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도시설계과의 디오라마
1화.
“성적에 S를 줄 수 있으면 자넨 분명 받을 자격이 있어.”
준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얼른 이 설교가 끝나길 바랐다.
“그런 자네가 더욱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거나 쓰다니!”
군대를 다녀온 준우는 중대장 말투는 사실 교수님들에게 전수 받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중대장은 실망했다라는 말처럼 교수님이 실망했다는 표현이 준우에게 향해오고 있었다.
“왜 휴학을 하려고?”
“... 그게 쉬고 싶어서요.”
군대야 어쩔 수 없는 국가의 부름이라고 치지만, 개인의 휴학은 자칫 잘못하면 탐내던 인재를 잃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여행을 갔다 오거나 다른 이유로 전향을 해버리면 그건 돌릴 수 없었다.
준우는 교수가 노리던 차기 교수, 즉 대학원생으로 만들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쉬고 싶어?”
준우의 입장에선 분명히 교학처에 낸 휴학 신청서를 왜 교수님이 들고 있는 지 몰랐다.
영문을 따지기엔 그랬다. 자신을 예뻐하며 거의 매일 같이 학식보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던 교수님이었다.
모두가 너를 대학원으로 끌고 가기 위한 작전이라고 말할 때도 준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할 거 없으면 하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
“네.”
교수님이 말려도 휴학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교수는 지금 준우가 자퇴서가 아닌 휴학을 신청해서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제일 어쩔 수 없는 게 지쳐버린 학생이고 사람이었다.
“쉬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자네에게 다음 학기에 권유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교수의 달콤한 제안이 시작되었고, 준우는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 앞에 있는 교수님은 ‘도시설계과’에 있어서 전설적인 분이셨다.
단순한 학문에서 그친 게 아니라 실전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전직 서울시장이었으니까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다 말년에 갑자기 학구열이 넘쳐서 한국서울대학교에 전임 교수가 됐다.
모두가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인 사람이 지금 준우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어떤 내용인데요?”
준우가 관심을 보이자 교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서울문화연합회에서 일할 인턴을 추천해달라고 하더군.”
“인턴이요?”
“어떤가 관심이 있어? 나는 당연히 자네가 생각이 있다면, 누구보다 자네 이름을 더 먼저 떠올렸기도하고. 다만 그전에 선행 과제가 있어.”
서울문화연합회면 남들은 다 가고 싶어서 안달인 곳이었다.
준우는 잠시 고민했다. 자기가 왜 휴학을 신청했던가, 그리고 지금 제안에 대해서 고민했다.
사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보라는 걸 알았다. 준우는 똑똑했기에 고민하는 게 바보라는 걸 알았다.
“해보겠습니다.”
**
준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대한 비정형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선행 과제를 위해서 도착한 곳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줄여서 DDP로 불리는 곳이었다.
외계에서 불시착한 우주선 같기도, 유체처럼 흐르다 굳어버린 금속 같기도 한 건물의 모습이었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그의 눈에 이 건축물은 언제나 거대한 질문이었다.
기능보다 형태가, 사람보다 상징이 앞서는 공간. 오늘, 서울의 모든 시작은 또 여기서부터였다.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건 공부가 아니라, 지금의 공허일 거다. 사람을 다시 보게 해줄 현장이 있어.”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휴학원서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교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준우는 이 장소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고 있었을 것이었다.
서울문화연합회 주관, 제1회 청년 대학생 시민 서울 도시 기록 프로젝트라는 이름이었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야심 찬 규모였다. 서울·경기권 대학에서 무려 200명의 사람을 선발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200명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거대한 곡면 벽을 따라 이어진 복도를 지나자, 수백 개의 의자가 놓인 알림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표정이었다.
적당한 자신감, 날카로운 호기심,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경쟁심. 취업 전쟁터의 예비군처럼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준우는 그 빛들이 조금은 낯설고 부담스러워, 가장 구석에 있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단상 위로 프로젝트 총괄이라는 사람이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서울의 가치, 청년의 시선, 기록의 미래. 귀에 익은 단어들이 화려한 PPT 화면과 함께 쏟아졌다.
준우는 무대 대신 사람들을 관찰했다. 맨 앞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노트북에 무언가를 맹렬히 타이핑 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서류철은 색색의 인덱스 탭으로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고, 자세는 곧았다. 마치 이 프로젝트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준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범생 타입인가.’
지루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200명은 열 명씩 20개의 팀으로 쪼개졌다.
준우의 이름이 불린 곳은 ‘3팀’이었다. 지정된 세미나실로 향하자, 아까 봤던 ‘모범생’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준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너는 누구고, 이 팀에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지?’라는 무언의 질문이 담겨 있었다.
곧이어 여덟 명의 팀원이 더 들어왔다.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기 바빴다.
“자, 그럼… 팀명부터 정할까요?”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성지연. 행정학과 4학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공모전은 속도가 생명이에요. 첫인상을 결정할 팀 이름이랑,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 전시 형식부터 빨리 정해야 합니다.”
또박또박, 용건만 정확히 전달하는 말투. 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를 중심으로 시선을 모았다.
“전시 형식이라면… 요즘은 VR 아닌가요? DDP에서 하는 건데, 좀 임팩트 있게!”
시각디자인과라는 정주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VR 좋죠! 완전 멋있겠다.”
분위기가 들뜨자, 지연이 찬물을 끼얹었다.
“VR 체험관 구축에 필요한 예산, 개발 기간, 장비 대여료, 그리고 관람객의 접근성까지 고려해야 해요. 우리에게 주어진 예산과 시간으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데이터 몇 개를 화면에 띄우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준우는 저 사람은 팩트로 사람을 때리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인쇄 아카이브는?”
“너무 올드해요. 임팩트가 부족하죠.”
몇 개의 의견이 더 오갔지만,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다들 ‘있어 보이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준우가 입을 열었다.
“혹시, 관점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요?”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완성된 서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서울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를테면, 특정 시간대에 특정 장소를 지나는 사람들의 동선, 간판들의 빛,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들요.”
“요소요?”
지연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네. 우리는 도시의 완성품을 모사하는 게 아니라, 그 도시를 살아있게 만드는 부품들을 수집하는 거죠. 그리고 그 부품들을… 이를테면 미니어처 형태로 만드는 겁니다.”
“미니어처?”
이번엔 주라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네. 아주 정교한 미니어처 위에, 우리가 수집한 요소들을 결합하는 겁니다. 가령, 명동 거리 미니어처 위에는 시간대별 유동인구 데이터를 프로젝션 매핑으로 쏘고, 꺼진 상점과 켜진 상점은 LED로 조절하는 거죠. 지향성 스피커를 써서 특정 위치에 서야만 그 골목의 소리가 들리게 할 수도 있고요.”
준우의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팀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기계공학과라는 서인호였다.
“…서보 모터랑 마이크로 컨트롤러, LED 제어. 그거,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재밌겠는데요?”
“와, 대박. 도시를 번역하는 거네요! 빛이랑 소리, 움직임으로!”
주라가 손뼉을 쳤다.
분위기가 급격히 달아올랐다. 지연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준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무언가를 재고 있었다.
“그 방식, 예산이나 기간 내에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근거는요?”
“모든 걸 한 번에 다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준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각 장소와 요소를 하나의 모듈로 만드는 겁니다. 레고 블록처럼요. 나중에는 이 모듈들을 관람객이 직접 조합해서 자기만의 서울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죠. 시작은 가장 상징적인 모듈 몇 개부터 하면 됩니다. 리스크가 적고, 확장성은 열려있는 방식이죠.”
‘레고 모듈’, ‘확장성’. 지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중시하는 ‘현실성’과 ‘효율성’의 언어였다.
지연은 잠시 노트북 화면을 보며 무언가를 계산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그럼 이 방식으로 가죠. 대신 모든 과정의 허가, 동의, 안전 검증은 제 기준을 엄격하게 따를 겁니다. 다들 동의하시나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팀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팀명은요?”
“서울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서울로그’ 어때요?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담고요.”
준우의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팀 〈서울로그〉. 어색했던 10개의 조각이 비로소 하나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흩어지는 복도에서, 지연이 준우를 따라잡았다.
“예준우 씨.”
“네.”
“아이디어 좋았어요. 아까 말했듯이, 앞으로 허가랑 동의, 안전 문제는 제 기준 따를 거예요. 보고 체계 확실히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협력, 동시에 견제. 그때, 옆방에서 나온 다른 팀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다. 그 중심에는 훤칠한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중요한 건 스피드야. 우리가 먼저 가장 멋진 앵글의 사진 자료를 선점해서 뿌리는 거지. 먼저 보여주는 쪽이 이기는 거야.”
그의 이름은 권신욱. 건축학과 4학년이었다. 이미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쓴 에이스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준우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먼저 보여주는 쪽이 이긴다는 말, 과연 그럴까.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빠르게 흘렀다.
손안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서울로그〉 단체 채팅방.
지연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네 개의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공유했다. ‘전체 일정 계획’, ‘예산 초안’, ‘팀원 역할 분담’, ‘1차 답사 체크리스트’였다. 숨 막힐 듯한 추진력이었다.
준우는 채팅방을 잠시 닫고 창밖을 보았다. 거대한 도시의 불빛들이 레고 블록처럼 흩어져 있었다.
저 무수한 빛의 조각들을 어떻게 수집하고, 어떤 순서로 조립해야 할까.
휴학계 대신 손에 쥐게 된 이 프로젝트는, 과연 그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지연이란 여자랑 잘 안 맞을 거 같지만 이왕 이 프로젝트를 맞게 된 거 교수님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답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일부터 이 도시를 어제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조각부터, 천천히. 그렇게 첫 번째 기록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톡방엔 여러 이야기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2화.
다음 날 아침, DDP 세미나실의 공기는 전날과 사뭇 달랐다.
“다들 잘 잤죠?”
어색한 탐색전 대신, 희미한 목적의식이 테이블을 감돌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단연 성지연이 있었다. 그녀는 회의 시작 5분 전부터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완벽하게 세팅해 놓고 있었다.
“자료, 다들 확인하셨죠?”
지연이 어젯밤 단체 채팅방에 폭탄처럼 투하했던 ‘1차 답사 체크리스트’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A4 용지 세 장을 빽빽하게 채운 문서였다.
시간대별 동선, 팀원 역할 분담 (A조: 인터뷰/스케치, B조: 공간 촬영/기록), 심지어 점심 식사 장소 후보와 예상 메뉴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와, 이걸 하룻밤 사이에 다…?”
누군가 감탄과 경악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우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전설적인 지도 교수를 떠올렸다.
‘행정은 디테일에서 시작해 디테일에서 끝난다.’
전직 시장이었던 교수의 입버릇이었다. 교수라면 분명 성지연 같은 인재를 탐냈을 것이다.
“교수님이 저 사람을 알면, 애제자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겠네.”
“무슨 말씀이시죠?”
바로 준우의 혼잣말에 대한 질문 공격을 시작했다. 회의 시간 중에 딴짓하지 말라는 지연의 경고였다.
“아, 아닙니다.”
준우는 머쓱히 웃으며 위기를 넘기려고했다. 지연이 이 다음에 다른 말을 잇지 않음으로 다행히 위기가 넘겨진 모양이었다.
준우는 교수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온 자신은, 적어도 저 사람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절로 밀려왔다.
“첫 단추가 중요해요.”
지연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정리했다.
“오늘 우리가 수집하는 기록의 밀도가 앞으로 우리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결정할 겁니다. 그럼, 출발하죠.”
서울로그의 첫 공식 답사가 시작되었다. 첫 장소는 광화문이었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서자마자, 거대한 공간감과 함께 도시의 소음이 파도처럼 팀을 덮쳤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이 한창이었다.
확성기를 타고 날카로운 구호가 광장을 갈랐다.
“시민을 위한 공간을 보장하라!”
그 옆에서는 수십 명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저마다의 포즈를 취하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소리가… 층층이 쌓여있네.”
음향 담당 차대원은 귀에 인이어를 꽂은 채 녹음기에 집중했다.
그의 귀에는 이 모든 소음이 ‘도시의 화음’으로 들리는 듯했다.
시각디자인과 정주라는 스케치북에 이순신 장군 동상과 그 뒤로 위압적으로 솟은 빌딩 숲의 부조화를 빠르게 담아냈다.
준우는 정해진 목적지 없이, 광장을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흐름을 쫓았다.
교과서에서 배운 ‘성공적인 공공 공간’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의미를 강요하는 거대한 상징’에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것뿐일까.
그의 도시계획학적 고찰은,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끊겼다.
권신욱의 팀이었다.
방송용 ENG 카메라처럼 보이는 커다란 장비를 어깨에 멘 채, 한 시민을 붙들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전히 집회와 시위로 시끄럽습니다! 솔직히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권신욱은 시민의 대답을 기다리기보다, 그가 원하는 ‘불편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인터뷰에 응하던 시민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준우의 직감은 저게이 권신욱이 말한 ‘스피드’와 ‘선점’의 방식이라고 느꼈다.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도시계획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시민의 의견과 행정의 의견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준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광화문을 등지고 경복궁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흥례문을 경계로 도시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팀원들의 자박이는 발소리와 처마 끝 풍경 소리, 그리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잘 가꿔진 조경과 엄격한 대칭 구조가 주는 고요하고 위압적인 아름다움이 준우의 심장박동을 느끼게 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 동안. 같이 울고 웃었던 장소.”
경복궁이 500년 동안 쭉 왕의 거처로 이용된 건 아니나 처음의 시절과 끝엔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궁궐을 처음 불태운 건 외세도 아니고, 그렇다고 혁명을 일으킨 내세도 아니고, 백성들이었다.
왕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이 왕이 사는 곳을 불태운 일화를 처음 알았을 때 준우는 신비함을 느꼈다.
“경복궁에 올 때마다 이싱함을 느껴, 그리움 같은? 나 전생에 공주였을까?”
“공주 아니고, 궁녀 아니었을까?”
조금은 친해진 팀원들이 장난을 쳤다. 준우도 잠깐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왕자가 아닐까 생각했던걸 부끄럽게 생각했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 왕자가 아닌 내시였을 수도 있겠단 말을 안 들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함께였다.
팀원들은 잠시 말을 잃고 공간이 주는 힘에 압도당했다.
정해진 관람 동선을 따라 근정전과 경회루를 지나고 있었다.
정도전이 직접 설계했다는 궁궐 중의 으뜸은 이 경회루라고 했다.
명나라 사신들도 경회루를 탐냈다고 하는데, 수백년 전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 현대에서 봐도 경회루는 아름다웠다.
준우는 옆에서 꼼꼼히 사진을 찍고 있는 지연에게 말을 걸었다.
“신기하네요.”
그의 말에 지연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광장은 사용자에게 모든 해석을 맡기는 공간인데,”
준우가 말을 이었다.
“궁궐은 정해진 의미를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지연은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조금은 가르치듯 대답했다.
“문화재의 효율적 관리와 보존을 위한 최적의 동선 설계죠.”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관람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고요.”
“합리적이지만, 그게 경험의 전부일까요?”
준우의 반문에 지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비효율적인 감상.’
성지연은 그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의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그의 질문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균열을 느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카메라 셔터만 한 번 더 눌렀다.
‘경험’과 ‘관리’.
전공만큼이나 다른 두 개의 단어가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팀은 서울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북악산 성곽길 포인트에 올랐다.
발아래에는 고즈넉한 궁궐의 기와지붕이, 눈앞으로는 강남의 마천루까지 서울의 심장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담기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와……”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주라였다.
“우리 미니어처, 낮이랑 밤이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게 만들자.”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조명을 써서. 해가 지면 궁궐은 은은하게, 저 빌딩들은 화려하게 빛나는 거야.”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궁궐 안에서 보이는 현대산업의 산물, 높은 빌딩들이 신기했다.
외국인들도 이 풍경을 참 좋아했다고 했다. 주라의 말을 들은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때, 풍경을 응시하던 준우가 아이디어를 덧붙였다. 손가락으로 능선을 가리켰다.
“저기, 성곽 라인을 따라서 레이저나 얇은 LED 라인이 흐르게 하는 건 어때요? 과거의 경계선이 현재의 도시를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거죠.”
“대박!”
“그거 진짜 멋있겠다!”
‘낮과 밤’, ‘과거와 현재’. 추상적이었던 개념들이 구체적인 시각화 아이디어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답사의 피로도 잊은 채, 팀원들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순수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처음으로 서울의 흩어진 조각이 하나의 온전한 그림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각자의 집에서 화상으로 다시 모인 〈서울로그〉 팀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성곽 라인 LED는 숨 쉬는 것처럼 천천히 깜빡이게 해요!”
"궁궐 지붕에는 아주 작은 한지 조명을 써보면 어떨까요?”
“예전에는 청와를 쓰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걸 차용해서 청와색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팀원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정주라의 목소리가 활기찼다.
“좋아요! 그럼 우리 미니어처 경복궁은 낮에는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밤이 되면 조명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내는 거죠!”
차대원이 맞장구를 쳤다.
화면 속 모두의 얼굴에 ‘해냈다’는 뿌듯함이 어렸다.
그때였다.
섭외/허가 담당인 한이솔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다들.”
“우리가 상상한 대로 미니어처를 만들려면,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부족하다니요?”
주라가 되물었다.
“네. 특히 ‘밤의 얼굴’을 제대로 구현하려면요.”
이솔의 말에, 주라가 바로 뜻을 알아차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아, 맞아요! 그냥 야간개장 때 가서 눈으로 보는 거랑, 전문 카메라로 빛이 기와에 어떻게 반사되는지, 그림자는 어디에 생기는지 찍는 건 완전 달라요. 우리 미니어처 조명의 참고 자료로 쓰려면, 삼각대를 세워두고 오랫동안 빛을 담아서 찍기도 해야 하거든요.”
준우는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었지만 팀원들의 의견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한 모형을 만들려면, 그만큼 정교한 원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솔이 화면에 문서 파일 하나를 공유했다.
문화재 촬영 허가 신청서라는 딱딱한 제목의 파일이었다.
“경복궁 안에서는 개인적으로 삼각대나 전문 조명 같은 촬영 장비를 쓰려면, 이런 허가 신청서를 내고 심사를 받아야 해요. 절차가 엄청 까다롭습니다.”
“네? 그냥 사진 찍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요?”
누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 특히 야간에는 더 엄격하고요. 우리가 원하는 참고 영상을 얻으려면, 이 서류의 벽을 먼저 넘어야 합니다.”
뜨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상상력을 펼치던 날개가 ‘허가’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순간이었다.
그때, 침묵을 깬 것은 성지연이었다.
“괜찮아요. 못 하는 게 아니라, 절차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
“이솔 씨, 그 신청서 저한테 보내주세요. 제가 공식 루트로 접수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답변이 올 때까지, 일단 규제에서 자유로운 다른 장소부터 찾아보죠. 이게 우리의 Plan B입니다.”
회의가 끝나고, 준우는 잠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도시를 기록한다는 건, 눈에 보이는 풍경을 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풍경을 제대로 담기 위해 넘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과 허들의 벽까지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Plan B’라는 단어를 조용히 메모장에 적었다.
“교수님이라면 금방 해결해주실 거 같긴한대.”
혼자 중얼거렸다.
3화
며칠 후, 다시 모인 DDP 회의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문화재청 답변 받았습니다.”
성지연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나, 선례가 없어 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원론적인 답변입니다.”
“그래서, 된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예요?”
누군가 묻자,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죠.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녀가 화면에 새로운 파일을 띄웠다.
-Plan B: 상업 지구 답사 계획
“궁궐 허가가 날 때까지,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다른 장소부터 기록을 시작하죠.”
그때, 한이솔이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저기… 경쟁팀 SNS에 사진이 엄청 올라오고 있어요.”
화면에는 권신욱 팀이 성수동의 힙한 카페와 강남의 화려한 빌딩 숲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어반스케이프 #서울의트렌드 #먼저보여준다’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였다.
사진 속 권신욱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쟤들은 정말 빠르네.”
팀원들의 얼굴에 조급함이 스쳤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우리도 성수동부터 갈까요? 지금 제일 주목받는 곳이잖아요.”
한 팀원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준우가 입을 열었다.
“상대팀이 저 한 팀도 아니고, 다 신경쓰면 9팀 모두를 신경써야 하잖아요? 우리가 할 일을 잘 하면 상대팀이 뭘하든 걱정 없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준우의 말에 여러 반응이 나왔지만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침묵이 이어지자, 준우가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그럼 우리는, 반대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반대로요?”
“네. 가장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곳 말고요.”
준우가 말을 이었다.
“가장 화려했지만, 지금은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곳. 명동과 신촌으로요.”
“상처요? 그래도 명동은 여전히 사람 많지 않아요?”
“사람은 많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만드는 풍경이 과연 진짜 명동의 얼굴일까요?”
준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팀이 빛을 쫓는다면, 우리는 그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를 기록해보죠.”
상대 팀을 의식하지 말자면서 결국 의식한 말에 약간 피식하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준우는 그게 비웃음이라기 보다는 준의 재치를 인정하는 반응으로 생각했다.
준우의 제안에 잠시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속도가 아닌, 깊이를 택하자는 제안을 모두가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팀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시작해 볼까요? 어차피 가만히 시간만 보내고 있자고 우리가 모인 건 아니잖아요? 명동이면 여기서 바로고.”
지하철을 타고 가도 한 얼마 걸리지 않았고 걸어서도 금방 도착하는 거리였다.
“좋아요, 얼른 출발하죠.”
“명동에 먹거리도 많잖아요! 벌써 배고픈데요.”
억지로 내는 꼬르륵 소리에 다들 꺄르륵 웃었다.
팀이 도착한 명동은 여전히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커다란 캐리어를 끄는 소리, 여러 나라의 언어, 화장품 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K-POP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분명 대한민국의 중심, 수도 서울 안이었지만, 명동의 공기에는 수많은 나라의 언어들이 각자를 증명하고 있었다.
다양함이 섞인 곳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운 선율과 같았다.
정주라는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찾았다. 화려한 간판, 활기찬 거리, 외국인 관광객의 밝은 표정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그림이 될 만한 요소는 많았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로 차가운 ‘임대 문의’ 종이가 보였다.
“명동..”
활기찬 표면 아래,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것처럼 텅 비어버린 공간들이 보였다.
주라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텅 빈 상가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풍경에 셔터를 눌렀지만, 결과물은 그저 이질적이었다.
“이게 아닌데…”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 화려함 뒤에 가려진 공허함을 찍고 싶은데, 렌즈는 자꾸 빛나는 것만 쫓는다.”
“인터뷰라도 한 번 해볼까요?”
오세라의 제안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설득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팀은 사람이 붐비는 한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서울 도시기록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대학생들인데요, 잠시 명동 상권에 대해…”
“바쁜 거 안 보여요?”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세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인터뷰할 시간 없어요. 저리 가요!”
매몰찬 거절이 돌아왔다. 몇 군데를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서울로그 팀은 귀찮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결국 팀은 근처 카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흘렀다.
“쉽지 않네요.”
차대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마치 거대한 유리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분명 눈앞에 있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린 그냥 표면만 핥고 있는 관광객 같아요.”
주라가 스케치북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준우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게 지금 명동의 본질일지도 몰라요.”
“네?”
“여긴 너무 오랫동안 외부의 시선에 맞춰진 공간이었어요.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관광객, 단골보다는 뜨내기손님을 위한 곳으로요. 그러다 보니 팬데믹으로 그 시선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속이 텅 비어버린 거죠.”
그의 분석에 지연이 조용히 노트북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그녀는 준우의 감상적인 접근을 못마땅해했지만, 그의 분석에는 날카로운 통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통찰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의 손에는 ‘보여줄 수 있는’ 결과물이 없었다. 결국 팀은 별다른 소득 없이 명동을 떠나야 했다.
“명동, 이름난 동네.”
한자 뜻을 그대로 해석해 본 준우는 명동에 아쉬움을 남긴 채 이동해야만 했다.
“신촌을 못가~”
팀원 중 하나가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오후에 도착한 신촌은 명동과는 또 다른 침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활기 넘치던 대학가는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팀원들의 얼굴에는 명동에서의 실패가 남긴 피로감이 역력했다. 차가 다닐 수 없던 거리는 사람이 적어지자 다시 차를 받기 시작했다.
도로가 나뉘어져 갈라져 버린 풍경이었다.
“한 군데만 더 가보고, 오늘 철수하죠.”
지연의 말에 모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수십 년간 신촌을 지켜온 작은 노포 식당의 문을 열었다.
식당 안은 오래된 나무와 구수한 육수 냄새로 가득했다.
이번에도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식당 주인 할머니는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다.
“그땐 말이야, 학생들이 줄을 서서 밥을 먹었어. 저기 골목 끝까지.”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매일 똑같이 김치찌개만 먹던 까까머리 학생도 있었지. 돈 없다며 외상 달고 가더니, 졸업하고 대기업 명함 파 와서는 동기들 다 데리고 와서 밥 사더라. 이 맛이 생각나서 왔다며, 어찌나 울던지.”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정주라는 할머니의 얼굴과, 낡았지만 반질반질하게 닳은 식탁을 번갈아 카메라에 담았다.
화려하진 않아도, 수십 년의 시간이 쌓인 이야기가 풍경 속에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피사체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맛있긴 하네.”
할머니의 오래된 손맛도 직접 맛본 팀원들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팀은 작은 액세서리 가게에서 묵묵히 짐을 빼고 있는 젊은 사장을 마주쳤다.
가게 유리창에는 서툰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팀원들은 잠시 망설였다. 실패의 흔적을 들추는 것은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준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념한 듯한 미소와 함께 팀을 안으로 들였다.
텅 빈 가게는 그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루나’라고… 달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죠.”
그는 텅 빈 선반을 쓸며 말했다.
“SNS 홍보도 열심히 하고, 밤새워서 신제품도 만들고… 1년은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어요.”
사장은 자신이 만든 제품을 손에 들어 보였다.
“근데 꿈만 가지고는 안 되더라고요. 월세, 권리금… 눈떠보면 전부 돈이었어요.”
그리고는 다시 물건을 제자리에 놓으려다가 정리함으로 넣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그나마 있던 학생들 발길도 뚝 끊기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이렇게 됐네요.”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에는 깊은 체념이 묻어있었다.
정주라는 인터뷰를 촬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천천히 내렸다.
어느새 뷰파인더는, 그녀와 청년 사이에 놓인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자신의 눈으로 그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이 찾던 ‘예쁜 그림’이,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온전히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해주셔서.”
인터뷰가 끝나고, 주라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날 밤 온라인 회의는 유난히 조용했다.
모두들 낮에 마주했던 도시의 그림자에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수집한 자료, 정리해볼까요?”
성지연이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했다. 누군가 명동의 유동인구 데이터를 언급했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때, 정주라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우리… 그냥 반짝이는 것만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요.”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향했다.
“꺼져버린 불빛, 사라진 가게들의 이야기도… 담아야 해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진심에 모두가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때, 준우가 그녀의 감성적인 제안을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번역했다.
“켜지는 간판과, 꺼지는 간판.”
“명동과 신촌 모듈은, 간판 모양의 LED를 여러 개 만들어서 온/오프 시퀀스를 제어하는 겁니다.”
모두가 하나씩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어떤 빛은 계속 켜져 있고, 어떤 빛은 위태롭게 깜빡이다가, 결국 꺼져버리도록. 한 시대가 뜨고 지는 모습을, 빛으로 보여주는 거죠.”
준우의 설명이 끝나자, 차대원이 아이디어를 보탰다.
“거기에, 꺼지기 직전의 형광등이 내는 ‘지지직’거리는 미세한 소리를 지향성 스피커로 넣는 건 어때요? 가까이 다가가야만 들리도록.”
“좋아요!”
“그거 진짜 의미 있겠다.”
팀원들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것은 단순히 멋진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오늘 그들이 마주했던 도시의 아픔에 대한, 서울로그 팀만의 대답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정주라는 아까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폐업한 가게의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깜빡이고 있던 낡은 형광등 사진이었다.
‘이 빛을, 기록해야 해.’
그녀의 스케치북 한쪽 구석에,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닌, 위태롭게 깜빡이는 작은 빛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준우도 작은 블록들을 육각종이로 찢어 만들어 하나가 될 모형을 만들었다.
“작은 여러 개가, 큰 하나를.”
4화.
다음 날 회의실의 분위기는 답사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켜지고 꺼지는 간판’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얻어낸 덕분이었다.
정주라는 스케치북에 여러 형태의 간판 모형을 그리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있었고, 준우는 마지막에 만들었던 작은 육각 종이 블록들을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팀원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아닌, 무언가를 함께 발견했다는 연대감이 흐르고 있었다.
“다들 집중.”
성지연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경복궁 허가 건, 연합회 통해 재문의했는데 여전히 내부 검토 중이라는 답변 받았습니다.”
결국 오늘도 플랜 B였다.
“다음 답사지에 대한 의견 받을게요.”
“젠트리피케이션은 어떨까요?”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촌이 과거의 활기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면, 홍대와 성수동은 그 과정이 지금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니까요. 비교해서 보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제안에 모두가 수긍할 때쯤, 조용히 자료를 찾던 차대원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잠깐만요. 젠트리피케이션은 감성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봐야죠. 지난 5년간의 임대료 상승률, 원주민 이주율, 외부 자본 유입량 같은 거요. 그런 수치 없이 그냥 인상 비평만 하는 건 기록이 아니라 단순한 감상문일 뿐입니다.”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팩트를 중시하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준우는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받았다.
“대원 씨 말도 맞아요. 데이터는 중요하죠. 하지만 신촌 사장님의 이야기는, 그 어떤 데이터에도 없었잖아요.”
준우는 대원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달았다.
“데이터가 보여주지 못하는 걸 우리가 찾아야죠. 두 가지 다요.”
준우의 말에 대원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로그, 3팀은 도시의 데이터와 이야기를 모두 담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젊고 뜨거운 두 동네로 향했다.
**
홍대 놀이터 근처는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버스킹 음악 소리와 외국인 관광객들의 대화, 호객 행위가 뒤섞여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팀은 두 개 조로 나뉘었다.
한 조는 대로변의 활기를 담기로 하고 예준우와 차대원이 속한 다른 조는 그 이면을 보기 위해 뒷골목으로 향했다.
“성수, 낭만 가득한 곳이지만.”
화려한 대로변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골목은 다른 세상이었다.
벽에는 떼어낸 간판 자국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고, ‘권리금 없음’이라는 문구가 절박하게 붙어 있었다.
“권리금이 뭔지 알아요?”
“법으로 보장되지 않지만, 서로 인정하고 있는.. 금액이죠.”
그때, 두 사람의 눈에 한 건물이 들어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LIVE CLUB ON AIR’라는 낡은 네온사인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오늘 쉽니다.”
계단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클럽 사장인 듯했다.
“아, 저희는 공연 보러 온 게 아니고요. 혹시 잠시 이야기 좀…”
준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사장은 한참 동안 말없이 둘을 쳐다보더니, 연기를 길게 뿜으며 고갯짓했다.
“따라와.”
클럽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퀘퀘한 먼지와 오래된 맥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벽에는 빛바랜 밴드들의 포스터가 빼곡했다.
“여기도 곧 문 닫아.”
사장이 텅 빈 무대를 보며 말했다. 차대원은 준비해온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 혹시 작년 대비 임대료가 몇 퍼센트나 올랐습니까? 구체적인 수치를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사장이 피식 웃으며 대원을 쳐다봤다.
“퍼센트?”
그가 되물었다.
“월세가 두 배가 됐는데, 퍼센트가 중요해?”
“……”
대원은 할 말을 잃었다.
“여긴 그냥 월세 내는 부동산이 아니었어. 쟤들 무대였다고.”
사장이 포스터 속 앳된 얼굴들을 가리켰다.
“이제 저런 애들이 설 곳이 점점 사라지는 거야. 돈 되는 음악만 하라는 거지. 그게 당신들이 말하는 데이터에 나와?”
퉁명스러운 대답에 대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질문이 죄인가 싶을 정도로 야단이었다.
차대원은 질문 대신, 조용히 가방에서 고성능 마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텅 빈 무대와 먼지 쌓인 앰프, 낡은 드럼 앞에 조심스럽게 설치했다.
“뭐 하는거야?”
그는 클럽의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낡은 냉장고의 저주파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 도시의 소음이 벽에 부딪혀 희미하게 울리는 잔향들이었다.
“여기가 사라져도, 소리만큼은 기록하고 싶어서요.”
차대원의 말에 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이곳에 먼지 쌓인 느낌과 다르게 아주 잘 관리한 레코드를 만지작거렸다.
대원이 기록하던 침묵은 그 음악소리에 깨졌다.
“이런 침묵이 여기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기록할거면 제대로 해야지.”
사장은 누가봐도 아끼는 듯한 LP판을 꺼냈다. 방금 포장을 뜯은 흔적이 바닥에 떨어졌다.
준우와 대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그렇게 들어보자 했는데, 이렇게 들어보게 되네.”
사장의 말에 담긴 의미를 두 사람은 충분히 알 날이었다.
대원은 조금 전 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녹음햇다.
**
오후, 팀 전원이 성수동에서 다시 합류했다.
낡은 붉은 벽돌 공장과 세련된 통유리 건물의 카페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동네를 담아낸 인원들이었다.
팀은 가장 성공한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대형 공장 개조 카페 사장을 인터뷰하기로 약속을 잡아둔 상태였다.
그런데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했다.
권신욱의 팀, 어반스케이프가 막 인터뷰를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며 나오고 있었다.
권신욱은 준우팀을 발견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어, 3팀?”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여긴 웬일이예요? 설마 이 카페 인터뷰하러 온 건 아니죠?”
“……어, 동선이 겹쳤나 보네요. 어떻게 여길.”
한이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어떡해요? 우리가 한 시간 전에 독점으로 끝냈는데. 겹치게 생겼네요?”
권신욱이 보란 듯이 휴대폰을 흔들었다.
“우리는 바로 영상 편집해서 내일 바로 올릴 건데요. ‘성수동 성공 신화’ 타이틀로.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잖아요?”
그는 준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핫한 건, 우리가 먼저 다 가져가는 거 아닌 가 몰라요. 서둘러야 겠어요. 3팀.”
그의 팀원들이 킥킥거리며 뒤를 따랐다.
서울로그 팀은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실에 대한 분함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팀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제 어떡하죠?”
카페 앞 벤치에서 누군가 힘없이 말했다.
허탈감에 빠진 팀을, 준우가 조용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진짜는 저쪽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화려한 카페 거리와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수제화 공방 골목이었다.
가죽과 본드 냄새가 희미하게 코를 찔렀다.
“성수하면 수제화긴 하죠.”
팀은 늦은 시간까지 홀로 불을 켜고 망치질을 하는 한 공방을 발견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장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했다.
"저기... 사장님."
준우가 반쯤 열린 공방 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망치 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죄송한데요, 저희 학생들인데... 성수동 장인분들 인터뷰하는 프로젝트 진행 중이거든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준우는 땀을 닦으며 다시 시도했다.
"10분만... 아니, 5분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요즘 성수동이 많이 변하고 있잖아요. 사장님 같은 분들 이야기를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장인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학생들이야?"
"네, 맞아요. 저희가 커피라도 사다 드릴게요. 정말 짧게만 여쭤볼게요."
준우가 옆에 있던 팀원들을 슬쩍 돌아보며 눈짓했다. 한 명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근처 카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장인은 낡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작게 웃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것도 관심 있나 싶네. 뭐... 잠깐이면 괜찮지. 어차피 접착제 마를 시간도 필요했고.“
준우의 설득 끝에, 장인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팀을 맞아주었다.
그는 트렌드나 성공 신화 대신, 가죽의 질감과 손의 감각, 사라져가는 동료들에 대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여긴 원래 구두 만드는 가죽 냄새, 본드 냄새로 가득했지. 다들 여기서 기술 배워서 자기 가게 차리고 그랬어.”
장인이 낡은 구두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커피 냄새만 나지만.”
차대원은 이번에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장인의 작업대 옆에 조용히 마이크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의 규칙적인 망치 소리와, 칼이 가죽을 자르는 서걱이는 소리를 녹음했다.
‘이 소리다.’
차대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데이터에는 없는, 사라져가는 과정의 소리. 이게 성수동의 진짜 팩트다.’
그는 숫자가 아닌, 소리로서 진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날 밤 온라인 회의는 권신욱에게 당한 분함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차분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수동의 본질은, ‘덧씌워진 풍경’ 같아요. 그래서 우리 미니어처도 그렇게 만들면 어떨까요?”
그의 아이디어는 곧 구체화되었다.
“붉은 벽돌의 공장 모형을 만들고, 그 외벽 일부가 슬라이딩 도어처럼 옆으로 열리게 만들죠.”
준우가 화면에 간단한 스케치를 공유하며 말했다.
“겉에서 볼 땐 화려한 카페인데, 그 속을 열면, 오늘 우리가 만난 장인 분의 좁은 수제화 공방이 보이도록. ‘덧씌워진 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와…!”
팀원들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차대원이 조용히 말했다.
“소리도 덧씌울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녹음한 두 개의 소리 파일을 재생했다.
첫 번째 파일에서는, 홍대 인디 클럽의 텅 빈 공간을 채우던 침묵과 희미한 잔향이 그리고 갑자기 LP판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 파일에서는, 성수동 공방의 규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사라지는 공간의 마지막 숨소리고, 다른 하나는 지켜내는 공간의 심장 소리예요.”
차대원이 말했다.
“이 소리들을 각 미니어처에 넣죠. 가까이 다가가야만 들리도록.”
그의 말에, 팀원 모두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들이 담지 못한 건 껍데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울로그는 도시의 심장 소리를 담아내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차대원은 자신의 컴퓨터에 새 폴더를 만들었다.
‘도시의 심장 소리’.
그는 오늘 녹음한 ‘망치 소리’ 파일의 이름을, ‘성수동의 심장 소리’로 저장했다. 그리고 LP판의 음악소리를 ‘서울의 영혼’이라 저장했다.
팀원들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역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역사가가 된 기분들을 느꼈다.
특히 그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 준우였다.
“거절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5화
오랜만에 다시 모인 팀원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답사에서 얻은 성공적인 결과물 덕분에 팀의 분위기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차대원은 ‘도시의 심장 소리’라는 이름의 폴더를 다른 팀원들에게도 공유하며, 자신이 수집한 소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좋은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어요.”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정주라의 스케치북에는 ‘덧씌워진 구조’의 구체적인 아이디어 스케치가 빼곡했다.
겉으로는 세련된 카페지만, 벽면을 옆으로 밀면 좁은 공방이 나타나는 구조. 그녀의 그림은 이제 단순히 예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다들 들뜬 건 알겠지만, 집중.”
성지연이 평소의 톤으로 분위기를 정리했다.
“경복궁 허가 건은 여전히 ‘내부 검토 중’입니다. 고로, 오늘도 플랜 B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녀가 화면에 서울 지도를 띄웠다.
“다음 답사지에 대한 의견 받을게요.”
“다른 팀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만한 주제는 어떨까요?”
지연이 먼저 제안했다. 권신욱 팀에게 허를 찔린 경험이 그녀를 더 전략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문화 커뮤니티 같은 곳이요.”
“이태원이네요!”
“해방촌도 있고요.”
팀원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국적인 풍경, 새로운 이야기. 기록할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교포 출신인 오세라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녀는 조용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팀원들이 ‘기록할 거리’라고 생각하는 그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꺼내야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팀원들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쳤고, 오세라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버스가 한강 다리를 건너 이태원으로 향하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빠르게 변해갔다.
팀은 이태원역에 내리자마자 완전히 다른 세상과 마주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낯선 향신료 냄새. 귀를 스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다양한 언어의 소음. 히잡을 쓴 여성들과, 아프리카 특유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저 방문하고 관광하는 인물들이 많은 명동과는 또 다른 다른 이색적인 소리들과 풍경이었다. 머무름이 있는 곳이었으나 이국적이었다.
“와… 진짜 외국 같다.”
누군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팀은 이슬람 사원으로 이어지는 우사단로를 따라 걸었다.
‘할랄’이라는 문구가 붙은 식료품 가게, 양고기 케밥 전문점, 터키식 빵집들이 터전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운 기록의 대상이었다.
“인터뷰부터 시작해보죠.”
지연의 말에, 팀은 한 식료품 가게로 들어섰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오세라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걸었지만, 중동인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영어가 통하는 곳도 있었지만, 카메라와 녹음기를 본 상인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아닌, 귀찮음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서울로그 팀에게 거절은 익숙했지만 이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자신들이 ‘완전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기록의 ‘주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그저 풍경의 일부, 혹은 침입자에 가까웠다.
“여기 한국 맞아?”
누군가는 문득 그런 질문을 던졌다.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핵심의 역할도 겸하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친절하게 다가가려 해도,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을 밀어내는 듯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결국 팀은 별다른 소득 없이 이태원 중심가를 빠져나와야 했다.
“뭔가…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았어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며 한이솔이 말했다.
해방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가파른 경사는 팀원들의 체력뿐만 아니라, 의욕까지 빼앗아 가는 듯했다.
“여긴 관광지라기보다, 진짜 사는 동네 같네.”
“진짜 사는 동네죠.”
준우가 숨을 헐떡이며 했던 말을 오세라가 답했다.
언덕 중턱에 자리한 신흥시장은 이태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외국인 주민들이 운영하는 작은 채소 가게와 정육점이 보였다.
관광객 대신,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이 오가는 생활의 공간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죠.”
팀은 한 채소 가게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가게 주인은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다행히 그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사장님, 저희는 대학생들인데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는 중입니다. 혹시 여기서 장사하시면서 느끼는 점들에 대해 잠시…”
남자는 팀원들의 행색과, 목에 걸린 카메라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 구청에서 나왔소?”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학생들이…”
“아니면 방송국? 우리 또 나쁘게 찍어서 방송에 내보낼 거면 그냥 가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과거 미디어에서 자신들을 불쌍하거나, 혹은 불결한 존재로 묘사했던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은 듯했다.
“절대 아닙니다, 사장님! 저희는 그냥 진솔한 이야기를…”
지연까지 나서서 차분하게 설득하려 했지만, 남자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됐소. 바쁘니까 그만 가주시오.”
그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더 이상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완벽한 거절이었다.
“어, 어.”
팀의 모든 설득이 실패로 돌아갔다.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명동에서의 거절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거절이었다.
“……철수하죠.”
지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팀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모두의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세라였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모두의 시선이 오세라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팀원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카메라랑 녹음기, 전부 가방에 넣어주세요. 그리고, 제가 끝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팀원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홀린 듯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세라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채소 가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가게 주인에게, 그의 모국어로 말을 걸었다. 아름다운 발음의, 정중한 인사였다.
순간, 채소를 다듬던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사장은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오세라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때마침, 한 한국인 할머니가 가게로 다가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총각, 그… 동남아 요리에 넣는 풀때기, 그거 이름이 뭐였더라… 레몬 맛 나는 거.”
가게 주인은 진땀을 흘리며 설명하려 애썼다.
“아, 할머니. 그거… 냄새 좋은 거…?”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소통이 막힌 순간이었다.
그때, 오세라가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할머니, 혹시 레몬그라스 찾으세요?”
“어어, 그거! 맞아!”
오세라는 다시 가게 주인을 향해 그의 언어로 무언가를 물었고, 그는 냉장고에서 익숙한 채소 한 묶음을 꺼내왔다.
막혔던 소통이 순식간에 뚫리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오세라의 등을 두드리고 갔고, 가게 주인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갔다.
오세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게에 있는 낯선 채소들의 이름을 물었다.
고향에서는 이 채소로 어떤 음식을 해먹는지, 한국 사람들도 좋아하는지. 그녀는 ‘기록’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태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그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준우는 처음의 접근법이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게 주인은 어느새 의자를 내어와, 오세라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팀원 전체를 향해 손짓했다.
“당신들도 이리 와서 앉으시오.”
남자의 이름은 ‘라자크’였다.
그는 팀원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건네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창한 다문화 담론이 아니었다.
한국에 온 지 10년, 아침마다 아들을 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가게 문을 여는 한 아버지의 소소한 일상이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녀가 학교에서 ‘깜둥이’라고 놀림당하였을 때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세라는 단순히 그의 말을 통역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과 문화적 배경까지 섬세하게 풀어서 팀원들에게 전달했다.
“라자크 씨는 지금… 고향의 명절 음식이 그립다고 하시네요. 그 음식은 온 가족이 모여야만 의미가 있는 음식이래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 번도 해 먹은 적이 없다고…”
그때 팀원 중 한 명이 갑자기 불만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한국엔 왜 왔고, 이렇게 생활을 고향으로 가면 돼지.”
그때 준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말을 꺼낸 팀원이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이해해 보고 토론은 나중에 하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팀원들은 비로소 한 사람의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기록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최신형 카메라나 고성능 마이크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는 신뢰일 수 있다는 것을 팀 전체가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온라인 회의가 이어졌다.
팀원들은 오늘 얻은 교훈을 어떻게 미니어처, 즉 우리가 만들고 있는 디오라마에 담을지 논의했다.
“오늘 우리가 올랐던 해방촌의 가파른 언덕, 그 지형을 그대로 재현한 ‘경사 모듈’을 만들죠.”
준우가 먼저 제안했다.
“좋아요! 그리고 가게 간판들에는 오늘 우리가 들었던 수십 개의 언어가 빠르게 롤링되는 작은 LED 스크린을 답시다.”
주라가 아이디어를 보탰다.
그때, 차대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라자크 씨의 이야기는, 시끄러운 길거리에서는 들을 수 없었어요. 아주 가까이, 우리끼리만 있을 때 들을 수 있었죠.”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모형도 그런 경험을 줘야 합니다. 시장의 다양한 소음을 아주 작게 재생하는 지향성 스피커를 모형 깊숙한 곳에 숨겨두죠.”
대원은 손짓을 해가며 자신의 말에 설득력을 부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라자크 씨 같은 분들의 목소리를 속삭임처럼 넣는 겁니다. 관람객이 귀를 아주 가까이 가져다 대야만, 그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요.”
그의 제안에 모두가 감탄하며 동의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그들이 얻은 교훈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방식이었다.
“저는 거기다 그럼 꼭 소리로 안들릴 수도 있으니까, 카메라로 찍는 사람들에게 큐알코드를 제공해서 읽을 수도 있게 하면 좋겠어요.”
모두가 오늘 나온 아이디어들에게 박수를 쳤다.
회의가 끝나고, 오세라는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그녀는 오늘 만난 라자크 씨의 이름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가 그리워하던 고향 음식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적었다.
그녀의 수첩에는 데이터가 아닌,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었다.
준우는 교수님이 이 작업에 왜 자신을 추천했는 지 알것같았다.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았을 거에, 자신의 휴학서 신청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6화
지난 이태원 답사의 여운이 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세라는 라자크 씨와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며, 그의 아들이 학교에서 그림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팀원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그때, 지난번 라자크 씨의 이야기 도중 무례한 말을 했던 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태원에서 제가 정말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가 팀원들과 오세라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준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모두 배우는 과정이잖아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히려 이런 사과가 용기 있는 걸요.”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기록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감정적인 비난이 아닌, 팀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건설적인 논의였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성지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은 이야기들이네요. 하지만 원칙이 없다면, 이런 다짐은 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 〈서울로그, 제 3팀〉 취재 윤리 가이드라인 v1.0’
준우는 그런 모습을 보며 지연은 총무 같은 걸 하면 정말 더 잘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기록 대상을 존중하며, 섣불리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왜?’라고 묻기 전에, 먼저 ‘무엇을’ 듣는다.
-기록 과정에서 개인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우리의 기록이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생각한다.
지연과 팀원들은 서로가 함께 지킬 약속문을 만들어 갔다. 간결하지만, 지난 답사에서 팀이 온몸으로 깨달은 교훈들이 담겨 있었다.
“이건 우리 팀의 첫 번째 공식적인 약속입니다.”
지연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팀은 비로소 하나의 철학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교수님은 이런식으로 흘러가실 걸 미리 예측하셨을까.”
준우는 이 작은 공동체에 대한 신비함이 느껴졌다. 자신도 그 중심에 있는 건 아직 잘 모른 체였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그녀가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래서, 다음 답사지는 어디로 할까요?”
예준우가 손을 들었다.
“석관동은 어떨까요?”
그가 지도를 띄워 한 지역을 가리켰다.
“여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의릉’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인다는 ‘한국문화예술대학교’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곳입니다.”
“도시가 늘 마주하는 딜레마죠. ‘보존’과 ‘창작’이라는.”
준우의 말에 누군가 긍정적인 말을 이었다. 팀원들의 눈에도 빛이 났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경계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음 날, 팀이 찾은 의릉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소나무들과, 왕릉을 지키는 석상들의 엄숙한 풍경.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문화재 관리소 직원은 친절했지만, 단호했다.
그는 ‘보존’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강조했다.
“이곳에서는 고성을 내시면 안 됩니다. 왕의 영면을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잔소리처럼 긴, 교회 목사님처럼 졸리는 설교 시간이었다.
“삼각대 설치는 저기, 관람 동선에 방해되지 않는 지정된 구역에서만 가능합니다. 잔디나 흙 위에는 절대 안 됩니다.”
끝날 듯싶으면 이어지는 마지막의 마지막의 당부였다.
“드론 촬영은 당연히 불허합니다. 조상님들 머리 위로 기계를 날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한 학생이 나무에 조명을 매달아 작품을 찍다가, 수백 년 된 소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릴 뻔했다는 것이었다.
경비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팀원들은 수많은 ‘금지’ 조항 앞에서 조심스럽게 장비를 다뤘다.
성지연은 관리 규정집을 꼼꼼히 체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조심할 게 많지만, 그만큼 조심하면서 잘 해봐요. 여러분.”
그녀에게 이 규정들은 불편한 제약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담벼락 하나를 넘자,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한국문화예술대학교 캠퍼스였다.
연습실 창문 너머로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이 터져 나왔고, 야외 잔디밭에서는 학생들이 실험적인 조형물을 설치하며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의릉의 침묵과는 정반대의, 살아있는 창작의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와, 분위기 좋다.”
팀은 영상원 학생 몇 명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 의릉이요? 진짜 미치죠.”
한 학생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아니, 저기 저 소나무, 진짜 멋있잖아요. 저걸 배경으로 작품 사진 딱 한 컷 찍겠다는데, 무슨 문화재 훼손범 취급을 하더라고요. 저희가 뭘 부순다는 것도 아닌데.”
“맞아요. 저희 연극 포스터 찍으려고 잠시 소품 좀 뒀다가, 관리인 아저씨한테 엄청 혼났어요. 좀 예민하신 것 같아요.”
옆에 있던 학생이 거들었다.
“예술 하라고 만든 학교 바로 옆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공원이 있는 셈이죠.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학생들의 목소리에는 ‘창작을 위한 자유’를 향한 갈망과,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 뒤섞여 있었다.
보존과 창작. 양측의 입장은 너무나 팽팽해서, 풀리지 않을 매듭처럼 보였다.
팀은 답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 모여 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관리소 직원분 이야기도 이해되고… 학생들 이야기도 이해되고…”
주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누구 하나가 양보해야 끝나는 문제 아닐까요?”
팀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준우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통해, 두 공간을 가르는 낡은 담벼락을 보고 있었다.
저 담벼락은 공간만 나눈 것이 아니라, 생각과 시간까지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집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져 자료를 정리하던 팀의 단톡방이 급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한이솔이 올린 링크 하나 때문이었다.
‘이거… 권신욱 팀인데.’
팀원들이 떨리는 손으로 링크를 눌렀다.
화면 가득, 도발적인 제목이 떠올랐다.
[단독] 왕릉의 비명, 예술이라는 이름의 소음 - By 어반스케이프
권신욱이 올린 게 확실했다.
팀원들이 숨을 죽인 채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의릉의 고요하고 장엄한 풍경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며 시작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수백 년의 역사가 잠든 곳’이라는 경건한 자막이 떠올랐다.
바로 다음 순간, 화면이 암전되더니 불안하고 자극적인 비트의 배경음악이 터져 나왔다.
한예대 학생들의 파격적인 퍼포먼스 영상이 교차 편집되기 시작했다.
기괴한 분장을 한 채 무언가 소리치는 학생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바닥을 뒹구는 학생의 모습도 이어 보였다.
시끄러운 밴드 음악 소리가 영상을 가득 채웠다.
마치 학생들이 왕릉의 평화를 위협하는 몰상식한 집단인 것처럼, 영상은 노골적으로 분노를 유도하고 있었다.
‘갈등’, ‘대립’, ‘신성모독’.
자막은 온통 선동적인 단어들로 가득했다.
오늘 그들이 들었던 양측의 복잡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단순하고 폭력적인 이분법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게 뭐야…?”
“이건 완전 악마의 편집이잖아!”
“미쳤다, 우리 인터뷰한 내용도 훔쳐본 거 아니야?”
단톡방은 순식간에 분노로 들끓었다.
권신욱은 그들이 하루 종일 고민했던 주제를, 가장 저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선점해버린 것이었다.
-‘[긴급] 온라인 회의 소집합니다. 지금 바로 들어오세요.’
지연의 메시지와 함께, 즉시 화상 회의가 열렸다.
“당장 반박 영상 만들어야 돼요!”
“우리도 저놈들처럼 자극적으로 편집해서, 권신욱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려야 한다고요!”
화면 속 팀원들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가 흥분한 상태였다.
그때, 성지연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혼란을 끊었다.
“다들 진정하세요.”
그녀는 화면에 의릉에서 받아온 ‘문화재 관람 및 촬영에 관한 규정’ 문서를 공유했다.
“흥분해서 똑같이 대응하면, 우리도 저들과 다를 게 없어집니다. 팩트를 보세요.”
그녀가 문서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규정 어디에도 ‘창작 금지’라는 말은 없습니다. ‘시각적 조화’와 ‘주변 음압 레벨 관리’에 대한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을 뿐이죠. 이건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의 문제입니다.”
그녀의 말에, 준우가 정신이 번쩍 든 듯 말을 받았다.
“지연 씨 말이 맞아요.”
“권신욱은 이걸 ‘갈등’이라고 부르지만, 본질은 ‘조율’의 문제예요.”
“우리가 쓸 단어는, 달라야 합니다.”
그의 말에 격앙되었던 팀원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권신욱이 만든 싸움판에 똑같이 뛰어드는 것은, 결국 지는 길이었다.
서울로그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기록해야 했다.
감정적인 반박이 아닌, 팩트와 중립적인 ‘언어’로 모두를 설득할 수 없겠지만 그런 걸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팀이었다.
다시 평정을 되찾은 팀은, 디오라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오늘의 교훈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의릉과 한예대 모듈 사이에, 실제 담벼락 대신 다른 걸 세우죠.”
준우가 제안했다.
“천장에서 가느다란 ‘레이저 라인’을 쏴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가 화면에 스케치를 그려 보였다.
“레이저는 계속해서 미세하게 깜빡이거나 흔들리게 하죠. 그 경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또 유동적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좋다…!”
팀원들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소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차대원이 말했다.
“모듈의 의릉 쪽에 귀를 대면 고요한 바람 소리가, 한예종 쪽에 귀를 대면 다양한 창작의 소리가 들리게 하는 거죠. 그리고 정확히 그 레이저 라인 아래에서는, 두 소리가 미묘하게 섞여서 들리도록요.”
팀은 권신욱이 만들어낸 분노를, 새로운 창작의 에너지로 바꾸고 있었다.
준우는 디오라마 옆에 붙을 설명 문구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갈등’이나 ‘대립’, ‘충돌’ 같은 단어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율’, ‘공존’, ‘과정’이라는 단어를 채워 넣었다.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창작 사이의 첨예한 갈등’
→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창작이 공존하기 위한 조율 과정’
단어 몇 개를 바꿨을 뿐인데, 문장이 담고 있는 세계가 달라졌다.
그 시각, 권신욱의 영상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요즘 애들 문제다’, ‘예술가들 다 쫓아내라’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 다른 의견들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너무 악의적으로 편집한 거 아닌가요?’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할 듯.’
-‘이건 그냥 혐오 조장이잖아.’
권신욱은 빠르게 올라가는 ‘좋아요’ 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같은 시각, 준우는 묵묵히 중립적인 단어들로 자신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한쪽은 속도를, 다른 한쪽은 깊이를 택했다.
도시의 진짜 얼굴은, 과연 어느 쪽의 기록에 더 담겨 있을까싶었다.
준우는 교수님이 늘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질문이 있다는 건 정답이 있다는 걸까요?”
도저히 의도를 알 수 없는, 그리고 정답도 알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정답과 질문,
그 과정 안에서 헤매던 준우였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감각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마음으로 보라’는 말을 말 그대로가 아닌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7화
권신욱의 영상은 예상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자극적인 편집은 대중의 분노를 쉽게 자극했고, 댓글 창은 한예종 학생들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목소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혐오 조장이잖아.’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지, 이렇게 한쪽만 매도하는 게 언론인가?’
권신욱이 노렸던 일방적인 여론몰리는, 그가 의도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서울로그 팀은 그 소란 속에서 묵묵히 다음 답사를 준비했다.
성지연이 공유한 ‘취재 윤리 가이드라인’은 이제 팀의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 있었다.
“경복궁 허가 건은 여전히 검토 중입니다.”
지연의 목소리는 이제 이 말을 일종의 주문처럼 시작하고 있었다. 팀원들도 익숙해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를 대신 하여 갈까요?”
“청년 주거 문제는 어떨까요?”
이번에는 좀처럼 총무 역할을 제외하고는 말이 없던 문해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요즘 제 친구들 만나면 전부 집 이야기만 해요. 월세, 보증금, 대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지금 우리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이니까요.”
“좋은 주제네요.”
준우가 동의했다.
“그럼 가장 상징적인 공간으로 가야죠. 관악 고시촌이요.”
일행은 관악구 고시촌들에 대해서 일단 사전조사를 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만은 많은걸 알 수 없었다.
어떤 인터넷은 이제 고시촌도 옛날 고시촌과 달라졌다는 말도 많았다.
고시촌.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회의실의 공기가 잠시 무거워졌다.
과거에는 사법고시생들의 꿈과 좌절이 켜켜이 쌓인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지금은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들과, 저렴한 방을 찾아 흘러든 청년들의 고단한 삶이 응축된 동네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또 실상은 다르다는 내용도 있었다.
“공무원이 1등인 직업에서 벗어난 이후로 고시촌도 망했다는 말도 많네요.”
“그래도 한 번 가보죠. 정말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떤 글이 정답인지 확인해야죠.”
“낮의 풍경도 의미 있겠지만, 진짜 이야기는 밤에 있을 것 같습니다.”
준우가 말을 이었다.
“청년들의 불안, 그리고… 밤길의 안전 문제까지요.”
“안전 문제라면…”
지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야간 답사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골목이 많고 좁아서요.”
“밤은 근데 대림역이 더 위험하죠.”
모두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윤리 가이드가 생겨난 원인이기도 한 발상이었다.
“아, 이건, 그냥 제 생각이고. 아닙니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당사자가 서둘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없던 일로 해달라고 사과를 구했다.
그러자 모두가 처음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원래의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지연은 즉시 노트북으로 관악구의 범죄율 통계와 CCTV 설치 현황 데이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행동대장 격 역할을 하던 서인호가 나섰다.
“제가 동선 미리 확인하고, 위험 구간은 체크해두겠습니다. 비상용 호루라기랑 손전등도 인원수대로 준비하고요. 너무 늦은 시간까지는 진행하지 않는 걸로 하죠.”
지연은 그의 체계적인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진행하되, 윤리 가이드라인 3번. ‘개인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절대 잊지 마세요.”
그렇게 팀의 다음 목적지가 결정되었다. 서울의 밤이 품고 있는 가장 무거운 그림자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관악 고시촌에 도착한 팀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과 마주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낡은 다세대 주택의 창문들이 섬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마다의 꿈과 불안을 끌어안은 채, 책상에 앉아 있을 청춘들의 섬이었다.
“어둡네요.”
사실 밤이면 대부분의 거리는 이런 느낌이었다. 특별히 이곳이라고 다른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청춘들이 자신의 시간과 꿈을 교환하고 있는 장소라는 게 다른 곳과는 달랐다.
“조금은 다르긴 하죠. 여기가 20대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하고.”
“아 정말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공기 중에는 늦은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음식 냄새와, 깊은 밤의 서늘한 습기가 뒤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주라가 속삭였다.
“다들 독서실이나 방 안에 있겠죠.”
차대원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요한 골목의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 낡은 건물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녹음되었다.
고요함 속에 숨어있는 도시의 긴장감이었다.
팀은 미리 계획한 동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 CCTV가 없는 사각지대, 가로등이 고장 나 어둠에 잠긴 길이었다.
인호는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팀을 이끌었다.
그때였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팀원 전체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술에 취한 중년 남성 두 명이 서로 멱살을 잡은 채 고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진짜…!”
“너나 잘해, 인마!”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갈 듯한 험악한 분위기.
팀원들은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숨겼다.
“……찍어야 돼.”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주라는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 렌즈 캡을 열고 있었다.
이것은 날것 그대로의, 도시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권신욱이라면 분명 환호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들이댔을 장면이었다.
“안돼요. 위험하고 우리가 담을 이야기에 꼭 필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지연이 단호하게 막아섰다.
“그리고 저 사람들 입장에선, 이건 폭력적인 기록일 뿐이고요. 우리 윤리 가이드라인 잊으면 안되잖아요?”
“하지만 이런 게 진짜 현실이잖아요! 우리가 언제 또 이런 장면을…”
주라가 아쉬움에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싸우던 남자 중 한 명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고, 짧은 신음과 함께 움직임이 멎었다.
다른 남자는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정적이 흘렀다.
상황이 순식간에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은 딜레마에 빠졌다.
기록자인가, 목격자인가.
그 경계선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모두가 얼어붙어 있는 그 순간, 결정을 내린 것은 성지연이었다.
그녀는 준우와 눈을 맞추며 짧게 말했다.
“준우 씨, 119에 신고해요. 위치는 제가 문자로 보낼게요.”
그리고는 나머지 팀원들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주라 씨, 카메라 집어넣으세요. 지금부터 촬영은 없습니다. 다른 분들은 저쪽 골목으로 돌아서 조용히 현장을 벗어납니다. 인호 씨, 인솔하세요.”
“하지만… 저 사람, 우리가 증언해줘야 할 수도 있잖아요!”
주라가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다.
기록자로서의 책임감과, 좋은 그림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우리의 안전이 먼저입니다.”
지연의 목소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저분의 인권도요. 지금 저분에게 필요한 건 카메라가 아니라 구급대원이에요. 이건 기록이 아니라, 사고입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원칙이 아니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한, 리더의 신념이었다.
팀원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고할게요.”
준우는 수화기 너머로 현재 위치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때쯤, 팀은 안전하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
계획했던 답사는 중단되었고, 손에 쥔 결과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거운 것을 마음속에 기록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잘했어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겠어요.”
준우는 자신이 꺼내는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 위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꼭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준우의 말에 대답하거나 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오늘의 기록은 종료되었다.
다음 날 팀원들의 얼굴에는 어젯밤의 긴장감과 피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젯밤 일은… 제 판단이었습니다. 결과물을 얻지 못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주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지연 씨. 지연 씨 판단이 맞았어요.”
그녀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어제는 너무 아쉬웠어요. ‘특종’을 놓친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만약 제가 그 장면을 찍어서 영상에 넣었다면… 그건 그냥 폭력적인 관음증이었을 것 같아요. 권신욱이랑 다를 게 없었겠죠.”
그녀의 고백에,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지연의 원칙주의는 팀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이 기록하려던 대상을 지켰다.
팀원들은 그녀의 리더십을 더욱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럼… 고시촌 모듈은 어떻게 하죠? 사실상 빈손인데요.”
누군가의 질문에 모두가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준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빈손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가 화면에 지도를 공유했다. 관악구의 범죄 통계 데이터와 CCTV 설치 지도가 겹쳐진 이미지였다.
“우리가 어제 느꼈던 ‘불안감’을 디오라마로 만들죠.”
“어떻게요?”
“고시촌의 좁은 골목길 모형을 만들고, 우리가 직접 걸었던 동선을 따라 아주 작은 LED를 박는 겁니다.”
“그런데 공포감이 표현이 될까요?”
“어떤 길은 가로등처럼 환하게, 어떤 길은 고장 난 것처럼 깜빡이게, 그리고 어젯밤 그 골목처럼… 완전한 어둠으로 남겨두는 거죠.”
“소리도요.”
자신의 차례를 놓치지 않는 차대원이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 제가 녹음한 ‘고요함 속의 긴장감’을 배경으로 깔고, 관람객이 특정 ‘어두운’ 골목에 가까이 다가가면, 심장박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어제 느꼈던 그 불안의 리듬을요.”
한 편의 공포영화 같다는 생각을 하는 팀원도 있었다.
서울로그의 기록은, 디오라마를 향한 아이디어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감각과 경험을 기록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지연은 ‘취재 윤리 가이드라인’ 문서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
-우리는 기록의 욕심보다, 사람의 존엄성을 언제나 우선한다.
지연은 어젯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좋은 기록은, 결국 좋은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되새겼다.
그녀의 팀원들은 이제 그것을 함께 믿어주고 있었다.
준우는 이쯤 되자 별거 아닌 일이 특별한 일이 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나하나 열어보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 거대한 서울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에 불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리고 기록이라는 의무를 가진 우리들에겐 아니었다.
모두가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자. 과제로 시작했지만, 과정을 통해 무언가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소중한 기록이, 우리들의 작은 역사가 되고 있었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중심엔 내가 있다.”
준우는 교수님의 철학을 한 번 더 끄집어냈다.
8화
관악 고시촌의 무거운 밤을 경험한 뒤, 팀의 분위기는 한층 더 진지해졌다.
단순히 흥미로운 풍경을 수집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기록이 가진 무게와 책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저 팀 과제라 여겼는데 가이드라인도 생기고.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
성지연이 만든 윤리 가이드라인은 이제 모두가 자연스럽게 내재화한 팀의 헌법이 되었다.
며칠 후 회의실 팀원들은 다시 모였다. 작업도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취재를 나가서면서 이제는 디오라마 제작도 함께 진행하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있던 건 아니라 다양한 시도로, 다양한 도구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경복궁 허가 건은… 여전히 검토 중입니다.”
지연의 정기 보고에, 이제 팀원들은 실망하는 대신 ‘그럼요, 암요’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플랜은 이제 비상 계획이 아닌, 그들의 주된 작업 방식이 되어 있었다.
“다음 답사지는 여의도입니다.”
지연이 지도를 띄웠다.
“국회의사당, 증권가, 그리고 한강공원.”
팀원들의 얼굴에 각기 다른 흥미가 떠올랐다.
행정학도인 지연은 국회에, 다른 팀원들은 금융의 중심지와 시민의 휴식 공간에 관심을 보였다.
준우가 모니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치, 금융, 여가. 한 섬 안에 전혀 다른 세 개의 도시가 있는 곳이죠.”
그가 팀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과연 우리는, 이 세 개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의 질문은 이번 답사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개별 장소의 깊이를 파고드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증명해야 할 때였다.
다음 날, 여의도에 도착한 팀은 국회의사당의 거대한 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압도적인 건축물이 내뿜는 권위가 보였다. 전설의 로봇이 세상을 구원하러 나올까 하는 바보같은 호기심도 함께였다.
아직은 꿈을 희망할 수 있는 나이, 그게 20대의 특권이었다.
그 주변을 흐르는 공기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한순간에 파도와 바람처럼 흘러가 버렸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소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확성기를 통해 터져 나오는 절박한 구호가, 무심하게 닫힌 국회의 철문에 부딪혀 흩어졌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팀은 기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는 듯했다.
국회 직원들은 약속된 취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고, 시위 참가자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날을 세웠다.
차대원은 이곳의 소리를 녹음하며 중얼거렸다.
“선언과 구호.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네요. 대화는 없이요.”
그의 녹음기에는 소통 없는 두 개의 소리가 위태롭게 담기고 있었다.
불과 몇 블록을 걸었을 뿐인데,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증권가였다.
“저녁에? 그래 좋아.”
“알았어. 그렇게 하자.”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눈은 쉴 새 없이 스마트폰 화면의 숫자들을 쫓고 있었고, 귀에는 무선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시간이 돈이고, 정보가 무기인 공간이었다.
팀은 1분 1초를 아끼며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한 젊은 증권사 직원과 겨우 짧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여의도요? 전쟁터죠.”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매일 숫자를 상대로 싸우는 곳. 1초의 타이밍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려요.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고요.”
그는 ‘리스크’, ‘레버리지’, ‘손절’ 같은, 아직 20대면서 주식을 잘 모르는 팀원들에게는 낯선 단어들을 쏟아냈다.
그의 이야기에는 성공에 대한 열망과,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차대원은 조용히 자신의 역할인 소리를 기록했다.
‘알림과 속삭임.’
스마트폰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주가 앱의 알림 소리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복도에서, 주가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들의 빠르고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들렸다.
모든 소리가 보이지 않는 돈의 흐름을 쫓고 있었다.
“쉼이 필요해 보여요.”
그렇게 다시, 팀은 세 번째 세상으로 들어섰다.
여의도 한강공원이었다.
방금 전의 치열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높은 빌딩 숲을 병풍처럼 두른 채, 드넓은 잔디밭 위에는 돗자리를 깐 가족과 연인들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하늘 맞아요?”
“어쩜 이렇게 다르죠. 여의도는.”
“심지어 오늘 일정에 방송국이 없는 게 마음아팠는데.”
“우리가 방송일을 하고 있어서요?”
“예? 우리가요?”
“방송이 기록이던가.”
팀원들은 어느새 업되어 침묵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의 시야에 보이던 아이와 함께 연을 날리는 한 가족에게 다가갔다.
이전의 거절이 떠올라 조심스러웠지만, 그들은 의외로 흔쾌히 대화에 응해주었다.
“여의도요? 저희한테는 숨 쉴 구멍 같은 곳이에요.”
아이의 아빠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저기 빌딩 정글 안에서 매일 치열하게 살다가도, 주말에 여기 오면 살 것 같아요. 서울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이렇게 넓게 보이는 곳이잖아요.”
그의 말에 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국회와 증권가에서는 모두 땅이나 눈앞의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하늘을 볼 여유가 있는 곳. 그것이 이곳의 본질이었다.
“심지어 하늘을 닮은 예쁜 강까지도요.”
그 말을 듣자 때론 달을 품기도하고, 어쩔땐 해마저 품는 거대한 한강물줄기가 보였다.
차대원은 이곳의 소리도 빼놓지 않고 녹음했다.
‘웃음과 바람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대화, 강바람이 잔디를 스치는 소리였다.
모든 소리가 분명하고 평화로웠다.
답사를 마친 팀은 여의도의 한 카페에 모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오늘 대박이지 않았어요?”
“정치, 금융, 여가. 이렇게 다른 세 개의 얼굴을 하루 만에 다 담았네요!”
팀원들은 성공적인 결과물에 들떠 있었다.
준우가 던졌던 ‘하나의 이야기’라는 과제는 잊은 듯했다.
그저 전혀 다른 세 개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수집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마침 내일이 배정후 멘토님과의 중간 점검 날입니다.”
지연이 일정을 확인하며 말했다.
“오늘 기록한 내용까지 잘 정리해서 발표하죠.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팀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은 조각들이 얼마나 날카롭고 생생한지 알고 있었다.
그 조각들을 하나로 꿰는 실이 없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저녁, 서울문화연합회 회의실에 일행들이 모였다.
팀은 실무 멘토인 배정후 앞에서 중간 발표를 진행했다.
발표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명동의 상처, 성수동의 심장 소리, 이태원의 신뢰, 그리고 어제 기록한 여의도의 세 얼굴까지.
팀이 수집한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힘이 있었다.
팀원들은 배정후의 얼굴에 떠오를 만족스러운 미소를 기대했다.
“...”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발표가 끝나고, 배정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음.”
그는 턱을 괸 채, 팀원들을 한 명씩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회의실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칭찬도, 질책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했다.
“개별 기록들은 흥미롭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담으려는 노력도 잘 보이는군요.”
팀원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바로 다음 말이 그들의 미소를 지워버렸다.
“그런데, 그래서 3팀. 그러니까 서울로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대체 뭡니까?”
그의 질문은 조용했지만,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명동의 상처, 성수동의 심장 소리, 이태원의 신뢰, 여의도의 세 얼굴… 전부 좋은데, 이걸 다 꿰는 하나의 줄기가 보이지 않는군요.”
그는 이들에게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냥 서울 풍경 스케치 모음집으로 끝낼 건가요?”
그의 지적에 팀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각개전투는 잘했지만,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서사가 없다는 약점이 드러난 것이었다.
스스로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문제를 정확히 찔린 것이다.
“기록은 수집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집한 것들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고, 어떤 이야기로 엮어내는가. 거기서부터 진짜 기록이 시작되는 겁니다.”
배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러분만의 ‘하나의 이야기’를 찾아오세요. 다음 보고 때 보겠습니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팀은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정체성의 위기였다.
그날 밤 회의는 침묵과 자책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멘토님 말이 맞는 것 같아…”
주라가 먼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무 파편적인 이야기만 모았나 봐. 그냥… 신기한 거, 재밌는 거 주워 담기만 한 거야.”
“우리 프로젝트의 주제가 대체 뭐지?”
“지금까지 한 거, 다 엎어야 하는 거 아니야?”
좌절과 불안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준우는 조용히 화면에 그동안 수집한 모든 자료를 펼쳐놓고 보고 있었다.
지도, 사진, 녹음한 소리 파일, 인터뷰 녹취록, 성지연이 정리한 데이터들이었다.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수 많은 조각들이었다.
그는 자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기 시작했다.
신촌의 꺼져가는 가게와 여의도 증권가의 빛나는 숫자들.
의릉의 멈춰버린 시간과 한예대의 폭발하는 에너지.
이태원의 다양한 언어와 국회의사당의 단호한 선언.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졌다.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가 기록한 건 장소가 아니었어요. ‘흐름’이었어요.”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국회에서는 ‘권력의 흐름’을, 증권가에서는 ‘돈의 흐름’을, 한강 공원에서는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을 본 겁니다.”
모두가 준우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명동의 상권은 ‘자본의 흐름’이 어떻게 도시의 얼굴을 바꾸는지를 보여주고, 의릉과 한예대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율되는지를 보여주죠.”
그의 말에 팀원들의 눈이 커졌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거대한 혈관처럼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디오라마는 단순히 장소들의 모음이 아니에요.”
준우가 말을 이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보이지 않는 혈류를 보여주는 지도가 되는 겁니다.”
준우는 디오라마 전체에 프로젝션 매핑을 활용하여, 이 보이지 않는 ‘흐름’들을 시각적인 데이터 라인으로 표현하자고 제안했다.
돈은 붉은색 라인으로, 권력은 차가운 푸른색 라인으로, 사람들의 시간은 따뜻한 노란색 라인으로 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그 흐름들이 각 디오라마 모듈 위를 흐르며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박…”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좌절감은 사라지고, 새로운 차원의 흥분이 그 자리를 채웠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팀원들은 자신들의 디오라마 위에 이 ‘흐름’들을 어떻게 그려 넣을지 열정적으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성지연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미소가 번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 도시의 혈관을 그리러 가보죠.”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기록이 단순한 스케치 모음이 아닌, ‘서울이라는 유기체의 혈류를 그리는 작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준우가 있었다.
준우가 찾아낸 것은 단순한 흐름도 아닌, 서울의 호흡이었다.
9화
‘흐름’이라는 거대한 지도를 손에 넣은 후, 팀의 작업실은 활기로 가득 찼다.
DDP 한편에 마련된 그들의 공간은 이제 단순한 회의실이 아니었다.
임대해 온 3D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작은 건물들을 출력하는 낮은 소음, 아크릴판 자르는 냄새, 모형에 색을 입히는 정주라의 집중된 옆모습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우리 이거 진짜 잘 돼야 해요.”
“그럼요.”
모두의 시선이 3D 프린터로 향했다. 거대한 기계를 임대해 오는데 학생들의 생활비로 유치할 수 없었다.
“상금 못 따면 정말. 큰일 나요!”
모두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이 디오라마를 잘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 아이디어도 좋은데, 역시, 이건 빠질 수가 없죠.”
3D 프린터로 인쇄한 미니어처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새활용과 재활용을 이용한 디오라마 도구들도 만드는 팀원들이었다.
“그래도 재밌네요. 허리는 아프지만.”
어린 시절 집중해서 진행한 도미노처럼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잘 쌓는 것도 더더욱 중요했다.
한 번의 실패가 모든 걸 끝장내는 건 아니었지만, 신중에 신중을 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
-씨이이익
-푸드드득
창밖으로는 며칠째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울 전역에 호우 경보가 내려진, 변덕스러운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다음 답사지는 중랑천 자전거길입니다.”
지연이 창밖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한강이 서울의 거대한 동맥이라면, 중랑천 같은 지류들은 도시의 실핏줄이죠.”
준우가 말을 받았다.
“그곳을 따라 흐르는 자전거, 유모차, 조깅하는 사람들. 가장 일상적인 시민들의 ‘시간의 흐름’을 기록할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날씨만 좀 어떻게 되면.”
팀원들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평온한 일상의 풍경을 담을 계획을 세웠다.
TV 뉴스에서는 서울 곳곳의 침수 피해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어난 강물에 잠긴 자동차, 지하철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흙탕물을 보며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표정이 이어졌다.
“와, 집 갈 수 있나?”
팀원들은 뉴스를 보며 혀를 찼지만, 아직 그것이 자신들의 기록과 직접 연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난은 언제나 TV 화면 속,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이틀 뒤, 거짓말처럼 하늘이 갰다.
팀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비를 챙겨 중랑천으로 향했다.
“거의 막바지니까. 더 힘이 나요.”
“저도요.”
그들의 머릿속에는 맑은 하늘 아래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자전거길 입구에는 폴리스라인처럼 노란색 통제선이 가로로 쳐져 있었다.
‘하천 범람으로 인한 출입 통제’
딱딱한 문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통제선 너머의 풍경은 처참했다.
아스팔트 위는 온통 시커먼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어디서 떠내려왔는지 모를 쓰레기들이 갈대밭과 벤치 다리에 뒤엉켜 있었다.
강변에 있던 운동 기구들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망했다.”
누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뭘 기록하라는 거야…”
며칠간의 기다림과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비가 그치면 모든 게 자동으로 정상화될 거란 바보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허탈함에 모두가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니요!”
준우가 멍하니 강변의 다리 기둥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기록해야 할 건 평온한 일상이 아니라, 바로 저 흔적일지도 몰라요.”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 다리 기둥에는, 이번 폭우가 어디까지 차올랐었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수위선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도시가 입은 상처. 그리고 저 상처가 어떻게 아무는지 지켜보는 것.”
준우가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우리가 기록해야 할, 진짜 ‘흐름’ 아닐까요?”
그의 말에,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계획이 틀어진 것이 아니었다.
도시는 그들에게, 계획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팀은 계획을 즉시 수정했다.
‘재난 이후의 회복 과정’을 기록하기로.
“재난복구 과정을 담는 게 의미는 더 있을지 몰라요. 우리가 원래 의도했던 일상은 아닐지 몰라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 희망을 담는 가치가 있는거니까요.”
멋들어진 말에는 고개가 중력을 이기지 못했다. 모두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서울로그는 기록의 방식을 바꿨다.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기로 했다.
팀은 근처 주민센터에서 나눠주는 노란색 우비와 목장갑을 받아 들었다.
“나는 빠지면 안되나.”
동의한 것을 후회하며 반대할 걸 싶은 팀원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일손을 보탰다.
“아, 허리야.”
카메라는 잠시 가방에 넣어두고, 그들은 흙탕물을 치우는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질척이는 진흙을 삽으로 퍼내고, 강물에 젖은 쓰레기들을 마대 자루에 담았다.
“와, 장난 아니야. 나 벌써 살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처음 해보는 고된 일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진심으로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흙을 퍼내며, 땀을 흘리며, 그들은 비로소 이 장소와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다.
“다들 정말 고생이예요.”
잠시 휴식하는 동안, 팀은 침수 피해를 입은 자전거 대여점 사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흙탕물에 잠겨 못 쓰게 된 자전거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닦고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 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저기 저 학생들이 와서 같이 흙 퍼주는 거 보니까… 다시 일어서야겠다 싶더라고. 사람이 희망이네, 결국.”
그의 말에, 팀원들은 서로의 흙 묻은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기록이란 때로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함께 땀 흘리는 시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근데, 우리가 모은 이 쓰레기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주라의 질문에, 현장을 지휘하던 공무원이 대답했다.
“태울 건 태우고, 재활용할 건 따로 분류하죠. 쓸만한 것들은 저기 성동구에 있는 새활용플라자로 가기도 하고요.”
‘새활용플라자.’
팀원들의 귀에 새로운 키워드가 꽂혔다.
중랑천에 남겨진 상처의 흔적은, 그들을 새로운 이야기로 이끌고 있었다.
팀원들은 봉사활동을 끝낸 이후 다음 날 모일 장소를 정했다.
바로 서울새활용플라자였다.
**
팀이 도착한 서울새활용플라자는 거대한 희망의 공장 같았다.
“와, 건물이 생각보다 예쁜데요?”
“그러니까요. 뭔가 칙칙할 줄 알았는데, 새활용이라는 이름처럼 좀 귀엽네요?”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건물 안으로 일행은 들어섰다.
그곳에서 버려진 플라스틱 병뚜껑이 알록달록한 색을 입고 아름다운 디자인 조명으로, 폐현수막이 세상에 하나뿐인 멋진 가방으로 재탄생하는 곳임을 직관하여 알 수 있었다.
팀원들은 그 과정을 보며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한 업사이클링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만, 저는 ‘이야기가 담긴 재료’라고 불러요.”
작가의 이야기를 인터뷰하고 있는 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는 끝이 아니라, 관점만 바꾸면 얼마든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거든요.”
그의 말은 팀의 심장을 관통하는 듯했다.
파편화된 기록들을 모아 ‘흐름’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자신들의 작업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호흡을 만드는 일과 같았다.
“끝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살다 보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
다음 날, 모두가 다시 디오라마를 만들기 위해서 모였다. 그때 익숙한 인영이 작업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신욱이었다.
“안녕하세요. 3팀, 서울로그팀원 여러분.”
그는 이전의 오만한 태도 대신,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고생 많습니다. 서울로그. 여러분.”
그가 티원들의 행색을 훑어보며 말했다.
“여러분 기록들, 쭉 봤습니다. 깊이는 있더라고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뜻밖의 칭찬에 팀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근데, 대중성은 없더라고요?”
그럼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그팀은 궁금하지 않은 그의 본론이 꺼내지기 시작했다.
“제 채널 구독자 수 봤죠? 내 편집 기술이랑, 여러분의 그 ‘깊이’를 합치면 어때요? 최종 결과물, 공동 이름으로 제출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때요?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서로 윈윈이잖아요?”
일종의 ‘흡수 합병’ 제안이었다.
팀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이름 아래에 두려는 교묘한 속셈이었는데, 이를 빠르게 느낀 준우가 불쾌감에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좋은 제안이지만.”
성지연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권신욱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우리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지키려는 건, 1등이라는 결과물이 아니거든요.”
지연의 말에 그는 반박했지만, 이어진 지연의 말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속도보다, 조회 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배웠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팀이랑은 길이 다른 것 같네요.”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권신욱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돌아섰다.
준우는 그런 지연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땐 ‘스펙’을 위해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더이상 아니었다.
자신들이 세운 ‘과정의 원칙’을 지키는, 진짜 리더의 모습을 봤다.
교수님이 안다면, 분명히 애제자의 타이틀을 강탈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교수님에게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밤에도 회의는 이어졌다.
팀은 오늘 얻은 영감을 디오라마에 녹여낼 방법을 논의했다.
“중랑천 모듈에는, 시간에 따라 수위가 오르내리는 푸른색 LED 바를 설치하죠. 우리가 봤던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는 거예요. 방법을 찾아서, 수위가 다를 때 다른 걸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찾아보고 반영해보죠.”
여러 의견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디오라마 바닥 일부는, 우리가 오늘 새활용플라자에서 본 것처럼 폐플라스틱을 녹여 만든 패널을 실제로 사용합시다. ‘회복’과 ‘순환’의 의미를 담아서요.”
준우는 ‘흐름’이라는 자신들의 핵심 서사에, ‘회복’과 ‘순환’이라는 새로운 레이어를 덧붙였다.
도시는 상처 입지만, 스스로를 치유하고 다시 흘러간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숲과 같은 형태로, 도시가 하나의 숲이라는 걸 상징하는 의미였다.
“흐음.”
팀원들은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서 미니어쳐를 제작했다.
그러다 보니 흙먼지가 묻은 옷과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밝고 환하게 웃으며 디오라마 위에 새활용 패널을 조심스럽게 붙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으로, 작은 도시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0화
프로젝트 마감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DDP 한편에 배정된 최종 전시 공간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거대한 공백이 오히려 팀원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와, 우리들의 공간이야?”
넓은 공간에 누군가는 환호와 설렘을 누군가는 걱정과 비관을 겪었다.
“이 공간을 가득 채워야 한다고?”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좁을가봐 걱정했는데.”
“우리집도 이 크기 였으면 좋겠다.”
3팀 서울로그의 공간은 더 이상 비좁은 작업실이 아니었다.
진짜 세상에 자신들의 기록을 펼쳐 보일, 거대한 무대였다.
“자, 그럼 우리 아기들 이사 한번 시켜볼까?”
정주라의 말에 팀원들이 웃으며 각자 애지중지 만들어온 디오라마 모듈을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했다.
“어 안돼!”
완벽이란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결말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과정 중에 다시 실수를 하고, 또 망연자실한 사람의 옆엔 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온 동료가 있었다.
“괜찮아, 그래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조금, 손 보면.”
“어? 으응.”
“그래도 낫잖아?”
역시 처음보단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에 생긴 상처가 모든 걸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팀원들이 기록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 각자 역할을 하며 자신의 위치를 찾아갔다.
“떨어져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웅장해보이네요.”
광화문의 웅장한 지붕, 명동의 깨알 같은 간판들, 성수동의 붉은 벽돌 공장, 해방촌의 아슬아슬한 경사로, 의릉의 고요한 소나무, 고시촌의 어두운 골목, 그리고 중랑천의 상처와 희망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예뻐요.”
“음. 그래요? 내 생각보단 좀.”
불멘의 소리로 이어질 말이 막혔다.
모두가 우선은 칭찬만 하기로 했다.
지난 몇 달간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거대한 서울을 이루는 모습에, 팀원들은 스스로도 감탄했다.
“와… 우리가 진짜 이걸 다 만들었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성지연이 전체 설치 일정표와 작업자별 안전 수칙을 나눠주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지금까진 잘 만들었으니까. 이제 잘 보여줘야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마지막까지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완수하겠다는 리더의 책임감이 묻어 있었다.
설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으쌰. 얍!”
각 모듈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수십 개의 케이블을 연결하고, 프로젝터의 각도를 맞췄다.
마치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건축가들처럼, 팀원들의 손길은 신중하고 정교했다.
-마감 D-3.
모든 물리적 설치가 끝나고, 마침내 첫 번째 통합 테스트를 하는 날이었다.
“다들 준비됐죠?”
서인호가 메인 컨트롤러 앞에 서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교차했다.
팀원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점등하겠습니다. 카운트다운 할게요.”
지연이 말했다.
-5,
-4,
-3,
-2…
-…1
“점등!”
인호가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거대한 디오라마 위로 생명의 빛이 들어올 것이라 모두가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완전한 혼돈이었다.
-파지지직!
명동의 간판 모듈에서 불꽃이 튀더니, 일부 LED가 경련하듯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이태원 모듈의 스피커에서는 속삭임이 아닌, 귀를 찢는 듯한 고주파음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최악은 프로젝션 매핑이었다.
도시의 혈류처럼 흘러야 할 ‘흐름’들은 좌표를 잃고, 허공과 벽지에 무의미한 낙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여의도의 ‘돈의 흐름’이 경복궁 지붕 위를 흐르고, 중랑천의 ‘회복의 흐름’은 DDP 바닥을 헤엄치고 있었다.
“안돼!”
“끄악...!”
그들이 몇 달간 쌓아 올린 서울은, 마치 거대한 오류 덩어리처럼 보였다.
“…….”
작업실은 침묵에 잠겼다.
마감을 사흘 앞두고 터진, 최악의 문제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케이블링을 잘못한 것 같아요. 전원 분배에 과부하가…”
인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니야, 인호 씨 잘못 아니에요. 프로젝터 좌표 계산을 제가 다시 확인 안 한 탓이에요.”
인호를 격려하며 정리안도 자책했다.
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서로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대로 끝나는 건가’하는 절망감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그때, 준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중랑천 갔을 때 어땠죠?”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계획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았잖아요.”
준우가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도 똑같아요.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뿐이에요. 다시 찾으면 돼요. 처음부터.”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팀원들의 눈빛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들은 수많은 위기를 함께 넘어왔다.
이것도 그 과정의 일부일 뿐이었다.
“맞아요. 지금 좌절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연이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
“인호 씨랑 리안 씨는 전원 및 데이터 파트 맡아주세요. 주라 씨랑 세라 씨는 외형 모듈에 손상 없는지 체크해주시고요. 대원 씨는 사운드 시스템 점검. 나머지는 전부 저랑 같이 케이블 다시 확인합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죠.”
그녀의 지휘 아래, 팀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샘 작업이 이어졌다.
수십 개의 에너지 드링크 캔이 쌓여갔고, 작업실 구석에서는 쪽잠을 자는 팀원도 있었다.
서로 예민해져 날카로운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누구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감 D-1.
멘토 배정후가 최종 점검을 위해 방문하기로 한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팀은 마침내 마지막 오류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됐다.”
인호가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팀원들은 환호성을 지를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로를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흐으으, 이번엔 제발!”
그들의 서울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회복해 낸 것이었다.
지쳐 잠든 팀원들을 깨운 것은 멘토 배정후의 조용한 발소리였다.
그는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나타났다.
“다들 고생이 많군요.”
그는 거의 완성된 디오라마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팀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훌륭하군요.”
처음 듣는 그의 칭찬에 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술적인 완성도나, 아이디어의 독창성.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는 디오라마 옆에 임시로 붙여놓은 설명 문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의 진짜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다.’
배정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진짜 모습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
“여러분들이 기록한 건 서울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마주한 서울의 수많은 단면들 중 하나일 뿐이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질책이 아닌, 마지막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기록자는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죠. 마지막까지 그 겸손함을 잃지 마세요.”
그의 말에, 준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모습.’ 어느새 그들은 스스로를 정답을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즉시 노트북을 가져와 문구를 수정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서울의 다양한 단면들을 기록했습니다.’
배정후는 수정된 문구를 보고,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없는 3팀에서 서울로그라는 이름을 가진 팀원은 이제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춘 기분이었다.
**
마침내 전시 첫날.
DDP 전시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합회 관계자들, 다른 프로젝트 팀들, 그리고 그들의 여정을 지켜봐 온 가족과 친구들이 와주었다.
준우의 눈에는,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교수의 모습도 보였다.
“예준우. 역시 훌륭하네.”
팀을 대표하여, 예준우와 성지연이 디오라마의 메인 전원 스위치 앞에 섰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연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저희 서울로그 팀이 기록한 서울의 불을 켜겠습니다.”
두 사람의 손이 함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거대한 디오라마 위로, 생명의 빛이 들어왔다.
광화문의 지붕 위로 은은한 달빛이, 강남의 빌딩 숲 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졌다.
명동과 신촌의 어떤 간판은 밝게 빛났고, 어떤 간판은 위태롭게 깜빡이다 쓰러졌다.
의릉과 한예대 사이에는 위태로운 레이저 경계선이 그어졌다.
“저때 기억난다.”
그때마다 팀원들도 각자 다르게 저장된 기억을 꺼냈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의 혈관처럼 수많은 빛의 ‘흐름’들이 디오라마 위를 흐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푸른빛, 자본의 붉은빛, 사람들의 따뜻한 노란빛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거대한 서울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와……”
관람객들의 입에서 낮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디오라마에 가까이 다가가, 해방촌의 속삭임을 듣고, 성수동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조합해보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만든 거 같아.”
저편에서, 권신욱이 홀로 그들의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나 질투가 없었다.
“...”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오늘까지 다들 정말 고생했어요!”
성공적인 전시 첫날이 끝나고, 소란이 잦아든 텅 빈 전시장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남았다.
“지연씨. 고생했어요.”
예준우와 성지연, 두 사람만이 남아 조용히 빛나고 있는 디오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났네요, 이제.”
준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아니요.”
지연이 디오라마를 보며 대답했다.
“끝이 아니죠. 서울은, 계속 흐를 테니까.”
그녀의 말에 준우가 미소 지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지연 씨.”
“다음 흐름은… 같이 보러 갈래요?”
그것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에 대한, 명백한 질문이었다.
성지연은 대답 대신, 디오라마 위 아직 모듈이 놓이지 않은 빈 공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은 지도상에서 서울의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름 모를 동네였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짧게 말했다.
“다음은, 여기.”
두 사람은 관람 동선을 거꾸로 걸으며, 아직 기록되지 않은 서울의 수많은 빈 공간들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불 꺼진 전시장 안.
그들이 만든 ‘작은 서울’은, 내일의 새로운 이야기를 꿈꾸며 밤새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경복궁 포함 및 오대 궁궐 촬영 허가’ 메일이 도착했다.
끝난 줄 알았던 프로젝트는 아직도 흐름을 이어가며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