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00년 만의 파업

 

이수문은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광화문 앞, 작열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수백 년 전에는 흙먼지 이는 길이더니.

어느새 시커먼 기름길이 되었다.

 

세상은 변했다.

강산도 변했다.

사람은 열 번도 더 넘게 변했다.

이수문만 그대로였다.

붉은 옷, 푸른 옷, 혹은 누런 옷을 입고.

손에는 의장용 칼을 든 채.

미동도 없이.

그렇게 600년.

 

“어머, 저 사람 진짜 안 움직여!”

“마네킹 아니야?”

“에이, 사람이야. 눈 깜빡이는 거 봤어.”

 

오늘도 똑같은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백만 번쯤 들은 레퍼토리.

차라리 마네킹이었으면 좋겠군.

이수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인간들의 언어는 소음이었다.

의미 없는 음절의 나열.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사람들은 이수문을 찍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은 ‘옷’을 찍는 것이다.

‘수문장’이라는 ‘상징’을 찍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600년 묵은 영혼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는 세종대왕의 어가를 노리던 자객의 칼끝을 막아선 적도 있었다.

달빛 아래 서슬 퍼런 칼날이 스치는 소리.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밤의 공기.

그때의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는.

웬 아이 하나가 신발에 막대 사탕을 비벼 붙이고 도망갔다.

끈적하고 달콤한 얼룩.

그걸 떼어내려 허리를 숙일 수도 없었다.

근무 중이었으니까.

수문장은 그런 존재였다.

나라의 존엄을 지키기도 하고.

아이의 사탕을 붙인 채 서 있기도 하는.

이 희극적인 간극이 이수문을 좀먹고 있었다.

 

지겨웠다.

모든 것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매연으로 뿌연 하늘.

조선 시대의 그 청명한 하늘은 어디로 갔나.

왕의 행차를 알리던 먼지구름도.

말발굽 소리도.

이제는 없었다.

대신 쇳덩어리들이 굉음을 내며 기름길을 달렸다.

 

이 모든 풍경이 이수문에게는 무의미했다.

덧없었다.

영혼이 바싹 마른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사막의 모래알처럼 푸석푸석해진 심장.

더는 못 하겠다.

아니, 더는 안 한다.

그래.

파업이다.

600년 만의 첫 파업.

정시 퇴근 시간이 되자, 그는 늘 그랬듯 동료와 교대했다.

동료 역시 그와 같은 존재.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교대하는 동료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은 묻고 있었다.

 

‘어디 가나.’

 

이수문은 시선으로 답했다.

광화문 너머, 빌딩 숲이 일렁이는 곳을 향해 아주 잠깐 눈을 돌렸다.

 

‘밖으로.’

 

짧은 침묵.

동료의 눈에 스친 것은 놀라움, 그리고 아주 희미한 부러움이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이수문의 자리에 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 사이엔 언어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발걸음의 방향이 달랐다.

늘 향하던 경복궁의 휴식처가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의 모습으로.

 

수백 년간 입었던 갑옷과 융복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갑주를 해제하자, 평범한 행인이 되었다.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무심한 표정의 잘생긴 남자.

그게 이수문의 ‘본체’였다.

물론,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일 뿐이지만.

 

---

 

“아니, 사장님. 정말 이 집으로 하시겠다고요?”

 

서촌의 낡은 부동산.

박 소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물었다.

모니터에는 허름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한옥 사진이 떠 있었다.

 

“네. 이 집으로 하죠.”

 

이수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 사장님처럼 젊고 번듯한 분이 왜….”

 

박 소장이 혀를 찼다.

 

“요즘 뜨는 오피스텔 좋은 데 많아요. 전망 좋고, 풀옵션에, 보안도 철저하고.”

 

이수문이 창밖을 쳐다봤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 하나가 보였다.

 

“하늘 아래 상자를 쌓아 올린 곳은 별로라서요.”

“네? 상자요?”

“잠깐 살다 버릴 것도 아니고.”

 

이수문의 말에 박 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수백 년은 살 것처럼 말하는 이 남자가 이상했다.

 

“그래도 여긴 너무 낡고… 보안도 취약하고….”

“제가 보안입니다.”

 

이수문의 한마디에 박 소장은 입을 다물었다.

농담 같지가 않았다.

 

“아니,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박 소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거기 터가 좀 안 좋아요. 전에 살던 사람들도 다 두 손 들고 나갔고.”

“왜요?”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나 뭐라나. 귀신 나올 것 같다고….”

 

말끝을 흐리는 박 소장을 보며 이수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박 소장은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괜찮습니다.”

 

이수문이 나직이 말했다.

 

“나보다 더한 귀신은 없을 테니.”

“네? 뭐라고요?”

“아닙니다. 계약하죠.”

 

이수문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올려진 주머니.

박 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낡고 빛바랜 엽전들이 가득했다.

 

“아니, 사장님. 장난하십니까? 이게 다….”

 

박 소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엽전들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눈부신 황금빛 가루가 되어 책상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 가루는 순식간에 하나의 숫자로 변했다.

박 소장의 휴대폰이 ‘띵’ 하고 울렸다.

 

[입금: 200,000,000원]

 

박 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휴대폰 액정과 이수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수문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수문이 박 소장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았다.

 

“참으로 편리한 주술이군요.”

“네? 주, 주술이요? 이거 그냥 은행 어플인데요!”

 

박 소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과거엔 이만한 재물을 옮기려면 장정 열은 족히 필요했는데.”

 

이수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이 모든 현대 기술이 마법이나 주술과 다를 바 없었다.

박 소장은 이 남자가 점점 더 무서워졌다.

 

“600년 치 퇴직금입니다.”

“네, 네? 퇴… 퇴직금이요?”

“조금 부족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시세에 맞는군요.”

 

이수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소장은 넋이 나간 채 그를 올려다봤다.

이 남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열쇠 주시죠.”

“아, 예! 예!”

 

박 소장은 허둥지둥 서랍에서 낡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공손하게 건넸다.

이수문은 열쇠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그가 임대계약을 마치고 부동산 문을 나서는 순간.

박 소장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귀신에 홀렸나….”

 

한옥은 생각보다 더 낡았다.

삐걱거리는 대문.

먼지가 뽀얗게 쌓인 툇마루.

잡초가 무성한 작은 마당.

하지만 이수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집안 곳곳에 희미하게 서린 세월의 흔적.

그리고 그 안에 잠든 기운들.

 

“오래 버텼군.”

 

이수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루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의 숨결이 바람이 되어 집안 전체를 훑었다.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뽀얗던 먼지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춤을 추듯 모여들었다.

이내 작은 구슬 하나로 뭉쳐졌다.

이수문이 손가락을 튕기자, 구슬은 창밖으로 날아가 햇살 속에 녹아 사라졌다.

삐걱거리던 문과 창문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시들었던 마당의 잡초들이 스르르 땅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파릇한 잔디가 고개를 내밀었다.

단 한 번의 숨결로, 600년 묵은 정령은 폐가를 아늑한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이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지키는’ 존재.

 

그 대상이 궁궐이든, 작은 한옥이든 상관없었다.

이제 이곳이 그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새로운 영역의 새로운 정보들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새로운 영역에 익숙해진 며칠 후.

한옥 대문 옆에 작은 나무 간판이 걸렸다.

 

[오후 네 시의 위로]

 

이수문이 직접 판 글씨였다.

그는 하루 중 오후 네 시의 빛을 가장 좋아했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하루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다정한 햇살.

그 햇살 아래서라면, 지친 영혼들도 잠시 쉬어갈 수 있으리라.

카페 내부는 단출했다.

그가 직접 고른 나무 테이블 몇 개.

오래된 서까래를 그대로 살린 천장.

그리고 그가 가장 아끼는 커피 머신.

인간의 음료 중, 커피는 꽤 마음에 들었다.

쓰고, 뜨겁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마치 삶의 축소판 같았다.

 

아마 20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서양 오랑캐라 불리던 상인이 임금께 진상한 검은 물.

신하들은 독이라며 기겁했고, 몇몇은 뱉어내기 바빴다.

그는 그때도 문을 지키고 있었다.

호기심에 한 모금 얻어 마셨다.

타버린 흙과 씁쓸한 규율의 맛.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짓이 없는 정직한 맛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수문은 종종 인간 세상의 커피를 즐겼다.

수백 년간 변해온 인간의 입맛 속에서도, 커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바에 서서 갓 볶은 원두를 갈았다.

고소한 향이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평화로웠다.

600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온전한 고요.

이걸 원했던 거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그때였다.

그의 시선이 카페 구석에 멈췄다.

벽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던 낡은 족자.

이전 주인이 버리고 간 물건이었다.

평범한 산수화.

그런데 그 족자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아주 희미한 기운.

자신과 동질의 것.

하지만 너무나 약해서, 곧 꺼질 촛불 같은.

 

‘…정령인가.’

 

산에 깃든 정령인지, 바위에 깃든 정령인지.

힘을 잃고 그림 속에 봉인된 모양이었다.

이수문은 잠시 족자를 응시했다.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양이었다.

그저 지켜볼 뿐.

이곳의 새로운 수문장으로서.

 

딸랑-

 

그때, 문에 달린 작은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다.

첫 손님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한 여인이었다.

스물 중반쯤으로 보이는.

조금은 지친 얼굴.

세상의 무게를 전부 짊어진 듯한 어깨.

 

“어서 오세요.”

 

이수문이 무심한 듯 말했다.

여인은 잠시 카페 안을 둘러봤다.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조금은 표정이 풀리는 듯했다.

 

“…커피 되나요?”

“네. 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수문은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인의 등 뒤.

그곳에 무언가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짙고, 탁한.

회색 그림자.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악의도, 원한도 아닌.

그보다 더 질기고 깊은 무언가.

 

슬픔.

절망.

그리고 체념.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여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족쇄처럼.

이수문은 600년 동안 수많은 인간을 봐왔다.

그들의 희로애락, 생로병사.

그들이 짊어진 업보와 원념까지.

하지만 저런 그림자는 처음이었다.

영혼을 좀먹는 안개.

생기를 빨아들이는 늪.

여인은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피곤한 직장인일 뿐.

하지만 이수문은 알 수 있었다.

저 그림자가 여인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에는 영혼까지 모두 집어삼킬 것이라는 것을.

이수문은 잠시 망설였다.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금기.

그저 커피나 내어주고, 조용히 보내면 그만이다.

나는 이제 수문장이 아니다.

평범한 카페 사장일 뿐.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곳은 나의 문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문은 문이다.’

 

반대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계약은 끝났다.’

‘지키는 자의 본분은 계약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파업을 선언하고 나온 첫날.

결국 또 ‘문’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다니.

결국, 자신은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

경복궁의 수문장에서.

이 작은 카페의 수문장으로.

그리고 눈앞의 저 여인은, 자신의 문으로 들어온 첫 번째 손님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600년 동안 몸에 밴 습성은 어쩔 수 없었다.

 

‘지키는’ 자의 본능.

 

위협을 감지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수문은 완성된 커피를 잔에 따랐다.

얼음이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가 카페 안에 울렸다.

그는 커피 잔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여인은 지갑을 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이수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본능이 먼저 튀어나왔다.

 

“손님.”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이수문은 여인의 등 뒤, 꿈틀거리는 회색 그림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꽤나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오셨군요.”

 

 

 

 

 

 

 

 

 

 

 

 

 

 

 

 

 

 

 

 

 

 

 

 

 

 

 

 

 

 

 

 

 

 

 

 

 

 

 

 

 

 

 

 

 

 

 

 

2. 첫 손님, 첫 위로

 

한다솔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꽤나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오셨군요.’

 

초면에 대뜸 할 소리는 아니었다.

사이비 종교의 새로운 포교 방식인가.

아니면 요즘 유행한다는 해괴한 플러팅인가.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네?”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온몸의 피로가 신경을 날카로운 바늘로 바꿔버린 듯했다.

피곤함에 절어 있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하루 종일 상사에게 시달렸다.

일주일 내내 야근에 시달렸다.

한 달 내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밤새 만든 기획안을 부장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감성이 부족하다’는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감성.

 

그 단어는 그녀의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영혼을 갈아 넣은 결과물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그녀의 영혼도 함께였다.

무거운 것을 짊어졌냐고?

짊어지다 못해 온몸이 삭아 내리고 있었다.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바위가, 등에는 거대한 맷돌이 얹힌 기분이었다.

온몸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던져진 말이었다.

 

무거운 것.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정확해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곡을 찔리니 오히려 반발심이 솟았다.

 

“제가 뭘 짊어졌는데요?”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방어기제였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수문은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 너머, 그곳에 달라붙은 회색 그림자를 향해 있었다.

 

‘600년 동안 수많은 원념과 악귀를 보았다. 하지만 저것은 달라. 분노나 증오처럼 뜨겁지도, 한이나 슬픔처럼 차갑지도 않은. 그저 눅눅하고, 끈질기고,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무(無)에 가까운 기운.’

 

끈적이는 타르처럼.

축축한 이끼처럼.

여인의 생기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빨아먹고 있는 저주 같은 것.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이수문이 말했다.

그의 무심한 말투가 한다솔의 신경을 더 긁었다.

 

“모르긴 뭘 몰라요. 기분 나쁘네요.”

 

그녀는 뒤돌아 나가려 했다.

이런 이상한 곳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텅 빈 방안에 쓰러져야 했다.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카페 안을 감도는 부드러운 공기가 그녀를 붙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깨를 감싸는 듯한 기묘한 감각.

갓 볶은 원두의 고소한 향기.

오래된 나무가 햇볕에 마르는 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이 문지방 앞에서 멈춰 선 것 같았다.

그녀가 등에 지고 온 도시의 번잡함, 회사의 압박감, 타인의 시선들이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들어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이수문을 보았다.

 

남자의 눈빛.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그 안에는 조롱도, 흑심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연못처럼 모든 것을 비추고 있을 뿐.

세월을 담은 눈빛.

인간의 희로애락을 수없이 지켜본 자의 눈빛.

 

한다솔은 그 눈빛에 압도당했다.

싸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나.

어차피 집에 가봤자 또다시 공허함만 마주할 뿐이다.

그녀는 창가 구석 자리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가방이 의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공간은 고요했다.

 

한다솔은 나가려던 발걸음 잡아끌고 창가 햇살이 잘드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멍하니 창밖을 보며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이수문은 커피 머신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원두를 갈지 않았다.

대신 바 아래쪽, 낡은 오동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그 어떤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오직 세월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그가 뚜껑을 열자, 희미하게 빛나는 마른풀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찻잎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궁궐 돌담에 이슬을 머금고 자라던 아주 작은 이끼였다.

봄볕 가장 따사로운 날.

오후 네 시의 햇살만을 골라 사흘간 말린 것.

왕의 근심도, 신하의 암투도 닿지 않는 곳.

그저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돌담의 숨결을 품은 이끼.

 

이수문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찻주전자에 넣었다.

그의 손길은 마치 귀한 약재를 다루는 의원처럼 신중했다.

뜨거운 물을 붓자, 맑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차의 향기가 아니었다.

오래된 돌이 햇볕에 달궈지는 냄새.

마른 흙을 적시는 소나기의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바람의 냄새였다.

 

한다솔은 여전히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차였다.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시켰는데요.”

“이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이수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한다솔은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이 카페는 모든 게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따뜻한 찻잔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향기 또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녀는 속는 셈 치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귓가를 맴돌던 이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풍경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초등학교 시절의 여름날 오후.

아빠의 낡은 자전거 뒤에 매달려 달리던 시골길.

 

이수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한다솔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기억이, 따스한 햇살 같은 황금빛 기운이 되어 피어올랐다.

그 빛은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은 회색 그림자를 향해 뻗어 나갔다.

차가운 안개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빛처럼.

회색 그림자는 그 빛에 닿자마자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빛을 두려워하는 어둠의 잔재처럼.

 

등 뒤로 느껴지던 아빠의 단단하고 넓은 등.

아빠가 흥얼거리던 촌스러운 유행가.

귓가를 스치던 유쾌한 바람 소리.

 

“아빠, 더 빨리!”

 

어린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져, 인마!”

 

아빠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모든 걱정은 아빠의 등 뒤에 두고 온 것 같았던 오후.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

그 기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실망과 좌절의 먼지 아래에 파묻어 버린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버겁고, 하루하루가 그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은.

 

주르륵.

 

한다솔의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눈물이었다.

따뜻했던 그 시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그렇게 순수했던 자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

 

이수문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의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기억의 햇살에 닿은 곰팡이처럼.

그것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며 희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뿌리가 너무 깊군.’

 

하지만 분명, 그림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한참을 울던 한다솔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그녀는 허둥지둥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깊게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정말로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그녀는 찻잔과 이수문을 번갈아 보았다.

이건 평범한 차가 아니다.

이 남자도 평범한 카페 사장이 아니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혹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뭐 용한 점집 같은 건가요? 타로나 사주 카페 같은?”

 

그런 곳이 아니고서야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수문은 대답 대신 마른행주로 찻잔을 닦고 있었다.

 

고요한 손놀림.

그는 찻잔의 물기 하나를 닦아내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운명을 보는 게 아니라,”

 

그의 시선이 한다솔에게 향했다.

 

“그저 묵은 마음을 닦아드릴 뿐입니다.”

 

한다솔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을… 닦아요? 그럼 심리 상담사 같은 건가요?”

 

그녀가 아는 단어 중 가장 비슷한 것을 골랐다.

이수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아주 희미한, 스쳐 지나가는 웃음이었다.

 

“사람들은 참 말을 어렵게 하네요.”

“네?”

“더러워진 그릇은 닦으면 그만이지, 그릇의 기원을 따질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도 원인을 알아야 해결을….”

“그릇에 묻은 흙이 어느 산에서 왔는지 안다고 해서 흙이 저절로 닦이나요?”

 

이수문의 반문에 한다솔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묵묵히 다른 찻잔을 닦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한다솔은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묵은 마음.

 

자신에게는 닦아내야 할 마음이 너무 많았다.

실망, 좌절, 체념, 그리고 분노.

 

“그럼 이 차는….”

“궁궐 돌담의 햇살을 말린 차예요.”

“네?”

 

한다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더더욱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이수문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찻잔을 닦을 뿐이었다.

한다솔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세상의 법칙과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남자는, 그 법칙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묘한 신뢰감을 느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감에 가까웠다.

이곳에 오면, 이 무거운 짐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기….”

 

이수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혹시… 아르바이트생 구하세요?”

 

이수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 600년의 수문장의 사명에 아르바이트생은 없었다.’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죠?”

 

단 두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한다솔은 잠시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편안해서요.”

“…….”

“여기에 있으면… 숨이 쉬어져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이곳이 아니면, 다시 숨 막히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이수문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한적한 툇마루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토록 원하던 평화였다.

하지만 이내 다른 그림이 보였다.

카페를 나서는 여인의 등 위로, 다시 짙어지는 회색 그림자.

도시의 소음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그림자에게 잠식당할 영혼.

인간과의 관계는 사양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 다시 보였다.

여인의 등 뒤,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회색 그림자.

 

‘저것을 완전히 닦아내려면, 한 잔의 차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곳, 내 영역 안에 있을 때, 저 그림자는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지키는 자의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경복궁의 문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가게 문으로 들어온 손님 하나를 지키는 것.

본질은 같았다.

이수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업은 아무래도 글렀군.’

 

“내일부터 나오세요.”

“네? 진짜요?”

 

한다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수문은 그녀를 잠시 훑어보았다.

 

“시급은 법대로 줄게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딸랑-

 

풍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카페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수문은 닦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카페 구석, 낡은 족자가 걸린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시선을 주자, 카페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더 깊고, 더 오래된 기운이 스며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공간.

그는 족자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네놈도 저 아이가 마음에 들었느냐?”

 

그의 목소리는 혼잣말이 아니었다.

분명한 대화의 시도였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낡은 그림일 뿐인 것처럼.

이수문이 막 돌아설 때였다.

 

스르륵-.

 

족자의 그림, 그 깊은 산세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메마르고 갈라진,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600년만의 소란스러움이군.”

 

이수문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의 한숨에는 체념과 약간의 성가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다시 행주를 집어 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600년 만의 고요한 휴식은.

아무래도 첫날부터 틀려 먹은 것 같았다.

 

 

 

 

 

 

 

 

 

 

 

 

 

 

 

 

 

 

 

 

 

 

 

 

 

 

 

 

 

 

 

 

 

 

 

3. 뚱냥이와 맺은 수상한 계약

 

한다솔의 첫 출근은 어설펐다.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는 것부터 헤맸다.

끈을 앞으로 묶어야 할지, 뒤로 묶어야 할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낯설고 어려웠다.

이수문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600년 묵은 석상처럼.

 

“저… 사장님. 뭐부터 하면 될까요?”

 

한다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수문은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쓸고, 닦으세요.”

“네!”

 

그녀는 의욕적으로 빗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마음이 앞선 탓일까.

빗자루질은 서툴렀고, 먼지만 풀풀 날렸다.

이수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차라리 내 숨결 한 번이 더 효율적이겠군.’

 

그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인간을 고용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이 서투름 또한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한다솔은 빗자루질을 잠시 멈추고 이수문을 훔쳐봤다.

바에 기대어 커피를 내리는 모습.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하지만 어딘가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을 주는 남자.

 

'잘생긴 건 인정.'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성격은 완전 별로인 것도 인정.'

 

어제는 무슨 신기라도 들린 듯 정곡을 찌르더니.

오늘은 그저 무심하고 까탈스러운 카페 사장일 뿐이다.

 

'하기야, 어제는 손님이었고 오늘은 직원이니까.'

 

그녀는 다시 빗자루에 힘을 주었다.

이 이상한 평온함의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까다로운 사장님은 감수할 수 있었다.

 

카페 안은 평화로웠다.

오후의 햇살이 낡은 마루 위로 길게 늘어졌다.

공기 중에는 커피 향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한다솔은 어느새 이 공간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는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이 카페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 그 힘을 잃는 듯했다.

그녀는 어제보다 훨씬 숨쉬기가 편했다.

마치 탁한 물속에 있다가 맑은 공기 중으로 나온 기분.

 

부르릉-!

 

그때, 카페 밖 골목길에서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다가왔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소음은 카페의 낡은 나무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굉음은 먼 나라의 소리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봤다.

오토바이는 분명 카페 바로 앞을 지나갔다.

이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인 걸까.

그녀는 다시 한번 이 공간의 기묘한 고요함을 실감했다.

 

“사장님, 저 고양이는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마루 한가운데에서 나른함을 표현하고 있는 거대한 고양이를 보며 물었다.

크림색 털에, 군데군데 치즈가 섞인 듯한 무늬.

몸집은 웬만한 소형견보다 컸다.

미동도 없이 잠에 빠진 모습은 흡사 거대한 털 뭉치 베개 같았다.

 

“왕자.”

 

이수문이 짧게 대답했다.

 

“왕자요? 아하하. 어울리네요. 아주 귀하신 몸 같아요.”

 

한다솔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왕자의 턱 밑을 긁어주려 했다.

 

“만지지 마세요.”

 

이수문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멈추게 했다.

 

“네? 아… 사람 손 타는 거 안 좋아하나 봐요.”

“성격이 까다롭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들어 있던 왕자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르르릉….

 

마치 땅 밑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아주 낮고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한다솔은 숨을 멈췄다.

고양이의 목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카페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몇 도는 떨어진 듯 서늘해졌다.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운데, 등골만 오싹했다.

 

왕자는 눈도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냥… 고양이가 아니구나. 여기는 고양이도 이상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말은 사실과 조금 달랐다.

정확히는, ‘인간’을 조금 귀찮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수문은 갓 내린 커피를 찻잔에 따랐다.

자신이 마실 것이었다.

 

600년 만의 파업 아닌 파업.

그는 이 여유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고요와 평화.

그것이 그가 원한 모든 것이었다.

그때였다.

모든 것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하고, 기름지고, 심드렁한 목소리.

 

“신령 나으리.”

 

한다솔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카페 안에는 자신과 이수문, 그리고 고양이뿐이었다.

 

“파업은 할 만 하신가?”

 

목소리는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있었다.

한다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시선은 마루에 누워있던 고양이, 왕자에게 고정되었다.

왕자는 여전히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털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챙그랑-!

 

한다솔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얀 사기 조각이 마루 위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깨진 찻잔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고… 고양이가….”

“시끄럽군.”

 

왕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천천히, 아주 귀찮다는 듯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금빛 눈동자가 이수문을 향했다.

 

“인간 계집 하나 들였다고 소란스럽기 짝이 없군.”

 

이수문은 깨진 찻잔 조각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다솔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니, 놀라지 마세요.”

“아, 안 놀라게 생겼어요 지금? 고양이가 말을 하잖아요!”

 

한다솔은 거의 비명을 질렀다.

이건 꿈일까.

아니면 어제 마신 그 이상한 차의 환각 증세일까.

 

“고양이라니. 무엄하다, 인간.”

 

왕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 거대한 몸이 움직이자, 낡은 마루가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이 몸은 인왕산의 주인이자, 산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산군(山君)이시다.”

“사, 산… 군?”

 

한다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아는 산군이란, 전래동화에나 나오는 호랑이였다.

하지만 눈앞에는 거대한 뚱냥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수문은 태연했다.

그는 새 찻잔에 다시 커피를 따르며 왕자에게 말했다.

 

“산군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인왕산이 좁아졌나?”

 

그의 말투에는 조금의 존대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동네 백수 형에게 말하는 듯한 투였다.

 

“흥. 나으리야말로 궁궐이 좁아져 이런 누추한 곳에 오셨는가?”

 

왕자가 비꼬듯 받아쳤다.

 

“요즘 신령계에 당신 흉보는 소리가 자자한 것, 아시는지.”

“누가 내 흉을 보던가.”

 

이수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북악의 도깨비들은 나으리가 600년의 의리를 져버렸다 하고.”

“그놈들은 원래 입이 가볍지.”

“한강의 용왕께서는 나으리가 왕실의 녹을 먹고 잠적한 파렴치라 하시더군.”

“그 영감은 아직도 내가 자기 비늘 훔쳐 간 걸로 알고 있나.”

 

왕자가 혀를 찼다.

 

“남대문의 터줏대감 귀신은 나으리가 노름판에서 자기 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매일 밤 곡을 하더이다.”

“그건 그자가 밑장 빼기를 하다 걸린 탓이지.”

 

이수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사직단의 토지신들은 나으리가 자기네 영역에 발도 안 붙이면서 세금만 꼬박꼬박 받아 간다고 투덜거리더군.”

“땅값 오른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받아야지. 엄연한 자릿세 아닌가.”

 

이수문의 뻔뻔한 대답에 왕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잠시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왕자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지. 나으리의 파업이 신령계 전체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질서라.”

 

이수문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없다고 한양의 기운이 뒤틀리기라도 하던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

 

이수문은 대화를 끊었다.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표시였다.

왕자는 그런 이수문을 잠시 노려보더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만두게. 이런 유희는.”

“유희라.”

“나으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 경복궁의 정문. 그곳이 나으리의 자리다.”

“600년이면 충분하지.”

 

이수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퇴직금은 내가 알아서 쓰겠네.”

 

왕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고집불통 영감은 설득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다솔은 이 비현실적인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사장님은 600살 먹은 신령.

뚱냥이는 인왕산의 산신령.

 

그리고 지금 그들은 파업과 퇴직금 문제로 다투고 있다.

차라리 지금 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적이 흘렀다.

왕자는 다시 마루에 드러누울 기세였다.

그때, 이수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바꾸는, 전혀 다른 제안이었다.

 

“왕자.”

“왜 부르나.”

“자네, 요즘 세상 구경은 좀 하나?”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다 그게 그거지. 상자 같은 건물들과 벌레 같은 인간들.”

 

왕자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이수문은 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상자였다.

상자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수문이 그 상자를 왕자의 코앞에 흔들었다.

상자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왕자의 코가 벌름거렸다.

두 귀가 쫑긋 섰다.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상자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꼬리가 바닥을 탁, 탁, 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계심이나 분노의 표현이 아니었다.

기대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왕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인간들이 ‘츄르’라고 부르는 물건의 최상급품이지.”

 

이수문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달빛만 받고 자란 참치를 손으로 직접 으깨 만들었다더군.”

“다, 달빛… 참치…?”

“이쪽은 유기농 목초만 먹고 자란 닭의 가슴살이다.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며 키웠다고 하더군.”

“크, 클래식…?”

 

왕자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산군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간식에 정신이 팔린 한 마리 고양이일 뿐이었다.

한다솔은 이 기막힌 광경을 입을 벌린 채 보고 있었다.

산신령을 츄르로 유혹하는 전직 수문장이라니.

 

“자네에게 이걸 무제한으로 공급하지.”

 

이수문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했다.

왕자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조건이 뭔가.”

“정보.”

“정보?”

“그래. 이 서촌 일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리고 신령계의 모든 동향.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나에게 보고하게.”

 

이수문의 눈이 빛났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카페 사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새로운 영역을 파악하고, 그 안의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는 수문장의 모습이었다.

경복궁을 지킬 때와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정보는 현대의 성벽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왕자는 잠시 고민했다.

산군의 자존심과, 혀끝을 감도는 환상의 맛 사이에서.

그의 내적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츄르 상자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하고 짭짤한 향기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염탐꾼 노릇을 하란 말인가.”

“말이 좀 심하군.”

 

이수문이 상자를 뒤로 슬쩍 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엔 그런 걸 ‘정보 브로커’라고 부르지.”

“정보… 브로커….”

 

왕자의 눈이 다시 한번 츄르 상자로 향했다.

 

“계약 조건이 너무 박하지 않은가?”

 

그가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정보의 가치에 비해 보상이 너무 적다는 말이다.”

“그럼 이것도 추가하지.”

 

이수문은 바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 창가 햇살 제일 잘 드는 곳에, 자네 전용 벨벳 방석을 하나 놔주겠네.”

“…….”

“색은 뭘로 할 텐가. 왕실을 상징하는 붉은색? 아니면 자네 털과 잘 어울리는 금색?”

 

왕자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최고급 츄르에, 전용 벨벳 방석까지.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산군의 체면보다 실리가 중요했다.

 

왕자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염탐꾼보다는 훨씬 듣기 좋았다.

뭔가 전문적이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군.”

 

왕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계약 성립이다.”

 

이수문은 말없이 츄르 상자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왕자는 지체 없이 상자를 앞발로 찢었다.

그리고는 튜브 하나를 꺼내 짜는 족족 게 눈 감추듯 핥기 시작했다.

쪽쪽 소리를 내며 츄르를 빠는 모습은, 인왕산의 군주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한다솔은 조용히 빗자루를 들고 깨진 찻잔 조각을 쓸어 담았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 카페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오늘의 상황을 정리했다.

 

하나. 내 사장님은 600살 먹은 파업 신령이다.

둘. 가게의 뚱냥이는 인왕산의 산신령이다.

셋. 그들은 방금 최고급 고양이 간식을 걸고 정보 브로커 계약을 맺었다.

넷. 나는 이 모든 광경을 시급 만 원에 직관하고 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일지도.’

 

한다솔은 깨진 찻잔 조각을 쓰레받기에 담으며 생각했다.

적어도 전 직장보다는 훨씬 흥미진진했다.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이 황당함에 밀려 조금 더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츄르 한 봉지를 다 비운 왕자가 만족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4. 성곽의 이끼차

 

딸랑-

 

오후 네 시의 위로.

고요를 깨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섰다.

한다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완벽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네이비색 정장.

넥타이는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매여 있었다.

구두는 거울처럼 반짝였다.

갓 서른을 넘겼을까.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여유로운 미소.

누가 봐도 성공한 엘리트의 표본.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르릉.

 

목 깊은 곳에서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웬 비린내 나는 족제비 한 마리가 기어 들어왔군.”

 

왕자가 털 사이로 중얼거렸다.

한다솔은 그 소리에 움찔했다.

 

“쉿! 손님 듣겠어요.”

“흥. 저놈은 제 심장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릴 게다.”

 

왕자가 코를 킁킁거렸다.

 

“최고급 향수 냄새 뒤에 숨겨진, 지독한 겁쟁이의 냄새.”

 

금빛 눈이 가늘게 뜨였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다시 감겼다.

 

“재수 없는 냄새로군.”

“아이스 에스프레소, 넉 잔 분량으로 가능할까요.”

 

목소리마저 좋았다.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

한다솔은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같은 인간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다시 고개를 드는 기분이었다.

자신과 눈앞의 남자를 비교하는, 지긋지긋한 습관.

 

“네. 잠시만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았다.

이수문은 바 안쪽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갑옷.

그 갑옷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그 틈새로 아슬아슬하게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

빛은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수명이 다한 등불처럼.

남자는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익숙하게 노트북을 펼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현란하게 오갔다.

하지만 이수문은 놓치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 남자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불안의 증거.

 

‘가면이군.’

 

이수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600년 동안 수많은 얼굴을 보았다.

왕의 근엄한 얼굴 뒤에 숨은 두려움.

역적의 충성스러운 얼굴 뒤에 숨은 야망.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하지만 저 남자의 가면은 조금 달랐다.

타인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곧 부서지겠군.’

 

저런 종류의 가면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기 마련이다.

한다솔이 이수문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에스프레소….”

“제가 할게요.”

 

이수문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어제와 같은 오동나무 상자를 꺼냈다.

한다솔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 그건….”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마셨던 그 차인가요?”

 

이수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궁궐 돌담 이끼고, 이건 성곽 이끼예요.”

“네? 그게 다른 거예요?”

“뿌리내린 곳이 달라요.”

 

이수문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왕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자란 거랑, 이름 없는 병사들의 피를 머금고 자란 건 다를 수밖에 없죠.”

 

그의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한다솔은 더 묻지 못했다.

그저 어제와는 다른, 더 묵직하고 거친 기운의 찻잎을 바라볼 뿐이었다.

600년 된 한양도성 성곽.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돌 틈.

여름의 가장 끈질긴 장맛비를 온몸으로 견뎌낸 이끼.

그것을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비바람을 견뎌낸 인고의 시간.

그리고 달빛이 스며든 밤의 고요함.

그 두 가지를 모두 품은 찻잎이었다.

 

이수문은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카페 안에 흙냄새와 돌 냄새가 섞여 퍼져나갔다.

비 온 뒤의 성곽길을 걷는 듯한 냄새였다.

한다솔은 그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수문은 찻잔 두 개와 보온병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는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가게 좀 봐주세요.”

“네? 어디 가시게요?”

“잠깐 산책 좀 하려고요.”

 

그는 망설임 없이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남자의 이름은 김민준이었다.

대기업 전략기획팀 신입사원.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스펙의 소유자.

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시험장이었다.

매일매일, 자신의 무능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들키면 안 돼. 내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들키면 끝장이야.’

 

악몽은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차라리 꿈속에서 추락하는 편이, 현실의 불안보다 견디기 쉬웠다.

 

“손님.”

 

나직한 목소리에 김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수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주문하신 커피는 아니지만.”

 

이수문은 보온병과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김민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하지만 그는 불쾌감을 드러내는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완벽한 비즈니스용 미소였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에스프레소가….”

“잠깐 바람 쐬러 가시죠.”

 

보온병과 찻잔을 다시 챙기며 말하는 이수문.

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김민준은 당황했다.

업무는 쌓여있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기묘한 분위기의 카페 사장을 거스를 수 없었다.

마치 오랜 상사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과 비슷했다.

 

“…어디를요?”

“가보면 아실 거예요.”

 

이수문은 먼저 몸을 돌려 카페 문을 나섰다.

김민준은 잠시 망설였다.

노트북 화면에는 빼곡한 보고서가 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카페를 벗어나자, 도시의 소음이 김민준을 덮쳤다.

자동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김민준은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사장님은… 카페 말고 다른 일도 하십니까?”

 

마치 거래처 사람을 탐색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이수문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문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네? 문이요? 가게 문 말입니까?”

 

김민준은 되물었다.

이수문은 대답 대신, 길 건너편 낡은 대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모든 문을요.”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범했으나, 김민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감각.

자신이 아는 세상의 법칙 밖에 있는 사람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오르막길을 올랐다.

숨이 조금씩 가빠왔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 도착했다.

낙산공원 성곽길이었다.

발아래로 서울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와….”

 

김민준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수만 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가 다니는 회사의 빌딩도 보였다.

가장 높고, 가장 밝게 빛나는 건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저희 회사입니다. 얼마 전에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서….”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아주 짧았다.

곧바로 불안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프로젝트, 사실은 내가 한 게 아니야. 선배들이 다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 모두가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빈껍데기인데.’

 

그때, 옆에 선 이수문이 입을 열었다.

 

“흠집투성이네요.”

 

이수문이 성곽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어떤 돌은 색이 바랬고, 어떤 돌은 이가 빠졌어요. 완벽한 돌은 하나도 없죠.”

 

그의 시선이 김민준에게 향했다.

 

“손님처럼요.”

 

김민준은 그 말에 얼굴이 굳었다.

자신의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수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저 빛나는 것들만 보느라, 이 돌들의 흠집은 보지 못하죠.”

“…….”

“하지만 이 성곽이 수백 년을 버틴 힘은, 저 반듯함이 아니라 이 흠집들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흠집에서… 힘이 나옵니까?”

“깨지고, 금이 갔기에 서로 더 단단히 기댈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의 말은 김민준이 평생 믿어온 세계를 흔들었다.

완벽해야만 가치 있다고.

흠집은 숨겨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왔다.

 

“저 빛이 아니라,”

 

그의 시선은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낡고 투박한 돌을 향해 있었다.

 

“저 빛을 받치고 있는 낡은 돌을 보세요.”

 

김민준은 이수문의 시선을 따라 성곽의 돌을 보았다.

검고, 울퉁불퉁하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돌.

어떤 것은 이가 빠져 있었고, 어떤 것은 금이 가 있었다.

화려한 야경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저 돌 하나는 특별할 게 없죠.”

 

이수문이 말을 이었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고. 어떤 건 깨지기까지 했어요.”

 

그의 목소리는 야경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저것들이 수백 년을 버티며 함께 서 있었기에, 이 도시가 있는 겁니다.”

 

김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수문은 들고 온 보온병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까 그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드셔보세요.”

 

김민준은 멍하니 찻잔을 받아들었다.

찻잔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차가워진 손을 녹였다.

향긋한 흙냄새.

비에 젖은 돌의 냄새.

그는 홀린 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법이 시작되었다.

눈앞의 야경이 흐려졌다.

대신, 잊고 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함께 남아주던 대학 동기들의 얼굴.

 

“민준아, 이 부분은 내가 맡을게. 넌 다른 거 먼저 해.”

 

취업 준비 시절, 면접에서 떨어지고 술을 사주던 선배의 얼굴.

 

“야, 임마. 그 회사가 너를 못 알아본 거지. 뭘 울고 그래.”

 

처음 입사해서 실수를 연발했을 때, 몰래 자신의 잘못을 덮어주던 상사의 얼굴.

 

“김민준 씨, 이건 이렇게 처리하는 게 더 나아.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말고.”

 

야근하고 들어온 아들을 위해, 밤늦게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의 뒷모습.

 

“아들, 밥은 먹고 다녀야지.”

 

자신이 이룬 모든 성공.

그것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 모를 성곽의 돌처럼.

자신을 묵묵히 받치고 있었다.

자신은 그 돌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직 화려한 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 빛을 혼자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주르륵.

 

김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차가운 밤바람에 눈물이 금세 식었다.

하지만 마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했다.

가면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더 이상 완벽한 신입사원 김민준이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진, 서툴고 부족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편안했다.

카페로 돌아왔을 때, 김민준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가면처럼 붙어있던 미소는 사라졌다.

대신 편안하고 부드러운, 진짜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차 값과… 산책 값은 얼마를 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수문은 대답 대신 바를 가리켰다.

 

“계산은 아르바이트생에게 하시면 됩니다.”

 

그는 끝까지 무심했다.

김민준은 작게 웃고는, 한다솔에게 다가갔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하지만 남자의 눈빛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날카롭고 사람을 평가하는 듯한 시선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온기만 남아 있었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그는 카드를 내밀며 나직이 말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네? 뭐가요?”

“너무 무례하게 주문했죠. 에스프레소 넉 잔이라니. 지금 생각하니 진상 손님이었네요.”

 

그는 멋쩍게 웃었다.

완벽한 갑옷을 벗어 던진,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다솔은 자신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아니에요. 그만큼 피곤하셨던 거겠죠.”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조금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타인의 완벽함이 아닌,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그가 떠나고, 카페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김민준은 회사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그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마침 팀장이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라도 혼자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의 무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팀장님. 솔직히 이 부분은 제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어렵습니다.”

 

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늘 완벽하던 신입의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김민준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시,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불안의 떨림이 없었다.

 

---

 

한다솔은 찻잔을 닦으며 이수문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뭐가 말이죠?”

“그 사람한테 그 차가 필요하다는 걸요.”

 

이수문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오래 서 있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때, 왕자가 어슬렁거리며 바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 거대한 몸집으로는 믿기지 않는 날렵함이었다.

 

“신령 나으리.”

“이번엔 또 왜.”

 

이수문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가게 안 공기가 아주 시궁창이 됐군. 인간의 불안만큼 역한 것도 없지.”

 

왕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입가심할 것이 필요하네.”

 

그의 금빛 눈이 이수문의 손을 향했다.

츄르를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수문은 피식 웃으며 최고급 참치 츄르 하나를 꺼냈다.

 

“정보는 가져왔고?”

“흥. 내가 공짜로 얻어먹을 것 같나.”

 

왕자가 츄르를 핥으며 웅얼거렸다.

 

“방금 나간 저놈, SKT 본사 타워에서 일하더군. 거기 터가 요즘 뒤숭숭하다는 소문이 있어.”

“뒤숭숭하다니.”

“을지로 지하에 묻힌 늙은 지네 요괴가 심술을 부린다는군. 전산망을 갉아먹는 게 취미라지. 아마 저놈도 조만간 된통 고생할 게야.”

 

산군의 정보망은 서울 전역을 꿰뚫고 있었다.

이수문은 말없이 츄르 하나를 더 꺼내 왕자 앞에 놓아주었다.

정보 값이었다.

그때였다.

카페 구석, 낡은 족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

 

“…저 아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군.”

 

한다솔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이수문은 태연했다.

그는 족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

 

족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처럼.

 

“…완벽하고 싶었으나, 결국 무너져 내렸던…”

 

 

 

 

 

 

 

 

 

 

 

 

 

 

 

 

 

 

 

 

 

 

 

 

 

 

 

 

 

 

 

 

 

 

 

 

 

 

 

 

 

5. 광장시장의 녹두전과 할머니

 

딸랑-

맑은 풍경 소리가 무색했다.

카페의 고요를 깨고 들어선 것은 두 사람이었다.

아니, 두 개의 태풍이었다.

 

“그러니까 그깟 그림 나부랭이 그려서 밥이 나오냐고, 쌀이 나오냐고!”

 

지팡이를 쥔 할머니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주름진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림 나부랭이 아니라고! 내 꿈이라고!”

 

스물 중반쯤으로 보이는 손녀가 악을 쓰듯 맞받아쳤다.

그녀의 얼굴은 울음과 분노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한다솔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등 터진 새우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꿈? 꿈이 밥 먹여주냐? 너는 아직도 철딱서니가 그렇게 없어?”

“할머니야말로 내 인생에 상관 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놈의 기집애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대기업 들어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벌써 잊었어?”

 

할머니의 목소리에 배신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걸 네 발로 차고 나와? 고작 그딴 짓 하려고?”

“고딴 짓 아니야! 그리고 거기서 나는 매일 죽어가고 있었다고!”

 

손녀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죽어? 요즘 애들은 편한 걸 몰라서 저런 소릴 해! 배가 불렀어, 배가!”

 

서로의 진심은 가시가 되어 날아갔다.

상대의 가슴에 꽂히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두 사람의 고성 사이로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오갔다.

서로의 가슴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말들.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에,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비수 같은 말들이었다.

이수문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할머니의 어깨에는 ‘걱정’이라는 이름의 회색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손녀의 등에는 ‘상처’라는 이름의 검은 가시가 돋아 있었다.

두 그림자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정작 그 주인들의 마음은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꿈’과 ‘현실’.

 

그녀 역시 그 양쪽 저울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다 결국 부서졌었다.

부장님이 던졌던 ‘감성이 부족하다’는 말.

할머니가 말하는 ‘철딱서니’와 무엇이 다른가.

자신의 등을 짓누르는 회색 그림자가 저들의 고성(高聲)에 공명하듯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어깨가 다시 무거워졌다.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르르릉.

 

목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시끄러운 암컷들이군.”

 

왕자가 털 사이로 중얼거렸다.

 

“인간 세상은 원래 저리 요란한가?”

 

한다솔은 왕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흥. 저러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겠지.”

 

금빛 눈이 가늘게 뜨였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다시 감겼다.

한다솔이 왕자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자님, 그래도 손님인데….”

“산군의 낮잠을 방해한 죄는 신령도 벌을 받는 법이다, 인간.”

 

왕자가 눈도 뜨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저 둘,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군.”

“네? 저주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질기고 질 낮은 저주 말이다.”

 

왕자가 혀를 찼다.

 

“걱정으로 상대를 옭아매고, 꿈으로 상대를 베려 하는군. 인간의 가족이란 참으로 기묘해.”

 

한다솔은 그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고양이가 가족 상담을 하는 듯한 이 상황이 비현실적일 뿐이었다.

 

“너, 당장 그 화실 때려치워!”

“싫어! 죽어도 싫어!”

“이게 진짜…!”

 

할머니가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손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두 분.”

 

나직하지만,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수문이었다.

그는 어느새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기운을 많이 쓰신 것 같으니.”

“…….”

“잠시 앉아서 목이라도 축이시죠.”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잔잔하지만 단호한 힘.

들끓던 할머니의 분노도, 폭발 직전이던 손녀의 울음도 순간 길을 잃었다.

두 사람은 홀린 듯,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물론,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였다.

이수문은 바로 돌아섰다.

한다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뭐 드릴까요? 어제 그… 돌담 이끼 차?”

 

이수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제와는 다른 오동나무 상자의 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에 싼 무언가가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맷돌의 돌가루처럼 보이는 아주 고운 가루였다.

 

“이건… 뭐예요?”

“광장시장의 시간입니다.”

“네? 시장… 시간이요?”

 

한다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 년 된 녹두 맷돌에서 백 년 동안 쌓인 가루를, 새벽 첫이슬로만 반죽해 말린 것.”

 

그의 설명은 여전히 시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기름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고된 하루의 위로가 함께 배어있죠.”

“저 맷돌이 처음 시장에 들어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이수문이 나직이 덧붙였다.

한다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백 년도 넘었다면서요?”

“그땐 지금처럼 번잡하지 않았죠.”

 

이수문의 시선은 아득한 과거를 보고 있었다.

 

“갓을 쓴 상인과, 짚신을 신은 아낙네들이 오가던 곳.”

“…….”

“그때나 지금이나, 저 맷돌은 고된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었고 그 세월이 이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의 말에, 평범한 가루가 역사의 무게를 지닌 유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수문은 그 가루를 찻주전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뜨거운 물을 붓자, 기이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녹두전의 고소한 냄새.

비 오는 날의 눅눅한 공기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오래된 시장 골목의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찻잔 두 개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문하신 건 아니지만.”

 

그는 할머니와 손녀 앞에 각각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더 필요하실 겁니다.”

 

할머니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리가 뭘 시켰다고 이래.”

“서비스입니다.”

 

이수문은 짧게 답하고 바로 돌아섰다.

손녀는 홧김에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마법은 다시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눈.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눈앞에 앉은 손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대들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성인 여자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앙칼지게 쏘아붙이던 목소리는 혀 짧은 옹알이로 변했다.

뾰족하던 얼굴선은 젖살이 오른 통통한 뺨이 되었다.

세 살배기 아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작은 아이였다.

 

“함미! 함미!”

 

서툰 발음으로 자신을 부르며 세상 전부인 듯 웃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준 삐뚤빼뚤한 그림이 그려진 과자를, 작은 손으로 쪼개어 자기 입에 먼저 넣어주던 아이.

밤새 열이 펄펄 끓을 때, 아픈 와중에도 자기 손을 놓지 않고 잠들었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비바람을 막아주고 싶었던, 자신의 전부였던 작은 존재.

언제 이렇게 커서, 자신에게 가시 돋친 말을 하게 된 걸까.

 

아니.

내가 언제부터 저 아이의 꿈을 ‘그림 나부랭이’ 따위로 부르게 된 걸까.

할머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녀의 눈.

그녀 역시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카페의 아늑한 공간이 사라졌다.

시야가 지글거리는 기름 연기로 가득 찼다.

훅, 끼쳐오는 열기.

귓가에는 시끄러운 시장의 소음이 맴돌았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젊은 여자.

지금의 할머니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팽팽하고 고운 얼굴.

 

하지만 그 얼굴엔 고단함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기름때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쉴 새 없이 녹두전을 부쳐내고 있었다.

거칠고 갈라진 손.

뜨거운 철판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

 

“우리 강아지, 오늘 유치원에서 재밌었어?”

 

어린 자신을 보며 웃는 그 얼굴 뒤로, 고된 삶의 무게가 보였다.

자신에게는 늘 따뜻한 밥과 새 옷을 사주면서.

정작 할머니는 닳아빠진 신발 하나를 몇 년이고 기워 신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우리 강아지는 그림 그리고 싶은 거 마음껏 할 수 있겠지.’

 

젊은 할머니의 혼잣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의 첫 크레파스는, 할머니의 수십 장짜리 녹두전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을.

손녀의 뺨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환상이 걷혔다.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서로를 보는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분노와 서운함이 있던 자리.

그곳에 그리움과 미안함이 차올랐다.

서로의 시간과 마주한 두 사람은, 깨달았다.

표현 방식이 서툴렀을 뿐.

그 뿌리에는 누구보다 깊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입을 연 것은 할머니였다.

 

“……미안하다.”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히 카페에 울렸다.

손녀가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늘… 늘 너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

“고생 같은 건 모르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가 살아보니 세상이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너도 나처럼 고생할까 봐. 그래서 그랬다. 내가 못나서.”

 

주르륵.

손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할머니의 주름지고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손녀의 손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굳은살이었다.

방금 전, 환상 속에서 보았던.

뜨거운 철판 앞을 떠나지 못하던 젊은 할머니의 손에 박여 있던 바로 그 굳은살.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그녀의 손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을 키워낸 시간의 증거였다.

손녀는 그 굳은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 어떤 말보다 뜨거운 진심이 오갔다.

 

“아니야, 할머니.”

“…….”

“내가 미안해. 할머니 마음도 모르고…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아니다. 내가… 내가 늙어서 고집만 늘었다.”

“아니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다.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온기가, 지난 시간의 모든 오해와 상처를 녹여내고 있었다.

한다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애써 마른행주로 깨끗한 테이블을 한 번 더 닦았다.

이수문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늘 그 자리에 서 있던 성곽의 돌처럼.

모든 비바람을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처럼.

한참 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손녀의 얼굴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할머니가 이수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 아주 고소하고 맛있었어.”

 

손녀도 그 옆에서 따라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팔짱을 꼭 낀 채 카페를 나섰다.

 

딸랑-

 

이번에는 풍경 소리가 제자리를 찾은 듯 맑게 울렸다.

카페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한다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영화 한 편 본 것 같아요.”

 

그때, 바 위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툭 하고 올라왔다.

왕자였다.

 

“신령 나으리.”

 

그는 이수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군.”

“피해?”

“저 인간들의 소음에 내 고귀한 정신이 오염되었다. 오후 네 시의 햇살도 저들 때문에 탁해졌어.”

 

왕자는 아주 당당하게 앞발을 내밀었다.

츄르를 달라는 명백한 요구였다.

이수문은 피식 웃으며, 말없이 최고급 닭가슴살 츄르 하나를 꺼내 주었다.

왕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핥기 시작했다.

소란이 끝난 뒤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왕자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흥. 인간들이란 참으로 번거로운 족속이군.”

 

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까칠함이 묻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부드럽게 들렸다.

그때였다.

카페 구석, 낡은 족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

 

“…가족이란….”

“…….”

“참으로 어렵고도… 따스한 것이로군.”

 

그 목소리에는 아주 희미한, 그리움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날 밤.

모든 손님이 떠나고, 한다솔도 퇴근한 뒤였다.

카페 안은 어둠에 잠겼다.

이수문은 닦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구석의 족자로 향했다.

오직 달빛만이 낡은 그림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족이라.”

 

그가 나직이 운을 뗐다.

족자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수문은 알고 있었다.

그 안의 존재가 듣고 있다는 것을.

긴 침묵이 흘렀다.

찻잔에 남은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마침내 이수문이 입을 열었다.

600년의 세월 속에 단단히 묻어두었던 이야기.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가장 깊은 곳의 흉터.

 

“나에게도….”

 

그의 목소리는 밤의 공기처럼 낮고 서늘했다.

 

“지키지 못한 가족이 있었네.”

 

 

 

 

 

 

 

 

 

 

 

 

 

 

 

 

 

 

 

 

 

 

 

 

 

 

 

 

 

 

 

 

 

 

 

 

 

 

6. 텅 빈 캔버스와 문래동의 밤

 

딸랑-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지만, 풍경은 제 할 일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한 여자였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카페 안의 모든 색이 한 톤 낮아지는 듯했다.

공기마저 잿빛으로 물드는 기분.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여자는 스물 후반쯤 되어 보였다.

물 빠진 잉크 같은 검은 머리칼.

오래 입어 닳아버린 무채색의 옷.

무엇보다, 그녀의 눈.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닌.

텅 비어버린 공허.

마치 색을 잃어버린 흑백 사진 같았다.

 

“어서 오세요.”

 

한다솔이 애써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여자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느릿하게 걸어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세상의 소리를 흡수해버리는 듯했다.

한다솔이 물수건을 들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손님….”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한다솔이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그때,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소용없다, 인간.”

“네?”

“저 여자는 지금 귀가 먼 상태다. 제 마음속 소음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게야.”

 

왕자의 말대로였다.

여자는 바로 앞에서 말을 거는 한다솔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르릉.

 

금빛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건 또 무슨 냄새지.”

 

왕자의 목소리는 잠이 덜 깬 듯 낮게 잠겨 있었다.

 

“먼지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된 종이 냄새 같기도 하군.”

 

한다솔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왕자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냄새로군.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다시 머리를 앞발에 묻었다.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이수문은 말없이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여인의 등 뒤에 달라붙은 잿빛 안개.

한다솔이 짊어졌던 슬픔의 그림자나, 김민준이 둘렀던 불안의 가면과는 달랐다.

그것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없는’ 것에 가까웠다.

모든 색과 소리와 감정이 빨려 들어가는 작은 블랙홀.

영혼의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상태.

그 자체가 하나의 텅 빈 캔버스였다.

한다솔이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주문… 하시겠어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한다솔은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감성이 부족하다.’

 

부장의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부정당했던 날.

영혼을 갈아 넣은 기획안이 쓰레기통에 처박혔을 때.

자신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지고, 오직 잿빛 절망만이 남았던 그때.

그녀는 여자에게서 자신의 가장 아팠던 조각을 보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동질감을 느끼듯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여자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이 한다솔을 잠시 스쳤다.

 

“…아무거나요.”

“네?”

“그냥… 제일 독한 걸로 주세요. 잠이 확 깰 만한 걸로.”

 

목소리마저 빛이 바래 있었다.

한다솔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수문에게 돌아왔다.

 

“사장님… 어떡하죠?”

 

이수문은 대답 대신, 앞치마를 풀었다.

그리고는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가게 좀 봐주세요.”

 

늘 듣던 말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 뒷말이 예상되지 않았다.

이수문은 여자에게로 걸어갔다.

 

“손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저와 같이 가실 곳이 있습니다.”

“…….”

“주문하신 것보다, 더 독한 것을 보여드리죠.”

 

그의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여자는 반박할 기력조차 없는 듯,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카페를 나섰다.

남겨진 한다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왕자를 쳐다봤다.

 

“왕자님, 이번엔 또 어디 가시는 걸까요?”

 

왕자가 눈도 뜨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저리 텅 비었으니, 채우러 가는 거겠지.”

“채워요?”

“시끄러운 걸로.”

 

왕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택시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수문은 창밖을 볼 뿐이었고,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여자, 서연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이수문은 창밖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부서지는 것을 봐야 하니까요.”

“네?”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가장 치열한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법입니다.”

 

서연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혼돈은 그저 두려움일 뿐이었다.

이수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도시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서연이었다.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듣던 화가.

지금은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붓 하나 들지 못하는 겁쟁이.

택시가 멈춘 곳은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어둡고 좁은 골목.

낡은 건물들.

그리고.

 

캉! 캉! 캉!

 

귀를 찢는 쇳소리.

 

지이이익-

 

무언가를 자르고 가는 날카로운 마찰음.

서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수문은 망설임 없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서연은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문래동 철공소 골목.

낮의 치열함이 채 가시지 않은 밤의 공간이었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

매캐한 쇳가루 냄새.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무언가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주황색 불꽃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용접 불꽃이었다.

한 남자가 보호면을 쓴 채 쇠를 지지고 있었다.

불꽃이 튈 때마다 그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사라졌다.

 

“옛날에는 저런 불을 도깨비불이라고 불렀죠.”

 

이수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불.”

 

그의 눈에는 용접 불꽃 너머, 다른 것이 보였다.

공작소마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땀의 정령들.

기계의 신음 소리.

쇠가 비명을 지르며 잘려나가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수문에게는 하나의 거친 교향곡처럼 들렸다.

이곳은 죽어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이 뒤엉킨, 가장 원초적인 힘이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차가운 쇠.

뜨거운 불꽃.

이질적인 두 개가 만나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과정은 아름답다기보다,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폭력적인 과정이 너무나 눈부셨다.

 

“저건 쇳물입니다.”

 

이수문이 한 공작소 안을 가리켰다.

용광로 안에서 시뻘겋게 녹아내린 쇳물이 액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원초적인 에너지.

 

“그리고 저건 버려진 철판이고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녹슨 철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

하지만 저 안에서, 저 불꽃과 쇳물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철공소의 셔터 위.

낡은 벽돌담 위.

화려한 그래피티가 죽은 공간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분노.

누군가의 꿈.

누군가의 절규가 색이 되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그림이 아니었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외침.

서연은 자신의 텅 빈 캔버스를 떠올렸다.

 

그 새하얀 순백의 공간.

그 위에는 완벽한 선, 완벽한 색만이 허락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흠집이 생기는 것이 무서워서.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모든 것이 흠집투성이였다.

녹슬고, 깨지고, 부서지고,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살아있었다.

치열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 보세요.”

 

이수문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어두운 골목의 끝.

용접 불꽃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 빛이 허공에 흩날리는 쇳가루를 비췄다.

그것들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가장 뜨거운 별의 파편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별들입니다.”

 

이수문이 나직이 말했다.

 

“가장 차가운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죠.”

 

서연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때, 이수문이 품에서 작고 검은 쇠 병을 꺼냈다.

그는 뚜껑을 열어, 병 안의 것을 작은 찻잔에 따랐다.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액체였다.

 

“이게… 뭐죠?”

“문래동의 밤입니다.”

 

이수문이 찻잔을 건넸다.

 

“차가운 쇠와 뜨거운 불꽃이 섞인 밤공기를 그대로 담아온 겁니다.”

 

서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봤다.

이수문이 덧붙였다.

 

“가장 시끄러운 소음만이 깊은 이명을 잠재우고,”

 

그의 시선이 서연의 텅 빈 눈을 향했다.

 

“가장 뜨거운 불꽃만이 얼어붙은 것을 녹일 수 있으니까요.”

“손님의 캔버스는 너무 차갑고, 너무 조용합니다.”

 

그 말에 서연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서연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투명한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입안에 차가운 쇠 맛이 번졌다.

비릿하고, 서늘한.

그리고 곧이어, 목구멍으로 뜨거운 불꽃이 넘어갔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강렬한 열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속 풍경.

온통 잿빛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내면.

그 텅 빈 캔버스 위로, 방금 보았던 문래동의 밤이 겹쳐졌다.

 

캉! 캉!

 

쇳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지이이익-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영혼을 긁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황색 용접 불티 하나가, 그녀의 잿빛 캔버스 한가운데로 날아와 떨어졌다.

 

타닥.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새로운 색을 칠한 게 아니었다.

잿빛 캔버스에 작은 구멍을 태워버렸다.

그을음이 번진 작은 구멍 너머.

새하얀 백지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어두운.

아무것도 없는 심연의 어둠이 보였다.

가능성의 어둠.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하얀 캔버스 위에 무언가 완벽한 것을 그려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작은 그게 아니었다.

이 잿빛 절망을, 이 텅 빈 공허를 인정하는 것.

그것을 태우고, 부수고, 녹여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완벽한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거친 쇳소리여도 좋고, 날카로운 상처여도 좋았다.

그저,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주르륵.

 

서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 눈물 끝에, 아주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잿빛 마음 한가운데에,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말이죠?”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부숴야 할지.”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텅 비었던 눈에, 희미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카페로 돌아왔을 때, 서연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잿빛 공허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듯한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계산대 앞에서 이수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얼마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찻값은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신, 그림이 완성되면 보여주러 오시죠. 그게 찻값입니다.”

 

서연은 잠시 이수문을 바라보다, 이내 맑게 웃었다.

그녀가 카페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보여준 진짜 미소였다.

그녀가 떠난 뒤, 한다솔이 감탄하며 말했다.

 

“와, 사장님. 진짜 대단하세요. 거의 마법사 같아요.”

 

이수문은 대답 대신 마른행주로 컵을 닦았다.

그때 왕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흥. 마법은 무슨. 그냥 병 주고 약 주는 거지.”

“네?”

“신령 나으리, 저 맛대가리 없는 잿빛 기운 때문에 내 미각이 흐려졌다. 보상으로 최고급 달빛 참치 츄르를 내놓으시지.”

 

왕자는 아주 당당하게 앞발을 내밀었다.

이수문은 피식 웃으며 츄르 하나를 꺼내 주었다.

평화로운 일상으로의 복귀였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자신의 작업실, 텅 빈 캔버스 앞에 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공간.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수많은 물감 튜브 중에서, 망설임 없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선명한 빨강도, 희망의 노랑도 아니었다.

페인즈 그레이(Payne's Grey).

어둡고, 깊은.

죽은 듯한 회색.

그녀는 물감을 팔레트 위에 짰다.

그리고는 가장 큰 붓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스윽-

 

회색 물감을 묻힌 붓이, 새하얀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한 번의 거친 붓질.

그것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은 절망의 색이 아니었다.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는 용광로의 색.

시작의 색이었다.

 

그날 밤, ‘오후 네 시의 위로’

모든 손님이 돌아가고, 카페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이수문은 묵묵히 찻잔을 닦고 있었다.

그의 규칙적인 손놀림만이 시간의 흐름을 증명했다.

그때, 카페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

낡은 족자였다.

 

“…저 아이는 자신의 색을 찾았군.”

 

이수문은 대답 없이 찻잔만 닦았다.

족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 덕분에.”

“…….”

 

긴 침묵이 흘렀다.

이수문은 닦은 찻잔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의 무심한 얼굴 위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족자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날카로웠다.

 

“자네의 색은… 지금 무슨 색인가, 수문장.”

 

이수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젖은 찻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색도 없었다.

그의 세상은,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7. 이방인의 서울숲

 

딸랑-

 

바람 한 점 없는 오후였지만, 풍경은 제멋대로 울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선 것처럼.

카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오후 네 시의 햇살이었다.

그리고 그 햇살을 등지고,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파란 눈이었다.

햇살을 머금은 금발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누가 봐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냅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외국인 손님은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영어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이내 흩어졌다.

헬로? 웰컴? 커피는… 커피… 라떼는 어떻게 설명하지?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Welcome.”

 

그때, 이수문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여전히 찻잔을 닦고 있었다.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확히 여인을 향해 있었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이국의 사신을 맞아본 사람처럼, 그의 발음에는 조금의 막힘도 없었다.

여인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어색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의외로 유창한 한국어였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인은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낡았지만 정갈한 한옥의 분위기.

공기 중에 감도는 편안한 향기.

그녀의 얼굴에 깃든 희미한 긴장감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커피… 한 잔 주세요.”

 

그녀는 창가 구석,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마저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이 공간의 조화를 깰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이수문의 시선이 처음으로 여인에게 향했다.

닦던 찻잔 위로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여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

한다솔의 슬픔처럼 무겁지도 않았고, 김민준의 불안처럼 날카롭지도 않았다.

서연의 공허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방향을 잃은 안개였다.

부드럽고, 축축하고, 모든 소리를 먹어버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

그녀의 미소는, 그 안개를 가리기 위한 필사적인 등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등불은 너무나 희미해서, 곧 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금빛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건 또 무슨 냄새냐.”

 

그의 목소리는 잠이 덜 깬 듯 낮게 잠겨 있었다.

늘 그랬듯이 한다솔이 눈짓으로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왕자는 무시했다.

 

“버터 냄새 같기도 하고, 낯선 풀 냄새 같기도 하군.”

 

그는 한쪽 발로 제 귀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의 몸에서는 왜 항상 저리 달큼하고 날카로운 물 내음이 나는 거지? 역하기 짝이 없군.”

“향수거든요, 왕자님.”

 

한다솔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흥. 제 땅의 냄새를 잃어버린 자의 냄새로군.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만큼 싱거운 것도 없지.”

 

그는 다시 머리를 앞발에 묻었다.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소피였다.

프랑스에서 온 교환학생.

서울 생활은 생각보다 외로웠다.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그 친절은 언제나 얇은 유리벽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말은 통했지만,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늘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안갯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었다.

거대한 숲속에 홀로 떨어진, 이름 모를 작은 씨앗이었다.

 

한다솔이 그녀에게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소피는 다시 한번 예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파란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한다솔은 그 눈빛에서 낯설지 않은 감정을 읽었다.

이 카페에 처음 왔던 날의 자기 자신.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 막막함.

 

‘나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가 동질감을 느끼듯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이수문은 커피 머신 앞에 서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듯, 바 아래의 낡은 오동나무 상자를 꺼냈다.

한다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이번엔… 어떤 차인가요?”

“궁금한가요?”

 

이수문이 드물게 되물었다.

 

“네. 매번 신기해서요. 이번엔 또 어디서 온 찻잎이에요?”

 

이수문은 상자의 새로운 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흙처럼 보이는 검붉은 가루가 담겨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미세하게 반짝이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봄의 새싹 같은 연둣빛.

여름의 녹음 같은 짙은 초록빛.

가을의 단풍 같은 붉은빛.

겨울의 눈꽃 같은 은빛.

 

“서울숲의 흙입니다.”

“네? 숲… 흙이요? 그걸 마셔요?”

 

한다솔의 얼굴에 기겁하는 표정이 스쳤다.

 

“왕이 사냥하던 오래된 땅의 기운이죠.”

 

이수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사계절의 표정이 모두 담긴 흙입니다.”

 

한다솔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봄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먹고 자라고, 여름에는 연인들의 속삭임을 머금고, 가을에는 고독한 이들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겨울에는 모든 것을 품고 다음 해를 기다리는.”

 

그의 설명은 한 편의 시와 같았다.

 

“이 흙 한 줌에는, 이곳에서 살아간 수만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그 흙가루를 조심스럽게 찻주전자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붓자, 경이로운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흙냄새가 아니었다.

젖은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의 냄새.

비에 젖은 나뭇잎의 냄새.

따스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남긴 시간의 냄새였다.

마치 숲 전체를 찻잔 안에 옮겨 담은 듯했다.

이수문은 찻잔을 들고 소피에게 다가갔다.

소피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

 

소피가 고개를 들었다.

이수문은 그녀 앞의 커피잔을 치우고, 새로 가져온 찻잔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건 아니지만.”

 

그의 시선이 소피의 눈동자, 그 너머의 짙은 안개를 향했다.

 

“길을 잃었을 땐, 잠시 땅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소피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따뜻한 찻잔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와, 코끝을 감도는 싱그러운 향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귓가를 맴돌던 도시의 소음이 사라졌다.

입안에 맴돌던 낯선 공기의 맛이 사라졌다.

눈앞의 카페 풍경이 흐려졌다.

그녀는 거대한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발밑에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방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그저 그 풍경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숲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스르륵.

 

발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곧이어 땅을 향한 강력한 이끌림으로 변했다.

보이지 않는 뿌리였다.

그 뿌리는 땅속 깊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외로움의 땅이 아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아있는 땅이었다.

그녀의 뿌리가 다른 나무들의 뿌리와 얽히기 시작했다.

옆에 선 키 큰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

저편의 작은 단풍나무의 가느다란 뿌리.

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들의 뿌리들이 서로를 감싸고, 지탱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다.

뿌리를 통해, 다른 나무들의 감정이 희미하게 전해져왔다.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고목의 평온함.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 묘목의 설렘.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모양, 다른 크기를 가졌지만, 땅 밑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함께 비를 맞고, 함께 바람을 견디고, 함께 햇살을 나누고 있었다.

혼자인 나무는 없었다.

그들이 함께 있기에, 이곳은 ‘숲’이었다.

 

소피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름 모를 씨앗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서울이라는 숲에 뿌리내리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리벽이라 생각했던 것은, 스스로 만든 마음의 벽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을 뿐.

그녀의 주변을 감싸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힌 자리로, 다른 나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르륵.

 

소피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외로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따스함이 섞인, 감사의 눈물이었다.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행인들.

카페 안에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한다솔.

그들 모두가, 방금 전 느꼈던 숲의 나무들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소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한다솔에게로 걸어갔다.

한다솔은 그녀의 달라진 눈빛에 조금 놀랐다.

안개가 걷힌 그녀의 파란 눈동자는, 아침 햇살을 머금은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소피는 수줍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서툴고,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기….”

“네?”

 

한다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우리… 친구 할래요?”

 

한다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의 정적.

이내, 한다솔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소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네! 좋아요!”

 

두 사람의 손이 맞잡히는 순간.

국적도, 언어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뿌리를 뻗어 단단히 얽히는 순간이었다.

한다솔의 등을 희미하게 감싸던 회색 그림자가, 그 따스함에 조금 더 옅어졌다.

그날 이후, ‘오후 네 시의 위로’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소피는 매일같이 카페를 찾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처럼 서울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다른 나라의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독일에서 온 엔지니어 막스,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 흐엉, 이집트에서 온 연구원 칼리드.

카페는 어느새 다양한 언어와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그들은 더 이상 커피만 마시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한다솔에게 한국어 신조어를 배우고, 각자의 나라 과자를 나눠 먹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누는 작은 사랑방이 되었다.

 

이수문은 바 안쪽에 서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가 600년 동안 지켜온 경복궁의 담장.

그 안은 언제나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 하나의 질서만이 존재했다.

담장은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경계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달랐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화로웠다.

자신이 지키던 세상보다 훨씬 더 넓고, 다채롭고, 살아있는 세상이었다.

그는 어쩌면, 600년 동안 높은 담장 안에서 우물 안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은 한옥 카페의 문이, 경복궁의 그 어떤 문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열려 있었다.

 

그날 밤.

모든 손님이 떠나고, 카페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이수문은 닦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소피가 앉았던 창가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카페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

낡은 족자였다.

 

“…저 아이는 자신의 뿌리를 찾았군.”

 

이수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족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처럼.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 목소리에는 아주 희미한, 아픔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긴 침묵.

이수문은 족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족자는 처음으로, 질문이 아닌 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무겁고, 깊었다.

 

“나는….”

“…….”

“뿌리를 잃었네.”

 

 

 

 

8. 위로의 공간이 사라질 위기

 

딸랑-

 

바람 한 점 없는 오후였지만, 풍경은 제 할 일을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선 것처럼.

오늘의 카페는 유난히 북적였다.

소피와 그녀의 친구들이 창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서툰 한국어와 유창한 독일어, 부드러운 베트남어가 뒤섞여 낯설지만 기분 좋은 소음을 만들었다.

 

한다솔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회색 그림자에 짓눌려있지 않았다.

이곳, ‘오후 네 시의 위로’는 그녀의 일상이자 안식처였다.

그 평화를 깨뜨린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가게 구석에 놓인 낡은 유선 전화기가, 잊고 있던 제 존재감을 알리듯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르릉-

 

이수문은 닦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마치 그 소리가 가져올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의 미간이 아주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한다솔이 전화를 받았다.

 

“네, 오후 네 시의 위로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었다.

그리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아, 저, 이 건물주 되는 사람인데요….”

 

오 씨였다.

이 낡은 한옥의 주인이자, 이수문과 계약했던 부동산 박 소장의 먼 친척뻘 되는 노인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게….”

 

오 씨는 한참을 뜸 들였다.

그의 목소리 너머로 무거운 한숨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혹시… 이 사장님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

 

한다솔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수문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이수문은 말없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이수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수화기 너머, 오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이고, 이 사장님! 정말 죄송하게 됐수다!”

“…….”

“큰일 났어요, 아니 나한테는 큰일인데… 사장님한테는….”

 

이수문은 상대가 말을 정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600년의 세월은 그에게 기다림이라는 미덕을 가르쳤다.

마침내, 오 씨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터져 나왔다.

 

“어떤 큰 회사에서… 이 집을 사겠다고 연락이 와서….”

“…….”

“제가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큰돈을 부르지 뭡니까….”

 

그의 목소리는 미안함과, 주체할 수 없는 설렘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수문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마른행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한다솔은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며칠 후, 오 씨가 직접 카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 사장님… 정말 면목 없수다.”

 

그는 차마 이수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수문은 대답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오 씨는 그 찻잔을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평생 빚만 지고 살았는데… 이걸로 자식들 빚도 갚아주고, 손주들 대학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계약서에도 다 명시되어 있고….”

 

변명이었다.

스스로를 향한 변명.

이수문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마루에서 잠자던 왕자가 실눈을 떴다.

 

그르르릉.

 

목 깊은 곳에서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인간의 욕심만큼 시끄러운 것도 없지.”

 

왕자가 털 사이로 중얼거렸다.

 

“제깟 종이 쪼가리와 번쩍이는 돌멩이를 얻자고, 제 영혼의 뿌리를 팔아치우는군. 어리석기는.”

 

그의 금빛 눈이 오 씨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경멸하듯 훑었다.

봉투 위에는 세련된 로고가 박혀 있었다.

 

[THE URBAN HUB]

 

이수문의 시선이 그 로고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돈의 액수나 법적인 조항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서류 봉투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차갑고 계산적인 기운.

그것은 평범한 장사치의 욕심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오 씨가 돌아가고, 카페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다솔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장님… 그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카페… 없어지는 거예요?”

 

이수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 오후 네 시의 햇살이 부서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풍경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소문은 발보다 빨랐다.

서촌 골목은 작은 동네였다.

이내 ‘오후 네 시의 위로’가 곧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거대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한다솔은 단골손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것은 소피와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What? No way!”

 

독일에서 온 막스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소피의 파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없어져요…? 여기가…?”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었다.

낯선 땅 서울에서 처음으로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숲이자, 따뜻한 둥지였다.

김민준은 퇴근길에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예전처럼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려 애썼다.

 

“법적으로 대항할 방법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정당한 매매 계약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가면을 벗게 해준 성곽.

그 성곽으로 가는 입구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화가 서연도, 할머니와 함께 녹두전을 팔던 손녀도,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그들에게 ‘오후 네 시의 위로’는 단순한 가게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를 보듬어준 위로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들었다.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피켓 들고 농성이라도 합시다!”

 

흥분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거대 자본 앞에서 그런 저항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그때, 침묵을 지키던 한다솔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우리는 그렇게 싸우지 않을 거예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곳은 그런 방식으로 지켜야 할 공간이 아니에요.”

 

그녀는 이수문을 보았다.

이수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윽박지르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상대의 마음에 가장 필요한 것을 내어줄 뿐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보이지 않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한다솔은 결심했다.

자신도 이수문의 방식을 흉내 내 보기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예요.”

 

한다솔의 프로젝트는 다음 날 바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김민준을 찾아갔다.

약속 장소는 낙산공원 성곽길이었다.

그들이 처음 함께 왔던 바로 그곳.

 

“기억나세요, 민준 씨?”

 

한다솔이 성곽의 낡은 돌을 쓸며 물었다.

김민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제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도 부족하고, 실수도 많이 해요. 하지만 더 이상 그걸 들킬까 봐 무섭지는 않아요.”

 

그는 회사 빌딩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 빛나는 곳에 혼자 서 있는 게 아니라, 이 흠집투성이 돌들처럼… 동료들과 함께 버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처음으로, 상사에게 도움을 청했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대신 오히려 더 단단해졌던 기적 같은 경험을.

한다솔은 그의 모든 말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다.

다음은 광장시장이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녹두전 가게 앞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손녀 그림, 이번에 작은 전시회에 걸리게 됐어!”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손녀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할머니의 팔을 툭 쳤다.

 

“할머니도 참.”

“뭐가 어때! 우리 강아지, 이제 진짜 화가 선생님인데!”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가시 돋친 말이 오가지 않았다.

서로의 꿈과 현실을 존중하는 따뜻한 응원만이 가득했다.

 

“그날, 그 찻잔에서 우리 손녀 세 살 때 얼굴이 보이더구먼.”

 

할머니가 한다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작고 여린 아기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저렇게 커서 제 세상을 단단히 딛고 서 있었어. 이 늙은이가 괜한 걱정으로 애를 잡을 뻔했지.”

 

한다솔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어떤 논리보다 강한 힘.

한다솔은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서연과 소피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솔은 자신이 모아온 이야기들을 그들 앞에 풀어놓았다.

김민준의 성곽 이야기.

할머니와 손녀의 녹두전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까지.

모두가 숨죽인 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화가 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여요.”

“네?”

“그 이야기들이… 색으로 보여요.”

 

서연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텅 비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세상을 자신만의 색으로 담아내는 예술가의 눈이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혔던 한 남자의 회색 가면. 그 가면이 깨지면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주황색 불빛.”

 

그녀는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차가운 쇠사슬과, 꿈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불꽃이 뒤엉키는 모습도 보여요.”

 

그녀는 더 이상 텅 빈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그릴게요. 그 모든 이야기를요.”

 

그때, 소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저는… 찍을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서툴렀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서연 씨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 그리고 우리가 이 공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할게요.”

 

그녀는 더 이상 낯선 땅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뿌리내린 숲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구성원이었다.

그렇게 그들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서연은 커다란 캔버스를 카페 한가운데에 펼쳐놓았다.

그녀는 물감을 짜는 대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의 감정이 자신의 손끝에 스며들 때까지.

소피는 카메라를 들고 서촌 골목을 누볐다.

카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의 발걸음, 문을 열 때의 기대감 어린 표정, 찻잔을 앞에 두고 편안하게 미소 짓는 순간들.

그녀는 위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필름에 담았다.

 

카페는 어느새 작업실이 되었다.

물감 냄새와, 카메라 셔터 소리와, 사람들의 나직한 대화 소리가 뒤섞여 새로운 활기를 만들어냈다.

이수문은 바 안쪽에 서서, 그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자신이 내어준 작은 찻잔 하나였다는 것을.

지키는 것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씨앗 하나를 심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숲을 지켜낼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카페 안에는 이수문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서연이 그리고 있는 캔버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은 밑그림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카페 구석, 낡은 족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돌이 서로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

 

“…저들의 마음이 모여, 새로운 문을 만들고 있군.”

 

이수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족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낮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조심하게, 수문장.”

“…….”

“저 문을 부수려는 자들의 ‘욕심’은….”

 

족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에 그려진 산세가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다. 내가 지키던 것을 무너뜨린 그것과 닮았어.”

 

 

 

 

 

 

 

 

 

 

 

 

 

 

 

 

 

 

 

 

 

 

 

 

 

 

 

 

 

 

 

 

 

 

 

 

 

 

 

 

 

9. 오후 네 시의 전시회

 

그날이 왔다.

‘오후 네 시의 위로’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고요함 대신, 나직한 기대감이 맴돌았다.

오후의 햇살은 여느 때처럼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은 마루 위에서 부서지는 게 아니라, 벽에 걸린 캔버스 위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었다.

서연의 그림들이었다.

카페의 낡은 벽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갤러리가 되어 있었다.

 

한다솔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 쥔 작은 기타의 목(neck)이 땀으로 축축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

가장 자신 없던 일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비웃으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불안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만 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벽에는 이야기가 걸려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성곽의 돌.

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남자의 뒷모습.

회색 가면이 부서지는 틈새로 새어 나오던 희미한 주황빛.

서연은 김민준의 불안과, 그것을 극복한 용기를 한 폭에 담아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밤바람과 따뜻한 찻잔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기름 냄새가 날 것 같은 낡은 시장의 풍경.

뜨거운 철판 앞에서 웃고 있는 젊은 할머니와, 그 곁에 매달린 어린 손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녹두전의 황금빛이 그림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서연의 붓은 할머니의 사랑과 손녀의 미안함을 한데 녹여냈다.

 

차가운 쇠와 뜨거운 불꽃이 뒤엉킨 문래동의 밤.

그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불씨 하나.

잿빛 절망을 태우고 다시 태어나는 희망.

그건 서연 자신의 이야기였다.

가장 어둡고, 그래서 가장 눈부신 그림이었다.

 

마지막 그림은 숲이었다.

국적도, 생김새도 다른 수많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땅 밑에서 조용히 뿌리를 얽고 있는 모습.

소피와 친구들의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연결의 시작을 담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카페 안으로 모여들었다.

김민준, 소피와 그녀의 친구들, 할머니와 손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가장 아꼈던 옷을 차려입고 왔다.

마치 소중한 누군가의 잔칫날에 온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림을 보며 소곤거렸다.

 

“어머, 저 그림… 우리 이야기 같네.”

 

할머니가 손녀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김민준은 자신의 뒷모습이 담긴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소피는 카메라로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이 다시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기적.

공간은 그림과, 사람과, 그들의 온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마루 한가운데서 잠자던 왕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들은 참으로 시끄럽게도 감정을 전시하는군.”

 

그르릉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희망이니, 위로니 하는 것들의 냄새는 멀미가 날 지경이야.”

 

그는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누웠지만, 쫑긋 세운 귀는 사람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수문은 바 안쪽에 서서 묵묵히 찻잔을 닦았다.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피어오른 따뜻한 기운들.

그 기운들이 모여 실처럼 얽히고설켜, 카페 전체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결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어떤 물리적인 성벽보다 견고하고, 유연한.

마음의 성벽이었다.

그때였다.

 

딸랑-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평화를 깨뜨리는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건물주 오 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

한 남자가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왔다.

 

[THE URBAN HUB] 개발팀장, 최진혁이었다.

최 팀장은 이수문이나 김민준과는 다른 종류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정장은 비싸 보였지만,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억지로 입은 듯, 모든 움직임이 계산된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카페 안을 스캔하듯 빠르게 훑었다.

낡은 서까래, 몇 개 안 되는 테이블, 벽에 걸린 아마추어 같은 그림들.

그의 입가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희미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이수문의 눈에는 그 갑옷의 실체가 보였다.

김민준의 갑옷이 불안으로 만들어졌다면, 최 팀장의 갑옷은 ‘확신’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자신이 믿는 ‘자본’과 ‘효율’이라는 가치 외에는 모든 것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텅 비어버린 확신.

 

“오 선생님, 시간은 금입니다.”

 

최 팀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표준어였다.

 

“마무리만 확인하고 바로 가시죠. 다음 미팅이 있습니다.”

 

오 씨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저… 이 사장님… 정말 면목 없수다….”

 

그가 이수문을 향해 말끝을 흐렸다.

이수문은 대답 대신, 최 팀장에게 찻잔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맑은 생수가 담겨 있었다.

최 팀장은 의아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봤다.

 

“손님께는 내어드릴 차가 없어서요.”

 

이수문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니, 맞는 차가 없다는 편이 정확하겠군요.”

 

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당신은 이 공간의 위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선고였다.

최 팀장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이수문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복잡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계 같았다.

이내 그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됐습니다. 이런 곳에서 뭘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이 공간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한다솔은 그 말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치는 대신, 기타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최 팀장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귀찮음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아시다피, 저희는 오늘 떠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다솔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작은 작별 인사를 하려고요.”

“…….”

“이 집에게. 그리고 이 집을 사랑했던 우리들에게.”

 

그녀는 더 이상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작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서툰 코드였다.

프로의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투박한 선율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노래였다.

 

‘회색 도시의 길 위에서, 길을 잃었던 아이가 있었네….’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과, 숨 막히던 현실에 대한 노래.

 

‘오후 네 시의 햇살 아래, 작은 문 하나를 만났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사이비 종교인인 줄 알았던 퉁명스러운 사장님.

자신을 울렸던 이상한 차 한 잔.

그 모든 순간이 노래가 되어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최 팀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명확한 감정이 떠올랐다.

경멸.

그는 이런 종류의 감상적인 상황을 수없이 겪어봤다는 듯, 지루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시간 낭비군요.”

 

그가 노래를 부르는 한다솔을 향해, 하지만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감상이 아니라, 계약으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의 차가운 말이 노래를 뚫고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혔다.

한다솔의 목소리가 순간 작게 흔들렸다.

기타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노래는 끊기지 않았다.

2절이 시작되자, 다른 목소리가 겹쳐졌다.

소피였다.

그녀는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하지만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낯선 땅에서 길을 잃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서.

독일인 막스가, 베트남 유학생 흐엉이, 모두가 작은 목소리로 허밍을 넣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한다솔의 흔들리던 노래를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노래는 더 이상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최 팀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그는 오 씨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 선생님, 이제 그만 가시죠. 저런 시간 낭비에 어울려줄 필요 없습니다.”

 

오 씨는 마지못해 끌려가려 했다.

그의 눈은 차마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바닥만 향해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한 그림에 멈췄다.

카페의 작은 마당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마당과는 조금 달랐다.

그림 속 마당 한가운데에는, 이제는 베어지고 없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한 젊은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작은 묘목을 심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세월에 바래 희미했지만, 그 미소만은 햇살처럼 선명했다.

오 씨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멎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그림은….”

 

그는 홀린 사람처럼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최 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그림이 뭐 어떻다고.”

 

오 씨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잊고 있던 시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이 집을 샀던 날.

아내는 마당에 작은 감나무를 심자고 했다.

자신은 돈도 안 되는 나무를 뭐하러 심냐고 타박을 줬다.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이 나무가 자라서, 우리 아이들이랑 손주들이랑 다 같이 감 따 먹으면 얼마나 좋겠어. 이 집의 역사가 되는 거지.’

 

햇살의 냄새, 흙의 감촉, 귓가를 간지럽히던 아내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아내의 말을 잊고 살았다.

아니, 잊으려 애썼다.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감나무를 볼 때마다 아내가 생각나 괴로워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

아내와의 추억을, 이 집의 역사를, 스스로 지워버린 것이었다.

 

“여보….”

 

오 씨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그림 속 아내의 웃는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자신이 잊고 있던 이 집의 진짜 가치.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평수나 위치가 아니었다.

아내와의 약속.

함께 쌓아온 시간.

결코 팔아서는 안 될, 자신의 인생 그 자체였다.

카페 안의 노래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림 앞에서 오열하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 팀장만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오 씨가 몸을 돌렸다.

그는 눈물로 젖은 얼굴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팔아.”

“……네?”

 

최 팀장이 되물었다.

 

“아니, 못 팔아. 이 집은….”

 

오 씨는 최 팀장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카페 안에 선명하게 울렸다.

 

“이 집은… 돈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구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잠시 눈이 멀어서… 내 집의 주인이 누군지도 잊고 살았어.”

 

그는 찢어진 서류를 최 팀장의 발아래 던졌다.

 

“미안하지만,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하겠네. 위약금은 내가 알아서 물지.”

 

최 팀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는 잠시 오 씨를 노려보다가,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찢어진 계약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바 안쪽에 서 있는 이수문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이수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소가 섞여 있었다.

 

“재미있는 힘을 가졌군, 당신.”

 

이수문은 대답 없이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최 팀장의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기억’ 따위로 ‘자본’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가 떠난 문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잠시 들이쳤다.

카페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누군가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작은 박수 소리는 이내 커다란 환호성으로 번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한다솔은 기타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 씨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와, 거친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맙네, 아가씨. 덕분에 나도 내 집을 지켰어.”

 

왕자가 그 모습을 보며 하품을 길게 했다.

 

“흥. 시끄러운 소동도 가끔은 쓸모가 있군.”

 

그는 어슬렁거리며 이수문의 발치에 다가와 다리를 비볐다.

 

“나으리,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달빛 참치 츄르 정도는 받아야겠네.”

 

이수문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늘 그 자리에 서 있던 성곽의 돌처럼.

모든 비바람을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처럼.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600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은,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10. 오후 네 시의 진짜 휴직

 

밤이 깊었다.

카페는 고요했다.

마치 수많은 이야기가 잠든 거대한 책 같았다.

이수문은 홀로 바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향했다.

 

서연이 남기고 간,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캔버스.

성곽의 돌을 딛고 선 남자의 뒷모습.

녹두전의 온기를 나누는 할머니와 손녀.

차가운 쇠를 녹이는 뜨거운 불꽃.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국의 나무들.

모두 이곳, ‘오후 네 시의 위로’에서 다시 태어난 이야기였다.

그는 아까의 소란을 떠올렸다.

 

사람들의 환호성.

한다솔의 눈물.

오 씨의 후회와 안도.

자신은 그저 차 한 잔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씨앗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싹을 틔웠다.

그리고 거대한 숲이 되어, 그들 스스로를 지켜냈다.

 

600년 동안 그는 홀로 문을 지켰다.

외부의 적을 막아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임무였다.

그것이 ‘지키는 것’의 전부라 믿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다른 것을 가르쳐주었다.

진정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성문이 아니었다.

그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뿌리내리고, 쉴 수 있는 터전이었다.

도망치는 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는 공허했다.

 

진정한 쉼.

 

그것은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것을 함께 지킬 이들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수문은 깨달았다.

자신은 파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켜야 할 문을 잠시 잊고 방황했을 뿐.

그의 자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광화문 앞, 작열하는 아스팔트 위.

하지만 이제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묶인 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돌아가는 자였다.

 

다음 날 아침.

 

한다솔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깨를 짓누르던 회색 그림자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는 활기차게 인사하며 카페 문을 열었다.

이수문은 이미 바 안쪽에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

하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마치 먼 길을 떠나기 전의 여행자처럼, 고요한 결의가 느껴졌다.

한다솔이 앞치마를 두르며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이수문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그는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늘 자신이 마시던, 가장 쓰고 진한 커피였다.

 

“이제 한다솔 씨가 이 가게의 사장입니다.”

“네?”

 

한다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푸흡…! 사장님, 농담도 참.”

 

그녀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이수문의 눈빛은 진지했다.

 

“저는 돌아가야겠습니다.”

“돌아가요? 어디를요? 고향?”

“원래 있던 자리로.”

 

그의 시선이 잠시, 경복궁이 있는 북쪽을 향했다.

한다솔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수문장.

600년의 근무.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왜요? 여기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어제는… 어제는 우리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이 평화가 깨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수문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진짜 미소였다.

 

“그래서 돌아가는 겁니다.”

“네?”

“이제야 알았거든요. 내가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의 시선이 한다솔을, 그리고 카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더 큰 문을 지켜야 합니다.”

 

그의 말은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한다솔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도망이나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더 큰 책임감을 향한 걸음이라는 것을.

 

“하지만… 제가 어떻게 혼자….”

 

한다솔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스쳤다.

 

“혼자가 아닐 겁니다.”

 

이수문은 카페 구석, 낡은 족자를 향해 고갯짓했다.

 

“든든한 수호신이 하나 있으니.”

“네? 저 그림이요?”

“그리고.”

 

이수문의 시선이 마루에서 잠을 청하는 거대한 털 뭉치를 향했다.

 

“시끄러운 정보원도 하나 있고요.”

 

그르르릉.

왕자가 잠꼬대처럼 낮은 소리를 냈다.

한다솔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묘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이 이상한 카페라면, 정말로 혼자가 아닐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녀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이제는… 수문장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편한 대로 부르세요.”

 

이수문은 그 말을 남기고, 앞치마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은 조용한 위임식이었다.

모든 인수인계를 마친 이수문은 족자 앞에 섰다.

아무도 없는 카페.

그와 낡은 그림, 그리고 조는 척하는 고양이뿐이었다.

 

“들었겠지.”

 

이수문이 나직이 말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수문이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스르륵-.

 

돌과 돌이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선택이군.”

“그런가.”

“너는 저들처럼 웃고, 떠들고, 평범하게 늙어갈 수도 있었어. 이 안온한 성 안에서.”

“성은 지키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성이지.”

 

이수문이 대꾸했다.

 

“성주가 성을 버리고 숨어버리면, 그건 그냥 돌무더기일 뿐.”

 

긴 침묵이 흘렀다.

족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왜 나인가. 왜 나에게 이 문을 맡기려는 거지?”

“자네 역시….”

 

이수문의 시선이 족자, 그 너머의 시간을 꿰뚫는 듯했다.

 

“나와 같은 수문장이었으니까.”

 

족자 안의 기운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실패했네. 나의 뿌리, 고려는 멸망했네.”

 

목소리에 처음으로 깊은 회한이 묻어 나왔다.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이 그림 안에 스스로를 봉인한 것이다. 세상에 나아갈 자격이 없으므로.”

“그럼 다시 한번 기회를 갖는 건 어떤가.”

 

이수문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기회. 이방 사람들은 이 나라를 ‘고려’에서 따온 이름. ‘Korea’ 라고 부른다네. 고려는 망하지 않았네. 자네의 뿌리는 여전히 저 깊숙한 곳에 살아있다네.”

 

족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그림 속 깊은 산세가, 더욱 짙은 침묵 속에 잠길 뿐이었다.

그것은 긍정이었다.

그때, 왕자가 하품을 하며 어슬렁거렸다.

 

“흥. 남자들끼리 무슨 재미없는 소리를 그리 오래 하나.”

 

그는 이수문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서, 내 츄르 공급책은 이제 저 인간 계집으로 바뀌는 건가? 일 처리가 미숙할까 봐 심히 걱정되는군.”

“특별히 부탁해뒀으니, 걱정 말게.”

 

이수문이 왕자의 턱을 긁어주었다.

왕자는 만족스러운 듯 그르렁거렸다.

 

“나으리, 파업은 어땠나? 600년 만의 휴가는.”

“덕분에 잘 쉬었지.”

 

이수문이 대답했다.

 

“이제 또 다른 휴직을 해야겠군.”

 

왕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수문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카페를 한번 둘러보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나섰다.

 

딸랑-

 

맑은 풍경 소리가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다시, 광화문 앞.

작열하는 아스팔트 위.

이수문은 또 다시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옷, 푸른 옷, 혹은 누런 옷을 입고.

손에는 의장용 칼을 든 채.

미동도 없이.

하지만 매순간이 같지 않았다.

 

“어머, 저 사람 진짜 안 움직여!”

“마네킹 아니야?”

“에이, 사람이야. 눈 깜빡이는 거 봤어.”

 

오늘도 똑같은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었다.

사람 사는 소리였다.

자신이 지키는 세상의 활기였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명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수문장’이라는 상징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600년의 시간을 기꺼이 짊어진 한 존재를 찍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지겹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매연으로 뿌옜지만, 그는 그 너머의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쇳덩어리들의 굉음 속에서, 그는 저마다의 터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이 의미 있었다.

정시 퇴근 시간이 되자, 그는 늘 그랬듯 동료와 교대했다.

동료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은 묻고 있었다.

 

‘괜찮은가.’

 

이수문은 시선으로 답했다.

광화문 너머, 서촌의 작은 한옥이 있는 곳을 향해 아주 잠깐 눈을 돌렸다.

 

‘더할 나위 없이.’

 

동료의 눈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은 발걸음의 방향이 달랐다.

늘 향하던 경복궁의 휴식처가 아니었다.

그는 갑주와 융복을 입은 채였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쇳덩어리와 비단.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성큼성큼, 익숙한 골목으로 향했다.

한옥 대문 옆, 작은 나무 간판이 그를 맞았다.

 

[오후 네 시의 위로]

 

그는 문을 열었다.

 

딸랑-

 

그를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풍경 소리가 울렸다.

카페 안은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한다솔이 바 안쪽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창가에는 소피와 김민준, 서연과 할머니, 손녀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돌아온 수문장을 향해,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손을 흔들었다.

왕자는 마루 한가운데서 꼬리를 탁, 탁, 치고 있었다.

족자의 그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한다솔이 찻잔 하나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맑은 차였다.

 

“어서 오세요, 손님.”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어떤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이수문은 갑옷의 투구를 벗었다.

600년의 세월이 담긴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말했다.

 

“오후 네 시의 위로. 그거면 충분해.”

 

그의 눈빛이, 오후 네 시의 햇살 아래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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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위로 (부제:오늘은 어떤 위로가 필요하세요?)

  • 작가 : 최병진
1. 제목
  • 오후 네 시의 위로 (부제:오늘은 어떤 위로가 필요하세요?)
2. 기획의도
이 작품은 '쉼'이 단순히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와 연결을 되찾는 과정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주인공 이수문은 궁궐 돌담의 이끼, 성곽의 흙, 시장 맷돌의 가루 등 세월의 이야기가 담긴 특별한 차(茶)를 통해, 불안과 상처, 절망과 외로움에 갇힌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차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효율성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의 가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복궁, 낙산 성곽길, 광장시장, 문래동 창작거리, 서울숲 등 서울의 명소들을 소개하고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감동을 녹여내 서울을 홍보하는 형태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3. 스토리
[1~2화] 발단: 600년 만의 파업, 새로운 문을 열다
600년간 경복궁을 지키던 수문장 '이수문'은 영혼의 번아웃을 선언하고 파업에 나선다. 그는 퇴직금으로 서촌의 낡은 한옥을 구해 '오후 네 시의 위로'라는 카페를 연다. 첫 손님으로 회사 생활에 지쳐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를 짊어진 '한다솔'이 찾아오고, 이수문은 궁궐 돌담 이끼로 만든 차를 통해 그녀의 잊었던 따뜻한 기억을 되살려주며 첫 위로를 건넨다. 한다솔은 카페의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아르바이트생으로 합류한다.

[3~7화] 전개: 위로의 찻잔, 인연이 쌓이다
카페에는 저마다의 상처를 가진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수문은 인왕산 산군(山君)인 고양이 '왕자'와 정보 계약을 맺고, 낡은 족자에 봉인된 고려 시대의 수호령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완벽주의의 갑옷에 갇힌 대기업 사원 '김민준'에게는 성곽 이끼 차를,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할머니와 손녀에게는 광장시장 맷돌 가루 차를,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절망한 화가 '서연'에게는 문래동의 밤공기를, 낯선 땅에서 외로워하던 외국인 '소피'에게는 서울숲의 흙으로 만든 차를 내어준다.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카페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연과 공동체를 형성한다.

[8~9화] 위기 및 절정: 위로의 공간이 사라질 위기
평화롭던 카페에 거대 개발회사 '어반 허브'가 나타나 건물을 매입하려 하면서 모두의 안식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법과 자본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 하지만 한다솔의 제안으로, 이수문에게 위로받았던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카페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친다. 화가 서연은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한다솔은 노래를 만들며 작은 전시회를 연다. 결국 전시회에 찾아온 건물주 '오 씨'가 그림에 담긴 자신의 잊었던 아내와의 추억을 마주하고 각성하여 계약을 파기한다.

[10화] 결말: 진짜 휴직을 시작하다
위기를 극복하며 이수문은 진정한 '쉼'과 '지킴'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는 도망이 아닌,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카페를 한다솔과 족자 속 수호령, 산군 왕자에게 맡긴 그는 다시 경복궁 수문장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퇴근 후, 그는 이제 손님으로서 '오후 네 시의 위로'를 찾아 동료들과 함께하며 비로소 600년 만의 진짜 휴식을 시작한다.


** 모집요강을 보고 10화로 완결을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여 많이 간소화 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더 많은 분량으로 리라이팅 가능하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