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힘든 일이지만, 서울에 있던 대통령과 장관들이 추방당했다.



" 지구는 기차와 지하철을 통해 이동하기를 즐기는군요? 그런데 출구 수가 좀 적네요. 아... 하긴, 인구가 900만명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죠? "


비로의 발언에 마음 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왔다. 네가 출퇴근 지옥철을 겪어봤어? 어?


" 정확히는 932만명이에요. 대한민국 도시 중에서 가장 인구 수가 많고, 세계적으로도 봤을 때도 인구 밀도가 높죠. "


" 정말요? 이 행성의 인구 수는 80억명이 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인구 밀도는 높지 않네요? "


" 비로 씨 눈엔 무슨 수치든 다 조그마해보일걸요. "


나는 한숨을 쉬며 비로를 데리고 계속 걸었다. 캐리어는 진작에 물품보관함에 맡겼다. 부산행 기차가 출발할 일은 당분간 없을테니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서울역 수색을 시작한 지 2시간 후, 나는 내가 다시 무게를 무겁게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 배를.


꼬르륵-


아오 쪽팔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비로를 보았다. 비로가 말했다.


" 슬슬 식사 좀 하고 갈까요? "


"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


나는 어색하게 편의점에 들어갔다. 도시락이나 먹어야지. 돈은 슬쩍 카운터 금고 안에 넣어두면 되겠지?


도시락을 까자 비로가 호기심이 깃든 오드아이 눈을 빛냈다.


" 현지의 도시락은 이런 식이네요? 오, 이건 뭔가요? "


" 김치요. 드셔보실래요? "


두 유 노 김치? 드립을 치고 싶지만 참은 나에게 치얼스. 그렇지만 비로는 내 제안에 고마워하는 티를 낸 것과 별개로 고개를 저었다.


" 저희 종족은 일반적인 음식을 먹지 않아요. 먹어봤자 입에 잘 맞지도 않고요. "


" 정말요? 색이 화려한 것 빼곤 인간이랑 똑같은데... 그럼 뭘 먹어요? "


비로는 정말 사람이랑 똑같았다. 덩치 크고 순한 대형견같은 인상. 흑발 아래 자주색과 연두색 시크릿 투톤이 있거나 왼쪽 눈동자는 자주색, 오른쪽 눈동자는 연두색 오드아이거나 하는 특이점은 있었지만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치면 모두 이 남자를 외계인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만큼 사람과 유사했다.


비로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돌렸다.


" 어... 별로 재밌는 주제는 아닐거예요. 그보다, 서율 씨는 서울에 대해 잘 아세요? "


왜 주제를 돌리지, 의아했으나 사회성을 발휘해서 그냥 넘겼다. 나는 비로의 말에 응하며 검은 깨가 뿌려진 계란후라이를 올린 쌀밥을 퍼먹었다.


" 그넉저럭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엄청 기대해서 열심히 배웠거든요. 여기 살면서 익숙해진 것도 있고, 선배들이 대충 지리는 외우고 있어야 편하다고 한 것도 있고... 하여튼 지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


그러고보면, 서울 생활에 치여서 처음의 열정을 잃어버렸지만 올라올 당시엔 이곳이 꿈의 도시처럼 느껴졌었지. 기차를 타고 도착할 때 서울이라는 표지판이 보이자마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 앗, 혹시. "


그러고보니 서울역을 수색할 때, 살펴보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보통 그쪽 방향으론 못 가니까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외계인이라면 심리적 제한 없이 넘나들었을지도.


비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요? "


" 네, 철도요. 플랫폼 너머 철도를 따라서 쭉 가보는 걸 안해봤어요. "


도시락을 다 먹은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랫폼으로 향했다. 철도를 따라 쭉 가보니...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 진짜로? 이렇게 대놓고 있어도 되는 거야? "


비행접시 형태는 아니지만, 캡슐같은 우주선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비로는 재빨리 우주선 곁에 뛰어가더니 홀로그램 장치로 스캔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어라? 이건 비허가 우주선이네요. 안을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자체 개발한 모양인데요. "


" 어쨌든 열 수 있으면 한번 열어보죠? "


" 네에, 잠깐만요... "


비로가 다시 장치를 우주선에 갖다댄 그 때였다.


푸쉬익-!


괴상한 연기 빠지는 듯한 기계음이 쨍하게 들리더니, 우주선의 외벽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 사용자 외의 접근이 확인되었습니다. 방어 모드를 전개합니다. '


'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방어 모드를 전개합니다. '


우주선 안에서 링 형태의 기계들이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았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뒤로 빠진 때였다.


철컥, 우웅-.


" 미친 저거 레이저포야?! "


콰자장-!! 철도 바닥을 녹여버리는 레이저가 쏘아지자 나는 기겁해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이걸 상대하라고? 절대 못해! 서울 탈환이고 나발이고 간에...


생각이 이어질 무렵 비로가 레이저총을 꺼내며 외쳤다.


" 서율 씨, 저건 제가 멈춰놓을게요! 기록이 지워지기 전에 서율 씨가 어서 안을 확인해주세요! "


이 씨, 이러면 도망치기도 이상하잖아!


한쪽에서 레이저가 오고가는 싸움이 벌어질 무렵, 나는 조심조심 움직이면서 우주선의 문 쪽으로 돌아갈 기회를 노렸다.


" 비로 씨, 저 레이저 제 쪽으로 안 오는 거 맞죠?! "


" 괜찮아요!! 제가 엄호할게요! "


인간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싸우는 걸 보면 인간같다는 감상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어느 인간이 레이저를 피해?


일단 비로 씨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믿어봐야겠지...! 숨죽여 접근해 우주선 뒷쪽의 곡선형으로 된 문을 열어젖혔다. 아까 장치로 스캔할 때 보안을 파훼한 모양이었다.


재빨리 안쪽 구조를 살피자, 여러 계기판들이 보였다. 대부분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자동 방어 모드가 가동되는 중이라는 경고창이 떠 있었다.


방어 모드란 걸 해제해보고 싶지만 알지 못하는 기계를 막 건드렸다가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으니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게 낫다.


우주선의 기록을 알기 위해선, 내가 크게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실시간으로 기록이 보안을 위해 삭제되면서 기록 내용이 화면에 뜨고 있었으니까!


" 출력 조절... 충격 분산 모드... 아, 뭐지 이건? "


검은 화면 위에 푸른색의 점선으로 된 도시 구조도가 띄워져 있었다. 서울역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는 걸 보니 서울. 그런데 사진이 내가 아는 서울과는 좀 달랐다.


이거, 서울은 맞는데... 서울이랑 완전히 똑같은 구조가 아니야.


이 사진들은 뭐지? 우주정거장같은 구조물도 있었고, 공중에 떠다니는 건물도 있었다.


" 서율 씨!! 이제 나오세요! 캡슐이 꺼질 거예요! "


재빨리 탈출하자마자 우주선에서 소리가 나면서 문이 그대로 멈췄다. 조금 더 늦었으면 갇혔을거다.


한편 비로는 링 형태의 레이저 장비를 전부 무력화시킨 모양이었다. 바닥은 녹아내려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비로는 아무렇지 않은지 기침 없이 나를 걱정하며 다가왔다.


" 이런 고생을 시켜서 미안해요, 서율 씨. 일이 끝나면 소정의 포상금을 드릴 수 있을거예요. "


" 안 죽었으니까 일단 됐어요... 그래도 폭주하는 우주선이랑 싸우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네요. "


그 뒤, 나는 비로에게 구조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일단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이상 장소 중 가장 서울역과 가까운 곳은...


" 숭례문이요. 숭례문이 구조도에서 이상했어요. 일단 거기부터 먼저 가볼까요? "


" 지금 단서가 없으니까 일단 짚히는 곳부터 방문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원래 수사의 기본은 탐문이라고요. 저는 형사과가 아니긴 하지만요. 하하. "


잠깐 웃은 비로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아까 경고 멘트가 외계어가 아닌 이 나라의 언어로 나왔던 것도 그렇고, 서울의 구조도를 보관하고 있던 것도 그렇고... 꼭 외부인이 아니라 지구 내부인인 것 같네요. "


" 초아가 지구인이라는 소리인가요? "


" 확실하진 않아요. 이 지구는 외계 문명을 접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데다, 지구에 전입 신고한 외계인들도 없었거든요. 가출이나 노숙하러 온 거라면 이야기가 맞긴 하겠지만... "


" 어쨌든 집이 없다는 게 완전 거짓말은 아닌 거네요. "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런 스케일의 사고를 친 건 황당하고 경계되는 일이었지만, 집 없는 떠돌이라고 하니 동정심이 문득 들었다.


정말로 그 애는 서울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한 국가의 수도. 그 무게감은 세계라던가 우주라는 것보다 작고 사소하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세계나 다름없진 않아도 개인에겐 한평생 다닐 세계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일평생 자신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일이 적다. 특히 서울의 경우엔 성인이 되어도 지방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않고.


익숙한 모든 것이 한 도시 안에만 속해있다면 거기서 안주하고 싶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 어서 숭례문으로 가봐요. 초아가 있을지도 몰라요. "


" 네! 그럼... "


" .....? "


비로가 웃으며 나를 봤다. 뭔데. 뭐야, 그 불길한 시선은.


" 서율 씨, 운전은 부탁할게요! "


" ...우리 뭐, 우주적인 이동수단 없어요? "


" 텔레포트 타고 좌표 찍힌 다른 은하로 넘어갈 순 있는데요. "


" 됐다, 그냥 갑시다... "


손짓으로 비로를 부르자 비로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덩치는 커도 귀엽네. 가만보면 저 정신 산만한 자주색과 연두색도 친근해지는 것 같았다. 뭐, 쟤가 좀 느긋하긴 해도 날 위험하게 만든 적은 없으니 점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 남았기도 하고.


여기서 벗어나봤자 시간이 멈춰있을 건데, 일주일 동안 고독 속에서 보내면서 사건이 해결될지 안될지도 몰라 불안할 바엔 이렇게 움직이는 게 낫다.


적어도 내가 사건 유발자이자 서울 공무원이잖아. 그냥 모르쇠하고 있으면 양심이 찔린다.


" 그런데 서율 씨, 저기 도로 좀 봐요. "


응? 비로가 서울역 유리창 너머를 가리키자, 나는 시선을 옮겼다가 입을 떡 벌렸다.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탓에 운전하던 차들이 그대로 멈춰있어서 도로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누가 운전하지도 않으니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도로는 계속 정체되어 있을 거다.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 그래도 시간이 멈춘 덕분에 추돌사고는 안 일어났네요... 하, 근데 이걸 생각 못했네. 자동차는 못 쓰겠는데요? "


" 곤란하네요... 좋은 생각은 없습니까? "


쓰읍, 나는 머리를 굴려봤다. 대중교통이든 지하철이든 다 안된다. 지하철도 멈춰서 선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걸어가기엔 너무 느려. 나는 한 가지 수를 생각해내고 손뼉을 탁 쳤다.


" 아, 하나 방법이 있어요. 서울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도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교통수단이에요. "


" 오, 그게 뭔가요? "


나는 말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서울 시민들의 친구, 따릉이를 아시나요?


끼익, 끼익 페달 밟는 소리가 고요한 서울의 도보 위에 작게 들려온다. 초록색 바퀴에 바구니까지 완비한 교통수단, 따릉이.


" 와아-. 바람이 약하게 닿는 게 기분 좋네요. 서율 씨도 이 따릉이란 걸 자주 타셨나요? "


" 아뇨, 정보만 알았어요. 그래도 직접 타보니까 꽤 좋네요. 어차피 가격도 얼마 안 나가고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으니까 다음엔 패스를 끊어볼까... "


이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을 산책하면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비로의 뒤에 타서 체력 소진 없이 한껏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따로 탔으면 숭례문까지 갈 때 녹초가 되어버렸을 걸. 아, 이런 상황에서 여유를 즐긴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 그래도, 서울에 대한 제 지식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좋네요. "


작게 중얼거리자, 비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듣기 좋다. 나도 미소지으며 서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주인이고 뭐고, 오늘의 서울은 하늘이 맑았다.


따릉이를 타고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 아, 드론이네요. "


" 드론이요? "


비로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니, 기계 골격에 구불거리는 덩쿨이 붙어있는 듯한 형상의 비행체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땅에도 레일이 연결되어 숭례문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숭례문을 바라본 서율이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 숭례문을 부수고 있잖아?! "


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호성을 질렀다.


" 화재도 당했는데 이젠 부숴?! 비로 씨, 당장 저거 막아요! "


한번도 안되고 두번은 더 안된다! 서율은 비로가 페달을 더 밟자 등을 꽉 붙잡고 열불을 냈다.


" 이거 혹시 초아 짓이에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


" 글쎄요, 일단 가까이 가보죠! "


옆에 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위해 일단 따릉이에서 내린 우리는 뛰어올라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조작 장치가 있었다.


물론 난 이게 뭔지 모르겠고! 비로가 외쳤다.


" 이걸로 드론의 활동을 뒤로 물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나라 말 중에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뭘 어느 쪽으로 복구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


" 아이 씨, 일단 저한테 물어봐요! "


밖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점점 크게 들린다. 이거 우리가 들어와있는 숭례문 자체가 무너지는 거 아니야?! 다급한 마음에 서율이 비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비로가 조작 장치 앞에 자리를 잡고 기기를 조작하더니 화면에 뜬 외계어를 보고 내게 물었다.


" 여기서 파수의식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데, 그곳이 어디죠? "


" 광장! 바로 앞에 있잖아요! "


" 아하, 그럼 이쪽 드론들은 광장에 배치되어있는 거구나. 잠깐, 하나 더요! 석축이 뭐죠? "


거기가 바로 화재로 전소된 곳이다. 아, 대한민국 국민들의 PTSD. 그러나 생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 서율 씨, 바닥 한쪽이 무너지려고 해요! "


" 그게 석축이에요! 돌로 이루어진 벽을 석축이라고 해요! "


그러자 비로가 얼른 기계를 조작하더니, 잠시 뒤 드론의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 네, 지금 해체 명령 떨어진 거 그대로 재설치 모드로 돌렸어요. 곧 원래대로 돌아올거예요. "


비로의 말이 들리자 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아, 설마 다른 건축물도 다 이렇게 무너진 건 아니겠죠?! "


" 그럴 가능성이 높죠. "


" 진짜 외계인답게 태연하시네요... "


내가 아무리 서울살이가 고달팠다고는 해도, 국보가 무너지는 꼴은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전에는 크게 자각하지 못했는데, 서울에는 참 많은 국보가 있었지.


일단 숭례문이 이전에 국보 1호였어서 으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복궁, 창덕궁, 종묘, 각황전 등등 곳곳에 있는 절이나 십층석탑 같은 것도 국가의 보물.


여기까지 생각한 뒤 오싹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 .....그러고보니 우주선에서 본 사진에선 경복궁도 없지 않았나? "


아, 진짜 머리 아프네. 비로는 허허 웃으며 나를 토닥였다.


" 지금 당장 가볼까요? "


" ...아뇨, 잠시만 생각을 정리합시다. "


이 나라 국민이자 공무원으로서의 혼이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잠깐 상황을 되짚어봐야겠다. 그러자 비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 마침 초아가 설치한 기계를 발견할 수 있어서, 작업 내역을 거슬러올라가 초아가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볼 수 있었어요. 서율 씨도 볼래요? "


기계 화면에 시선을 주자, 비로가 화면을 짚었다. 화면 위에는 이렇게 떠 있었다.


' 여긴 대체 어디야? 원래의 서울로 되돌려놔. '


원래의 서울이라고? 그건 마치 초아가 다른 서울에서 왔다는 뜻처럼 들린다. 비로가 화면을 톡톡 건드렸다.


" 시간 여행일 가능성이 높아지네요. 하지만, 시간 여행은 단속반이 엄중하게 잡을텐데...? 그리고 또 하나 걸리는 게 있어요. 기계 자체는 표준 외계어 사양인데 명령은 한국어로 했네요. "


내가 한국 사람이다보니 이상한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시점 차이가 있구나. 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굴렸다.


" 저번에 추측한대로 한국에서 오래 지낸 외계인일수도 있겠지만, 혼자 있을 때도 한국어로 말했다는 게 조금 걸리네요. "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까 먹은 도시락이 이미 다 소화된 것 같아.


" 하, 아아 한 잔이라도 마시고 싶네요. "


카페인 수혈이 시급하다. 비로가 맞장구를 쳤다.


" 그럼 복구도 다 된 것 같으니까, 밖에 나갈까요? "


비로는 기계에 단말기를 대더니 삑 소리가 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숭례문 밖으로 나가니 아까와 달리 금방 다 복구되어 있었다. 드론 수가 많으니 복구도 빠른가보지.


비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단말기를 두드렸다. 나는 서울이 엉망진창이 된 이 상황을 따라가는 것만 해도 머리가 벅찬데 얜 멀쩡한가보지. 어이없이 바라보는데, 드론 소리가 들렸다. 드론들이 두 개의 덩어리로 뭉치고 얽혀 캡슐 모양이 되어 있었다.


비로는 쨔라란~ 하는 효과음이 나올 것 같은 미소로 드론을 가리켰다.


" 이제부턴 저걸 타고 서울 내부를 둘러보면 더 빠를거예요. "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 자식, 쓸모 있어...!


느슨하긴 하지만 우주경찰이긴 한가보다. 덕분에 빠르게 경복궁으로 도착한 나는 몇 번인지 모를 탄식을 내뱉었다.


" 경복궁 없어졌네... 큰일났다, 이걸 어떻게 보고 올리지... "


얼마 정도의 벽만 남겨두고 그 광활한 건축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은 건 드론 떼뿐. 이건 드론을 조작하는 기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서율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 이건 또 왜 단청이지. "


그냥 비포장된 길이랑 돌이었잖아. 왜 단청인데. 왜 단청이 네온색으로 빛나는데. 오방색을 왜 멋대로 강화시키지?


바닥을 살펴보던 비로는 침음을 흘렸다.


" 아무래도 이 아래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지하를 새로 만들었나? 그런데 문을 열 방법을 모르겠네요. "


" 하루 안에 지하를 만들 수 있는 스케일이 참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네요. 태클은 이제 때려치워야지 원. "


" 일단 잠깐 쉬는 게 좋겠어요. 아, 저기 기념품 샵이 남아있네요. 저기에 마실 것이 있을까요? "


" 음... 카페 겸 기념품 샵이라서 남아있겠네요. "


나도 피곤한터라 지리도 모르면서 앞장서는 비로를 뒤따라 기념품샵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없는 가게에서 음료를 먹으려니 약간 양심이 찔렸기에 돈을 내서 양심을 중화시켰다.


" 비로 씨,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요? "


고심하는 비로를 보자, 비로가 반색하며 나를 보았다.


" 현지인한테 무슨 차를 마실지 추천받아도 될까요? 대추차랑 국화차같이 이 국가의 전통이 녹아들어있는 차가 좋아요! 지구에 온 김에 이런 것도 좀 마셔봐야죠. "


서율은 약간 떨떠름하기도 하고, 으쓱하기도 한 감정이 들었다. 하긴, 우리에게도 이런 전통차들은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키는데 외국인... 아니, 외계인이라면 더 기대되겠지.


" 국화차를 한번 마셔봐요. 아, 저는 박하차로 해야겠어요. 머리가 아파서. "


때 아닌 차 끓이는 시간을 갖게 되자, 마음이 비교적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서율은 경복궁이 없는 창 밖에서 눈을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하네요. 그 전까지는 물가니 뭐니 하는 거에 스트레스 받았는데, 생각보다... 서울이 이상해지니까 되돌려놓고 싶어요. "


" 그 전의 서울을 서율 씨는 좋아하지 않으셨나요? "


"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곳은 일하기 위해서 온 곳이니까요. 집이 다른 지역에 있는 저로서는 공사가 지역별로 구분되어 있는 기분이었어요. "


그러자 비로는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 그럼 지금은요? "


나는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비로가 짧게 웃었다.


" 제가 여러 행성의 도시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 어느 도시든,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있어요. 애초에 인구를 유지하지 않으면 타격을 입긴 하지만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데도 그 수많은 종류의 사람을 위한 복지가 세세하게 마련되어 있다는 건 노력이죠. 전 그러지 않는 지옥도인 행성들도 꽤 봐왔는 걸요. "


" 마지막 말이 무섭네요, 진짜. "


이 외계인 은근 섬뜩한 말을 할 줄 아네. 비로는 국화차를 마시더니 아차, 하고 눈을 깜빡였다.


" 그러고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제가 아까 초아가 시간여행자일수도 있다고 했던 걸 기억하시죠? "


" 아, 네. 뭔가 짚히는 게 있나요? "


" 저, 시간 여행은 원래 여행 초기에만 단속하지 그 시간에 오래 머문 여행자들에겐 단속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시간이 여행자들을 무시해버리거든요. "


" 무시한다고요? "


" 다른 시간의 존재는 현 시간에 간섭하지 못해요. 유령이 된다고 해야하나. 단지 우주선 정도야 똑같은 외부 취급이니 손댈 수 있지만요. 워프 에너지의 잔향이 남아있을 때만 세계가 연결된 후유증으로 잠깐 간섭이 가능하죠. "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투명인간 신세가 된다는 건가. 그럼 초아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비로가 턱을 쓰다듬었다.


“ 초아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던 것 같아요. ”


" 지금까지의 증거로 봤을 때, 초아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계약 때문인 것 같아요. "


서율은 숨이 턱 막혔다. 결국 나 때문에 이런 난장판이 벌어진 게 맞다고?


비로가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 쉽게 설명하자면, 마법 계약서라고 칭하죠. 이 계약서를 외계 상인들에게서 얻었던 모양이에요. 어쩌면 초아가 관련된 외계인들이 상인 종족이었을수 있고요. 이 계약서는 작성된 계약을 강제 이행시켜요. 물론 우주를 파괴시키는 계약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계약서 따위로 할 수 없지만요! "


그건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우주적으로 볼 때 서울같은 조그만 땅이라서 계약의 힘으로 깽판이 이뤄질 수 있었다는 거에 어이없어하려던 차에 비로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 하지만 이것도 적법한 계약자가 아니면 못해요. 그러니까, 서울 땅의 소유주는 국민들을 대리하는 정부죠. 그러니까 대통령과 계약했어야 정상적으로 계약이 처리될텐데... 급하게 최소한으로 공무원인 서율 씨를 데려간 거겠네요. "


" 뭐요? 그러니까 결국 약식 계약에 야매였다는 거죠? 그렇게 계약해도 돼요? "


" 물론 안되죠. 그래서 초아 양도 무언가 대가를 받았을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드론으로 장난치는 거 보면 목숨이 날라가진 않은 모양이네요, 다행이죠! "


나는 결국 아까 내가 했던 발언을 철회하고, 새로운 대답을 외쳤다.


" 다행이 아니잖아요, 이 외계인아!! “


서율은 박하차의 아릿하고 상쾌한 맛에 강제로 진정되며 숨을 골랐다.


" 그럼 정리해봅시다. 초아는 시간여행자이고, 다른 시간대에 온 대가로 원래는 간섭력을 잃어야 하는데 계약 때문에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데 야매 계약이라서 무언가 부작용이 일어났을 거다. 이거죠? "


비로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가 말을 덧붙였다.


" 물론 이건 가설이고,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 있죠. 그렇지만 상황이 나쁜 건 아니네요. "


외계인의 시선에는 그렇겠지. 그러다 나는 문득 질문했다.


" 그런데 외계엔 이런 마법 계약같은 게 흔해요? "


" 각 종족마다 고유 능력이 따로 있어요. 물리법칙에 관여하는 능력도 있고요. "


" 그럼 비로 씨도 종족 특성이 있나요? "


그러자 비로는 헛기침을 했다.


" 그으건 말하기 좀 곤란하네요... 지구인은 특성같은 게 없나요? "


주제 회피하는 게 보이지만 넘어가주자. 나는 대충 답했다.


" 뭐... 저희 한국인 특성이라면 김치 잘 먹기 유전자 같은 게 있을지도요. "


그러자 비로가 피식 웃었다.


" 아, 드디어 마음이 좀 괜찮아지신 모양이네요! 유쾌한 말도 다 하시고. "


" 덕분에요. 스케일이 하도 크다보니 정신이 확 날아가네. 전 그냥 서울같은 사이즈로 만족할게요. "


몇 번 농담을 주고받으니까 확실히 마음이 진정된 게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끙끙거리며 말을 뱉었다.


" 초아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있을까요, 그 애. "


" 제 생각에는 이 지하에 있을 확률이 꽤 높아보여요. 아까 보안이 꽤 철저했거든요. "


" 끄응... 그럼 파훼할 방법은 없나요? "


" 제가 생명체를 다루는 건 자신있는데, 기계 해킹하는 재주는 없어서...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요. "


그럼 어쩌지? 머리를 굴리던 나는 괜찮은 수를 생각해낸 것 같아 비로에게 물어봤다.


" 아까 제가 본 사진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현실과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거든요. 숭례문이나 경복궁처럼 그 건축물들도 드론으로 개조했을까요? "


" 그렇겠죠, 아마도? "


" 그 드론들은 조작 기계 장치만 찾으면 비로 씨가 조작할 수 있고요? "


비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내 계획이 통할까 말까 고민하다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 그럼.... 그 드론들을 모두 모아서 지하로 이어지는 바닥을 뚫을만큼 폭격할 순 없을까요? "


그러자 비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오... 서율 씨, 과감하시네요. 가능은 할 것 같아요. 와, 근데 발상이 참... "


" 계약 부작용 있을거란 걸 알고도 허허 웃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


" 어라, 그런가요? "


능청스럽기도 해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침 어디로 가야할지 떠올랐어요. 이제 출발하죠. "


비로가 드론을 단말기로 부르며 어리둥절해했다.


" 어디로 가시려고요? "


" 그야, 이 서울의 랜드마크격인 건축물들이 개조되고 있다면. 그리고 초아가 알던 서울로 개조되는 중이라면... 초아의 서울을 알 만한 단서가 많은 건축물이 하나 있어요. "


비로의 시선을 받으며 내가 목적지를 알렸다.


" 별마당도서관으로 가죠. "


별마당도서관은 국보는 아니지만, 서울의 유명한 코스였다.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위치한 별마당도서관은 초대형 규모의 도서관으로, 책들도 함께 변형되었다면 초아의 서울 시간대에 걸맞는 책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드론 택시를 타고 도착한 코엑스몰은 외관부터 확 바뀌어 있었다. 보통 코엑스몰은 공중에 떠다니지 않지, 응.


" 고소공포증 있었으면 큰일날 뻔 했네... "


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에서 둥둥 떠 있는 코엑스몰 안에 들어가니 안에는 아직 세부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지 드론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쟤네들도 참 바쁘게 일한다.


" 딱 별마당도서관에 기계 장치가 있으면 좋을텐데요... "


그러자 비로가 좋은 소식을 전해줬다.


" 책같은 정보물을 수천, 수만 개 생성하려면 아무래도 도서관 쪽에 기계 장치를 설치하는 게 초아에게도 편했을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에 있을 확률이 높죠! "


아 진짜?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기저기 안 돌아다녀도 돼서 다행이다. 별마당도서관에 들어서자 비로가 오, 하고 감탄했다.


" 지구인들도 공중부양하는 법을 알고 있었나봐요? 천장에 책꽂이가 있네요. "


그거 그냥 장식인데. 하지만 굳이 얘기하지 말고 감탄하게 냅두자. 나는 별마당도서관 안을 둘러보며 나도 내심 신기해했다. 한 두 번 와본 적은 있었는데, 기력 빨려서 더 이상 관광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나도 서울 시민인 것 치고 익숙하지 않긴 했다. 


" 아, 서울 시민... "


이유모를 쑥스러움에 뒷통수를 긁적이며 벽에 붙어있는 분류표를 봤다가 어서 비로를 불렀다.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거 한국십진분류법이 아닌데요? 그리고 아까 숭례문의 기계 화면에 있던 외계어로 번역도 되어있네요! "


내게 불려온 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건 우주표준도서분류법이네요. 시간순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 기준으로 분류하고... 여러 외계 서적도 외국어 분류에 포함되어 있고요. 역시 서율 씨의 말대로 책들까지 바꾼 것 같아요. "


" 그럼 현재 분류에서 서울 관련 자료를 찾아보죠. 초아가 왜 이렇게 서울을 개조하는 건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러자 비로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 그럼 여기에 아카이브 시스템이 있을거예요. 제가 찾아볼테니 여기 계세요! "


비로는 도서관을 둘러보겠다고 하더니 책꽂이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빠르기도 해라. 나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고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진 뒤 처음으로 혼자 있는 거네... "


우주경찰이라는 비로랑 늘 붙어다녔지. 그리고 그게 그나마 심리적 지지대이기도 했다. 갑자기 서울에 아무도 없어진 상황에서 혼자 남았다면... 으,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진짜 끔찍하네.


비로가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물론 그 허전함은 보다 크긴 했다.


" 원래 여기엔 외국인이나 책 읽으러 오는 시민들이 있었을텐데. "


이젠 아무도 없다. 비로의 말을 떠올려보면 죽지 않았다고 하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해도 그리운 걸 보면 꽤 잘 살고 있었던 거겠지.


" 서율 씨! 서울 서적이 어딨는지 찾았어요! "


으악 깜짝이야. 불쑥 나타난 비로의 손목에는 홀로그램이 부착되어 있었다. 도서 제목과 일련번호가 새겨져있는 걸 보니 아키이브 시스템을 찾았나보다.


" 그럼 이제, 초아의 서울이 뭐였는지 확인해보죠. "


비로를 따라가는 길은 꽤 멀었다. 아니 진짜 길었다. 개조하면서 도서관 크기도 늘어난 듯했다. 기껏 약간 폼 잡았는데 이렇게 힘들어해서야 멋이 전혀 안 나잖아?


" 서율 씨, 드론 불러드릴까요? "


" 아뇨... 조금만 더 가보고요. "


지금까지 얼마나 걸었는데 좀 힘들 수 있지. 나는 헛기침을 하고 비로를 따라 걸었다. 비로는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추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손가락을 따라 올려보다 입을 떡 벌렸다.


책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 공중 책장? 역시 지구인의 상식으론 머리가 아프네요. 지금까지의 세상이 다 부정당하는 기분이야... "


궁시렁거리며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고 책장을 뒤졌다. 서울의 역사, 서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서울 침공의 날... 뭐? 


" 서울 침공의 날? "


역사책이나 에세이 사이에 침공? 침공? 표지에 UFO 사진이 찍혀있는 걸 보고 난 홀린 듯 책장을 넘겼다.


그 책의 목차부터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았다. 외계인의 이주, 공존, 평화 조약... 미국 대통령과 에일리언이 악수하고 있는 사진을 보며 나는 다시 머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혼란 상태에 빠진 나 대신 비로가 힐끗 보더니 해설해주었다.


" 초아의 지구에선 외계 문명을 받아들였나보네요. 그렇다는 건 초아가 정통 지구인일 가능성도 높고요. "


" 그렇다는 건... 서울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냥 고향이라서일수도 있는 건가요? "


" 계약을 한 것 자체는 빨리 어떻게든 존재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하필 공공장소인 서울역에 떨어져버렸으니 서울 전역 소유주를 상대로 계약해야 해서일거에요. 안전 지대를 당장 갈 수 없는 곳으로 설정해버리면 계약을 해도 유령이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


" 요약하자면 대통령을 찾아갔어야 했는데 타임 리미트가 있어서 도박수를 쓴 거다? "


" 완벽하네요. 서율 씨가 이렇게 잘 요약해주니까 마음 놓고 비문 써도 되겠어요~. " 


어처구니가 없어질 무렵 비로는 초아가 서울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지는 좀 더 봐야겠다면서 책장을 넘겼다. 책장에는 여러 삽화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보고 나는 탄성을 뱉었다.


왜냐하면, 감탄할 만큼 멋진 메카-남산타워가 있었기 때문에.


" 이 남산 타워! 제가 우주선에서 봤던 사진이랑 똑같아요. 타워 주위에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건물이 붙어있잖아요! "


그럼 역시 초아는 이 세계의 서울을 자기 세계의 서울로 바꾸려고 했던 것 같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더 증거가 나올까? 어차피 제지할 사람도 없으니 책을 쌓아놓고 빠르게 넘겨보는데, 이번에는 비로가 무언가 찾았는지 나를 불렀다.


" 이 책의 삽화에 주석 달린 거 보이세요? 개인 워프 캡슐 최초 도입, 이라고 쓰여져 있네요. "


비로가 보여준 책의 삽화를 보니 초아의 우주선과 비슷한 모양의 캡슐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초아의 우주선은 워프 캡슐이었고, 어쩌다 우리 세계로 오게 되었다는 거네요. ...어라? 근데 이거, 2025년이라고 쓰여져 있네요? "


그랬다. 삽화의 주석에는 2025년, 개인 워프 캡슐 최초 도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시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거 아니야? 초아가 지구에서 살던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인이라는 가정 하에 나는 초아가 미래인일 줄 알았는데, 2025년이면 현재다.


우주인인 비로도 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 설마...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온 게 아니라 수평으로 이동한 건가? "


" 그게 무슨 뜻이에요? "


" 다중 우주라는 걸 지구인들도 아나요? "


" 알아요. 응? 설마 다른 평행세계에서 왔다고요? "


" 네, 정확히 말해선 초아는 지구가 외계 문명을 받아들인 평행세계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높죠. 평행세계 이동이라... 그런 건 저도 들어본 적 없는데요. "


" 외계인들도 그런 건 못해요? "


" 물론 어느 행성에서는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주는 광활하고, 제가 모든 우주의 정보를 아는 건 아니니까요... "


우리는 고심에 빠졌다. 초아는 왜 평행세계의 지구로 온 걸까? 아니면, 오려고 한 적 없던 걸까?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비로였다. 비로는 볼을 긁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 일단 드론을 조종하는 기계부터 먼저 찾아볼까요? "


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어쨌든 초아를 만나야 해결되는 일이다. 나는 비로를 따라가며 약간 볼멘소리를 했다.


" 그런데 혹시 초아를 한번에 잡을 장비같은 건 없나요? 그런 게 있었으면 훨씬 편했을 것 같은데... "


" 에이, 순경한테 장비 지원을 빵빵하게 해주지는 않죠, 아무래도. "


그건 맞는 말인데. 왜 이런 부분에서만 현실적이지? 여러 갈래로, 그리고 위 아래로로도 이동할 수 있는 초거대 도서관 한가운데서 벽에 부착된 표지판만 보고 길을 찾던 나는 표지판에 적혀있는 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 공학 부문 - 기계 수리 '


직감이었을까, 나는 비로를 멈춰세웠다.


" 저쪽으로 한번 가봐요. "


기계 수리 책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곧 돌아가고 있는 기계 장치를 볼 수 있었다. 아까 숭례문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내 시선은 한쪽에 쌓인 책무더기로 향했다.


' 워프 오류 해결법 '


' 우주미아가 되었을 때 '


' 집에 돌아가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것들 '.....


" ...... "


나는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출청소년이 아니라, 가출당한 청소년이었다.



비로는 기계 장치를 손쉽게 접수했다. 저 단말기가 기계 해킹에 능한 것 같았다. 저거 좀 탐나네.


" 이제 이쪽의 드론들도 제가 다룰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경복궁의 지하를 타격하려면 드론들이 더 필요한데요. 이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요? 혹시 드론들이 많이 필요할만한 곳을 아시나요? "


" 음.... "


어디로 가야 할까? 한강? 남산타워? 국립중앙박물관? 아니, 아니다. 드론들을 많이 사용하려면 부속물이 많은 곳이 좋다.


" 광장시장으로 가죠. 거기만큼 세세하게 복구해야 하는 곳은 없을 걸요. "


벌써부터 빈대떡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비싸긴 했지만 맛있긴 했어. 약간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렇지만 역시, 드론 택시와 함께 도착한 광장 시장은 싹 갈아엎어져 있었다.


" 죄다 자판기에 담아놨잖아... 정이 없어... "


음식은 자판기에, 사람 대신 로봇이 물건을 전달해주고, 키오스크 비슷한 계산기도 있고.


거의 공장인데, 이건? 게다가 광장시장에 원래 있던 음식들도 다 사라졌다. 자판기 안에서 눈알이 여러 개 달린 문어가 숙성되어 있는 유리병을 발견한 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초아야, 네 서울은 대체 어떤 꼴인 거야?


" 우와, 저 우주문어 아직 살아있네요. 대체 어디서 공수해온 거지? 아니면 분자 재구성해서 제작했나? "


댁은 왜 두근두근하고 있어요. 아, 그러고보니 저 사람 아까 아무것도 못 먹었지? 도시락 나만 먹은 게 미안해서 조금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 저...런 걸 먹고 싶다면 먹어도 돼요. 암만 우주인이라도 배고프긴 할거잖아요? "


그렇지만 비로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 으음, 먹는 모습이 좀 흉해서요. 서율 씨가 놀랄까봐 걱정이에요. "


" 머리가 네 개로 갈라지며 열린 채로 음식을 안에 삼킨 뒤 다시 원상복귀되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요. "


" ...그럼 안 할게요! "


아니 진짜 뭔데. 제발 나를 두렵게 하지 말아줘. 내 표정을 봤는지 비로가 웃었다.


" 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그보다 이곳의 드론 조작기가 있는 위치를 찾아보죠. 현지인으로서 짐작가는 곳이 있으신가요? "


장난 맞지? 나는 불안함을 삼키며 더듬거리는 답변을 내놓았다.


" 아까 기계 조작 장치가 있던 위치를 보니까, 초아가 관심을 가진 것들이 주변에 있는 곳에 기계를 설치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여기도 초아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


" 좋아하는 음식... 저희로선 모르지 않나요? "


" 아, 하나 짐작가는 건 있어요. 한국인이라면 외국에 나갔을 때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는 음식이죠. "


" 뭔가요? "


" 김치요. "


" 그럼 김치가 있는 자판기를 찾아가면 되겠네요!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


" 저도 이런 광장시장은 처음이거든요... 게다가 반찬가게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음식이라 가게가 너무 많아요... "


이게 또 문제네. 초아가 김치를 찾았을 거라는 것도 내 뇌피셜이지만 그래도 근거는 되잖아. 아예 맨 땅에 헤딩하는 것보단 낫지.


결국,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숭례문은 바로 찾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까 기념품 샵에서 쉬어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철퍼덕 넘어져버려서 비로 씨한테 업혀갔을지도 몰라. 저 남자는 진짜 아무 거리낌없이 업어줬을 것 같아서 상상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 서율 씨, 저 현수막 좀 보세요. 국산 브로커가 뭔가요? "


" 국산 브로콜리를 잘못 표기한 거예요... 아, 외계 문명 들어와도 이런 건 달라지지 않는구나. "


어쩐지 구수하네. 그래, 서울도 사람 사는 곳이지 뭐.


누군가는 서울을 소중한 고향으로 삼을 정도로.


어쩌면, 나도 그저 일 때문에 서울에 오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해.


" 서율 씨, 서율 씨? "


" 아, 네. 무슨 일이에요? "


" 기계 장치 찾았어요. 근데, 문제가 좀 있네요. "


눈을 들자 나한테도 드론을 조작할 수 있는 기계 장치가 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문제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 기계 장치를 중심으로... 음식들을 생산해내고 있네요. 진짜 공장을 한가운데에 만들어버렸잖아. "


기계 장치에는 여러 전선들이 부착되어 있었고, 그 전선들을 따라가보면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기계는 원통 형태로 생겼는데 드론이 어떤 물건을 찾아와 집어넣으면 곧장 다른 음식으로 환원되듯 생성해냈다. 그리고 그 제품은 드론이 가져가 다른 자판기에 배치했다. 아, 저런 거 하나만 있어도 떼돈 벌 수 있을텐데. 비로는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 드론 조작기에 다가가려면 전선들을 분리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다른 기계들이 꺼져버릴거예요. "


" 꺼져도 어차피 음식을 생성해내지 못할 뿐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


" 아까 우주선의 방어 모드 기억나세요? "


" 아하. "


바로 납득했다. 그럼 어쩌지? 내게 답을 알려줘, 우주경찰. 난 9급 행정직일 뿐이란 말이야. 말을 들어보니 당신도 순경이면 9급이겠지만 어쨌든 단위가 우주잖아. 그런 시선으로 비로를 보니 비로가 머쓱해했다.


" 음... 일단 단말기로 관리자 권한을 탈취하는 동안 드론에게 공격을 받아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제가 버텨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저희 쪽 드론으로 감싸면 좋은데... 그건 따로 쓸모가 있으니까. 바리게이트를 치는 것도 공간 부족하고요... 아. "


" 뭔가 방법이 떠오르셨나요? "


" 제가 식사를 하면 될 것 같아요. "


결국 식사란 걸 해버리는 건가? 하는 건가? 비로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워했다.


" 서율 씨가 기대하시는 것보다는 별로 대단하지 않아요. 서율 씨는 밖에 나가있으셔도 되는데... 아, 이런 변이된 지역에 별 다른 힘 없는 지구인을 내버려두는 건 역시 아니죠. 어차피 저만 공격할테니까 있으셔도 돼요. "


그래도 눈은 감아달라고 부탁하는 비로를 보며 나는 인간의 고질병이 호기심임을 실감했다. 나도 그 병을 지금 당장 겪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뭘까? 진짜로 에일리언화되나? 장난이라고 하긴 했는데 말이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비로는 다른 드론들을 단말기로 움직여서 계속 자원을 환원기에 넣도록 했다. 그러자 원통형 기계에서 감당 불가능한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생성되기 시작했다.


" 와, 크라켄이다. "


멍하니 중얼거린 나는 3초 뒤, 전속력으로 뛰어 거대한 오징어와 거리를 뒀다. 나는 본능적으로 비로를 손가락질했다.


" 이런 걸 먹어요?! 어쩐지 도시락도 안 먹고, 아까 그 괴상한 문어 보면서 입맛 다시더라!! "


" 아, 아니에요! 저도 이런 건 안 먹어요! "


" 그럼 크라켄은 왜 꺼낸건데요? "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비로를 훑어보았다. 지구인의 상식과 멘탈 따윈 가볍게 날려버리는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것 치곤 외계인인 걸 잘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비로가 외계인이란 걸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먹는 건 둘째치고 지구인의 배짱으론 크라켄에게서 등을 돌리고 한눈파는 짓은 못하는 걸!


아, 오징어 눈깔이랑 눈 마주쳤어. 속이 더부룩해져 나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저 다리에 잡히면 끝장날 것 같았다. 비로는 손을 내저었다.


" 조금만 있으면 끝나요. 잠깐만요... "


그러더니 비로는 망설임 없이 전선들을 뚝뚝 끊어내고 재빨리 단말기를 기계에 가져다댔다. 그 순간, 꺼진 기계에서 오류 표시가 뜨더니 크게 알람이 울렸다.


우우웅-. 알람에 반응한 드론들에게서 붉은 불빛이 반짝였다. 반응한 건 드론만이 아니었다.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크라켄이 몸부림을 치더니, 비로를 그대로 거대한 다리로 감싸버렸다. 


" 비로 씨?! 괜찮아요?! "


" 괜찮아요!! "


" 지금 당신 꽉 조여지고 있는데요?! 진짜로 괜찮아요?! "


그러나 다음 대답은 없었다. 비로가 완전히 크라켄에게 덮혀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비로 씨!! "


드론은 드론대로 크라켄 속에 파묻혀버린 비로를 겨냥한 채 레이저 총알을 쏴대고, 크라켄은 크라켄대로 아픈지 마구 다리를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다가 이변이 일어났다.


크라켄이 갑자기 뚝 멈춰버린 것이었다.


저건 또 왜 저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레이저 총알이 비로의 머리를 날려버리진 않는지 초조해했다.


그리고, 우웅-. 다시 기계 가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드론의 총알 세례가 멈췄다. 너덜너덜해진 우주 크라켄 안에서 나온 비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비로가 괜찮은지 확인하며 물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


" 아, 음. 그냥... 먹었어요. "


뭐를? 비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 속내를 읽은 건지 대답했다.


" 영혼을요. 저희 종족이 생명체의 영혼을 먹고 살거든요. 그래서 방어막 역할만 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영혼을 먹었어요. "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제일 위험한 능력이었잖아? 그래도 머리가 쩍 갈라지진 않으니까 안심이다.


" 경찰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민원에 좀 시달리지 않아요? "


" 어, 어떻게 알았어요? "


비로가 놀란 눈을 하자 나는 툭툭, 내 어깨를 두드렸다.


" 저도 공무원이니까요. 대충은 고충이 짐작되네요. "


" 서율 씨는 안 무서우세요? 대놓고 말하자면... 제가 배고팠을 때 서율 씨의 영혼을 한입 베어물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


" 어차피 사람 영혼을 안 먹어도 되잖아요? 비로 씨도 그런 건 안 먹으실 것 같고요. "


" 그렇긴 한데... 그렇네요. 제가 지구인의 담력을 얕봤나봐요. "


비로는 씩 웃었다.


" 지구란 거, 재밌네요. 다음에도 또 와보고 싶어요. "


좋은 인상을 받았나보네. 외계인이 나로 인해 지구에 호의적이게 됐다면 당연히 나도 뿌듯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지구 침략은 하지 마시고요. 뭐, 저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겠지만.


" 그럼 배도 채우셨으면 한번 물어볼까요? 드론이 더 필요할까요? "


" 아뇨, 이제 가도 좋을 것 같아요. 경복궁 지하로 들어가보죠. "


드론의 몸통박치기 시전, 드디어 하는 건가. 드디어 초아를 마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렸다.


" 서율 씨, 롤러코스터 잘 타요? "


" 네? 갑자기요? 아뇨...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


" 음, 그럼 눈 감고 있으세요. "


불길한 말에 내가 비로를 붙잡기도 전에, 비로는 단말기를 조작하더니 드론 택시에 날 태워버렸다. 드론 떄문에 앞이 가려져서 안 보여!


" 비로 씨! 지금 우리 뭐하는 거예요?! "


일단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바람은 확실히 느껴지거든요?! 내가 비명지르듯 외치자 비로가 쾌활하게 웃었다.


" 드론으로 경복궁 지하로 향하는 문을 뚫은 뒤에 초아가 복구해버리면 곤란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전에, 빠르게 하강할거예요. "


갑자기 왜 롤러코스터 운운하나 했다!! 나긋나긋한 말과 반대로 드론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이거 자이로드롭도 섞여있네?! 롯X월드 안 부럽겠다!!!


하늘에서 우뚝 멈춘 드론을 느낀 서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원래 놀이기구란 것은, 떨어지기 직전에 폭풍전야를 가지는 법이다.


" 으아아아아아악-!!!!!! "


세상이 90도로 돌아가며 서율을 태운 캡슐이 전속력으로 떨어졌다. 하여튼 간에 우주인이란 건 섬세함이 없는 거냐고!!!



" ...우욱. 웨엑. "


" 서율 씨, 괜찮아요? 지구인은 어떻게 해야 회복되나요? "


그냥 보지 말아주세요... 실컷 토하고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입을 닦고 주변을 보았다. 이곳은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경복궁인 건 확실했다. 경복궁의 구조 자체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렇지만, 거대한 속이 빈 원 형태 안쪽에 중력을 무시하고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이집트 미술을 현실로 구현화한 것 같았다.


" 하.... 멀미약 없죠? "


비로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중력을 거슬러서 올라가야 하는 어지러움은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지? 어쩔 수 없다. 나는 각오를 다졌다.


어쨌든 내가 저지른 일인데 여기까지 와서 도망갈 순 없어. 적어도 초아를 만나야겠다.


"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서율 씨? "


"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볼게요. 저건... 경회루인가? 그럼 중간지점 즈음에 와 있는거네요. "


경복궁 구조를 떠올려보았다. 물론 서울 지리를 외웠다고 해서 한번에 다 기억나진 않았다. 경복궁 건물 위치들을 굳이 다 외우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까.


" 일단... 제일 중심은 역시 근정전이죠. 광화문 방향으로 가면 되니까 아래로 내려가면 되는데... 아,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헷갈리네. "


" 그건 이쪽으로 가면 돼요. 그런데 근정전이 뭔가요? " 


" 간단히 말하면 어좌, 이러면 못 알아듣겠구나. 그러니까 이 나라의 왕이 알현받던 곳이라고 보면 돼요. 경복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죠. "


근정전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창문이 열려있어서 안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서울에 상경했을 때는 아니고, 어릴 때 서울 여행을 했을 시기에.


참, 색은 소박해보이는데 구조는 섬세했지.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기억을 되새기며 걸으니 근정전까지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중력을 거스른 채로 어린 시절의 추억 속 궁궐을 확인하려던 차에, 비로가 외쳤다.


" 저것 좀 보세요, 서율 씨. 워프 캡슐이에요. "


근정전 안에는 여러 기계들이 쫙 깔려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원형 관 안에는 초아의 워프 캡슐이 들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저번과 달리 크기가 작고 간소했다.


" 간이로 만든 건가봐요. 저렇게 만들면 위험해서 불법인데... 그런 것도 상관없었던 걸지도요. "


간략하게 설명한 비로는 워프 캡슐 근처로 다가갔다. 워프 캡슐 근처는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고 있었다.


" 괜찮으니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이 워프 홀, 불안정한데 뭔가 들려요. 다른 시간대에 연결되어 있나봐요. "


비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보니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 ....했, ...있었어. "


비로의 손가락은 바로 노이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즈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작고, 익숙치 않았지만 저 목소리가 내 일생일대의 사건을 일으켜주었기 때문에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초아의 목소리다.


" 집에... 돌아가고 싶어. "


초아는 훌쩍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의 내가 떠올랐다.


비로가 없었으면 나는 이 낯선 서울에 홀로 남겨져 패닉해버렸겠지. 물론 초아와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난 내가 아는 서울에 그대로 남겨져 있는 대신 사람들이 몽땅 사라져버렸고, 초아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전혀 낯선 서울을,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세상에 혼자 떨어져버리게 됐으니까.


" 쟤... 중학생인가요? "


"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요, 어른도 보통 조난당해버렸으면 침착할 수 없죠. "


비로가 나지막히 말해주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 못 돌아가면 어떡하지... 아니, 아니야. "


초아의 목소리가 낮아져서 나도 절로 집중했다. 노이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깊었다.


" 못 돌아가겠지... 그럴거면 차라리, 여기가 다른 세계라는 걸 모르는 편이 좋았을텐데.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초아가 서울을 개조한 뒤의 다음 행적이 뭐일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말을 꺼냈다.


" 서울을 자신의 고향처럼 되돌리고, 기억을 조금만 지워버린다면 적어도 여기가 낯선 세계는 아니라고 착각하며 살 순 있겠네요. 간이 캡슐을 만든 것도 실패했고, 계약 부작용도 작용하고 있을 테니까 심리는 이해돼요. "


" 그래서 사람을 전부 내쫓아버린 걸지도요. 이 서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900만 명이나 있으면 당연히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버릴 테니까. "


나름의 절박함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초아가 불쌍해졌다. 서율은 결론을 내리고 비로를 바라보았다.


" 근데, 쟨 사람이 필요해요. "


의지할 사람을 만들어줘야 해. 혼자 패닉에 잠겨버리면, 이런 엄청난 짓도 저지르게 되어버린다.


" 일단 찾아내죠. 찾아서... 대화를 해봐요. "


" 초아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서율 씨? "


" 지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완벽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제가 우리 서울의 대표자가 되어버린 모양이라서요. 한 마디는 해줘야겠어요. "


그러자 비로가 미소지었다.


" 이러니저러니해도 서울을 '우리' 라고 부르시네요. " 


나는 잠깐 멈칫하다, 멋쩍게 웃었다.


" 결국 절 받아준 곳이잖아요. 그럼 우리죠. "


서울살이가 팍팍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한 때는 그랬다. 그리고 물가 상승이나 집값, 경쟁 등 특유의 분위기와 단점도 있다는 것을 지금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도, 완벽히 남이라고 하기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들을 챙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정책이, 인프라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라고 불러도 되잖아.


" 별 수 없게도, 우리네요. "


한 때 외지인이었던 한서율은, 머쓱하게 애정을 인정하는 투로 나지막히 말했다. 



" 좋겠다, 당신. "


익숙치 않은, 그러나 방금 들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향은 노이즈 쪽이 아니었다. 정반대. 그렇다는 말은,


" 당신은, 나만 없으면 '우리'로 돌아갈 수 있겠네. "


비아냥거리고 있는 표독하고도 어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초아였다.


검은 단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공중에 흔들거리고, 눈동자 또한 좌우로 굴러간다.


" 초아야...! "


드디어 만났다. 내가 놀라며 한 발자국 가까이 가려고 하니 비로가 나를 말렸다.


" 잠깐만요, 서율 씨. 제가 먼저 가볼게요. 그러니까... 초아야. 네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빠가 왔는데, 잠깐 내 말을 들어줄 순 있을까? "


" 당신이 누군데? 그리고 왜 서율 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서울에 있어? 분명 시민들은 다 내쫓았는데. "


어라. 서율은 비로와 초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뭐지, 이 위화감?


" 나는 우주경찰이야. 아, 하지만 초아를 체포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니? "


그 순간, 초아가 머리가 아픈 듯 윽,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 초아야? 왜 그래? "


" ...뭐라고? 네가 뭐라고? "


" ...우주 경찰인데. "


" ...뭐라고 했어? 제대로 말해. "


비로와 서율은 눈을 마주쳤다. 서율의 얼굴에 삐질 식은땀이 맺혔다. 서율이 약간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 잠깐만, 너 외계에 대해 몰라? 너희 쪽 서울이 외계 문명이랑 엮여서 발전했었잖아. "


그러나 초아는 잠시 머리 아파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왜 그렇게 작게 말해? 전혀 모르겠다고. "


아, 이거 큰일났다. 비로 쪽을 보니 비로가 중얼거렸다.


" 계약을 약식으로 해버린 대가로 우주 키워드와 관련된 건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아요.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지금 상황에선 되게 곤란하네요... "


서율도 비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소곤거렸다.


" 이제 어떡하죠? 우리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믿음을 어떻게 얻어야 할까요? "


" 음... 이 세계는 사실 소수의 이능력자가 존재하고, 우리가 이능력자라는 설정으로 갈까요? "


" 진짜 변명거리도 안될 것 같은데 상대도 유사 판타지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 통할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보여줄 이능력이란 게 있어요? 우주경찰에서 무슨 지원이라도 해주나? "


" 평행세계에서 온 미아라고 하면 지원은 더 해줄 것 같지만요, 문제는 지금 당장 보여줄 순 없네요. 우주 관련 기술이라고 기억을 삭제해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고. "


" 그럼 이능력 흉내는 뭐로 해야하죠? "


" ...영혼을 살짝만 깨물어볼까요? "


" 진짜 제발 자중하세요. "


게다가 그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리의 근거가 되기엔 다른 분야의 이능력이잖아. 우리가 소곤거리고 있자 초아가 짜증났는지 버럭 화를 냈다.


" 내 앞에서 뭘 둘이서 속삭이고 있어?! 당신들 정체가 뭔지나 말하라니까! "


비로는 재빠르게 한 마디만 속삭이고 멀어졌다.


초아가 계약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계약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는 건, 아무리 봐도 내 역할이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초아를 마주 보았다.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불안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 그야 그렇겠지. 나만의 왕국을 만들어서 현실 도피하려고 했는데 계획에 상정하지 않았던 이상한 놈들이 중심부까지 침투해오니까 겁날 만도 할 거야.


나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 안녕, 반가워. 초아야. 나는 9급 일반행정직 공무원인 한서율이라고 해. 서울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어. "


그리고 초아가 무어라 반발할 새 없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우리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지? 알려줄게. 대신, 너도 해줘야 할 게 하나 있어. 언니오빠랑 같이 여행을 좀 하자. 너희의 서울이 아니라, 내 서울을 보여주고 싶어. 단지 그것뿐이야. 무서울 것 없어. "


무릎을 낮추어 초아와 눈높이를 완전히 같게 맞추었다. 초아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내가 조금 더 부드럽게 밀어붙이려는 차에, 초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설득하려는 거잖아. 그런 건, 필요없어...! "


초아가 손을 확 휘두르자 레이저 포를 달고 있는 드론 몇 개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 서율 씨! 조심하세요! "


" 기절시켜서 내쫓아버려! "


초아가 소리를 지르자 드론에서 붉은 빛이 나며 내 주변을 향해 쏘아졌다. 뒷걸음질을 몇 번 칠 새도 없이 갑작스레 세상이 뒤집혔다. 비로가 날 안아들어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비로가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들려던 참에, 


-쿠과광!!!


빗나간 레이저 총알 하나가 간이 캡슐에 명중해버렸고,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망했다,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일이 끝나버렸다.







-


아, 졸리다.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움직였어.


원래 사람이란 건 하루에 겪어야 하는 사건의 총량에 한계가 있다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진작에 넘었단 말이야.


그냥 이대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잘까...


" ...율, "


응? 무슨 소리지?


뭐어, 신경쓸 것 없나. 아무것도 아니겠-


" 서율 씨!!!!! "


그아악!!! 고막에 바로 와닿는 고함에 서율은 번쩍 눈을 떴다.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리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심장마비의 위험에서 겨우 생존한 서율은 콩닥콩닥 뛰고 있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 서율 씨, 정신이 들어요? "


그 곳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비로가 있었다.


저 사람이 다급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어.


늘상 태평할 것 같던 사람의 변화에 정신이 번쩍 든 서율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뭐야, 여긴 대체...? "


주변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때는 주변에 용포를 입은 사람이 지나가고, 갑자기 휙 바뀌어 모든 게 폐허가 되어 있기도 하고, 어느 땐 인간과 매우 유사한 안드로이드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도 했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 토하고 싶을 정도였다.


" 잘 들으세요. 저흰 지금 계속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고 있어요. 계속 이동하고 있으니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대신 시공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바뀌어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


" 네?! 그럼 어떡해야 하죠? "


비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짜 심각한 건가. 우주경찰이 곤란해할 정도라면 난 도움도 되지 않을텐데.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다 못해 유체이탈을 해버린 것 같았다. 가슴이 계속 미친듯이 뛰고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손바닥 안쪽에서 땀이 찼다.


"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


서율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우주경찰이야, 뭐라도 할 수 있구나! 비로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 이동하는 건 저희로 한정되어 있어요. 만약 이동하는 중에 새로운 개체가 생겨버리면, 그건 그 시간대에 잔류하게 되겠죠. 아까 제가 영혼 하나를 먹은 걸 기억하시죠? "


" 그 무섭게 생긴 크라켄이요? "


" 네, 그것처럼 제가 먹어버리고 다시 뱉으면, 그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채 그 시간대에 머무를 수 있을거예요. 그럼 그 영혼은 다른 물체나 생명체에 붙어서 간섭력을 가지며 저 대신 초아의 계약서를 찾아서 찢어주세요. 그럼 우주에 구조 요청을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제가 할 말은요. "


서율이 집중하자, 비로가 씩 웃었다.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 제가 서율 씨의 영혼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해주실래요? "


" .....! "


영혼을 먹힌다는 말에 저절로 몸이 긴장 상태로 곱아들었다. 비로가 별 다른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긴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걱정거리도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그럼... 제 육체는 어떻게 되는 거죠? "


" 이동 자체는 저희 둘 다 함께 일어나는 일이니, 제가 지켜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버리면 그대로 서율 씨의 영혼은 전혀 엉뚱한 시간대에서 떠돌게 될지도 몰라요. "


그러니까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듯이 비로가 말했다.


이런 큰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자, 머리가 반쯤 새하얘졌다. 대체 초아는 여기로 떨어진 초기에 어떻게 날 붙잡고 계 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던 거지? 나는 어른인데도 이 선택의 기로를 버티기 힘들었다.


" 제가 초아를 설득하지 못하면...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하면, 제 육체도 비로 씨도 무한정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는 상황에 남겨져야 하는 거죠?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


갑자기 서울의 모든 인구가 내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땐, 비로가 있었다. 별마당도서관에서 잠깐 홀로 남겨졌을 때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서울에 비로가 함께해준 것에 안도했다. 비로의 행동에 투덜거린 적도 꽤 있었지만,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떨어져야 한다고?


그것도 자칫 잘못하면 모두 갇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 아.... "


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아, 이 기분이구나.


초아가 바로 이 아득한 답답함을 느꼈구나. 절망감이라고 하기엔 답이 있어서 더 미칠 것 같은 기분.


정말로 옳은 길이 무엇인지는 다 안다. 초아의 경우에는 서울을 제멋대로 바꿔놓지 않고 우주 사회에 접촉하는 길을 찾는 것이 맞는 길이었을테고, 나의 경우엔 나 혼자만이라도, 영혼 상태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 구조 요청을 하는 게 맞는 길일거다.


근데 못하겠다.


진짜로, 못하겠어.


어느 길이라도 감당해야 하는 게 벅차서, 그냥 익숙한 길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잘해야만 하는 거잖아? 그런 걸 내게 어떻게 감당하지?


" 서율 씨. "


비로가 나를 보았다. 자주색과 초록색 오드아이가 반짝이며, 그 각각 다른 색이 나한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걸 표력하는 것만 같았다.


" 걱정마세요, 서율 씨. 어느 시간대든, 이 도시는 당신을 받아들여줄테니까요. "


말을 마친 비로는 눈치를 보더니 멋쩍게 뒷목을 쓸었다.


" 기억나세요? "


서율은 잠깐 숨을 멈췄다.


주저앉고 싶어 견딜 수 없던 마음으로 좁아진 시야에서, 한 순간 사고가 역행한다. 그 때 잠깐 깨달았다 믿었던 마음이 나를 찾았냐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내가 했던 말이잖아. 서율의 눈매가 조금 풀렸다. 그걸 확인했는지 비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 이 말이 아까 전의 서율 씨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효과가 있었나요? "


다시 천연덕스럽게 돌아온 비로의 말에, 서율은 숨을 내쉬며 작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지금 보니까 흑역사네요, 완전. "


그렇지만서도.


“ 서율 씨, 그 때 했던 말이 부끄러워요? ”


“ 그럴 수밖에 없죠. 그 순간에 취해서 그럴듯한 헛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고... 하하. 아까도 조금만 상황이 급해지니까 금방 잊어버렸잖아요. ”


비로는 손을 뻗어 가볍게 서율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까이 다가온 비로의 모습에 서율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비로가 천진한 듯이, 혹은 인자하게 말을 짚어주었다.


“ 그렇지만 말이죠, 한 번 믿을 수 있던 건 언젠가는 다시 반복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일상처럼 돌고, 돌고. 서율 씨는 대단한 주인공이 될 필요 없이, 시민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작은 희망이 들어올 쥐구멍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주었다. 서율은 잠깐 고개를 떨궜다가 끄덕였다.


“ 그렇네요. 어쩌다 또 우리라고 믿어버릴 수 있겠고... 지금, 후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단단히 마음을 먹고 비로와 눈을 마주치자 비로가 환히 웃었다.


" 네! 그럼 시원하게 바로 일처리를 할게요! "


아뇨, 잠시만요. 뭔가 작별인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쪽 분위기 아니었나? 응? 내가 입을 잠깐 벌리는 사이에, 비로가 밝게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크게 벌렸다.


이빨이 죄다 날카로웠고, 그리고 잠시 뒤.


으직-, 뭔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으악 미친, 나 살아있지?!! "


헉, 허억. 악몽을 꾼 기분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근정전이었다. 그리고, 초아가 보였다.


제대로 도착한 것이다.


" 아, 어....? "


초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초아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있었다. 아까보다 커진 노이즈를 향해서. 격렬하게 지직거리는 노이즈에 초아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아냐, 이상한 놈들이었으니까... 저런 것쯤은 알아서 극복할 수 있겠지. 응, 괜찮겠지 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 잖아. 당연하잖아. "


내심 저런 상황을 만든 초아에게 쏘아붙이고 싶던 마음이 갑자기 훅 꺼져버렸다. 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구나.


그러고보면 아까도 기절시키라고만 명령을 내렸었지. 초아는 자리에 주저앉다가 다시 추스르고 일어섰다. 마치 병든 식물을 먹은 것처럼 미식거리는 표정이었다.


" ...됐어, 어차피 곧 잊어버릴 거야. "


나는 씁쓸하게 초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나도 더는 물러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지? 빙의라도 할 수 있나? 나는 투명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혼을 잘 알고 있을 비로 씨가 물체나 다른 생명체에 붙을 수 있다고 설명한 걸 보면 빙의 자체는 가능할 듯 싶었다.


이렇게 보니까 비로 씨 종족 진짜 무섭네. 영혼을 먹고, 다른 곳에 이식시킬 수도 있다. 사람 자체는 착하고 느슨한데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달리 경계를 많이 받아봤을 게 틀림없었다. 본인도 그런 뉘앙스로 말하기도 했고.


" ...엄마 보고 싶다. "


초아의 중얼거림이 멀어지려고 해서 나는 공중에 떠서 초아를 따라갔다. 초아는 근정전 바깥으로 나와있었다. 초아는 도망치듯 드론을 타고 서울을 배회했다. 우리가 한참 바쁘게 초아를 찾아다닐 동안 이미 해는 다 저물었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초아는 망설이더니 한강을 따라 청계천의 풀숲에 자리를 잡았다.


찰박, 찰박. 물 밟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지금 유령 상태라 걸을 수 없으므로 초아의 발소리다. 초아는 멍한 눈으로 청계천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내가 아는 서울은... 이렇게 낙후된 곳이 아니었는데. "


" 뭐 임마? "


" ....??! "


초아가 화들짝 놀라 기겁했다. 그야 기겁하겠지. 왜냐하면, 자기 입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으니까. 초아의 발언에 긁혀버렸다는 걸 인정하겠다. 그 바람에 나는, 욱해버려 초아에게 당장 빙의해 태클을 걸었다. 휴, 유령이 되어도 태클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구만.


" 뭐, 뭐야?! "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초아를 달랠 수 있을까. 그냥 내 정체를 밝혀버리면 또 패닉해버릴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와있다니 무섭잖아. 그래서 나는 내 신원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 안녕, 초아야. 나는 너의... "


나는 숨을 들이켜고 겨우 그 발언을 내뱉었다. 


" 나, 나는.... 너의 다른 인격이야. "


악!!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배배 꼬고 말았다. 이중인격이래! 이중인격 컨셉이래! 내가 25살이나 돼서 이중인격 컨셉질을 하고 있다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이런 꼴을 부모님이 보면 뭐라고 하셨을까. ㅋㅋㅋ였겠지. 진짜 딱 그 의성어였을 거다. 내 주변 친구들도 다 그랬을 거고.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뻔뻔하게 참아내며 나는 초아의 반응을 살폈다.


" 아...? 뭐, 이중인격? 뭐? 진짜로? "


얘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군. 하지만 내가 다른 영혼인지는 아직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자, 한서율. 네 컨셉질에 서울과 네 육체와 비로 씨가 달려있다. 낯짝 두껍게 깔아라.


" 응, 정말이야. 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네가 서울역에서 엄청 괴로워했을 때, 나는 눈을 떴는데. 넌 느끼지 못했어? "


그야 느끼지 못했겠지. 그런 건 없으니까. 나는 계속해서 혀를 놀렸다.


" 나는 아마도, 네 마음 속에 있던 다른 생각이 인격화가 된 것 같아. 예를 들어서... 이렇게 잊어버리는 게 과연 맞는 걸까, 하는 생각? "


" ....! "


초아는 흠칫 몸을 떨더니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 너, 날 방해할거야? "


" 무슨, 방해라니. 나도 네 마음을 잘 이해해. 난 너로부터 태어났다고 했잖아? 하지만 네가 조금 더 길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자꾸 들어서 그래. "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 초아야. 혼자 낯선 곳에 떨어져서 지금까지 고생했다고 말도 해주고 싶고, 사고를 이렇게 쳐버리면 어떡하냐고 혼내고도 싶어. 그렇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우선 네 기분이 나아지게 해주고 싶어. 그렇다면 무언가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길테니까.


나는 나지막히 초아에게 제안했다.


" 이 세계의 서울을, 한번 같이 걸어보지 않을래? “


" 내가 왜? "


역시 이런 반응이 나오는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날카로운 초아라도 혹할 만한 거래를 제안했다.


" 네가 나랑 같이 이곳을 함께 걸어주면, 나는 기뻐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깨어나지 않으면 네게 좋은 이야기이지 않니? "


초아는 고민하는지 어깨에 힘을 주고 미간을 찡그리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 어디까지 가고 싶은데? 정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거래가 되지 않잖아. 네가 영원히 만족하지 않는다면 내게 손해지. 계약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계약서. 내 눈이 번뜩 뜨였다. 그걸 찢어버리면 초아의 계약이 해제될테니 우주에 구조 요청을 할 지식이 있는 인원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계약서의 위치를 알지도 못하고, 지금 상태에서 찢어봤자 초아가 비로 씨를 도와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잔혹한 성정은 아닌 것 같지만 도망쳐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공을 들여서 초아의 마음을 돌려야 해.


" 음... 그렇다면 딱 두 곳만 더 가볼까? 북촌 한옥마을이랑 남산 서울타워만 들러보자. 어때? 그러고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사라져줄게. "


" ...딱 거기까지만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곳 지리를 알아? "


예리하구나, 초아야. 하지만 변명거리를 미리 생각해놨지.


" 네가 집중해서 보지 않더라도, 나는 네 속에 있으면서 주변을 충분히 봐왔어. 서울역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도 귀기울여들었고. 서울에 여행온 것 같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을 꼽으면서 말하길래, 나도 가보고 싶어서. 어때? "


" 뭐... 알겠어. 진짜 잠시만 가는 것뿐이야. "


아싸. 일단 성공했다. 초아는 나를 믿지 않는 듯했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고, 그것만으로도 성과였다.


" 그런데 아까, 한강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


" 내 다른 인격이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


" 물론 모르지, 다른 인격인 걸. "


" 알려줄 생각 없어. "


까칠하네. 하지만 저 아이를 어떻게든 마음을 바꾸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전제만은 절대로 수행해야 해.


초아는 드론을 타고 찜찜한 얼굴로 하늘을 날았다.


" 초아야, 어디부터 갈래? 네가 원하는 곳부터 가도 돼. "


" 어차피 둘 중에 하나잖아. 굳이 정해야 해? " 


" 응, 선택해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


" 하아... 그럼 한옥마을부터 가자. 남산타워는 마지막에 가고 싶어. "


초아는 좋아하는 건 나중에 아껴먹는 스타일이려나? 나도 그런 스타일이긴 한데. 초아의 몸을 통해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하늘에서 서울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아까는 그냥 하강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고, 지금은...


" 우욱. "


" 하, 뭐? 야! 토하지 마!! "


" 미안, 우와... 욱. "


" 내 몸으로 토하지 말라고!!! "


미안하다, 초아야.


언니가 공중전을 잘 못해.


그래도 다행히 공중에서 토해버리는 건 겨우 참았다. 진짜로 토해버리면 초아와의 사이가 영영 나쁠 것 같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았거든. 근데 와, 진짜 멀미 나네.


투덜거리며 한옥마을에 도착한 초아가 신경질을 냈다.


" 하,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이런 인격도 생겨가지고, 이 고생을..... "


" 괜찮아, 초아야! 내가 있잖아! "


" 네가 있어서 더 싫어! "


아, 그건 좀 마음의 상처인데. 나는 시무룩하게 한옥마을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기와장이 쭉 늘어선 모습이 고풍스럽기 그지없겠지만, 지금 아무도 없고 밤이 될 무렵이니 고요하고...


" 좀 무섭네... "


" 아, 맞아. 나도 그 말하고 싶었어. "


" 흥... 너도 겁쟁이인가보지. 그렇다면 왜 여기로 오자 한 거야? 지금이라도 무르는 게 어때? "


괜찮거든? 나도 어릴 때 전X의 고향 자주 봤단 말이지. 이런 불빛이 하나도 켜지지 않은 한옥이 주는 으스스함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아마도.


" 초아야... 나 한 가지만 제안해도 될까? "


" ...뭔데? "


" 불빛이라도 좀 찾자. 드론한테 그런 거 부탁해줄 순 없어? "


" 하아... "


한숨을 쉬지만 초아는 같은 의견인 듯 드론을 불렀다. 저거 인공지능이라도 탑재되어 있는 건가? 아니면 엄청나게 코딩해서 인공지능이라도 된 것처럼 출력하는 건가. 초아가 직접 다루지 않을 땐 살벌하게 공격했던 거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인공지능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잠시 뒤, 드론이 가지고 온 것은 등불이었다. 그 왜, 나무살이랑 함께 한지로 안쪽이 가려진 등불. 옛날 시대극에서 한번쯤은 나오는 그거.


초아는 떨떠름하게 불이 새어나오는 등불을 들었다.


" 하필이면 이런 고대 등불을 가져온 거야...? 오히려 더 상황에 몰입돼서 무서워졌잖아... "


" 에이, 그래도 드론이 센스가 좋은데? 그리고 조상님들이 쓰던 건데 체험하는 재미를 느껴보는 게 어때? "


그런 거 느낄 것 같냐, 하는 투덜거림이 돌아왔지만 이렇게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 있지, 초아야. "


" ...또 왜 불러? "


" 나는 네가 여기 온 뒤에 태어났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전까지 네가 살던 곳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라. 이 자리에 뭐가 있었어? "


초아는 입을 꾹 다물고 한옥마을 거리를 그저 걷기만 했다. 내가 아픈 곳을 파헤쳐버린 건가, 걱정하던 차에 초아가 말했다.


" 내가 있던 곳도 비슷했어. 하지만 그것보단, 현대와 과거를 퓨전한다는 구호 아래에 좀 다른 거리였지. 원래 네온사인이 여기저기 붙어있어서 이렇게 등불에만 의존해서 다녀야 할 일은 없었는데... "


초아의 서울은 뉴-메카-서울이구나. 시간대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같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이동에 우주 이동까지 한 케이스네.


" 되게 멋질 것 같아. 물론 여기도 더 경험해보고 싶어. 이런 곳에선 한복을 입고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주변에 한복 대여점이 있는지 찾아볼래? "


" 그런 거 할 것 같아? "


" 아, 초아야! 저거 한복대여한다고 쓰여져 있어! 들어가보자! "


" 싫어. 내가 왜... 아, 진짜! 몸 멋대로 움직이지 마!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네가 이곳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있는 서울도 엄청나게 화려하고 놀거리가 많았을 테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거든. 나는 초아의 몸에 빙의된 채로 당장 한복대여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 외로움도 꽤 버틸 수 있었다. 일단 곁에 누구라도 있으니까.


...비로 씨도 함께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 사람, 서울에 휴가날 때 들리고 싶다고도 했잖아. 외국인... 아니, 외계인이라면 한복을 한번쯤은 입어야지.


" 초아야, 넌 한복 입은 적 있어? "


" 아니, 없는데... 하아, 이 기회에 입어보라고 할 거지? "


" 어떻게 알았어? "


초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옷걸이 사이를 둘러보았다.


" 근데... 나, 애초에 어떻게 입는지 모른단 말이야. 우리나라 전통 옷이라고 들었긴 했지만 낯설고... "


" 에이, 서울 사람이 한복 한번쯤은 입을 수도 있지! 한복 입으면 할인해주는 식으로 전통문화를 유지하려는 정책도 있잖아. "


" 서울에 그런 정책이 있었나? "


아차. 실수. 초아의 서울은 내가 아는 서울과 여러가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마음에 새겨야겠다. 이러다가 크게 실수하면 곤란해.


" 너 지금까지 이 세계의 서울을 둘러봤잖아? 경복궁 바로 앞에서부터 할인해주고 대여해준다는 내용이 표지판에 깨알같이 쓰여져 있었는데, 못 봤어? "


" 몰라... 내가 못 본 건가. "


좋아, 무사히 넘어갔다. 초아는 약간 의문이 드는 듯 했지만 빨리 나를 떨쳐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한복들을 살펴보았다. 초아가 고른 건 연두색 치마에 연분홍색 저고리 조합의 한복이었는데, 마치 꽃 같았다.


얘, 생각보다 귀여운 거 좋아하는구나? 지금 성격이 날카로운 것도 역시 갑자기 미아가 된 영향일 수도 있겠다.


" 초아야, 여기 탈의실 쪽에 어떻게 입어야하는지 설명해주는 설명문이 붙어있을 거야. 한복을 입는 법을 몰라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글이나 동영상 같은 걸로 설명해주곤 하거.. 할 것 같거든. "


" 옷이 꼬이면 그냥 원래대로 갈아입을 거야... "


다행히 탈의실 안쪽에 어떻게 옷을 입어야하는지 글과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는 게 붙어있었다. 초아가 제대로 갈아입자, 나는 초아를 얼른 거울로 이끌었다.


" 봐, 초아야. 한복 입으니까 진짜 조선시대 아가씨같네. "


거울 앞에 선 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이며, 무의식적으로 반 바퀴 살짝 돌아보았다. 치마가 살짝 부풀며 휘날리자 초아는 느낌표가 뜬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직 애다, 진짜. 좋을 때야.


그리고 이런 초아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 가지를 더 확신했다.


진짜로, 얘는 받아들여주는 곳이 있다면 엇나갈 애가 아니라는 것을. 고작 나 하나가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사그라들었는데 더 큰 존재가 자신을 수용해주는 감각을 느낀다면, 그 때는... 이야기를 시도할 수 있을 거다.


" 자, 그럼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보자! 기대되지 않아, 초아야? "


" 뭘 기대하라는 거야... 별 것 아니잖아. 그냥 옷 좀 바꿔입었을 뿐인데. "


" 그게 좋은 거야. 다른 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다는 거. "


그리고 그게 네가 전혀 다른 서울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 ...넌 말을 복잡하게 해. 그리고, 꼭 그 언니같네. 그러고보니 나를 서울 여행하게 만들려는 게 꼭 그 언니 같잖아. "


" 응? 누구? "


" 그... 서율이라는 사람. 이름이 서울이랑 비슷하던 공무원 언니였는데... ....몰라. 그냥 가자. "


초아는 계속 내가 노이즈 속에 갇혀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움찔하더니 주제를 피했다. 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초아가 한옥마을 거리를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도 생각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비로 씨, 괜찮겠지?


내가 초아의 계약을 해지하고 초아가 구조 요청을 하는 데 도와줄 수 있도록 초아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있잖아.


비로 씨는 영혼을 먹잖아.


지금까지 먹은 게 영혼 하나밖에 없는데, 너무 오래 지체하면 우리가 꺼내줬을 때 비로 씨가 굶주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 ...응! 가보자, 초아야! "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어린애 앞에서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느긋하다고 느껴지는 방식이라도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하니까, 해보는 거야.


비로 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볼게요. 어떻게든.

" 초아야! 이것 봐, 고양이는 아직 남아있어! 진짜 귀엽다! "


그 뒤로, 나는 초아의 기분을 최대한 괜찮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서울에 추억이 있고, 없고는 초아를 망설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계산이 아니더라도, 그냥... 이렇게 몰린 애가 좀 애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어른의 본능이잖아.


나? 물론 나는 속으로 애가 탔다. 내 육체, 비로 씨 둘 다 걱정이 되어서 사실 계속 초조해지려고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끊임없이 나를 검열하며 초아를 안심시키는데 집중했다.


그에 도움이 되는 것은 외계인 특유의 우주적 스케일에 익숙해진 사고회로였다.


영혼 상태야? 그럴 수 있지, 우주 어딘가에선 영혼 상태로 사는 종족도 있을 걸.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괜찮아, 우주의 과학 기술을 보면 시공간을 여행할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있어. 단속반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단속반에게 걸리지 않는 기술도 우주 어딘가엔 있겠지.


진짜, 이런 게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된다.


북촌문화센터에서 여러 가지 전통놀이를 마지못해 해보던 초아의 얼굴은 점점 복잡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저게 무슨 표정인지, 슬슬 감이 잡힌다.


내가 이런 걸 즐겨도 되는 걸까.


" 즐겨도 돼, 초아야. "


이런 곳에 익숙해져버렸다가 집에 대해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 집은 하나만 있지 않을 수도 있어. 괜찮아,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아. "


내가 중얼거리자 초아가 톡 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자꾸 뭐라는 거야, 너... 혹시 독심술이라도 해? "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완전히 아니진 않을 거다. 일단 내가 말을 하는 걸 초아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내가 발언하는 상태를 초아도 인지한다는 뜻이니까. 진짜로 이중인격이라면 일방향 소통만 가능하거나 글을 써서 남겨야 소통이 가능하다고 듣긴 했는데... 뭐, 난 영혼 상태니까.


그리고 초아가 인격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초아가 어느 한옥 카페의 대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주저앉았다. 초아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한옥마을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하늘에도 별은 뜬다. 그리고 오늘은 별을 볼 수 있는 날이다. 사람이 없어졌다는 게 나름의 장점도 되긴 한다. 단점이 더 크긴 하지만.


" 무섭지 않지? "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 나는 방금까지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냥 어두워도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 어두운 건 무서움만이 아니라 포근함도 같이 느낄 수 있거든.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서 다른 면을 보게 되지. 다른 것들도 다 그래. "


" 하아... 넌 진짜 이상해. "


내가? 눈을 깜빡이자 초아가 다시 주도권을 가져가서 팔짱을 끼었다.


" 넌 날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아. 너무 싫을 만큼 너 때문에 자꾸... 자꾸만... "


초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저 화난 듯 보이는 숨소리가 사실은 울컥 올라오는 울분을 참기 위한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초아가 감정을 삼키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음 목적지를 입에 올렸다. 


" 남산타워는 마지막에 가고 싶다고 했지. 어째서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었어? "


초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더니, 어느 순간 툭 억지로 보따리에 싸매려던 것이 풀려버렸는지 말을 내뱉었다.


" 어두운 서울을 보고 싶었어. 전혀 야경이 보이지 않고, 죽은 것만 같은 도시. 그걸 확인하면 마음이 괜찮아질 것 같았어. 진짜로 미련같은 걸, 다 떨쳐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곳이라고 믿고 싶었는데. "


초아는 점점 더 웅크리더니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초아의 몸에서 잠시 벗어나, 드론 하나를 움직였다. 조작하지 않았는데 드론이 움직이자 초아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다시 초아의 몸 속으로 들어간 내가 초아에게 말해주었다.


" 한번 타봐, 초아야. 네가 원하는 대로 이곳의 서울을 보자. “


조금만, 내게 맡겨줄래?


" ...그래, 이것만 하면 이제... 너도 잠들겠다는 거지. 알겠어. "


초아는 내가 조종하는 드론 위에 올라탔다. 무게가 그렇게 무겁지 않다.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몸. 안쓰러움을 삼키고 나는 남산 서울타워를 향해 올라갔다. 원래는 기나긴 줄을 서야하고, 이 산까지 올라오는데에도 거의 하나뿐인 버스를 타야하지만 비행체가 있으면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바로 전망대까지 도달해서 초아를 내려준 나는 초아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전망대의 난간을 잡았다.


" 이제 우리 서울 여행의 마지막 코스네. 무슨 생각이 들어? "


내가 묻자 초아는 숨을 한껏 들이켜고 높은 곳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 차가워. 그리고 어두워. 등불도 없고, 달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거야. 혹평밖에 할 수 없네, 진짜로. 그런데... "


" 그런데? "


내가 조심스레 밀어주자 초아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곧 닭똥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그런데... 무섭지가 않아. 그래서 싫어, 싫다고. 잊어야 하는데, 이런 곳따위 내가 알던 곳으로 고쳐버려야 하는데. 어째서... 왜 잠깐 여행했다고 잊고 싶지 않아진 거야? 나도 진짜 날 이해 못하겠어... "


초아의 목적은 이곳을 개조하고, 그나마 위안을 받으면서 자신이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걸 잊고 사는 것. 외로움을 달래는 것 따위는 기계들에게 맡기고 그나마 덜 충격받을 수 있는 세계로 인지를 전환시키겠다는 거겠지.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서울이 전혀 다른 세계에다가, 돌아갈 방법도 마땅히 보이지 않는 상황을 직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외로워서 힘들면 또 다시 기억을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애초에 모든 기억을 잊는다면 이 세계에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세계의 부모님을, 가족을, 친구를, 온통 추억으로 넘쳐나는 작은 세계를 잊어버리고 싶을리가.


" 내가 아까 말했지, 초아야. 집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어. "


" ...그럼 여기가 내 집이라는 소리야? "


" 응, 너도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냥 그 언니한테 허세부리고 싶었던 거라면 내가 속상해지겠는데. "


나는 잠시 말을 끊고 무엇이 초아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 어쩌면 말이야, 초아야. 이렇게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노력이 은연 중에 스며들어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더 있을지도 몰라. 네가 원하는 만큼 네 집은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는 거지. "


"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하나뿐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곳에 더는 갈 수 없게 됐어. 간이 캡슐까지 겨우 만들었지만 실패작이었고! "


초아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울었다.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모습은 내 눈엔 그저 안쓰러웠다.


" 있잖아, 초아야. "


그래도 이 말은 결국 꺼내야만 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초아에게 말했다.


" 계약, 종료하자. 서울을 다시 모두에게 되돌려주자. 네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서울을 그리워할 수 있어. 그 마음을 너도 이해할 거야. "


초아는 고향 이야기를 꺼내자 눈동자가 흔들렸다. 초아가 기세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계약을 종료해버리면, 나는 내 간섭력의 안전지대를 잃어. 그럼 더는 아무 것도 못할 거야. 그냥 유령처럼 될 뿐이지. 그럼 여기에서 날 기억해주고 구해줄 사람이 있을리도 없는 걸. "


" 글쎄, 그건 진짜 유령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


초아가 내 말에 멈칫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이제 비밀을 밝힐 때가 됐나. 거짓말을 해버린 거에 초아가 많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초아에게 안정적으로 비밀을 풀어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마땅한 수를 생각해냈다.


" 초아야, 그거 알아? 사람이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는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된다는 걸. 상대방에서 조금이라도 손을 내밀어주면, 여기도 괜찮다고 믿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걸 말이야. "


"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봤자... "


" 그래? 그럼, 언니가 보여줄게. "


" 언니? "


초아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아는 주변을 무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다른 인격을 찾았다.


" 방금 언니라고 했어? "


처음에 만난 공무원 언니. 꼭 그 사람이 생각나. 그리고 진짜 유령이라고 말했고, 공무원 언니같은 말투를 썼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초아에게도 찾아올 무렵이었다.


" ...!! "


초아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죽은 듯한 도시. 분명 아무도 응답할 리 없는 도시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하나둘씩 빠르게 불이 켜지며, 도시는 아주 느릿하게지만 밤의 풍경을 밝히고 있었다.


초아는 무의식적으로 난간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원래 살고 있던 서울처럼 휘황찬란한 불빛은 되지 못했다. 국소적으로 작은 부분에만 불이 켜질 뿐이었다.


" .....예쁘네. "


그것뿐이었는데, 어쩌면 조금 이해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 언니가 말한, 자그마한 응답이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소리를.


" 어때? 받아들여진다는 기분이 드니? "


" ...당신 누구야? "


초아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서율은 손을 모으며 작게 웃었다.


"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 초아야. 내가 누군지는 조금 짐작이 됐겠지? 난... 한서율이야. 서울의 일반행정직 공무원. 그리고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


"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뭔데? "


" 그걸 말하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기다려왔어. 네가 이 서울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그래서... 서울을 걸고 한 계약을 끝낼 마음의 힘을 얻을 수 있길. "


초아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내가 계약을 끝내야,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는 거야? "


" 응. 그리고 네 도움이 엄청 필요해. 사실은 나랑 같이 온 사람이 지금 위험에 처해있거든. 네가 계약을 풀고 나면 무언가 떠오를 거야. 그걸 바탕으로 날 도와주면 돼. "


초아는 거절할까, 말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빛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저 멀리에서, 그러나 가까이 스며들고 있었다. 초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할게. "


지금은 어쩐지, 크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니까.


그래도 내버려둘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이유라도 좋아. 마음을 바꿔줘서 고마워. 서율은 드론을 호출하더니, 숨겨두었던 계약서가 든 잠금장치를 가지고 왔다. 네모난 상자 안에 담긴 계약서를 손에 든 초아가 숨을 가다듬었다.


" 집은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말, 그건 거짓말 아니지? "


" 물론이지. 이상해보일 순 있어도, 언니가 직접 체감해버렸는걸. "


" ...하, 좋아. 저질러버리고서 와닿지 않으면 당신을 원망할거야. "


초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계약서를 용기내어-


찌지직-,


계약서는, 찢어졌다.


나는 그 순간, 타임 리미트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 초아야! 지금 떠오르는 게 있니?? 외계인이라던가! 알아? "


" 갑자기 뭔 그런 이상한 걸... ...알고 있네? "


초아는 자신도 몰랐던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 초아야! 외계에 구조 신호 보내는 법 알아?! 아마 여기도 비슷할거야! "


" 그, 알긴 하는데. 원래 우주선으로 돌아가야 해. 그런데 그걸 고칠 방법이 없는... "


" 내가!! 물건에 빙의될 수 있어!! "


물건에 빙의되어서 억지로 작동시키면 한번쯤은 구조 신호가 제대로 닿을 거다.


" 초아야, 급해!! 어서 드론 타! "


" 응?! 응!! "


초아를 재빨리 태우고 서울 한복판을 질주한 나는 서울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끝낼 방법도 여기 담겨 있겠지. 조금 만신창이가 된 초아의 원래 캡슐에 빙의되는지 시험해보았고...


된다! 영혼 상태로 빙의하니까 작동시킬 수 있어! 아니 진짜 비로 씨, 종족 특성 하나는 제대로 타고 나셨네요?!


나는 초아에게 구조 신호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빠르게 속성으로 파악하고 외계 교신을 시도했다. 초아가 입을 떡 벌리며 외쳤다.


" 혹시 날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내줄 순 있어?! 아, 아니... 내가 알려줘야 네가 할 수 있는데, 나도 방법으로 모르니까 안되겠네. 응... "


초아가 풀이 죽었길래 나는 응원하며 외계에서 답신이 빨리 오길 빌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주 캡슐이 똑똑, 두드려졌다.


" 안녕하세요, 우주 경찰- 우왁! 잠깐, 빙의되어버렸잖아! "


기쁨에 주체하지 못하고 덤벼들다 우주경찰을 빙의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건 비로 씨가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 육체도 비로 씨가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고, 나는 드디어 내 몸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 비로 씨..! "


내가 감격해 비로 씨를 안으려고 하던 때, 다른 우주경찰이 나를 제지했다.


" 잠깐만요, 비로 씨는 지금 안정을 취하러 우주병원에 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비로 씨, 빨리 가시죠. "


" 앗, 서율 씨... "


비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도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비로는 잠깐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빙그레 웃었다.


" 휴가 때에 올게요. 물론, 서율 씨 수명이 다 되기 전에 말고요. 지구적인 스케일 적용해서,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


나는 그 말에 길게 답하지 않았다. 한 마디면 충분했으니까.


" 다시 와요. 다음 번에 방문한 이곳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일테니까. "


그리고 그 후엔...


" 그래서? 그 뒤 이야기가 뭔데? "


그리고 며칠 뒤의 부산. 어머니가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어휴, 지금 제가 무사히 돌아온 거 보면 모르겠어요? 일이 잘 풀렸죠. 다행히도. "


" 이야기가 어중간한 데에서 끝나는 거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왜 만들었니? 위에서 하라고 시키든? "


" 에이... 진짜 겪은 이야기라니까. 그리고, 이건 열린 엔딩이어야죠. "


아버지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말했다. 


" 열린 엔딩이어야, 독자가 이입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건 그걸 위한 거잖아요. 서울은 그냥, 당신의 이웃이라는 별 거 없어보이지만 눈여겨보기 힘든 사실을 위해서요. "


역시 위에서 시킨 것 같은데, 하며 의심하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그저 웃었다.


별 거 아닌 이야기라서 즐거울 때도 있어. 그리고 그게 지금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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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외계인의 습격을 받았다는데요

  • 작가 : 이지
1. 제목
  • 서울이 외계인의 습격을 받았다는데요
2. 기획의도
서울을 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서울을 자기 고향처럼 친근하게 여길 수 있게 모험의 무대이자 일상의, 독자가 생각하는 다양한 고향의 이미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서울과 포용을 엮어보았습니다.
3. 스토리
서울의 평범한 9급 고무원이던 주인공, 한서율. 그러나 일에 시달려 서울에 대한 애착은 별로 없었다. 지방의 본가로 돌아갈 수 있어 들떠있던 날, '이초아'라는 가출청소년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우주인인 이초아에게 잘못 걸려 서울 땅의 소유를 이초아에게 내어주는 계약을 해준 당사자가 되고 만다. 서울 땅에서 계약자 서율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쫓겨나고, 서율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 우주경찰 비로를 만난다. 댕청하지만 성실한 비로는 계약자인 서율을 초아 앞으로 데려다놓아 계약을 해제하게 만들려고 하며, 서율에게 길잡이 역할을 부탁한다. 서율은 이 대형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비로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먼저 초아를 찾아 서울역을 수색한다. 발견한 초아의 우주선에는 이상한 서울의 구조도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구조도를 기반으로 초아가 서울을 개조하려고 한다는 추측에 도달한 두 사람은 초아가 개조할 장소를 찾아가는 식으로 초아의 동선을 쫓는다. 이미 개조된 장소는 서율이 비로에게 복원 방향을 알려주면서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계속해서 쫓던 중 경복궁에서 초아를 발견한다. 그러던 중 초아가 계속 집에 가기 위해 만들었던 실패작 우주선에 휘말려 초아가 가고자 했던 평행세계의 과거를 엿보게 된다. 초아는 사실 외계 문명을 받아들인 평행세계의 지구인이었고, 우주선 오작동으로 평행세계로 이동해버린다. 집에 돌아가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어느 우주에서든 돌아갈 자리가 없었던 초아는 익숙하지만 낯선 곳에 남겨진 것이 두렵고 외로워 자신이 생활했던 도시, 서울을 자신의 세계처럼 꾸며놓기로 한 것이다. 절대로 계약을 해제하지 않으려는 초아에게 서율은 자신도 이 서울이 무척이나 낯설었다면서, 그렇지만 이 도시도 결국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너도 예외는 아니라고 다독여준다. 집에 가고 싶다면서 우는 초아에게 서율은 가만히 위로해주고, 감정을 받아주는 서율을 통해 서서히 진정된 초아는 비로에게 이 우주 어딘가엔 평행세계로 갈 수 있는 기술이 있을거라고, 함께 여러 행성의 여러 도시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비로와 초아가 떠나면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서율은 지방의 본가로 돌아가는 기차에 제 때 탑승할 수 있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며 부모님은 서울 생활이 힘들지 않았냐고, 장하다고 토닥여준다. 서율은 둘 다 내 집이라 이젠 서울도 만만하다면서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