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집 아이〉

 

프롤로그 ― 기름 냄새로 시작하는 집

우리 집은 기름 냄새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다섯 시. 어둠이 아직 골목에 남아 있을 때 가장 먼저 깨어나는 건 알람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덜컥 덜컥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기계가 먼저 눈을 뜬다.

낡은 압착기가 돌아가는 순간 볶아 둔 들깨가 깔때기를 타고 내려간다. 기계 속에서 눌리고 눌리다 보면 까만 알갱이에서 금빛 액체가 흘러내린다. 기름이 통 안에 모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 집 안 공기가 달라진다. 뜨겁고 고소한 향이 부엌을 채우고 안방까지 번진다. 이 냄새에 나는 잠에서 깬다. 눈을 감은 채로도 알 수 있다. 오늘도 우리 집 하루가 시작됐다는 것을.

아버지는 기계를 돌리고 엄마는 유리병을 정리한다. 나는 병을 닦는다. 닦는다는 건 단순히 먼지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닦다 보면 손끝이 미끄러워진다. 유리병은 기름을 기다리며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때때로 병 입구에 작은 금이 가 있으면 엄마는 곧바로 옆으로 치워 버린다. “기름은 귀하니까, 흘러내리면 안 되지.”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기름을 담는 그릇부터 단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문이 열리면 첫 손님이 들어온다. 늘 같은 시각 늘 같은 사람.

“사장님 올해 들깨는 기름이 잘 나오나?”

한옥자 할머니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등지고 서서 묻는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유리병 하나를 들어 올린다. 갓 짜낸 기름이 반쯤 찼다. 금빛이 형광등 불빛과 섞여 더 진하게 빛났다.

“향은 좋습니다. 볶을 때 불을 조금 낮췄거든요.”

할머니는 병을 받아 코끝에 가져다 댄다. 두 번 세 번 숨을 들이마신다. “그래. 이 냄새지. 이 냄새 아니면 제사 못 지내지.”

그 말은 언제 들어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제사라는 건 집안의 얼굴이니까. 우리 집 기름이 누군가의 얼굴을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묘하게 설레게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름집 애”라고 불렸다.

처음에는 그 말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이 킁킁거리며 내 옷에서 나는 냄새를 흉내 낼 때면 집에 돌아와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도 마음이 씻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냄새는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내 몸에 밴 냄새는 결국 내 삶의 일부였다.

학교에서 부끄럽던 냄새가 시장에서는 자랑이 되었다. 떡집 이모는 늘 말했다. “네네 집 기름 아니면 송편 맛이 안 나.” 반찬가게 사장은 “무침은 기름에 달렸다”라며 우리 병을 들어 보였다. 같은 냄새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 걸 나는 시장에서 배웠다.

시장 골목은 낮보다 새벽이 더 시끄럽다. 고깃집 아저씨가 고기를 손질하는 소리, 채소 상자가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방앗간의 둔탁한 망치 소리. 그 소리들 사이에서 기계의 덜컥거림은 유난히 규칙적이다. 사람의 손보다 오래, 더 정확히 리듬을 지킨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병을 닦고, 라벨을 붙이고, 날짜를 적는다. 2025년 9월 18일, 첫 병. 날짜를 적는 순간 우리 집 하루가 기록된다.

가끔은 부끄럽고 가끔은 자랑스럽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란다. 기름 냄새가 내 이름에 붙은 꼬리표라면 나는 그 꼬리표를 언젠가 떼지 않고 달고 다닐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집 하루는 언제나 금빛 방울로 시작한다는 것. 그 방울이 병에 쌓일 때마다 나의 시간도 조금씩 채워진다는 것.

 

 

1화 — 기름 짜는 소리

새벽 공기는 얇고 단단했다. 골목 끝 가로등이 꺼질 듯 말 듯 깜박거리자 아버지는 셔터를 절반만 올려 놓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쇳덩이의 관절을 풀 듯 손바닥으로 축을 한 번 문지르고 손가락 마디로 깔때기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기계는 사람의 목처럼 어딘가 만져줘야 살살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

“오늘은 온도 조금 낮춰서 가자.”

아버지는 늘 첫마디를 기계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잘 부탁한다’와 같은 인사인지 ‘실수하지 말자’는 다짐인지 가끔 헷갈렸다.

불을 올리고 예열하는 동안 엄마는 유리병이 든 상자를 꺼내 놓았다. 새 병인데도 빛을 받으면 미세한 먼지가 떠 있었다. 나는 젖은 천으로 입구를 돌리며 한 줄씩 닦아 나갔다. 유리와 천이 문질릴 때 나는 소리는 가볍지만 시간은 묵직하게 흘렀다. 병 백 개를 닦고 나면 해는 어느새 어귀를 넘어왔다가 가게 바닥까지 들어와 있었다.

“라벨은 곧게.”

엄마가 말할 때마다 나는 기계 옆에 붙은 벽시계를 힐끔 봤다. ‘곧게’라는 말에는 서두르지 말라는 뜻과 삐뚤면 다시 붙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 라벨이 한 뼘이라면 그 한 뼘만큼의 성질도 사람마다 달랐다. 나는 윗변을 경계선 삼아 상표의 ‘ㄱ’ 모서리가 병의 실선과 만나도록 맞췄다. 살짝 비틀리면 다시 떼었다. 스티커 뒷장에 남은 풀은 손끝에 얇게 달라붙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투명한 막처럼 벗겨졌다.

덜컥— 덜컥—

기계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볶아 둔 들깨를 깔때기에 붓자 검은 알갱이들이 목구멍처럼 좁은 원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안쪽에서 눌리고 밀리고 어둠 같은 것들이 서로를 문지르며 길을 냈다. 그리고 잠시 후 첫 방울이 떨어졌다.

딱 하고 빈 통의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의 어깨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간다.”

그 한마디와 함께 금빛이 시작됐다. 처음엔 연하고 조심스러웠다가 곧 실처럼 가늘고 끊기지 않게 이어졌다. 나는 스테인리스 통의 표면에 비친 빛을 바라보다가 오늘 날짜를 라벨 위 여백에 적었다. 2025. 9. 18. 명절 전주 목요일.

문이 ‘딩동’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옥자 할머니였다. 해마다 비슷한 옷 비슷한 시간. 하지만 손에 든 가방만은 해마다 달랐다. 올해는 붉은 바탕에 참깨 그림이 박힌 장바구니였다.

“사장님.”

“오셨어요?”

아버지는 통의 밸브를 조절하며 대꾸했다. 할머니는 카운터에 엉덩이를 비스듬히 올려앉고 숨을 골랐다.

“올해도 제사가 먼저야. 위에는 깔끔하게, 아래는 향이 진하게. 기억하지?”

“잊을 리가요. 위쪽 병은 볶는 불 조금 낮춰서 아래 병은 어제 저녁 볶은 걸로.”

엄마가 말을 받자 할머니 입가가 풀렸다. 세 사람 사이에는 ‘몇 년째 그대로’인 안부가 오갔다. 나는 뚜껑을 풀고 새 기름을 담았다. 병목에서 기름이 통통하게 올라오다가 표면장력처럼 모가지에 한 번 붙었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찰나가 늘 좋았다. 금빛이 둥글게 숨 쉬는 모습을 눈으로 봤다.

“얘야.”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너 크면 뭐 할래?”

나는 잠깐 멈칫했다. 예전엔 몰랐다고 말했지만 요즘은 그 말을 잘 안 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제사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할머니는 킥 하고 웃었다. “그럼 벌써 하고 있지.”

할머니의 말은 가벼운데 안쪽은 무거웠다. 나는 병에 라벨을 더 곧게 붙였다.

둘째 손님은 낯선 청년이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만 멨다. 문턱에 발을 걸치고 주변을 훑어보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 촬영해도 될까요? 과제 때문에… 전통시장 기록하는 프로젝트라서.”

아버지는 통을 보다가 청년을 보았다.

“사진은 맛을 담지 못하죠.”

“그래도… 소리와 움직임은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담아 보세요. 대신 길 막지는 말고.”

청년은 고개를 크게 숙였다. 카메라가 달린 폰을 기계 가까이 들이대고 기름이 실처럼 이어지는 곳에서 천천히 팬을 돌렸다. 화면에 내 손등과 병, 라벨에 적힌 날짜가 스쳐갔다. 나는 괜히 등을 곧게 폈다. 기름의 속도를 따라 숨을 맞추면 손이 덜 떨렸다.

떡집에서 보낸 메신저가 울렸다.

— 미정: 오전 송편 두 통 먼저 나가요. 참기름 두 병 미리 부탁해요.

엄마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 엄마: 지금 짠 걸로 보낼게요. 향 살려서.

나는 두 병을 포장지로 차분히 감쌌다. 병 밑을 손바닥으로 한 번 받치고 입구 쪽으로 얇은 종이를 한 번 더 둘렀다. 걸음이 빨라질 때 병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종이는 반 장 더 필요했다.

그때 문 앞에서 작은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아이였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엄마 손을 잡고 들어오다가 입구 턱에 걸려 휘청했는데 내 손에서 막 받아 든 빈 병이 탁 하고 바닥을 쳤다.

“괜찮아요?”

나는 반사적으로 병을 잡아 올렸다. 다행히 깨지지 않았다.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봤다.

“미안해요…” 아이 엄마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엄마가 먼저 웃었다. “병이 튼튼해요. 사람도 조금은 그래도 돼요.”

아이는 내 손에 들린 병을 오래 쳐다보았다. 불빛이 병목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서 작게 반짝였다.

“예쁘다.”

아이의 목소리는 투명해서 가게 안에 잠깐 물처럼 번졌다. 나는 빈 병이 예쁘다는 말이 고마워서 오늘 라벨을 더 곧게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한옥자 할머니의 병을 두 상자 채우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할머니는 봉투를 가슴에 꼭 안았다.

“사장님 손등이 더 까맣게 탔네.”

“계절을 타니까요.”

“계절 타는 건 기름집도 사람도 똑같지.”

할머니는 문턱을 넘기 전 아버지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손에 바르세요. 큰애가 만든 거요. 맨날 고맙다 하더라고.”

아버지는 사양하려다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라벤더 그림이 찍힌 고운 손크림이 들어 있었다. 향보다 먼저 고마움이 났다.

점심 가까운 시각. 청년이 촬영을 마치고 인사를 했다.

“덕분에 좋은 장면 많이 찍었습니다.”

“찍은 거 어디 올리나요?” 내가 물었다.

“학교 아카이브에도 올리고, 나중에 온라인 전시도 할 거예요. 링크 보내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의 감촉이 거칠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종이 명함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낯설면서도 이 가게에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름 아래 작은 글씨로 ‘도시기록학’이라고 적혀 있었다.

잠시 손님이 뜸해지자 엄마가 장부를 펼쳤다. 검은 펜으로 ‘외상’ 칸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누구?”

“상회집. 지난주에 들깨 껍질 가져간 거.”

“이번 달 안에 오실 거야?”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눈빛이었어.”

엄마는 가게를 오래 보며, 손님들의 ‘오는 눈빛’과 ‘미루는 눈빛’을 구분하게 되었다. 장부에는 숫자와 함께 작은 기억들이 적혔다. ‘아버지 상(喪) 치름’, ‘딸 아이 대학 합격’, ‘작년보다 싱겁게’. 그 메모들은 외상을 기억하게 하고, 외상을 믿게 했다. 여기서는 서로의 이름이 영수증이 되었다.

오후가 되자 떡집에서 심부름 온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와 병을 받아 갔다. 대화는 간단했다.

“두 병.”

“향 살린 걸로.”

“네.”

그 간단함에 익숙해질 때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낯익은 얼굴이었다. 채소 가게 사장님이 깊은 주름이 더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사장,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왜요?”

“마켓에서 무슨 프로모션을 하던데… 시장 상인들 모여서 한 번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는 잠깐 통을 보다가 사장님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은 어려울 수도. 명절 앞이라.”

“그렇지. 그럼 내일 새벽, 떡집 앞에서. 미정이도 부른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죠.”

사장님은 돌아가며 내 어깨를 툭 쳤다. “키가 또 컸네. 기계보다 빨라.”

나는 웃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커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 말이 몸에 먼저 붙었다.

해가 기울 무렵 가게 안 빛이 조금 노랗게 변했다. 통 안의 기름도 노란빛에서 주황빛으로 가볍게 물을 갈았다. 나는 병을 닦으며 잠깐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비눗물로 씻었다. 세 번을 문지르고 네 번째에 비로소 미끄러움이 덜해졌다. 비누 거품 사이로 손등의 살갗이 하얗게 들여다보였다. 거품을 털어내고 보니 손마디마다 얇은 기름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워도 남는다.”

아버지가 기계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뭐가요?”

“향이든 습관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나는 대답 대신 라벨 한 장을 더 곧게 붙였다. 그 말은 어디 붙여도 잘 어울리는 문장 같았다. 지워도 남는 것들로 우리는 하루를 만들었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아버지는 통 아래 바닥을 훑었다. 기름이 떨어진 자리를 보자마자 마른 톱밥을 뿌렸다. 기름은 톱밥과 만나 빠르게 사라졌다. 너무나 금방. 방금 전까지 반짝이던 것이 순간에 없어지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왠지 시간이 헛되이 증발하는 것 같아서였다.

“기름은 흘리면 안 아까워?” 내가 물었다.

“아깝지.”

“근데 이렇게 금방 없어지면… 더 아깝지 않아?”

아버지는 웃었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거지. 다른 데 가서 역할을 해.”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톱밥은 금빛을 다 품고 무덤덤해 보였지만 아버지 말대로라면 어쩌면 그 속에서 다른 향이 자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셔터를 내리기 전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전에 다녀간 청년이었다.

— 오늘 촬영본 중에 몇 컷 보내요.

파일을 열자 기계가 돌며 기름이 이어지는 장면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내 손이 병을 받쳐 들고 라벨 위 여백에 날짜를 적는 순간까지가 하나의 호흡처럼 붙어 있었다. 영상의 마지막에 아버지가 첫 방울이 떨어지는 찰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잡혔다.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이고 눈을 가늘게 뜬 얼굴.

— 나중에 온라인 전시 열리면 알려드릴게요. 제목은 ‘새벽의 금빛’ 정도로 생각 중입니다.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 고맙습니다. 기계가 덜컥거리는 소리도 잘 들려요.

— 네. 그 소리 중독성 있더라고요.

엄마는 내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오늘 잘했다. 병 깨질 뻔한 것도 잘 잡았고.”

“운이 좋았죠.”

“운이 좋은 사람은 대개 손이 바쁘더라.”

엄마는 웃고 나는 따라 웃었다. 아버지가 셔터를 반쯤 내리고 골목 쪽을 한 번 둘러봤다. 떡집 앞에는 아직도 김이 솟고 있었다. 불빛이 김 속에서 번져 나와 가게 간판들을 옅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일은 더 바쁠 거야.”

아버지의 말은 예고가 아니라 약속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것은 힘들고 힘든 것은 오래 남는다. 오래 남는 것은 길이 된다—아침에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한 번 뒤돌아봤다. 셔터 사이로 새어 나오는 기름집의 빛이 골목 바닥에 가는 줄을 만들고 있었다. 낮에 병목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던 금빛과 닮은 그러나 조금 더 차분한 줄. 그 줄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높이 들었다가 괜히 그 위로 천천히 걸었다.

오늘의 금빛은 병에, 톱밥에, 라벨에, 영상 파일에, 그리고 내 발바닥에도 조금씩 묻어 있었다.

내일 아침 기계가 다시 덜컥거리면 나는 또 병을 닦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더 곧게 더 조용히 더 오래 남게.

 

2화 — 떡집의 김

명절이 가까워지면 시장의 호흡이 바뀐다.

평소에는 기름집이 새벽을 열고 반찬가게가 뒤따르고 떡집은 그 다음 순서였다. 하지만 추석을 앞둔 이맘때면 순서가 뒤엉킨다. 떡집이 제일 먼저 불을 밝힌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가게 유리문 사이로 흰 김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골목 공기는 쌀가루와 찹쌀 반죽의 단내로 덮였다.

아버지가 갓 짜낸 참기름 두 병을 종이포장으로 곱게 싸서 내게 건넸다.

“떡집 먼저 갖다 드려라. 송편 반죽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병을 가슴에 꼭 안았다. 따뜻한 금빛이 손바닥을 데웠다. 기름은 새벽에도 뜨거웠다.

골목을 달려 떡집 앞에 이르자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김이 솟구쳐 나왔다. 문턱을 넘자 얼굴이 금세 축축해졌다. 사람들은 밀가루 범벅이 된 손으로 반죽을 치대고 커다란 찜통 뚜껑을 들어 올리면 흰 증기가 눈앞을 가렸다. 그 속에서 미정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네 아버지가 불 낮춰 짠 거라면서? 오늘 건 향이 살아있겠네.”

나는 병을 내밀었다. 이모는 뚜껑을 열어 흰 송편 반죽 위에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순간 반죽이 번들거리며 빛을 입었다. 마치 흰 숨결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떡은 모양보다 향으로 기억되는 거야.”

이모가 말하는 순간 내 귀에는 어제 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던 말이 겹쳐 들렸다.

“기름 냄새 또 난다.”

그 말이 비웃음처럼 남아 있던 가슴 속이 이모의 말로 조금 덜 무거워졌다. 향은 놀림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떡집 안쪽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반죽을 접고 있었다. 그가 나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너 기름집 아들이지?”

나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말은 달랐다.

“이모가 너네 기름 자랑 엄청 하더라. 우리 송편은 그 덕에 맛이 산다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낯선 누군가에게 집안이 칭찬받는 순간에 숨이 조금 가벼워졌다.

점심 무렵 떡집 앞은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 송편을 기다리는 사람들, 종이상자에 절편을 담아 나르는 사람들, 전날 미처 주문하지 못해 허둥대는 사람들. 시장의 명절은 떡집에서 먼저 터졌다. 나는 포장된 송편 상자에 라벨을 붙이는 걸 도우며 이모의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명절이면 이 집 떡을 찾는 건 네네 기름 덕분이야. 향이 없으면 떡이 떡이 아니거든.”

나는 송편이 아니라 내 어깨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어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가 물었다.

“떡집은 어땠냐?”

“사람들 줄이 길었어요. 이모가 우리 기름 덕분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름은 기름집에서 짜지만 그 힘은 떡집에서 살아나.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거야.”

그날 밤 나는 알았다. 우리 집 기름은 단순히 병에 담겨 팔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가게를 살리고 시장 전체의 명절을 지탱하는 숨은 심장이었다는 것을. 떡집의 김 속에서 번진 향이 곧 우리 집의 향이라는 걸.

 

3화 — 학교와 냄새

아침 종이 울리기 전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이 교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시장의 냄새가 아닌 교실만의 냄새였다. 칠판 분필가루 낡은 책상에 밴 먼지, 그리고 가끔 흘러드는 매점 어묵 국물 냄새. 하지만 내 셔츠에는 이미 다른 냄새가 묻어 있었다. 볶은 들깨와 참깨가 한데 섞인 향. 기름집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풍기는 우리 집 냄새였다.

“야, 오늘도 고소하다?”

뒤에서 수호가 킁킁대며 말했다. 그는 일부러 내 어깨에 턱을 얹고 코를 바짝 들이댔다.

“그만해.”

나는 웃으려 했지만 입가 근육이 조금 당겼다.

“진짜야. 급식에 네 냄새 섞이면 더 맛있겠다니까?”

주연이 책상에 엎드린 채로 말했다. “그만 좀 해라. 웃기지도 않아.”

수호는 대꾸하지 않고 내 셔츠 소매를 잡아당기며 킥킥 웃었다. 나는 창문을 더 열었다. 바람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 목덜미를 식혔다. 하지만 바람은 냄새를 가져가지 못했다.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 것. 늘 그렇듯.

첫 수업은 과학이었다. 담임이 말했다.

“오늘은 실험이 있으니 지각하지 말고 다 같이 와라.”

나는 노트에 ‘실험 준비물: 알코올램프, 유리관’이라고 적으면서도 귀에만 어제 떡집의 김 냄새가 맴돌았다. 쌀가루에 참기름을 떨어뜨릴 때 번쩍 빛나던 반죽의 표면. ‘떡은 향으로 기억된다’던 이모의 목소리. 시장에서는 칭찬이던 냄새가 교실에 오면 놀림이 되는 게 이상했다. 냄새는 같은데 이름만 달라졌다.

쉬는 시간에 수호가 내 옆에 앉아 물었다.

“근데 넌 매일 도와? 힘들지 않아?”

“힘든 것도 맞고 해야 하는 것도 맞아.”

“해야 하는 거?”

“응. 그냥… 같이 하는 거야. 우리 집 일이니까.”

수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넌 특이하다.”

그 말은 농담 같았지만 내 가슴 속엔 오래 남았다. 특이하다는 말은 칭찬일까, 아니면 경계선일까.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식실에서는 김이 자욱했다. 오늘 메뉴는 미역국이었다. 국물 위에 둥둥 뜬 참기름 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우리 집 기계의 금빛 방울이었다. 시장에서 매일 보던 그것이 급식 식판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올라오는데 주연이 옆에서 말했다.

“너 아까 창피해하지 말지. 네네 기름 아니면 송편도 맛 없대잖아. 어제 우리 엄마도 그러더라.”

나는 놀라서 주연을 보았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있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연의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처럼 들렸다.

종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일부러 다른 쪽 골목으로 갔다. 시장 반대편에 새로 생긴 대형마트 앞에 서서 자동문이 열리는 걸 보았다. 진열대에 플라스틱 병들이 반듯하게 늘어서 있었다. 반짝이는 라벨, 일정한 용량, 균일한 색. 한 병을 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편리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기름.

가게로 돌아오니 낮에 나를 놀리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서 있었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기름집이 여기였구나. 제사 준비하려고요. 어떤 게 좋아요?”

엄마는 병을 꺼내며 말했다.

“제사면 볶는 불을 조금 낮췄습니다. 향이 더 깊게 살아날 거예요.”

엄마의 손끝에서 기름이 병에 담겼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병목을 받쳤다. 그 손끝이 약간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이상하게 고마웠다. 사람의 손은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날 밤. 방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커튼을 밀고 들어왔다. 내 손등에 코를 대자 비누 향과 종이 냄새 그리고 아주 얇게 깔린 참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붙여 줄 수는 있다.

부끄러움, 자부심, 오늘의 칭찬, 내일의 두려움. 냄새는 결국 내가 걸어갈 길을 알려주는 지도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우리 집 냄새야.”

 

4화 — 시장 사람들

장날은 시장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날이다.

평소에는 골목마다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흘렀다. 기름집은 새벽, 채소좌판은 해 뜨고 조금, 생선가게는 아침, 떡집은 명절 앞. 그런데 장날이면 모든 가게가 하나의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북적임이 소리로 소리가 냄새로, 냄새가 사람의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그 발걸음이 우리 가게 문턱을 통과하면 나는 병을 조금 더 빨리 닦았다.

아침 첫 손님은 반찬가게 ‘영자네’였다. 영자 아줌마는 늘 들깨가루와 자투리 껍질을 달라고 했다.

“사장님, 어제 볶은 들깨 껍질 좀 있슈? 무쳐서 팔면 반응 좋아요.”

엄마는 미리 종량제 봉투에 담아 두었던 껍질을 내주었다. 돈을 받지 않았다. 영자 아줌마는 대신 손수 만든 가지무침과 고사리볶음을 바구니에 담아 건넸다.

“이게 요즘 잘 나가. 사장님 댁 저녁반찬 하라구.”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바구니를 받았다. 장부에는 ‘들깨 껍질—반찬 교환’이라고 적었다. 나는 그 칸 옆에 작은 별표를 그려 넣었다. 교환은 돈의 말보다 오래갔다.

채소좌판의 만식 아저씨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칼로 대파 뿌리를 정리하며 우리 쪽을 힐끗 봤다.

“오늘 파가 달아. 참기름에 살짝 무치면 밥도둑이지.”

“그럼 대파 한 단만 주세요.” 엄마가 말했다.

“돈은 떡집에서 받아.”

만식 아저씨가 웃었다. “오늘 떡집에서 우리 상추 다 쓸 거거든. 그 대금 들어오면 여기로 한 단 보낸 셈 칠게.”

나는 그 말의 계산법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떡집—채소좌판—기름집. 돈은 한 번만 움직이는데, 마음은 세 번 왔다 갔다 했다. 장부로 계산하면 복잡했지만, 사람으로 계산하면 간단했다.

열 시쯤 되자 철물점의 ‘상회집’ 사장님이 우리 가게 문턱을 발로 툭 치고 들어왔다. 구두 앞코가 닳아 있었다.

“사장, 그 축 고정하는 작은 고리 있지? 지난번에 받아 간 거.”

“있죠.” 아버지가 서랍에서 작은 봉지 하나를 꺼냈다.

“근데 그거 아직 값 못했는데…”

“오늘 들어오는 길에 영자네에 들렀다 가셔. 반찬 하나 하고 얘기하면 돼요.”

사장님은 허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여기는 돈보다 말이 먼저네.”

“말을 끝까지 지키면 그게 돈이지요.” 엄마가 답했다.

사장님은 봉지를 쥐며 내 어깨를 톡 쳤다. “학교는 어때?”

“장날이면 더 늦게 가고 싶어요.”

“그 마음 알아. 나도 학생 땐 장날만 기다렸어.”

점심 무렵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장날 비는 약속도 없이 찾아온다. 바람이 들이치자 좌판의 비닐 지붕이 한 번 크게 떨렸다. 채소 잎사귀들이 뒤집혔고, 생선 비린내가 진하게 올라왔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천막 안으로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그 순간부터는 누구 가게, 누구 손님이 없었다. 모두가 서로의 비닐을 붙잡아 주고, 물이 고인 지붕을 긴 장대로 밀어 내렸다.

우리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셔터를 반쯤 내리고, 나는 문 앞에 고인 물길을 빗자루로 틀었다. 엄마는 방수포를 꺼내 기계 옆을 덮었다. 바닥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명을 잃은 국처럼 우르르 몰렸다가 다시 골목 하수구로 삼켜졌다.

떡집에서 미정 이모가 달려왔다. 머리끈이 비에 젖어 축 처져 있었지만, 눈은 반짝였다.

“사장님, 여기 방수포 더 있어요?”

“여분 있어요.” 엄마가 건네자 이모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기계 먼저 덮으셔. 우리는 사람 손이 많으니까.”

“기계는 물 몇 번 맞아도 돼. 사람은 감기 걸리면 안 돼.” 아버지가 방수포를 이모에게 다시 밀어 줬다.

그 짧은 밀고 당김에 시장의 서열이 들어 있었다. 누구의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오늘 어떤 것이 더 위태로운가. 그걸 몸이 먼저 알아서 움직였다.

비가 그치자 골목은 씻긴 얼굴처럼 환해졌다. 장날의 두 번째 박자가 시작되었다. 젖은 바닥에서 흙냄새가 올라왔고 반짝 비친 빛이 사람들의 발목을 감쌌다. 나는 기계 옆에 붙은 깔때기 가장자리를 닦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몰아치던 빗줄기가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게 신기했다. 사라진 건 물 뿐이었고, 남은 건 서로 붙잡아 준 손의 열이었다.

잠깐의 고요 속, 단골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첫 번째는 미장원 원장님.

“명절 앞에 고객들 비빔밥 잔치하려구. 참기름 세 병.”

엄마가 병을 따르며 물었다. “그 잔치 아직도 하세요?”

“그럼요. 손님들 머리 만지면서 밥도 같이 먹어야 정이 쌓이지.”

나는 미장원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미용실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섞이면 어떤 향이 날까. 새로 깎은 머리카락 위로 금빛이 사뿐히 내려앉는 그림이 떠올랐다.

두 번째는 분식집 부부.

“떡볶이 마감에 비빔면 팔아야겠다. 참기름 한 병만.”

아저씨는 허리를 잡고 “허리가 나갔어, 나갔어” 하면서도 웃었다. 아줌마가 곁에서 “말이 나갔지 허리가 나가긴” 하고 핀잔을 줬다.

엄마가 병을 건네며 말했다. “비빔면이면 깨소금도 조금 가져가. 어제 볶은 거.”

“미안해서 어째.”

“내일 떡집에서 떡 두 줄만 보내.”

“그건 더 미안하네.”

“미안하면 더 보내.”

그들 사이의 미안함은 계산 방식이었다. 미안하네—라는 말은 값을 치르겠네—라는 뜻이었다.

오후 늦게, 차림이 곱상한 중년 남자가 우산을 턱턱 털며 들어왔다. 고급 양복에 구두가 번들거렸다. 그는 병이 아닌 메모장을 꺼냈다.

“혹시 도매 가능합니까? 저희는 프랜차이즈인데 각 지점에 동일한 품질로…”

아버지는 고개를 기울였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월 이백 병 정도로 시작해서 반응 보면 더 늘릴 수도 있고요. 맛은 좋은데, 가격이…”

아버지는 말을 끊었다. “우리는 한 병 한 병 누구 상에 올라가는지 대충 압니다.”

남자는 잠깐 웃었다. “요즘은 스토리보다 물류가 중요해서요.”

엄마가 조용히 라벨을 붙이며 말했다. “우리한테는 스토리가 물류예요.”

남자는 낯빛을 바꾸지 않았지만 우산 손잡이를 한 번 더 쥐었다 폈다.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명함을 두고 갔다. 엄마는 명함을 장부 한가운데 말아 넣었다가 다시 펴서 서랍 깊숙이 넣었다. 나는 장부의 빈 칸을 보며 생각했다. 물류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사람의 이름으로 적히는 것이라고.

해가 기울 즈음, 영자 아줌마가 반찬 한 통을 들고 다시 왔다. 들깨 껍질로 무친 비지무침이었다.

“맛 좀 봐봐. 손님 반응 괜찮으면 메뉴에 올릴라구.”

엄마와 나는 작은 접시에 덜어 맛을 봤다. 고소하고, 담백하고, 마지막에 남는 깨의 향이 길었다.

“이건 팔리겠다.” 엄마가 단번에 말했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해.”

“들깨비지무침? 길지?”

“길면 기억이 안 나. ‘깨비지’ 어때?”

영자 아줌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깨비지? 재밌네. 애들이 좋아하겠다.”

나는 그 이름을 장부 귀퉁이에 적어 보았다. ‘깨비지—교환: 들깨 껍질’. 이렇게 적어 두면 다음 장날에 무엇을 더 가져와야 할지 헷갈리지 않았다. 이름이 붙으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질녘이 되자 만식 아저씨가 대파 대신 상추 한 봉지를 들고 왔다.

“오늘 떡집에서 계산 끝냈어. 이건 기름집 몫.”

아저씨는 상추 봉지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상추 잎사귀가 냉기를 품고 있었다. 흙과 물의 냄새가 났다.

“내일 아침에 비비면 되겠다.” 엄마가 말했다.

“비빌 때 기름은 조금만. 요새 젊은 사람들은 담백한 걸 좋아해.”

아저씨의 말은 시장 통계였다. 사람 입맛은 매주 조금씩 바뀌었다. 그 변화를 제일 먼저 아는 건 좌판의 손이었다.

문득 기억나서 나는 철물점으로 달려갔다. 상회집 사장님이 고리를 쥔 손으로 가게 셔터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사장님! 그거 고리요. 오늘 영자네에서 반찬 받아 가시면 된대요.”

“알고 있지.” 사장님이 웃었다. “근데 너한테 직접 말하라고 하더라. 꼬마 회계사.”

“저 꼬마 아닌데요.”

“그럼 청년 회계사.”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철물점 앞은 고무 냄새와 쇠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에 참기름 향이 한 가닥 끼어들었다. 오늘 하루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는 냄새였다.

가게로 돌아오니 엄마가 장부를 덮고 있었다.

“오늘 외상칸에 별표가 많네?”

“교환도 외상으로 치면 길어져.”

“길어지면 뭐가 좋아요?”

“길어질수록 끊기지 않거든. 돈은 정확하지만 정은 길잖아.”

엄마의 말은 멋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멋있었다. 나는 라벨 뒷지에 남은 풀을 손끝에서 둥글게 굴렸다. 굴리면 투명한 공처럼 말려 올라갔다가, 손바닥에 붙었다. 떼려면 한 번에 쭉 당겨야 했다. 사람 사이의 정은 그 반대였다. 한 번에 당기면 끊어지고, 오래 굴리면 둥글게 커졌다.

아버지는 기계를 닦고, 깔때기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슬쩍 긁었다. 묻어 나온 검은 가루를 휴지에 대고 훑어냈다.

“오늘은 덜컥거림이 부드러웠네.”

“비가 씻어줬겠죠.”

“비가 씻어준 건 바닥이고, 사람들은 서로가 씻어줬지.”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낮의 빗줄기와 방수포, 서로에게 건넨 말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방수포를 건넸고 누군가는 장대를 들어 올렸고 누군가는 병을 더 조심히 받쳤다. 누구도 영웅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씻겨 나갔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자 미정 이모가 마지막 송편 상자를 들고 가게 앞을 지나갔다.

“내일 아침 회의 잊지 마요. 시장 사람들 모이라고 했어. 마트 프로모션 건.”

“알았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말고 돌아섰다.

“아, 맞다. 영자네가 너희 들깨 껍질로 만든 새 반찬 이름 정했대.”

“깨비지?” 내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지었거든요.”

이모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기름집이 저작권료 받아야 되는 거 아냐?”

“저작권료 대신 반찬 한 통이요.” 엄마가 말했다.

“그럼 두 통 줄게.” 이모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장난 같은 약속은 장날의 결산표였다.

셔터를 내리고도 한참 기름 냄새는 가게 안에 얇게 떠 있었다. 나는 오늘의 날짜를 마지막 병 라벨에 적었다. 장날. 비. 교환. 깨비지.

짧은 단어들이지만 그 단어들 사이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장날엔 돈이 더 많이 오가지만 이상하게 돈만 남지는 않았다. 남는 건 이름이었다. 영자네, 만식 아저씨, 상회집, 미정 이모, 한옥자 할머니. 그리고 ‘우리’.

계단을 올라가며 뒤돌아보니, 골목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물 위에서 부서지며 작은 금빛 조각들을 만들었다.

그 금빛 조각 위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지나갔다. 발자국은 곧 사라졌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로 보였다. 나는 그 발자국의 주인을 가만히 떠올리며 생각했다. 여기서는 서로의 이름이 영수증이고, 서로의 걸음이 영수증이다. 내일 아침에도 이 골목은 그 영수증을 확인할 것이다.

문을 닫는 아버지 뒤에서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사람이 남아야 시장이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사람이 남아야 우리 집도 남는다.

 

5화 — 조용한 위기

새벽 공기가 유리처럼 차가워진 날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골목 벽에 밀착돼 있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셔터를 올리기 전 아버지가 평소보다 길게 숨을 멈추었다 놓았다. 기계 옆 탁자 위에 놓인 전단지가 바람결에 살짝 들썩였다. 누가 문틈으로 밀어 넣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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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씨가 눈을 찌르는 듯했다. 사진 속 병들은 똑같은 각도로 서 있었다. 라벨의 금박 테두리는 규칙적으로 반짝였다. 나는 전단지를 접었다 펴다가 다시 반으로 접어 유리병 상자 밑에 밀어 넣었다. 접힌 금박이 상자 밑에서 작은 칼날처럼 빛났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기계의 축을 만졌다. 한 번, 두 번. 금속이 손끝에서 작은 울림을 보냈다.

“오늘도 낮은 불에서 시작하자.”

그 말은 매일의 인사말 같았지만 오늘은 안쪽이 조금 비어 있는 소리였다. 나는 병을 닦기 시작했다. 젖은 천으로 입구를 돌릴 때마다 천의 섬유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기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도 내 손끝은 이미 미끄러웠다.

덜컥— 덜컥—. 기계가 돌아가고, 볶아 둔 들깨가 깔때기 안으로 쏟아졌다. 통 아래, 첫 방울이 떨어지는 찰나의 소리를 기다리며 모두의 숨이 얇아졌다. 딱, 하는 소리가 나자 아버지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금빛이 드디어 이어졌다. 밸브를 조절하는 손놀림이 오늘은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작은 실수가 오늘은 더 크게 번질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문이 열리고 한옥자 할머니가 들어왔다. 코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장님, 오늘은… 뭐랄까 냄새가 조금 얌전하네?”

아버지가 밸브를 한 치만큼 더 열며 대답했다.

“불을 낮췄어요. 진하게 끓이는 것보다 오래 남게 하려고요.”

할머니는 병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냄새를 맡았다.

“응. 얌전한데 오래 가겠다. 제사에는 그게 낫지.”

말끝이 길었다. 할머니는 계산대를 두드리며 낮게 덧붙였다.

“근데 너희 들었니? 마트에서 균일가 한다더라. 옆집 김 씨가 벌써 한 병 샀다네. 급해서.”

엄마가 웃음을 띠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급하면 뭐든 손에 잡히는 걸 사죠. 제사 전은 늘 급하니까요.”

할머니는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고개 끄덕임이 오늘은 우리 편에 서 있지 않아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아침 줄이 예전만큼 길게 늘어서지 않았다. 간격이 넓었다.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빈 의자가 놓인 것처럼, 대화의 텀이 길었다. 병을 닦다가 문밖을 보면 골목 끝에서 마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뒷모습이 한둘 보였다. 우리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었다.

아홉 시 무렵, 떡집에서 메시지가 왔다.

— 미정: 오늘 오전 물량 반으로 줄여요. 손님들이 마트 기름 맛 좀 본다나… 오후에 상황 보고 다시 보낼게.

엄마가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 엄마: 알겠어요. 혹시 모자라면 말해요.

메시지를 보내고 엄마는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 화면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는 화면은 오래 본 사람의 얼굴처럼 피곤해 보였다.

낯선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재빨리 둘러보고는 말했다.

“혹시 맛 좀 볼 수 있나요? 엄마가 전 부친다길래…”

아버지는 스푼을 꺼내 병 입구에 기름을 아주 조금 떨어뜨려 건넸다.

젊은 남자는 코앞에 대고 한 번 혀끝으로 아주 조금 그 다음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마트에서 파는 거랑 무슨 차이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차이’라는 단어를 한 번 굴려 보듯 되뇌었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이 병이 어느 집 상에 오르는지 어떤 반찬에 올라가는지 대충 압니다. 그래서 볶는 불도 조금씩 다르게 합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계산 중 같았다. 그는 한 병을 사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계산의 잔향이 가게 안에 남았다.

점심 무렵 채소좌판의 만식 아저씨가 상추 한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오늘은 외상으로 안 치고 그냥 선물.”

“왜요?”

“선물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아저씨는 더 묻지 말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나갔다. 그 어깨가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상추 봉지를 든 채 서 있었다. 봉지 안에서 흙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비닐 안쪽에 맺힌 물방울들이 상추 잎 맥을 타고 흘렀다. 흔들림 없는 초록. 오늘 같은 날에는 초록의 트집조차 잡을 수 없었다.

오후에 반찬가게 영자 아줌마가 뛰어 들어왔다.

“사장님, 오늘 깨비지 반응 좋아요. 대신 손님들이 기름 어디서 사냐고 묻는데… 내가 말했지. ‘저기, 이름 라벨에 날짜 적어주는 집’이라고.”

엄마가 고마워하자 영자 아줌마가 손사래를 쳤다.

“근데 나도 한 병만 외상 좀. 오늘은 진짜 손님이 ‘마트가 더 싸다’고 자꾸 따지는 통에 나도 속 좀 상했어.”

엄마는 병을 하나 꺼내 조용히 라벨을 붙이고 날짜를 적었다.

“오늘 날짜는 너랑 나 둘 다 기억하자.”

영자 아줌마가 병을 받아 들고 씨익 웃었다. 웃음이었지만 눈가엔 물기가 얹혀 있었다. 해가 조금 기울었을 때, 학교 친구 수호가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교복 바지선이 구겨져 있었다.

“여기였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엄마가 기름 한 병 사오래.”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천천히 훑었다. 오래된 병. 지금은 쓰지 않는 금속 깔때기, 아버지의 젊은 시절.

“냄새… 진짜 다르다.”

수호는 말끝을 삼켰다. 나를 놀릴 때 키득거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 냄새 얘기해서 미안.”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오랫동안 고였던 말들이 입구에서 서로 먼저 나오겠다며 밀치고 있었다.

“괜찮아.”

말은 짧았지만 내 몸 어딘가가 느슨해지는 소리가 났다.

“근데, 진짜로… 마트랑 뭐가 달라?”

나는 아버지가 낮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로 옮기는 게 가장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해. 누가 뭘 먹는지. 그게… 맛에 들어가.”

수호는 멍하니 병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을 기억하는 맛…”

그는 그 말을 한번 굴려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거 사갈게.”

그가 문을 나서며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수호의 뒷모습은 예전보다 조금 덜 장난스러워 보였다.

오후 늦게 상회집 사장님이 급히 달려왔다.

“오늘 밤 상인회 회의 변경. 장소 떡집. 마트 쪽 영업사원이 상인회장한테 미팅 제안했대. 우리도 얘기 듣자고.”

“영업사원이 직접 와요?” 엄마가 물었다.

“그래. 어디까지 진심인지 들어나 보자고.”

아버지는 통의 밸브를 잠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조금 일찍 닫자.”

말은 침착했지만 손끝 힘이 평소보다 세졌다. 마지막 병에 라벨을 붙이다가 모서리가 살짝 접혔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떼어 다시 붙였다. 라벨이 조금 지워진 자리 위로 새 라벨이 포개졌다. 지웠지만 남는 자리. 남지만 지우는 자리. 오늘 하루와 닮았다.

문을 닫고 떡집으로 향했다. 떡집 유리문 안은 따뜻한 김으로 가득했다. 상인들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채소좌판 만식 아저씨, 반찬가게 영자 아줌마, 생선가게, 미장원, 분식집, 그리고 상회집 사장님. 모두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회의는 상인회장이 입을 여는 것으로 시작됐다.

“마트 쪽에서 ‘상생’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 시장에 홍보 부스를 마련해 함께 명절 분위기를 살리자고.”

웅성거림이 돌았다. 생선가게 사장님이 먼저 물었다.

“상생이면 가격은? 균일가로 밀고 들어오면 우리 뭐로 버텨?”

상인회장은 입술을 축였다.

“그쪽 말로는 ‘우리는 가격, 시장은 이야기’라며 역할분담을 하자더라.”

분식집 아줌마가 헛웃음을 쳤다.

“손님은 ‘이야기’ 먹고 배 채우나?”

모두가 웃었지만 웃음은 곧 사라졌다.

잠시 뒤 단정한 정장차림을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후에 우리 가게에 왔던 그 사람과는 달랐다. 배지에 회사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는 준비해 온 제안서를 펼쳐 보였다.

“시장 입구에 공동부스를 설치해 ‘서울의 명절’을 함께 알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가격 경쟁력과 물류를 여러분은 전통과 이야기를.”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손님이 우리 가게에서 한 병 사면 부스에서 하나 더 싸게 파는 것도 상생입니까?”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서로 보완적으로…”

“보완이 아니라 대체가 일어나죠.” 엄마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보완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요. 사람이 줄 서서 기다리다가 ‘여기가 나한테 맞다’고 깨닫는 그 순간. 그런데 균일가 전단지는 그 순간을 앞에서 잘라요.”

남자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그럼 어떤 방식이 여러분께 도움이 될까요?”

나는 그 질문을 종이에 적었다. 도움이라는 단어가 오늘처럼 낯설었던 적이 없었다.

침묵이 길었다. 그때 영자 아줌마가 손을 들었다.

“공동부스에서 우리 가게들 ‘사람 이름’을 붙여 주세요. ‘오늘의 기름—○○기름집’, ‘오늘의 반찬—영자네’처럼. 그리고 손님이 거기서 맛을 보면, 우리 가게 위치로 발을 옮기게. 길 안내를 해 주세요.”

만식 아저씨가 덧붙였다.

“부스에서는 맛보기만. 판매는 각 가게로. 그게 상생이지.”

분식집 부부가 손을 맞잡았다.

“맛보기 재료는 얼마까지 지원해 줄 건가요? 우리도 원가가 있어요.”

남자는 수첩을 펼쳤다.

“비용은 협의 가능합니다. 다만… 구매 전환이 어느 정도 나오는지 데이터도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터 좋습니다. 대신 우리 식의 데이터도 같이 기록합시다. 누구 집 제사, 누구네 돌잔치, 누구네 미장원 잔치처럼. 이름이 있는 데이터.”

남자는 펜을 멈추고 우리를 보았다.

“그런 데이터는 법적으로…”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입니다.” 엄마가 잘랐다. “이 시장을 움직이는 건 카드 단말기보다 ‘누구네’라는 이름이에요. 그 이름까지 함께 기록합시다. 개인 정보는 빼고 관계의 지도만 남기죠.”

회의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김 솟는 소리만 들렸다. 떡이 익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표정으로 익어가는 솥뚜껑을 바라보았다.

회의는 결론 대신 약속으로 끝났다.

— 공동부스 설치는 하되 판매는 각 가게로 유도한다.

— 맛보기 비용은 일정 부분 지원받고 전환율은 ‘우리식 데이터’와 함께 본다.

— 전단지는 ‘가격’ 대신 ‘사람’을 먼저 소개한다: “오늘의 참기름: 라벨에 날짜를 적어 주는 집”.

— 명절 주간, 골목길 안내 표지판을 임시로 세운다. 마트에서 시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사람 이름을 적는다.

돌아오는 길. 골목은 이미 어두웠다. 떡집 유리문 안의 김이 노랗게 반짝였다. 아버지는 길가에 붙은 전단지 하나를 떼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버리려고요?” 내가 물었다.

“두고 보려고.”

“뭘요?”

“내일 우리가 어떻게 붙이는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오늘 아침보다 조금 단단했다.

집에 올라와 방에 누우니 낮에 봤던 젊은 남자의 질문이 떠올랐다. 차이가 뭐냐고. 나는 노트를 꺼내 적었다.

차이

볶는 불의 높이,

병에 적힌 날짜,

라벨 뒤에 묻어 있는 손의 압력,

누군가의 상차림을 기억하는 일,

이름으로 불러 주는 방식.

적다 보니, 내 손끝에 금빛이 다시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잠시 펜을 놓고 손등을 코에 갖다 댔다. 아주 옅게 오늘도 우리 집 냄새가 남아 있었다. 낮보다 더 얌전했지만 오래 갈 냄새. 한옥자 할머니가 말했던 그 향.

휴대폰이 진동했다. 수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 엄마가 맛 다르대. 내일 또 간대.

— 그리고… 미안.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 내일 오면 내가 라벨 적어 줄게. 너희 집 이름으로.

불을 끄고 눈을 감으니 마트 진열대의 반짝임과 우리 가게 통 위 금빛이 한 화면에 겹쳐졌다. 균일한 빛과 매일 조금씩 다른 빛. 하나는 보기 좋았고 하나는 살아 있었다.

내일 아침 우리는 다시 기계를 돌릴 것이다. 그리고 공동부스 앞에서 누군가에게 한 방울의 차이를 건넬 것이다. 조용하지만 오래 가는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먼저 붙이는 방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잠들기 직전에 문득 오늘 떡집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남아야 시장이다.”

나는 속으로 그 문장에 하루의 날짜를 붙였다. 2025년 9월 18일. 조용한 위기의 첫날.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한다.”

 

6화 — 기록과 홍보 사이

처음으로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장날 회의 이후였다.

마트의 제안서를 본 순간 머릿속에 번쩍 들었던 말. “데이터가 필요하다.”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 단어를 집까지 들고 왔다. 데이터라면 내가 할 수 있었다. 종이에 적는 것 말고, 더 넓게, 더 빨리 퍼지는 방식으로.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핸드폰을 올려두었다.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결국 ‘계정 만들기’ 버튼을 눌렀다. 아이디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기름집아이.

프로필 사진은 아버지가 기계 옆에 앉아 있는 뒷모습으로 했다.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금속 기계와 병을 붙드는 두 손이 충분히 우리 집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다.

첫 글은 단순했다.

〈오늘의 기름〉 2025.09.19. 볶는 불 낮춤. 향은 얌전하지만 오래 감.

사진 한 장을 덧붙였다. 병 위에 방울이 맺히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기름 속에 들어가 더 진하게 반짝였다. 화면 속에서도 금빛은 살아 있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학교에서 발표를 할 때보다 더. 이건 우리 집이 시장 바깥으로 나가는 첫 걸음이었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미정 이모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야 이거 네가 올렸냐? 여기, ‘기름집아이’.”

화면에는 내가 어젯밤 올린 사진이 떠 있었다. 좋아요가 이미 스무 개 넘게 붙어 있었다. 댓글도 몇 개.

— 냄새 나는 것 같아요.

— 우리 엄마가 여기만 찾는데 드디어 계정 생겼네!

— 시장 기름 최고.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거… 제가 맞아요.”

이모가 박수를 쳤다.

“잘했다! 요즘은 말보다 이게 더 먹혀. 손님들이 사진보고 와서 물어본다니까.”

엄마는 놀란 눈으로 내 휴대폰을 보았다.

“언제 이런 걸…”

“어제 회의 끝나고요. 데이터 필요하다 해서…”

아버지는 기계를 돌리다 말고 우리 쪽을 힐끗 봤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날 오후 가게 앞에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여자 손님이 왔다.

“여기 인스타에서 봤어요. 진짜 매일 날짜를 적어 주시나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건 방금 짠 거예요.”

여자가 휴대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향이 다르다더니 병도 다르네요. 이거 주세요.”

병 하나가 그녀의 장바구니에 담겼다. 나는 라벨에 오늘 날짜를 적으면서 펜 끝이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기록이 실제로 발걸음을 데려온 순간이었다.

학교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주연이 내 자리에 와서 물었다.

“야 너 인스타 했지? 우리 엄마가 어제 그 계정 보여주더라.”

옆자리 애들도 귀를 기울였다.

“사진 되게 예쁘던데? 냄새도 느껴지는 것 같았어.”

수호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제 ‘기름 냄새 난다’는 말이 칭찬이네?”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웃음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조금 달랐다. 과학부실에서 실험 준비를 하다가 내 휴대폰에 알림이 뜨자 선생님이 눈길을 주었다.

“요즘 너네 나이에 사업 흉내내는 애들이 많다더라. 공부보다 그게 우선이면 안 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훈계였지만, 내 귀에는 균일가 전단지처럼 들렸다. 같은 말이어도, 누구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졌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공부는 네 몫이고, 집안일은 우리 몫이지. 그런데 네가 우리 몫을 같이 해주고 싶다면… 그건 고맙지. 다만, 네 몫을 버리지는 마.”

아버지는 말없이 병에 라벨을 붙이고 있었다. 오늘은 라벨 글씨가 평소보다 크고 굵었다. ‘2025.09.20’. 숫자가 기계음처럼 울려 퍼졌다.

계정을 만든 지 사흘째, 팔로워가 백 명을 넘겼다. 댓글에는 추억을 말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 어릴 적 외할머니가 늘 여기서만 사셨는데…

— 명절 때마다 아버지가 사오던 집인가요? 병 모양이 기억나요.

— 서울에도 아직 이런 곳이 있구나.

나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이름 대신 닉네임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분명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장부를 쓰는 기분이었다. 돈 대신 기억으로 채워지는 장부.

그러던 중, 낯선 댓글이 달렸다.

— 결국 가격이 문제죠. 향이고 뭐고 마트가 반값이면 거기로 갑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면을 오래 들여다봐도 그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우고 싶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오히려 더 크게 남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을 달았다.

— 가격은 마트가 이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향은 사람을 따라옵니다.

손끝이 떨렸다. 올리자마자 후회가 밀려왔지만 곧 다른 댓글이 붙었다.

— 맞아요. 여긴 향을 기억해 주는 집이에요. 우리 엄마 이름을 라벨에 적어 주셨던 게 아직도 생각나요.

— 시장은 가격이 아니라 얼굴이지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댓글이 댓글을 붙잡아 주는 광경은 장날 비에 서로의 비닐을 붙잡던 시장 사람들과 닮아 있었다.

그날 밤에 아버지가 내 방 문을 열었다.

“오늘 올린 글, 내가 봤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혼날 줄 알았다.

아버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했다. 하지만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우리가 진짜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지 더 묻는 사람이 나올 거다. 그때는 네가 대답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가 조용히 문이 닫혔다.

창문을 열자, 밤공기가 들어왔다. 골목은 어두웠지만, 가게 기계 위에 남은 기름 방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 오늘도 향은 사람을 따라왔다.

짧게 적고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방울은 작은 별처럼 보였다. 그 별을 바라보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공부와 집 일 사이, 기록과 홍보 사이.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잠이 들기 전에 댓글 알림이 하나 더 떴다.

— 당신 덕에 우리 집 제사가 살아났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한 줄이 오늘 하루의 마침표였다.

 

7화 — 고장 난 새벽

명절 전날. 새벽 공기는 유난히 얇았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금방 찢어질 것 같은 깨지기 쉬운 유리막처럼.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일찍 셔터를 올렸다. 가게 안은 아직 어둡고 형광등은 두 번 깜박인 뒤에야 불이 붙었다. 나는 먼저 유리병 상자를 꺼냈다. 라벨 뒷면의 보호지를 벗기며 윗변을 기준으로 맞추는 동작을 몇 번 연습했다. 오늘은 실수 없이 붙이고 싶었다. 오늘은 실수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온도는 어제랑 같게. 불 낮추고 눌림은 한 치 더.”

아버지가 기계 옆에 서서 축을 두 번 문질렀다. 금속 표면이 새벽의 차가움을 머금고 손끝에 옮겨왔다.

엄마는 병 닦는 걸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떡집에서 새벽 물량 먼저 달래. 송편 세 통, 절편 세 통. 아침 여덟 시 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신저에 체크리스트를 적어 둔 걸 다시 확인했다. 떡집 우선, 옥자 할머니 오전, 미장원 점심 전, 분식집 마감용.

메모를 닫는 순간,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리듬은 설렘과 긴장이 겹친 소리였다.

덜컥— 덜컥— 기계가 회답했다. 볶아 둔 들깨가 깔때기에서 쏟아져 들어갔고 안쪽에서 눌리며 길을 찾았다. 나는 밸브 아래에 통을 놓고, 첫 방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늘 그랬듯, ‘딱’ 하는 소리가 가장 먼저 우리를 안심시켜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밸브를 조심스럽게 더 열었다. 기계 안쪽에서 ‘읏—’ 하는 낮은 마찰음이 났다. 축 어딘가가 걸린 듯한 소리.

“잠깐 멈춰.” 아버지가 전원을 끊었다. 덜컥거림이 뚝 하고 끊겼다. 가게 안에 순간 진공이 생겼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로 냄새가 더 진하게 밀고 들어왔다. 볶은 들깨 냄새가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아버지는 드라이버를 꺼내 덮개를 열었다. 나사 두 개가 굳은 기름에 눌려 있었다.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기름을 닦은 뒤 축을 가볍게 밀었다 당겼다.

“살짝 휘었네.”

“휘었다고요?”

“어제 비에 젖었다가 식으면서 금속이 수축했을 거다.”

엄마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수리하자. 지금.”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로 잡아보지. 오늘만 넘기고, 명절 지나면 축 갈아야 해.”

덮개를 열고 축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려는 순간에 금속이 ‘딱’ 하고 더 멀리서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얇은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축의 끝단이 손톱만큼 나갔고 미세한 금속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쿠.” 엄마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탄식이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체크리스트가 흐트러졌다. 떡집 우선이라는 글자가 ‘흐—’ 하고 번졌다.

아버지는 손톱 끝으로 나간 부분을 확인하더니 짧게 말했다.

“상회집.”

같은 골목 철물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뛰었다.

아직 완전히 밝지 않은 골목으로 찬 공기가 닿았다. 상회집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다. 손바닥으로 두드리자 안쪽에서 발걸음이 났다.

“누구야— 어, 너구나.”

사장님이 셔터를 올리며 내 얼굴을 봤다.

“축 끝에 끼우는 고리, 더 작은 규격 있는 거요?”

“쟤가 또 나갔어?”

“네. 오늘… 오늘은 꼭 돌아가야 해요.”

사장님이 실눈을 뜨고 내 등을 한 번 두드렸다. “알지.”

그는 계산대 아래 서랍을 뒤지고 벽에 걸린 투명 서랍장으로 가 규격별로 나눠 둔 봉투를 꺼냈다.

“정확히 같은 규격은 없는데 머리만 살짝 갈아내면 맞을 거야. 그라인더 켜도 되냐?”

“지금요?”

“지금이 언제라고.”

사장님은 셔터를 다시 내리고 안쪽 공구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금속 냄새와 기름 냄새가 얽혀 있었다. 그라인더가 켜지자 매끈한 불꽃이 짧게 연필심처럼 튀었다. 금속이 조금씩 깎여 나가며 다른 노래를 만들었다.

사장님은 중간중간 고리를 내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너 손이 덜 떨린다. 아침마다 병 닦아서 그런가.”

“오늘은… 더 떨려요.”

“그래도 덜 떤다. 덜 떨리는 손이 사람을 살려.”

사장님은 마지막 손질을 하고 고리를 내게 건넸다.

“이걸로 오늘만 버텨. 명절 지나면 내가 축 통째로 새로 구해줄게. 외상으로.”

“오늘 안에 갚을게요.”

“명절 지나고. 오늘은 사람 먼저.”

가게로 달려 돌아오는 길. 떡집 앞에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김이 유리문을 통해 밖으로까지 번졌다. 미정 이모가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불렀다.

“됐어?”

“오늘만 버틸 거예요.”

“그 ‘오늘만’이 오늘 우리 다 살릴 거야. 먼저 송편 반죽에 들어갈 것만이라도 부탁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가 덮개를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리를 끼우고 축을 다시 밀어 넣었다. 나간 끝단이 고리에 맞닿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잠깐.” 아버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엄마가 긴 케이블 타이를 건넸다. 아버지는 고정 위치를 조정하면서 타이를 일시 고정용으로 두 군데 묶었다.

“전원.”

나는 스위치를 올렸다. 덜컥— 덜컥— 소리가 났고, 순간 ‘이’ 하는 약한 비명이 났다가 사라졌다. 기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회전수를 올렸다.

“통.”

엄마가 스테인리스 통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첫 방울이 떨어졌다.

딱.

그 소리는 오늘따라 너무 또렷해서 가슴이 조금 아플 정도였다. 금빛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떡집 두 병 먼저.”

나는 병을 잡아 뚜껑을 열었다. 금빛이 병목에 매달렸다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늘은 라벨을 붙이는 속도보다 기계의 속도가 느렸다. 느리지만, 움직였다. 그게 전부였다.

첫 두 병을 종이로 감싸 안고 떡집으로 뛰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이모가 상자를 들고 길에 나와 있었다.

“여기! 반죽 기다려. 이거 먼저 쓸게.”

이모는 뚜껑을 열고 참기름을 떨궜다. 반죽의 표면이 그제야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이모의 목소리는 진짜 뜨거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가게로 뛰었다.

돌아오니 이미 한옥자 할머니가 문턱을 넘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도 제사 앞이라…”

엄마가 할머니를 보고 상체를 깊게 숙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늘 기계가 덜 건강해서.”

할머니는 걸음을 아주 조금 줄였다.

“사람도 덜 건강할 때가 있지. 그래도 땀이 나와.”

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위로가 되는지 몰랐다. 사람의 땀과 기계의 기름이 같은 문장 속에 섞여 버리는 순간.

아버지는 속도를 더 올리지 않았다. 기계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바퀴라면 더 밟았을까? 아버지는 브레이크를 가볍게 밟은 채로 내리막을 내려가는 운전자 같았다.

우리는 병을 받았고, 라벨을 붙였고, 날짜를 적었다. 오늘날짜는 이상할 정도로 굵게 써졌다. 펜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힘을 주어 눌러 쓰는 느낌. 2025.09.21. 명절 전날.

엄마가 중얼거렸다.

“오늘 날짜는 오래 남겠네.”

“왜요?” 내가 물었다.

“어려운 날에 적은 날짜가 사람 머리에 더 오래 남아. 결혼식도, 장례식도, 애 낳은 날도. 오늘은 그런 날이야.”

오전 내내 우리는 속도를 유지했다. 속도가 우리를 이끌었다기보다, 우리가 속도를 설득하는 모양새였다. 그 사이사이에 시장 사람들이 들렀다 가며 조금씩 도와주었다. 영자 아줌마는 달걀지단을 썰어 봉투에 넣어주며 말했다.

“너넨 점심 못 먹을 거 같아서.”

만식 아저씨는 상추 대신 대파를 쥐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된장찌개라도 끓여. 물 끓기 전에 대파부터.”

상회집 사장님은 한 번 더 들러 고정 나사를 점검했다.

“오후 두 시쯤 다시 올게. 그때는 이걸로 바꾸자.” 그는 손바닥 위에 작은 심 같은 나사를 두 개 올려 보여줬다.

“돈은…”

“명절 지나고.”

“오늘만 오늘만.” 그가 웃으며 되뇌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 기계 안에서 또 한 번 ‘읏’ 하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곧바로 전원을 낮췄다.

“지금은 쉬게 해.”

우리는 잠깐 전원을 끄고, 기계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가 손금 사이를 지났다.

엄마가 방수포를 조금 들춰 공기를 통하게 했다. 나는 그 사이 병을 다시 닦았다. 닦는 동안에도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떨리지 않으려 하면 더 떨리는 손.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기름집아이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오늘 열어요? 줄 서도 돼요?

— 기계 고장이라던데… 괜찮으신가요?

— 제사 기름 부탁드려요. 오후 세 시 전이면 감사해요.

나는 잠깐 엄마와 아버지를 보았다.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 설명해. 늦어도 괜찮다면 오시라고.”

나는 계정에 글을 올렸다.

〈오늘의 공지〉 기계가 잠깐 아픕니다. 천천히 짭니다. 늦어도 괜찮으신 분만 와 주세요. 대신 오늘 날짜를 더 크게 써 드릴게요.

올리고 나니 손끝 떨림이 조금 줄었다. 내 손이 오늘을 인정한 것 같았다.

오후 두 시에 약속대로 상회집 사장님이 다시 왔다. 손에는 작은 고정 나사와 얇은 철판이 있었다.

“지금 멈출 수 있어?”

아버지가 금세 전원을 내리고 덮개를 열었다. 사장님과 아버지는 말이 거의 없이 손을 움직였다. 나는 드라이버를 건네고 엄마는 조명 각도를 기계 안쪽으로 더 깊게 비췄다.

“한 번만 더.”

사장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나사는 제자리에서 ‘딱’ 하고 앉았다.

“가볼까.”

전원을 올렸다. 덜컥— 덜컥— 이번엔 아까보다 안정된 리듬이었다. 금속의 호흡이 다시 균형을 찾았다. 금빛도 조심스럽지만 끊기지 않게 이어졌다.

우리는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숨이 합창처럼 들렸다.

오후 내내 우리는 약속한 병들을 하나하나 채웠다. 떡집 추가 물량 두 병, 한옥자 할머니의 제사 상자 두 개, 미장원 잔치 한 병, 분식집 마감용 한 병. 그 사이사이, 낯선 손님이 와서 말했다.

“인스타 보고 왔어요. 늦어도 괜찮아요.”

나는 라벨을 붙이고 날짜를 적으며 대답했다.

“오늘 날짜가… 조금 다르게 남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내 말이 과장인지 두려웠다. 하지만 병을 받아든 사람들의 손끝이 조심스러워지는 걸 볼 때마다,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가 기울 무렵. 미정 이모가 마지막 송편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오늘 거 향이 확실히 다르다. 얌전한데 길어.”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기계가 몸 사려서 그래.”

“몸 사린 게 오히려 좋을 때가 있어.” 이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도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내 손은 몸을 많이 사렸다. 그랬더니 더 오래 갔다.

마지막 병을 채우고 라벨에 날짜를 적으려는데 펜촉이 종이를 눌러 얇게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의 무게가 펜에 실린 것 같았다.

2025.09.21. 명절 전날.

그 아래에 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천천히 짠 날.

엄마가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거 좋네. 오늘을 기억하는 방법.”

“사람들이 볼까요?”

“오늘 오는 사람들은 볼 거야. 오늘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걸 먼저 보더라.”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덮개를 닫기 전에 기계 속을 한 번 더 살폈다. 손가락으로 축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금속이 낮고 안정된 소리를 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버지가 전원을 끄자 가게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덜컥거림이 멈춘 자리, 조용한 진동만이 몇 초간 더 남았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눈빛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셔터를 내리기 전, 나는 휴대폰을 꺼내 마지막 글을 올렸다.

〈오늘의 기록〉 천천히 짰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짰습니다. 오늘 병에는 날짜가 더 크게 적혀 있습니다. 혹시 늦게라도 필요하신 분! 내일 아침 다시 짭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르고 나서 골목을 바라보았다. 떡집 유리문 안에는 아직 김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이모는 손을 쉼 없이 놀리고 있었다. 그 김 속에는 분명 우리 집의 향이 섞여 있었다. 우리가 천천히 짠 향.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게 안 형광등이 꺼졌는데도 기계의 금속 표면이 여전히 아주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오늘 종일 닦고 만졌던 그 표면.

나는 손등을 코에 가져다 댔다. 아주 미약한, 그러나 분명한 향. 얌전하지만 오래 가는 냄새.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속으로 말했다.

오늘만 오늘만—이 말이 우리를 살렸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덜 흔들릴 것이다.

잠들기 직전 @기름집아이에 알림이 하나 더 떴다.

— 오늘 날짜, 우리 집 제사 사진에 같이 찍어 두었어요. 고맙습니다.

나는 화면을 오래 보았다. 오늘의 모든 소리가 그 한 줄로 정리되는 느낌.

한 줄이었지만 길었다. 아주 오래 남을 길이었다.

 

8화 — 함께 수리한 하루

아침 공기가 바뀌었다. 명절 당일을 하루 앞둔 소란이 아니라, 어제 고장 난 기계를 함께 고친 뒤에만 나는 묘한 안도의 냄새. 골목 끝에 새로 선 안내 표지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 폼보드에 검은 매직으로 쓴 글씨.

← 오늘의 참기름: 라벨에 날짜를 적어 주는 집

← 오늘의 송편: 미정이네

← 오늘의 반찬: 영자네

화살표 끝에는 이름이 있었다. 상회집 사장님이 밤새 폼보드에 구멍을 뚫고 케이블 타이로 전봇대에 묶었다고 했다. 마트와 시장의 사이 튀지 않는 흰 보드가 골목의 가는 숨을 길게 이어 주는 것 같았다.

공동부스는 시장 입구 마트에서 내려오는 폭 넓은 계단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다. 접이식 테이블 세 개, 흰 천 두 장, ‘서울의 명절’이라고 적힌 깃발 하나. 마트 쪽 직원이 가져온 롤업 배너에는 반짝이는 병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우리 상인회에서 준비한 손글씨 플래카드에는 ‘맛은 여기서, 구매는 가게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두 문장 사이에는 얇은 투명 테이프 같은 긴장감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작은 종이컵과 대나무 이쑤시개, 그리고 100ml 샘플병 여섯 개를 상자에 담아 들고 왔다. 병마다 라벨 위에 ‘오늘’이라는 글자를 크게 적었다. 엄마는 라벨 아래에 아주 작게 우리 가게의 위치를 적었다. “골목 둘째 전봇대 왼쪽.”

부스 한가운데에는 ‘오늘의 참기름 — ○○기름집’이라고 쓴 종이 액자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오늘의 반찬 — 영자네’와 ‘오늘의 송편 — 미정이네’. 만식 아저씨가 가져온 상추 한 장은 물기를 털고 접시 한쪽에 놓였다. 반짝이는 초록이 마치 신호등 같았다. 어제 우리가 겨우겨우 붙잡아 낸 속도가 오늘을 향해 초록불을 켜는 기분.

“시작하자.” 상인회장이 말했다. 마트 직원 두 명이 리플렛을 한 움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리플렛에는 가격표가 큼지막했다. 우리 플래카드에는 얼굴과 이름이 큼지막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대신 냄새가 먼저 걸어 나갔다. 미정 이모가 얇게 썬 절편 위에 우리 집 참기름을 한 방울 떨구자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달라졌다. 향이 길을 냈다.

첫 손님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내려오는 젊은 부부였다. 유모차에 아이가 자고 있었다. 아빠가 종이컵을 하나 들었다. “맛만 볼 수 있어요?”

“네.” 엄마가 샘플병을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한 방울 더했다. “오늘은 불을 낮췄습니다. 향이 얌전하지만 오래 가요.”

아빠가 혀끝으로 살짝 맛을 봤다. 그리고 유모차 손잡이를 천천히 흔들더니 엄마를 보았다. “다르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나는 액자를 가리켰다. “여기서 왼쪽 골목, 둘째 전봇대 왼쪽입니다. 라벨에 오늘 날짜 적어서 드릴게요.”

아빠가 리플렛 대신 우리 손글씨 플래카드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유모차 바퀴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 바퀴 자국이 금방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길이 생겼다.

두 번째 손님은 혼자 온 중년 남자였다. 손에 들린 마트 비닐봉지가 묵직해 보였다. 그는 리플렛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고 우리 쪽 플래카드를 오래 읽었다.

“사람 이름이 적혀 있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장은 이름으로 움직입니다.”

남자는 종이컵을 받아 향을 먼저 맡았다. “향이… 집 냄새 같네.”

엄마가 웃었다. “그 말, 오늘 우리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남자는 결국 리플렛 대신 작은 메모지에 ‘○○기름집’이라고 적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내 가슴 속 장부에는 ‘전환’이라고 적었다. 돈이 아니라 걸음으로 기록하는 장부.

마트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님들이 길을 헷갈려하실 수 있어요. QR코드로 구매 페이지를 보여 드리면 더 편할 텐데…”

엄마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서는 편한 길이 꼭 좋은 길이 아니에요. 걸어가는 사이에 냄새가 붙거든요.”

직원의 표정이 잠깐 비워졌다. 그는 이해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리플렛의 가격표는 여전히 큼지막했지만, 사람들의 코끝은 그보다 앞서 움직였다.

점심 무렵, 햇빛이 부스 천을 통해 희게 번졌다. 영자 아줌마가 ‘깨비지’를 작은 종지에 담아 나왔다. “맛만 보세요! 이름은 아직 고민 중—아니, 깨비지입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이름이 입에 달라붙자, 맛도 쉽게 달라붙었다. 미정 이모는 얇은 송편 조각을 내놓으며 말했다. “기름은 오늘, 소금은 손끝으로.”

아버지는 작은 병에서 참기름을 떨어뜨릴 때마다, 손목을 과장되지 않게 뒤로 빼서 방울이 길게 나풀거리지 않게 했다. 방울이 짧아지면, 향이 똑바로 떨어졌다.

부스 옆에는 내가 그린 작은 지도가 붙었다. 골목 입구, 분기점, 전봇대, 우리 가게 문턱의 높이, 떡집의 김이 새어 나오는 창문 위치. 지도 제목은 ‘얼굴의 지도’였다. 누군가 “왜 얼굴이죠?” 하고 물으면 나는 대답했다.

“여기선 가게가 이름이고, 이름이 얼굴이라서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 앞에서 잠깐 멈췄다. 멈춤은 곧 방향 전환의 전조였다. 멈춘 사람 중 절반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다시 마트 쪽을 향했지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뒤돌아보았다. 향이 뒤를 잡아당겼다.

한옥자 할머니가 부스에 나타난 건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거 여기 기름 맛보는 데라며.”

엄마가 작은 종이컵을 건넸다. 할머니는 코앞에서 한 번, 혀끝에서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며 한 번. 세 번의 예식을 거친 뒤에야 말했다. “그래, 이 냄새지.”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 ‘○○기름집’ 옆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2025.09.22.

“내가 이 날을 또 적는 이유가 뭔 줄 아나?”

아버지가 물었다. “제사 때문이죠.”

“그것도 있고.” 할머니가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붙잡은 날이니까.”

할머니의 말이 플래카드에 적힌 문장보다 깊게 박혔다. 나는 내 노트에도 같은 날짜를 적었다. 사람이 사람을 붙잡은 날.

오후, @기름집아이 계정으로 알림이 폭주했다. 어떤 계정이 우리 부스 사진을 찍어 올린 모양이었다.

— 골목에서 만난 서울의 냄새. (사진)

— 가격 대신 얼굴을 적어 둔 부스. (사진)

— “맛은 여기서, 구매는 가게에서” (사진)

댓글이 빠르게 달렸다.

— 위치 공유 가능할까요?

— 우리 동네에도 이런 부스 생겼으면.

— 명절 때마다 골목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나는 부스 뒤 그늘에서 잠깐 숨을 고르며, 댓글 몇 개에 답을 달았다. “지도 사진 참고해 주세요. 골목 둘째 전봇대 왼쪽입니다.”

답을 달며 느꼈다. 온라인의 말이 이 골목의 발걸음으로 번역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향과 속도는 함께 움직였다.

한때 우리 가게를 사진 찍던 대학생 청년도 나타났다. 이번엔 목에 작은 녹음기를 걸고 있었다.

“오늘 현장 소리도 담을게요. 이 소리가 나중에 사람들 기억을 흔들 겁니다.”

그는 우리 부스 앞에서 흘러가는 소리들을 한꺼번에 담았다. 종이컵 부딪히는 소리, 이쑤시개 봉투가 스치는 소리, 아이 울음과 웃음 사이, 그리고 무엇보다 참기름이 종이에 스며들 때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 나는 그 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것 같았다. 맛과 냄새에 가려 듣지 못했던 소리. 오늘은 들렸다.

부스 앞을 오가던 마트 직원이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표정이 조금 풀려 있었다.

“손님들이 부스에서 맛보고, 실제로 가게로 가는 게 보이네요. 우리가 전단지로는 못하던 일이네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단지는 앞당기는 종이죠. 이야기는 끌고 가는 숨이고.”

직원은 수첩에 적었다. “앞당김 vs. 끌고 감… 흥미롭네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맛보기 재료 비용, 오늘분 먼저 지원 드릴게요. 내일은 정식 문서로 처리하고요.”

엄마가 봉투를 받지 않고, 대신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직원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악수가 짧게, 단단했다. 봉투는 잠시 뒤, 상인회장에게 건네졌다. 돈은 가운데로, 악수는 사람 사이로.

해가 기울자 공동부스의 그림자가 골목 한가운데까지 늘어났다. 그림자 언저리에서 아이들이 뛰놀았다. 영자 아줌마가 남은 깨비지를 조금 더 꺼내고, 미정 이모는 마지막 송편 조각을 접시에 정리했다. 나는 샘플병의 마지막 한 방울을 종이컵에 덜어 놓고, 액자를 다시 세웠다. 오늘의 참기름 — ○○기름집. 액자 뒤쪽 발판이 헐거워져 테이프로 한 번 더 고정했다. ‘사람 이름이 영수증’인 시장에서는 테이프 한 장이 서류보다 힘이 셀 때가 있었다.

부스 정리를 시작하려는데, 중년의 여자가 뛰어왔다. 숨이 가빴다.

“혹시… 지금도 가게 여나요? 엄마가 갑자기 오신대서… 전 부쳐야 하는데, 기름이 떨어졌어요.”

엄마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요.”

아버지가 샘플병을 상자에 담고, 나는 플래카드를 접어 겨드랑이에 끼었다.

“지도 따라오세요. 둘째 전봇대 왼쪽입니다.”

우리가 함께 골목으로 들어서자, 바람이 뒤에서 등을 밀었다. 안내 표지판이 ‘끽’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마치 길 자체가 같은 방향으로 의논을 마쳤다는 표정.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형광등이 켜졌다. 기계 위 덮개는 낮의 햇빛을 아직 조금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원을 확인하고, 엄마는 병을 꺼냈다. 나는 라벨을 준비했다.

“오늘 날짜로, 얌전하지만 오래 가는 향으로.”

나는 펜을 쥐고 ‘2025.09.22.’를 적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함께 수리한 하루.

여자가 숨을 고르며 병을 받았다. 그녀의 손끝이 오늘을 기억하는 사람의 떨림을 닮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진짜로… 살았어요.”

우리는 “명절 잘 보내세요”라는 인사를 서로에게 동시에 건넸다. 말들이 겹쳐도 어색하지 않았다. 겹쳐야만 온전해지는 인사가 있었다.

문을 닫고 다시 부스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보랏빛이었다. 마트의 간판 불빛이 켜지고 시장 입구 깃발이 마지막으로 한 번 흔들렸다. 상인회장이 손바닥으로 깃대를 두드렸다.

“오늘 참 잘했다.”

누구 하나 크게 이긴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덜 졌다는 느낌. 시장에서는 그런 날을 승리라고 불렀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부스를 바라봤다. 접힌 테이블, 말아 올린 플래카드, 빈 샘플병. 그런데도 향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속도. 오늘 하루 내내 지켜본 속도였다.

방으로 올라와 @기름집아이에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오늘의 기록〉 얼굴의 지도를 펼쳤습니다. 맛은 부스에서, 사는 곳은 가게에서. 가격보다 향이 먼저 걸었고, 리플렛보다 이름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함께 수리한 하루.

업로드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아주 작은 별이 하나 더 켜졌다. 그 별은 샘플컵 위로 떨어지던 한 방울과 닮아 있었다.

잠들기 전, 현관에서 부모님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사람 많이 붙였지?”

“응. 그리고 우리도 서로 더 붙었어.”

그 대화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은 명절. 기계는 아침에 다시 덜컥거릴 것이고, 골목은 김으로 다시 가득할 것이다. 오늘보다 더 바쁠 것이고 오늘보다 더 흔들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함께 수리하는 법을 오늘 배웠으니까.

 

9화 — 명절날 골목

명절 아침은 평소 새벽보다 더 이른 시간에 시작됐다.

닭이 울기도 전에 골목은 이미 사람 발자국으로 가득했다. 흰 한복 소매가 바람에 스쳤고, 손에는 떡 상자, 채소 바구니. 그리고 제사용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시장은 여느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지만 소란이 아니라 의식 같았다. 사람마다 일정한 박자를 지키며 움직였고, 그 박자는 ‘오늘은 다른 날’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가게 문을 열자, 기계가 먼저 깨어났다. 덜컥, 덜컥. 어제까지는 불안한 소리였지만, 오늘은 다부졌다. 아버지는 축을 한 번 쓰다듬고 말했다.

“오늘은 스스로 더 조심할 거다. 명절이니까.”

엄마는 이미 병을 닦고 있었다. 물걸레로 한 번, 마른 수건으로 한 번. 그 움직임은 기계의 리듬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나는 라벨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2025.09.23. 추석 아침.

첫 손님은 영자 아줌마였다. 이미 머리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양손에는 반찬 통이 들려 있었다.

“오늘만 스무 통은 더 나갈 거야. 기름 없으면 못 해.”

아버지가 병을 내밀자 아줌마는 한 손으로만 받지 않았다. 두 손을 꼭 맞잡아 받았다.

“이거야말로 제일 큰 반찬.”

그 말이 가게 안에 오래 남았다.

뒤이어 미정 이모가 송편 상자와 함께 달려왔다.

“아직도 줄이 저 골목 끝까지 이어져. 참기름 병 네 개만 더!”

엄마는 병에 라벨을 붙이며 말했다.

“오늘은 얌전한 향으로 갔어. 아이들 먹기에도 괜찮아.”

이모는 뚜껑을 열자마자 반죽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향이 피어오르자 이모의 얼굴이 확 펴졌다.

“이 향 덕에 줄이 안 끊겨. 고마워.”

오전 열 시가 되기도 전에 가게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장 사람들, 동네 이웃, 명절에만 오는 손님, 낯선 얼굴까지. 모두가 병 하나씩을 들고 줄을 섰다. 기계의 덜컥거림은 북소리 같았다. 병에 채워지는 금빛은 악보의 음표 같았다. 그 소리와 빛이 합쳐져 오늘의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줄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마트도 갔다 왔는데 왜인지 발길이 여기로 오더라고요. 가격은 모르겠고 냄새가 그쪽엔 없었어요.”

엄마는 웃으며 라벨을 건넸다.

“냄새는 여길 지나야 붙습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명절은 냄새지.”

점심 무렵 한옥자 할머니가 들어왔다. 두 손에는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재료가 담긴 장바구니가 있었다.

“사장님 오늘 거 한 병만. 올해는 아들네까지 같이 와서…”

아버지가 병을 내밀자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향을 맡았다.

“그래. 이게 우리 집 조상들한테 가는 냄새지.”

그리고는 손을 떨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오늘 날짜를 적으며 말했다.

“내 수첩은 이제 기름집 달력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내 노트에도 같은 문장을 적었다. 기름집 달력 = 사람들의 명절.

오후가 되자 부스에서 만난 손님들도 하나둘 찾아왔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라벨을 확인하며, “여기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젊은 부부는 아이에게 병을 들려 주며 말했다.

“이 병은 기억해야 돼. 네 할머니가 늘 찾던 집이야.”

아이의 손끝이 병 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작은 손에 오늘의 무게가 얹힌 것 같았다.

명절이 되면, 시장 사람들은 서로의 물건을 사기도 한다. 분식집 아줌마는 떡집 송편을, 미정 이모는 영자네 반찬을, 만식 아저씨는 우리 기름을. 돈이 오갔지만, 사실은 감사가 오갔다. ‘고맙다’는 인사가 돈보다 먼저 입에 붙었다.

해가 기울 즈음, 가게 앞에 뜻밖의 얼굴이 나타났다. 담임선생님이었다. 교복 대신 점퍼 차림, 손에는 장바구니.

“여기였구나.”

나는 얼어붙었다. 선생님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냄새가 다르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학생이 올린 글을 봤어요. 데이터가 필요하다 했지? 이게 데이터야. 내가 직접 걸어 들어오게 만들었잖아.”

선생님의 말은 훈계가 아니었다. 오늘은 축복처럼 들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저녁 무렵, 마지막 손님이 돌아가자 가게 안은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기계의 전원을 내리며 말했다.

“오늘은 기계보다 사람이 더 고생했네.”

엄마는 병 뚜껑을 닫으며 웃었다.

“사람이 기계를 살렸으니까.”

나는 라벨에 마지막으로 오늘 날짜를 적었다. 2025.09.23. 추석.

그리고 아주 작게, 사람이 기계를 살린 날이라고 덧붙였다.

골목은 이미 어두웠지만, 남은 향은 오래 남았다. 김과 반찬과 참기름 냄새가 섞여, 골목 전체가 거대한 상처럼 느껴졌다. 그 상 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 노트에도 한 줄이 남았다.

명절의 골목 = 향으로 이어진 얼굴들의 지도.

 

10화 — 내일을 짜는 손

명절이 끝난 골목은 언제나 조금 비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서로 부딪히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오늘은 천천히 걸었다. 장바구니는 가벼워졌고, 목소리는 낮아졌다. 하지만 가게 안은 여전히 향으로 가득했다. 기계가 돌고 있었고 금빛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맑게 떨어졌다.

아버지는 기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가 어제 고생했지. 오늘은 덜컥거림이 가볍다.”

엄마는 라벨에 날짜를 적으며 대꾸했다.

“사람도 명절 지나면 몸이 가벼워지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닦았다. 오늘 날짜는 2025.09.24. 명절 다음 날.

1. 골목의 새로운 리듬

명절 동안 시장은 서로를 붙잡아 주었다. 이제는 각자의 가게가 다시 자기 리듬으로 돌아가야 했다. 떡집은 남은 송편을 세일했고, 반찬가게는 명절 음식을 활용한 새로운 메뉴를 내놨다. 미장원에서는 머리 염색 예약이 몰려들었다. 모두가 명절의 피곤함을 지우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준비했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계 옆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지난 사흘 동안의 병 수, 고장 수리 내역, 그리고 특이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건 장부가 아니라 일기야.”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맞다. 오늘의 일기. 기계도 쓰고, 우리도 쓰고.”

엄마는 내 휴대폰 화면을 가리켰다. @기름집아이 계정 팔로워 수가 500명을 넘겼다. 댓글 중에는 해외에서 온 계정도 있었다.

— 한국 살 때 늘 시장 기름만 썼는데, 사진 보니 다시 냄새가 나네요.

— 언제 한번 직접 가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골목을 넘어서 다른 데까지 향이 갔네.” 엄마의 말은 감탄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운 걱정도 섞여 있었다.

2. 학교와 시장 사이

학교에 갔을 때 교실은 여전히 분필가루 냄새로 가득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눈빛은 달랐다.

주연이 먼저 다가와 물었다.

“너네 계정 우리 엄마 친구들도 본대. 어제 그 얘기만 했어.”

수호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이제 우리 급식에도 네 기름 들어오면 좋겠다.”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마음속에서 이상하게 진지하게 그 말을 기록했다. 급식에 우리 기름.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뒤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너 글 잘 쓰더라.”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이 말했다.

“사진보다 네 글이 사람을 끌더라. 향이 보이게 쓰던데. 공부할 때도 그렇게 해라. 과학이든 문학이든.”

그 말은 잔소리가 아니었다. 오늘은 응원처럼 들렸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향이 보이게 쓴다. 내일의 숙제 같았다.

3. 회의와 약속

저녁에 상인회가 다시 열렸다. 떡집 뒷방, 여전히 김 냄새가 묻은 공간이었다. 이번엔 웃음이 조금 더 많았다.

상인회장이 말했다.

“이번 명절에 매출은 줄지 않았어. 일부는 마트로 갔지만 절반은 다시 우리 골목으로 돌아왔지. 부스가 길을 열었어.”

만식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

“길은 열렸는데, 닫히기도 쉬워. 계속 붙잡아야 돼.”

영자 아줌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장날에도 얼굴 지도 붙이자. 맛은 부스에서, 사는 건 가게에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트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번 협업 성과를 본사에 보고했는데, 반응이 괜찮습니다. 다음 명절에도 같이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대신 더 넓게 알려야 해서 온라인도 함께하자고…”

엄마가 먼저 대답했다.

“온라인이면 우리도 있어요. 이미 계정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부스 사진, 댓글, 기록.

직원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해도 좋겠습니다.”

회의는 약속으로 끝났다. 다음 명절까지 사람의 얼굴이 먼저 보이는 시장을 지켜내기로.

4. 내일을 짜는 손

밤이 되자, 가게는 다시 고요해졌다. 아버지는 기계의 축을 닦으며 말했다.

“얘는 오늘도 잘 버텼다. 내일도 짤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바꿔야 한다. 그때는 네 손이 필요할 거야.”

나는 대답했다.

“제가 짜 볼게요. 내일도, 모레도.”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네 손은 이미 기름 냄새가 배어 있어. 이제는 냄새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더 멀리 퍼뜨려.”

나는 병에 라벨을 붙이고 오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내일을 짜는 손.

형광등 불빛 아래, 금빛 방울이 천천히 이어졌다. 소리가 들렸다. 덜컥, 덜컥. 그 소리는 어제보다 가볍고 내일보다 든든했다. 골목은 이미 어두웠지만, 향은 계속 번져 나갔다.

나는 휴대폰을 켜고 @기름집아이 계정에 마지막 글을 올렸다.

〈오늘의 기록〉 명절이 지나도 우리는 짭니다. 오늘은 추억을 짰고 내일은 내일을 짤 겁니다. 향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업로드 버튼을 누른 순간 화면에는 작은 별 하나가 켜졌다. 그 별은 오늘의 금빛 방울과 똑같았다.

 

에필로그

명절이 끝난 시장은 다시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골목 입구에는 아직도 작은 안내 표지판이 서 있었고 플래카드에는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가격표 대신 얼굴을 먼저 떠올렸고 향은 그 얼굴을 잇는 다리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기름집 아이로 불리던 내가 언젠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내 손끝에 남은 기름 냄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붙일 수는 있다.

오늘 내 이름은 기름집 아이였다. 그리고 내일 또 다른 이름이 붙더라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기억하는 손으로 기름을 짤 것이다.

 

 

 

  • webnovel

기름집 아이

  • 작가 : 오선아
1. 제목
  • 기름집 아이
2. 기획의도
서울의 골목은 언제나 ‘사라짐’과 ‘남음’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대형 마트와 플랫폼이 생활의 편의를 장악해 가는 동안, 오래된 시장의 풍경은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명절의 냄새, 제사의 의식, 이름이 적힌 병 하나를 통해 삶의 뿌리를 기억합니다. 이 작품은 그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한 소년, ‘기름집 아이’의 눈을 통해 서울 골목의 현재성과 미래를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향과 사람’입니다. 가격과 편리함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냄새와 이름입니다. 들기름과 참기름의 향은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집과 조상과 기억을 잇는 다리로 작용합니다. 주인공은 기계의 덜컥거림을 따라가며 골목의 호흡을 배우고, SNS를 통해 기록을 확장하며, 사람과 사람이 다시 연결되는 순간을 체험합니다.
서울이야기창작소 소상공인 부문 출품작으로서, 이 작품은 단순한 생계의 서술이 아니라, 소상공인의 일상이 곧 서울의 문화이자 이야기임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기름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곧 서울 전체가 겪는 변화의 축소판입니다.
기획 의도는 사라져가는 골목의 소리와 향을 기록한다.
소상공인의 노동을 문학적 서사로 끌어올린다.
서울의 내일을 짜는 손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라고 믿습니다.
3. 스토리
〈기름집 아이〉는 서울 한 골목의 작은 참기름집을 배경으로 한 10화 분량 웹소설입니다. ‘향으로 이어지는 얼굴의 지도’라는 부제를 달 수 있을 만큼, 작품 전체는 냄새와 사람, 그리고 이름의 힘을 중심축으로 삼습니다.
주인공은 기름집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그는 기계의 덜컥거림, 들깨가 눌려 나오는 소리, 볶은 참깨의 향 속에서 성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대형 마트와 온라인 플랫폼은 편리함과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전통 시장을 압박합니다. 골목 상권은 무너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프롤로그와 1~3화에서는 골목의 일상과 주인공의 성장을 담았습니다. 떡집, 반찬가게, 미장원 등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대조적 경험, SNS 계정(@기름집아이)을 통해 기록을 시작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 과정은 서울 골목이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기억이 얽힌 공동체임을 드러냅니다.
4~7화는 위기의 서사입니다. 기계가 고장 나고, 시장과 마트의 갈등이 격화됩니다. 그러나 위기는 곧 새로운 협력의 출발점이 됩니다. 골목 상인들은 공동 부스를 세우고, 마트와 협력하면서도 정체성을 지켜냅니다. 이 과정에서 향과 이름이 가격과 전단지를 이긴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사람들은 QR코드보다 냄새와 손글씨 라벨을 따라 걸음을 옮깁니다.
8~9화에서는 명절을 맞이한 골목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명절의 소란 속에서 기름집은 다시 ‘사람이 사람을 붙잡는 자리’가 됩니다. 제사에 필요한 기름 한 병, 반죽에 떨어지는 한 방울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가족과 조상을 잇는 의식이자 위로가 됩니다. 명절은 골목 전체가 하나의 제사상이 되는 순간이며, 작품은 이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깊은 층위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10화는 에필로그이자 다짐입니다. 주인공은 기계와 함께 ‘내일을 짜는 손’이 됩니다. 시장과 학교, 오프라인과 온라인,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냄새와 이름을 통해 내일을 이어가려 합니다.
〈기름집 아이〉는 단순히 한 집안의 생업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울 골목이라는 공간이 지닌 가치와 소상공인의 노동이 어떻게 문화적 자산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서사입니다. 가격 경쟁에서 밀려나는 대신, 향과 얼굴, 그리고 기록으로 살아남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특정 인물이 아니라, 서울의 모든 골목에서 내일을 짜고 있는 사람들의 은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