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보부인, 조선왕실의 내니
1화. 이름 없는 무덤
아이를 포기했다. 세 번의 유산 끝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 않은 채 병실에 누운 내게 의사는 말했다.
“원래도 몸이 약한 데다, 자궁벽이 너무 얇아. 다음 임신은…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고...”
‘무슨 개소리야. 당신은 그걸 말이라고 듣고 있는 거야?’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마음에서만 부르짖는 소리였다. 하지만 남편, 아니 남의 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의사는 남편의 하늘 같은 선배이자, 내 직장 상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남편이라는 작자의 한결같이 무심한 태도는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래, 너한테 뭘 바라겠어. 너 같은 걸 남편이라고 팔장끼고 식장에 들어간 내가 미친년이지.’
더 박살 날 것도 없다고 생각한 내 결혼은, 그 순간 부스러기 조차 없이 산산히 부서졌다. 이혼 서류에 도장부터 찍고 나서 병원을 그만뒀다. 병원에 더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산부인과 간호사였던 나는, 더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가 부풀어 오른 채,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산모들, 신생아실 창 너머에서 쌔근쌔근 잠을 자고, 오물오물 엄마의 젖을 먹는 그 어린 생명들. 그것이 모두 칼날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암막 커튼조차 걷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잠만 자는 날이 계속됐다. 어느 날, 후배 간호사에게 연락을 받았다.
“선배, 혹시 시간 되시면 북악산에 플로깅 가실래요? 말이 봉사지, 그냥 바람 쐬러 가자는 거죠.”
약속이나 일정 같은 게 사라진 지 오래. 나는 그저 후배를 따라 나섰다. 북악산은 과연, 서울인가 싶게 별세상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후배는 길이 익숙한지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내 다리는 썩은 무처럼, 후들거렸다. 너무 누워만 있었던거다.
“선배, 너무 좋지 않아요? 서울에 이런 데가 있다는게. 완전 개방된 지도 얼마 안되서 신령스럽다니까요. ”
“그...래”
가뿐숨을 몰아쉬며 대답도 제대로 못하던 내 눈에 무언가 포착됐다.
“여기 비석이 있어!”
뭔가 엄청난 것을 발견한 것처럼, 홀린 듯, 비섯 가까이 다가갔다.
‘奉保夫人 康伊丹’ 비석은 반쯤 깨진 채 흙에 묻혀 있었고, 글자는 뭉개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한문으로 된 글자는 아는 글자, 모르는 글자가 섞여 읽기도 어려웠다. 스마트폰으로 찍고 인터넷 사전에 올려 해독한 끝에, 글자의 전모가 드러났다. ‘봉보부인 강이단.’ 강이단.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름에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순간 뱃속에 불덩이 같은 것이 느껴지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아악!
눈을 떴다. 차가운 땅바닥,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칠흑같이 까만 밤이었다. 가슴 앞섶은 온통 젖어 있었다. ‘이건 무슨 냄새지?’ 시큼하기도 달큼하기도 한 그런 냄새. 알듯도 모를 듯도 한 그런 냄새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돌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강씨는 예를 갖추고 중전마마의 명을 받들라.”
등 뒤에서 누군가 외쳤고, 사내 몇이 들이닥쳤다.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팔이 붙들려 있었다.
“강가 이단이 맞느냐?”
그들의 행색은 뭐랄까... 조선시대 사극에 나오는 군졸들 같다고나 할까. 나는 강하게 항의했다.
“저기요. 강씨는 무슨. 사람을 잘못봤어요. 전 서씨라고요. 서씨.”
누구도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복이 맞긴 한데. 흰색 소복 차림이었다.
끌려간 곳은 큰 성문 앞이었다. 낯익기도 한데. 어디서 봤더라. 저 현판은...광화문? 횃불을 환하게 밝힌 거대한 성문은 광화문과 비슷했다. 성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며. 나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며 내 소복 차림이며. 여긴 조선인가? 이건 꿈인가? 이혼하고 퇴사 후, 낮이고 밤이고 잠만 자더니, 내가 드디어 미쳤나. 북악산 올라간 게 꿈을 꾼 건가? 어디서부터 꿈인거지?
“강가 이단을 들이라.”
몇 개의 문을 지난 건지. 어느 전각의 문 앞에 무릎이 꿇렸다. 잠시 후 누군가의 기침 소리 끝에 가만히 문이 열렸다. 한 여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기품 있으나 수척한 얼굴, 무엇보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전마마, 강가 이단이옵니다.”
상궁이 입을 떼자, 중전이 중전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에서 이미 죽음이 가깝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 어미가 젖을 먹여 나를 키웠으니 우리는 자매와도 같은 인연이 아니냐. 네가… 내 아이를 키워다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대꾸도 못하고 눈만 꿈벅였다. 중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갓 태어난 네 아이가 먼저 떠난 것은 너무도 애통한 일이다. 내가 저 세상에서 네 아이를 반드시 찾아 돌볼 터이다. 그러니 이단아. 내 아이를...내 아이를...지켜다오.”
순간 내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강이단. 북악산 비석에서 본 이름. 나를 붙들어온 사내들이 부르던 이름, 중전을 나를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힘겹게 말을 건넨 중전은 중전은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 후, 나는 이 나라의 국본이 될 원자의 유모가 되었다. 조선의 왕이 될 운명의 아이. 그러나 그 아이의 피부는 창백했으며, 몸이 자주 떨렸다. 젖을 무는 데도 활기가 없었다. 내 아이, 아니 강이단의 아이가 죽었어도 강이단의 젖은 늘 넘쳐 흘러 옷섶을 흠뻑 젖셨다. 내가 처음 맡은 이 세계의 냄새가 바로 아이가 먹지 못하고 흘러내린 나의 젖냄새였다. 그리고 지금 내 젖을 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심히 병약하고 예민한 원자는 낮이고 밤이고 울기만 했다. 낯선 품을 거부하며 오직 내 품 안에서만 머물렀다. 나는 밤새 아이를 안고 젖을 물렸다. 그래야만 아이는 안심하듯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조용히 잠들었다. 이 아이를 지켜야 했다. 그게 내 아이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잘 알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중전은 반드시, 내 아이...아니 강이단의 아이를 찾아서 돌볼 것이다. 그럴 사람이다. 어쩐 일인지 나는 처음보는 중전의 말이 굳게 믿어졌다. 실제 난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는데도 젖을 물리는 일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깜짝 놀랄 일이었다. 한 번도 젖이 돈 적 없는 몸, 내 아기집에 아기가 자리 잡기를, 그 아기에게 내 젖을 물리기를 나는 얼마나 소원했던가. 꿈이라기엔 너무 분명한 이 느낌. 그래서 나는 이 작은 생명이 왜 아픈지 그 이유를 찾기로 했다. 겨우 잠든 아이를 떼놓고, 동궁 밖으로 나갔다. 연못가에 앉아있는데 내신세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엄마의 삶, 내 젖을 물릴 수 있는 갓난아이. 모두 내가 꿈꾸던 것 아니었나. 그런데 하필 그게 조선 시대라니. 혹시 나는 나의 전생으로 온 것일까. 뭐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때 연못에 둥실 뜬 보름달을 흐트러뜨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 그 얼굴을 본 순간, 숨이 멎을 뻔 했다.
“김지훈? 당신이 여길 왜!”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조선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히 나의 X, 전 남편, 김지훈이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마마님. 괜찮으십니까.”
2화. 내소주방의 독초
조선의 국본이 될 아이, 그 무거운 짐을 진 아기가 내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다.
아침 햇살이 동궁의 창호지에 스며들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이보다 더 평화로운 풍경이 있을까.
‘잘 먹고, 잘 자는데 왜 아이는 점점 시들어갈까.’
특히 원자는 호흡이 불규칙해서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만 같았다.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간밤에도 원자의 열이 끓어오르는 바람에 동궁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대비전에 연락을 하느니, 마느니로 난리가 났다. 간신히 열을 잡았지만, 아직도 열꽃이 남아있었다. 이 작고 여린 생명이 말도 못하게 무거운 존재로 다가왔다. 다시 젖을 물릴 준비를 하기 위해, 나는 가볍게 가슴 마사지를 시작했다.
“내가 저 세상에서 네 아이를 반드시 찾아 돌볼 것이다. 그러니 이단아. 내 아이를...내 아이를...지켜다오.”
중전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과연 중전은 강이단의 아이를 찾았을까. 나의 현생에서 잉태하지 못한 나는 처음으로 내 아이에게 내 살을, 내 모유를 내어주었다. 잠자던 아이가 무언가 찾듯 옷섶을 파고 들더니 작은 입을 벌려 젖꼭지를 물었다. 부드러운 잇몸으로 젖을 물고는 간간히 눈을 깜박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기. 그 까만 눈동자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눈동자는 내가 의심한 모든 것을 다 녹아버리게 했다. 그래 그건 사랑, 그 자체였다.
며칠이 지났을까. 궁은 중전의 장례 준비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영문 모르는 사람이라면 잔치 준비라고 생각할 정도로 바쁘고 활기찼다. 그러나 동궁만은 예외였다. 원자의 상태는 불안정했다. 열은 내렸다가도 다시 오르기도 하고, 힘차게 물던 젖도 다 토하기도 했다. 태아일 때는 엄마의 영양상태가 곧 아이의 영양과 직결된다. 태어나면 모유가 그렇다. 엄마가 먹는 것은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모유수유하는 엄마들에게 커피도 술도, 매운 것도 제한되는 것이다. 한낱 유모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마치 왕의 수라상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원자 애기씨의 모유 때문일 것이다. 중전의 밥상도 그랬을테지. 원자에게 먹일 것이라 보통 정성이 아니었겠지.
수라를 준비하는 내소주방으로 향했다. 무수리들이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다.
“이 물은 어디서 길어온 것이오?”
“연못에서 떠올립니다. 상궁마마님.”
“원자 애기씨에 올리는 물이라면, 깨끗한 우물물을 써야 하지 않소?”
무수리는 얼버무렸다. 무수리 중의 한 아이가 유독 당황한 눈빛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곁에서 자는 생각시 영이를 깨웠다.
“영이야. 일어나.”
열네 살 되었다는 어린 영이는 한참 잠이 많을 나이였다.
“마마님? 어디 가십니까?”
“내소주방에 가보자꾸나. 조용히 따르거라.”
내가 사극 매니아라서 그런가. 내뱉는 말투가 자연스러워 스스로 놀랐다. 영이와 나는 내소주방에 숨어들어 고양이처럼 조용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궁이 옆 항아리를 열었더니 낯설지 않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발효가 시작된 풀냄새. 내가 아는 냄새였다.
“독초야.”
온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나는 간호학 전공이지만, 한약에 관심이 있어 따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은퇴를 하면 본격적으로 한약을 공부해 볼 작정이었다. 내가 아는 한 이 냄새는 치명적인 독성 식물이었다. 바로 ‘천남성’. 소량씩 장기 복용하면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서서히 장기를 못쓰게 만드는 약성. 알뿌리에는 사포닌, 옥살산 캄슘 같은 성분으로, 기도와 복부 장기에 부종을 일으켜 호흡장애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천남성을 맨손으로 만져도 가려움증, 알러지, 물집 등 피부 반응이 나타난다. 공식적으로는 사약을 만들던 바로 그 약초다. 아무리 미약해도, 반복되면 아이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그 위험한 약초를 발효시켜서 눈가리고 아웅 하는 중이다. 이런 걸, 임금의 수라를 만드는 내소주방 아궁이에 버젓이 들여놨다니. 그것도 조선 시대에. 이건 역적의 음모가 아닌가.
“마마님. 이 흉측한 것이 왜 여기 있는 겝니까.”
영이가 덜덜 떨며 물었다.
“원자 애기씨가, 세자 저하가 되고 나아가 왕이 되는 걸 볼 수 없는 사람.”
며칠 후, 원자는 또 열병을 앓았다. 밤새 고열과 발작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거였다.
아이의 젖어미로써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소주방에서 들이는 것은 물 한잔도 그냥 넘기지 않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건만. 의원을 불러야했다. 나는 시위하듯 아이를 안고, 외쳤다.
“전의감 부제조를 불러 주시오. 다른 의원은 안되오. 부제조여야 하오.”
전의감 부제조, 그가 나타났다. 김지윤. 며칠 전 연못가에서 만난 사내. 내 전 남편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 하지만 전혀 다른 눈빛을 가진 남자. 그 남자가 불려왔다.
“아이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독...”
그는 순식간에 내 말을 막아섰다.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원자 아기씨께 물 한방울, 약 한 첩 쓰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제가 직접 조제하겠습니다.”
비겁하고 못난 내 남편의 얼굴을 한 남자인데, 나는 저 남자를 믿을 수 있는가?
동궁전을 나서며 그는 내게 속삭였다.
“독이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마십시오. 마마님. 동궁전에는 지붕에도 창문에도 귀가 붙어 있습니다.”
그의 말이 하도 믿음직스러워서 순간 눈물이라도 쏟을 뻔 했다. 다행히 김지윤이 다녀간 이후, 원자의 열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원자를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했다.
“괜찮아. 아가. 유모가 있잖니. 내가, 널 살릴거야.”
원자가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배냇짓이라고 하는 건가.
“아가, 꿈에 엄마라도 찾아왔나?”
3화. 후궁들의 전쟁
원자의 병세가 나아졌다. 열이 내리고 숨소리도 고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약조한 대로 전의감 부제조는 원자의 약을 손수 지어 보냈다. 다른 사람 손을 타지 않도록 생각시 영이가 매일같이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나는 밤낮없이 원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꼭 쥘 때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궁궐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전이 세상을 떠난 그 거대한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지, 후궁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날은 어딘가 공기도 싸늘하게 느껴졌다. 궁의 기나긴 복도를 지나는 궁녀들의 발걸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원자의 병이 나았다는 말이 사실이오?"
왕의 후궁, 그것도 가장 총애한다는 정귀인이었다. 서늘한 미인형의 정귀인은 원자보다 두 살 위 왕자를 낳은 터라,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정귀인이 동궁을 찾은 그날은 햇살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방안으로 스며든 날이었다. 중전의 사망 이후, 아무도 발길 하지 않던 동궁에 찾아와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흡사 친모 같은 모양새였다. 얼굴은 풀메이크업을 받은 것처럼 화사했지만, 눈동자만은 겨울 호수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벨 듯 날선 시선이 원자를 품고 있는 내게 향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 모두 보모상궁의 정성이옵니다.“
나이 많은 상궁이 대답했지만, 이는 귀인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 상찬할 만하구나. 낮이고 밤이고 원자 애기씨를 품고 있다고.”
칭찬이 아니었다. 가시를 숨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내보이는 거짓 아량 같은 거였다.
“모두 귀인 마마께서 살펴주시는 덕 아닐런지요.”
귀인의 시선을 피해 보고자, 나는 이를 드러내며 어리숙하게 웃어 보였다.
"참으로 귀한 일이로구나. 그런데..."
정귀인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누구든 제 분수를 모르면, 위험해지는 법이지. 특히 궁에서는 말이다. 원자의 보모는 원자의 건강은 물론 양육을 위해서도 애써 주게. 하지만 그렇게 싸고 돌기만 하다가 버릇이 나빠질까 그게 걱정이야.”
‘어따대고 반말이시옵니까. 귀인 마마야. 한참 어려 보이는구만.’
존대도 반말도 아닌 정귀인의 말뽄새에 하마터면 본심이 흘러나올 뻔했다.
그날 밤, 정귀인은 사람을 보냈다. 나를 처소로 청한다는 것이다. 말이 청한다는 거지. ‘냉큼 오너라’와 같은 의미였다. 원자를 영이에게 맡기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손을 놓는 순간부터 마음이 찜찜해졌다. 후궁이 원자의 보모를 처소를 부른다는 것이 썩 개운한 일은 아니지 않나. 사극에서는 그렇던데.
정귀인의 처소는 과연, 화려했다. 궁의 어떤 곳보다 그 사치스러움이 흘러내렸다. 왕의 총애가 후궁 처소의 내부 인테리어까지 다르게 할 수 있는 건가? 붉은 비단 장막에 금실로 수놓은 방석, 향기로운 침향까지. 명나라 황실에서 좋다는 건 다 수입해온 그런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권력의 향기였다.
"상찬을 하기로 하였으면, 바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좀 놀라게 했던가.”
역시나 반존대. 같은 편으로 꼬시고 싶긴 하고,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어 구사하는 현대 사회생활 스킬을 구사하는 정귀인. 나 저런 애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정귀인은 미리 준비된 차를 따라주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우아하고 세심한 손놀림. 차를 많이 따라 본 손이자,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할 것 같은 야무진 손이다. 하지만 차를 내어주는 손에 긴장도 한가득 묻어있었다.
"그나저나 전의감 부제조는 어떻게 아는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모상궁이.”
“...제가 어찌 부제조 나으리를 어찌 알겠습니다. 저는 그저 중전마마께서 신뢰하시던 분이라 하기에.”
"그저? 궁에서는 가장 무서운 말이란 걸 모르느냐.”
귀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찻잔을 건넸다. 찻물은 은은하게 향기가 올라왔다. 녹차도 아니고, 발효차도 아니고, 뭘 블렌딩한 것일까? 은은한 꽃향기, 그러나 저 잔을 받으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내 온 세포들이 아우성 치고 있었다.
"유모라면, 원자의 입에 무엇이 드나드는지도 제일 잘 알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먹으면 안될지도. 그러니 이제 ‘그저’ 라는 말은 하지 말게.”
뭐지? 신종 협박인가? 아니면 제안인 건가? 하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직 정귀인이라는 물증은 없지만, 분명한 심증과 정황을.
"원자를 위해서는 무엇이 바른 길인가, 옳은 길인가. 보모의 선택은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첫째도 원자의 건강, 둘째도 원자의 건강일세.”
귀인은 나 보란 듯 찻잔을 입술에 대고 한 모금 마신 후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귀인 마마, 젖이나 물리는 하찮은 젖어미가 무얼 알겠나이까. 저는 돌아가신 중전마마의 명에 따라 흘러넘치는 젖을 원자 애기씨께 물리는 것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나이다. 그저 목숨 바쳐 원자 애기씨가 성장하도록 하겠나이다.”
“목숨을 바쳐? 젖어미 주제에...그거 참 재미지구나. 아, 봉보부인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그래...오늘은 이만 나가보너라. 또 보자꾸나.”
귀인의 웃음소리가 짧게 그쳤다. 밤하늘에 까마귀 울음도 뚝 그쳤다. 정귀인의 처소를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아, 망한거 같다. 정귀인, 보통 요망진 것이 아니로군.
다음 날 영이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마마님! 큰일, 큰일입니다. 세자 저하 옷고름에... 흉한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뭣이라?"
잠시 눈을 붙이던 나는 버선발로 달려갔다. 원자의 옷고름에 흉충이 들어있었다. 말라붙은 지네 한 마리가 옷고름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살아있는 거라면 모를까. 약재로 쓰기 위해 말려둔 지네 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다혈질 영이는 화가 나서 방방 뛰었다.
분명 경고였다. 누구 짓인지는 알겠고, 이제부터 어떻게, 원자를 보호할 것인가. 스물 네시간을 붙어있어도, 원자를 해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더 이상 방어만 할 수는 없겠다...싶었다. 냅다 원자를 품에 안고 대비전으로 향했다. 감히 주상도 윤허 받지 못하면 들지 못하는 대비전에 원자를 앞세워 쳐들어 간 것이다.
"감히... 보모상궁 따위가 예가 어디라고. 정녕 죽고 싶으냐.”
목청 좋은 할머니였다. 대비의 노기 서린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짝 조아렸다.
"대비마마, 원자 저하를 살려주소서. 원자 저하를 해하는 손이 궁 안에 있습니다. 저 혼자서는 원자 마마를 지키지 못하나이다.”
찰나가 억겁 같은 정적이 흘렀다. 대비의 숨소리가 나노단위로 느껴졌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나 하는 것이냐. 네 목숨이 열 개쯤 되느냐. 감히 궁에서 원자의 안위를 입에 올리다니. 어떤 증좌가 있기에 그리 대담한 주장을 하는 게냐.”
원자의 옷고름에 붙어있던 지네. 내소주방에서 떠온 독초 발효액. 마지막으로 전의감 부제조가 긴밀히 전해준 진단서을 내밀었다. 과연 대비가 알아차렸을까. 알아차렸어야 한다. 아니라면, 대비의 뜻도 그들과 같은 거란 말인가. 대비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긴 침묵 또한 영원과도 같았다. 드디어 대비가 그 무거운 입을 뗐다.
"원자의 보모상궁은 들어라. 네게 원자의 안위를 맡기겠다. 하지만 명심하도록 하여라. 단 한 번이라도 원자가 위험에 빠진다면, 그날로 너는 이승과 하직하게 될 것이다.”
“네...제가 무슨 힘이 있어...”
“네가 원자를 지켜준다면, 내가 너를 지켜주지.”
과연 궁궐 안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대비다운 선택이었다. 내부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그러면서도 그림자처럼 나를 지키겠다는 1타 3피. 대비의 노련함에 무릎을 쳤다. 한 수 배웠나이다.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목숨 걸고 원자 마마를 지켜내겠습니다.”
동궁으로 돌아온 나는 원자의 자그마란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 생명이 가득한 어린 손.
"아가. 우린, 살아남는다. 반드시.“
그때, 창 너머 어둠 속에서 뭔가 스르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사라져갔다.
‘적인가, 친구인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지금 어딘가에 나를 지켜주는 눈이 있다. 적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움직일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믿음이 생겨나는 그런 밤이었다.
4화. 내소주방의 쥐새끼
지난밤, 동궁전.
어둠 속에 움직이던 누군가는 흔적을 남겼는지도 모른 채 도망을 쳤다. 작고 값비싼 것. 나비 장신구였다. 그것은 후궁, 정귀인 가채에 시그니처처럼 사용하는 거였다. 정귀인의 가채 하나는 현대로 따지면 소형 아파트 열 채 값은 될 정도였다. 그럼 장신구 하나는 얼마인 건가. 필시 정귀인의 사주를 받은 자가 쥐새끼 노릇을 하다 도망을 친 것이리라. 그런데 너무도 허술하지 않은가. 정귀인이 보낸 자가 아니라면, 누가 정귀인의 짓이라고 나를 속이는겐가? 너무 사극톤인가? 아무튼 나는 이제 대비로부터 허락을 받은 몸이었다.
“원자의 보모상궁, 강이단. 너를 특별히 내명부의 감찰로 명한다. 단, 네 임무는 단 하나. 원자를 지키고, 원자를 해하려는 자도 밝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너의 안위는 내가 보장하마.”
원자의 보모상궁만으로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감찰이라니.
“영이야, 오늘은 수라간에 가지 말거라.”
“하오나, 마마님. 원자 애기씨의 알밤죽은 반드시 제가 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허나 네가 원자 애기씨 죽을 쑨다는 것도 누군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영이를 원자 곁에 남겨 두고 홀로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소주방 뒤 항아리에서부터 찬합을 씻는 수라간 우물까지. 모든 길목을 두 발로 다시 훑어 나갔다. 어둠 속 궁녀 둘이서 차판을 들고 옮기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전각 뒤로 몸을 숨겼다. 궁녀들의 차판에서는 은은한 향이 퍼졌다. 뜻밖에도 나는 그 향을 알고 있었다. 몸을 무겁게 하고, 기운을 흐리게 하는 향. 여인들이 잉태를 피할 때 쓰는 약초에서 나는 향이지만, 향이 그윽하여, 본래 정체를 숨기는 향. 미향이었다. 두 궁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 차, 향 너무 좋다.”
“그럼. 귀인마마께서 하사하시는 차니까, 좋은 거겠지. 소용마마께서 좋아하는 차라서 선물하시는 거라잖아. 소용마마 드시고 남으면 우리도 한 잔 마셔보자.”
최근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부상하고 있다는 채소용의 궁녀들인 듯했다. 그런데 정귀인이 차를 선물했다고? 정귀인은 차와 향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채소용의 잉태를 막기 위해, 선물을 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길로 전의감 김지윤을 찾았다. 자주 보다 보니, 전남편과 닮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보여서 부대낌이 덜어졌다.
“부제조 어르신. 부탁이 있어요. 원자 애기씨의 모든 약을 제가 직접 챙길 수 있도록, 문서를 만들어 주세요.”
“마마님, 만약 그런 문서가 밝혀지면 궁 안의 모든 권력과 맞서게 될 수도 있어요. 특히 정귀인이 마마님을 가만 둘리가 있겠습니까. 대비마마께서도 노여워하실겁니다.”
“이미 맞서고 있어요. 대비마마라면 괜찮아요. 윤허하신 일입니다.”
“대비마마가 윤허 하셨다구요?”
김지윤은 잠시 고개 숙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내소주방의 식재료는 물론 전의감 약재 목록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했다. 문서에는 대비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내가 내소주방에 들어섰을 때, 담당 상궁은 잔뜩 부어있었다.
“보모상궁께서 내소주방을 뒤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여기는 주상 전하의 수라를 짓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원자 애기씨께 올리는 음식도 만들어지지요. 이제 여리고 어린 원자 애기씨가 모유와 함께 미음도 드실 때가 되었으니, 각별히 신경 쓰라는 대비마마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대비마마라는 말에, 상궁은 순순히 기세를 꺾는 모양새였다. 내소수방은 과연 왕을 위한 부엌이었다. 전국에서 진상 올린 최고의 식자재가 모여있었다. 원자의 유아식 때문에 과일과 밤, 고기의 보관도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모두 최고였는데, 식자재 창고는 생각보다 관리가 부실했다. 활짝 문을 열어젖히니 상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람은 물론, 온도 관리도 각별해야 하는 곳이 아니던가. 백성의 고혈을 짜낸 진상품인데, 관리가 이토록 소홀하다니. 누가 일부러 허술하게 관리한 것 같았다. 쥐새끼가 드나들 수 있도록.
“설마하니, 식자재에 손을 대는 궁인은 없겠지요. 진상품에 손을 대면 역적이 아닐런지요. 설마 쥐선생의 역적질을 보고도 모른척 한 것은 아닐 것이구요. 우선 쥐부터 잡아들여야겠군요.”
내소주방 책임상궁은 귀까지 빨개지더니 변명에 급급했다. 각 처소에 들어갈 기호품도 나왔다. 그중에는 어제 소용에게 올린 차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차가 미처 치우지 못한 중전의 찬장에도 들어 있었다. 나는 차가 담긴 합을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귀인마마께서 선물한 것입니다. 주리를 틀 일이예요.”
“이 차는 독은 아니지만, 아주 위험한 것이지요. 잉태를 막고, 여자의 기운을 앗아갑니다. 소용 마마께서 이런 걸 드시고 있었다는 걸 알면 주상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게다가 귀인 마마 선물이라구요. 허허 이거 종사가 끊어질 일이니 반역 아닙니까.”
나는 내소주방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제대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석이 정귀인 귀에 들어가면 조바심이 날 것이다. 조바심이 나면 뭔가 빨리 일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실수가 생길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소문은 발에 바퀴라도 달린 듯, 궁궐 구석구석 퍼질 것이다. 제발,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동궁으로 돌아왔다. 나의 아이 곁으로.
“아가, 넌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 자리에 오르는데 방해물은 내가 치워주마.”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용상에 앉은 젊고 훤칠한 임금.
임금이 벌떡 일어나 내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꿈속에서도 나는 울고 있었다.
5화. 붉은 젖
울다가 웃다가...기분 좋은 꿈이었다. 바라고 바라던 꿈이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그러나 눈이 번쩍 뜨였다. 요며칠 평온했던 원자의 몸이 다시 끓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작디작은 손은 내 옷고름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째서. 위험 요소를 제거했는데, 네 곁으로 얼씬도 못하게 했는데. 어째서.’
“괜찮아요. 원자 애기씨 여기 유모가 있답니다.”
불안에 떠는 듯한 어린 원자에게 젖을 물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짝 동여맨 가슴을 풀고 아이를 안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원자는 젖꼭지를 물다가 뱉더니, 다시 물지않았다. 그제야 내 가슴을 바라보았다. 피였다. 아이의 입가에도 피가 섞여 있었다. 젖이 아니라 피였다.
“이게 뭐지? 내가 병이 난 건가?”
잠자던 영이를 깨워 원자를 맡겼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슴에 별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내. 모유에 피가 나오는 경우는 어떤 경우였지?’
유방 모세혈관 파열, 유방 내부 출혈, 면역력이 약화 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정도 상식으로는 될 문제가 아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동이 트자마자 영이를 통해 전의감에 전갈을 넣었다. 부제조 김지윤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인적이 드문 후원에서 김지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지윤은 안절부절하더니, 내가 나타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마님,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전의감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기도 하겠지만, 나으니. 혹시 모유에 혈이 섞이는 일은 어떤 경우입니까.”
“혈이라뇨? 피요?”
김지윤은 자신이 뱉은 ‘피’라는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내 가슴을 쳐다보았다.
“그...그게 유선이 막히거나, 울화로 혈이 터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혈유가 아이에게 해가 되지는 않습니까?”
“피 자체는 문제 되지 않지만, 젖이 감염되었거나 한다면 그건 아이에게 바로 영향이 되지요.”
말을 멈춘 김지윤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마마님 일입니까. 혈유가 나왔습니까. 어제 특별히 드신 것이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떠올랐다. 아무래도 우물물 그대로 마실 수가 없어, 영이에게 보리를 한되 넣고 끓여오라고 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뭔가 먹은 모양입니다. 확인부터 해보겠습니다.”
그길로 동궁으로 돌아가 보리차가 들어있는 탕기를 열어보았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영이가 울고 있었다.
“마마님, 원자 애기씨가 설사를 하십니다.”
나는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설사 양상은 어떻더냐. 냄새는 어떤 것이냐.”
“묽습니다. 소변처럼 줄줄 새어 나옵니다. 이를 어쩝니까.”
“어서 가서, 전의감 부제조를 모시고 오너라. 어서!”
김지윤이 뛰어왔다. 김지윤에게 보리차를 마신 탕기 채로 내어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모르는 일입니다. 탕기까지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원자 애기씨의 설사부터 잡아주세요.”
김지윤은 들고 온 탕약을 원자의 입에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침착하고도 믿음직스러웠다. 원자의 엄지발가락 양쪽에 침도 꽂았다. 그리고 내가 내어준 탕기를 소중한 것인 양 가슴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기를 가져가 독극물 반응이 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마마님도 조심하십시오. 잘은 모르겠지만, 그릇에 어떤 약재를 입힌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의심되는 건 황련과 백부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약재입니다. 단독으로 썼다면 해로운 약이 아니지만, 섞이면 해롭습니다.”
“그게 혈유를 발생시킨 건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른이라면 모를까, 원자 애기씨한테는 위험하죠.”
“역시, 저를 노린 게 아니라… 원자를 노린 것이군요.”
“그렇습니다만, 원자 애기씨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마마님 역시 무사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마마님과 원자 애기씨를 동시에 노린 겁니다.”
태아 때부터 치밀하게 원자를 공격하고 있다. 중전을, 지금은 나를 이용해서. 엄마의 몸을, 유모의 몸을 이용해서 이 죄없는 아이를 죽이려 하고 있다.
“미안하다. 아가. 널 지키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너를 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 나의 손을 붙들었다. 마치 모든 걸 알아듣는다는 듯이.
6화. 후궁의 독배
깊은 밤, 원자는 고요히 잠들어 있다. 아이의 모습이 천진할수록 나의 속은 점점 더 타들어 갔다. 내 몸은 이미 나만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내 몸을 통로로 삼아, 원자의 몸을 해하려 한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저열한 방식이었다.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손은 닿는다는 경고를 보냈겠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
다음 날, 아침.
일찍 몸을 움직여 전의감을 찾았다. 김지윤이 가져간 탕기의 약재 분석을 막 마친 시간이었다. 꼬박 밤샌 모양이었다. 눈이 벌게진 김지윤의 얼굴을 보며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마마님,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백부자와 황련이 모두 검출됐습니다. 탕기 통째 약재를 푹 담궜다고 보면 됩니다.”
“보리차가 아니라, 그릇이 문제라구요.”
“예. 그릇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동궁전의 모든 그릇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약재를 내어 드릴 터이니, 그릇을 모두 끓이십시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릇은 원래 동궁전에 있던 건가요? 어디 외부에서 왔다면...”
김지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동궁전의 그릇까지 모두 챙길 여력이 없었다. 내가 놓친 것이다. 내소주방으로 달려가 동궁전에 들이는 모든 그릇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궁이 또 유난이다 싶은 얼굴로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동궁전의 그릇은 언제부터 쓰던 겁니까.”
“중전마마께서 돌아가시고, 귀인마마께서 동궁전의 그릇을 모두 바꾸라 명하시며 새그릇을 내려 주셨지요. 왜요. 이번엔 또 그릇이 문제입니까. 다 깨버리기라도 할 겁니까.”
쿵.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역시, 당신이었군. 정귀인. 궁에 입궐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 되고, 지금은 빈의 자리를 따놓은 여자. 아니다. 정귀인은 어쩌면 중전의 자리를 노리는 것일지 모른다.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으니...어쩌면 정귀인은 대비가 되려는 것일지도. 임금의 정실 아내가 될 수 없다면 임금의 모후가 되겠다는 것인가.
영이에게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다시 보리차를 끓여오라고 하였다.
“어제도 보리차 드시고 안 좋으셨는데, 또 보리차를요. 그러나 원자 애기씨 또 탈 나면 어쩝니까.”
영이는 거의 울듯한 얼굴로 하는 수 없이 내소주방으로 건너갔다. 영이가 차기에 보리차를 들고 오자, 나는 그 차기를 들고 일어섰다.
“마마님, 그걸 들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
영이가 놀라며 물었다.
“기운 좀 쓰러 가자꾸나.”
나는 비상한 마음으로, 정귀인의 전각으로 향한 것이다.
정귀인의 전각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정귀인의 시녀 하나가 차기를 들고 내실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동궁전에서 들고 온 것과 같은 문양의 차기였다.
“야심한 시각에, 동궁전 보모상궁 마마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나를 아시는가. 나는 자네를 처음 보네만.”
정귀인의 시녀는 입을 샐죽거렸다. 정귀인이 동궁전을 찾았을 때도 저 시녀와 함께였다. 눈빛이며, 날렵한 걸음걸이 하며 사실 모르기 힘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놓쳤을까. 영이를 통해 시녀에 대해 미리 파악해 두었다. 시녀의 이름은 홍나. 정귀인의 보좌 시녀로 오른팔 같은 아이라고 했다.
“귀인마마를 알현할 수 있겠나. 좋은 차가 있어 올리고 싶은데.”
“이를 어쩝니까. 마마님. 귀인마마께서는 오늘 곤하다 하시며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를 것이지. 이토록 불을 다 밝힌 전각에서, 찻물을 들고 들어가면서, 전각의 주인이 잔다고?
“동궁전의 차기와 어찌 그리 같은가. 같은 장인이 빚은 건가 보오.”
“그런가요. 차기를 좀 아시나 보옵니다. 마마님.”
“아니네. 무지렁이가 알게 무언가. 그저 튼튼하고 쓸모 있으면 되지. 그래도 좋은 걸 알아 보는 걸 보니, 궁에 들어와 내 눈이 많이 높아졌나보구먼.”
“마마님은 참, 웃전들처럼 말을 하십니다.”
‘내가 궁중사극을 많이 봐서 그래.’
차기를 들고 돌아 나오려다, 홍나를 불러 세웠다.
“참, 이 장신구 자네 것이 아니던가? 내, 떨어진 걸 주웠네만.”
계단을 오르던 홍나가 흠짓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천천히 고개를 돌린 홍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참으로 어여쁜 장신구이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장신구를 어찌하겠습니까. 딱 봐도 집 한 채 값은 너끈 할 텐데요.”
“집 한 채 값이라니!”
홍나의 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간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이 장신구에 대한 모독일세. 모르긴 몰라두 사대문 안 기와집으로 족히 열 채는 가능할걸세.”
“어머나 그런가요. 그리 비싼 장신구는 처음 봅니다.”
홍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너로구나. 이처럼 귀한 걸 잃었으니, 다시 찾으러 오겠구나. 그래 오너라.’
나는 차기를 들고, 내소주방으로 갔다. 전각 주인들의 그릇이 놓인 그릇장마다 담겨있었다. 정귀인의 장을 열어 보니, 과연 동궁전의 그릇과 구성이 똑같은 그릇이 한 벌 놓여있었다. 동궁전의 그릇 중, 어떤 것이 오염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모두 바꾼다. 정귀인의 그릇과. 밤이 길고 길 터였다.
제7화. 쓰러진 왕자
밤새 종종거리며 그릇장을 오갔다. 나야말로 내소주방의 쥐새끼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 말할 수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이에게조차도. 정귀인의 장에 꽂힌 그릇은 동궁전의 그릇과 색도, 크기도, 문양도 거의 같았다. 아니, 동일했다. 애초에 똑같이 두벌을 맞춤 주문을 한 것이다.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동궁전 그릇들을 조심스레 포개어 보따리에 싸서, 정귀인의 그릇장으로 옮겼다. 정귀인의 그릇장 그릇들을 다시 싸서, 동궁전 그릇장으로 옮기었다.
꼬기오. 꼬꼬꼬꼬.
닭이 울고 그제야 동이 터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에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원자 곁을 지켰다. 아직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것 같아, 원자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다. 내 속도 모르고 아이는 연신 젖을 더듬었다. 대신 밤으로 미음을 쑤어 한 모금씩 떨어뜨려 주었더니, 잘 받아먹었다. 자식 입에 먹을 게 들어가는 게 이런 마음이려나. 그럴수록 정귀인의 시녀, 홍나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다. 정귀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오늘 밤, 다시 찾아올 것이다. ’
깊은 밤이 되자, 누군가 동궁전에 숨어들었다. 목소리도 기척도 없이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인물.
“날 지켜보고 있었나요.”
그림자는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 대신,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정귀인의 시녀 홍나, 달포 전 자하문 밖, 사가 출입. 부엉재에서 도자기 수취.’
그래, 동궁전의 그릇은 모두 진상품도 아니고, 선대부터 내려온 것도 아닌, 정귀인의 사사로이 사들인 것이다.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거 맞나요?”
그림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한 짓도 봤겠군요.”
그림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거면 됐다.
문제는 다음 날, 터져버렸다.
정귀인의 아들, 4살 된 왕자 흥연군이 피를 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야말로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다. 정귀인은 원자의 유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금군이 동궁전을 둘러싸더니, 유모 강이단을 끌어내었다. 바로 나였다. 그러나 의금부로 압송되고 보니, 전의감 부제조, 김지윤도 끌려와 있었다.
“동궁전 보모상궁, 강이단은 전의감 부제조 김지윤과 공모하여, 왕자에게 해로운 독극물을 제조하였다. 죄를 고하라.”
정귀인은 그릇이 바뀐 것을 모르는가. 아니면 차마 그릇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나를 잡아 온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나도 깜짝 놀랐다. 그릇이 귀인의 어린 왕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기야 원자가 영향을 받았다면 왕자가 마찬가지였으리라. 정귀인이 더욱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지 아들 아픈 거 알면, 남의 아들 아픈 것도 알아야지.’
어린 원자를 그토록 오래 괴롭혔다는 것이 더욱 용서되지 않았다.
“증좌가 무엇이오. 대체 원자의 유모인 내가 대관절 왜! 흥원군 마마를 해한단 말이오.”
종사관은 나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원자의 유모는 어미를 잃은 원자를 무기 삼아, 주상전하의 성은을 입고자 획책하고, 정귀인은 물론, 주상전하까지 해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 내연남 전의감 부제조 김지윤을 꼬드기어 불량한 약재를 처방받았으니, 그 죄는 과연 역적의 죄라 할 것이다.”
알고 보니, 정귀인은 스토리텔링의 귀재군. 내연남이라니, 성은이라니!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웃어? 보통 뻔뻔한 년이 아니로구나. 여기가 어딘줄 알고 감히 웃음을 흘리느냐. 왕자의 탕약에 사용된 약재가 전의감 부제조 김지윤의 처방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부제조, 직접 말하라. 탕약을 네가 처방하여 조제한 것이 맞느냐?”
“아닙니다. 저는 흥원군의 약을 조제한 적이 없습니다. 전의감의 기록을 확인해 주시옵소서.”
김지윤은 고개를 저었다.
“처방? 그릇이 아니고 처방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청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소주방으로 가서, 귀인 마마의 그릇과, 동궁전의 그릇을 가져와 주십시오.”
김지윤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릇이 독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릇을 가져다 주십시오.”
“그것은 자백이더냐. 오냐. 좋다. 당장 내소주방에서 정귀인의 그릇과, 동궁전의 그릇을 가져오라.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와야 할 것이다.”
의금부에 그릇이 펼쳐졌다. 똑같은 두 개의 그릇 세트. 그러나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증표는 없었다.
그때 김지윤이 제안하였다.
“제가 그릇을 조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그릇 중에 흥원군 마마의 옥체를 상하게 한 것이 있는지 찾아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