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종로 e스포츠 경기장에 나타난 그림자
종로의 밤은 드높은 건물들의 유리창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가지각색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자리한 한 e스포츠 경기장,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호흡이 한 데 엉켜 파도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한쪽이 탄식을 내뱉으면 다른 한쪽은 환호를 지르고, 한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면 다른 한쪽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오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관중석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소리는 콘크리트 벽을 울리며 반향을 남겼고, 그 진동이 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스며들었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었고, 무르익은 열기가 후끈했다.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박혀 있었다.
그 화면은 수십 개의 손가락 끝에서 번개처럼 튀어나오는 명령들을 그대로 비추었다.
도윤의 손가락도 그중 하나였다.
이도윤, 프로게이머 이름은 ‘버텍스(Vertex)’. 그는 노련한 베테랑이자 서울 솔라리스 팀의 주장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건반을 현란하게 두드릴 때마다 모니터 속의 캐릭터는 전장을 이리저리 누비며 움직였다.
마우스를 쥔 손에는 옅은 땀이 배어 있었으나,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온정신은 오직 끊임없이 번뜩거리는 화면과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동료들의 짧고 단호한 목소리에 기울어 있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해.”
“빠진 스킬 확인해줘.”
“나 지금 가는 중!”
낮게 흘러나오는 음성들은 서로를 묶는 실처럼 팽팽했다.
각자의 리듬이 한순간에 맞아떨어질 때, 마치 다섯 사람이 아닌 하나의 생명체가 그곳에 존재하는 듯했다.
순간 해설자의 긴박한 목소리가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내렸다.
“현재까지 양 팀의 골드 차이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투, 이번 전투가 바로 승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 말에 관중석이 요동쳤다. 도윤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 소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묘한 힘이었다. 키보드 위의 손가락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그는 확신했다. 이번 싸움,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지금 좋아. 천천히 해!”
“앞쪽부터 보자, 앞쪽부터!”
그때였다. 도윤의 목덜미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잘못된 듯한 강렬한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해설자의 목소리도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지온 선수……?”
박지온, ‘지온(Zion)’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선수명으로 쓰고 있는 그는 팀의 막내이자 늘 위기에서 길을 열어 팀의 숨통을 틔우는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캐릭터는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그 빈틈을 파고들었고, 한순간에 전황은 뒤집히고 말았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팀의 캐릭터가 하나둘씩 무참히 쓰러지기 시작하는 걸 보며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쳤다.
그렇지만 이 경기가 간절한 것은 도윤만이 아니었다.
승기를 잡은 적 팀은 승리를 굳히기 위해 도윤을 끈질기게 쫓아왔다.
결국, 수 초간의 추격전 끝에 도윤의 캐릭터까지 사망하고 말았다.
“아, 버텍스까지 잡히면서 이렇게 서울 솔라리스가 전멸합니다!”
캐스터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믿을 수 없다는 숨죽인 웅성거림이 경기장 안을 가득 메웠다.
대형 스크린은 방금 전투의 다시 보기 영상을 띄워줬고, 해설자는 그를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분명 초반 싸움 구도는 서울 솔라리스 팀에게 좋아 보였는데요. 여기서 지온 선수가 살짝 튀어나온 순간을 스톰엑스 팀이 놓치지 않았습니다! 스킬 연계를 맞고 어쩔 새도 없이 순식간에 터져 버렸어요.”
“지온 선수가 저런 포지션을 잡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는데요.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누가 봐도 전투의 패배 요인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지온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도윤은 자신의 캐릭터가 부활할 때까지 의자에 뻣뻣이 붙들린 채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캐릭터가 부활하기도 전, 지켜야 할 거점에 상대가 도착했고, 그대로 게임은 끝나버렸다.
얼핏 돌아본 지온의 얼굴은 참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경기는 리그의 준결승전으로, 시즌 내내 공고히 1위를 지켜온 스톰엑스 팀과 좀처럼 4위에서 벗어나질 못한 서울 솔라리스 팀이 맞붙었다.
전문가들은 도윤이 속한 서울 솔라리스 팀이 스톰엑스 팀을 상대로 단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서울 솔라리스 팀은 그 누구도 기대치 않은 저력을 보여주며 선전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5판 3선승제의 경기를 다섯 번째 마지막 세트까지 끌고 왔는데, 그 끝이 허무하게 마무리되고 만 것이었다.
“스톰엑스, 정말 강력합니다! 지금 리그에는 한바탕 돌풍이 불고 있어요. 오죽하면 스톰엑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만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 솔라리스도 이번 게임에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스톰엑스를 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과연 남은 경기에서 스톰엑스를 저지할 수 있는 팀이 나올 수 있을까요?”
스톰엑스 팀이 카메라에 대고 세레머니를 남길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반면 서울 솔라리스 팀은 카메라를 등지고 씁쓸하게 개인 장비를 정리했다.
도윤은 짐을 챙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그 실수는…… 정말 지온답지 않았어.’
오랜 동료의 손놀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그것이 단순한 집중력 저하도, 긴장감 탓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문득 떠오른 것은 다시 보기 영상을 보면서 해설진이 남긴 말이었다.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윤이 가방을 들쳐 매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관중석 저편, 수십 명의 인파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그림자라 생각했다. 조명의 각도나 카메라 플래시가 만들어 낸 착시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하기엔 너무도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닮았으면서도 턱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었다.
그걸 목격한 도윤의 심장이 반사적으로 싸늘하게 조여들었다.
주위의 관중들은 오직 스크린만을 주시했고,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기묘한 형체의 검은 눈구멍이 도윤을 관통하는 순간.
그의 귓가에서는 경기장의 소음 멀어지고, 마치 수면 아래 잠긴 것처럼 둔탁한 울림만이 남았다.
형체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지온을 향해 입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상심에 젖은 그를 비웃듯 말이다.
“형, 뭐해요?”
그때, 팀의 동료가 얼어붙은 도윤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도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남들의 눈에는 그 얼빠진 모습이 패배에 대한 미련으로 비쳤다.
그리고 도윤이 관중석을 돌아봤을 땐, 마치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아까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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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벗어나자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감독과 코치진이었다.
이번 경기를 위해 열심히 전략을 구상하며 심혈을 기울인 그들도 아쉬운 얼굴인 건 매한가지였다.
특히, 지온을 향해서는 할 말이 많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눈치챈 지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다들 고생 많았다. 피드백은 들어가서 하는 거로 하고…… 지온인 너무 자책하지 마라. 마지막 실수 때문에 그렇지, 그거 빼면 경기 내내 잘했으니까.”
“그래, 나는 솔직히 그 스톰엑스 상대로 두 세트 따낸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가능성을 보여줬으니까 다음 시즌에 본때를 보여주면 되는 거야.”
어린 지온이 곧바로 눈물을 쏟아낼 듯 울먹거리자 주변에서 위로의 말이 날아들었다.
도윤은 감독과 코치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게임은 이미 끝났고, 여기서 지온을 질책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 게임을 진 것도 온전히 지온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만약 도윤 자신이 조금만 더 잘했다면 지온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고, 어쩌면 게임을 끝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더더욱 내면에 해소되지 않은 분함이 들끓었다.
마치 속에 무언가가 얹힌 듯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스톰엑스를 상대로 두 세트를 따낸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도윤의 목표는 언제나 우승이었다.
우승을 위해서 다른 모든 팀은 빠르나 늦으나 이겨야 할 상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감독과 코치는 내심 현실적으로 서울 솔라리스 팀의 패배를 당연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단지 어떻게 해야 한 세트라도 더 따낼 수 있을지, 다음 시즌에 조금이라도 순위를 높일 수 있을지 전전긍긍한 게 분명했다.
그 선명한 간극이 와닿자 도윤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코치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잠시만 다른 데 들렀다가 갈게요.”
코치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다른 데 어디? 너 뭐, 사고 치려는 거 아니지?”
“아녜요,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금방 들어갈 거예요.”
코치는 도윤의 속이 어지러울 걸 짐작하고 말을 아꼈다.
프로게이머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앞으로 과연 몇 년이나 더 활동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태에서 도윤에게는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에게 이번 게임은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었다.
그런 게임이 엎어졌는데, 팀의 막내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사정을 이해한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진짜 바람만 쐬고 바로 들어오는 거다?”
“네, 그동안 지온이 좀 봐주세요. 쟤 또 인터넷 커뮤니티 보다가 밤새울지도 몰라요.”
지온은 안 그런 척해도 여론을 제법 신경 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온라인에서 지온이 얼마나 죽일 놈이 되어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마지막 실수 장면이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게 눈앞에 선했다.
한숨을 몰아쉬는 코치를 뒤로하고 도윤은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팀원이 ‘형, 어디 가요?’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손만 가볍게 흔들어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도윤도 어디를 목적지로 정해두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경기장 바로 앞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도윤은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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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시작한 게임은 밤 10시가 넘어서 끝나 어느덧 주위가 캄캄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계천 주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도윤은 대중에게까지 얼굴이 알려진 편은 아니었지만, 팬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혹시 몰라 모자를 푹 눌러 썼다.
따듯한 노란빛의 가로등과 푸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청계천은 고즈넉한 운치가 흘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걷고 있던 도윤의 발에 철퍼덕 엎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갑작스레 평온한 시간을 방해받은 도윤은 난색을 보였다.
‘이 희고 복슬복슬한 털 뭉치는 대체 뭐지?’
처음에는 자그마한 강아지인가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다란 귀, 짧고 통통한 꼬리,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토끼……?”
그러자 토끼가 마치 도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홍옥을 닮은 붉은색 눈이 정확히 도윤을 응시해 왔다.
난데없이 길을 가다가 웬 토끼를 맞닥뜨리게 된 도윤은 어리둥절했다.
‘주인을 잃어버린 토끼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토끼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토끼가 입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이봐, 인간. 이 몸과 계약해서 마법 소년이 되어라!”
제2화
청계천에서 만난 옥토끼
도윤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토끼가 말을……?”
“이 몸은 그냥 토끼가 아니다! 무려 달나라에서 온 옥토끼란 말이다!”
토끼는 이제 아예 두 발로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쪽 발로는 불만을 표출하듯 연신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말이다.
도윤은 어안이 벙벙해 오른손을 들어 올려 뺨을 세게 꼬집었다.
선명한 통증이 볼을 엄습해 왔다.
“아야,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데…….”
“왜 인간들은 자꾸 이 몸만 보면 볼을 꼬집는 건지 모르겠군. 그게 귀여운 걸 목격했을 때 지구인의 풍습인가?”
토끼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든 말든, 도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패배의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내가 잠깐 정신을 놓은 건가?’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사람들은 두 발로 서서 말하는 토끼가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히 지나가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도윤이 혼란스러워하자 토끼가 언성을 높였다.
“무례하군! 이 몸은 이 몸이 누구인지 밝혔건만, 인간은 인사도 하지 않다니……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건가?”
“쉿, 잠깐, 잠깐만. 우리 저리로 가서 이야기하자.”
도윤은 남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몰라 우선 그늘진 다리 밑의 계단 쪽으로 토끼를 이끌었다.
‘어쩌면 허공에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라.’
계단에 주저앉은 도윤은 아무 노래도 틀지 않은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았다.
이러면 눈앞의 토끼가 허상이라고 해도, 적어도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으로 보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단, 너…… 달나라에서 온 토끼라고?”
“그렇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서 이 몸에게 계속 반말을 하는 것이냐?”
“그야 당연히 네가 먼저 반말을 하니까 그렇지.”
도윤의 말에 토끼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동그란 얼굴에 올망졸망한 이목구비가 구겨지자 도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영문 모를 상황에 한껏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도윤은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채 물었다.
“네 정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그러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너를 못 보는 듯하던데…….”
“그건 우리의 위대한 기술, 루나리안 홀로그래피 때문이다!”
“루나리안 홀로그래피?”
생소한 명칭에 도윤이 고개를 기울이자 토끼는 가슴팍 부근의 털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그마한 정육면체를 꺼내 들었다.
정육면체는 유리처럼 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그 속에 청록색 빛으로 발광하는 광석이 맥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루나리안’이라고 불리는, 달에서 거주하는 외계 종족이다.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를 읽어 본 적 있나?”
“응, 읽어 봤지.”
“거기서 나오는 시계 토끼도 우리 루나리안 종족이다. 한국에서는 옥토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지. 그만큼 우리는 예전부터 인간과의 교류를 이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토끼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정체가 외계인이라는 걸 알게 된 도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나는 루나리안이라는 외계 종족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들어봤는걸?”
“물론 그럴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면 분란이 일어날 게 뻔하니까. 루나리안 홀로그래피도 그 때문에 개발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토끼, 아니, 토끼 모습의 외계인은 정육면체를 달그락달그락 흔들며 말했다.
“지구에 파견되는 루나리안은 모두 루나리움을 하나씩 지급받는다. 루나리움은 달에서만 채취 가능한 희귀 결정체인데, 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면 다양한 기술을 쓸 수 있다.”
“루나리안 홀로그래피도 그 기술 중 하나인 거야?”
“정확하다, 이해력이 뛰어난 인간이군! 루나리안 홀로그래피는 일종의 위장 기술인데, 인간의 지각 필터를 조작해서 이 몸을 평범한 토끼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이 외계인은 말하자면 한국에서 토끼로 위장 잠입 임무를 수행 중이던 특파원인 것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도윤은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네가 전혀 평범한 토끼처럼 안 보이는데?”
“그게 핵심이다!”
토끼가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다.
“가끔 인간 중 이 루나리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이 있다. 우리 루나리안은 그런 인간과 계약을 맺어 활동하곤 한다.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그래서 날 보자마자 계약 얘기를 꺼냈던 거구나?”
도윤의 말에 토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마법 소년이 되자고 그런 거야?”
“계약을 맺은 인간이 하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마법 소녀, 혹은 마법 소년이다! 옛날엔 이렇게 말하면 바로 넘어오곤 했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에 마법 소녀가 되자고 하면 다들 욕을 하거나 부리나케 도망가더군. ‘이젠 더 이상 안 속아!’라면서 말이다…….”
토끼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도윤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마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너처럼 귀엽게 생긴 마스코트 캐릭터가 뒤통수를 친 적이 있어서 그럴 거야.”
“이 몸은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 선량한 외계인을 무턱대고 의심하다니, 지구인들은 정말 이상하군.”
토끼가 발끈하며 귀를 뻣뻣하게 세웠다.
도윤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스스로 선량한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이 토끼를 경계해야 할지 가늠했다.
그러나 직감이 좋은 편인 도윤에게 지금까지의 토끼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면 그 계약이라는 거 말이야…….”
“관심이 있는가, 인간!”
“정확히 어떤 도움을 주고받는 건지 궁금해. 그걸 듣고 나서 결정하고 싶어.”
도윤이 신중한 어투로 말했다.
마지막 경기가 패배로 끝났으니 시즌이 끝날 때까지 짧은 휴식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훈련을 소화해야 할 도윤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나치게 어려운 일을 요구하거나, 혹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종류의 부도덕한 짓을 시킬 경우, 도윤은 거절할 심산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보여주지. 이 루나리움의 진가를 말이다!”
토끼는 그런 도윤의 속내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듯 그저 신이 나서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징검다리 쪽으로 폴짝폴짝 뛰어나갔다.
도윤은 얼떨결에 토끼를 따라 징검다리를 건넜다.
청계천의 물결은 여느 때와 같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징검다리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 토끼는 자리에서 멈춰서더니 청록색으로 번뜩이는 정육면체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루나리움이라고 불렸던 작은 보석이 빛을 뿜어내더니 이내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를 이루었다.
‘저건 방망이…… 아니, 절굿공이인가?’
아무래도 달에서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말은 저 모습 때문에 나온 모양이었다.
토끼는 두 앞발로 자신의 몸집보다도 큰 절굿공이를 능숙하게 돌리더니 곧 자신이 서 있는 징검돌을 향해 내리찍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내리찍은 부분으로부터 둥그런 원을 그리며 푸른 기운이 뻗어 나갔다.
그러자 청계천은 더 이상 단순한 도심의 물길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이 떠오른 작은 불씨 같은 형체들이 물속을 수놓았다.
그 찬란한 존재들은 강 위를 유영하며 유유히 흘러갔다.
어떤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일렁였고, 어떤 것은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떠내려갔다.
그들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잔잔한 노랫소리 같은 울림이 만들어졌다.
마치 청계천이 수백 년 전부터 간직해온 기억이 물결을 타고 풀려나오는 듯했다.
그러더니 도시의 조명마저 사라지고, 오직 강물이 만들어내는 환한 빛만이 밤을 지배했다.
토끼는 고요히 절굿공이에 손을 얹은 채,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반면 도윤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곤 강 위에서 벌어지는 장관에 시선을 뺏겼다.
“……저게 뭐야? 저기, 빛나는 것들 말이야.”
“딱 한 단어로 정의할 순 없다. 저건 청계천이 품어온 사람들의 추억이자 감정이며 영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것을 ‘소울’이라고 부른다.”
그 순간, 도윤은 아지랑이처럼 어슴푸레한 어떤 환영을 목격했다.
청계천에서 연을 높이 날리던 아이가 실이 끊어지자 연을 잡으러 달리는 환영, 커다란 보름이 뜨는 날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와 다리를 밟으려는 환영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머나먼 옛날부터 청계천은 사람들의 놀이터이자 빨래터였다. 그렇기에 이처럼 소울이 풍족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말에 도윤은 방금 자신이 목격한 환영이 한때 이곳에서 실제로 펼쳐졌던 풍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기쁨 가득한 웃음, 일상적인 인사와 농담에서 비롯된 즐거움,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고여 소울로 응결된 것이었다.
그러니 소울은 단지 과거의 잔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남긴 활기 그 자체이자 살아가는 순간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에너지였다.
그리고 세월은 그것을 지워내는 대신, 더 깊고 넓게 다져 주었다.
긴 시간 이어져 온 공동체의 가닥은 은은하게 서로 얽혀 거대한 별 구름을 이루었다.
그렇게 마치 강이 수많은 물줄기를 모아 바다로 흘려보내듯, 인간의 삶은 끝내 소울로 모여 강물 위를 떠다녔다.
“서울에는 이런 곳이 제법 많다. ‘소울 넘치는 도시, 서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
토끼가 징검돌을 짚고 있던 절굿공이를 떼자 루나리움이 뿜어내던 빛이 줄어들면서 다시 정육면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토끼는 그 정육면체를 청계천에 반쯤 담갔다.
그러자 소울이 하나 둘씩 루나리움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살짝 흐려졌던 불빛이 다시 청록색으로 선명해졌다.
“보다시피 루나리움은 이 소울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가동한다. 그리고 지구에서 우리의 임무는 바로 소울을 저장해서 달로 보내는 것이지. 우리가 소울을 채집한다고 해서 어떠한 이상이 생긴다거나 하진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그제야 토끼가 지구라는 행성까지 찾아오게 된 목적을 알게 된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양의 기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음의 기운도 있는 법이지. 소울이 많은 곳에는 필연적으로 부정한 요괴들이 떠돌기 마련이다. 너도 혹시 본 적 있지 않나? 누가 봐도 기괴하고 이질적인 존재 말이다.”
그에 도윤이 떠올린 것은 경기장에서 본 검은 그림자였다.
경기장이라면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몰린 만큼 소울은 충분히 많을 터였다. 그러니 토끼의 말대로라면 요괴가 출몰하기에 최적의 조건일 게 분명했다.
도윤이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본 토끼가 말했다.
“본 적 있나 보군.”
“그 요괴라는 녀석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도 해? 갑자기 안 하던 실수를 하게 만든다든지…….”
“물론이다. 그 녀석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주변의 소울을 싹 다 마르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기까지 빨아먹고 마니까.”
비로소 모든 퍼즐 조각이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지온답지 않은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요괴에게 홀린 게 맞았던 것이었다.
“우리가 계약자에게 요구하는 도움도, 바로 우리를 대신해 그런 요괴들을 해치우는 것이다.”
“너희들이 직접 그 요괴를 해치울 순 없는 거야?”
토끼는 침울한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요괴를 해치우기 위해선 루나리움을 활용해 기술을 써야 한다. 그런데 짐작했겠지만, 우리 루나리안은 직접 소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루나리움에 한 번 저장된 소울이 다 떨어지면 그대로 요괴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힘을 빌리는 거야?”
“그래, 인간은 직접 소울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중간중간 적당히 휴식을 취하기만 한다면 소울이 떨어질 일 없이 요괴와 싸울 수 있어 우리보다 요괴를 퇴치하는 데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도윤은 토끼의 설명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소울이 게임에서 스킬을 쓰는 데 필요한 마나 같은 거고, 인간은 시간만 있으면 마나 자동 회복이 가능하다는 거구나. 루나리안은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확실히 싸우는 데는 불리하겠네.’
도윤에게는 그게 마치 게임에서 전투에 적합한 캐릭터를 대신 내보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누군가에게는 토끼가 말한 대로 정령과 계약을 맺은 마법 소년이 활약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터였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악의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은 변함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떤가, 이 몸과 계약을 맺는다면 너도 이 몸의 루나리움을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너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뭔데?”
“그건 지금부터 네가 제시해야 한다.”
토끼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도윤은 처음에 말문이 턱 막혔지만, 곱씹어 보니까 원하는 걸 최대한 들어준다는 뜻으로 들려 솔깃해졌다.
도윤이 무엇을 말할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토끼가 덧붙였다.
“보통은 자신이나 주변 지인들을 괴롭히는 요괴를 퇴치하는 데 도움을 바라곤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도윤은 바로 지온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토끼에게 경기장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토끼는 옳다구나 무르팍을 내리치며 외쳤다.
“네가 봤다던 그림자는 요괴가 틀림없다! 그 녀석을 가만두면 계속해서 네 동료의 생기를 뺏어가 다음 경기까지 슬럼프에 빠지게 할 거다.”
“그렇다면 사라진 그 요괴를 쫓아 퇴치하는 걸 도와줄 수 있어? 그동안 너와 계약해서 다른 요괴들을 무찌르는 데 협력할게.”
“좋다, 인간. 계약을 마치려면 지금 보이는 화면의 마지막 칸에 서명하면 된다.”
토끼가 루나리움을 만지작거리며 조작하자 도윤의 눈앞에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화면이 떠올랐다.
네모난 창에는 지금까지 토끼와 나눈 내용이 전부 적혀 있었다.
계약서
인간(이하 ‘갑’이라 한다)과 루나리안(이하 ‘을’이라 한다) 사이에 계약을 체결하고, 다음 사항을 약정하여 성실하게 이를 이행하기로 한다.
제1조 용어의 정의
1. ‘루나리안’이란 토끼의 모습을 하고 달에 사는 외계 종족을 말한다.
2. ‘루나리움’이란 달에서 생산되는 특수한 결정체로, 루나리안이 쓰는 2. 기술의 원천이 된다.
3. ‘소울’이란 인간이 살면서 만들어내는 활기가 특정 장소에 축적된 3. 것으로, 루나리움을 충전하는 에너지원에 해당한다.
4. ‘요괴’란 소울이 많이 모이는 곳에 등장하는 기괴한 존재로, 소울을 4. 마르게 하고 인간에게 해악을 끼친다.
제2조 계약 내용
1. 갑은 을에게 루나리움과 루나리안 기술을 공유받는다.
2. 갑은 을을 도와 마주치는 요괴를 해치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단, 2. 생명에 심각한 지장을 입거나 그 외에 전투가 불가능한 사정이 생긴 2. 경우, 갑은 요괴와의 전투를 포기할 수 있다.
3. 을은 갑을 도와 갑의 동료 ‘박지온’의 생기를 뺏어간 요괴를 추적하3. 고 해치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제3조 계약 기간
이 계약은 계약일로부터 효력을 발휘하며 갑이 동료 ‘박지온’의 생기를 뺏어간 요괴를 해치울 때까지 지속된다.
‧
‧
‧
도윤은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고 제일 마지막 부분을 확인했다.
‘을’이라고 되어 있는 칸에는 토끼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아르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 ‘갑’이라고 되어 있는 빈칸에 도윤은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이도윤, 그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자 화면이 서서히 사라졌다.
“인간의 이름은 이도윤이었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도윤!”
아르테가 밝게 웃으며 제 짤막한 앞발을 내밀었다.
도윤은 허리를 숙여 그 앞발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나 역시 잘 부탁해, 아르테!”
제3화
요괴를 쫓아서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한 햇볕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방안을 가득 밝혔다.
도윤은 기지개를 피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리고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뭐야, 아직 이것밖에 안 됐어?’
어제 숙소로 돌아온 도윤은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돌렸다.
패배의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덧 점심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도로 침대에 누워 모자란 잠을 채우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묘한 꿈을 꿨지. 내가 말하는 토끼랑 계약해서 마법 소년이 되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점차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윤, 일어나라.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
그 익숙한 말투에 도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발치에서 꼬물거리는 하얀색 털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윽고 털 덩어리로부터 뿅 하고 토끼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도윤이 일어나길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배시시 웃는 아르테를 보며 도윤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다면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도윤이 애써 현실 감각을 되찾는 동안, 아르테는 아직도 도윤이 졸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도윤의 허벅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정신 차려라, 도윤!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인 거냐?”
아르테는 찹 하고 두 앞발로 도윤의 뺨을 짚었다.
그 말랑거리는 발바닥의 감촉에 도윤은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아르테……?”
“그렇다. 원래 아무나 이 몸의 이름을 부르도록 두지 않지만, 계약자인 도윤에겐 특별히 허락하겠다!”
에헴 하고 아르테가 뒷짐을 지며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아르테와 계약을 맺었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로 마법 소년…… 아니지, 이 나이 먹고 마법 소년은 좀 그러니까 차라리 퇴마사라고 하자,”
“마법 소년이 어때서 그런가, 도윤! 좀 더 당당해져도 좋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도윤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아르테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내가 정말로 퇴마사가 됐다는 거지?”
“맞다, 그리고 이 몸이 도윤을 위해 맞춤형 능력까지 개발해냈다!”
“맞춤형 능력?”
그러자 아르테가 으스대면서 가슴팍을 뒤적거리더니 루나리움을 꺼내 들었다.
정육면체 안에서 반짝거리는 청록빛은 낮에 봐도 또렷했다.
아르테가 루나리움을 몇 번 만지작거리며 조작하자 도윤의 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어제 아르테와 계약을 맺을 때 봤던 것과 비슷한 푸른색 네모난 창이었다.
“이게 뭐야? 상태창?”
“도윤의 직업이 프로게이머라는 얘기를 듣고 밤사이 준비했다!”
도윤은 자신의 앞에 둥둥 떠 있는 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1
체력: 100 / 100
소울: 100 / 100
집념: 67 / 100
패시브 스킬: 긴급탈출, 루나리안 홀로그래피, 신체 강화
액티브 스킬: 사인검 소환
화면에는 도윤의 현재 상태가 정말 게임처럼 수치화되어 적혀 있었다.
몇몇 항목은 게임에 익숙한 도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몇몇 항목은 도윤에게도 설명이 필요했다.
“우선, 레벨이라고 함은 도윤의 루나리움 친화도와 숙련도를 의미한다. 도윤이 루나리움을 사용해 요괴와 싸워나갈수록 루나리움의 힘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걸 레벨로 표현해봤다.”
“레벨이 오르면 어떤 이점이 있는데?”
“체력과 소울의 한계치가 늘어나고, 새로운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참고로 흔히 ‘궁극기’라고 불리는 강력한 스킬은 6레벨은 되어야지 쓸 수 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6레벨까지는 부지런히 요괴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체력은 요괴의 공격을 받으면 감소하는 수치다. 현재 최대 체력은 100이고, 가득 차 있는 상태다!”
“만약 체력이 0이 되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거야?”
“그렇다, 하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 긴급탈출 스킬도 만들어 뒀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르테의 말에 도윤은 자신의 스킬 중에 있는 ‘긴급탈출’이라는 글씨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봤다.
그러자 새로운 화면이 떠오르며 긴급탈출 스킬의 설명이 출력됐다.
긴급탈출
사용자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경우, 사용자를 안전한 위치까지 순간이동 시킨다.
“패시브 스킬은 도윤이 따로 사용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상시 발동되고 있는 스킬이다. 그래서 도윤의 체력이 0이 된다고 해도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안전한 장소에 피신해서 휴식을 취하면 체력은 다시 회복되니까.”
“그런데 혹시 순간이동 하는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떡해?”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루나리안 홀로그래피가 있는 것이다!”
루나리안 홀로그래피는 아르테가 어제 말한 적 있는 기술이었다.
‘분명 위장 기술이라고 했었지.’
도윤은 ‘루나리안 홀로그래피’라는 글자도 검지로 건드려봤다.
루나리안 홀로그래피
사람들의 지각 필터를 조작해서 사용자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 스킬이 발동 중일 때, 사람들은 사용자가 스킬을 사용하거나, 루나리안과 대화하거나, 요괴와 전투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사용자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단, 기존에 사용자와 이미 아는 사이이거나 사용자 본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경우는 제외된다.
안 그래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요괴를 찾아 돌아다닐 생각으로 곤란했던 도윤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도윤은 내친김에 연이어서 마지막 패시브 스킬인 신체 강화까지 확인했다.
‘대충 어떤 스킬일지 짐작은 가지만…….’
신체 강화
루나리움의 힘으로 사용자의 신체를 강화한다. 전투 시 평소보다 뛰어난 운동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도윤은 설명을 읽으며 세 가지 패시브 스킬이 앞으로 자신이 활동하는 데 필수적이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제 자연스럽게 관심은 액티브 스킬 쪽으로 쏠렸다.
“이건 뭐야? 사인검 소환?”
도윤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갑자기 아르테가 들고 있던 루나리움이 진동하더니 푸른색 기운이 도윤의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도윤은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그 신비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짝이는 빛들은 청계천에서 아르테에게 절굿공이가 되어줬던 것처럼, 도윤의 손에서는 곧고 길쭉한 검의 형태로 뭉쳤다.
‘검신에 뭔가가 새겨져 있잖아……?’
도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을 유심히 바라봤다.
검의 한쪽 면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고, 다른 쪽 면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별자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 몸이 설명해주기도 전에 먼저 써버렸군. 잘했다! 액티브 스킬은 직접 써보는 게 훨씬 이해하기 빠르니까. 도윤의 음성과 연동해 두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스킬의 이름을 말하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가볍게 한 번 휘둘러 봤다.
그 과정에서 반투명한 칼날이 실수로 가구를 스쳤는데, 놀랍게도 아무 일 없이 가구를 통과하고 지나갔다.
“사인검은 오직 삿된 요괴에게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건 우리 루나리안의 기술은 아니고 다른 외계 종족의 기술인데…….”
이어서 아르테는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외계 종족은 지구의 호랑이를 닮은 종족이었다. 루나리안 종족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루나리안이 그 외계 종족을 골탕 먹여서 해왕성에 꼬리를 파묻어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도 비슷한 동화가 있어. ‘토끼와 호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이야.”
“맞다, 그 동화도 루나리안의 얘기가 각색된 것이다! 다만, 동화에는 나오지 않은 후일담이 있다. 꼼짝없이 냉동될 위기에 처한 외계 종족이 루나리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를, 바로 자신들의 기술 중 한 가지를 알려줄 테니까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호랑이 종족을 구해주고 사인검 기술을 알아 온 거구나?”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도윤은 제 손에 들린 검이 다르게 보였다.
‘호랑이의 기운이 담겼다고 하니까 뭔가 시리얼 광고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런 도윤의 발칙한 생각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아르테였다.
“아무튼, 이걸 무기로 요괴를 공격하면 되는 거지? 스킬 자체로 대미지를 주는 게 아니라 일반 공격을 위한 수단을 만들어주는 거구나.”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법 소년의 ‘변신!’ 같은 스킬이라는 거지. 변신 자체로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지만, 변신하기 전까지는 요괴를 때릴 수 없으니까.”
아르테가 도윤의 비유에 맞다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도윤은 그런 아르테가 귀여워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화면에 적힌 ‘사인검 소환’이라는 글씨를 꾹 눌러봤다.
사인검 소환
필요 소울: 10
재사용 대기 시간: 8시간
요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 ‘사인검’을 소환한다. 최대 지속 시간은 24시간으로, 그전에도 ‘해제’를 외치면 언제든 사인검을 집어넣을 수 있다.
필요 소울이 10이라는 문구를 보고 도윤은 자신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100이었던 소울이 어느새 90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짐작한 대로 소울은 스킬을 사용하는 데에 소모되는 게임 속의 마나 같은 개념인 듯했다.
‘별다른 스킬이 없는 당장은 소울이 부족하지 않겠지만, 나중에 스킬이 더 늘어나면 소울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서 사용해야겠네.’
검을 충분히 구경한 도윤이 해제를 외치자 검은 다시 청록색 빛줄기로 변해 흩어졌다.
그리고 ‘사인검 소환’이라는 글자 옆에 ‘8시간’이라는 빨간 글자가 새로 나타났다.
도윤은 그것이 재사용 대기 시간을 의미하며, 시간이 전부 지나기 전까지는 사인검을 다시 소환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환을 해제한 다음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나 보네. 그렇다면 요괴는 하루에 한 마리 정도 잡는 게 안전하겠어.’
이제 도윤이 상태창에서 모르는 항목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아르테, 마지막으로 여기 ‘집념’이라는 건 뭐야? 다른 수치는 다 100으로 꽉 채워져 있었는데, 집념은 아니네.”
도윤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확히 봤다, 집념은 체력이나 소울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레벨이 오른다고 해서 최대치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아르테는 귀를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집념은 궁극기를 쓰는 데 소울 대신 필요한 에너지다. 그래서 아직은 쓸모가 없지만…… 주의해야 할 건, 집념이 100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100을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데?”
“도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르테가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묻자 도윤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유명한 말이잖아.”
“집념은 어떤 목표에 강렬하게 집중하고, 맹목적으로 달려나갈 때 쌓이는 에너지다. 삶의 활기로부터 모이는 소울과는 다르다. 적당한 집념은 도움이 되지만…… 집념이 도를 넘어서는 경우, 요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요괴는 주변의 소울을 먹어치우고 몸집을 불리면서 마침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지.”
그 말에 도윤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집념 수치를 바라봤다.
67이라는 제법 높은 숫자가 화면에 번뜩이고 있었다.
도윤은 그 숫자가 아무래도 지난 게임에서 패배한 이후 자신의 가슴에 맺힌 울분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지금껏 말하지 못했지만…… 도윤, 아마 네 동료를 홀렸다는 요괴도 사실 게임의 결정적인 순간에 네 동료의 집념이 지나치게 높아져서 나타난 존재일 확률이 높다.”
그러자 도윤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것은 항상 인터넷의 날 선 반응에 휘둘리곤 하던 지온의 모습이었다.
특히, 저번 경기는 질 게 당연시되던 1위 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한층 더 승리에 욕심을 내고 바짝 긴장했던 지온이었다.
도윤은 아르테의 추측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도윤이 비장한 말투로 덧붙였다.
“어차피 그 요괴는 내 손으로 해치울 테니까. 그러면 지온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도윤의 상태창에 집념이 67에서 68로 올라갔다.
도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르테는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도윤에게 경고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아르테는 곧 도윤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투지를 발견하곤 다른 말을 꺼내길 택했다.
“좋다, 그러면 우선 내게 짐작되는 곳이 있는데…….”
제4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주친 둔갑 쥐
“아르테, 네가 말한 ‘짐작되는 곳’이 여기야?”
도윤은 주변을 둘러봤다.
일명 ‘문화의 거리’라 불리는 삼청로는 평일 낮에도 사람이 북적였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관광을 온 외국인도 색색의 한복을 입은 채 즐거운 얼굴로 웃으며 떠들었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다양한 언어가 들려왔다.
전통을 유지한 채 다양성이 얽혀든 공간 특유의 생동감이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또한, 기와가 얹혀있는 예스러운 돌담에는 앙증맞은 담쟁이덩굴이 걸쳐져 있었고, 능소화는 줄기줄기 늘어진 채 다홍빛을 뽐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자로 잰 듯 네모반듯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관리된 푸르른 잔디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그 뒤편으로 보이는 국가지정유산인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 조화로움을 이루었다.
그사이에 우뚝 솟은 검은색 기둥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말한 ‘짐작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아르테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현재 네가 쫓는 요괴에 대한 단서는 세 가지다.”
그러더니 아르테가 손가락 한 개를 쭉 펼치더니 말했다.
“첫째, 요괴는 소울이 많은 곳에 나타나고, 소울은 사람이 많은 곳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괴를 찾으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 개 더 늘리며 물었다.
“둘째, 네가 준결승전을 벌였다던 경기장이 분명 종로에 있었지?”
“맞아, 청계천 바로 앞에 있었어.”
“그러면 그 요괴는 아직 종로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르테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한 개 더 늘렸다.
“셋째, 그 요괴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마치 사람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랬지?”
“음, 완전 사람 같지는 않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습이긴 했어.”
“어쨌든 그렇다면 그 요괴는 인간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거기까지 말한 아르테가 가슴팍의 복슬복슬한 털을 해치고 루나리움을 꺼내 들어 절굿공이로 변신시켰다.
“이 세 가지 단서를 조합하면, 우리는 인간형 요괴가 나타나는 종로의 사람 많은 곳을 찾아다니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런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아르테는 청록색 빛으로 이루어진 절굿공이를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그러자 도윤의 눈에 국립현대미술관 주변을 맴도는 반짝이는 소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국립현대미술관의 부지에서 열심히 책을 읽던 규장각의 학자들, 바쁘게 진료를 보는 수도국군병원 의사들의 모습이 환영으로 스쳐 지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역사적 유래가 깊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에 놓여 있지. 그만큼 소울도 풍부하고, 요괴가 나타나기에도 충분한 장소다.”
아르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윤은 사방을 빛내는 소울들 사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기운을 발견했다.
“도윤, 너도 보이나?”
“응, 저 검은색 연기 같은 거 말이지?”
“저게 바로 요괴의 흔적이다. 저걸 따라가면 요괴와 마주칠 수 있다! 네 동료에게 해를 끼친 요괴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음침하게 꾸물거리는 안개는 본격적인 전시가 이루어지는 전시관의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도윤과 아르테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스크린에 미디어 아트 전시가 한창이었다.
그 거대한 전광판 앞에서 아르테의 작은 몸집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르테는 고개가 꺾어질 듯 화면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항상 신기한 걸 만들어내곤 하는군.”
“내가 볼 때는 루나리안의 기술력이 더 대단한데?”
도윤의 대꾸에 아르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 루나리안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열중해도 예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서울에 오고 난 뒤, 예술이 단순히 사치나 오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르테의 빨간 눈동자가 눈앞의 첨단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작품을 투명하게 담았다.
“예를 들어, 경복궁의 단청은 위엄과 질서를 드러내지. 또, 한양 거리의 판소리꾼은 세상살이의 애환을 소리로 풀어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전쟁 이후의 폐허 속에서도 서울의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다시 도시를 세워나갔다. 덕분에 오늘날 서울의 예술과 문화는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고 있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의 벽화부터 무대 위의 공연까지, 예술은 여전히 시민들의 일상을 위로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언어가 됐다.
그것은 이 도시가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생존과 희망의 기록이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의지의 증거였다.
결국, 서울에서 예술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인 동시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도윤과 아르테가 전시된 작품 앞에서 공통된 감상을 나누던 찰나, 누군가 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기요, 프로게이머 버텍스 맞죠?”
돌아본 곳에는 단정한 미인이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였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는데, 저 정말 팬이에요! 저번 경기도 보러 갔었는데…… 혹시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도윤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도윤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나직이 읊조렸다.
“사인검 소환.”
그러자 청록색 빛들이 도윤의 손으로 모여들어 순식간에 기다란 검의 형태를 취했다.
여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곧바로 표정을 구기며 뇌까렸다.
“쳇, 어떻게 알았지? 내 둔갑은 완벽했을 텐데…….”
도윤은 망설임 없이 여자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여자가 제자리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그 궤적을 피한 탓에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여자의 형상이 뒤틀리더니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몸집만 한 쥐였다.
결코 평범한 생김새는 아니었고, 기이할 정도로 앞니가 길며 긁히기만 해도 크게 상처를 입을 만큼 손톱이 날카로웠다.
“둔갑 쥐다! 도윤, 검은 기운의 범인이 바로 저 요괴였어!”
아르테가 소리치자 둔갑 쥐가 도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뒤이어 뾰족한 손톱이 공기를 찢으며 내려꽂혔다.
도윤은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며 몸을 비틀었다.
칼날과 손톱이 맞부딪히는 순간, 불꽃 같은 섬광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번에는 둔갑 쥐의 거대한 앞니가 목덜미를 향해 들이닥쳤다.
도윤은 끝까지 눈을 떼지 않으면서 검 끝을 곧게 찔러 넣었다.
시퍼런 칼날이 앞니와 부딪히며 묵직한 진동을 울려 보냈다.
둔갑 쥐는 좌우로 튀며 벽을 타고 달려드는가 하면, 바닥을 짚었다가 다시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숨을 고를 틈조차 없이 맹렬한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며 단련된 반사 신경이 빛을 발했다.
둔갑 쥐가 정면으로 달려드는 찰나, 도윤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양손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검날에 모여든 빛이 폭발하듯 번쩍이며 둔갑 쥐에게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끼이익!”
귀청을 찢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명상을 입은 둔갑 쥐는 등을 돌려 도윤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윤, 쫓아가자!”
도윤은 아르테와 함께 둔갑 쥐를 따라 전시관 복도를 달렸다.
그러나 둔갑 쥐는 크게 타격을 받았음에도 민첩함을 잃지 않았다.
재빠르고 날쌘 움직임에 둔갑 쥐를 놓치기 거의 직전이었다.
“저쪽이다, 도윤! 저쪽으로 둔갑 쥐를 몰아!”
아르테가 가리킨 곳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도윤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자 둔갑 쥐는 정원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둔갑 쥐의 패착이었다.
지하 전시실 사이의 정원은 천장이 뻥 뚫려 햇빛이 가득 쏟아졌다.
곳곳에 설치된 작은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틀어져 있었고, 싱그럽게 자라난 식물들은 평화롭고 온화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별처럼 빛나는 소울이 빼곡했다.
평상시였다면 그 소울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울 둔갑 쥐였지만, 지금은 도윤에게 이미 타격을 입은 뒤였기에 오히려 소울이 머금은 활기에 짓눌리고 말았다.
힘이 빠진 둔갑 쥐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던 속도를 잃어버렸고, 도윤은 그 목덜미를 낚아챘다.
“잡았다!”
둔갑 쥐가 찍찍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도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흘깃 상태창을 바라봤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1
체력: 39 / 100
소울: 90 / 100
집념: 77 / 100
‘생각보다 아슬아슬했어.’
둔갑 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자잘한 공격을 허용해서 그런지 체력은 어느덧 사십 언저리까지 떨어져 있었다.
반면, 집념은 77이라는 제법 높은 수치로 차오른 상태였다.
도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둔갑 쥐에게 윽박질렀다.
“지온의 생기를 뺏어간 게 네 녀석이냐?”
“지온?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젯밤 종로의 경기장에 나타난 게 네 녀석이냐고!”
둔갑 쥐는 마구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엉뚱한 요괴를 겁박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프로게이머 버텍스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저번 경기도 보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둔갑 쥐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경기를 보러 갔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 우리 쥐들은 모르는 게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얘기도 있지 않나? 그러니 청계천에서 옥토끼가 계약자를 찾았고, 그 계약자가 프로게이머라는 걸 알아내는 정도야 내게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수 있지.”
아르테가 그 반응을 보며 말했다.
“도윤, 아무래도 우리가 쫓는 요괴는 이 녀석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퇴치해야 하는 요괴라는 데는 변함없지.”
“잠깐, 기다려라!”
도윤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 사인검을 높이 쳐들자 둔갑 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억울하다, 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요괴가 아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는 존재다!”
“도움을 준다니?”
도윤은 멈칫했다.
“너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적 있겠지. 나의 분신, 또 다른 내가 한 명 더 있어서 하기 싫은 일을 전부 떠넘기고 싶다고 말이다!”
둔갑 쥐는 도윤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떠들어댔다.
“분명 학생 때는 귀찮은 숙제를 대신시키고 싶다 했을 테고, 프로게이머가 된 후에는 고된 훈련을 대신시키고 싶다 했을 테다.”
“……확실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 우리 둔갑 쥐는 그런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요괴다. 인간은 우리에게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고, 우리는 그 대가로 인간의 모습을 잠깐 빌리는 거지. 이 정도면 서로에게 이득인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둔갑 쥐는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해 승기를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해졌다.
“만약 나를 놔주면 네 모습으로도 둔갑해서 네 일을 대신 해주마! 너는 손톱 한 조각만 내어주면 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손톱 한 조각이면 된다.”
“도윤, 넘어가면 안 된다!”
유혹적인 목소리에 아르테가 도윤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그러나 아르테의 걱정과 달리, 도윤은 단칼에 대답했다.
“아니, 거절하겠어.”
“어째서지? 온갖 귀찮은 일을 내게 떠넘길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겠다고?”
“그래, 왜냐하면 그게 바로 네 수법일 테니까 말이야.”
도윤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너는 대신해서 일을 처리해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성장할 기회를 조금씩 뺏어왔겠지. 귀찮은 숙제, 고된 훈련,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하기 싫은 게 당연한 일이야. 그렇지만 그걸 해내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서 단단해지고, 자신만의 힘을 가지게 되는 거지.”
그러면서 도윤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봤다.
물론 행복하고 기쁜 순간도 있었지만, 견디고 견뎌야 했던 인내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런 고통의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겼더라면 지금의 도윤은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네가 노리는 건 뻔해. 누군가 마땅히 누려야 할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어서 마침내 그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는 것, 알맹이는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텅 빈 껍데기만 남게 하는 것, 그게 네 진짜 목적이지?”
속셈이 전부 탄로 난 둔갑 쥐는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깨닫고 탄식했다.
“빌어먹게 영리한 인간이로구나! 아깝군, 아까워. 조금만 더 구워삶았으면 넘어왔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네게 설득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도윤이 힘 있게 말하자 그 주변으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소울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둔갑 쥐는 애초부터 도윤에게 자신의 회유가 통할 리 없었음을 알아차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최후의 힘을 쥐어 짜내 도윤에게 덤벼들었다.
도윤은 높이 쳐들었던 사인검을 망설임 없이 내리그었다.
단죄의 칼날을 정통으로 맞은 둔갑 쥐는 먼지로 변해 순식간에 흩어졌다.
“잘했다, 도윤!”
아르테의 환호와 함께 어디선가 띠링 하는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도윤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바로 도윤의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이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2
체력: 120 / 120
소울: 90 / 120
집념: 69 / 100
새로운 스킬 획득!
‘레벨 업을 하면 체력은 전부 회복되는 모양이네.’
어쩐지 온몸에 생기가 넘치는 기분에 도윤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도윤, 네가 쫓던 요괴가 아닌 건 아쉬운 일이지만…….”
“난 괜찮아. 처음부터 바로 찾아낼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아르테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도윤은 의연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아르테의 축 늘어진 귀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보송보송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조금은 기운을 차린 듯 다시 쫑긋하게 귀를 세운 아르테가 도윤을 향해 물어왔다.
“첫 전투를 무사히 마친 소감은 어떤가?”
아르테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귀의 움직임에 도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 아마 나 혼자였으면 해치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르테가 도와줘서 가능했어.”
“이 몸이 도와줘서 가능했다고?”
아르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아르테가 정원으로 둔갑 쥐를 몰라고 했잖아. 기억나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둔갑 쥐를 놓치고 말았을 거야.”
그러자 아르테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맞다, 이 몸이 없었으면 둔갑 쥐를 놓쳤을 거다! 감사한 줄 알도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하던 아르테가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걸 보며 도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도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어떻게 처음에 둔갑 쥐가 사람으로 변신한 걸 눈치챈 거냐?”
아르테는 한참 전부터 물어보고 싶던 것을 뒤늦게 털어놓았다.
“네가 둔갑 쥐에게 속아 넘어가 방심했다면 허를 찔려 낭패를 봤을 것이다. 심지어 이 몸의 눈에도 둔갑 쥐는 완벽하게 사람처럼 보였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바로 상대가 요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냐?”
“아아, 그거 말이야?”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루나리안 홀로그래피가 발동 중인데도 나를 인식했다는 건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상대가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나처럼 루나리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별한 사람이거나.”
“만약 후자라면 어쩌려고 그랬나?”
“그야 도박을 한 번 걸어본 거지. 어차피 사인검은 오로지 삿된 것에게만 효험을 발휘한다고 그랬잖아. 아니야?”
그 태연한 어조에 아르테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혹시 상대가 요괴가 아닌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사인검에 다치지 않으리라는 걸 믿고 칼을 꺼내 들었다는 소리였다.
도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게임에서도 항상 그래야 할 때가 있거든.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승부를 걸어야만 할 때 말이야.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를 놓치면 늦어버리니까. 늘 상대보다 한 박자 먼저 움직여야 승산이 있거든.”
아르테는 한참 도윤의 설명을 곱씹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게 네가 가진 강점일지 모른다, 도윤.”
“강점이라고?”
“그 순간적인 판단 능력 말이다. 얼핏 무모하거나 과감해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중요한 상황에서 그 특성이 크게 도움이 될 거다.”
도윤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자신의 강점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아직 사인검을 들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사인검에 박혀 있는 별자리는 도윤의 앞날을 예견하듯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5화
명동 거리를 떠도는 걸귀
“도윤, 얼른 와라. 얼른!”
“알았어, 재촉하기는.”
도윤은 툴툴거리면서도 아르테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바로 이곳이다!”
아르테가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도윤이 고개를 들어 건물 입구의 위쪽에 붙어있는 음식의 사진을 바라봤다.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유일한 위구르 음식점이라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명동성당 뒤편의 한 식당 앞이었다.
아르테가 요괴를 잡으러 가자고 하더니 불쑥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면서 먼저 점심부터 먹을 것을 제안한 게 지금까지의 경위였다.
도윤도 제법 출출했던 참이라 아르테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 안에 들어가 메뉴판을 펼치니 생소한 요리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요리 대부분은 한국어로 풀어서 설명되어 있었지만, 간혹 고유 명사로 추정되는 낯선 단어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위구르 캡슐? 이건 뭐야?”
“위구르 전통 빵을 번역기가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다!”
도윤은 번역기의 오류로 빚어진 해프닝에 킥킥거리며 메뉴를 마저 살폈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은 양고기 필라프, 소고기 볶음면, 그리고 매콤한 닭 요리였다.
“역시 두 명이 오니까 여러 메뉴를 시킬 수 있어 좋다!”
아르테는 맛집 마니아 같은 대사를 외치며 의자에 앉아 발을 달랑거렸다.
양고기 필라프는 밥알 사이로 번지는 기름기가 고소했고, 잘게 썬 당근이 은근한 단맛을 흘렸다. 무엇보다 숟가락을 뜰 때마다 살짝 스쳐 가는 고기의 향이 입맛을 돋우었다.
소고기 볶음면은 수제로 만든 면이 들어갔는데, 굵고 탱탱한 면발이 씹을수록 중독적이었다. 그 위에 얹힌 소스는 각종 향신료가 뒤섞여 복잡한 매력을 풍겼다.
마지막으로 큼직한 접시에 닭고기와 감자가 산처럼 담겨 나온 요리는 마치 한국의 닭볶음탕을 연상시켰다. 양념은 혀끝을 살짝 찌를 정도로 매콤했고, 향신료 특유의 향이 감자 속까지 배어들어 이국적인 인상을 남겼다.
“와, 정말 잘 먹었다.”
도윤은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맞은편에 앉아 접시까지 싹싹 핥아먹을 지경인 아르테를 바라봤다.
도윤의 시선을 알아차린 아르테가 머리를 들자 도윤은 저도 모르게 파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르테, 입 주변에 소스가 다 묻었잖아!”
어느새 아르테의 희고 고운 털은 붉게 물들어 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이런. 닦아달라, 도윤! 나는 어디에 묻었는지 안 보인다.”
아르테의 뻔뻔한 요구에 도윤은 못 이기겠다는 듯 휴지를 꺼내 들어 아르테의 털을 닦아줬다.
루나리안 종족의 털은 특별한지 다행히도 붉은 자국은 금세 지워졌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르테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래서 이 몸이 서울을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정답이다! 서울만큼 여러 나라의 음식점이 공존하는 곳은 정말 찾기 힘들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베트남, 태국……. 서울에서는 수많은 나라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고, 언제나 식도락가로 붐비곤 했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언제나 새로운 음식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색을 덧입히기도 하며 역동적인 식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19세기 고종이 가배 차를 즐겨 마시던 시절에 커피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커피는 직장인들의 필수품이 됐지. 그뿐만 아니라 커피 믹스처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커피도 유행하게 됐다.”
“마카롱에 필링을 가득 채워서 ‘뚱카롱’을 만들기도 하고, 크루아상을 누룽지처럼 바짝 눌러서 ‘크룽지’를 만든 것처럼 말이지?”
아르테는 바로 그거라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먹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함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지닌다. 그러니 밥상에 여럿이서 함께 둘러앉는 순간마다 서울은 새로운 삶을 수용하며, 적응하고, 어울림으로써 다양성을 일궈냈다고 할 수 있다.”
그 말에 도윤은 한 도시의 역사가 식탁 위의 음식과 함께 차곡차곡 쌓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중에서 빚어진 정갈한 음식도, 옛날 교실의 난로 위에서 덥혀 먹었던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도, 방금 도윤이 먹은 이국의 향신료 가득한 요리도 모두 하나의 흐름 위에 있었다.
“그나저나 아르테, 너는 대체 언제부터 서울에 왔길래 고종 시절의 얘기를 하는 거야?”
“그건…… 비밀이다, 도윤! 알려고 들면 큰코다친다.”
아르테는 깔깔 웃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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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거리는 언제나처럼 사람으로 붐볐다.
공중에선 외국인 관광객들의 웃음소리와 젊은 연인들의 수줍은 대화 소리가 얽혀들었다.
상점 앞에는 유행하는 가요가 쏟아져 나오고,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 덕분에 골목마다 허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번졌다.
“명동도 네가 있었다던 경기장으로부터 멀지 않고, 유동인구가 많아 소울도 풍족한 곳이지. 요괴가 꼬이기엔 적합한 장소다.”
“충분히 후보가 될 만하다는 거지?”
“그래, 무엇보다 이곳에도 사람의 형태를 띤 요괴가 모이곤 한다.”
아르테가 루나리움을 절굿공이 모양으로 바꾸더니 바닥을 향해 단호하게 내리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청록색 빛이 퍼져나가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소울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명동이 주택가이던 시절부터 상업가로 부흥한 이후까지 꾸준히 북적거리던 사람들의 환영이 도윤을 감쌌다.
“도윤, 준비는 됐나?”
“물론이지.”
그 틈바구니에서 저번처럼 한 줄기의 검은 기운을 목격한 도윤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배를 채워서 그런지, 마음도 절로 든든한 기분이었다.
도윤은 한 번 크게 심호흡을 내쉰 뒤 나지막이 외쳤다.
“사인검 소환.”
그러자 푸른 빛이 나비처럼 날아들어 도윤의 손에서 뭉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잡이의 감각을 느끼며 도윤은 가볍게 사인검을 휘둘러 봤다.
“좋아, 가자!”
도윤과 아르테가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해치며 검은색 연기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기롭게 박차고 나간 것과는 달리 도윤은 머지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뭐야, 하나가 아니야……?”
바로 검은색 연기가 둘로 쪼개지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것이었다.
“괜찮다, 도윤. 사인검 소환은 최대 24시간까지 지속되니까 한 놈을 먼저 잡은 다음에 다른 놈을 잡으면 돼.”
아르테가 침착하게 말했다.
도윤은 끄덕이며 검은 기운 한 줄기를 따라 추격을 재개했다.
마침내 검은 기운이 다다른 곳은 한 과일 찹쌀떡 노점상 앞이었다.
도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창백하게 말라붙은 몸뚱이에 비해 기괴하게 큰 입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 생김새가 경기장에서 봤던 그림자와도 얼추 비슷해 보였다.
요괴의 입에서는 썩은 음식 냄새와 함께 굶주림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그 외침은 공허했으나, 동시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압박을 주었다.
“도윤, 걸귀다!”
“걸귀?”
“식탐이 무지막지한 요괴지. ‘걸신들렸다’라는 표현에서 ‘걸신’이 바로 걸귀를 칭하는 말이다. 그만큼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놈이니 조심해야 해!”
아르테의 설명에 도윤이 자세를 잡자마자 걸귀가 휙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걸귀가 무작정 도윤의 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날카로운 손톱이 마치 고기를 내리찍는 포크처럼 도윤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도윤은 간신히 사인검의 날로 그 손톱을 막아냈다.
쨍 하는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걸귀는 검에 막히고도 움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미친 듯이 고개를 젖히더니 큰 입을 벌려 도윤을 통째로 삼키려 했다.
도윤은 곧장 몸을 낮추어 걸귀의 이빨을 피한 뒤, 사인검을 단단히 틀어쥔 채 그대로 걸귀의 몸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러자 걸귀가 그 커다란 입으로 히죽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검에 찔렸는데 웃는다고……?’
도윤이 불길함을 감지한 찰나, 걸귀가 바싹 마른 팔을 들어 자신의 몸에 박힌 사인검을 붙잡았다.
도윤은 당황하며 검을 물리려고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건지 검은 마치 바위에 박힌 것처럼 뽑히지 않았다.
오히려 걸귀가 검을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도윤이 그에게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걸귀는 그 상태로 다시 한번 도윤에게 이빨을 드러냈고, 도윤은 그를 피하기 위해 검을 포기하고 멀찍이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은 치명상을 입으면 도망치는 둔갑 쥐랑은 다르다! 제 몸이 상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이야!”
아르테의 말처럼 검을 붙잡았던 걸귀의 손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러나 걸귀는 아픔보다도 도윤을 잡아먹겠다는 열망이 더 큰지 비척비척 도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윤이 경계하며 물러서자 걸귀가 갑자기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끔찍한 울부짖음이 명동 거리를 뒤흔들었다.
불현듯 아르테가 도윤의 뒤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숙여라, 도윤!”
도윤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자 뒤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또 다른 걸귀였다.
‘검은 기운이 둘로 갈라졌던 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무기마저 빼앗긴 도윤은 자신을 향해 입맛을 다시는 두 마리의 걸귀를 상대해야 했다.
비록 그중 한 마리는 중상을 입은 채였지만, 도윤을 물어뜯을 이빨만큼은 멀쩡했다.
‘안 되겠어, 그걸 써야 할까?’
도윤은 재빨리 눈을 굴려 자신과 걸귀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직 아니야, 좀 더……. 좀 더…….’
도윤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마리의 걸귀를 응시할 때였다.
“이놈들아, 이거나 먹어라!”
아르테가 걸귀 쪽으로 무언가를 휙 던졌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언제 샀는지 모를 노점상의 과일 찹쌀떡이었다.
고작 과일 찹쌀떡일 뿐이었지만, 먹을 것이라면 환장을 하는 걸귀의 시선을 잠시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 그 잠깐의 틈이 도윤에게 절실하던 참이었다.
‘지금이야!’
도윤은 두 마리의 걸귀 한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정화의 빛!”
그러자 도윤의 주변으로 눈 부신 빛이 퍼져나가며 걸귀를 뒤덮었다.
걸귀는 그 자리에 쓰러지며 바르작거렸다.
도윤이 쓴 것은, 바로 지난번에 둔갑 쥐를 잡은 뒤 새로 얻은 스킬이었다.
정화의 빛
필요 소울: 50
재사용 대기 시간: 5분
반경 10m 안의 모든 요괴를 향해 정화의 빛을 내뿜는다. 정화의 빛에 닿은 요괴는 일시적으로 행동 불능 상태에 빠진다.
스킬을 처음 확인했을 때, 도윤은 생각했다.
‘범위기에 기절 효과까지 있어서 전투에 큰 도움이 될 스킬이지만, 소울이 50이나 필요해. 소울이 120일 때, 사인검 소환에 10을 쓰고 나면 110이 남으니까…… 많아봤자 하루 최대 두 번. 이 스킬은 정말 신중하게 써야겠어.’
그래서 걸귀와의 전투에서 상황이 위태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스킬을 아끼다가 사용한 것이었다.
도윤의 가슴이 거친 숨으로 들썩였다.
“도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며 자신을 얼싸안는 아르테에게 도윤은 안심하라면서 미소를 지어준 뒤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2
체력: 27 / 120
소울: 60 / 120
집념: 75 / 100
‘레벨이 올랐는데도 둔갑 쥐를 잡을 때보다 적은 체력이 남았어. 둘을 한꺼번에 상대했으니 당연한가……. 체력 한계치가 늘지 않았다면 자칫 패배했을지도 몰라.’
도윤은 가슴을 쓸어내리곤 바닥에 널브러진 걸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걸귀의 몸에 꽂힌 사인검을 힘주어 뽑아냈다.
그게 마지막 타격이 되었는지, 사인검이 박혀 있던 걸귀는 먼지가 되어 곧장 흩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걸귀의 울음을 듣고 등장한, 또 다른 걸귀뿐이었다.
도윤은 그 걸귀의 목에 칼날을 바짝 가져다 대고 물었다.
“네 녀석, 종로의 경기장에서 한 선수의 생기를 빼앗은 적 있나?”
걸귀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 경기장에 먹을 게 있는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친 걸귀가 이어서 덧붙였다.
“우리는 먹을 게 없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 갈 이유가 없지.”
이번에도 지온을 홀린 요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실망하는 대신 사인검을 치켜들었다.
그걸 본 걸귀가 억울하다는 듯 뇌까렸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냐!”
“시치미 떼지 마라! 사람들에게 들러붙으면서 굶주림을 퍼뜨리고 다니는 주제에!”
아르테는 도윤의 옆에 붙어서 걸귀를 향해 호통쳤다.
걸귀는 적반하장으로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냐. 어차피 인간도 우리랑 똑같다!”
“인간이 너희와 같다고?”
“이 거리를 봐라!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명품을 사려는 탐욕스러운 인간들로 득실거리지. 너 자신은 또 어떻고? 너 역시 승리를 위한 욕심으로 다른 이들을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자 도윤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네 녀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몰라.”
“그럴 줄 알았다. 차마 부정하기 어렵겠지!”
담담한 인정에 걸귀가 으스댔다.
그러나 도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해. 인간의 욕망은 때로는 꿈이 되고,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 그래서 인간은 성장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는 거야. 반면 네 녀석은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굶주림에 허덕일 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고……?”
“그래. 네 녀석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그저 남을 갉아먹으며 존재를 이어갈 뿐이잖아! 그게 네 녀석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야.”
그와 동시에 도윤은 사인검을 크게 휘둘렀다.
도윤의 의지를 대신 나타내는 것처럼 사인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번뜩이며 빛났다.
그를 정통으로 맞은 걸귀는 아무런 반박도 내놓지 못하고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띠링, 레벨 업을 알리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3
체력: 140 / 140
소울: 60 / 140
집념: 64 / 100
새로운 스킬 획득!
도윤은 후련하다는 얼굴로 아르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르테, 고마워! 이번에도 네가 던진 찹쌀떡이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어.”
그런데 아르테는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도윤을 바라봤다.
“아르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르테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떨쳐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밝은 낯으로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벌써 3레벨이 된 걸 축하한다, 도윤!”
아르테는 자신이 본 것을 끝까지 말하지 않길 택했다.
순간이지만, 걸귀와 말싸움하던 중 도윤의 집념이 81까지 솟구쳤던 걸 말이다.
‘도윤, 너의 그 꺾이지 않는 굳센 성정이 오히려 독이 되는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남모를 걱정을 아르테는 마음속 한구석에 고이 접어두었다.
제6화
남산타워에서 목격한 독각귀 (1)
“흐음, 흐으음, 흐으으음…….”
아르테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침음했다.
도윤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휴가를 받아 마법 소년, 아니, 퇴마사로 일하면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방금 막 게임 한 판을 마친 참이었다.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친 도윤이 아르테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르테,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그러자 아르테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윤이 쫓는 요괴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난 또 뭐라고.”
도윤이 마치 남 일처럼 대꾸하자 아르테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렇지만 벌써 두 번이나 허탕을 치지 않았나!”
“말했잖아, 애초에 그렇게 금방 찾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조바심을 낼수록 일은 틀어지기 마련이야.”
사실 도윤도 속으로는 마냥 태평하지 않았다.
얼마 전, 지온을 마주쳤을 때 우울해 보였던 얼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조하게 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아 애써 평정심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뭐, 여차하면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관점을……?”
“그래, 때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잖아.”
도윤이 다시 의자를 돌려 게임을 한 판 더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아르테가 제자리에서 튀어 오르며 외쳤다.
“그거다!”
“깜짝이야!”
도윤이 덩달아 놀라 아르테를 쳐다봤다.
“도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르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잠깐만, 컴퓨터! 컴퓨터만 끄고 나가자!”
도윤의 다급한 외침이 현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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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방은 캄캄한 밤이었다.
심지어 비도 추적추적 내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득 맴돌았다.
“아르테, 종일 끙끙거리더니 갑자기 데려온 곳이 여기야?”
도윤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렇다, 도윤은 이 몸만 믿으면 된다!”
아르테는 큰소리치며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도윤은 제 앞의 건물을 떨떠름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건물에는 ‘남산 케이블카’라는 여섯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남산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람.’
도윤은 속으로 툴툴대면서 매표소 앞에 섰다.
“일단 이유는 나중에 묻는다 치고…… 아르테, 너는 무슨 표를 끊으면 돼? 나이로 따지면 대인인가? 아니면, 무게로 따져서 소인인가?”
“도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도윤이 심각한 어조로 질문하자 아르테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이 몸은 토끼다! 토끼가 사람 요금을 내는 걸 본 적 있나?”
“아니, 그렇지만 넌 토끼가 아니라 외계인이잖아…….”
결국, 도윤은 대인 표 두 장을 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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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계단을 쭉 걸어 올라가야 했다.
평소에는 몇 층에 걸쳐 줄을 서야 했겠지만, 비 오는 밤이어서 그런지 거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도윤, 움직인다. 움직여!”
케이블카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잔뜩 맺혀 작은 수정구슬의 모양새로 도르륵 도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물길은 겹겹이 흩어져 창 너머 서울의 풍경을 잔뜩 번진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만들었다.
케이블카가 더 높이 올라가자, 서울은 점차 발밑으로 내려앉았다.
남산의 울창한 숲은 비에 젖어 짙은 녹음을 뿜어내고, 그 위로 회색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윤은 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겨 갖가지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도심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번쩍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반사되어 마치 도로 위에 별들이 흩뿌려진 듯 빛났다.
그 아래, 우산을 쓴 사람들은 개미처럼 분주히 움직이며 빗줄기 속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비에 젖은 서울은 꼭 다른 세상 같네.”
도윤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아르테가 귀를 살짝 움찔했다.
“……비는 모든 걸 감추는 듯하지만, 사실 드러내기도 하니까. 저 불빛도 평소엔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빗속에선 유난히 또렷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아르테의 붉은 눈동자에는 서울의 야경이 반들거리며 비치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화려하게 빛나지만, 그 조명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흔적이기도 하다.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사무실의 불, 편의점과 식당의 네온사인, 모두 누군가의 노동을 증명한다. 그러니 저 범람하는 빛의 바다는 서울의 번영과 동시에 그 속에 깃든 누군가의 땀방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전까지 아름답게만 보이던 야경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에 한 사람의 삶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미가 훨씬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느덧 케이블카는 정상에 도착했다.
도윤은 케이블카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며 물었다.
“아르테, 비에 젖지 않게 해주는 루나리안 기술은 없어?”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소울을 아껴야 해서 함부로 쓰지 않는다.”
쩝, 도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 몸이 팁을 하나 주겠다! 비가 싫을 땐 우산에 토도독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봐라. 그러면 꽤 재밌는 기분이 든다.”
아르테는 신난 어린아이처럼 남산타워 쪽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도윤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뒤 남산타워 입장권을 구매해서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입장한 남산타워는 전망대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는 커다란 미디어 아트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 봐라, 도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전시 공간은 사방이 현란한 그래픽으로 번쩍거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이 얼마 없는 탓에 전시를 즐길 새도 없이 도윤과 아르테는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타게 됐다.
재밌는 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벽면 가득 동영상이 송출됐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의 중심부를 지나 남산타워에까지 다다르는 듯한 그 영상은 수십 초 정도의 짧은 길이였는데, 영상이 끝나는 것과 함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정말 순식간에 올라왔네.”
“우우, 귀가 먹먹하다…….”
감탄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윤과 다르게 아르테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문질렀다.
외계인도 기압 차는 어쩔 수 없는 듯해 도윤은 작게 웃고 말았다.
남산타워의 전망은 단연코 환상적이었다.
온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살갗에 가깝게 닿아 있던 것들은 까마득하게 멀어졌고, 거대하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은 장난감만큼 작아졌다.
착시가 어찌나 대단한지, 모든 게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도윤이 그 광경에 감탄하며 아르테에게 말했다.
“아르테,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이것보다 더 아득하게 보이겠지?”
“물론이다. 달에서는 지구를 이루는 전부가 납작한 색깔로 보인다. 파란색은 바다, 하얀색은 구름, 초록색과 갈색은 땅, 그 정도가 알아볼 수 있는 전부다.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그 안에 국가가 있고, 건물이 있으며, 사람이 있고, 돌멩이가 있는 게 보인다.”
“반대로 지구에서 달을 볼 때도 마찬가지겠네?”
그 말에 아르테가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 한복판에는 둥그스름한 달이 걸려 있었다.
그 평평하고 노란 동그라미를 응시하던 아르테는 마치 그곳에 있던 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어졌다.
도윤이 나직이 속삭였다.
“언젠가 나도 달에서 지구를 바라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그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나중에 이 몸이 도윤을 달로 초대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도윤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거다!”
기약 없는 약속이었지만, 도윤은 그걸로 만족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도윤이 쫓는 요괴부터 잡아야겠지만 말이다.”
포부를 다진 아르테는 곧바로 루나리움을 절굿공이로 변신시켰다.
그리고 씩씩하게 바닥을 쿵 내리찍으며 외쳤다.
“좋아, 일명 ‘관점 바꾸기’ 작전이다!”
“‘관점 바꾸기’ 작전?”
“다른 말로 ‘시각 달리하기’ 작전이라고 해도 좋다. 말 그대로 평상시엔 볼 수 없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지!”
도윤은 그제야 아르테가 자신을 남산타워로 끌고 온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르테는 관점을 바꾼다는 말을 정말 있는 그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에선 볼 수 없던 요괴가 눈에 들어올 테니 아주 엉뚱한 발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려나…….’
얼핏 단순하지만 나름 그럴듯한 작전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테는 그런 도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남산타워를 타고 지상에까지 닿아 퍼져나가는 청록색의 빛줄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남산타워의 전망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과 난간에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연인들의 환영이 스쳐 지나가고, 이내 도심 곳곳에서 푸른빛 소울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서울이 오래전 잃어버린 별을 되찾아주듯, 까만 하늘에 청록색 불빛이 수놓아졌다.
“대단해, 서울에 이렇게 많은 소울이 있구나.”
도윤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루나리움이 보여주는 신비한 광경에는 제법 익숙해진 도윤이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의 소울을 목격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아르테는 뿌듯한 듯 입꼬리를 달싹거렸다.
그러더니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자, 도윤, 이걸 받아라!”
“이건……?”
도윤이 아르테가 휙 던진 물건을 가볍게 낚아챘다.
손안에 안착한 것은 다름 아닌 망원경이었다.
“그건 평범한 망원경이 아니다. 루나리움으로 만든 망원경이다! 그걸 눈에 대고 보면 요괴의 흔적이 조금 더 잘 보일 것이다.”
아르테는 어느새 제 몫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도윤은 그를 따라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면서도 긴가민가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인 것 같은데…….’
눈알이 빠지도록 서울 도심을 둘러봐도 푸른 불빛들로 에워싸인 건물 사이에서 검은 기운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아래를 내려다봤을까, 문득 도윤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아르테, 저게 뭐지?”
“뭘 말하는 거냐?”
“저기, 저 건물 옥상에 희끄무레한 거 말이야.”
흩날리는 깃발이나 널어둔 빨래라고 하기엔 기이한 형체였다.
도윤은 미간을 좁히며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자 그것이 통 하고 튀어 오르며 반대편 건물 옥상으로 옮겨갔다.
“도윤, 독각귀다!”
“독각귀?”
“그래, 비 오는 날에 주로 등장하는 다리가 하나뿐인 요괴다. 저것도 사람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기이하게 일그러진 생김새를 하고 있으니 네가 경기장에서 봤다던 그 요괴일 가능성이 있어!”
그 설명을 듣고 나니 비로소 도윤의 눈에도 독각귀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두른 요괴는 한 다리로 통통 튀면서 건물 옥상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그러면 저걸 잡아야 할 텐데, 저렇게 멀리 있어서 어떻게 다가가지?”
“저번에 새로 받은 스킬을 써라, 도윤!”
“새로운 스킬이라면…….”
도윤은 마지막으로 얻었던 스킬을 떠올렸다.
루나리안 점프
필요 소울: 30
재사용 대기 시간: 1분
루나리움의 힘을 빌려 크게 도약한다.
‘이동기인 동시에 회피기인 스킬이었지. 그걸 이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라는 거지?’
도윤은 의아한 낯으로 아르테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르테가 도윤의 어깨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 몸이 루나리움을 조작해 일시적으로 전망대의 유리창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 그러니 최대한 독각귀와 가까운 곳까지 도약한 다음, 강화된 신체로 독각귀처럼 건물 옥상을 넘어가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나 보고 파쿠르를 하라는 거야?”
도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르테는 그런 도윤을 향해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요괴의 이빨과 손톱을 검으로 막아내는 일은 하면서 파쿠르는 못 하겠다는 말인가?”
“그건 그렇긴 한데…….”
도윤은 우물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나는 번지 점프나 스카이다이빙도 안 해 봤다고.’
도윤이 손바닥에 스며드는 땀을 느끼며 주먹을 꽉 거머쥐었다.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르테는 도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엄살은 그만 부리고. 이러다 놓치겠다, 출발하자!”
결국, 도윤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힘껏 도움닫기를 한 뒤 유리창을 향해 몸을 던졌다.
“루나리안 점프!”
순간, 도윤의 몸이 유리창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속도로 포물선을 그리며 서울의 도심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미터의 간극이 단숨에 접히고, 어둠 속을 가르는 궤적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제7화
남산타워에서 목격한 독각귀 (2)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도윤의 얼굴을 두드렸다.
도윤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지금, 이 순간 온 도시가 도윤의 발밑에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 붕 떠 있던 것도 찰나, 아래로 추락할수록 느껴지는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옷 아래로 파고드는 바람, 끔찍할 정도로 긴 부유감, 온갖 장기가 몸을 뒤따라 오지 못하는 듯한 무중력감이 차례로 도윤을 덮쳤다.
처음에는 마치 물속을 헤치는 것처럼 꼴사납게 허우적거리던 팔다리가 반사적으로 오그라들었다.
귓가에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도윤, 눈 떠라!”
그때, 선명하게 내리꽂히는 아르테의 목소리에 도윤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리를 스프링처럼 접으면서 건물의 옥상에 내려앉았다.
자신이 무사히 착지했다는 걸 깨닫고 도윤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숨을 골랐다.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
“도윤, 이럴 새가 아니다. 얼른 독각귀를 쫓아가야 한다!”
도윤의 어깨를 꼭 붙잡고 있던 아르테가 외쳤다.
도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독각귀의 위치를 확인했다.
독각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도윤의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등을 돌려 달아났다.
“젠장, 사인검 소환!”
도윤은 검을 움켜쥔 채 빗속을 달렸다.
옥상의 가장자리에 다다랐을 때,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실었다.
젖은 콘크리트 위를 박차자 물보라가 튀며 뒤로 흩어졌다.
그리고 난간에 발을 딛고 전신을 밀어내자 공중이 열렸다.
바람이 귀를 때리고, 아래로는 차량의 불빛이 줄지어 흘렀다.
쾅, 그는 다른 건물 옥상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빴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또다시 난간을 박차고 어둠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멀리서 서울의 불빛이 별처럼 빛나고, 도윤과 독각귀가 서로 번갈아 뛰어오르며 건물의 옥상을 넘나들었다.
도시는 그들의 추격전을 끝없이 비추는 거대한 무대 같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도윤은 루나리안 점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났다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루나리안 점프!”
도윤이 인간의 몸으론 불가능한 거리를 크게 도약했다.
영원히 잡히지 않을 듯했던 독각귀가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도윤은 착지하자마자 곧장 몸을 숙였다.
독각귀의 뾰족한 손톱이 허공을 할퀴며 시멘트를 긁어냈다.
날카로운 파편이 튀어 오르는 사이, 도윤이 몸을 비틀어 곧장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독각귀는 잽싸게 피한 뒤 다시 옆 건물로 몸을 던졌다.
“비겁한 자식, 도망만 치는 건가!”
도윤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르테가 분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도윤은 자신과 독각귀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 뒤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겼다.
‘내 소울이 140, 사인검을 소환하는 데 10, 루나리안 점프를 두 번 썼으니 60, 남은 건 70……. 스킬 없이 독각귀와의 거리를 10m 이하로 좁혀서 정화의 빛을 쓸지, 아니면 루나리안 점프를 쓸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활용해서 독각귀에게 최대한 큰 타격을 입힐지 선택해야 해.’
도윤은 마치 자신을 약 올리는 것처럼 건물 옥상을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독각귀를 보고 결심을 마쳤다.
“아르테,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
“응? 뭔가, 도윤?”
“일명 ‘관점 바꾸기’ 작전이야.”
도윤이 씩 웃으며 말했다.
‧
‧
‧
밤이 깊어가도 도윤과 독각귀의 술래잡기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도윤은 루나리안 점프를 한 번 써버려서 앞으로 쓸 수 있는 루나리안 점프는 한 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윤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곧이야!’
독각귀는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오는 인간을 피해 다음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그때였다. 푸른색 섬광이 독각귀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인간은 분명 내 뒤에 있었는데?!”
독각귀는 당황하며 다시 원래 있던 건물 옥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도윤이 독각귀를 향해 사인검을 크게 휘둘렀다.
“끝이다, 이놈!”
독각귀는 제 발로 도윤에게 달려든 꼴이 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분명 앞에 있었는데! 인간, 분신술이라도 쓴 거냐!”
독각귀가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며 외쳤다.
도윤은 사인검의 끝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독각귀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작전 대성공이다, 도윤!”
그때, 건너편의 건물 옥상에서 아르테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청록빛 절굿공이를 휘휘 흔들며 소리쳤다.
그제야 독각귀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도윤은 ‘관점 바꾸기’ 작전을 아르테에게 설명한 뒤, 아르테를 그 건물 옥상에 내려주고 본인만 독각귀를 쫓아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독각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독각귀는 한 바퀴를 빙 둘러 아르테가 있는 건물 옥상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아르테의 역할은 루나리움을 절굿공이로 변신시킨 채 대기하고 있다가 독각귀가 돌아오면 그를 향해 내리찍는 게 전부였다.
독각귀를 정확하게 노릴 필요도 없이 당혹감을 느끼게만 하면 됐다.
도윤과 아르테는 같은 루나리움을 공유하고 있으니 독각귀는 둘의 힘을 구분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도윤의 예측이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도윤이 루나리안 점프를 써서 자신의 앞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한 독각귀가 도윤이 있는 원래의 옥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까지가 계획이었다.
‘굳이 남은 소울에 집착하면서 스킬의 도움을 받으려고 할 필요 없지. 아르테도 날 도와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관점을 바꿔 생각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어.’
그리고 그 계획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렇지만 추격전이 더 길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
독각귀는 도윤의 상태창을 볼 수 없어 몰랐겠지만, 사실 도윤의 상태는 썩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3
체력: 128 / 140
소울: 40 / 140
집념: 79 / 100
직접 독각귀와 맞부닥치는 일은 적었기에 체력은 그 어느 전투보다도 많이 남았지만, 그를 뒤쫓는 것에 몰두해서 그런지 집념은 어느덧 80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나중에는 체력이나 소울 관리보다 집념 관리가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네.’
도윤은 속으로 걱정을 삼켰다.
그리고 독각귀 앞에 쪼그려 앉아 검을 겨누며 물었다.
“네 녀석, 종로의 경기장에 갔던 적이 있나?”
독각귀는 사납게 대꾸했다.
“갔던 적이야 있겠지.”
“그렇다면 거기서 한 선수의 생기를 빼앗은 적은?”
“없다. 나는 지붕 위를 돌아다니지, 건물 안까지 들어가진 않는다.”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도윤이 애써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검을 치켜들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그러자 독각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병을 옮기는 존재라며 나를 꺼리지. 그러나 내가 옥상을 누비며 깨달은 것은, 진정으로 병든 건 바로 이 도시라는 사실이었다.”
“이 도시가 병들었다고?”
도윤이 되묻자 독각귀가 목소리를 높였다.
“한밤중까지 빛을 내뿜는 건물들, 화려한 간판들, 그 아래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보지 못했느냐? 그들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에 병폐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지금 내가 옳다는 걸 인정하는 게냐?”
“아니, 그렇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무너질 거라는 네 말은 틀렸어.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어. 네가 직접 저들 사이에 어울려 살면 알게 될 거야. 건물 위에서 그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도윤이 검을 내리그었다.
“제대로 사람들을 마주 볼 용기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 마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곧고 반듯한 궤적이었다.
평생 그 궤적에서 도망치며 살았지만, 끝내 붙잡히고만 독각귀는 먼지가 되어 서울의 밤 속으로 흩어졌다.
그와 함께 띠링, 레벨 업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4
체력: 160 / 160
소울: 40 / 160
집념: 79 / 100
새로운 스킬 획득!
‘이제 4레벨, 궁극기를 배울 수 있다던 6레벨까지도 조금밖에 남지 않았네.’
도윤은 아르테가 있는 건물을 향해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도윤이 착지하자마자 아르테가 도윤에게 우다다 달려들었다.
“도윤, 훌륭한 팀플레이였다! 루나리안만 꾀가 많은 줄 알았더니, 도윤도 제법 하는군.”
“아르테가 역할을 잘 소화해 준 덕분이야.”
도윤은 달려드는 아르테를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사실, 아르테를 혼자 두고 가면서 도윤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보다 아르테를 믿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작전을 시행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독각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꾀도 꾀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대단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도윤이 멈칫했다.
“도윤은 분명 처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걸 무서워했다. 이 몸이 도윤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도윤은 그걸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했다, 그렇지?”
도윤은 드러내지 않으려던 속내를 들키곤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도윤은 독각귀를 쫓아 건물 옥상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게 됐다. 이 몸은 거기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봤다. 그건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도윤의 가슴팍에 아르테가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고마워, 아르테. 그런데 말이야…….”
도윤은 비에 젖어 축축해진 털의 감촉을 느끼곤 말했다.
“일단은 우리, 먼저 씻는 게 어떨까? 둘 다 완전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잖아.”
감동을 와장창 깨부수는 말에 아르테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생쥐라니,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 있지! 이 몸은 비에 젖어도 어딜 보든 토끼 꼴이다. 당장 그 말 취소해라!”
“아르테, 그건 그냥 비유였어.”
“비유라도 취소해라!”
결국, 도윤은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해야 했다.
그리고 함부로 비유를 쓴 죄로 찜질방의 뜨거운 목욕탕에 몸을 푹 담그면서도 아르테의 토끼다움에 대해 한참을 칭찬해야 했다.
제8화
양화 한강공원에서 조우한 별주부
덜컹, 덜컹.
지하철이 둔탁한 진동을 남기며 합정과 당산 사이를 지나는 당산철교 위로 올라섰다.
“오오. 도윤, 저길 봐라!”
아르테가 아예 몸을 돌린 채로 의자를 밟고 일어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노을이 질 때쯤 지하철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다리를 경계로 왼편에는 아직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오른편에는 해가 저물면서 분홍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서로 만나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한강이었다.
강물은 햇빛을 받아 꼭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고단한 하루에 지친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고개를 들어 창문 밖에 시선을 두고는 숨을 골랐다.
“이번 역은 당산, 당산역입니다.”
머지않아 지하철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마법 같던 시간에도 끝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도윤, 이제 곧 내릴 준비 해라!”
아르테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외쳤다.
오늘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양화 한강공원이었다.
도윤은 출발하기 전, 아르테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렸다.
‘안 되겠군. 회심의 남산타워에서조차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니…….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를 써야겠어.’
‘최후의 수가 뭔데?’
‘으윽, ‘그 자식’만큼은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아르테, ‘그 자식’이 누구야?’
‘묻지 마라,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싫다!’
그러면서 질색을 표하는 아르테 때문에 끝내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온 도윤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르테는 밖에 나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저기 돗자리를 빌리는 곳이 있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서 돗자리를 빌리는 가게를 보고 눈을 빛낼 정도였다.
그를 지적하기도 뭣해서 도윤은 얌전히 돗자리를 빌리길 택했다.
때가 되면 아르테가 어련히 말해주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양화 한강공원은 러닝을 뛰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그리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고, 빛은 나뭇잎 사이를 헤치며 내리쬐어 공기 중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도 한강 라면 먹자, 도윤!”
그러나 아르테는 자연을 즐기는 것보단 다른 데에 더 관심이 많은지 말간 눈동자로 도윤을 올려다보며 소맷자락을 이끌었다.
덕분에 도윤은 처음으로 그 유명한 한강 라면을 먹어보게 됐다.
“요즘엔 이렇게 자동으로 라면을 끓여 주는 기계도 있구나.”
“루나리안 기술 중에도 라면을 끓여 주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개발해 보는 건 어때, 아르테?”
도윤과 아르테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렸다.
편의점을 나오자 이번에는 돗자리를 펼쳐놓고 치킨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이 아르테의 눈에 띄었다.
“우리도 치킨 시켜 먹자, 도윤!”
“아르테, 우리 라면 먹은 지 3분도 안 지났어…….”
결국, 도윤은 아르테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치킨은 이따가 저녁에 먹기로 합의를 봤다.
‧
‧
‧
도윤과 아르테는 한강공원을 돌아다니다가 적당히 그늘이 있고 한적한 풀밭에 돗자리를 펼쳤다.
한강은 도시를 관통하면서도 마치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증인처럼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강에 오니까 좋네.”
도윤의 중얼거림에 아르테가 동의한다는 듯 귀를 까닥거렸다.
“맞다, 서울에 살면 이따금 한강에 한 번씩 와줘야 한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와서 웃어야 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와서 울어야 한다. 한강은 그 모든 걸 묵묵히 들어준다.”
도윤은 눈을 감고 상상에 잠겼다.
아르테가 절굿공이를 꺼내 들고 바닥을 내려치지 않아도 한강 주위를 떠돌 소울의 모습들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웃고 울며 한강과 함께 살아왔을 사람들의 환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런 도윤을 보며 아르테가 흐르는 물살을 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서울의 역사 속에서 한강은 늘 인간과 함께 호흡해 왔다. 생존의 원천에서 산업의 동력으로, 이제는 휴식과 치유의 상징으로 말이다. 빌딩 숲이 들어서면서 자연은 예전만큼 설 곳이 없게 됐지만, 한강과 그 주변만큼은 여전히 푸르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그 말에 도윤은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가장 오래된 동반자임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때, 문득 저 멀리서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측하기로는 두 팀이 내기를 건 듯한데, 그중 한 팀의 오리배가 기우뚱거리며 기울어지기 직전이었다.
“우리도 슬슬 오리배를 타자, 도윤!”
“보기엔 재밌어 보여도 막상 타면 꽤 힘들걸?”
도윤이 아르테를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자 아르테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재밌으려고 타자는 게 아니다.”
“그러면?”
“오리배를 타야만 ‘그 자식’을 만날 수 있다.”
도윤은 한층 더 의아해졌다.
오리배를 타야만 만날 수 있다니, 아르테가 말하는 ‘그 자식’의 정체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테는 여전히 ‘그 자식’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도윤이 ‘그 자식’이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은 단 하나, 아르테와 함께 오리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
‧
‧
오리배가 삐걱거리면서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윤은 페달에 다리가 닿지 않는 아르테를 대신해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돼, 아르테?”
“맞다, 조금만 더 힘내라!”
도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오리배가 한강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쯤이었다.
문득, 뻥 뚫린 창문 너머로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형체가 보였다.
‘저건 거북이…… 아니, 자라인가?’
까만 등딱지를 가진 자라는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도윤이 페달을 밟아 자라 쪽으로 다가갈 정도였다.
“이 느림보 자식아! 그렇게 헤엄쳐서 어느 세월에 오려고!”
자라를 마주하자마자 아르테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면박을 줬다.
반면, 자라는 느긋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빠르게 헤엄칠 필요가 있나? 급한 쪽이 먼저 다가오기 마련인 것을, 허허.”
도윤은 말하는 토끼도 있는 마당에 말하는 자라가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았다.
단지 이 자라의 정체가 또 다른 외계 종족일지, 아니면 요괴일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자라가 도윤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못 보던 인간은 자네의 계약자인가?”
“그래, 맞다.”
그러자 자라가 꼭 인사를 하는 것처럼 팔을 휘둘러 물을 찰방거리더니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 별주부라 하오.”
“안녕하세요, 이도윤입니다.”
별주부라는 이름을 들으니 도윤의 머릿속에 ‘혹시…….’ 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별주부는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소리 내 웃었다.
“‘주부’라는 직책을 가진 자라는 모두 별주부라는 이름을 쓰지. 그러나 나는 남해가 아니라 한강에 사는 자라인지라 용왕의 건강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토끼의 간을 탐낼 이유는 더더욱 없소.”
“아, 그렇군요…….”
“또한, 토끼와 경주를 벌인 적도 없고, 앞으로 벌일 생각도 없소. 그러니 저자와는 아무런 사연 없이 그저 성격 차이로 앙숙일 뿐이라오.”
도윤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별주부가 도윤이 궁금해하던 것을 미리 선수 쳐 대답해 준 탓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웬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이 몸이 보낸 편지에 네 녀석이 도통 답장이 없어서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기 전에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어조에 별주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급한 쪽이 먼저 오기 마련이라니까.”
“그래서 뭔가 알아낸 게 있나? 종로의 경기장에서 나타났던 요괴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그제야 도윤은 아르테가 그토록 싫어하는 별주부를 만나러 온 까닭이 자신이 쫓는 요괴를 찾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별주부는 느리게 고개를 내젓더니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아직은 전부 불확실한 짐작뿐이야.”
“그럴 줄 알았다, 쓸모없는 자식! 자라 망신은 다 시키는군!”
“다만…….”
“다만?”
별주부가 덧붙인 말에 아르테가 반색하며 물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 요괴를 찾기 위해 종로 주변을 뒤지는 건 무용한 짓이라는 거라네.”
“그럴 리가! 요괴가 벌써 그렇게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텐데?”
그동안 도윤과 아르테는 요괴에 대한 세 가지 단서에 따라 후보지를 물색하고, 움직였다.
그런데 별주부는 그 단서라고 생각했던 것 중 한 가지가 아예 틀려먹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도망친 게 아니라면?”
“도망친 게 아니라니?”
“자네가 방금 요괴는 그리 멀리 도망칠 수는 없다 그러지 않았나. 그러니 요괴가 도망친 게 아니라면 그리 멀리 갈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장난이냐!”
수수께끼 같은 별주부의 말에 아르테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도 별주부는 너털웃음을 짓기만 했다.
“그러니까 요괴는 종로보다는 차라리…… 그래, 이 근처에 있다고 할 수 있겠군.”
“정확하게 말해라. 이 근처라는 게 서울이 될 수도 있고, 영등포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이 오리배 안이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러나 별주부는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라네.”
“별 도움도 안 되는 정보뿐이니 괜히 헛걸음만 했군.”
아르테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도윤, 이만 돌아가자!”
용건이 끝나자 볼일을 마쳤다는 듯 아르테는 휙 고개를 돌렸다.
도윤이 이대로 돌아가도 될지 슬쩍 눈치를 보던 찰나였다.
“참, 도윤이라고 하였소?”
“예?”
별주부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내가 돌멩이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던 돌멩이가 있었다오. 작고 표면이 반질반질한 녀석이었는데, 어느 날 그 녀석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뜬금없는 이야기에 도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그 녀석을 찾아 녀석을 마지막으로 봤던 곳 주변을 모래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뒤졌다오. 그렇지만 그 녀석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지. 내가 나중에 그 녀석을 찾게 된 곳이 어딘지 짐작할 수 있겠소?”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자 별주부가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바로 내 등딱지 위였다오. 정말로 근처에 있었는데 못 찾았던 게지.”
“그런 일을 두고 인간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말하곤 하죠.”
“그렇소? 그 표현도 재밌구려. ‘등잔 밑이 어둡다’라…….”
별주부는 도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윤, 그대도 부디 그대가 찾는 것을 찾을 수 있길 바라오.”
그 말을 남기고 별주부는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왔던 것만큼이나 굼뜨게 헤엄쳐 오리배로부터 멀어졌다.
도윤은 얼핏 그 뒷모습으로부터 꼬리라기에는 지나치게 긴 무언가를 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이지,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아르테가 투덜거렸다.
도윤은 아르테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르테, 혹시 별주부는 요괴야?”
“요괴? 아니다.”
“그러면 너처럼 외계에서 온 종족이야?”
“그것도 아니다.”
도윤의 표정이 점점 해괴망측해졌다.
“그러면?”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천년 묵은 자라쯤 될걸? 그래서 어느 정도 영성이 있는 편인데, 항상 저렇게 두루뭉술하게 전하곤 해서 문제야.”
아르테가 쯧쯧 혀를 차는 동안, 도윤은 방금 자신이 만난 게 천년 묵은 자라라는 사실에 기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꼬리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도…….”
“잘못 본 게 아닐 테다. 현무에 가까운 존재라서 꼬리 쪽에 뱀을 달고 다니거든.”
아르테의 말에 도윤은 망연히 별주부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분명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움직이던 자라는 잠깐 시선을 뗀 사이에 물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수천 년이 넘게 자리를 지켜온 수면에는 고작 천년 묵은 자라를 품은 정도론 일말의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제9화
홍대에서 맞닥뜨린 지하국 대적
“……아르테, 그래서 여기에 온 이유가 뭐라고 했지?”
“양화 한강공원 기준으로 근처에 요괴가 있다고 했으니 한강 건너편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봤다!”
아르테는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었다.
도윤은 왁자지껄한 주변을 둘러보고는 확실히 소울 넘치는 곳이라고 한다면 이곳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는 가지각색의 개성을 뽐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누군가는 검은 머리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큰 티셔츠와 질질 끌리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누군가는 노란 머리에 리본과 프릴이 가득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파란 머리에 짧은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당당하고 떳떳한 태도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 않았다.
이 공간에서 다른 건 있어도, 틀린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걷고 싶은 거리’의 한복판에는 버스킹 무대를 둘러싸고 원 모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경계가 허물어진 그곳에서 행인은 얼마든지 관객이 될 수 있고, 관객은 얼마든지 공연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는 열기와 자유로운 에너지가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확실히 홍대는 인근 주민이나 일하러 온 사람보다는 놀러 온 사람이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좋다! 여가를 즐기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일하고 달리지만, 여가가 있기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르테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치는 사람, 길가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 그리고 즉흥 춤을 추는 무리까지 그 모든 풍경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여가는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시간이며, 공동체와 연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 공연을 함께 바라보고, 낯선 이와 웃음을 나누는 일은 오락을 넘어서 도시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서울이 정말 매력적인 공간인 이유라 할 수 있다. 성취를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여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균형을 선사하니까.”
그 말을 들으며 도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언제 여가를 누렸는지를 떠올렸다.
적어도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이후, 홍대처럼 사람이 들끓는 곳으로 놀러 나온 적은 없는 듯했다.
그때였다. 아르테가 무언가를 목격하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윤, 저기 네 잎 클로버를 파는 노점이 있다!”
그곳에는 아르테의 말대로 코팅된 네 잎 클로버를 잔뜩 늘어놓고 파는 노점이 있었다.
아르테는 망설임 없이 그 앞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도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르테를 바라봤다.
“클로버를 먹으려는 건 아니지, 아르테?”
“지금 이 몸을 뭐로 보는 거냐!”
“아니, 클로버의 우리나라 이름이 토끼풀이니까……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아르테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가슴팍을 뒤적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코팅된 네 잎 클로버 한 장을 구매했다.
“이건 도윤에게 선물로 주려고 본 거였다!”
“나한테?”
“그래, 이렇게 상대에게 행운을 선물할 수 있다니 멋진 일이지 않나!”
도윤은 아르테가 건네주는 네 잎 클로버를 받아들었다.
둥글게 퍼진 초록빛 잎사귀 네 장은 마치 서로 기대어 원을 이루듯 붙어있었다.
“도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 네 잎 클로버가 조금이라도 도윤을 지켜주면 좋겠다.”
사실 도윤은 네 잎 클로버가 가진 힘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다만, 그에 담긴 아르테의 마음만큼은 확실히 부적이 되어주었다.
도윤이 네 잎 클로버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난 항상 네게 많은 걸 받는구나.”
“고마우면 앞으로 잘해라!”
아르테는 민망한지 서둘러 루나리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절굿공이의 형태로 변신시키고는 땅을 향해 내리찍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청록빛 소울이 바닥으로부터 떠올랐다.
과제를 하는 대학생, 흥에 찬 젊은이들의 환영이 차례로 나타났다.
도윤은 그 사이에서 한 가닥의 검은색 기운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사인검 소환.”
도윤은 검을 꽉 그러쥐고는 검은 연기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기가 향하는 곳에 아르테가 낭패라는 듯 중얼거렸다.
“도윤, 여기는…….”
도윤의 얼굴도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연기가 지하에 자리한 피시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자신이 독각귀를 잡고 얻었던 스킬을 떠올렸다.
솔라리스
필요 소울: 50
재사용 대기 시간: 5분
태양의 힘을 빌려 강력한 일격을 상대에게 가한다. 단,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일수록 위력이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도윤이 소속된 팀명과 같은 스킬이었다.
도윤은 이 스킬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대낮부터 홍대에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지하의 피시방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솔라리스 스킬은 거의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좁은 공간 특성상 회피기인 루나리안 점프도 사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쩌지, 이대로 돌아갈까?”
아르테가 도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솔라리스 스킬의 위력을 실험해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대신 정화의 빛 스킬을 쓰면 되니까 괜찮아.”
도윤은 오히려 폐쇄적인 장소인 만큼 10m라는 거리 제한이 있는 정화의 빛 스킬을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 4레벨이 된 후, 소울 최대 한계치가 160으로 증가하면서 정화의 빛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도 두 번에서 세 번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도윤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피시방 안으로 들어섰다.
‧
‧
‧
피시방엔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컴퓨터 모니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곳은 순간순간 화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으로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작은 세계였다.
게임 음향과 이따금 흘러나오는 다급한 목소리,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 한 데 섞여 하나의 불협화음 같은 음악을 만들어 냈다.
좌석마다 집중한 얼굴들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승리의 환호를 터뜨리며 손을 번쩍 들었으며, 또 어떤 이는 아쉬움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머리가 아홉 달린 거인이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요괴에겐 앉아 있는 의자가 비좁아 보였다.
“큰일이다, 도윤.”
그때, 요괴를 발견한 아르테가 덜덜 떨면서 속삭였다.
“저 요괴는 지하국 대적이다……!”
“지하국 대적?”
“그렇다. 지하에서 올라온 괴물인데, 머리를 잘라도 다시 붙어버린다. 저 녀석을 해치우기 위해선 머리를 자른 뒤 재를 뿌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지금 우리에겐 재가 없다.”
아르테가 동동 발을 굴렀다.
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인검이나 정화의 빛으로도 못 무찌르는 거야?”
“맞다, 루나리움의 스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 몸의 생각에는 작전상 후퇴했다가 어떻게든 재를 얻어 다시 돌아오는 게 좋겠다.”
‘작전상 후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엔 도망치자는 소리였다.
도윤은 유심히 지하국 대적을 관찰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저 녀석,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한데……?”
그제야 아르테도 지하국 대적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헤드셋을 쓴 채 피시방의 다른 사람들처럼 컴퓨터 속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키보드와 마우스는 그의 큼직한 손안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지만, 지하국 대적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그것들을 조종했다.
“제기랄, 잘못 눌렀잖아!”
그러다가 두꺼운 손가락이 키보드를 잘못 눌렀는지 쾅 하고 거세게 책상을 내리치기도 했다.
그에 따라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라면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주변 사람들은 한 번 힐끔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가 익숙한지 도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게임을 하는 요괴도 있어, 아르테?”
“아니, 처음 본다.”
도윤과 아르테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때였다. 지하국 대적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쥐새끼들, 속닥거리지 말고 나와라!”
아르테는 발끈하며 외쳤다.
“쥐새끼라니, 이 몸이 어딜 봐서 쥐라는 거냐!”
지하국 대적은 팔짱을 끼고 도윤과 아르테를 바라봤다.
그의 게임 화면에는 ‘패배’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쥐는 확실히 아니군. 옥토끼와 그 계약자인가?”
지하국 대적의 머리 아홉 개가 번갈아 가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보아하니 재를 가지고 오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다면 나를 이길 방법도 없을 텐데,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지하국 대적은 당장 덤벼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 중을 맴돌았다.
아르테가 고개를 들어 도윤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은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할지, 아니면 덤벼들어야 할지 고민인 모양이었다.
문득, 도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네게 물어볼 게 있어.”
아르테는 도윤이 과연 어쩌려는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걱정과 불안, 그리고 믿음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반면, 지하국 대적은 흥미로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뭐지?”
“넌 게임을 좋아하나?”
도윤의 질문에 지하국 대적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다!”
“저, 손님, 실례지만 목소리 좀 줄여 주시겠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 손님께선 덩치가 크셔서 안 그래도 다른 손님들이 위압감을 느낀다는 문의가 많이 들어오거든요.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아마 지하국 대적도 아르테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본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위장을 한 모양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지하국 대적은 꾸벅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다가 다시 도윤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였다.
“저 깊은 땅속에서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료함의 굴레에 갇히기 쉽지.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어 지쳐가던 찰나, 날 구원해 준 게 게임이었다. 할 때마다 재밌고, 계속해서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는 게임 말이다.”
지하국 대적의 또 다른 머리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게임을 통하면 굳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상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지. 그래서 나는 게임에 푹 빠져버렸다.”
얘기를 들은 아르테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도윤에게 말했다.
“도윤, 그래도 저 녀석이 퇴치해야 하는 요괴라는 데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게임에 빠졌을지 몰라도 과거에 저지른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 아르테. 나는 지하국 대적과 친분을 쌓으려는 게 아니니깐.”
도윤은 아르테를 안심시키고는 지하국 대적을 향해 제안했다.
“이봐. 만약 이곳에서 나와 네가 전투를 벌이면 내겐 불리하고, 네겐 달갑지 않은 일이 될 거야. 게임을 할 시간을 방해받을 테니까 말이지. 심지어 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너를 찾아와서 귀찮게 싸움을 걸 거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한 가지 내기를 하지.”
지하국 대적이 어디 한 번 들어보겠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너와 내가 지금, 이 피시방에서 무작위로 사람을 모아 5:5로 게임을 하는 거야. 3판 2선승제, 만약 네가 이기면 나는 네 앞에 두 번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 네가 게임을 하든, 지상에 올라와 난동을 피우든 방해하지 않겠어.”
“만약 네가 이기면?”
“만약 내가 이기면…….”
도윤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반대로 네가 두 번 다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야.”
“그건 내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닌가?”
지하국 대적의 시큰둥한 반응에 도윤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너는 실질적인 보상과 페널티가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게임을 해 왔을 거야. 그렇지만 무언가가 걸리는 순간, 게임의 감각은 송두리째 달라져. 승리에 대한 열망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커지니까 말이지.”
그러자 지하국 대적의 머리 아홉 개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는지 차례로 떠들어댔다.
“좋아, 어차피 이기면 그만이니까.”
“재밌겠군.”
“네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지.”
지하국 대적은 기세 좋게 말했지만, 도윤에게 와닿지는 않았다.
도윤은 속으로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사실, 이 게임은 사기에 가까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하국 대적은 도윤이 아르테의 계약자인 건 알아봤어도 프로게이머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둔갑 쥐만큼의 정보력이 없어서 다행인 건가.’
도윤은 아르테를 보며 이제 안심하라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아르테도 도윤이 낸 꾀가 만족스러운지, 마구 눈을 찡긋거렸다.
그렇게 홍대 지하 피시방에서 도윤과 지하국 대적 간의 즉흥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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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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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의 결과는 2:1로, 도윤 팀의 승이었다.
도윤은 2:0으로 이기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지하국 대적 팀이 선전한 탓에 한 세트를 내어주고 말았다.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지하국 대적은 분노를 못 이기고 키보드를 내리치고 말았다.
그 엄청난 힘에 키보드가 산산조각이 나며 튀어 올랐다.
도윤은 깜짝 놀라 사인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혹시 지하국 대적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덤벼들면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지하국 대적은 한참 고개를 숙인 채 씨익씨익 숨을 고르더니 이내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윤은 처음에 이 손으로 나를 때리겠다는 뜻인가 싶어 경계했지만, 머지않아 그게 악수를 청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윤이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자 지하국 대적은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좋은 경기였다.”
“네 말대로 보상과 페널티가 걸리니까 느낌이 다르군.”
“비록 나는 패배해서 두 번 다시 지상에 올라오지 못하겠지만, 이 경기를 잊지 못할 거다.”
아홉 개의 머리가 차례로 떠들어댔다.
아르테가 도윤의 뒤에서 외쳤다.
“잘했다, 도윤. 정말 멋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도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혼란에 빠져서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정말 ‘멋있는’ 게임이 맞나……?’
가끔 게이머 중에서도 비겁한 수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윤은 평상시에 그런 사람들을 혐오하곤 했다.
즐거운 놀이를 위해 우리끼리 만든 룰을 짓밟으며 희열감을 느끼는 족속들이라며 말이다.
그만큼 도윤은 지금 자신의 행태에도 떳떳할 수 없었다.
결국, 도윤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봐, 방금 경기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경기였어.”
“뭐라고? 지금 이긴 주제에 이쪽에서 반칙을 썼다고 주장하는 거냐?”
“아니, 그 반대야. 비열한 건 내 쪽이었다.”
갑작스러운 도윤의 고백에 지하국 대적의 열여덟 개의 눈이 일제히 끔뻑거렸다.
“도윤, 지금 뭐 하려는 거냐!”
아르테가 다급하게 도윤에게 속삭였다.
“미안, 아르테. 그렇지만…… 지혜로운 꾀로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것과 치사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상대를 골탕 먹이는 건 정말 한 끗 차이인 것 같아. 그리고 내 생각에 지금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고.”
도윤은 아르테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르테라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잠시 뒤, 아르테는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계약 관계지만, 나는 도윤이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하면서까지 도움을 주는 건 바라지 않는다.”
“고마워, 아르테.”
아르테의 허락까지 받은 도윤은 지하국 대적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사실 프로게이머야.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 경기는 공평하지 않은 경기였어.”
도윤은 긴장감에 사인검을 꽉 그러쥐었다.
지하국 대적이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 때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하국 대적은 오히려 가만히 도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툭 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그 말에 도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를 얼마나 바보로 본 건진 몰라도, 옥토끼의 계약자가 프로게이머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불리한 조건이라고 말을 했던 거고.”
“……나는 불리한 조건이라는 게 두 번 다시 지상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페널티가 너무 크다는 뜻인 줄 알았어.”
지하국 대적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윤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러면 너는 내가 프로게이머인 걸 알고도 내기를 승낙한 거야?”
“그렇다.”
“왜?”
그러자 지하국 대적이 도윤을 바라보며 답했다.
“네가 그러지 않았나. 무언가를 걸고 하는 게임은 느낌이 다를 거라고. 이 기회를 놓치면 내가 그런 게임을 할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그래서 제안을 승낙했다.”
도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 과정에서 네게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내기는 내기고, 결과는 결과다. 약속대로 나는 두 번 다시 지상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그 단호한 선언에 도윤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인가?”
지하국 대적이 얼마든지 물어보라는 듯 턱 끝을 까닥였다.
“혹시 게임을 좋아한다면, 종로의 경기장에 가본 적 있나?”
그러자 지하국 대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게임을 보는 것보다 하는 걸 더 좋아한다.”
사실, 지하국 대적은 아홉 개의 머리와 거대한 체구가 지나치게 특징적이었기 때문에 도윤도 그가 지온을 해친 요괴가 아니리라 생각했다.
점점 지온의 생기를 빼앗아 간 요괴의 실마리가 희미해지는 걸 느끼며 도윤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도윤의 질문이 끝나자 지하국 대적은 도윤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두고 봐라, 난 지하에서도 게임 실력을 갈고닦는 걸 그만두지 않을 테니까. 언젠가는 너보다 더 훌륭한 게이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하국 대적은 땅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남은 피시방 충전금 이만 삼천 원어치는 쓰고 가도 됐을 텐데, 어쩐지 시원시원하면서도 묘하게 허술한 녀석이군.”
“그러게나 말이야…….”
아르테는 지하국 대적의 컴퓨터 화면에 남은 잔액을 확인하곤 아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어쨌든 다행이다, 도윤! 나는 또 지하국 대적이 덤벼들까 봐 긴장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응, 좋게 끝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도윤이 마지막에 정직함을 선택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만약 그때 도윤이 고백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아마 두고두고 떠올리게 됐을 테다.”
“맞아. 내 결정을 믿고 이해해 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 아르테.”
곧이어 띠링 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하국 대적과 내기에서 승리한 것도 요괴를 처치한 거로 계산하는 모양인지, 도윤의 레벨이 5로 올라 있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5
체력: 180 / 180
소울: 180 / 180
집념: 74 / 100
새로운 스킬 획득!
‘이제 1레벨만 더 올리면 궁극기를 배울 수 있겠네.’
도윤이 의지를 다지면서 피시방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저기요……!”
뒤에서 도윤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지하국 대적과 함께 5:5 경기를 치렀던 팀원이었다.
“프로게이머 버텍스 선수 맞죠? 혹시 사인 한 장 해주실 수 있나요?”
갑작스러운 요청이 들어오자 도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또 둔갑 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인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아르테가 속삭였다.
“아마 지하국 대적에 도윤이 프로게이머라고 정체를 밝히면서 루나리안 홀로그래피가 풀린 것 같다!”
그 말에 도윤이 스킬 설명에 적혀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단, 기존에 사용자와 이미 아는 사이이거나 사용자 본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경우는 제외된다.’
그제야 아차 싶은 도윤은 일단 마커 펜과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상대가 수줍은 어조로 말했다.
“제가 버텍스 선수 진짜 팬이거든요! 데뷔 때부터 경기 다 챙겨봤는데,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도윤이 멈칫하고 눈앞 자신의 팬을 바라봤다.
선수 생활을 하며 곧잘 들었던 말인데도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타인의 삶을 이렇게 진심으로 지지할 수 있는 걸까. 과연 내가 이 과분한 애정을 받을 자격이 될까?’
도윤의 머릿속은 의구심으로 가득 찼지만, 그와 달리 가슴속에 퍼지는 것은 따스한 온기였다.
도윤은 팬에게 사인을 내밀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피시방을 나가기 직전, 돌아본 풍경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이 컴퓨터 화면의 불빛과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한 채였다.
그렇지만 도윤은 어쩐지 그로부터 지하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가장 밝은 역사가 세워질 수도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아르테가 그런 도윤의 옆에 쫄래쫄래 따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도윤, 혹시 마지막으로 홍대에 온 게 언제였나?”
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사실대로 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됐어.”
“잘 됐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테가 제자리에서 깡충 뛰어올랐다.
“아니, 도윤이 오랜만에 홍대를 왔다는 게 잘 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 홍대에서 조금 더 놀다 가자고 할 생각이어서 그랬다!”
허둥지둥거리는 아르테를 보며 도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러자. 하고 싶은 거 있어?”
“안 그래도 내가 어제 조사를 해놓은 참이었다! 우선 보드게임 카페를 갔다가 노래방을 들리고, 옷가게를 구경한 뒤에 맛있는 식당을 가고…….”
아르테는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계획을 쏟아냈다.
그날, 도윤은 아르테와 홍대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아르테와의 기억은 도윤에게 항상 특별했다.
청계천에서 처음 마주쳤던 것부터 남산타워에서 뛰어내렸던 것까지…….
그렇지만 가장 특별한 기억은 오히려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기억이었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명동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남산타워에서 야경을 구경한 그런 기억들 말이다.
도윤은 어쩌면 추억의 본질은 거창하고 대단한 순간이 아니라, 그런 자그맣고 일상적인 순간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제10화
국회의사당에서 찾아낸 의가작수
노을이 깔린 하늘 아래, 국회의사당은 거대한 돔을 중심으로 붉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빛을 받아 서 있었다.
외벽은 낮 동안의 차가운 흰색을 벗고, 저녁 햇살을 머금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깔로 변해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구름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건물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고, 돔 위에 앉은 반사광은 마치 불꽃처럼 천천히 번져나갔다.
“아르테,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있다고?”
“그렇다, 도윤! 양화 한강공원 근처에서 요괴가 나타날 만한 곳은 홍대가 아니라면 바로 이곳이다.”
그들은 영등포의 국회의사당 앞에 있었다.
아르테는 자신만만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도 점점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지온에게 해를 끼친 요괴를 영영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들을 발끝부터 조금씩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테는 티 내지 않고 가슴팍에서 루나리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절굿공이로 변신시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청록색 빛줄기가 바닥으로 퍼져나가자 이내 반짝이는 소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봐도 아름다운 광경 속 불현듯 검은색 연기가 나타났다.
도윤과 아르테는 동시에 당황하며 말했다.
“잠시만, 도윤, 왜 요괴의 기운이…….”
“……이렇게 내 주변으로 몰려 있는 거지?”
어째서인지 검은 안개는 도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도윤을 포위하는 것처럼, 혹은 옥죄려는 것처럼 말이다.
도윤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나직이 속삭였다.
“사인검 소환.”
도윤의 손 위로 번뜩이는 검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검을 꽉 틀어쥐고는 사방을 향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안개가 점점 매캐하게 불어나는 것과 달리 요괴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도윤, 알겠다. 그림자다!”
그때였다. 아르테가 도윤의 늘어진 그림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황혼, 하루 중 그림자가 가장 길게 늘어지는 때.
그때의 그림자는 나를 지켜줄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여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그 말처럼 도윤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도윤의 그림자는 기괴한 형태로 뒤틀려 있었다.
턱은 길게 늘어지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는,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봤던 그 형체 그대로였다.
“네 녀석이구나!”
도윤은 사인검을 자신의 그림자 쪽으로 내리꽂았다.
그러나 그림자는 여유롭게 그 궤적을 피한 뒤 땅바닥에서 서서히 솟아올랐다.
“낄낄, 과연 언제쯤 내 존재를 눈치챌까 싶었는데 말이지.”
도윤이 그림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림자는 땅과 건물 벽에 자유자재로 들러붙으며 도윤의 검을 모조리 피했다.
아르테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외쳤다.
“그래서 그때 별주부가 이상한 말을 한 거였군, 요괴가 다름 아닌 도윤의 그림자에 들러붙어 있어서였어!”
“맞다, 제가 찾는 요괴가 항상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을 뒤지는 꼴이란! 그 바보 같은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요괴의 도발에 도윤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정화의 빛!”
도윤에게서 말간 정화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요괴는 그를 피해 후다닥 근처 가로수의 그림자 쪽에 들러붙었다.
‘해치웠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윤도, 아르테도 모두 숨죽여 나무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바람이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자 나뭇잎이 우스스 흔들렸다.
그리고 함께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에서 요괴가 멀쩡한 모습으로 떨어져 나왔다.
“정화의 빛은 안 통한다, 도윤! 스킬을 쓰는 순간 다른 사물의 그림자와 일체화해서 정화를 피하는 듯하다!”
도윤은 혀를 찼다.
사인검은 휘두르는 번번이 빗나가는 데다가 하필이면 지하국 대적과 내기에서 이긴 뒤 레벨 업 해서 받은 스킬은 방어 스킬이었다.
루나리안 점프 역시 회피기여서 타격을 입힐 순 없었다.
그렇다면 도윤에게 남는 공격 스킬은 오직 솔라리스뿐이었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가고 있지……!’
상황이 아주 불리하게 흘러갔다.
‘하다못해 6레벨을 만들어서 궁극기를 배웠어야 했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요괴가 이를 알고 본색을 드러낸 걸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항상 도윤의 발치에 머무르며 도윤의 모든 전투에 함께 한 요괴였다.
도윤의 스킬이며, 심지어는 도윤조차 모르는 약점까지도 전부 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도윤이 궁극기를 배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추측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도윤, 저 녀석의 정체는 의가작수다! 원래는 사람의 집에 숨어 살면서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요괴인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네 그림자에 숨어 산 모양이다!”
“의가작수를 상대하는 방법은 따로 없어?!”
“기록에는 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밖에 안 나와 있다!”
심지어 기록마저도 도윤을 도와주지 않았다.
해가 서서히 저물자 그동안 사인검을 피하기만 했던 의가작수가 매서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보호의 장막!”
결국, 공격을 견디지 못한 도윤이 새로 배운 스킬을 외쳤다.
보호의 장막
필요 소울: 30
재사용 대기 시간: 20분
사용자를 감싸는 보호의 장막이 펼쳐져 10초 동안 그 어떤 피해도 무효화된다.
보호의 장막은 일종의 무적기였다.
유지 시간은 10초인 반면, 재사용 대기 시간은 20분이어서 한 전투에 여러 번 사용하기는 어려운 스킬이었다.
그래서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만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걸 지금 쓰게 된 것이었다.
‘소울도 문제야. 180의 소울 중 사인검 소환에 10, 아까 정화의 빛을 한 번 써서 50, 지금 보호의 장막을 써서 30……. 합치면 90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 정화의 빛이나 솔라리스 같은 공격 스킬은 한 번밖에 쓸 수 없고, 나머지 스킬도 최대 세 번까지만 쓸 수 있다.’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킬 없이 사인검만으로 의가작수에게 피해를 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르테가 도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윤, 포기하자.”
도윤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되물었다.
“뭐라고……?”
“포기하자고 했다.”
도윤은 떨리는 눈동자로 아르테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르테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단순히 스킬이나 체력, 소울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윤. 지금 상태창을 켜서 한 번 봐봐라.”
그 말에 도윤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5
체력: 134 / 180
소울: 90 / 180
집념: 98 / 100
어느새 도윤의 집념이 98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전투를 지속하면 100을 넘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포기하면 지온은 어떻게 되는 건데?”
아르테는 침묵했다.
도윤은 아르테가 말하지 않은 지온의 미래를 점쳐봤다.
지온은 아마 요괴에게 생기를 뺏긴 것도 모른 채 다음 시즌 내내 슬럼프에 시달리며 부진한 성적을 낼 테고, 그러다가 계약이 종료되면 그 어느 팀에서도 제안이 들어오지 않아 조용히 은퇴하게 될 터였다.
그 이후엔 감독이나 코치, 아니면 게임 스트리머로 전향해 살길을 찾겠지만, 두 번 다시 프로 리그에서 선수로 뛰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제껏 도윤은 그런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봐왔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머지않은 도윤의 미래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마 지온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읽은 듯, 아르테가 애원했다.
“지온이 어떻게 되든 그건 요괴가 나쁜 것이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도윤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어.”
“도윤…….”
“이건 정의심 때문도 아니고, 이타심 때문도 아니야. 순전히 내 이기심 때문이야. 나는 지온이 선수로서 뛰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
아르테는 설득하는 어조로 말했다.
“도윤, 결국 모든 선수는 은퇴하게 되어 있다. 빠르냐 늦으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슬럼프 때문이 아니라, 걔가 직접 본인의 실력으로 꺾이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그 말에 아르테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도윤이 고집을 굽히지 않을 걸 깨달았다.
어느덧 도윤의 집념은 99로 올라간 상태였다.
이제 하늘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의가작수는 그림자의 힘을 이용해 도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저건 피할 게 아니라 맞받아쳐야 한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도윤이 외쳤다.
“솔라리스!”
처음으로 외치는 스킬 이름이었다.
허공에서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이 충돌하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도윤은 손에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최대한 의가작수의 쪽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갈수록 빛은 점차 약해졌고, 오히려 도윤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도윤, 차라리 솔라리스 스킬을 해제하고 옆으로 피해라!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아르테의 조언에 도윤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전혀 유쾌할 게 없는 상황인데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아르테, 네가 옛날에 그런 적 있지?”
그는 최초의 전투에서 둔갑 쥐를 해치우고 나서 아르테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얼핏 무모하거나 과감해 보일지 몰라도 필요한 타이밍에 승부를 거는 것, 그게 내 장점이라고 말이야.”
도윤은 점점 손에서 꺼져가는 빛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지금이 바로 그 장점을 발휘할 때야.”
도윤은 솔라리스 스킬을 해제하는 대신 의가작수와의 대치를 유지하길 택했다.
그 순간, 도윤의 집념이 100을 채웠다.
그리고 어디선가 띠링 하고 맑은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이건, 틀림없이 레벨 업 할 때 나는 소린데……?’
도윤은 의아하게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6
체력: 200 / 200
소울: 40 / 200
집념: 100 / 100
궁극기 스킬 획득!
도윤이 눈을 깜빡였지만, 레벨 옆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숫자 6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가작수도 무언가 잘못된 걸 예감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둠의 힘을 더 강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도윤, 궁극기를 써라!”
아르테의 외침에 도윤은 궁극기가 어떤 스킬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그 스킬 이름만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소리쳤다.
“백야!”
그러자 갑자기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백야, 하얀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분명 저물었던 태양이 다시 도윤의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도윤의 집념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해의 고도가 높아지며 그림자가 짧아지자 의가작수는 자신이 파고들 그늘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어떻게 어둠의 힘만이라도 간신히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 손에서는 어둠의 힘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수 초 전, 도윤의 손에서 빛의 힘이 흩어졌듯 말이다.
드디어 숨 돌릴 틈이 생긴 도윤은 궁극기 스킬의 설명을 확인했다.
백야
필요 집념: 100
재사용 대기 시간: 365일
지상에 하얀 밤을 불러옵니다. 24시간 동안 태양이 저물지 않습니다.
정확히 도윤의 집념이 100을 달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동시에 집념이 100을 넘기 전, 아슬아슬하게 집념을 소모할 수 있어 도윤에게는 마치 위기의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윤이 아르테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르테, 어떻게 요괴를 해치우지도 않았는데 내 레벨이 오를 수 있었던 거야?”
아르테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이 몸이 레벨을 설명할 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나, 도윤?”
“그야…….”
도윤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레벨이라고 함은 도윤의 루나리움 친화도와 숙련도를 의미한다. 도윤이 루나리움을 사용해 요괴와 싸워나갈수록 루나리움의 힘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걸 레벨로 표현해봤다.’
그제야 도윤이 설명의 빈틈을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몸은 단 한 번도 요괴를 해치울 때 레벨이 오른다고 한 적 없다.”
아르테는 이어서 덧붙였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도윤. 도윤이 이해하기 쉽도록 게임의 시스템을 빌렸을 뿐, 엄연한 현실이다. 상태창에 나와 있는 수치도 편의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 말에 도윤은 자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임은 삶을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순 있어도, 삶 그 자체가 될 순 없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 그러면 이제 최후의 일격을 날릴 차례다!”
아르테의 외침에 도윤이 의가작수를 향해 사인검을 휘두르려고 하자 아르테가 고개를 저었다.
“도윤, 사인검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지금 저 하늘에 네가 불러온 태양이 떠 있을 때, 가장 강력해지는 스킬이 있다.”
도윤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르테가 무슨 스킬을 말하는지는 곧바로 눈치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던 탓이었다.
“그렇지만 스킬을 쓰는 데 필요한 소울이 부족한걸?”
그러자 아르테가 도윤의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도윤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손끝에 걸리는 걸 끄집어냈다.
그건 홍대에서 아르테가 도윤에게 선물해 준 네 잎 클로버였다.
도윤이 전투를 하는 동안 도윤을 지켜주길 바란다며 선물한 행운.
그 코팅된 네 잎 클로버로부터 문득 티끌만 한 청록색 불빛 한 점이 떠올랐다.
그새 네 잎 클로버에 쌓인 도윤과 아르테의 추억, 감정, 그리고 이야기가 소울이 돼서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도윤이 검지로 살포시 그 빛을 건드리자 그 빛은 도윤의 몸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도윤이 상태창을 봤을 때, 소울의 수치가 달라져 있었다.
상태창
이름: 이도윤
레벨: 6
체력: 200 / 200
소울: 50 / 200
집념: 0 / 100
정확하게 스킬 한 번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소울이 그곳에 있었다.
도윤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의가작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흥, 종로 경기장의 요괴가 정말로 나인지 확인을 받고 싶은 거냐?”
도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내게 네게 낼 건 간단한 퀴즈야.”
“퀴즈라고……?”
의가작수는 내내 도윤을 따라다녔지만, 도윤이 요괴를 퇴치하는 순간에 퀴즈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어리둥절했다.
도윤은 지금껏 자신이 애타게 찾아 헤맸던, 그러나 어두운 등잔 밑에 숨어 있었던 바로 그 상대를 내려다보며 해맑게 물었다.
“너, 다음 시즌 리그에서 우승할 팀이 어딘지 아냐?”
대답은 불필요했다.
도윤이 곧바로 퀴즈에 대한 답을 스스로 소리쳤기 때문이다.
“솔라리스!”
‧
‧
‧
“솔라리스!”
“솔라리스! 솔라리스!”
오늘도 종로의 경기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윤은 슬쩍 지온을 향해 물었다.
“지온아, 오늘 컨디션 어때?”
“그야 당연히…….”
지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최고죠, 형. 말해 뭐해요.”
“그래, 이번에는 우승해야지.”
“맞아요, 스톰엑스에게 설욕을 갚아줘야죠!”
도윤은 지온에게 마주 웃으며 뚜둑 손 관절을 풀었다.
그런 도윤의 주머니에는 코팅된 네 잎 클로버 하나가 들어있었다.
도윤은 그 네 잎 클로버를 볼 때마다 마지막으로 아르테를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도윤, 이제 우리 계약은 종료됐다. 그리고 나는…… 이만 달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태양이 작열하던 그 날, 아르테는 국회의사당을 등진 채 도윤에게 말했다.
‘달에 돌아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고해야 한다. 또, 그 김에 우리 종족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생각이다.’
‘한 가지 부탁?’
‘그래, 바로 인간 한 명에게 달나라를 구경시켜주는 걸 허락해 달라는 부탁 말이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얘기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르테가 소리 내 웃었다.
‘남산타워에서 나중에 이 몸이 도윤을 달로 초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이 몸을 공수표나 날리는 허풍쟁이로 본 건 아니겠지?’
그러더니 아르테는 도윤에게 한쪽 손을 불쑥 내밀었다.
도윤은 그 손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곧 힘주어 맞잡았다.
문득 아르테와 처음 계약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 둘은 이렇게 악수로 인사했었다.
‘잠시 작별이다, 도윤. 내가 꼭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도윤은 몸 건강하게 있다가 리그 우승을 거머쥐어야 한다. 알겠나?’
‘물론이지. 아르테, 너도 건강해야 해.’
그렇게 작별 인사가 끝나자 아르테는 가슴팍에서 루나리움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의 커다란 돔이 열리더니 거기서 불쑥 로켓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국회의사당 밑에 거대한 로봇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소문은 들어봤어도, 옥토끼의 로켓이 숨겨져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는 도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르테는 도윤에게도 익숙한 루나리안 점프 기술을 써서 그 로켓에 탑승하더니 도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도윤은 숙소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대단한 꿈이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주머니에 바스락거리며 잡힌 것이 바로 네 잎 클로버였다.
‘도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 네 잎 클로버가 조금이라도 도윤을 지켜주면 좋겠다.’
물론 아르테가 말한 것은 요괴와의 전투였겠지만, 도윤이 생각하기에 게임 속 전투도 전투였다.
그래서 그 뒤로 경기가 있을 때마다 네 잎 클로버를 주머니 한구석에 챙겨 함께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도 그 부적은 도윤의 마음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자, 그럼 1세트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캐스터의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관중들의 환호가 쏟아지던 때였다.
도윤은 보고 말았다.
관중석 저편, 수십 명의 인파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그림자라 생각했다. 조명의 각도나 카메라 플래시가 만들어 낸 착시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하기엔 너무도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색 털은 부드러우면서도 복슬복슬해 보였고, 붉은색 눈동자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도윤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주위의 관중들은 오직 스크린만을 주시했고,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조그맣고 흰 생명체와 도윤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생명체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도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도윤 역시 그를 마주하며 회심의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