제목 : 나의 특급 동창생
1화.
서울 마포, 한강출판사.
출판기획2팀 회의실 안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두툼한 실적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그걸 집어 든 팽부장은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린 채 종이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작년 실적이 이게 뭐야?”
굵은 목소리가 내게 날라와 꽂혔다.
나는 그와 동시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앞코가 닭아있는 낡은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구두의 꼴이 처량한 내 신세 같아 보기 불편했지만, 팽부장의 분노하는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팽부장은 내가 보건 말건 보고서 속 목록을 손가락으로 콕콕 짚으며 화를 냈다.
“〈한양 도성의 비밀 성문들〉? 누가 그런 걸 돈 주고 사본다고? 관광객도 아니고 역사학자 몇 명 팔자고 책을 찍었어?”
목록이 뒤로 넘어갈수록 목소리는 더 커졌다.
“〈청계천, 복원되지 못한 기억〉은 또 뭐야? 노점상 사라진 얘기 누가 읽냐고! 〈종로 골목의 100년〉, 〈북촌의 옛집, 그 안의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졸려 죽겠구만.”
사무실 구석에서 누군가 킥킥대며 웃음을 참다가 곧 조용해졌다. 그 웃음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내가 기획한 책 마다 망했다는 사실을 확인당했으니까.
박부장은 보고서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출판사는 박물관도 아니고 자선업체도 아니야! 학술논문 같은 걸 책으로 찍어내서 뭐 하냐고. 당장 팔릴 만한 기획을 가져오란 말이야.”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사원증이 목에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고, 방 안의 공기가 갑갑하게 조여왔다.
“죄송합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지만, 그정도로 팽부장의 화를 가라앉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만큼은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됐어!”
팽부장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이빛나 대리는 새로운 책 계약서 가져오기 전까지 출근하지 마.”
사무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직원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한숨을 삼켰다.
“…출근하지 말라고요?”
내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떨렸다. 그 동안 숱한 기획을 말아먹었지만, 출근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
팽부장이 창문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창고에 네가 기획한 책들, 수만 권이 팔리지도 못한 채 창고에 쌓여 있는 거 뻔히 알잖아.”
손바닥에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두어번 비비고는 다시 앞으로 공손하게 모아 쥐었다.
“이대리, 우리 이제 팔리는 책 좀 만들자. 제발. 응?”
팽부장의 목소리는 어느새 나를 꾸짖는 톤을 벗어나 간절함으로 변했다.
“예를 들면 말이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었던 한국 선수의 자기계발서. 그런 거라면 대박 나지 않겠어?”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바쁜 분들을 어떻게 저자로 섭외하겠어요…”
“하!”
팽부장은 피식 웃었다.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그래, 그... 누구냐... 최시우 선수 몰라? 은퇴하고 한국 들어왔다잖아. 그런 선수랑 계약서 딱 받아오면 얼마나 좋아?”
“최… 시우 선수요? 은퇴했나요?”
나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팽부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세상 돌아가는 걸 그렇게 모른 상태로 책을 만드니, 어디 책이 팔리겠냐? 아무튼, 그 정도 저자 계약서 들고 오기 전엔 사무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알았어? 사람이 말이야, 양심이 있어야지.”
싸늘한 정적 속에서 빛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잠시 후, 경의선 숲길.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나는 가방을 아예 챙겨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조퇴도 아니요, 외부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요. 말 그대로 쫓겨난 상황.
“휴우.”
원래라면 같은 팀 사람들과 김치찌개를 먹었을 시간.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컵을 받아 들고는 회색 빌딩 숲 사이를 유유히 걷다가 1시가 되어서야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출판사 생활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장에게 깨졌는데, 팀원들과 점심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두 굽을 끌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작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란 하늘 아래 나무들은 싱그럽게 흔들리고, 햇살은 한낮이라 눈부셨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길가엔 점심을 마치고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이 커피를 손에 들고 여유로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동료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또 어떤 이들은 이어폰을 꽂은 채 가볍게 조깅하며 지나갔다.
그 속에서 혼자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끈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한숨만 새어 나왔다.
물론 내가 기획한 책마다 판매가 저조했던 건 사실이지만, 팀장인 팽 부장 또한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올해 팀 실적이 저조한 그 책임을 내게 떠넘기려는 수작 같아서 마음이 영 불쾌했다.
‘더군다나 최시우 같은 저자라니!
내가 누구 때문에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데!’
순간 화가 났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내가 선택한 거였잖아.’
이제 와 전공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한들, 딱히 먹고 살 만큼 뾰족한 재능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휴.”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난 꽤 대단한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만 하면 혜성처럼 등장해 한국 문학계를 씹어먹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으니까. 학과 선배들과 신촌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며, 우리가 다뤄야 할 소설이 어떤 것인지, 현재 문학계의 현실이 어떤지 떠들기 바빴던 대학 생활. 하지만 내게 그만한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졸업 후에도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잘하는 건 꼼꼼하고 성실하다는 것.
그나마 잘하는 건 꼼꼼함과 성실함뿐이었다. 그 장점 하나로 편집자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나는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버티고 있었다. 비록 내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편집자의 삶이 못마땅한 건 아니었다. 편집자로서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작가라면 한 해에 한 권도 겨우 출간하겠지만. 편집자로선 같은 기간 동안 비교적 더 많은 책을 제작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비록 책의 맨 뒤에 내 이름이 달리는 게 전부일지라도, 그 책들은 모두 내 자식 같았다.
문제는, 내가 기획한 책들이 번번이 판매가 저조했다는 점이었다.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을 섭외하고, 유명 사진작가를 섭외해 사진을 넣고, 구하기 힘든 자료는 복원까지 해서 만들었지만, 제작비조차 건지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 일마저 못 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던 순간, 핸드폰이 윙 울렸다. 같은 팀 김 과장이었다.
[빛나 씨, 부장님 기분이 너무 안 좋으셔서 당분간 외근하는 게 좋겠어.]
[당분간요?]
오늘 하루만도 아니고, 당분간이라니. 이러다가 책상을 정말 빼는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게 연락을 준 김 과장은 나와 입사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몇 권의 대박 책을 기획한 덕분에 이미 ‘과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여전히 대리인 것에 비하면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
‘아니다. 내가 느린 건가?’
[그런데 빛나 씨, 양화초등학교 나왔잖아? 거기 축구부 있었다면서. 동창 총동원해서라도 선수들이랑 접촉해 보는 게 어때? 이러다 진짜 잘리겠어.]
나는 휴대폰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게…. 졸업한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요.]
[지금 자존심 따질 때가 아니잖아. 철판 깔고 들이대야지.]
[일단 알겠어요. 최대한 팽 부장님께서 좋아하실만한 작가분을 섭외해 볼게요.]
김 과장에게 그렇게 답을 하긴 했지만, 막상 연락하려니 망설여졌다.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나는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다 최근 은퇴했다는 최시우 선수와 초등학교 동창 사이다. 차라리 잘 모르던 사이였으면 연락하는 게 오히려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개망신을 당했으니, 연락도 못 하고 이게 뭐야!’
초등학교 6학년 11월. 빼빼로 데이에 시우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가, 같은 반 여자아이들한테 들키면서 망신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한 번… 연락해 봐? 내가 지금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잖아? 그리고 다 지나가 버린 옛날 일이고. 학교 여학생 중 시우를 안 좋아했던 아이가 없을 정도니까. 시우도 그냥 자기를 좋아했던 무수히 많은 여학생 중 한 명으로 나를 기억할 거야.’
숨을 고르며 SNS를 열었다. 검색창에 ‘최시우’를 입력하자, 바로 계정이 떠올랐다.
“뭐야? 정말 한국에 들어왔잖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우의 계정을 들여다봤다.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야근과 각종 지원 행사. 나는 일에 치여 팽 부장의 말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있단 소식까진 알고 있었는데… 은퇴하고 한국에 돌아온 건 몰랐네. 아무리 운동선수라도 은퇴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닌가?’
그의 계정에는 은퇴 후, 한국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골프장, 카페, 고급 자동차….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동창을 보니 부러움이 밀려왔다.
“누구는 은퇴 라이프 즐기고, 누구는 회사에서 잘릴까 봐 벌벌 떨고…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한숨이 깊게 흘러나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지.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도 자존심이고 뭐고 따질 수 없는 노릇이야. 무조건 물고 늘어져야지. 초등 동창한테서라도 계약 못 따내면, 이번엔 정말 책상 빼야 할지도 몰라.”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곧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최시우 선수님, 안녕하세요. 한강출판사 이빛나 대리입니다. 선수님의 이야기를 저희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안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읽, 읽었어!'
다행히 바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곧 화면 상단에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문구가 번쩍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시우에게 답이 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몇 초나 흘렀을까. 곧, 짧지만 강렬한 답장이 도착했다.
2화.
[시우 : 설마… 양화초등학교. 그 이빛나?]
순간, 심장이 철컥 내려앉았다. 시우는 날 기억하고 있었다.
[응. 혹시나 했는데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름이 특이해서 그런가? 하하.]
부디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길 바라는데, 곧이어 다음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시우 : 나 지금 상암이야. 계약하고 싶으면 네가 이쪽으로 오던가.]
상암이라니, 바로 코앞이었다.
‘오라면 가야지.’
[이렇게 스타 선수가 날 기억해주다니 너무 영광이야. 당연하지!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내일? 그래.]
시우의 답장에, 나는 부랴부랴 가방 안에 챙겨 나온 가계약서를 다시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
‘명함도 챙겨왔고, 서류도 있고!’
내일 시우를 만나 도장만 찍으면 출판사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벅찬 기분으로 가방을 다시 정리하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박 과장이었다.
[박 과장 : 이 대리, 일단 이번 주는 쭉 외근한다고 부장님께 말씀드릴게. 동창을 만나보던지, 인플루언서들한테 DM이라도 돌려보든지 해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과장님, 일단 최시우 선수 내일 만나기로 했어요. 동창이라서 만나준다는 것 같은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약할게요!]
[박 과장 : 정말? 준비 제대로 해서 가야해. 무조건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 준다고 해. 이번 기획 제대로 못 하면 정말 책상 뺄 것 같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박 과장에게 큰소리는 쳐놓긴 했지만, 10년도 훌쩍 지난 세월이 흐른 후 만나는 동창이 나를 얼마나 반가워할지는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세계적인 슈퍼스타. 이쪽은 당장이라도 백수가 될 위기에 처지니 말이다.
*
*
*
상암동, 서울FC 사무실 앞.
버스를 갈아타고, 복잡한 길을 겨우 물어물어 찾아온 시우의 사무실.
‘드디어 다 왔다… 최시우, 이 자식 때문에 내가 무슨 고생이야.’
분명히 집에서 출발할 때까지는 곱게 다려져 있던 셔츠는 어느덧 땀에 젖어 구깃구깃 구겨져 있었다. 명품 가방이나 옷은 없지만, 커리어 우먼으로서 멋지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 그대로 가장 좋은 옷을 깔끔하게 다려서 입고 온 것이다. 땀에 젖은 모습이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구겨진 옷매무새를 손바닥으로 대충 펴내며 억지로 기운을 내본다.
‘그래도 오늘 계약서만 받내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지.’
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똑똑’ 열린 문을 두드린 뒤 얼굴을 내밀었다.
안쪽에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시우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순간, 시우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잠깐 스치더니, 곧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일찍 왔네?”
낯선 시우의 목소리. 생각해보면 변성기가 온 이후의 시우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니까.’
학창 시절, 축구공만 차던 까까머리 소년이 머릿속에 선명했는데, 눈앞의 시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 축구공만 차던 까까머리 소년이 머릿속에 선명했는데, 눈앞의 시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늘색 트레이닝복 사이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단단히 다져진 팔선, 그리고 선수 출신다운 균형 잡힌 체격. 190cm에 달하는 큰 키가 공간을 압도했고,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탄탄하게 다져진 하체는 그가 여전히 운동선수의 몸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축구를 한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흰 피부는 여전했지만, 얼굴은 조금 바뀌었다. 예전의 소년미를 완전히 지우고, 성숙한 남자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정말 그때 그 시우 맞아?’
물론, 최시우는 국민 스타였고, 어디에서든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면도기 광고부터, 맥주 광고, 심지어 테이크아웃 커피 광고까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전혀 달랐다.
‘히이익,.. 농구선수야 뭐야?’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키가 중간 정도였던 시우는 어느새 공격수로는 드물게 장신의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순간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영업용 미소 장착.’
“응. 중요한 미팅인데 당연하지!”
“…중요한 미팅이라.”
그 말에 시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탁자 위에 앉았다.
“하하. 그럼, 여기서 우리 회사 소개부터 할게.”
편히 앉으라는 의례적인 말조차 없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미리 포장해온 커피를 올려놓았다.
“이거, 너가 모델로 하는 브랜드에서 커피 사왔어. 마시면서 하자.”
시우는 종이 커피잔을 힐끗 보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곤 얼른 본론부터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이거 한 번 볼래?”
가방 안에서 태블릿을 꺼내, 준비해 온 자료 화면을 띄웠다. 태블릿 화면에는 샘플 도서 표지 시안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모두 베스트셀러였고, 빛나가 기획한 책은 아니었다. 모두 베스트셀러였지만, 내 작품은 아니었다. 유명 연예인이나 셰프들을 앞세워 직원들이 사실상 대신 써준 책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팔렸고, 대중은 그런 책들을 좋아했다.
나는 손끝으로 표지에 인쇄된 유명인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지만, 긴장한 나머지 시선이 자꾸만 흔들렸다. 반면 시우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흥미보다는 심드렁한 무관심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하하… 책이 좀 많지?”
빛나는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쓰며 책 한 권을 화면이 띄웠다.
“우리 출판사는 규모가 커서 아동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다 다루고 있어. 만약 이번에 네가 우리 출판사와 자서전을 내준다면, 그걸 바탕으로 최고의 그림 작가님들과 협업해서 아동용 만화 시리즈로도 확장할 수 있어. 인세 조건도 최고야!”
물론, 아무리 인세를 최고 조건을 준다고 해도 시우 같은 월드스타급 선수에게는 모래사장에 모래 한 줌 얹는 것에 불과했다.
‘광고 계약만 해도 1년에 몇 억은 받을 텐데...’
최고 대우라는 말을 내가 해놓고도 스스로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흠, 흠...”
하지만 그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푼돈일지 모르겠지만, , 내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시우와 함께 책을 내서 성공한다면 회사에 남을 수 있고, 어쩌면 과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진짜 퇴사밖에 답이 없을 터였다.
이제 은퇴해 후학을 양성하며 살아갈 시우와 이제 겨우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전세대출금을 갚기 시작한 나. 우리는 동갑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인생의 타임라인에 서 있으니까.
나는 간절함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봐, 이 책도 우리 출판사에서 낸 건데... 유명인들과…”
나는 책 표지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시우는 더는 들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내밀며 말을 잘랐다.
“아, 됐고.”
그가 팔짱을 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뚝뚝한 표정 속에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난 축구 선수야. 내 방식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상대를 알아가는 거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더듬거렸다.
“…몸, 몸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정적이 회의실에 잠시 흘렀다.
***
인근 풋살 연습장.
골대 앞에 선 시우는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서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그 맞은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서있는 내 발 앞에는 축구공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말이 그렇지, 선수 출신인 사람이 나랑 게임을 하겠다는 게 말이 돼?’
속으로는 내심 시우가 농담하는 걸 거로 생각했다.
무려 18년 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동창이니까.
‘짝꿍을 오래 하기도 했었고.’
불행하게도 시우는 진심이었다.
시우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계약을 걸고 게임을 하겠다고 나선 나를 비웃듯 두 손바닥을 탁 맞부딪쳤다.
“네가 차면 내가 막을게. 주어진 시간은 5분. 그 안에 나한테 골 하나라도 넣으면, 계약서에 사인한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발끝을 내려다봤다. 운동화도 아닌 낮은 구두. 축구공을 차기엔 어울리지 않는 신발이었다. 상대도 상대지만, 장비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상황. 절망감이 한순간 밀려왔지만, 이내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최시우라고 해도 계속 차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가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 오른발을 뒤로 당겼다.
“가보자!”
있는 힘껏 공을 찼다. 그러나 시우는 손쉽게 몸을 날려 막아냈다. 주먹으로, 무릎으로, 때로는 발끝을 이용해 모든 공을 가볍게 튕겨냈다.
“하!”
나는 숨을 고르며 또 달려갔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삐비빅-삐비빅-’
휘슬 대신 핸드폰 타이머가 울렸다. 어느새 5분이 흘러간 것이다. 골대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무릎에 손을 짚고 깊이 숙였다. 거친 숨이 목구멍을 타고 치솟았고, 이마와 뺨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시우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우리는 안 되겠다. 그때도, 지금도. 넌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지만, 시우는 이미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운동장 바닥에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관심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시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며 무슨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계약을 안 해준다는 거잖아.’
아무리 동창이라지만 세계적인 운동선수에게 다짜고짜 찾아와 책을 내자고 제안하다니. 역시 무리였다.
계약서를 손에 쥐지 못한 채, 나는 허탈하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내가 기껏 사 온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연습장을 떠나던 시우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지가 성공했으면 다야? 동창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가방 속에는 가계약서와 태블릿에, 이것저것 챙겨 온 샘플 도서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벽돌처럼 무거운 가방을 겨우 메고 지하철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제 정말 끝인가. 뭐 해서 먹고 살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3화.
‘웅- 웅-’
박 과장이 시우와 미팅이 끝날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과장님.”
수화기 너머로 박 과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리! 오늘 최시우 선수 만난 건 어떻게 됐어?”
나는 눈을 깜빡이며 머뭇거렸다. 프리미어 출신 선수와 축구 내기를 했고, 내기에서 져서 계약하지 못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내가 질 게 뻔한 내기였잖아.’
“…그, 그게요. 아무래도 너무 유명한 선수라… 동창이라고 겨우 얼굴만 본 게 다예요. 계약은 쉽지 않네요. 오늘은 일단 퇴근하려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 박 과장의 한숨 섞인 말이 이어졌다.
“여기 상황, 어제보다 더 안 좋아졌어. 오늘 내년도 기획 발표하는 날이었잖아. 팽 부장님이 엄청 깨지셨다더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분위기 안 좋겠네요.”
“이사님이 당장 다음 주까지 새 기획 안 가져오면, 팀을 날려버리겠다고 하셨대. 창고에 쌓인 책 어떻게 할 거냐고 아주 난리가 났나 보더라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꼭 쥐었다.
“티, 팀을요?”
“그래. 지금 이 대리 책상만 위태로운 게 아니라, 우리 팀 전원 책상 뺄 판이야. 상황이 그 정도라고. 그러니까 최시우 선수 도장 계약서에 ‘꽝’ 하고 받아오기 전엔 사무실에 올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지?”
“…과장님? 박 과장, 잠깐만요—”
그러나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
화곡동의 한 원룸.
자고 일어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침대 위.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겨우 옷만 갈아입은 채 침대 위에 풀썩하고 누워버렸다. 그리고 한 팔을 이마 위로 올린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아까 들었던 말이 맴돌았다.
‘우리는 안 되겠다. 그때도, 지금도. 넌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어.’
나는 벌떡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관심? 내가 뭐, 자기랑 출간 계약이라도 하려면 조기축구회라도 다녔어야 한다는 거야, 뭐야?”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아아아아악!”
그리곤 문득 고개를 들자, 화장대 거울에 왠 처녀 귀신이 비춰있었다. 내 엉망진창인 꼴이 오히려 화를 더 돋웠다.
“좋아. 그 관심, 내가 제대로 보여주지. 두고 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탁자 위에 던져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곧장 ‘최시우’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경기 영상부터 보자…”
작은 화면 속 시우는 필드를 지배하는 선수였다. 거침없이 달리고, 상대를 따돌리고, 정확히 슛을 꽂아 넣는 모습.
“…엄청나게 잘하긴 잘하네. 하긴 초등학생 때도 축구는 정말 잘했지.
최시우가 축구를 잘한다는 건 전혀 새로운 정보가 아니야. 축구에 ‘축’ 자를 모르는 사람도 최시우는 알 테니까.”
시우에 대한 다른 정보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기사를 검색했다. 은퇴 기사가 주르륵 나왔다. 기사 목록을 스크롤 하던 내 손가락이 움찔하며 멈췄다.
[최시우 선수, 왼쪽 무릎 부상이 결국 발목을 잡아.]
[최시우, 고국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기로.]
“왼쪽… 무릎 부상?”
나는 중얼거리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머릿속에 오후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오른발로 찬 공은 당연하겠지만 시우의 오른편으로만 날아갔다. 그는 오른쪽으로 날라오는 공을 매번 손쉽게 막아냈다.
‘넌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어.’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소리쳤다.
“아, 이 바보! 똥 멍청이! 이런 것도 제대로 모르고 갔으니, 문전박대당할 수밖에.”
허탈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동시에 잘하면 이번에 성공할 수 있을거란 희망이 생겼다.
“좋아… 이번엔 네 왼쪽을 공략하는 거야.”
그리고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하나 더 했다.
[최시우 선수 커피]
기사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 축구 커뮤니티 글에서 왜 내가 사간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최시우 선수는 정말 더 뛸 수 있었는데 은퇴라니 아쉽네요. 자기 관리 끝판왕이잖아요. 지금까지 술, 담배에 손도 안댄 것 뿐만 아니라 커피와 라면도 먹은 적이 없대요. 대박!]
*
*
*
일주일 후, 상암동, 서울FC 사무실 앞.
나는 시우의 사무실 앞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셔츠 대신 트레이닝복에 풋살화까지 갖춰 신은 차림이었다. 시우의 출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으니, 곧 사무실로 출근하는 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시, 시우야!”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뭐야?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시우를 올려다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말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그리고 시우에게 내가 사 온 이온 음료 한 병을 건넸다.
시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온 음료를 받아서 들었다.
“게임은 지난번과 똑같아.”
무표정하게 답하는 시우였지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럼, 그럼! 한 번 더 기회를 줘서 정말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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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풋살 연습장.
골대 앞에 서 있는 시우가 두 손바닥을 탁하고 맞부딪치며 자세를 잡았다.
“다시 한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아무튼, 이번에도 5분이다.”
나는 대답 대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발 앞에 놓인 축구공을 응시하다가, 몸의 방향을 ‘휙’ 돌리며 왼쪽을 노렸다.
‘슛!’
공이 왼쪽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시우가 재빨리 몸을 굽혔지만, 순간 무릎에서 번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손끝이 공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흔들며 환호했다.
“내가 골을 넣었다! 넣었다고!”
시우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뱉었다.
“…뭐야, 이거.”
허무하리만치 금방 골이 들어가고 난 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곧 골대 앞에 서 있던 시우가 느긋하게 걸어와 내 옆에 철퍼덕하며 앉았다.
‘어?’
순간,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너무 가까웠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잔디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시우가 쓰는 듯한 샴푸 향 같은 것이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너무 가까이에서 숨을 내뱉는 시우가 한순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잘생기고, 또 너무 잘생겼잖아!’
나는 몸을 한 뼘 옆으로 옮겼다. 그리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공을 차느라 뛰는 것인지, 시우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 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된 거야?”
시우가 내게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냉랭한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시우의 질문에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아직도 세게 뛰는 심장 때문에 목소리가 혹시나 떨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랬지?”
‘난 축구 선수야. 말이 아니라 몸으로 상대를 알아가서 말이야.’
“처음엔 그 말 듣고 속으로‘ 뭐래? 책은 글로 쓰는 거지, 말로 하는 건데’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정말 내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더라. 그런데 염치도 없이 책을 쓰자고 찾아왔으니... 미안해.”
솔직한 고백을 내뱉자, 시우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피식 웃었다.
“동창이다 보니까... 어쩌면 당연히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네가 왜 은퇴를 한건지는 알아봤어야 했는데. 미안.”
시우는 눈가에 장난스러운 빛을 띠며 나를 바라봤다.
“야, 설마 네가 왼쪽으로 차서 골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무릎에 부상이 있고 은퇴했어도, 네가 차는 공 정도는 100% 막을 수 있어.”
“다, 당연하지. 나도 네가 봐준 거 알아.
그래도 나 지난 일주일 동안 패널티킥 과외도 받았어.”
“진짜?”
“응. 우리 동네 어린이 축구교실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수업하러 오기 전까지 요만한 골대에 계속 연습했어.”
“하하하하하.”
시우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조금 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우리… 계약하는 거야?”
“그래.”
“그럼, 가계약서 먼저 보여줄게. 여기...”
내가 허둥대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려 하자 시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됐어. 그냥 바로 보내줘.”
“고마워! 역시 넌 대인배야! 아무나 유럽 리그에서 뛰는 건 아니지. 그럼.”
나는 시우의 손을 맞잡으며, 감동하는 눈빛을 지었다. 시우는 잠깐 당황하더니 그런 내 손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
*
*
화곡동의 한 원룸.
그날 저녁, 나는 좁은 자취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전화를 받았다. 양손은 단정히 무릎 위에, 상반신은 잔뜩 굽힌 채, 휴대폰을 귀에 붙인 모습은 마치 절이라도 드리는 듯 공손했다.
“빛나 씨, 내가 조금 전에 최시우 선수와 통화했고, 방금 최종 계약서까지 다 작성했어. 바쁜 분을 출판사까지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잖아. 내일 아침에 사무실에 들려서 계약서 챙겨 가. 최시우 선수 만나서 도장 받아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정도야 제가 당연히 해야죠. 제가 아침에 계약서만 챙겨서 바로 최시우 선수 만나러 가겠습니다.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바로 사무실로 갈게요.”
혹시라도 팽 부장이 사무실로 못오게 할까봐 걱정이 되어, 바로 사무실로 가겠다는 말도 일부러 덧붙였다.
하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고, 팽 부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빛나 씨는 출근할 필요 없어.”
“…네?”
당황한 나머지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계약서만 받아오면 제 책상은 안 빼는 거로….”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최 선수가 팔을 다쳐서 글을 쓸 수가 없다네. 그런데 또 하필 이번 달에 원고를 못 쓰면 코치로 전지훈련을 따라가야 해서 시간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 빛나 씨가 최 선수 옆에 딱 붙어서 같이 원고 작업을 좀 해줘야지.”
한 마디로 대필자가 노릇을 하라는 말이었다.
‘지금 대필 작가 비용 아끼려고 이러는 거야?’
함께 기획한 책들이 망한 책임을 나에게 오롯이 떠넘기는 것에 모자라, 대필 작가 역할까지 시키려는 팽 부장에게 화가 나고 말았다.
4화.
“저, 제가요? 부장님, 저기...”
그렇다고 들이받을 수도 없는 처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필 작가를 섭외하셔서...”
“대필 작가라니. 최시우 선수가 팔이 다쳐서 자판을 칠 수가 없다잖아.
아니, 그 뭐야. 빛나 씨가 최 선수랑 동창이라며. 아무래도 편한 사람이랑 작업하는 게 최 선수로서도 좋지 않겠어?”
팽 부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했다.
“아무튼! 최 선수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최대한 편의를 봐야 하니까 그렇게 하고. 원고 다 써올 때까지 이 대리는 사무실에 올 필요 없어.”
“부, 부장님! 전 이제 당연히 사무실에... 부장님? 부장님!”
뚝.
핸드폰은 통화 종료음을 남기고는, 화면이 어둡게 꺼졌다.
나는 힘없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최시우의 속기사 노릇이라니.”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건 시우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다.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라는 최시우가, 몇 시간 만에 갑자기 팔을 다쳤다고?
“얘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마도 출간 계약을 빌미로 나를 곯리거나 놀리려는 속셈인가 싶었다. 분명히 초등학생 때는 장난기가 있긴 했지만, 남을 골탕 먹인 적은 없는 아이였는데.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
*
*
청담동 고급 펜트하우스.
시우가 산다는 펜트하우스 앞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TV 속 재벌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여, 여기서 산다고?’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압도적이었다. 유리와 대리석이 어우러진 매끈한 외관, 짙은 녹음 속에 우뚝 솟은 건물은 그 자체로 다른 세계의 성처럼 보였다. 넓게 뻗은 진입로와 고급스럽게 다듬어진 조경, 보안 시스템까지. 완전히 나와는 다른 말 그대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아니야. 괜히 두리번거리며 촌스럽게 굴지 말자.’
나도 모르게 눈앞의 건물을 쳐다보다가 벌어진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 그리고 미리 보내준 주소를 다시 확인하며, 시우의 현관 앞에 섰다. 나는 노트북과 서류가 꽉 들어찬 배낭을 메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보온병을 들고 서 있었다. 보온병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리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곧 문이 열렸고 안에서 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냐?”
가벼운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시우.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한 상체가 얇은 천 사이로 드러나있었다. 넓은 어깨, 탄탄한 팔을 따라 시선을 내려가니 반깁스를 하고 있는 오른쪽 팔뚝이 눈에 드러왔다.
‘…뭐야? 진짜 다쳤잖아? 하루 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려 긴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나는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그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시우의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우와, 내부도 넓구나!’
넓은 거실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유명 작품인 것으로 보이는 그림과 오브제들이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높은 층고와 화려한 등까지 더해진 거실에 깜짝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작업할만한 공간을 찾아 두리번렸다. 마침 거실에는 소파가 기역자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있었다.
‘여기서 작업을 해야겠구나.’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레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저기, 이거.”
나는 짐을 풀고는 시우에게 보온병을 내밀었다.
“우리 엄마가 직접 고운 사골이야. 무릎도 안 좋은데 팔까지 다쳤다며… 뼈에 좋다고 해서 오는 길에 엄마네 들려서 가지고 가져왔어.”
시우는 힐끗 보온병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참, 사회생활이 무섭긴 무섭네. 이빛나가 이런 것도 챙길 줄 알게 되고.”
그는 깁스한 팔을 들어 보였다.
“근데 알다시피 내 팔이 이래서. 네가 좀 따라줘야겠다.”
나는 서둘러 보온병 뚜껑을 열고 국물을 따라냈다. 뽀얗게 우러난 국물을 따라내자, 거실에 오래 고아낸 듯 깊고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엄마에게 부랴부랴 전화해 끓여달라고 부탁한 사골국물이었다. 딸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엄마는 마트가 문 닫기 직전에 한우 뼈를 구매해 주셨다. 밤새 핏물을 뺀 뒤, 오늘 새벽같이 일어나 끓여낸 사골육수였다. 사무실에 들러 계약서를 받은 뒤, 엄마 집으로 달려가 보온병만 받은 채, 곧장 시우네 집으로 달려온 길이었다.
“그, 그럼. 무리하면 안 되지. 따뜻할 때 약이라고 생각하고 마셔.”
시우는 어설프게 오른손을 뻗었다가, 왼손으로 바꿔 잡아 사골 국물을 홀짝였다.
그사이 나는 노트북을 꺼내 놓고 본격적인 원고 작성 준비를 마쳤다.
“내가 이래 봬도 숙련된 편집자거든!”
자신만만하게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며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작년에도 이 손으로 책을 엄청 많이 만들었어. …물론, 죄다 안 팔리고 재고가 됐지만. 앗, 흠, 흠...”
괜한 말을 보태고 말았다. 헛기침으로 말을 수습하고는 시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네가 팔을 다쳤어도, 전지훈련이 있어도! 걱정은 접어둬. 자,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유럽 프리미어 리그 입단 때부터?”
“그래.”
시우는 보온병 뚜껑을 내려놓고 소파에 드러눕듯 기대었다. 눈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아마 상상만 해도 행복한 기억인 모양이었다.
“처음 전화 받았을 땐 장난 전화인 줄 알았어. 월드컵 때 같은 방 썼던 선배가 워낙 장난이 심했거든. 그 형이 날 속이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없이 타자를 쳤다. 독자들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장면인 만큼, 시우가 전하는 감정 하나,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겠다는 각오였다.
“근데…”
시우가 말을 멈추고 힐끗 나를 보았다.
“나 목마른데, 물 좀 가져와 줄래? 알다시피 내가 팔이 이래서.”
나는 얼떨결에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 그럼. 당연하지.”
생수를 챙겨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또 일어났다.
“저쪽 방 불 좀 꺼줄래?”
나는 다시 일어나 그의 등을 긁어줬다.
“등 좀 긁어줄래?”
그 뒤로도 연달아 택배 상자 뜯어 따로 거두기, 바나나 껍질 까주기, 핸드폰 충전하기 등을 위해 노트북 앞을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해야 했다. 원고 작업보다 자잘한 시우 시중드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 하루였다.
그리고 결국, 시우의 집을 나설 때 내 한 손에는 보온병이,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나가는 김에 부탁 좀 할게!”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회사에서는 ‘속기사’인지 ‘대필작가’인지 취급이고. 친구에게는 ‘요양보호사’처럼 부려지고 있었다.
‘이러려고 계약해 준 거였구나! 난 전문 출판인, 편집자라고!’
내 기억 속의 시우는 곤란한 친구를 말없이 도와주던 다정한 아이였다. 장난기가 좀 있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속이 배배 꼬인 채 성인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관심이 있네, 없네 하더니... 이럴 속셈이었나? 얘는 세계 무대에서 뛰더니 어쩌다 속이 이렇게 좁아졌지? 내가 자기 은퇴 이유 모르고, 커피 안마시는 거 몰랐다고 이렇게 복수하는 거야?’
너무 일을 열심히 해서인지, 속이 상해서인지 쓰레기봉투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끌다시피하며 겨우 걸어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쓰레기봉투를 옆에 내려놓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상대방이 내 모습을 보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비굴한 자세를 취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럼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진행했어? 한 달 안에 끝낼 수 있겠어?”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 작업량이요? 그게 오늘은 첫날이기도 해서… 브레인스토밍 겸 가볍게…”
나는 괜히 허공에 선을 그으며 과장된 손짓을 하며 애써 핑계를 댔다.
“프리미어 리그에 처음 입단 제의받았던 에피소드를 정리해 보았…”
“시간 많지 않아. 여유 부리면 안된다고.”
“네, 네. 내일부터는 더 분발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이번 가을에 최시우 선수 자서전이 딱 나와줘야, 우리 팀이 사는거야. 알지?”
“그, 그럼요. 네, 들어가세요.”
그렇게 팽 부장과의 통화가 끝났다. 원고가 마무리 될 때까지 매일 전화해서 작업 진행 상황을 확인할 낌새였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쓰레기봉투를 들어 올려 노려봤다.
“몇 시간 동안 그 자식 수발만 들다가 하루가 다 갔다고? 물 꺼내오고, 불 꺼주고, 택배 받아주고, 쓰레기까지… 이게 원고 준비야?”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런 식으로는 전지훈련 전에 원고 다 못 써.”
빛나는 보온병과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주민인 듯, 화려한 투피스를 입고,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잔뜩 두른 여자였다. 나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일 거로 생각하고, 쓰레기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상대가 나를 불러세웠다.
“이… 빛나? 이빛나, 맞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멈춰서서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설마... 강지은?’
이 곳에서 우연히 부딪힌 사람은 강지은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어디서든 눈에 띄던 존재감은 여전했다. 배우답게 깨끗한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지은은 완벽에 가까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눈에 띄네.’
학교에 다닐 때야 다른 아이들처럼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는 강지은의 패션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명품 재킷과 구두, 신발로 도배한 것으로 모자라 귀와 목에는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큼지막한 액세서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지은의 입술은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나를 위아래로 재빠르게 훑고 있었다.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지은의 시선은 잠시 낡은 내 구두에 머물더니, 재빨리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시선을 감췄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행색을 보며 지은이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아무튼 반가웠어. 난 쓰레기 버려야해서. 이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 대화할 틈을 주지 않고 지은 곁을 스쳐 걸어갔다.
“잠깐.”
그런데 지은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5화.
나는 움찔거리며 손을 확 잡아뺐다. 그리고 지은을 쳐다봤다.
“왜?”
“너 여기 살아?”
지은의 눈빛이 호기심에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의도로 한 질문일까, 고민하다가 질문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너야말로. 여기 사는 거야?”
지은은 피식 웃었다.
“아니. 우리 집은 서래마을이야. 여긴 친구 집.”
“그렇구나! 그럼, 잘 놀다 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는 재빨리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흥. 네가 질문하면 내가 다 대답하는 사람이야?’
내가 사는 집이 아니라 업무차 만날 사람이 있었던 거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뻔했다. 지은에게 휘말리지 않고, 대화를 먼저 끝내고 나온 나 자신이 잠시 뿌듯해지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쓰레기봉투를 버리는 마지막 할 일까지 모두 다 끝내고 마침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버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느새 머리 위로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저녁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흩날렸다. 무심코 고개를 숙이자 싸구려 소재의 바지와 몇 번이나 굽을 갈아 일 년 넘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낡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까 마주쳤던 지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명품 재킷, 지하철이라곤 타본 적도 없어 보이는 깔끔한 하이힐, 커다란 액세서리, 그리고 손에 들려 있던 명품 가방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지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며, 재수 없는 지은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아니, 우리 집은 서울 서래마을이고. 여긴 친구 집.’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뭐야, 지금 자기 잘나간다고 자랑한 거지? …참나. 하필 내가 최시우랑 작업할 때 친구네 놀러 오는 건 또 뭐냐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지은과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었다.
‘게다가 아주 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고.’
같은 반이었을 때는 함께 급식을 먹고, 수행평가도 하며 어울려 다닌 사이긴 했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아이였다.
“…근데 친구네 집이라면 누구지? 같이 어울리던 애 중에 누가 저런 펜트하우스에 산다는 걸까?”
한 명 한 명 얼굴을 떠올려보았지만, 일단 동창 중에서는 이 정도 되는 집에서 살 만한 아이는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이름이 번개처럼 스쳤다. 나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 정도 되는 집에서 살 만한 능력의 동창이 딱 한 명 있지 않은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친구가… 최시우는 아니겠지?”
지은은 고등학생 때에도 시우와 따로 연락하며 지낸다는 듯한 뉘앙스를 몇 번 풍기곤 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남자들이야 단순하니 지은이 얼마나 여우 같고, 뒤에서 무서운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그저 예쁘고 상냥한 얼굴에 속기 쉬우니까.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별스타그램 앱을 열었다.
@jieun.1004
“역시, 찾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네.”
스크롤을 내리자, 연기나 작품 관련 게시물은 온데간데 없고,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의류 브랜드 제품 광고만 잔뜩 올라와있었다. 지은의 아버지는 의류 사업을 운영한다고 들었었다. 분명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의류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여러분, 진짜 인생템 나왔습니다♡
에코백 집에 많으시다고요?
집에 에코백이 아무리 많아도 금방 흐물거리고 모양 망가지는 거 쓰기 싫으시죠?
제대로 된 가방 하나가 있어야죠.
요 가방은요, 정말~~~ 실용성 갑이에요.
√ 아기 키우는 친구는 기저귀 가방으로 강추!
√ 프리랜서로 일하는 친구는 노트북이며+ 책까지 넉넉히 들어가서 완전 만족!
한국 생산된 무독성 최고급 캔버스 원단에
저 지으니가 직접 디자인한 시그니처 로고까지!
주구장창 사용할 진짜 인생템이에요!
#데일리가방 #지은시그니처 #인생템 #에코백추천]
화려한 필터가 씌워진 셀카와 함께 적힌 글을 보니 코웃음이 나왔다.
“뭐야. 본인은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면서, 팔 때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붙여?”
또 다른 게시물에서는 핸드메이드 도금 목걸이”라며 작은 액세서리를 수십만 원대에 판매하고 있었다.
“하…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겉만 번지르르하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제로는 명품만 두르고 다니면서, 마치 평소에도 자신이 만든 패션 브랜드 제품을 잘 하고 다니는 것처럼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지은의 모습이, 내 눈에는 얄밉게만 비쳤다.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을 이용할 생각만 하더니… 결국 지금도 똑같아.’
하지만 그런 김지은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은 별스타그램 속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언니, 가방 너무 예뻐요!]
[지은님이 디자인한 제품이라니, 믿고 구입합니다.]
[언니 덕분에 요즘 예쁘게 하고 다닌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폰 화면을 꺼버렸다.
*
*
*
한편, 빛나와 헤어지고 시우네 집 현관 앞까지 도착한 지은. 지은은 이곳에 사는 듯 쓰레기봉투를 들고 걸어가던 빛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기 살지 않는다면 굳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여기 산다고? 하필이면 재수 없게…”
낮게 중얼거리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그 가난하던 애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여기에 살아? …로또라도 맞았나?”
아주 친한 사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데다. 같은 반도 꽤 여러 번 한 적이 있는 아이였다.
‘게다가 신경 쓰이게 하는 구석이 워낙 많았어야지.’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 없는 지은이었지만, 빛나의 형편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살 리는 없고. 여기서 일하나?”
지은이 생각할 때, 빛나가 이 펜트하우스를 왔다 갔다 할 이유는 단 하나. 어디 한 집에서 청소 도우미로 일하는 경우뿐이었다.
고개를 한번 절레절레 흔들고는 시우의 현관 벨을 눌렀다.
“칠칠하지 못하게 뭐 놓고 갔어?”
시우가 현관문을 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왔다 간 모양이었다. 현관 밖에 서있는 사람이 지은이라는 걸 알아챈 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설마?’
그런 시우를 바라보는 지은의 눈빛에는 의아함과 불편한 기색이 빠르게 스쳐 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시우의 집 안으로 들어가 태연하게 신발을 벗었다.
“놓고 가? 누구 왔다 갔었어? 에이전트 사람?”
시우는 별말을 하지 않고, 그런 지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한국 온 지 꽤 됐으면서 왜 연락 안 했어? 바쁜 내가 이렇게 시간 내서 직접 와야 해?”
시우는 팔짱을 끼며 문에 기대섰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어머님이 너 걱정돼서 그러셨지. 한번 들러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오라 하셨거든.”
지은은 자신이 시우의 공간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의 오른팔에 감긴 반깁스를 발견했다.
“너, 팔이 왜 그래?”
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냥 조금 삐끗했어. 금방 나아.”
지은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진작 어머님 말씀대로 결혼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부상 때문에 은퇴 같은 소리도 안 나왔을 테고.”
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기서 갑자기 결혼 얘기가 왜 나와?”
“운동선수한테 내조가 얼마나 중요한데. 넌 왜 그렇게 결혼 안 한다고 고집만 부려? 청승맞게 이게 뭐야?”
시우는 냉소를 흘리며 집안을 둘러봤다.
“청승이 아니라, 궁궐이 따로 없는데? 난 잘살고 있으니까, 엄마한테 연락 가면 그렇게 전해.”
“야, 넌 한국까지 와서도 어머님 전화를 씹어? 제발 좀 받아 달라고 전해 달라셨다니까.”
시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도 참… 이제는 하다 하다 스파이까지 보내시네. 아니지, 처음도 아니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다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보다시피 난 요양해야 해서. 엄마한테는 은퇴해도 생활비는 꼬박꼬박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고.
그럼, 멀리 못 나간다. 조심히 가라.”
시우가 등을 돌리자, 지은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시우를 붙잡을 말이 떠올랐다. 지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시우를 슬쩍 떠봤다.
“나 아까 이빛나 봤어.”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지은은 능청스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 기억하지?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 시우는 이미 지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반깁스한 오른손으로 지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너, 걔한테 무슨 소리 했어?”
그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하… 내가 아직도 중딩이냐?”
지은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손목을 뿌리쳤다.
“나, 배우 강지은이야.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내가 큰일 나는 거 몰라?”
시우는 여전히 눈을 좁힌 채 노려봤다.
“처신 똑바로 해라.”
“뭐야? 걔 정말 여기에 사는 거야? 너 알고 있었어? 근데, 그 애가 무슨 돈으로 여기에 살아?”
시우는 천천히 몸을 세우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건 네 알 바 아니지. 조심히 가라.”
그는 귀찮다는 듯 방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지은은 잠시 멍하니 그 문을 바라봤다.
“뭐야… 완전 이상해.”
아픈 듯 손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저 깁스도 가짜 같고.”
눈빛에는 짜증과 동시에 묘한 의심이 스쳐 갔다.
‘설마…. 아직도 여자 보는 수준이 그대로인 거야?’
지은은 불편한 기억을 떠올렸다.
*
*
*
때는 2002년 6월 14일 금요일.
2002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은 금요일이었다. 반장인 지은을 중심으로 수업이 끝나고 6학년 3반 아이들이 모두 단체로 시청역에 응원가기로 한 날이었다.
지은은 국가대표 정품 유니폼을 입고 교실에 들어섰다.
커다란 태극 문양이 새겨진 반짝이는 유니폼은 아이들의 탄성을 끌어냈다.
“와, 진짜 멋있다!”
“지은이네 집은 역시 달라!”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지은은 으쓱하며 자리로 걸어갔다.
지은이 다 같이 응원하러 가자고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정품 유니폼을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반 아이들은 모두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적힌 붉은 티셔츠를 입고 왔기에, 분홍색에 가까운 지은의 유니폼이 유독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은은 자신의 가슴에 그려진 축구협회 엠블럼과 유명 스포츠 브랜드 마크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와, 이거 진짜야?”
“그럼, 짝퉁이겠니? 붉은 악마 티셔츠야 그렇겠지만, 이건 공식 유니폼인데.”
지은은 오른쪽 소매에 인쇄된 태극기를 가리키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정품’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순간 교실 문이 다시 열리고, 빛나가 등교했다.
헐렁한 태극기가 옷처럼 몸에 걸쳐져 있었는데, 어깨와 옆선을 잘라 수선한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도 그 낯선 모습은 오히려 독특했다.
“와, 저거 진짜 멋있다!”
“태극기를 옷으로 만들다니, 대박!”
아이들 몇 명이 감탄을 터뜨렸다.
지은은 그 말에 얼굴이 굳었다.
‘멋있다고? 저게?’
지은은 일부러 비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멋은 무슨. 티셔츠 살 돈도 없어서 저런 거 입은 거잖아. 태극기가 불쌍하다, 불쌍해.”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빛나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지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빛나는 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자신도 모르게 주눅 들어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6화.
2002 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던 시기,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월드컵 덕분인지, 반 아이들을 잘 만나서였는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탓에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던 나였지만 6학년 때는 무척이나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은 학년이 바뀌었다고 해서 나아지지는 않았다. 반 친구들과 함께 시청역 광장에서 축구 응원을 하기로 했다는 말에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으니까.
“하루 입자고 티셔츠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반 아이들과 다 같이 응원가기로 했다는 말에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Be the Reds’ 티셔츠는 구하기 무척이나 쉽지 않았다. 시청 앞 길거리 노점에서 팔긴 했지만, 티셔츠 하나에 2만 원씩 받고 판다는 말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티셔츠를 사기 어려우면 두건이라도 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버스요금 600원을 아끼기 위해 시장에서부터 집까지 무거운 채소를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 엄마에게 말이다.
“어쨌든 붉은 색이면 되는 거지?”
엄마는 집안의 낡은 서랍장에 있는 옷이란 옷은 죄다 꺼냈다. 하지만 눈 씻고 살펴보아도 붉은 티셔츠는 없었다. 어렸을 때 입었던 분홍색 긴팔 티셔츠가 그나마 비슷했지만 너무 작았다. 빛나는 자신에게 오래된 분홍색 긴팔 티셔츠를 대어 보는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단 저녁 먼저 먹자.”
엄마는 흐트러진 옷을 차곡차곡 개서 서랍에 넣고는 부엌으로 가서 저녁을 먼저 준비해 주었다. 분홍색 소시지가 있는 저녁 밥상이었지만, 빛나는 당장 친구들과 응원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입맛이 없었다.
“어, 엄마?”
그때, 무심코 틀어놓은 TV에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응원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나왔다. 붉은 티셔츠 대신 태극기를 몸에 두른 사람들 또한 무리에 섞여 환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 집에 태극기 있어요?’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나와 엄마는 집안을 샅상이 뒤졌다. 장롱 위, 이불장 안, 묵은 짐더미 속. 곧, 좀약 냄새가 진하게 밴 태극기 하나가 나왔다. 엄마가 태극기를 펴자 바스락, 오래된 천의 구김이 드러났다.
“어디서 받았던 태극기인가 보다. 이리 서봐라.”
엄마는 나를 세워놓고 태극기를 몸에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깨에 걸치고, 허리춤에 맞춰 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원피스는 어렵고, 상의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
그날 밤, 그릇을 치운 밥상 위에는 바늘과 실, 가위가 올려졌다. 엄마는 태극기의 옆선을 조심스레 잘라내며 팔이 들어갈 구멍을 만들었고.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 있으려 노력했다.
“자 이제 완성이다.”
다림질로 구김까지 깔끔하게 펴니 응원복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아침에 등교했다. 몇몇 친구들은 그런 내 옷차림을 보며 멋지다고 해주었지만,
“멋은 무슨. 티셔츠 살 돈도 없어서 저런 거 입은 거잖아. 태극기가 불쌍하다, 불쌍해.”
지은의 싸늘한 한마디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지은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일부러 나를 보며 키득거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 태극기 그림을 조금이라도 감추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었다.
‘툭.’
그때, 누군가 내 책상 위에 무언가를 무심코 올려두었다.
‘이건?’
응원할 때 사용하는 붉은 두건이었다. 나는 두건을 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축구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옆에 앉은 짝꿍인 시우뿐이었다.
“이걸 왜...”
작게 중얼거렸지만 시우는 마치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듯,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지우개 뒤집기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 고마워!”
나는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두건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
*
*
그날 하교 후, 시청 앞 광장, 붉은 물결 속.
어린 학생들이 모여 열심히 응원하는 모습은 방송국 PD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한 카메라가 지은을 잡았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지은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응원에 열중했고, 급기에 짧은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꼭 이겼으면 좋겠어요!”
지은은 본인이 어딜 가든 눈에 띄게 예쁜 데다가, 공식 유니폼까지 입고 있으니, 자신이 주목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방송국 PD들은 지은 외 몇 명 아이들도 인터뷰했지만, 지은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뉴스에 등장하는 아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그날 저녁, 지은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저 오늘 뉴스에 나올 거예요.”
“그래? 무슨 방송국인데?”
지은은 저녁도 먹기 전에 뉴스를 봐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고, 지은이네 가족은 TV 앞에 둘러앉았다.
“우리 딸이 TV에 나오는 게 이번 처음도 아니잖아?”
지은의 아빠는 딸을 TV에서 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 듯했다. 아마 다음 날, 회사에 가면 자랑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어, 우리 반이다!”
먼저 화면에 등장한 건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6학년 3반 아이들.
“오, 이제 지은이가 등장하겠구나! 힘들게 유니폼을 구해준 보람이 있어.”
하지만 카메라는 지은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태극기 옷을 입고 있는 빛나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분명 아침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머리에는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양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내려와, 초등학생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순간, 지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빛나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응했다.
“본선 진출 꼭 할 거예요! 대한민국 파이팅!”
“우와아아!”
빛나의 구호에 맞춰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빛나의 뒤로는 같은 반 학생들이 비춰졌고, 그 속에는 시우도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왜 하필 저 애가.’
지은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반 아이들은 한동안 빛나가 TV에 나온 이야기를 떠들어댈 테였다.
‘재수없어!’
지은은 자신의 TV출연 기회를 빼앗고, 반 아이들의 관심을 받은 빛나를 어떻게 하면 골탕먹일까 고민을 시작했다.
*
*
*
나는 그날부터 매일 시우의 집으로 출근했다. 매일 오전같이 원고 작업을 마치고 나면, 코치로 근무하기 위해 출근하는 듯했고. 나는 시우와 함께 집을 나와 근처 카페에서 원고를 이리저리 구성해 보고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을 했다. 지은과 또 부딪힐까 봐 왔다 갔다 하며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면 생각보다 순탄하게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웅.’
그렇게 원고를 수정하고 있는데, 김 과장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과장님.”
‘그래, 원고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네. 생각보다 순탄하게 되고 있어요. 이번 달, 최 선수가 전지훈련 가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잘됐네. 최시우 선수 집에 왔다 갔다 할 때는 주의하고. 혹시라도 열애설이 나면 곤란하잖아?’
“아휴. 그런 슈퍼스타와 제가 열애설 날일이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나저나 내일 오후에는 기획 회의도 있으니, 오후에 사무실로 갈게요.”
‘사무실로?’
“네. 아무리 외근하라고 하셨지만 2주에 한 번 있는 기획 회의는 참석해야죠.”
“기획 회의에 이 대리가 들어와서 뭐 하려고.”
‘네?’
‘지금 최시우 선수 자서전만큼 우리 팀에 괜찮은 기획이 또 있어? 부장님께서도 회의 들어올 필요 없으니 그 시간에 원고에 더 집중하라고 하시네. 앗, 잠깐만…. 네, 부장님. 지금 이 대리랑 통화하고 있었어요. 네? 네. 네.’
김 과장은 팽 부장과 뭐라고 대화하더니 다시 전화기로 돌아왔다.
‘부장님께서 원고 완성된 거 들고 오면 직접 기획부터 편집까지 다 하실 거라고 하시네. 아, 내일 당장 언론에 기사도 나갈 거야. 최시우 선수 자서전이 올가을에 나올 거라는 짧은 기사. 마케팅까지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일단 초안만 들고 오라셔. 그러면 수고.’
이제는 아예 대필 작가 취급이다. 이런 식으로 비용을 아껴도 되는 거야? 싶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러다가 나 대필 작가로 성공하는 거 아니야?’
최시우의 자서전을 내가 직접 쓰다시피 하니, 잘만 하면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자서전을 대필해달라는 문의가 끊임없이 올지도 모른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같은 목숨. 차라리 대필 작가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글 쓰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스스로 재능도 있어보였다.
‘흥, 팽 부장. 두고 보라지. 내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보다 더 돈도 많이 벌고 잘나갈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
*
*
다음 날, 김 대리의 말처럼 시우의 자서전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기사로 나왔다.
매일 습관처럼 자신의 이름과 ‘최시우’의 이름을 검색해 보던 지은에게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프리미어리거 최시우, 자서전 출간 예정.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한 최시우 선수가 오는 가을경, 자서전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강 출판사가 밝혔다. 그가 프리미어 리그에 스카우트 된 과정부터….]
“자서전? 갑자기?”
의아하던 지은의 머릿속에 갑자기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빛나?’
분명, 빛나는 노트북도 거뜬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시우가 사는 단지를 나오고 있었다.
‘둘이 자서전 작업을 한다는 거야?’
빛나가 글을 꽤 잘 쓴다는 것 정도는 지은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점을 노려 수행평가를 같이하곤 했으니까.
‘뭐 어디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수시로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고 나서는 연기를 한다는 핑계로 학교도 잘 안 나갔던 터라, 동창들에 대한 소식은 가물가물했다.
함께 대학에 다니는 동기, 선배들과 어울리며 먼저 TV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받거나, 클럽을 다니느라 바쁜 생활이었다. 더군다나 틈틈이 시우를 챙겨야 했으니, 빛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수밖에 없는 대학 생활이었다.
‘아주 기어오르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려야 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더니. 또 기어오르려 드네?’
지은은 ‘한강 출판사’라는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흐름. 한강 출판사라. 제법 큰 출판사잖아?’
평생 누구 빵셔틀이나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빛나가 큰 회사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나빠진 지은이었다.
제법 예쁜 얼굴로 아역 배우로 활동하는 것도 중학생 때까지였다. 고등학생부터 아빠의 입김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았고, 웬 듣지도 보지 못한 새로운 배우들이 매해 새롭게 스타가 되었다. 배우라며 친구들에게 떠받들어지는 것도 대학생 때까지였고.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는 연기 수업을 들을 일도 없으니 배우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난 먹고 살기 위해 일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좋아서 의류 브랜드를 만들고,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는 있지만, 집안이 부유한 탓에 자존심이 상할 뿐, 일은 안 해도 상관없다며 스스로 자존심을 세우던 지은이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예쁘다고 보내는 찬사에 마냥 행복한 지은이었다.
“아, 근데 빛나는 다르잖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니까.”
지은의 한쪽 입꼬리가 쓱 하고 올라갔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니. 그럼요, 제가 어제 시우네 집 갔다 왔어요. 뭘요. 당연히 제가 한번 가봐야죠. 어머니 생활비도 은퇴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말은 무뚝뚝하게 해도 속이 참 깊어요, 그죠?”
시우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큰 일은 아닌데, 어머니께서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요.”
7화.
기획 회의에도 참석하지도 못하는 나는 매일 사무실 대신 시우의 집과 집 근처 카페로 출근했다.
‘명색이 난 편집자인데 말이야. 기획과 편집까지 팽 부장님이 다 가져가겠다니. 하아.’
속상하긴 했지만,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미 출판사에서는 가을에 책이 나온다며 언론 홍보를 먼저 해버렸고. 그 기한을 맞추려면 지금부터 신세 한탄을 하거나 멍을 때릴 시간 따위는 없으니까.
“그래도 본격적으로 작업해 볼까?”
호기롭게 노트북을 펼치긴 했지만, 막상 오늘 시우와 작업한 내용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우와의 작업은 일반적인 자서전 대필 작업과는 결이 아주 달랐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의 대필 작업은 세 번에 걸쳐 심층 인터뷰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면….
시우와의 작업은 그야말로 입으로 하는 축구 생중계였다.
‘내가 오른 다리를 뒤로 빼면서 헷갈리게 만드니까, 눈동자가 흔들리더라고. 그래서 곧장 슈슈숙하고 뚫으며 앞으로 나갔는데, 한 세 걸음이나 뛰었으려나? 와, 중앙 수비수가 얼마나 빠른지 벌써 내 앞에 있는 거야.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리니까 감독님은 막 소리 지르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부지런히 타자를 하며 받아적긴 했지만, 몇 시간 동안 나눈 대화도 정리해 보면 몇 페이지 분량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나긴 글을 지우고 단 몇 줄로 요약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첫 골을 넣었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두 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넣었던 슛. 이방인이었던 내가 드디어 홈 팬 관중들에게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긴 이야기를 단 한 줄로 요약하고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셨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다 보니 원고 작업은 꽤 빨리 끝나버리곤 했다.
‘이래서 언제 한 권을 다 쓰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시우에게 모든 걸 의지할 필요는 없었다. 시우에 관련된 기사들은 충분히 많았고, 기사 내용을 토대로 주요 사건을 미리 정리해 원고 방향을 정할 수도 있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훌륭한 보조자료 하나를 오늘 추가로 얻었다.
‘인터뷰라 아니라 이 외장하드가 오늘의 성과지.’
시우는 무심한 듯 짐을 챙기는 내게 외장하드 하나를 건네주었다.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해 살펴보았다. 외장하드 안에는 시우의 유소년 대표팀 시절, 그리고 국가대표와 프리미어 리그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사진이 정리되어 있었다. 신문 기사 스크랩부터 기사를 캡처한 이미지. 아마 기자나 사진 작가에게 직접 받은 듯한 고화질 경기 장면 사진까지. 그야말로 선수 최시우의 역사가 모여있는 자료였다. 사진도 훌륭한 자료였다.
오늘은 어차피 원고 정리도 빨리 끝났겠다. 책에 실을만한 사진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역시 유소년 대표팀 시절 사진은 별로 많지가 않네.’
아무래도 유소년 대표팀 경기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으니 사진이 별로 없는 건 당연한 결과. 좀 더 유심히 사진 자료를 찾아보며 쓸만한 사진을 찾아야 했다.
‘응? 이게 뭐지?’
[폴더명 : 20060903_AFC U-17_네팔]
한 폴더를 열어보니 유소년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시우가 누군가와 찍은 사진들이 쭉 나왔다.
‘경기를 마치고 찍은 사진인가 보네?’
사진을 클릭해 보니,
‘뭐야, 강지은이잖아?’
땀에 젖어있는 시우의 모습을 보니, 경기 후, 지은과 둘이 찍은 사진들이었다.
‘뭐야.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둘이 연락하고 있었잖아.’
그러다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
*
*
“나 이번에 싱가포르에 놀러 가잖아.”
“정말?”
“와, 해외여행이라니, 좋겠다.”
“훗. 단순히 여행만 하는 건 아니고. 여행 간 김에 유소년 대표팀 경기도 응원하는 거야.”
“정말 좋겠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곧 해외여행을 간다며 자랑하던 지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 빛나야! 빵 사 왔어?”
그런 지은이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내 얼굴을 보며 반갑게 불렀다.
“어, 어.”
“고마워. 여기 빵값이야.”
지은은 내게 동전을 건넸다.
“뭘 내 것 사는 김에 사 온 건데.”
하지만 지은과 나누는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지은은 빵 비닐을 뜯고 땅콩샌드를 한입 베어 물며, 쏟아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바빴다.
나는 조금은 풀이 죽어 내 몫의 빵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지은이와 친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지은이의 행동은 잘해줄 때도 있었고, 나를 빵셔틀로 취급할 때도 있어 무척이나 헷갈렸다.
“엄마가 싱가포르 여행 가기 전까지 영어 공부 해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셔서, 요즘 피곤해 죽겠어. 지난달부터 영어학원을 끊었다니까.”
물론, 아예 지은이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도 컸다. 지은이에게 별 관심 없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무리도 있었고, 학기 초에는 나도 그런 친구들과 제법 잘 어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지은과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로 배정되어 버렸고. 더 운이 없게도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까지 되어 버렸다.
“빛나야, 이번에 국사 수행평가 나랑 같이 하자. 넌 글도 잘 쓰고, 여기 그림 잘 그리는 친구도 있거든. 같이 하면 무조건 만점이야.”
“응? 나는 이미….”
이미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행평가를 하기로 정한 나는 거절하려고 했다.
“3명씩 한 조를 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2조는 4명씩 해야 하거든. 너까지 들어오면 딱 맞아서.”
지은의 주위로는 지은의 시녀 6명이 서 있었고, 우르를 나를 둘러싸 있었다.
“이미 얘기한 애들이 있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봤다. 그리고 나와 함께 같이 수행평가를 하기로 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뭐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저쪽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빛나야, 우리가 한 명 더 구해볼게.”
“뭐?”
“잘됐다. 꼭 나랑 같이 해야 해?”
어안이 벙벙해서 있으니, 지은이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근데 우리 같이 매점 안 갈래? 나 출출한데.”
갑자기 친한 척하는 지은이 부담스러워 팔을 빼려고 했지만.
“그래. 우리 다 같이 가자.”
지은의 시녀들까지 합세해 나를 끌고 매점으로 갔었다.
*
*
*
그 뒤로 나는 지은의 시녀도 아니고, 절친도 아니지만, 왠지 그녀의 무리처럼 되어버려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지은의 무리와 급식을 먹고, 수행평가를 하긴 하지만, 지은과 나의 관계는 친구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건 지은을 따르던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CF 모델로 활동했던 지은과 어울린다는 그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하는 아이들이었다. 지은이 촬영으로 학교를 비울 때면, 앞다투어 노트를 대신 필기해 주고, 수행평가까지 나서서 도와주는 아이들이었다. 그 대가로 얻는 건 지은의 친구라는 타이틀 정도였지만,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듯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3학년에는 다른 반이 되었다는 것.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다면 입시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다행히 3학년 때는 마음 맞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편하게 입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같은 반도 너무 자주 됐었단 말이야.’
한 예대에 합격해 고민하다가 다른 학교를 선택했는데, 나중에 지은이가 그 대학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어차피 과가 달라서 부딪힐 일이 없었겠지만, 이상하게 내게 살갑게 구는 지은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지금 책상을 빼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 또 강지은이 나타나다니. 나는 진절머리가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쓸만한 사진들을 추려서 회사 내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있는데,
‘웅.’
메시지가 왔다.
[팽 부장 : 이 대리, 기사 봤어?]
팽 부장이었다.
‘기사?’
팽부장이 보내준 링크를 클릭하니, 메인 화면에 커다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최시우 선수의 갑작스러운 은퇴 이유는 한국의 연인 때문!?
연예전문뉴스 디스팡팡]
나는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뭐, 뭐야… 한국의 연인?”
급히 스크롤을 내려 기사 내용을 읽었다.
“최시우 선수의 고급 펜트하우스에 한 여성이 드나드는 모습이 포착됐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 사이로 알려졌으며, 은퇴 후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함께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머리끈까지 놓쳐버릴 만큼 놀라고 말았다. 내가 요즘 매일 같이 시우의 집을 들락거린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숨이 가빠왔다.
“초등학교 동창? 그럼… 설마, 나?”
급히 사진을 확인했다. 기사 속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열애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옅은 색상의 화려한 재킷과 큼지막한 명품 가방이 선명하게 사진에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지은이잖아?”
손끝이 떨렸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곧 가슴 한편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역시, 지은이랑 얽힌 거였네.”
‘웅. 웅.’
그때,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앗, 부장님?’
“네, 부장님.”
“그래, 기사 봤어?”
“네. 방금 봤어요.”
나는 설마 열애설 상대를 자신으로 오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었지만,
“그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데. 빛나 씨도 아는 사람인가? 댓글 보니까 무슨 배우라며? 안 유명한….”
팽 부장님도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저도 얼굴만 아는 거죠. 뭐.”
“은퇴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현역 선수들 열애설보다 반응이 더 뜨거워. 괜히 열애설 때문에 최시우 선배가 싱숭생숭해져서 작업 못할 수 있으니까 차분하게 잘 끌어가야 해.”
“네.”
“그리고 진짜 연애하는 거면 혹시라도 여자 친구랑 부딪힐 일 있으면 잘 대하고.”
“그, 그래야죠. 아무리 동창이라곤 하지만 성인 되어서는 처음 만난 거고. 공과 사는 구분할 수 있어요.”
정말 둘이 사귀는 건가?
나는 다시 한번 2006년 두 사람이 싱가포르에서 찍은 사진을 클릭해 보았다.
지은이 다정하게 시우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싱가포르에 여행 간다며 잘난 척하던 지은이 생각나서 아예 노트북을 꺼버렸다.
괜스레 더 이상 일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일하고, 내일 다시 상쾌하게 시작하자.’
기분이 안 내킬 때는 너무 무리하기보다 차라리 기분 전환하는 게 나을 때가 있었다. 노트북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는 곧바로 카페를 나섰다.
집에서 시원한 맥주나 한 캔 마시고 곧장 남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8화.
다음 날, 어김없이 시우네 집 앞에 도착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내리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갑자기 그런 기사가 왜 나온 거야?
나 은퇴했는데…. 어떻게 현역 선수들보다 내 기사가 더 크게 나오냐고.”
열애설 기사와 관련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무조건 열애설 부인한다고 반박 기사 내줘…. 응.”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시우가 다시 낮게 말을 이었다.
“어? 아니야. 진짜로 동창일 뿐이고, 걔는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애라고.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말 가끔 만난 거고. 사진 찍힌 날도 하필 이번에 은퇴한다고 한국 와서 처음 만난 거야. 응. 그전에 만나지도 않았어.”
나는 내가 도착했다는 기척을 최대한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숨죽이며 통화 내용을 들었다. 시우와 지은은 서로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시우도 지은이의 실체를 잘 아는 듯했고.
“그냥 걔가 엄마랑 친하게 지내는 것뿐이야. 무슨 딸 같은 며느리? 아주 걔 때문에 엄마가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 같다니까. 엄마는 천륜이라 끊지도 못하고, 어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의아한 내용이 들렸다.
‘엄마?’
내가 기억하는 최시우는 할머니와 함께 단둘이 사는 아이였다. 운동회 때도, 학부모 참관 수업 일에도 시우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가 왔었고, 모두가 자연스러워할 만큼 시우가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뭐? 영국에서 걔랑 나랑 데이트하는 장면도 발견됐다고? 하아.. 그건 걔가 우리 엄마가 혼자 영국까지 오기 힘드니 자기가 무슨 여행 오는 김에 같이 영국에 와준다고 했던 거야. 그것도 몇 년 전 일인데.”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을 죽였다. 엄마가 영국까지 오셨었다니, 요 며칠 시우에 관련된 뉴스란 뉴스는 샅샅이 읽어보았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디에도 시우 부모님에 관한 기사는 없었으니까.
“첫사랑? 말도 안 돼. 어디서 그런 루머가 확산하는 거야?”
내가 의아해하는 동안, 시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내 첫사랑은 아무튼 따로 있어. 잘 부탁할게.”
뚝 하고 통화가 끝나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복도를 휘감았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첫사랑은 따로 있다?’
시우에게 엄마가 있다는 말만큼이나, 의아한 통화 내용. 나는 가물가물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동창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강지은 말고 인기 있는 아이가 있었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지은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예쁘거나 인기가 많은 여자아이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상한 소문이 퍼지거나 갑자기 따돌림을 당하면서 전학 갔던 아이들의 얼굴이 몇 명 떠올랐다.
‘지금 내가 최시우 첫사랑이나 열애설 생각할 때가 아니지. 그저 최시우의 기분을 맞춰주며 원고를 만드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야.’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흐, 흠...”
일부러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밖을 나오니, 한쪽에 서 있던 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 나와 있었네? 밖에는 왜 나와 있었어?”
“잠깐 통화 좀 하느라.”
“누,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밖에서 통화를 해. 넌 일반인도 아니면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기 한 층에 한 집이 사는데 들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고 아랫집, 윗집 사람들은 다 바빠서 평일에 이 건물에는 나밖에 없어.
하도 답답해서 나왔다.
들어가자.”
“답답? 열애설 때문에 그런 거야?”
빛나는 시우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오해... 인 거지?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야?”
“당연히 오해지. 누가 강지은 같은 애랑 참나. 얼른 들어가자. 이 몸이 축구 말고도 다른 운동도 얼마나 잘하는지 딱 보여줄 만한 에피소드가 어제 막 생겼거든?”
어제 이야기했던 코치로서의 이야기도 아직 다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했지만,
“너무 재밌겠다. 사람들은 다재다능한 최시우도 궁금할 테니까.”
무조건 좋은 아이디어라고 호응하며 시우를 따라 들어왔다.
시우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빛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충전하고 와.”
시우는 건성으로 턱짓하며 충전기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 그래.”
한 팔을 다쳤다고 해도 핸드폰 충전 정도야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빛나는 ‘을’, 저쪽은 ‘갑’이었다.
“어휴.”
시우에게는 들키지 않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핸드폰을 충전하러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윙.’
그때, 시우의 핸드폰이 울렸고, 나도 모르게 화면을 쳐다보았다. 일부러 몰래 보려고 했던 건 아닌데, 화면이 잠겨있지 않은 건지, 메시지 내용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지은 : 열애설 기사 봤어? 나는 오늘 보고 완전….]
‘윙.’
[지은 : 대박이다!]
‘윙.’
[지은 : 근데 우리 사진 잘 나오지 않았어? 모자이크를….]
강지은은 열애설이 난 게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배우면 열애설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나는 시우의 비위를 맞추러 온 것인지, 여자 친구가 아닌 게 분명한 지은이의 기분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곳에 온 것이지, 최시우 선수의 사생활에 관심을 두거나 끼어들려고 온 게 아니었다.
“자, 그러면 한번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까지도 잘하는 능력자 최시우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까?”
실컷 떠들어봤자 책에는 실리지 않을 가능성이 큰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차피 편집 과정에서 추렸다고 말하면 그만이고, 지금부터 김새게 할 필요는 없었다. 가뜩이나 열애설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인데, 그럴수록 비위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잊지 말자. 상대는 인세가 전혀 아쉽지 않은 인물이야. 하지만, 이 책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면, 실업자가 되는 건 바로 나라고!’
“근데 너 외장하드는 다 봤어?”
“어? 외장하드?”
“어, 어. 내용이 워낙 많았어야지. 다 못 봤어.”
“그래? 책 작업이 별로 급하지 않나 보네?”
“아, 아니야. 그…. 출판사에서는 2주에 한 번씩 기획 회의라는 게 있거든. 외근을 주로 하지만 출판사 일도 있으니까.”
기획 회의에는 올 필요가 없다며 거의 팀에서 내쳐진 분위기이긴 했지만, 괜스레 회사 핑계를 댔다. 시우의 열애설에 내가 기분이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못 봤다고 하면 될걸, 너무 구구절절이 말했나?’
“초등학교 때부터 자료를 모아놓은 거라서, 양이 많긴 할 거야.”
“응. 넌 초등학생 때부터 축구를 잘했으니까 그때 자료도 있으면 좋지. 그러면 축구 말고 어떤 운동을 했었는지 얘기해 볼래?”
나는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얹으며 원고 작업으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너는 피구도 잘했잖아.”
“그럼. 수영 학원에 가면 수영 선수를 시켜야 한다, 스키장에 가면 스키 선수를 시켜야 한다…. 어디를 가도 이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니까.”
다행히 시우는 자신의 열애설에 지난밤 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우의 자랑은 비록 쓸데없는 내용들이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그의 유년 시절을 지켜본 나로서는 과장 하나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두어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렇게 시우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으며 열심히 노트북에 타자하고 있는데, 시우의 핸드폰이 연신 울렸다.
“뭐지? 야, 핸드폰 좀. 그리고 오는 길에 마실 물도.”
“어!”
나는 재빨리 일어나 냉장고에서 시원한 생수 한 병을 꺼내고,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가져와 시우에게 건넸다.
“땡큐.”
“뭘. 아픈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냉장고 문을 못 열 정도로 다친 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치솟았다. 사진이 담긴 외장하드를 건네주었을 때는 츤데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또 이렇게 나를 부려 먹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누르며 시우가 핸드폰 확인하기를 기다렸다.
“이게 뭐야? 야, 잠깐만….”
시우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이게 뭐야?”
화가 난 시우의 목소리.
“열애설 반박 기사를 내라고 했지, 왜 열애설 확인 기사가 나와? 2006년이면 도대체 언제 적 사진이야. 이게 어떻게 열애설 증거가 돼?”
시우는 전화를 끊더니,
“내 기사 좀 검색해 줘 봐.”
“어, 어.”
나는 노트북 화면에 켜져 있는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끄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최시우’라는 글자를 입력하자 최신 기사들이 나왔다.
“클릭... 해볼까?”
제일 위에 있는 기사를 하나 클릭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최시우 선수의 첫사랑 이야기]
“이게 뭐야!”
최시우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지금 안 사귀는 건 사실이지만. 첫사랑인 건 맞지 않아?”
“첫, 첫사랑? 내가 얘랑? 말도 안 돼.”
시우는 허둥거리며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빠르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강지은! 이거 사진 뭐야?”
“어? 나도 모르지.”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걸면서 스피커폰이 켜졌지만, 내가 통화 내용을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다급해 보였다.
“그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랑 너밖에 더 돼?”
“나랑 너? 글쎄…. 정말 우리 둘만 가지고 있는 거 맞아?”
“당연하지. 나는 그때도 지금도 어디에 사진 같은 거 안 올렸어. 지금까지 별스타그램도 안 하는걸? 그 사진 저장할 때 빼고는 한 번도 열어본 적도 없다고.”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니 너무 섭섭한데?
그리고 내가 열애설 당사자인데, 내가 스스로 우리 옛날 사진 찾아서 뭐 기자한테 건네기라도 했을까 봐?”
“하아.. 아무리 강지은이라도 그런 짓까지 했을 리는 없겠지.”
“그래. 한번 잘 생각해 봐. 혹시 그 사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는지.”
“뭐라고?
그건 이번에 자서전 작업한다고 출판사에 보낸 게 전부야.”
“그럼, 출판사에서 기사한테 보내줬나 보지.”
“뭐? 도대체 왜?”
지은의 말에 시우는 얌전히 앉아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나를 홱 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며, 아니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지만, 이를 보지 못하는 지은은 계속해서 뻔뻔하게 출판사를 의심했다.
“왜겠어? 책을 많이 팔려면 이목을 끌어야 하잖아. 사람들 관심 끌려고 한 거 아니야?”
“야, 너 당장 우리 집으로 와. 만나서 얘기해.”
“알았어. 지금 갈게. 아마 한 시간이면.”
지은은 무척이나 해맑게 대답했고, 시우는 그런 지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버렸다.
“하아.
작업은 다음에 이어서 해야겠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응. 내가 사진을 우리 팀원들이 공유하는 클라우드에 올리긴 했는데, 우리 출판사에서 그런 기사를 언론에 흘리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회사 쪽에 한 번 확인해 볼게.”
괜스레 의심을 받아서 불편해진 나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겨 나갔다. 시우는 무척이나 화가 났는지,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씩씩거리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내 등 뒤로 시우의 절규가 울렸다.
“악! 강지은! 정말 짜증 나!”
9화.
한 시간 후, 지은이 시우의 집에 도착했다. 시우가 지은보다 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함께.
“뭐야, 혼자 온 거 아니었어?”
“네가 전화했을 때, 어머님이랑 나랑 마침, 브런치 먹는 중이었거든. 이번에 내 브랜드에서 나온 가방도 드릴 겸,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던 거야.”
“말도 없이 같이 오면 어떻게 해.”
시우는 커다란 에코백을 들고 지은의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자신의 엄마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어때. 어머니도 한번 와보셔야지.”
지은은 시우 엄마의 팔짱을 끼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시우의 엄마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마지못하다는 듯 지은을 따라 걸어들어왔다.
“어머님, 어때요? 집 너무 좋죠? 세상에 우리 집보다 좋다니까요.”
“어머, 그렇구나.”
지은은 마치 본인 집처럼 시우 엄마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고, 시우 엄마는 머뭇거리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길게 말할 필요 없고, 빨리 반박 기사 내자. 그거 논의하려고 불렀어.”
“응?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인 건 사실이잖아. 어떤 걸 반박하겠다는 거야?”
숨도 돌리기 전부터 반박 기사를 내자고 몰아붙이는 시우를 보며, 지은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을 살짝 굴렸다.
“동창인 것만 사실이잖아. 첫사랑도 아니고,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엉뚱한 열애설에 놀라지도, 반박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지은을 보며 답답한 시우.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시우 엄마가 거들고 나섰다.
“첫사랑은 맞지 않니? 서로 좋아했다며,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말이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잘 알지만.”
시우 엄마는 오늘만큼은 부모로서 할 말을 꼭 해야겠다고 각오하는 듯,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이어 말했다.
“너희 두 사람,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잖니. 더군다나 시우 너는 지은이 말고는 달리 여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고.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인연은 가까이에서 있는 법이더라.”
“도대체 뭘 잘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시우는 엄마의 말에 순간 화가 났다.
“자격 없다는 거 잘 알면 그만 하세요!”
“야, 최시우! 너 어머니한테 뭐하는거야?”
시우가 버럭 큰 소리를 내자, 지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우는 엄마까지 대동해서 나타나 뻔뻔하게 구는 지은에게도 짜증이 났다.
“왜 반박을 안하겠다는거야? 사진, 네가 언론사에 보냈어?”
“왜 나를 의심해? 이빛나를 의심해야지.”
“뭐?”
“너 자서전 작업. 이빛나랑 하는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지난 번에 너 만나러 왔을 때, 빛나 만났었거든. 걔가 이 동네에 살 리는 없고. 무슨 일을 하러 왔나보다 싶었지.”
지은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럼,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빛나가 널 이용한거지.”
지은은 휴대폰 화면을 열어 시우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봐. 출판사에서 이번 가을에 네 자서전 낸다고 기사 냈잖아? 그런데 ‘좋아요’ 수 좀 봐. 반응도 미적지근하지?”
시우는 화면을 흘긋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빛나랑 무슨 상관인데.”
지은은 곧바로 또 다른 기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건 달라. 열애설 기사야. 너랑 내가 다정하게 찍힌 사진. 조회수, 댓글 반응, 전부 폭발적이야.”
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빛나가 홍보 욕심에 흘린 거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속에 서늘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시우 엄마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빛나? 그게 누구지? 그 사람이 우리 시우에 대한 소문을 일부러 냈다는 거야?”
“아, 빛나는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아마 동창이라는 핑계로 시우에게 접근한 것 같아요. 본인 일에 이용하려고요.”
“무슨 사기 같은 건 아니겠지?”
“사기는 아니고, 시우의 자서전을 내겠다고 하는 모양이에요. 근데 혹시 알아요? 어떤 속내가 숨겨져 있을지요. 걔가 학교 다닐 때부터 늘 조용하고 아무 말 없어서 속을 알 수 없었거든요.”
“이용이라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나 가.”
시우는 아예 지은의 가방을 들어 손에 쥐여주고는 등을 떠밀다시피하며 두 사람을 집 밖으로 내보냈다.
“어머니께 차 한 잔도 대접해 주지도 않고, 이렇게 보내는 게 어딨어?”
“나는 괜찮다. 그런데 시우야, 네 인기와 돈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항상 조심해야 해. 알겠지?”
두 사람은 현관문을 닫는 순간까지 뭐라 뭐라 시우에게 외쳤지만, 시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시우는 삽시간에 적막만 감도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땀이 나서 덥다는 듯, 깁스의 버클을 풀고 손목을 빼냈다. 그 순간, 팔을 압박하던 인조 패드가 축 늘어지며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시우가 차고 있던 깁스는 두툼한 플라스틱 프레임과 회색의 조임 끈, 팔을 고정하는 패드까지 그럴듯했지만, 실은 인터넷에서 산 ‘명절용 가짜 깁스’였다. 보통은 명절에 일을 피하고 싶은 며느리들이나, 힘든 아르바이트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쓰곤 하는 물건을 시우는 빛나를 속이기 위해 특별히 이 깁스를 구해두었다.
“큭.”
시우는 조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걔가 학교 다닐 때부터 늘 조용하고 아무 말 없어서 속을 알 수 없었거든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빛나가 아니라 지은이었다. 지은은 겉으로는 상냥하고 싹싹하고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까이 지켜본 사람은 지은의 진짜 모습을 알 수 밖에 없었다. 질투가 심해서 자기보다 빛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깎아내리거나 쫓아내서라도 주인공의 자리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엄마가 한 말이 가관이었지.”
‘시우야, 네 인기와 돈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항상 조심해야 해.’
프로에 입단하고 나서도 큰돈을 벌면서도 시우는 사기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에이전트 형이 워낙 믿을만하게 여러 일 처리를 해주었기도 하고, 크게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훈련만 반복하는 생활 탓에 사기꾼과 만날 기회 자체도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시우의 돈을 보고 접근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엄마였다.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겨둔 채 집을 나갔던 엄마. 한 번도 어린 시우를 찾지 않았던 엄마는 시우가 프로 구단에 입단하던 해, 경기장으로 찾아왔다. 엄마는 뉴스를 통해 겨우 시우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시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시우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엄마가 자신을 버렸던 그 집에서 줄곧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살 집을 마련해주고,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준 것은 불필요한 사생활 노출을 막기 위한 보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 엄마를 따로 만나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빛나는 달라.’
하지만 빛나는 달랐다. 시우는 몸을 일으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온통 축구에 관련된 책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책들이 꽂혀져 있었다.
〈한양 도성의 비밀 성문들〉, 〈청계천, 복원되지 못한 기억〉, 〈종로 골목의 100년〉, 〈북촌의 옛집, 그 안의 사람들〉... 모두 빛나가 편집자로서 기획하고 제작한 책들이었다. 시우는 빛나가 자신에게 연락하기 전부터, 빛나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가 제작한 책은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딱히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없었지만, 모두 크게 주목받지 못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책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시우는 주전으로 뛰지 못하고 벤치 신세일 때에도 용기를 얻곤 했다. 화려한 스트라이커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운동장 안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책을 한 권 펼쳐서 몇 장 넘기고 있으니 에이전트 형에게 전화가 왔다.
“시우야, 강지은 배우 별스타그램 봤어? 너 강지은 배우가 반박하는 입장문 먼저 낼거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된 거야?”
시우는 잠시 통화 화면을 내려놓고 곧장 지은의 별스타그램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2006년, 자신과 함께 찍었던 사진 몇 장이 새로 게시되어 있었다.
[헐… 이 사진이 기사로 뜰 줄은 몰랐네
오늘 하루종일 전화 폭주한 거 실화냐 🔥📱
2006년 U-17 대표 시절 ⚽
우리 반 동창 최시우 선수랑 함께했던 그날!
한국 2:0 승리의 순간이 아직도 생생✨
학교 땡땡이치고
싱가포르까지 직관 간 찐의리 지은✈
그땐 그냥 응원하러 간 건데…
세월이 이렇게 스캔들로 돌아올 줄이야 🤦
#추억팔이 #2006U17 #최시우선수 #최시우열애설 #유소년대표팀 #최시우선수과거 #초등학교동창 #강지은 #강지은배우 #동창스타그램 #싱가포르직관 #싱가포르 #2006AFC #jalanbesarstadium]
제발 자신의 계정을 봐주길, 열애설이 더 확산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끝없이 늘어진 해시태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강지은 배우의 반박 입장문이 나오면 바로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떠서 전화한 거야. 너 혹시... 강지은 배우한테 약점 잡힌 거 있냐? 일단 형이 대충 알아서 언론사에 입장문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에이전트 형이 전화를 끊었다.
‘약점?’
시우는 읽다 만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시우는 초등학생 때부터 지은에게 잡힌 약점이 있긴 있었다.
*
*
*
2002년, 시우가 지은과 우유 급식을 나르기 위해 심부름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알아.”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지은이 조용히 속삭였다.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붉어진 귓불은 시우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근데 내가 널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걔가 왕따로 학교생활이 힘들어지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시우는 남자아이긴 했지만, 교실 내에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일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집이 잘사는 데다가, 이따금 재연 프로그램에 아역 배우로 출연하곤 하는 지은은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지은의 어머니는 학교생활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서 그런 지은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함께 점심을 먹을 친구도, 쉬는 시간에 함께 놀 친구도 없다는 의미였다.
시우는 빛나를 떠올렸다. 빛나는 말수가 적고, 쉬는 시간이면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크게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지만, 크게 주목받지도 않는 아이였다. 지은이 마음을 먹는다면 그런 빛나의 평온한 학교생활이 지옥처럼 변하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난 축구 훈련만으로도 벅차서, 누구랑 사귀거나 할 마음은 전혀 없어.”
시우는 그렇게만 말하고 지은과 보조를 맞추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빛나의 학교생활은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비록 뒤에서 지켜봤을 뿐이었지만, 함께 시청 앞으로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러 갔다가 인터뷰를 하는 빛나의 모습을 바라본 것도 재미있었고, 짝꿍으로 한 학기 생활을 했던 것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게다가 학기 말에는 반 아이들이 다 함께 학급 문집을 만들었는데, 빛나가 쓴 동화가 가장 인기도 많았었다, 빛나에게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빛나가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만족했던 시우였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한 시우는 열심히 훈련에만 전념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은에게 연락이 왔다.
[나 싱가포르로 응원하러 가도 돼?]
10화.
[싱가포르에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지은이 오건 말건 별 신경 쓰지 않았던 시우. 하지만 지은이 바로 보낸 문자에 우호적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랑 같이 갈까 싶은데.
아, 그리고 나 빛나랑 또 같은 반 된 거 알지?]
그랬다. 시우가 잡혔던 약점은 2개였다.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인 거라. 너는 절대로 은혜 모르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시우의 머릿속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우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몹시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지만, 축구를 할 만한 정도의 형편까지는 아니었다. 시우의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시우에게는 초등학생 때부터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후원해 주는 한 독지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후원자가 지은네 아버지였을 줄이야!’
그 독지가가 지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중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되면서 그는 지은과의 관계를 잘라버릴 수 없었다.
빛나의 학교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걱정. 그리고 자신이 받은 호의라는 굴레에 시우는 지은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시우는 그렇게 지은과 함께 경기가 끝나고 사진을 찍고, 지은의 아버지와 셋이 식사까지 했었던 날이었다. 지은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 빛나에게 빵셔틀을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빛나라는 약점은 이제 사라졌으니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시우는 그만 빛나에게 약점 하나를 새롭게 잡혀버렸다.
“어머니께서 도박으로 네가 마련해 준 집을 날릴 위기에 처하셨어.”
“어머니께서 최시우 선수가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빚을 지고 다니셨나 봐. 지금 사람들이 언론에 보도한다는 걸 내가 설득하고 있어.”
다시 만난 엄마는 사치가 심했고, 도박이나 골프에 돈을 펑펑 쓰기 일쑤였다. 시우가 보내주는 생활비가 결코 모자랄 리가 없음에도 빚이 점점 늘어났다. 유럽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고 경기마다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우는 그저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만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함께 골프를 친다, 쇼핑을 한다며 엄마와 종종 만나던 지은이 이 사건·사고를 다 알게 되었다.
“아우, 이제 난 현역 선수도 아닌데!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 순간, 시우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시우는 이제 더 이상 현역 선수가 아니었다. 열애설이 나건, 부모의 빚이 밝혀지건, 불우한 가정사가 드러나건. 경기 성적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경기를 뛸 리가 없으니까! 그는 곧장 에이전트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내가 지금 보내는 영상 좀 언론에 보내줄래?”
초등학생 시절, 축구 경기를 녹화해 보기 위해 시우는 없는 형편에 무리하게 비디오기를 샀었다. 그 덕분에 시우가 녹화했던 영상이 있었다.
‘그저 추억으로 남길 생각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
*
*
쫓겨나듯 시우의 집에서 나온 나는 어김없이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최시우의 첫사랑이니, 열애설이니 뭐니 하는 소문은 제쳐두고, 지금 당장은 일을 해야 했으니까. 노트북을 펼쳐 아직 보지 못한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자서전에 쓸만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6학년 3반_학급 문집]
그때, ‘축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폴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우리 반이었잖아?’
폴더를 열어보니 한 부씩 인쇄해 가졌던 학급 문집 이미지가 있었다. 클릭해 보니 시우가 쓴 시가 있었다.
[제목 : 역전승
지은이 : 최시우
압도적인 승리는 뻔하지만
역전승은 예측불가능하다
압도적인 승리는 즐겁지만
역전승은 짜릿하다
하지만 감독님은 압도적인 승리를 원한다]
시우가 쓴 짧은 시 아래로 축구 슛을 날리는 남자아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큭. 그때도 축구에 대한 시를 썼었구나.’
어릴 때부터 축구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다는 부분에 이 시를 넣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그림으로 넘겼다.
‘앗, 이건?’
다음 그림은 내가 쓴 동화였다.
[제목 : 우승은 6학년 3반!
지은이 : 이빛나]
동화 내용은 학교에서 반대한 축구 대회가 열렸고, 6학년 3반 아이들이 시우를 중심으로 열심히 훈련한 끝에 우승한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반 아이들이 등장하도록 이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실제 학급 내에서 인기가 많건 적건, 빛나는 최대한 모든 친구가 비슷한 분량으로 동화에 등장하도록 이야기를 만들었었다. 가장 조용한 친구가 응원 단장을 맡고, 가장 체구가 작은 친구가 축구팀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 명도 상처받지 않고, 동화 속에서 마음껏 활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학급 문집이 나왔을 때, 아이들이 제일 먼저 펼쳐서 읽었던 글이 바로 빛나의 글이었다. 하지만, 이 글이 문집에 실리는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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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급 문집은 모두 동시를 써야 해. 그래야 공평하지.”
학급 문집을 이끌던 지은은 모든 학생이 동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모르고 쉬는 시간마다 동화를 써오던 나는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맞아. 모두 돈을 모아서 만드는 건데. 한 사람당 A4 용지 한 페이지씩 공평하게 분량을 나눠야 해.”
“그래. 동시를 써야 한다고 안 하면, 남자아이들은 분명 대충 하는 애들도 있을 거야.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니까.”
지은을 추종하는 무리가 지은의 주장을 두둔하며 나섰다. 학급 문집에 만화 캐릭터나 로봇 같은 그림을 그리려던 아이들 몇 명과 긴 동화를 쓰려고 했던 나는 그만 주눅 들어버렸다.
“학급 문집은 자유롭게 하자. 학급 시집이 아닌걸.”
그때, 시우가 목소리를 내주었고, 몇 명이 그 목소리에 동조한 끝에 겨우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은 동시가 아닌 작품을 학급 문집에 실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치사했지만, 막상 학급 문집이 나오니 그런 수모 따위는 잊어버릴 만큼, 뿌듯했다. 반 아이들이 정말 즐겁게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빛나, 넌 정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시우가 그런 칭찬까지 해주자, 나는 그만 그날부터 작가가 돼야겠다는 꿈을 꿔버리고 말았다.
*
*
*
가끔은 시우의 그 한마디에 무모하게 진로를 정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지만, 지금 와서 동화를 다시 읽어보니 시우의 안목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어도 재밌는걸? 초등학생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3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모두 등장하는 동화는 자칫 산만해질 수 있었지만, 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크고 작은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하는 과정들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어? 그런데 이게 뭐지?’
동화의 끝에 손으로 덧붙여 쓴 이야기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를 보니 시우의 글씨체가 분명했다. 나는 이미지를 확대해 한 글자씩 읽어보았다.
[대회가 끝난 후, 빛나가 시우에게 다가왔다.
“최 감독, 너무 멋지다. 오합지졸을 잘 훈련했어.”
“뭘, 선수로 뛴 아이들이 잘 해준 거지. 아까 준명이 골 넣을 때 정말 멋지지 않았어?”
그 순간, 빛나가 시우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다들 준명이가 멋있다던데?”]
‘뜨악! 이게 뭐야?’
당황한 나는 다른 이미지도 있나 살펴보았지만, 폴더 안에는 시우의 동시와 내가 쓴 동화뿐이었다.
‘얘는 내가 쓴 동화는 왜 가지고 있고, 뒷부분에 이런 내용은 왜 멋대로 넣은 거야?’
그때, 시우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링크 하나를 보냈다. 웬 뉴스 기사였다.
[2002 월드컵, 초등학생 최시우의 추억 영상 공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최시우 선수가 학급 친구들과 함께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대표팀을 응원하던 영상이 최근 공개됐다.
영상 속 최 선수는 친구들과 붉은 응원 티셔츠를 입고 열정적으로 응원을 펼치고 있으며, 그중 한 반 친구가 방송국 인터뷰에 응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화면에 잡혀 눈길을 끌었다.
최 선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라며 “여전히 몇몇 친구들과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라고 전했다.]
영상을 클릭해 보니 당시 나의 인터뷰 장면과 그 옆에서 친구들과 함께 v 자를 만들며 손을 흔들고 있는 시우의 얼굴이 나왔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시우일 테였다. 화면에서 시우는 유독 눈에 띄었다. 반 아이 중에서 키가 유독 큰 데다, 야외운동을 하면서도 흰 얼굴. 멀리서 보아도 시우만 보일 것 같았다.
그 시절에 비디오기도 집에 없어서 엄마와 함께 뉴스에 나온 나를 함께 보긴 했는데, 비디오로 녹화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었다. 시우가 이걸 녹화해서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의외였다.
기사 댓글을 내려 보았다.
[인터뷰한 애도 예쁘다]
[이번에 열애설 난 아역 배우 강지은 아니야? 자기 최시우 선수랑 동창이라고 예능에서 몇 번 말했잖아.]
[아니야 영상 다 보면 이름이 이빛나임.]
[우와. 이 반에 최시우도 있고 강지은도 있고 이렇게 예쁜 학생도 있었다고? 대박.]
그날 붉은 티셔츠 살 돈이 없어서 엄마와 저녁에 태극기를 수선해 옷을 입고 있는 내가 있었다. 다행히 시우가 준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머리를 양 갈래로 묶으니 그런대로 봐줄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내가 그렇게 예뻤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인터뷰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최시우 같은 반 친구가 인터뷰할 때 아주 뿌듯하게 바라보는 거 봐라.]
[완전 아빠 미소임.]
[아 나도 최시우랑 같이 학교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우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았었나 싶은 생각이었다.
멍하니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시우는 조용히 나를 챙겨준 적이 있긴 했었다. 응원하러 가던 날, 붉은 두건을 챙겨와 주기도 했고, 남자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말려주기도 했었다.
‘아, 맞아. 학급 문집을 만들 때도 티 안 나게 날 잘 챙겨줬었는데.’
그 당시에는 시우가 무척이나 다정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시우는 ‘싸가지’ 그 자체였다.
싸가지없는 시우에게 적응이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시우에게 메시지가 왔다.
[너도 나랑 연락하고 있는 동창 중 한 명이다. 알았지?]
[그래. 그렇게 말할 테니 걱정 마라.]
답장을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지은이랑 정말 사귀는 거 아니야? 뭘 이렇게 열심히 열애설을 막아?’
솔직히 이제 현역 선수도 아니고 은퇴한 마당에 굳이 열애설을 막겠다고 이러는 시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한다고 해서 팬들이 큰 충격을 받을 것도 아니고.
‘됐다, 일이나 하자. 일이나.’
그때, 시우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근데 너 외장하드 파일 꼼꼼하게 보고 있어?]
[다 봤는데, 왜?]
[다 봤는데도 할 말이 없어?]
[뭐? 이 몸이 쓴 위대한 작품에 네가 오점을 남긴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오점이 아니라 ’고백‘이겠지. 넌 출판사에 다니는 애가 한글도 제대로 모르냐.]
[고백?]
나는 다시 시우가 덧붙인 이야기를 읽어보았다.
[설마 그때 네가 날 좋아했었다는 거야? 강지은이 아니라?]
순간, 첫사랑이 따로 있다던 시우의 말이 생각났다.
[강지은은 그냥 사정이 있어서 친하게 지냈던 것뿐이야.
난 못된 여자 싫어해.]
‘그럼 도대체 왜…?’
의문이 들었다가 순간 몇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은이 아주 가끔 나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지나가긴 했지만, 학급 문집 비용을 더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고 넘어간 일이나, 싱가포르에 갔다 오고 나서 한동안은 빵셔틀을 시키지 않았던 일까지.
‘뭐야. 내 학교생활을 두고 강지은이랑 거래라도 했던 거야?’
내 말에 시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말…. 날 좋아해서?’
‘그래. 이제 알았냐? 너는 하여튼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다니까.’
그 순간,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시우가 자신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우는 나름대로 나를 챙겨준다고 했는데, 정작 나는 본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
*
*
몇 개월 후, 가을.
광화문 대형 서점, 북토크 현장.
북토크가 열리는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은퇴하긴 했지만,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동하며 한국인들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준 최시우 선수가 서점에 온다는 소식에 어린아이부터 중년층까지 서점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와, 최시우 선수다!”
“축구 선수가 어쩜 저렇게 하얗지?”
최시우 선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설레는 축구 팬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본격적인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이빛나 작가님, 이 작품에서 최시우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활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뛰어난 주인공을 다루기보다, 한 학급 구성원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내용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량이 뛰어난 학생은 주장이 아니라 감독 역할을 하여, 전체적인 팀의 수준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원맨팀을 피한 덕분에 반 친구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죠.”
그랬다. 오늘 북토크에 초대된 저자는 나 이빛나. 신간 <우승은 6학년 3반!>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정말 내 글을 읽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거였어? 나는 그 말만 믿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단 말이야.”
갑작스러운 시우의 고백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그때의 그 말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했던 사탕발림 말은 아니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이야기 중에서 <우승은 6학년 3반!>이 제일 재미있는걸?”
시우는 나에 대한 호감이 아니어도 동화가 정말 재미있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려주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써봐. 너 정말 재능이 있어.”
그 길로 나는 바로 노트북을 열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1주일 만에 한 장편 동화의 초고가 나왔고, 바로 출판사로 원고를 들고 갔다.
“어, 이빛나 대리. 그래, 최시우 선수 자서전 원고 가지고 왔나?”
“여, 여기요, 부장님.”
시우의 자서전 초고를 기대했던 팽 부장에게 건넨 원고는 동화였다.
“이게 뭔가? 동화잖아?”
“네. 이번에 제가 기획하고 집필한 원고입니다. 꼭 검토해 주십시오!”
팽 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원고를 받았다.
“일단 알았어.”
“네.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다.
“이 대리, 계약하지.”
“정말이예요, 부장님?”
“그래. 이 원고를 다른 출판사에 뺏길수는 없지.”
그렇게 계약한 원고는 빠르게 출간되었다. 최시우 선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설정. 게다가 시우가 직접 직접 도서 홍보에 참여해 준 덕분에 출간 직후, 베스트 셀러에도 오르는 영광까지 누렸다.
“최시우 코치께서는 동화의 주인공으로 어떻게 읽으셨나요?”
“초등학생 때도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미리 체험했던 기억이 있네요.”
시우의 말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빛나 작가가 성인이 되어 다시 쓴 버전에는 감독으로서의 고민이 더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압박해야 하지만, 친구에게 마냥 그럴 수는 없는 초등학생 시우의 고민이 현재 제가 갖고 있는 고민과 비슷하기도 하고요.”
“십대들이 가질 수 있는 교우 관계, 그리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잘 그려낸 작품인 그것 같아요. 그럼, 질문을 받겠습니다.”
수십 명의 관객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사회자는 그 중,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에게 질문을 받았다.
“동화에서는 감독인 시우가 훈련일지 담당인 빛나에게 고백하면서 끝나잖아요. 실제로도 두 분은 서로 사귀시나요?”
그 질문에 나와 시우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우가 마이크를 들었다.
“네.”
그 순간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초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다면 무척이나 좋았겠지만, 너무나도 아쉽게도 최근부터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시우는 관객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이어 우리의 관계를 발표했다.
“와 아아!”
“꺅!”
“대박이다!”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고, 그 환호 소리에 무대 아래에 서 있던 팽 부장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이며 웃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앞으로 책이 더 많이 팔릴 것 같다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