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홍길동 선생
Ⅰ.태어남
1914년 연안군과 배천군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연백이란 군명 역시 두 군의 앞 글자에서 따온 것 따라서 같은 연백군이라도 연안 지역과 배천 지역의 특성이 달랐다고 한다.
광복 이후 38선이 그어지자 경기도로 편입되었고 38선 이남에 위치한 벽성군 동부까지 편입하였다.
6.25 전쟁 전까지는 옹진군과 함께 남한지역이었기 때문에 연백 출신 황해도계 실향민들도 상당히 많다.
여담으로 6.25 이전까지 연백군에는 경찰서가 셋이나 있었다.
연안경찰서 연안 읍 호동 면 호남 면 해송 면 송봉 면 봉서면 괘궁 면 봉북 면 해룡 면 관할하고 배천경찰서 은천 면 해월 면 온정 면 도촌 면 유곡면 석산 면 관할하고 배천 지역의 전통적 중심지는 현 북한 치하에서 배천읍 소재지인 은천 면이지만 시가지가 38선 남쪽으로 겨우 몇 백 미터 떨어져 있는지라 적진에 너무 가까워서 은천 면 남쪽에 있는 유곡면에 경찰서를 두었다.
청단경찰서 추화면 용도 면 내성 면 일신 면 청룡 면 보면 알겠지만 구 청단서의 관할 구역은 용도 면을 제외하면 분단 이전 벽성군 동부에 해당하는 면들이었고 청단서 자체 역시 벽성군 지역에 위치했다.
온전한 연백 군 소재 경찰서들은 연안과 배천 2개서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과 함께 연백 군 전역이 북한 땅으로 넘어갔지만 전쟁 이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연백 군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가 있는 1954년까지 그 직과 임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개성 시 개풍 군 장단 군 옹진군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에는 연안 읍 호남 면 일대의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21호 연안 학 도래지 봉서면 해룡 면 일대의 제22호 은천 면 유곡 면 일대의 제23호 토월 리 산25 일대의 제71호가 지정되어 있으나 미수복지역이기 때문에 1962년에 일단 해제라기보다는 봉인되었다.
철도 노선으로는 토해선이 있었으나 한국전쟁당시 예성강철교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본 북한이 예성강철교를 파괴하고 노선 일부를 끊어놓은 다음 일부 구간을 북쪽으로 이설하여 현재는 배천선이 군 내부를 가로 지른다
가족들이 내려오셔서 다행이지만 언제쯤 통일이 되려는지?
황해도 연백 군 호남 면 읍 동 리 마을에서 1948년 8월 27일 아버님 남양 홍씨의 성을 가진 홍순학씨와 어머님 금녕 김씨의 성을 가진 김형옥으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연백군은 애국지사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의사의 탄생지인 해주 읍 근처이기도 하다.
당시 기름진 연백평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평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집안 형편은 평범한 농사짓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이 태어나서 6개월 되던 해에 늑막염으로 돌아가셨다.
요즘은 의료시설이 벽지까지 잘되어 의사가 상주하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의료 시설이 전연 없었다.
아버님 얼굴도 모른다.
형들은 가끔 어린 나에게 짓궂게 장난도 치고 둘째 형이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고 몹쓸 장난을 하여 어머니가 보시고 야단을 치고 매도 때렸다.
어느 날 형이 어머니에게‘엄마 동생의 눈이 이상해요 눈동자가 허옇게 되었습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어머니는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곳에 가보니 눈이 멀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머님은 눈을 낫기 위해서 집안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놓고 깨끗한 그릇에 정한 수를 놓고 매일 새벽마다 1시 경 기도를 하셨다.
거의 일 년 가까이 되어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신 듯 기적적으로 앞을 못 보던 눈이 보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 댁은 이웃마을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돌아서면 있고 집 앞에는 과수원과 넓은 농토가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외할머니가 시집살이를 개만도 못한 심하게 하였다.
어머니는 오씨 성과 외할머니와 김씨 성을 가진 외할아버지와 중매결혼을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하는 중농의 집안이었는데 슬하에는 7명의 자녀 중 어머니는 첫째 딸로 아버지가 있는 연백 군 호남 면 읍동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배움은 당시 해방 이후였고 학교가 없는 시기여서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총명하고 슬기가 많아 천태라는 곳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예의범절을 배우고 이웃마을에 사는 키가 180cm을 훨씬 넘고 풍채가 당당한 몸을 지니고 인물도 훤칠한 남자가 사는 동네로 혼인을 하였다.
시어머니 성격이 호랑이 같고 걷어 먹여야 하는 시동생이 한명이고 아들을 젊고 예쁜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빼앗긴 심술이 많은 강씨 성을 가진 시어머니로 시집살이가 고초보다 당초보다 매웠다.
없는 말도 지어내는 생사람을 잡는 시누이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우물물을 잔뜩 길어놓고 쉬려고 하면 어디서 보고 있는지 젊은 며느리가 구들장을 메고 잔다고 험담을 계속하였다.
후에 시머머니가 되면 며느리가 밥을 늦게 먹어도 혼을 내지 않고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 남한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당시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북한은 공산당이 지배를 하고 있었는데 태어난 그곳도 공산당이 들어와 못살게 굴었다.
심지어 콩 한 알갱이 까지 세어서 공출로 갖다 바쳤다.
그리고 주민들이 더 괴로운 것은 그 지역에 사는 공산당원인 바닥 빨갱이들이 날뛰어서 더욱 못살게 굴었다.
바닥 빨갱이들은 신분이 부자 집 이나 지주집의 종이 하인들로 이들은 종으로 있던 집의 사정을 특히 재산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까지 눌러 지내던 신세가 공산당이 되니까 공산당의 빨간 완장을 차고 신이 나서 돌아다니면서 누구네 집에 쌀이 몇 가마 등 재산을 일일이 알아 공산당한테 일러 바쳤다.
그래서 동네에 사는 지주는 말 할 것도 없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재산을 공산당한테 뺏기었다.
하도 이들이 괴롭혀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바닥 빨갱이를 돌로 쳐 죽이고 나서 동네 사람들이 그 마을을 전부 도망쳐 다른 곳으로 가버렸는데 역시 어머니도 이웃마을 작은 삼촌 집으로 피신을 했는데 저녁이 되니까 집에 있는 소가 궁금하여 소죽을 쑤려고 동네 마을 굽어진 입구에 가자 동네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경찰 같은 공산당 내무서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까 어머니는 괜히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산당 내무서원이 총을 막 쏘고“거기 서”하면서 달려왔다.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동네 입구에 있는 작은 삼촌 집으로 들어가서 마루 밑에 신발을 넣어 감추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아랫목에 환자처럼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어 아픈 환자처럼 하고 들어 누워있고 작은집 삼촌댁은 당시 윗목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내무서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여기 어떤 여자 들어오는 것 못 보았느냐?'고 삼촌댁 작은 동서한테 물어보고 가슴을 만져보고 그냥 나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슴을 만져보아 심장이 급히 뛰면 금방 이 여자가 도망간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라고 한다.
어머님은 환자로 아랫목에 들어 누워 있으니 도망간 여자라고 의심할 수가 없었다.
6.25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이 싫어 피난을 하였다.
그곳 고향 사람들도 피난을 하는데 우리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개미떼 같이 내려와 할 수 없이 일사 후퇴 시절 어느 날 은 어머니가 피난을 하려고 배를 타는 부둣가에 있는데 갑자기 집에 두고 온 금가락지 생각이 나서 밤중에 집에서 금가락지를 갖고 오다가 수렁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여 다시 기어 나와 부둣가에 왔다. 당시 흑암이 깃든 깊은 그믐밤 밤중이라 앞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가다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그 다음날 피난 가는 배를 타려고 하니까 순서를 지어 사람이 너무 많아 바로 은 집 가족 앞에서 매진되어 배를 못타고 다음 배를 기다리는데 앞에 간 배가 100m쯤 가니까 배가 뒤집혀 거기에 탓 던 100여명이 모두 바닷가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조그만 배에 그 많은 사람이 탔으니 그 배가 제대로 갈 리가 없었다.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Ⅱ.피난살이
큰형님은 동네 아저씨를 따라 피난을 하여 강화도 옆에 있는 조그만 섬인 교동도에서 기다렸다.
이 섬은 공산군이 안 들어와 공산당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농토가 비옥한 땅으로 농사가 잘되어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비교적 풍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15번째로 큰 섬인 교동도는 지금은 강화도와 이 섬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여 2014년 7월에 개통했다.
어머님과 작은 형님과 도 같은 섬인 교동도 난정리에 도착하여 피난살이가 시작되었다.
피난 올 때 송아지 한 마리와 금 몇 돈을 갖고 온 것이 전부였다.
피난 배를 타고 오다가 사기를 맞아 귀한 재산인 송아지를 도둑맞았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도착하니 누구하나 아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 당시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 건넌방 하나를 주시어 거기에서 어머님과 세형제가 어렵게 살아가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피난을 나왔다가 작은 막내딸이 생각나서 다시 이북으로 들어가서 데려오려다가 공산당한테 붙잡혀서 죽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고 같이 나오던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머지 친척 분들도 고모가 5명인데 다 못나오고 큰 고모만 나와서 후에 만났다.
처음에 피난 온 몇 달 동안은 정미소에서 한번 밖에 안 깍은 깡 보리에다 염전에서 얻은 정제되지 않은 깡 소금을 찍어 먹었다.
요즘 쌀 한 톨이 아니라 고춧가루 한 개라도 남기지 않고 먹는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소름이 기칠 정도로 가난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삼천초목이 모두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곳에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어도 사람들 인심이 전쟁을 하는 중이라 인심이 박하여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요즘은 건강식이라 보리밥을 먹지만 그 시절은 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북한의 요즘 어려운 실정을 대변하는 그 시절이었다.
아마 그래서 당뇨라든가 성인병 걸리는 정도가 그 시절에 보리밥을 많이 먹어서 걸리는 사람이 다른 세대보다 덜 할 것 같다.
그때는 사탕이라든가 단성분의 설탕이 없어서 먹지를 못했다.
물론 제조하는 공장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행히 그래서 그런지 다른 세대의 젊은 사람들 보다 이빨이 견고하다.
장가가서 낳은 자식도 요즘 이 때문에 고통을 많이 느끼고 많은 돈을 들여 고친다.
우스운 말이지만 은 시절을 잘 타고 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빨에 충치가 생기는 등 이로 인한 질병이 생기는 정도가 덜한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들이 너무 못 먹고 자라서 자식들만큼은 잘 먹인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류 당류의 간식을 많이 먹였다.
그 결과 오늘날 치과에 발 디딜 틈이 없어 예약을 해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시에 많은 거지들이 외양간이나 마구간 에서 지내다가 추워서 죽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었다.
요즘 같으면 사람 죽으면 난리가 나고 죽은 원인을 조사하고 난리가 나고 신문방송에 날 터인데 당시에는 사람이 죽어도 관심이 없고 거지가 죽는 것이 다반사로 자주 일어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많은 이산가족이 부모와 자식이 형제가 헤어지고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기었다.
그만큼 처참한 당시 우리 사회였다.
그 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한 전체가 그렇지 안 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다행히 그곳에 공산군은 들어오지 안했다.
지역에 살면서 공산당원들로 주로 머슴이라든가 하인들이 빨간 완장을 차서 신이 나가지고 주인들의 실정을 일일이 공산당원들한테 고자질을 주로 하는 바닥 빨갱이들은 많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곳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 공산 북한 치하 일 때는 이웃에 사는 바닥 빨갱이가 공산당 내무서원에게 잘 말해서 살려주고 또 대한민국이 되었을 때는 교감 선생님이 남한 정부 당국에 잘 말해 살려주고 민족의 분단 상황이 만든 경우였다.
같이 학교에 다니던 친구의 아버지가 간첩으로 남한에 와서 하루 밤을 지내고 부산에서 잡혀 간첩인 아버지의 다닌 경로를 조사 하던 중 집에 하루 밤 자고 간 것이 발각되어 당시 수사기관에서 소환 되는 등 많은 고생을 하였다.
전쟁은 남북한 한반도와 우리 민족을 초토화 시켰다. 어디가나 희망이 없고 하루하루 식량을 어디서 구해 먹을 까 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어머님도 식구가 살기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하셔야 했다.
그러나 피난 온 이곳에 농토가 없었고 누구하나 먹을 양식을 재배할 땅을 줄 사람이 없었다.
매일 죽만 먹고 살아갔다.
죽이 하도 먹기 싫어서 당시 6살 정도 된 나이에 부뚜막에 앉아서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죽을 쑤고 있는데 어머님한테 '죽이 먹기 싫어 밥 좀 줘' 나중에는 말하기도 힘들어 '죽행 밥'으로 말이 단축되었다.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다 이 말을 듣고 이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놀리었다.
‘야! 저기' 죽행 밥 지나간다.’라고 놀렸다.
아무튼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죽이었다.
혹시 큰 형님이 생일날이면 어머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쌀 몇 움큼을 동네에서 구해와 쌀밥을 해서 큰 형님 밥상에 놓았다.
그러면 눈치를 보아 큰 형님이 쌀밥 한 숟가락 주시지 않나 눈치를 보고 하였다.
그러면 큰 형님은 쌀 밥 한 숟가락을 주신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은 밥 한 톨 하나는 물론 고춧가루 한 개 국그릇에 국물 묻은 흔적까지도 먹기 위해서 국그릇에 물을 붓고 먹는다.
또한 땅콩은 껍질까지도 먹는다.
그러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물자를 아껴서 쓰되 쓸데가 있으면 과감히 써야한다.
남을 도와주는 일 자기가 줄 수 있는 역량 안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은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분을 보면 안쓰럽다.
그냥 지나치기가 좀 그렇다.
그래서 꼭 1000원 짜리 한 장은 꼭 준다.
이것은 자랑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인색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돼지우리 간에서 자라는 쇠비듬 나물 이 있는데 반찬도 해먹고 다친데 부은데 뼈가 삔 곳에 만병통치약으로 그 당시 썼던 생각이 난다.
요즘도 가끔 식당에서 내놓는 반찬을 보게 되는데 지금은 그 나물이 밥상에 올라오면 보기도 싫다고 짜증낸다.
하도 먹어서 쳐다보기도 싫다.
당시에 무슨 약이 있었으며 병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산천초목이 다 전쟁 통에 다 상처를 입어서 변변한 건물이나 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우스운 이야기를 어느 분이 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사 춘 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밥상에 사 춘 형제가 생선 이면수가 나와서 이면수를 먹는데 자기는 미안해서 먼저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아서 있는데 사 춘 형제가 생선을 먹고 뼈는 남기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뼈까지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미운 생각이 들었는지 오죽 먹고 싶었으면 뼈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도 그 사 춘 형제만 보면 그때 그 생각이 나서 미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렇게 그 당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의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자본 없이 하기는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웃 섬인 강화도에서 옷이랑 옷감을 사다가 동네마다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보따리 장사를 하였다.
그 판 것으로 쌀과 계란을 받아와 식구가 먹고 살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들어 오시자마자 대성통곡을 하고 우셨다.
이유인즉 추운 겨울 이곳 동네 사람들한테 팔 물건을 사러 이웃 섬인 강화도에 가셔서 도매가계의 물건을 사러가셨다가 배를 타고 돌아오시다가 큰 얼음덩어리를 만나 배가 파손되어 죽을 번하다가 살아남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내가 죽으면 삼형제 어린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시면서 대성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
삼형제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같이 울었다.
아무튼 이런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데 그래도 어머님은 배워야 산다.
하면서 당시 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하도록 했다.
당시는 초등학교에서도 월마다 일정액의 돈인 월사금을 내도록 하였다.
돈을 안내면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죽어도 배워야 산다.'가 금언이 되었다.
저녁에는 또래나 보다 위의 형제자매들이 허름하게 지은 건물에서 미군 부대에서 쓰다 남은 칠판을 구해가지고 가마니 깔고 공부를 하였다.
그만큼 배움에 간절하였고 삼형제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당시 학교까지 가려고 하면 10리가 되었다.
가는 길이 오늘날처럼 큰 도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속의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까지 가는데 가는 길 도중에 도로 옆에 보리밭 밀밭이 있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밀밭에 오늘날 은 한센 병이라는 문둥이가 숨어서 사람 간을 빼앗아 먹는다는 소문이 있어 지나갈 때 마다 혼자 못가고 같은 동네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모여서 같이 집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문둥병 환자가 많았다.
또 집에서 학교까지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가다가 사람이 없으면 벗고 사람이 지나가면 신발을 신고 가는 등 신발이 아까 와서 그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가 장날이 되어서 꽃신이라도 사오면 그것을 귀하게 여겨 이불속에다 같이 넣고 잤다.
장난 잘 치는 형님이 밤중에 몰래 다른 곳에 감추어 아침이 되면 꽃신이 없어 은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그러면 어머니가 형님이 장난을 친줄 아시고 형님한테 빨리 갖다 주라고 한다.
학교에서 공부가 끝난 후 운동장에서 돼지 잡는 집의 돼지 불알을 구해 갖고 새끼를 꼬아 똘똘 말아 만든 공 모양을 갖고 동네 넓은 곳에서 축구를 하였다.
또 제사지내는 집이 있으면 밤 12시까지 기다리다가 흰쌀밥인 제사 밥을 먹었다.
왜냐하면 꼭 제사는 밤 12시가 되어야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제사 지낼 때 까지 기다리는 동안 동네 초가지붕 속 참새 집을 발견하여 손전등을 갑자기 대면 참새가 자다가 눈이 부셔 깜짝 놀라 도망을 못하고 잡히고 만다.
그러면 그 참새 다리를 구워 먹던 생각이 난다.
여름철이 되면 이웃집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헌 고무신을 태워 모기가 오지 않도록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나이가 유치원의 아이 정도 되는 또래의 아이들이 노래자랑 대회를 부모님들 앞에서 한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어머님 무릎에 누워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생각이 난다.
춘향전에서 부터 심청전 및 옥루몽 이야기까지 매우 흥미진진하게 듣던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섬 앞에 갯벌에는 생선뼈에서 나오는 인의 밝은 빛이 훤하게 비추었다.
당시 화장실 사용은 재를 이용해 대변을 본 다음 변을 덮었다.
동네 사는 여자 아이가 변을 보다가 자기 집에 있는 똥통에 빠져 부모가 구해내기도 하였다.
당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철이 왔습니다.
유치원 또래의 동네 꼬마들이 뒷동산에 올라가서 콩을 볶아먹기로 하고 각자 분담을 맡았다.
성냥을 갖고 오기로 하고 다른 애들은 콩을 볶을 그릇과 콩을 준비하고 약속된 장소에서 모여서 큰 세 돌멩이를 받쳐놓고 불을 붙이는 순간 갑자기 봄바람이 불어와서 동산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불을 끄려고 했으나 도저히 감당치 못하고 동산 밑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가서 신발은 마룻바닥 속에 감추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가을철에 모아둔 콩을 도리깨로 타작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동네 아저씨 한분이 큰소리로 너희들 오늘날에는 경찰에 해당되는 순사들이 잡으러 왔다. 하는 그 한마디에 숨어있던 친구들은 간이 콩알 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순사는 울던 호랑이도 무서워하고 어린애기가 울다가 호랑이 하면 울음이 그치지 안했지만 순사가 온다 하면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만큼 일본 시절에 순사가 무서워했다.
옆구리에 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국민들을 못살게 굴고 잔인하게 대하였다.
55년 만에 어렸을 때 지냈던 교동도 난정리에 학곡마을에 가보았다.
감회가 깊었다.
고향마을에서 멀지 않는 사림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어렸을 때 있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인 것 같았다.
또 동네 샘물이 있었는데 그 샘물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형편이 나은 집들은 집안에 우물이 있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다 먹었다.
같이 지내던 동네 친구가운데 그 집안은 유난히 아들이 많았고 당시 할머니 어머니 새로 시집온 큰 형수님이 있었다.
당시 큰 형님은 면서기로 직장을 다녔다.
궁금해서 동네 살고 있는 분께 물어봤더니 위 두형님은 돌아가시고 80이 다 된 큰형수님은 인천에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세월이 지나가기 때문에 내가 늙어간다고 생각한다.
바꾸어서 생각하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사는 동네에 부자 집이 있는데 유일하게 큰 집에 살고 있고 그곳에 자기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니지 않는 집에 내 또래의 얼굴이 살이 찌고 윤기가 흐르는 손자가 있는데 같이 놀면서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였다.
어느 날은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로 그렇게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1학년어린이 어렸을 때 썰매를 만든다고 동네 형들과 같이 뒷동산에 올라가 톱과 칼을 갖고 나무를 자르고 굵은 철사를 불에 달구어서 또 스케이트를 만든다고 양철조각을 불에 구워서 스케이트 날을 만들어서 스케이트를 타던 일 추운겨울날 겨울철에 부모님이 해준 검은 한복을 입고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항상 코를 흘리면 소맷자락으로 훔쳐 소맷자락 끝이 반들반들 하였다.
언젠가는 동네 저수지가 얼어 거기서 놀다가 옷이 젖어 저수지 언덕에서 불을 피워 바지를 약간 태워 집에 들어 가며는 야단맞을 생각이 무서워 저녁 늦게야 들어갔다.
어머님은 그러나 야단은 치지 아니 하시고 형님이랑 친구들이 너를 찾으러 동네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하면서 을 얼싸안아 주면서 매우 반가워하셨다.
마치 잃어버렸던 양한마리를 찾은 마음의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소의 먹이를 구하러 들판으로 나갔다가 한참 자고 일어나니 소가 없어졌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집의 큰 재산인데 큰일 났다.
그래서 집에 가면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두컴컴해서 집에 가보니 도망갔던 송아지가 외양간에 엄마소와 같이 있어 은 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Ⅲ.학교생활
일학년에 입학식을 마치고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 가운데 또는 삼촌 등 친척들이 왔으나 홀로 혼자 교실에 있으니까 같이 입학한 아이가 을 깔보아서 그런지 자꾸 집적집적 댄다.
괜히 을 툭툭 치고 도망간다.
약간 화가 났지만 아버지가 꼭 데리고 학교 교실에 와서 어쩔 수 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안 오셨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얕보고 툭툭 치고 시비를 걸었다.
모르는 사이에 화가 나서 그 녀석과 싸움이 붙었다.
싸움결과 그녀석의 얼굴의 코에서 코피가 났다. 어린이들 싸움에 그 당시 코피가 터지면 싸움에 지는 것이다.
어린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그 다음부터 보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했다.
또 당시 같이 학교생활을 하던 춘난이라 하는 여자 어린이가 있었는데 나를 보면 주먹으로 엎어 뜨려 놓고 막 주먹으로 웃으면서 때리었다.
그때 당시 좋아해서 그렇지 않았나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왜 그렇게 때리고 장난을 치었는지 작년 동창회에 만나서 물어보니까 기억이 없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 모습이 아니고 어슴푸레 얼굴 모습은 그대로 있으나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만나니 얼굴에는 주름살이지고 많이 변했다.
세월은 속일 수 없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큰 형님은 이웃 큰 동네인 대룡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작은 형님은 당시 중학교 입시가 경쟁인데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마을에서 난리가 났다.
그 어려운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였다고 축하해 주었다.
6.25전쟁 후 소식을 몰랐던 작은 이모를 만나게 되었는데 서울 북아현동 능안 이라는 부자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4학년 되던 해에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후에 인기 만화가 엄마 따라 삼만리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전쟁 피난 중에 헤어진 엄마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서울의 동네마다 거지가 되어 허리에 깡통을 차고 돌아다니면서 엄마를 찾아다닌다.
어떤 집에서 주는 밥 한 덩어리를 심지어 주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먹으면서 엄마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서울에는 엄마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산으로 몰래 무임승차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다.
거기서 마찬가지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부모님을 찾으러 다니면서 거지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어떤 부잣집에 마찬가지로 거지모습으로 구걸하면서 먹을 것을 주시지 않으십니까? 하면서 깡통을 내민다.
잘사는 부잣집에 아주머니가 생각하기를 내 아들도 살았으면 저런 나이 또래인데 하며 밥을 깡통에 가득 담고 국그릇에 담아 준다.
그러나 거지인 아들은 주인을 처다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는 말만 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 장면을 읽고 안타까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이산가족의 슬픔은 6.25전쟁이 낳은 결과였다.
전쟁 중에 미군병사가 다리를 지나가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 다리 밑을 보니 옆에 있는 우는 어린 아이의 옆에 죽어있는 어머니가 옷을 벗어 어린 아기를 감싸주어 춥지 말라고 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미군병사는 어린아이의 어머니를 근처에 묻고 전쟁이 끝난 후 어린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서 양아들로 삼고 공부도 대학까지 시켜 직장을 다니게 하였다.
그러든 어느 날 양부모는 말하기를 아들에게“너는 6.25 한국 전쟁 중에 내가 다리 밑을 지나가다 네가 우는 소리를 듣고 발견하여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데려왔다.
너를 낳아준 어머니 산소는 한국에 있으니 한번 가보자.”
양아버지와 양아들은 한국에 있는 산소에 가서 어머니가 묻혀있는 곳으로 갔다.
양아들은 어머니의 산소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또한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서울에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한 은 어머님과 함께 서울역에 도착하여 지나가다 모든 것이 새롭고 당시 시골 섬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 많이 길거리에서 파는 사람도 많고 많은 인파가 있었다.
당시 우스운 이야기지만 서울에 가면 조심해야한다.
잘 못하면 코 베가는 것도 모른다고 한다. 라는 당시 시골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다.
볼거리가 많아 이것저것 보다가 그만 인파속에서 은 어머님을 잃어버렸다.
순간 아찔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가운데 어머님을 찾을까? 하는 순간 어머니가 앞서가다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신다.
매우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의 집안은 오랜만에 네 식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
물론 방 한 칸을 빌려 살게 되었다.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제일 꼭대기 위에 있는 달동네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였다.
동네 밑에 있는 여러 집에서 사람이 물을 받아쓰는 공동 수돗가에서 물지게로 길어다가 동네 높은 꼭대기 까지 길어다 물을 먹었다.
근처 초등학교에 4학년에 입학을 하고 당시 시골에서 올라와서 모든 것이 생소하고 학교 학급아이들도 역시 생소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반에서 장난이 심한 아이가 자꾸 괴롭혔다.
언제 가는 책가방을 어디까지 갖다 놔라 하는 것을 시키고 힘을 무기로 괴롭혔다.
정말 당시 은 한번 붙어서 싸움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같은 패거리 그런 아이들이 대 여섯 명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학교 가기가 정말 싫었다.
오늘날 같이 왕따를 시키는 등 괴롭혔다.
한번은 복도에서 그 아이가 괴롭히고 넘어뜨리는 등 시끄러우니까 담임선생님이 “밖에서 장난친 사람 다 교실로 들어와”하면서 과 장난친 아이가 담임 선생님께 불려가 뺨을 수차례 맞았다.
그 녀석 때문에 정말 억울하였다.
생전에 뺨 맞은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난다.
오늘날 과 같은 경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없다고 보장 못하고 요즘 신문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폭력학생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다 자살을 하는 등 사건이 난다.
학생 교육을 맡은 학교 선생님이나 학교 당국은 이점에 세심히 신경을 써서 한 학생이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생활지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 실정은 학교에 오랜 세월을 근무했지만 어린이들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선생님이나 부모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일일이 많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할 수도 없고 또 그런 일 들은 은밀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과 부형님들이 관심을 더 갖고 자주 자식들과 대화를 갖고 하면 예방된다고 생각된다.
요즘 같이 맞벌이 하는 가정에서 학생들이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전적으로 담임교사에게 인성교육을 의존하는 형편이다.
담임교사는 나름대로 전적으로 학생들만 지도할 시간이 없다.
학생을 가르칠 교재 연구 등 업무처리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점차 개선된다고 하지만 교내 행사 등 여러 가지 공문 출장 등 할 일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예방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당시 4.19혁명이 일어나 서대문 적십자 병원 뒤에 있는 이기붕 부통령집 근처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경찰이 쏜 탄환 소리가 집에까지 들리었다.
난리가 났다.
연일 데모가 일어나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하였다.
부정으로 당선된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이 다시 연장하여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 부정투표를 하여 당선되어 학생들이 이에 저항하여 데모를 하는 것이었다.
세 들어 사는 주인이 박태선 장로가 운영하는 전도관에 다녔다.
주인집 딸이 일곱이고 아들이 외아들인 집에 전세로 살았다.
주인의 권유로 전도관에 다녔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시험을 보아 낙방을 하고 말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짝 사랑하는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보기에 민망하고 며칠간을 다른 길로 집을 다녔다.
12월 성탄절이 되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크리스마스 송을 몇 사람의 교인들과 함께 축복 송을 하였다.
식사를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새벽에 주인을 따라 전도관에 예배를 보다가 졸다가 옆으로 쓰러져 졸아 같이 예배를 보던 분들이 웃었다.
예배를 보고 물통에 물을 가져와서 먹었고 일주일 후에 다시 가서 물을 가져왔다.
다니는 근처 전도관에 매주일 마다 다녔는데 전도사가 나이가 50세가 넘은 분이 폐병으로 고생하다 전도관에 다니면서 병이 났고 부인은 몸이 뚱뚱하고 젊은 부인이고 아이는 아들을 말을 안 듣는다고 가끔 야단을 치고 때리기도 하였다.
다니는 전도관에 주인집 어머니와 딸과 같이 가기도 하였다.
그 집에서 근처 계단을 내려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고 근처 동네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병원에 다니는 분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물을 먹고 계속해서 가져와서 먹었다.
기성교회에서는 박태선 장로 발 씻은 물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개신교회들은 규모가 작고 전도관은 컸다.
거의 각 구 별로 1개씩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하기 벌써 두 번째입니다.
시골 있던 때입니다.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 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나는 확실히 알았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이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은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 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 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히 살아가련다.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던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던 당신이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구 해서 쓰기로 한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에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너와 있으면 난 참 행복해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같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라는 사람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줘 고마워 그런 것을 가르쳐 줘서 말로 표현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귀중한 것들을 나에게 줘서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넌 모를 거야
그 고마움보다도 더욱 너를 사랑하고 너만 보면 가슴이 뜀박질을 한 것처럼 쿵쾅대니 말이야 너와 함께 있으면 난 항상 그렇거든 이제 알겠니?
내가 널 얼마나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지 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너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혼자이면 사무치게 보고 싶고 사랑 한단 말 되 뇌이고 되 뇌이고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하루하루 이젠 정말 너 없인 아무 것도 아무의미도 없게 되어버린 내 삶 내 마음은 이래 매일매일 너를 생각하면 행복하고 흐뭇해 사랑하고 가장 흔한 말이고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는 말이지만 흔하기에 더 가치가 있는 말인 거잖아 사랑해 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지 보고 싶고 애틋하고 지켜주고 싶은 가슴 떨린 세 글자 고마워 사랑해란 아름다운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닌 너에게 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사랑합니다.
어느덧 형님들은 군대에 가고 직장에 다녔다.
작은 형님은 군대 생활을 하는 중 당시 월남에 십자성부대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있는 동안 군대에서 주는 돈을 보내왔다.
매우 긴요하게 생활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어머니가 식사를 혼자 하는 동안 부엌으로 큰 바위가 굴러 어머니 머리위로 약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다치지는 안했다.
정말 끔직하고 큰일이 일어 날 번 한 일이었다.
당시 어머님은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였다.
몇 년 후 조그만 옷 수선 가계를 마련하여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겨울날 설을 앞둔 어느 날 가계 옆 대나무를 파는 가계에서 일하던 종업원 아이가 실수하여 불이 나서 이네 집 가계도 불이 나서 가계에 수선을 맡겼든 옷들이 모두 타버렸다.
당시 옷 주인들이 오히려 위로해 주면서 얼마간의 성금도 주고 갔다.
정말 고마웠고 서울적십자지사에서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어서 다시 수선가계를 하였다.
둘째 형님은 월남 전쟁 때문에 나라에서 주는 다달이 얼마간의 돈을 보내어 생활에 도움을 받았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상 진학하는 것보다 오히려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진학을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신문배달을 길을 잘 몰라 여러 번 갔던 곳을 다녀 겨우 찾아 배달하고 낮에는 당시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았다.
한때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무산계급인 노동자가 정권을 잡고 지배자인 지주를 없애고 골고루 잘사는 칼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의 집안형편으로는 먹혀 들어가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의 우상은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처럼 어렸을 때 고생을 하여 세계를 거의 지배하는 프랑스의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노력하였다.
Ⅳ.교직생활
1.첫 부임지
당시 무료로 학비도 안 들고 당시 5년간의 교사로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교육대학을 졸업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임지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 가일분교였다.
그곳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였다.
버스가 하루에 학교까지 2번만 다닌다고 한다.
처음 부임하는 날 교육청에서 학교까지 데려갈 사람이 없어 교감 선생님 회의가 끝나고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아침부터 기다리다 점심을 먹고 회의가 끝난 오후 5시경에 같이 교감 선생님과 또 이웃학교 교감 선생님 함께 청평역에서 막차를 타고 가는데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버스가 가다가 못 갔다.
왜냐하면 버스 바퀴가 비포장도로에 빠져서 못 간다고 한다.
버스 차장 밖을 보니 바로 옆에 청평호가 보인다.
깜짝 놀랐다.
조금만 실수하면 버스가 강물 속에 빠질 형편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을 보내다 군인 트럭의 힘을 빌려 버스를 끌어내어 겨우 설악면 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에 도착하였다.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거의 5시간을 보내어서 보통이면 30분이면 갈 거리였다.
교감선생님이 면소재지인 이곳에서 학교까지 2시간 정도를 걸어서 가야한다고 한다.
이웃 학교 교감 선생님과 함께 셋이 걸어갔다.
원래 이곳 면소재지에서 잠을 자고 내일 가도 되는데 내일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 행사가 있어서 지금 꼭 가야한다고 한다.
학교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되어 도착하여 교장선생님 사택으로 교감선생님이 인도로 교장선생님 사택에 가서 인사를 부임인사를 하러가니 교장선생님이 술을 잔뜩 드시고 주무시다가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서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 오셨다고 막걸리 한잔을 주시면서 잔을 비우라고 한다.
당시 술을 못하였고 술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세상이라고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술을 먹으면 그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술을 못한다고 사양을 하고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그날 아침 학교 선생님 댁에서 아침식사를 대접받고 본교 학교에 갔다.
교무실에서 간단한 인사를 하고 운동장에는 본교 학생들 300여명이 모여 있고 9시경이 되니까 선생님 한분과 분교 학생들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왔다.
어린이날 행사로 체육대회를 마치고 분교 아동들과 10리 정도 되는 거리가 되는 곳 분교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학교 당시 학교 어려운 일과 본교와 연락 하는 일을 하시는 소사아저씨가 거주하는 옆 초가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몇몇의 어린이들은 먹지를 못해서 얼굴이 새까맣고 지금으로 말하면 북한의 어린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에서 주는 강냉이 빵1개를 점심시간 이면 먹기도 하였다.
또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개울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서 공부하다가 말고 집으로 개울을 업어다 건너다 주어야만 한다.
어느 날 유명산에 올라가보니 산에 있는 바위가 금강산에 있는 것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날 올라가 보니 물고기를 잡아 가지고 집에 와서 먹어보니 맛이 하나도 없었다.
원인을 살펴보니 산에 무슨 고기가 먹을 것이 있겠으며 맑은 물밖에 없어 맛이 없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일부 학부모들은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속에 숯을 구워 시장에 팔거나 도끼자루를 만들어 생활을 연명하는 매우 어려운 가정들이었다.
농사짓는 부모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
그곳 지리환경이 깊은 산속에 동네가 되어 일조량이 부족하고 산 밑에 조그만 농토 산을 개간하여 계단식 논이 되어 농사도 그리 넉넉지 못하였다.
내가 맡은 학급은 1,2학년 복식으로 20여명 되었다.
1학년을 가르치면 옆에 학년은 과제를 해결하도록 시키고 번갈아 가면서 가르치었다.
당시 봉급은 27,000원 이었다.
한강맨션아파트 27평이 350 만 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며칠 있다가 청평에서 면소재지를 오고 가던 버스가 청평호 물속에 빠지는 사건이 생기었다.
희생자들은 같은 면에 사시는 분들이라고 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식구가 모두 빠져 희생되고 불행 중 다행이라 한분 학부형만이 희생을 당하였다.
어느 동네에는 집집마다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아침 조회시간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할지 난감하였다.
우선 아침이라도 먹었을까 아침 첫차를 타서 산에서 만든 도끼 자루를 갖다 읍내 시장에 갖다 팔려고 그런 참변을 당했다고 동네 분들이 말씀하셨다.
새벽에 면소재지까지 걸어서 짊어지고 첫차버스를 타려고 가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버스비 몇 십 원을 아끼려고 20 리까지 걸어서 거기까지 걸어서 갔다.
희생자들은 면소재지 지서장 면에 근무하는 공무원 이웃학교 교장선생님 등 마을 주민들 모두 150여명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버스사고로는 희생자가 최고라고 생각된다.
그날따라 젊은이들이 징병검사를 받는다고 군 소재지인 가평군청으로 가던 길이어서 많은 인원들이 버스에 탔다.
당시 버스 인원 초과에 대한 단속 규정이 없었는지 모른다.
사고가 난 후 몇 달 동안을 청평역까지 걸어 100리 길을 걸어 거기서 가평이나 서울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만 하였다.
가일분교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인상적인 일들이 있었다.
어느 날 추운 겨울날 아침 일찍 학교 뒤에 있는 많이 눈이 쌓여있는 산을 산책을 하다가 산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여 잡으려고 달려가 잡힐 듯 잡힐 듯 놓치고 말았다.
옆 가까이 있는 곳이 양평군에서 북동쪽으로 이곳 근처에 있는 유명산은 용문산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을 이동해 놓은 듯 산 모양에 있는 바위들이 참 보기 좋았다.
나중에 관광지로 많은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정말로 말 그대로 유명해진 산으로 가는 산이 되었습니다.
유명산은 설악면 가일리에 위치한 해발 864m의 산으로 계곡에 계속 흐르는 물로 등산객들이 좋아하고 있다.
이곳의 계곡은 박쥐 소 용소 마당소 등 얼음모양 같은 깨끗한 냇물과 이어져 모습이 연결된다.
가까이에 산림청에서 직영하는 유명 산 자연휴양림은 통나무집 야영장 산책로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사시사철 등산코스로 알맞다.
가까이 있는 문화마을이 있다.
수도권에서 가장 유명한 쉼터가 되어 있는 유명 산 휴양림을 알아보면, 휴양림 가까이에서 오른쪽으로 어비 산 어비계곡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이 자칫 유명산자락의 가까이 있는 계곡 모양 생각하기도 하지만, 전혀 또 다른 산에서 내리는 물이다.
용문산과 유명 산 가까이에 숨은 듯 있는 어비산 자락을 도는 시원한 몰이 내리는 곳이다.
조그만 여울 같은 물줄기에 전에는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 모양 보게 될 정도로 뛰어난 물줄기 이었다고 한다.
모양이 물고기 모양 비늘처럼 생겨 어비교 라고 한다.
물줄기는 유명산에 있는 물줄기와 어비교에서 사기막천을 지나 남한강으로 지나간다.
물줄기의 처음은 유명산 어비계곡 이라 쓰인 궁궐 같은 곳을 지나면서 부터다.
어비교 가까이에 있는 가일리 미술관 안내판이 계시되어 있고 곧이어 가평군 지정 어비계곡 문화마을 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왼쪽의 물줄기 가까이에 집들이 이루어 놓은 쉬는 곳과 물장난 하는 곳이 있다.
7개 정도의 시원한 쉼터와 작은 물줄기풀장이 죽 연결되어있습니다.
2km 정도를 걸어가면 가일2리 마을공회당이 있습니다.
마을공회당을 지지가면 금방 어비2교가 있고 동쪽 앞에 어비 산 모습이 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고 물탱크를 가보면 즉시 어비 계곡의 정말 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물줄기 양 옆으로는 수풀이 번창하여 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낀다.
7분 정도를 지나가다가 왼쪽으로 안경다리를 지나가다 조금 경사진 길로 들어서면 수풀이 울창하다.
울창한 숲과 계속되는 산에 있는 새 소리들이 벽지에 온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숲이 울창한 곳을 7분 더 지나가면 산림감시초소 옆에 군경계판이 있다.
군경계판을 지나가면 양평이라는 곳이다.
어비 계곡의 물줄기 위를 넘으면 양평 갈현 마을에 이른다.
잎이 많이 있고 수묵화로 그림을 그려놓은 비슷한 모양이다.
늦가을은 아름다움을 벗고 어떻게 보면 산의 모양 그대로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알려주는 산의 모양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일찍 오게 되면 아름다움을 보게 되지만 오늘도 감사하며 계속 내리는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아름다운 유명 산 물줄기에 걱정도 내려놓고 끝없이 내려다보게 됩니다.
계곡이 4Km나 길게 있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처음 산행이 끝 무렵에는 다리가 정말로 아파 물줄기를 가는 길이 자연그대로의 길이고 발바닥이 정말로 지쳐 있었습니다.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긴 물줄기 길을 내려 걷는 것은 정말로 좋은 산행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이 물줄기에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 하는 상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에는 힘이 드는 4Km의 아름다운 물줄기가 있습니다.
유명산 자연휴양림에서 유명산에서 계곡을 내려가다 마당 소에서 유명산으로 올라가서 자연휴양림 쪽 으로 내려갔습니다.
유명산 휴양림에는 날이 추워지고 야영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물줄기를 따라 내려 가며는 휴양림은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 같다.
유명산 산행은 유명산을 올라가고 유명 산 물줄기 쪽으로 내려가면 내가 물줄기소리를 좋아해서 물줄기를 따라 갔습니다.
길 따라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유명계곡을 갑니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물소리가 많이 쏟아지는 소리에 찬바람이 생각 될 정도 기뻤습니다.
휴일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4Km나 되는 긴 물줄기를 나 혼자 걸었던 물줄기길 발바닥이 매우 아프다.
넘어지지 않고 신경 쓰며 걷느라 산행과는 매우 피곤합니다.
전부 작은 폭포들이고 내리는 소리는 몸까지 나의 눈에는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물소리와 같이 살아 숨 쉬는 수묵화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물줄기 물을 바라보며 걷는 길 매우 좋습니다.
가다 뒤 돌아 보면서 찍어 두 길게 아름다운 물줄기 물길은 전부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왔더라면 풀려진 다리로 이 힘이 드는 물줄기 물길을 가기 가 힘이 듭니다.
사진마다 모두 아끼고 매우 습한 곳이라 바위에도 나무에도 이끼들이 많이 있고 늦가을 모습과 잘 어울려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듭니다.
다리위에서 걸어온 길 뒤돌아 찍은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너무 환상적인 소리랍니다.
수영금지 간판이 많습니다.
매우 깊게 보입니다.
사진에는 작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깊이가 매우 깊어 보인다.
이곳이 길이고 돌들이 매우 친근감을 느끼고 4키로 정도 걸으면 피곤이 금방 옵니다.
계곡을 내려다보면 고개를 들고 보면 수묵화가 아름답습니다.
지나가는 길 혼자서 지나 갈 수 있는 길 오른쪽 아래로는 큰 물줄기가 보이며 왼쪽은 매우 위험한 돌덩이들이 있습니다.
발바닥 힘들게 하는 길 시원한 물소리에 용서하게 되는 유명물줄기 구름이 매우 많이 있고 금방 햇볕이 있고 물빛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곳이 마당 소 박쥐 소 용소도 컸는데 마당 소는 얼마나 클까 하며 갔습니다.
물빛이 매우 아름답고 정말로 물속에 들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추워서 용기가 안 났지만 여름에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마당소로 내리는 폭포 아래쪽에서 보는 것과 위쪽에서 보는 깊이가 다르고 아름다운 물줄기를 뒤로하고 4Km의 긴 물줄기길이 끝나고 세 길로 나누어집니다.
나무들이 모양을 아름답게 있고 산으로 가는 길은 볼품없는 나무들의 몸매가 그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매우 푸르고 고개 들어 올려 하늘 보면 산속에서 하늘 보는 것 매우 좋아합니다.
매우 보기 좋은 이른 겨울나무 올라가는 길은 매우 힘들고 37도정도의 각도이고 힘든 올라가는 길이 끝날 때 정상110m 남겨두고 아름다운 풍경이 보입니다.
언덕만 올라가면 꼭대기입니다.
정상주변에는 많은 눈이 있습니다.
물줄기 길이 끝나면 싸리 눈이 오고 싸리 눈 매우 춥고 바람소리 매우 심하고 나뭇가지들과 같이 춤을 추고 춥기는 하고 바람소리가 들려주는 심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 좋아 했습니다.
정상에서 매우 거센 산바람을 맞고 매우 추운 사진 찍고 내려간다.
180도 회전하면서 찍어봅니다.
700고지인데 높은 산이 하나도 없고 가평이라 산모양이 아름답습니다.
즉시 있는 구름과 햇볕이 있고 매우 춥고 다리도 내려 갈 때는 90도 코스라서 힘이 듭니다.
버스종점에 있는 곳에서 신나게 놉니다.
기대안하고 있었고 버섯구이는 맛있겠지 하며 석쇠 위 깔고 그 위에 구운 버섯구이 나왔습니다.
두입 베여 물고 좋아하였습니다.
국산버섯구이이고 향이 좋습니다.
등산 후 버섯구이를 한두 번 먹어보기는 했지만 봄철이라 맛이 더 있고 이집에 좋은 버섯구이를 쓰고 너무 맛있고 이집에서 파는 버섯구이도 샀답니다.
가는 길에 두 줌 쥐어 맛을 보고 매우 고소하고 달고 봄철 잣은 매우 맛있고 한두 알만 먹어도 잣의 향기가 고소해서 요리는 한줌씩 집어 전부 다 먹어버릴 자세입니다.
물줄기길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가다 지치시지만 않으시면 물줄기 길은 사시사철 전부 아름답습니다.
물줄기 길을 갔다 등산을 하러 올 때는 다리가 매우 힘듭니다.
산행을 하고 물줄기 길을 걸었다면 물줄기 길이 눈에 왔습니다.
다리가 풀려 물줄기길이 매우 힘이 듭니다.
경치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물줄기만 갔다 와도 신이 납니다.
버섯구이는 양이 매우 많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제가 전부 먹었습니다.
사진을 후에 찍고 양도 많고 국산이고 가격은 이 만 원 등산 후 기분 좋게 먹으면 그것만큼 신나는 것이 없습니다.
사진이 이보다 몇 십 배는 많았지만 날이 매우 추워졌습니다.
하늘의 색깔이 매우 보기 좋고 아름답습니다.
지금 등산을 끝나고 왔는데 숲과 하늘이 매우 보기가 좋습니다.
아름다운 곳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저녁 보냈습니다.
등산객들이 많이 다녔고 숲과 하늘이 매우 보기가 좋습니다.
폐활량과 기립 근은 나의척추를 똑바로 세우게 하며 근력도 탄탄하게 하여 나의 몸을 건강하게 지켜줍니다.
봄 날씨가 되어 아지랑이 나고 봄철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건강 산행입니다.
친구들과 포천과 가평에 있는 운악산에서 눈썹바위 코끼리바위 사 부자바위 애기봉 신선대 무지치 폭포 빙벽 두꺼비 바위 무엇보다 멋진 망경대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보고 여러 가지 색의 아름다운 자연의 뛰어난 작품을 구경하였습니다.
운악산은 화악 산 관악 산 감악산 송악산과 같이 경기 5악으로 불리는 산중 가장 수려하며 경기 소금강이라 부를 만큼 경관이 뛰어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산모양이 크고 거대하며 산위에 올라가면 용문산 봉우리와 북한강 물 계곡 발아래 물줄기 사이를 흐르는 물이 경기도에서 보기 좋은 산으로 운악산 제일 명당자리에 현등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운악산 입구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현등사 입구에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 시절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 추모비가 설립된 삼충단이 있습니다.
산골짜기는 지금까지도 어름이 얼어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불이문중 매우 아름답고 높은데 건축되어 있습니다.
운악산 현등사는 신라 제 23대 법흥왕 시절에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 국사가 다시 건축했다고 전하여집니다.
용마루 양쪽에 설치된 치미가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의 모양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예술적인 건축미가 매우 아름다워 오래 동안 보았습니다.
일주문 내부안의 장식품과 색감이 진짜처럼 분명하고 고와 오래 동안 보다가 왔습니다.
운악산 현등사 일주문이 웅장합니다.
기둥이 나누어지는 것이 2개 굵은 것이 2개 모두 4개인 것이 특이 합니다.
일주문이 기둥이 2개가 한 줄로 선 있는데 특이하게 건설 되었습니다.
백팔번뇌가 무엇인지 해석이 잘 되어있습니다.
나도 지금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108번뇌 계단을 올라가는데 숨이 차고 힘들지만 108번뇌를 내려놓으니 마음이 가볍고 몸과 마음이 평안함을 즐기고 왔습니다.
힘이 들지만 마음 많은 편했습니다.
어린이들을 가르친 다음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마을 공회당에서 동네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약간 아는 태권도를 아침 일찍 가르치었다.
이곳 청소년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가지 못하고 마을 근처 개인이 운영하는 중학교 과정인 재건학교가 있었는데 거기도 못 보내고 집에 지내는 청년들이 다수가 있었다.
그래서 저녁에 농사일을 다 끝내고 저녁에 2시간씩을 중학교 영어와 한문을 가르치었다.
영어를 가르치고 다른 한 선생님은 한문을 가르치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일어 잘 살아보자는 표어를 갖고 열심히 서로 도와가며 지붕도 개량하고 농로 길도 넓게 하여 모내기를 편히 하고 가을에 벼 곡식을 잘 나를 수 있도록 농로 길을 넓혔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속도로가 서울서 부산까지 건설되었다.
이곳은 산골짜기가 되기 때문에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개울 건너편에 학교가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다 말고 길을 건너다 주어야 한다.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내려온 불어난 물은 엄청나다.
매년 2월초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개울 속에 동면해 있는 개구리나 냇물 물고기를 잡아 된장을 넣고 몸 내장 까지 끊여 먹는다.
처음에는 못 먹다가 몸에 좋다고 하여 먹었다.
몸은 적응력이 빠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50kg도 안되던 의 몸무게가 불기 시작했다.
2년 후 거기를 떠날 때는 몸을 추릴 수 있었다.
늦은 가을철이 되면 학부형들이 겨울을 잘 지내기 위해서 나무장작을 갖다 주었다.
가끔 아침이면 아이를 시켜서 할아버지 생신이라고 식사하러 오시라고 연락이 와서 학부형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모내기철 에는 모내기 밥 잡수시라고 해서 접심을 먹고 가을철 벼 타작할 때에는 타작 밥 먹으라고 먹었던 생각이 난다.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집에서 해먹은 적이 드물었다.
학부형들 인심이 고마웠다.
어느 날 같이 잘 지내든 마을 청년 집에 유명산을 가기 위해서 집을 방문하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동생 되는 아가씨가 얼굴이 새빨개가지고 말하기를 아직 면소재지 설악에서 아직 안 왔다 고 해서 발걸음을 홀로 유명 산 계곡으로 가다가 생각해보니 아가씨와 말도 나누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으나 단념을 하고 혼자 산을 올라갔다.
당시 거기도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어와 마을마다 사람들이 지붕을 개량하고 농로를 크게 확장하고 소득이 될 만한 유실수를 심고 마을 공동 일을 같이 협력하여 마을을 잘 가꾸었다.
어느 날 본교에서 체육행사로 배구대회를 끝내고 음식과 술을 마신 후 분교로 돌아오는 10리길이 걸리는데 거의 숙소에 가까이 논에서 귀신같은 웬 흰 물체가 보여 근처 가까운 집의 대문을 두들겨 사람 살려 소리를 질렀다.
집주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논 논두렁에서 순이네 할머니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아침 동네 돌아다니기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은 술을 동네 분들과 같이 마셔 술이 잔뜩 취하였다.
그 다음날 술병이 나서 온몸에 열이 나는 등 고생을 거의 한 달 동안 하였다.
겨울눈이 많이 쌓인 어느 날 아침 일찍 산책을 하다가 사는 집의 뒷산에 올라가서 다니다가 산토끼를 잡으려고 잡힐 듯 말 듯 하다가 노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2.조종초등학교에 근무
2년 후 3월 달에 이동 발령을 받아 가평군 조종면에 있는 조종초등학교에 근무를 시작했다.
학급은 24학급 규모인데 젊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고 매우 활기찬 학교였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크신 교장선생님인데 추운 겨울날에도 냉수욕을 하루도 빠지지 않으시고 하시었다.
그리고 국경일에는 빠지지 않고 행사를 꼭 하시었다.
행사시 운동장에서 당시는 피아노가 없고 대신 풍금으로 사용하는데 꼭 교사인 을 시키어서 연주하도록 하시었다.
물론 이상으로 잘 연주하는 선생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튼 을 시키셨다.
또한 거기서 인상 깊은 근무는 행정 실 업무를 하면서 아동들을 가르치었다.
정말 힘들었다.
밤 12시를 넘기기는 다반사고 새벽2시 까지 업무를 볼 때도 있었다.
요즘은 컴퓨터로 일을 처리하지만 당시는 주판으로 수기로 처리하던 시절이었다.
봉급날은 30여명의 직원의 봉급을 주기위해서 긴장의 날 이었다.
당시 봉급으로 자가용을 살 형편이 못되고 버스를 타고 교육청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려 현금을 받아오는데 추운 겨울날은 추워서 기다리는 것도 만만치 안했다.
봉급날 교육청에서 학교일하는 청부 아저씨와 같이 봉급을 타와 숙직실에서 돈을 다 월급봉투에 넣고 마지막에 계산을 해보니 돈이 한 달 봉급만큼 모자랐다.
너무 늦은 겨울날 봉급날이라서 많이 받은 직원 가운데 돈을 내놓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까지도 모자라는 돈은 나오지 안 했다.
당시 총각이라 다행이지 정말 힘들었다.
교감선생님은 일을 다 할 때 까지 댁에 안가셨다.
지금 생각해도 지독한 분이라 생각된다.
또한 아동들을 다음날 가르치었다.
너무나 힘들어서 가끔 자습도 시키었다.
괴로우니 할 수가 없었다.
열악한 학교환경과 학교에 재정형편이 궁핍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 맡은 학년이 3학년을 맡았는데 그 가운데 키는 작은 똘똘한 어린이가 있었는데 이름이 박지성인데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 제목은 방울꽃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속에로 시작하는 동요 곡인데 너무 잘 불러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린이 생각이 난다.
지금도 그 곡이 4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지금은 그 어린이도 50줄에 들어 같이 늙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교감으로서 그 학교를 방문할 일이 있어 가보니 37년 만에 처음으로 가보았는데 그곳에 마침 졸업 앨범에 사진을 보고 그때 당시 동료 교사들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깊었다.
젊은 청춘을 다 보내고 그 시절의 햇병아리 교사로서 여러 가지 지내던 일 모습이 또한 감회가 깊었고, 하숙을 하던 집도 가보았고 거주하던 집도 보니 그대로인데 주인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아무 인기척이 없어 발길을 돌이키었다.
그곳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던 일이 생각났다.
새벽1시경인데 자다가 잠이 저절로 깨어났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연탄가스를 마셨구나 하면서 누군가 얘기하기를 땅의 흙냄새를 맡으면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나서 겨우 기어서 방문을 열고 문밖의 마당 땅바닥으로 기어 나왔다.
때는 늦가을 날씨로 새벽공기가 차가왔다.
방안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집 마당 밖에 오들오들 떨면서 있었다. 당시 사는 동네 병원이 시골이라 아침 7시가 되어야만 병원 문을 열었다.
그날 하루 종일 학교 근무를 못하고 병원신세를 지어야 했던 생각이 난다.
교장 선생님이 큰 분이고 근처에 있는 사단장이 와서 아침 마다 같이 정구를 하고 직원이 아침에 커피와 먹을 간식을 대접 하였다.
어느 날 같이 있던 교사가 있는데 한양대학교를 나와 인천교대 양성소를 다녀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갖고 교사로 같은 동 학년 이었다.
하숙을 치는 집 아이가 동 학년 교사로 담임을 맡았다.
하숙집 부인과 가끔 대화를 나누고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지 대화를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내는 모습을 나도 하숙을 같은 집에서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같이 지내고 근처 연구주임으로 있는 분과 근처 2층 집에 있는 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보았다.
교회 목사님의 성은 신 씨고 아들과 딸을 각각 한 명씩 있었는데 아들 이름은‘바람이고 딸의 이름은 난다’였습니다.
교회에서 오동나무를 심어 몇 년 후를 내다보고 각 교인들에게 돈을 거두어 나무를 사서 심었다.
40년이 지난 나무도 엄청나게 크게 자랐다고 생각이 든다.
가끔 전도 한다고 근처 술집에도 다니면서 술도 먹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목사님이 술을 먹을 까 하고 사모님 에게 물어 보았더니 죄가 있는 곳에 은혜도 많기 때문에 목사님이 술집을 다녀 거기에 오는 손님과 술집 아가씨를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학교 교사 대표로 연구 발표를 하는데 연구부장은 크고 천주교 신자이며 아들 한명을 두고 내가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열심히 연구할 내용을 생각하다 마침 먼저 있던 복식 수업에 관한 연구를 하여서 가평 교육청에서 발표를 하려고 하는데 출장을 가게 되어서 교무주임이 대신 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전날 하드 콘택트랜즈를 눈에 넣고 잤더니 렌즈가 눈 속에 들어가 밤사이에 눈물기가 없어져 달라붙어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눈이 너무 아팠다.
할 수 없이 근처 청평에 있는 군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출장을 제외하고는 아파서 학교를 못 갔던 일이 이틀 밖에 없다.
몸이 아파도 기어코 이를 악물고서라도 학교에 갔다.
같이 근무하는 같은 학년에 예쁘장한 여선생을 짝사랑하였는데 그 여선생이 몸이 아파서 집에 있어 먹을 것을 사들고 수업이 끝난 후 찾아 가보니 먼저 근무하던 총각선생과 옆에 방주인이 벌써 와 있었다.
어느 날 비가 오는 날 학교 근처에 사는 여 교사 집에 마침 방문을 열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총각의 마음에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어 대화를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상대방의 여교사에게 궁급한 점을 물어보면서 사귀고 있는 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직은 결혼할 나이가 안 되어 없다고 하였다.
어느 날은 교직원들이 살고 있는데 나는 학교 근처의 산소가 있는 산이 집 앞에 있었고 마침 서울에서 내려와 같이 지내고 있던 둘째 형님과 같이 지내고 있는데 학교 교장 선생님이 방문을 하여 인사를 드렸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와 학교 근처에 탁구장에 탁구를 매일 두 시간 정도를 하고 겨울이 되면 학교 근처에 스케이트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하는데 처음이라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였다.
3년을 그 학교에서 보내고 학교를 옮기었다.
경기도의 양주군 모 학교로 옮기었다.
6학급의 소규모 학생 수는 300여명 이었다.
어린이들과 같이 수학여행을 하였다.
가 볼만한 곳으로 유명한 어린이박물관 다녀오신 분들은 어린이대공원 상상나라와 비슷하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는데요,
궁금한 마음에 예약 후 방문해보았어요,
요즘은 어디를 가나 예약 없인 방문 불가 현장 예매도 안 되고 하니 방문하시기 전 꼭 예약 후 방문하시길 바라고 자연 속에 낮 과 밤 그리고 사계절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고 멸종위기동물을 포함한 습지 생태계를 관찰 할 수 있다고 해요 가운데에는 연못처럼 꾸며져 있었고요
물고기 위에 채를 올려두면 물고기가 잡힌 것처럼 파닥파닥 영상이 바뀌고 채를 다시 빼면 자유롭게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요
올라오자마자 바로 보였던 물빛마을안개 숲 놀이터사람의 몸에 필요한 물의 수압 촉감 그리고 물의 특성을 이용한 체험을 할 수 있고 물의 길을 만들고 동영상 중 고양 아이랑 가볼만한 곳 어린이박물관 가볼만한 곳 어린이 박물관 물 폭탄도 발사 남자아이라 그런지 이렇게 총을 쏘며 노는 걸 좋아하고 신나게 물빛마을에서 놀다보니 옷이 젖었는데 아이들 옷을 갈아 입 을 수 있도록 뽀송뽀송 준비실도 준비되어 있고 엄마도 아들도 신났던 옛날 놀이 체험 장 최근 오징어게임을 재미있게 봤다.
저는 오징어게임은 모르고 땅따먹기 게임을 했었거든요
땅따먹기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옆에는 팽이가 놓여 있어서 저도 모르게 신이 났다.
어린이들은 땅따먹기를 이렇게 했어 팽이치기 채를 따로 주시는데 그림에 채를 치기만 해도 팽이가 신나게 팽팽 돌아가요
알록달록한 색감이 예쁜 장난감과 장난감 집들과 다른 세계 여러 나라 이야기해보며 퍼즐이 준비되어 있었다.
옆에 그림을 보고 퍼즐을 맞추는 활동이고 생각보다 퍼즐을 잘 맞추었다.
해류의 이동에 대해선 4세 아들은 그저 슬쩍 보고 지나가고 7~8세 정도 되면 아이와 이야기를 해가며 체험해도 좋았다.
꽃향기 마을엔 꽃을 심허보고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꽃잎차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손님 차 맛있게 드세요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아들도 맛있게 타주네요
100cm이상 아이들만 체험 가능한 아이그루 아들은 겁이 많이 없는 편이라
아이그루를 보자마자 자기도 타고 싶다고 난리를 치었다.
아이그루 타기 전에 키를 재는 기계가 있는데 키를 재보니 99.5cm이고 아이그루는 타지 못했다.
밥도 잘 먹고 잘 자라며 키가 조금만 더 큰 다음에 다시 오자 !
아쉽게 아이그루를 체험하지 못한 아들에게 보여주었던 꽃동산은 100cm미만의 아이들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해요
2층을 체험하고 나니 남은 시간은 약 50분 사실 2층 곳곳을 체험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3층에도 체험 할 곳이 많다고 하여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보았지요
3,봉암 초등학교에 근무
학교 운동회 연습을 열심히 지도하여 운동회가 있는 날은 지도한 조립체조를 학부형들 앞에서 보여주어 많은 박수를 받기고 하였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지내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몸이 허약하고 나와 같이 대화를 하였다.
교회에 청년이 있는데 군대 행정부서를 군대에 글씨를 잘 쓰고 당시 학교마다 학교를 소개할 때 차트로 발표를 하는 데 글씨를 쓰도록 매년 마다 부탁을 하였다.
학교 근처에 산이 있는데 학교에 다니는 아동들이 미끄럼을 타서 다치지 않나 걱정을 하여 수시로 지도 하였다.
어느 날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에 이웃학교 여선생이 찾아와서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교사를 집으로 보낸 다음 조금 있다가 생각하니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여선생 뒤를 쫒아 가보니 보이지가 않았다.
허탈한 마음을 갖고 쓸쓸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소풍을 가서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난 후 학교로 뒤 돌아 가려고 하는데 맡고 있는 어린이 2명이 안보였다.
소요산 여러 지역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보이지가 안했다.
할 수 없이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와서 혹시나 부모님 집에 먼저 와 있나 알아보았으나 아직 안 왔다고 한다.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는 중학생들에게 혹시 어린이 2명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도로에 걸어오는 2명을 보았다고 하여 부리나케 어린이들이 오는 도로를 향하여 달려가서 만나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4.의정부 경의초등학교에 근무
3년 후 의정부에 있는 초등학교로 이동을 하였다,
어느 날 맡고 있는 어린이들을 데리고 함께 교동 망향 대에 수학여행을 갔다.
북한이 지척에 보인다.
황해도에서 피란 내려오신 의 고향이 보이는 듯하다.
고향을 떠나 그 오랜 세월 가보지 못한 마음은 어떠할까..
난 예전 살던 동내에 찾아가 보곤 했다.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나고 좋은 여행이 되었다.
당시 학교 예산을 갖고는 해결 할 수가 없었다.
매년마다 그렇다.
시당국도 알고 있을 터인데 손을 덜 써서 그런지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학교는 물난리를 겪는다.
교장선생님이 이런 실정을 아시고 냄새 나는 큰 하수도 직접 학교에서 일하시는 소사 아저씨와 같이 일을 하신다.
어느 날은 감사원에서 학교 감사가 왔는데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 어디 게시느냐고 일을 하시는 교장선생님께 물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교장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시는 교장선생님을 보시고 이런 훌륭하신 교장 선생님이 경영하는 학교에 무슨 감사를 하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냥 갔다는 이야기를 같이 일하는 아저씨가 직원들한테 이야기를 하여 알게 되었다.
학급에 장난꾸러기들이 교장선생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감동이 되었는지 교장선생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그림을 그린다든가 또는 글을 써서 교장선생님께 갖다드렸다.
아이들은 하나 둘 학교생활의 변화가 왔다.
또 선생님들도 많은 근무자세가 변하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다.
가끔 그분의 학교경영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이런 훌륭하신 분에게 이상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교를 감사하기 위해 감사반원이 학교에 왔다.
이유인 즉 학교에 체육진흥회가 있는데 이를 불법 조직하여 돈을 학생들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처벌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고 파면까지 된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아찔 하는 순간이었다.
학교체육진흥회는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어린이들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코치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후에 우리나라의 국가 대표 급 스케이트 빙상대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빙상하면 대한민국에서 이 학교라 할 정도로 빙상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이런 지원하는 자금이 없었다.
예산이 없으니 학급별로 학급반장이나 부반장 학부형에게 일정금액을 부담시켜 운영하였다.
그것도 전임 교장선생님이 체육진흥회를 만들었다.
현재 교장선생님은 취지를 알고 계셨고 그러나 그것이 학부형들로부터 돈을 받아서 운영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폐지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전임 교장선생님과 현임 교장 선생님을 놓고 대질 심문을 하여 누가 이체육진흥회를 조직했느냐고 따지니까 전임교장선생님은 내가 조직을 안했다고 발뺌을 했다고 한다.
옆에 게시던 교장선생님이 제가 했습니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감사결과 알게 되었다.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도에서 감사결과 학교체육진흥회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9월 달 정기인사발표가 나왔는데 다행히 파면까지는 안 되고 규모가 작은 학교로 좌천을 하셨다.
다른 분 같으면 즉시 파면되었을 것이나 워낙 청령결벽하신 분이라는 것을 모든 같이 근무하시던 분이 아시고 이일을 안 같이 근무하던 도에 장학사들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하고 해서 작은 이웃 시골 조그만 학교로 가시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오히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송별회 모임에서 '나는 조금도 섭섭히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대한민국교장이냐 어디가나 교장하면 되지 구분을 하나 하시면서 오히려 남아있는 직원들을 위로하였다.
모든 선생님들이 정말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난감하였다.
어떤 여선생님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시었다.
숙직을 하던 여름철 어느 날 순찰을 하다가 담임하는 교실의 책상과 의자가 움직이는 느낌을 갖고 있던 중 그리스의 황제인 시저가 가장 신임하던 부르트스가 글 중에 나를 배반하다니 하는 소리가 은연중에 생각이 들어왔다.
다른 학교로 억울하게 좌천하신 교장선생님이 억울하게 전근하셨는데 너는 비겁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느냐는 질책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옮긴 학교에서도 학교를 위해 열심히 하셔서 퇴임하신 후 그곳 학부형님들이 학교 교정 안에 공덕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학년을 맡고 비가 오는 어느 날 담임을 맡은 어린이들 가운데 등치가 크고 부반장으로 있는 어린이가 갑자기 옆에 있던 아이를 쉬는 시간에 얼굴을 때려 이가 나가 급히 학교 근처 치과 병원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하고 다친 어린이의 집으로 가서 학부모에게 사과를 하고 매일 퇴근 후에 한 달이 넘도록 다녀 부모의 마음을 달래 보려고 노력하였고 며칠 후 다치게 한 어린이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데 같이 다친 학부모 집에 보상금으로 얼마간의 돈을 드렸다.
지난 10월 중순에 일주일 동안 국내 수학여행의 가장 국내 여행지로 1위에 드는 제주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지난번 수학여행을 갔다 온지가 벌써 5 달이 넘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수학여행지로 금년 10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 5박 6일 동안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이날까지 미루게 되어 수학여행을 다녀온 생생한 기억과 감동이 많이 줄었지만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에서 구입한 밀감 카라향기보다 진한 추억을 남긴 이번 여행의 정말로 추억의 기록으로 남기려한다.
정년퇴직 후에 글쓴이는 오랫동안의 병상 생활로 졸업한 어린이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체력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도 이번 수학여행은 함께하고 싶어 동행하였지만 여행 중에 일행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였다.
그렇지만 5박 6일간 놀면서 먹고 쉬면서 한 이번 제주도 수학여행은 사제 간 우정을 깊게 나눈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결코 간단치 않았던 이번 수학여행의 역할 분담은 자연스레 여행 일정을 기획하고 준비한 교무주임 선생님이 대장을 여행 마니아며 가장 운전을 잘하시는 선생님이 현지에서 빌린 카니발 운전을 그리고 다른 선생님이 사진 기록을 맡게 되었다.
5박 6일 여행 기간 내내 진심 어린 도움과 배려를 받았다.
사실 필자가 퇴직한 2012년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경비를 사전에 적립해 나갔으나 아쉽게도 필자는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그때 일행과 합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젠가 동기생 모임에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후일담을 들었을 때 너무 부러웠다.
우리 일행은 오전 11시 40분에 김해공항에서 트랩으로 탑승하여 오후 1시경에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제주국제공항은 국내외 여행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이 혼잡하였다.
짐을 찾아 바깥 통로로 한참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예약해 둔 7인승 카니발을 대여하여 제주도 여행 시동을 걸었다.
차창 너머로 뵈는 4월 중순의 제주도는 아름다운 봄꽃 향연을 펼친 흔적만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바다로 내려앉은 넓은 개활지 오름 사이의 수목들은 벌써 싱그러운 신록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리 여행단이 보낸 여행 일정을 기록해 본다.
10월 15일 첫째 날은 마산역을 출발하여 김해공항을 거쳐 제주공항에 오후1시경에 도착하고 7인승 자동차를 대여하여 제주 여행을 위해 출발하고 오후1시30분경 점심을 먹고 곽지해수욕장에 가서 가까운 곳에서 휴식을 하고 농협 하나로 마트에 도착하여 물건을 사고 애월여가 한옥펜션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관광을 위해 출발하여 애월우체국 인근 노포 식당에서 성게식당에서 미역국을 먹고 상가리야자숲에 도착하여 양떼을 구경하고 점심때 식당에서 해물찜을 먹고 한라수목원을 구경하고 숙박지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음 잠을 잤다.
다음날 식사를 한 다음 짐을 챙겨 관광지를 출발하여 김창열 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을 관람하고 점심은 해물갈비전골을 먹고 곶자월을 구경하고 산방산을 거쳐 용머리 해안에 도착하여 숙박지인 서귀포 라임 오렌지빌펜션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관광지를 출발하여 김창열 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을 관람하고 낭쿰낭쿰에서 해물갈비전골을 먹고 곶자왈을 구경하고 천지연 폭포를 구경하고 이중섭과 왈종미술관을 구경하고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에서 시장 안에 있는 통나무집 회 센터에 점심을 하고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을 구경하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 새연교를 지나 외돌개에 도착하여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하고 점심은 해물찜과 생갈치조림을 먹고 이중섭 거리에서 선물을 사고 치유의 숲을 구경하고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을 방문하여 캬라향을 사고 숙박지로 돌아왔다.
지금 현재 아내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아내의 언니가 같은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구역예배를 아내의 언니의 집에서 들렸다.
구역예배를 보는 동안에 아내가 나를 슬쩍 처다 보고 지나갔다.
다음날 언니가 한번 만나 보려는 의사가 없느냐? 하고 말을 하였다.
언제 어디서 만나볼 까요?
내일 의정부에 있는 빵집에서 만나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내 동생에게 만나도록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처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냐고 수고하였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하시는 일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교회에서 서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러갑시다.
그렇게 합시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도록 하겠습니다.
한식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습니까?
그렇게 하죠.
종업원 아가씨 여기 음식을 시키려는데 여러 가지 한식 메뉴 중에 좋은 음식을 가져오세요.
한식 뷔페가 저의 음식점에서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죠.
참 맛이 있습니다.
저도 맛이 있습니다.
종업원 아가씨 여기 커피 한잔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기 있는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하는데 같이 가서 구경을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좋습니다.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사는 동네로 갑시다.
그렇게 하죠.
저도 좋습니다.
내일 6시경에 사는 곳 다방에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죠.
무슨 차를 좋아하십니까?
인삼차가 어떠한가요?
저는 커피를 마시려고 합니다.
내일 여기서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만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언니가 말하기를 너와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도 당신을 처음 뵈올 때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일 이곳에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요.
나와 같이 이 근처에 같이 걸어볼까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든 참이에요.
당신과 같이 걸어가니 행복합니다.
저도 기쁩니다.
당신을 보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내일 여기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과 같이 저 언덕을 한번 걸어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이 날 것 같습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도 당신을 잊을 수가 없고 어제 잠을 잘 때 당신 생각을 하여 기쁜 마음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 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만약 당신이 보시기에 얼굴이 추하기 짝이 없다면 그래도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만날 약속을 정했다.
노원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척하셔도 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조금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금발의 전형적인 한국인계의 미인이 나타났다.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순간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고는 그녀도 녹색 옷을 입은 여인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6시 멀리서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듯 했다.
놀랍게도 걸어오는 여인은 못 생기다 못해 매우 흉측한 모습이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쪽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짧은 순간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 척 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정말 그녀를 모른 척 해야 하나?’
'아니야. 원망해야 할 상대는 적군이야.’
이 여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고 3년 동안 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랑했어.
이건 변할 수 없어.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배신하는 거야.'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보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책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고 전 아니고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여자 분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장미꽃을 달고 이 앞을 지나가 달라는 저에게 말을 거는 분에게 식당으로 오시라고 전해 달라더군요.”
식당에 들어서자 녹색 옷을 입었던 내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반겨 주었다.
나는 놀라 당황하는 그에게 붉어진 얼굴로 부탁하였다.
“오늘 일은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당신을 실험 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해 주세요.”
나의 가교 역할을 하였던 그녀가 실명을 쓰지 않고 "감동적인 사랑 실화”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게재했고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큰 소문을 불러 일으켰다.
비슷한 이야기가 소설로도 쓰여 지기도 하고 심지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급격히 추워진 겨울 날씨 움직이기는 귀찮을 때 따뜻한 이불 속은 천국과도 같죠.
외출까지 어려워진 요즘 주말이면 모든 것은 잠시 잊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귤 하나 까먹으며 소설책을 읽는 것도 겨울의 묘미 중 하나 아닐까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책을 훔치려던 소년을 쫓다가 그 소년이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모든 비난과 책임을 등에 지고 긴가도 서점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찾아간 오후도 서점은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유일한 서점인데요.
서점 주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 처해 대신 내가 그곳을 맡아 운영하기로 해요.
그 무렵 서점의 직원들은 내가 떠나기 전 찾아낸 보물 같은 책 4월의 물고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데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학교에서 6학년을 맡고 학교 대표로 수업연구를 하여 당시 의정부와 양주군이 한 교육청으로 통합되어 있는 가운데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양주군의 수업연구 교사 대표는 예쁜 여교사가 받았고 당시 나는 총각이라 여교사에게 관심이 있어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여교사에게 관심을 갖고 사귀었다.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쓰는 것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도 딱 붙어 있을 수 있는 떳떳함과 우산 아래 작은 공간에서 빗소리로 둘러싸여 우리 둘만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고요함과 세상 어떤 향기보다도 달콤한 나만의 향기를 맡으며 길을 걸을 수 있는 황홀한 공기 이런 것들은 비 오는 날 여교사와 함께 쓴 우산 아래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더 우산 같이 쓰기는 그녀가 날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여준다면 그만큼 날 더 생각한다는 것이고 비를 조금 맞으려고 우산을 좀 더 자기 쪽으로 향한다면 나보다 자신을 더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그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면 평생 그녀를 모르는 사람으로 놓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자고 하면 골치가 아프고 헤어진 연인이 잘되면 배가 아프지만 헤어진 연인이 불행해지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이 말의 핵심은 한때 사랑했던 옛 연인이란 그만큼 복잡하고도 미묘한 존재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배가 아파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을 놓아줬을 때 가능하기에 지나간 사랑은 지나간 채로 두는 게 가장 아름답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에서 가정을 연인으로만 바꾸면 이별에도 이 명제를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명제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연인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며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연인들은 헤어졌다.
우리가 이별을 하는 첫 번째 이유 바로 사랑이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 아니라는 것과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어떤 명백함이라는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건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건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평생을 함께할 사람으로 확신한 건 첫 느낌 때문도 아니고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그녀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나의 일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도 그와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답을 찾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의 반대를 겪는 그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웃게 해주고 싶고 그녀의 인생에 보탬이 되고 싶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
교직의 바쁜 생활가운데 글을 쓰기위해서 모 대학창작문예학과를 다니면서 많은 글쓰기와 당시 유명한 소설가들로부터 글쓰기 강의도 들었다.
같은 문예 창작과에 다니는 초등학교 교사도 있고 대학을 나온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숙직 교사로 근무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어느 여학생이 울고 있었다.
성폭행을 당해서 우는 것 같았다.
위로의 말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오해를 받을까 그냥 지나갔다.
집이 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
내가 신혼시절이라 아내를 보고 싶어서 숙직을 하던 중에 학교 담을 넘어서 있는데 경찰 아저씨가 왜 학교 담을 넘어 다니느냐? 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나는 이 학교 숙직교사 라고 순찰 중이라 하였다.
내 말을 듣고 경찰은 지나갔다.
이튿날 학교 교장 선생님 에게 불려가서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지적을 받을까봐 겁이 났는데 다행히 경찰이 지나가서 안심이 되었다.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함께 잠깐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다시 학교로 들어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이층집인데 나의 집은 이층 방을 전세를 내어 살고 옆집에는 신문기자 되는 분이 살고 있었다.
아래층은 집 주인이 살고 있고 할아버지는 버스기사이고 아들은 택시 운전기사였다.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육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래층에는 화장실과 목욕탕이 같이 있어 나와 아내는 그곳에서 화장실도 이용하고 목욕도 하였다.
2년 후에 의정부 터미널 근처에 있는 주공 아파트로 분양을 받아 이사를 갔다.
집에 새로 이사를 하여서 직원 50명 정도가 집을 방문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
퇴근 후에 집에 오니 아래층에 사는 아저씨가 내게 이야기하기를 집에 불이 나서 내가 소방서에 연락을 해서 소방서 아저씨들이 문을 열고 불을 껐다고 하였다.
집에 들어가 보니 싱크대 옆에 있는 음식을 만드는 가스 밸브가 열려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불이 난 내용을 이야기를 하여 아내가 급히 집으로 왔다.
내 딸이 근처 살고 있는 집에서 중량 천 근처 어린이집에 다녔다.
아내는 딸을 아침에 데려다 주고 나는 퇴근 후에 거기를 가서 딸을 데려왔다.
여름 방학이라 학교 보이스카웃 활동을 아동들과 같이 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나에게 하였다.
딸이 데었다고 하였다.
급히 집으로 가서 원인을 아내에게 물어 보았다.
아내가 이야기하기를 젖병을 소독하느냐고 물을 펄펄 끊는 주전자에 방에서 기어 나와 뜨거운 주전자를 업 질러 손을 데었다. 라고 하였다.
살고 있는 근처 병원에 급히 가서 치료를 받았다.
어느 사람이 지나가다 이야기하기를“서울 청와대 근처 효자동에 병원에 가면 의사가 치료를 잘 한다”고 하였다.
매일 서울에 있는 병원을 버스를 타고 가서 치료를 하는데 의사는 나이가 많고 데운 곳을 전부 피부의 껍질을 제거하고 옆에 보고 있던 나와 아내는 아파서 우는 아이를 보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한 달 기간을 매일 서울에 있는 병원을 아내와 같이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다녔다.
어느 날은 맡고 있는 반장의 아버지가 퇴근 후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양식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처음으로 양식을 먹어 먹는 법을 몰라 눈치를 보고 학부형이 양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눈치를 보며 먹기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나도 급하여서 학부형이 가자고 해서 나도 양식집을 나와서 집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집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학부형이 사준 양식을 잘 먹지 못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배가 불러 집으로 왔다.
어느 날은 아내의 오빠가 회식 식당을 하는데 저녁 식사로 양식식당으로 가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역시 양식 먹는 법을 몰라 눈치를 보다가 양식 식사를 같이 하고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느 날 학급을 맡고 있는 어린이 가운데 힘이 세고 부반장의 어린이가 비가 오는 날 반 어린이의 이를 때려 부러뜨려 당황한 나는 급하게 옆에 반 교사에게 반 어린이들을 부탁을 하고 급하게 근처 치과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병원을 다녀온 후 다친 어린이의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하고 집으로 왔다.
거의 한달 동안을 다치 어린이의 집을 방문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다녔다.
다치게 한 부 반장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마지막 다친 어린이의 집을 방문 하는 날 같이 가서 내가 위로금을 당시 10만 원 정도 주었다.
당시 나의 봉급은 30만 원 정도 이다.
어느 날 반장어린이의 학부모가 학교 근처 양식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퇴근 후 초대한 학부모 양식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데 처음 먹어본 양식이라 고기를 어떻게 먹을까 망설이다가 학부모의 식사하는 법을 보고 반 정도 먹고 학부형이 기다리는 것이 미안하여 같이 나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어린이들과 근처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의정부 미군부대로 어린이들을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 놀이와 보물찾기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노래도 부르고 장기자랑도 하였다.
6학년 어린이들과 수학여행을 갔다.
설악산 비룡폭포가 용의 전설의 시작점이라니 금강산보다 낫다느니 어사 박문수가 비선대에 왔다느니 의상대 아래에서 점심으로 해녀들이 요리한 전복회를 먹었다.
제주 해녀들은 부산과 동해안에 먼 길을 다녔다.
회를 해삼이나 전복 멍게를 맛있게 먹었고 아름다운 풍경은 이와 같다.
의상대 동쪽 편 모래밭 서쪽으로 차양을 친 점포들이 있다.
경포대 일출을 보면서 전복 멍게 해삼을 먹었다.
일정을 보면 매우 분주했다.
밤 11시 반쯤 달빛도 가득하고 밤색갈이 아름답다.
호수 근처 길은 조용하고 깨끗한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온 몸으로 나간다.
영랑호를 돌 때부터는 센바람이 걸음을 막으며 동해안 해풍의 모양을 보여주었다.
바람이 조용한 시간이 오면 서쪽 방향으로 기울어진 달빛에 영랑호 갈대에 웃음 짓고 사진 한 장으로 이 아름다운 친구의 사랑 순간을 찍었다.
가로수가 근처에 있는 달은 가끔 아름다운 얼굴로 나를 비쳐 주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영랑호의 모양 실마다 이야기가 계속하였다.
단풍이 물들은 비에 물든 설악산이 있는 아이들 마음도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 30분경 버스에 승차를 하였다.
숙소를 떠날 때 설악산의 무지개가 아름답게 있다.
써늘한 날씨였다.
비가 가끔 내리기 시작했다.
햇볕이 들면서 비가 오니 호랑이 장가가는 비 여우 시집가는 비라는 얘기도 나오며 금방 그칠 비라고 생각해 봤지만 비는 조금 더 굵어지며 계속 왔다.
다음날에는 비가 와서 권금성 케이블카 일정을 변경했다.
설악산 근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산은 전부 아름다운 단풍이 있고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상상해본다.
비로 인하여 예정된 권금성 케이블카 타는 일정을 최소를 하였다.
예약된 식당은 취소가 안 됐다.
후에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근처 처마 밑에서 아이들이 비를 피하는 모양이 불쌍하게 보였다.
식사를 하였다.
어린이들은 그 시간에 밥 한 그릇까지 다 먹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비는 안 왔다.
설악산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바닷가로 버스를 타고 갔다.
멀리 구름이 많은 속초바다를 모습으로 단체 사진 한 장 반 별로 한 장 계속 찍었다.
다시 헤어지기 싫은 생각을 하면서 동해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에는 경포해수욕장의완만하게 깊어지는 깨끗하고 깊고 지평선 같은 아름다운 바다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륙붕이 완만하고 급하지 않고 갯벌이 깨끗하지 않은 바닷가와 다도해를 여러 번 갔다.
모두 모였다.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달빛 같은 아이들 그 빛이 나에게 관심을 끌었다.
그 빛이 나를 바라본다.
그 빛이 나를 둘러본다.
강원도 통일전망대로 갔다.
금강산기차여행 에서 밥을 먹고 서서히 둘러보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수학여행 및 종교모임 각종 가족들 토요일 이라 사람이 많다.
고성 통일전망대에 입장료는 오 천 원이다.
가족들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다.
사람이 살면서 꼭 다시 와야 될 장소인 것 같다.
금강산도 보여서 정말 빛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고성에 바다도 정말 아름다운 빛 바다여서 너무 좋다.
북한도 보고 금강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 기도도 드리고 정말 할 수 있는 많은 곳이라고 상상해 본다.
동해안의 금강산 비로봉과 해금강을 구경 할 수 있고 반공교육에도 도움을 줄 목적으로 1983년 7월 26일 시작해 다음해 2월 9일 완성하였다.
북위 38.35˚에 위치하며 해발고도 70m에 높이 8.8m의 2층 건물이다.
전 면적이 104평이며 1층과 2층 각 52평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멸공 관으로 민족의 얼 멸공의 의지 통일을 향한 전진 등 3실로 나누어져 6·25전쟁 당시부터 지금 까지 여러 가지 무기와 장비 금강산의 큰 모형 사진 등이 있다.
2층에는 120석의 좌석을 배치하고 남쪽 면은 전부 유리창으로 만들어 북한의 금강산과 해금강을 즉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망대 주위에는 지름 1.25m 높이 1.87m의 통일기원범종과 전등 1,500개가 있는 전진십자철탑 민족 웅비 탑 마리아상 통일 미륵불 351고지 전투전적지 등이 있다.
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끝 16㎞ 길이 25㎞정도 되지 않아 일출봉 552m 월출봉 채하봉1,588m 육선봉과 집선 봉 세존 봉 옥녀봉1,424m 신선대 관음봉 등 금강산의 대표적인 봉우리가 있다.
그러나 최고봉인 비로봉은 gm린 날에는 볼 수가 없다.
해금강은 정말 가까워 만물상 부처바위 백 바위 구선 봉 외에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로 유명한 감호 등 해금강 전체를 전부 볼 수 있다.
통일전망대에 가기 위해서는 10㎞ 북쪽에 있는 통일 안보 공원을 거쳐야 하며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매해 170만 명에 달하는 실향민과 관광객이 온다.
주변 구경거리는 대진 항 화진포 호 화진포해수욕장과 남한 최북단 마을 명 파리 역사안보전시관 있다.
전망대안내 입장권이 3천원이다.
고성8경 통일전망대 고성군 현내면 저진리 소재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 고지의 통일전망대는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가까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 봉 등 천하절경 금강산을 바라 볼 수 있다.
휴전선 철책을 사이에 두고 있는 발밑에는 동해북부선 철도 길을 연결하는 공사 모습과 2004년12월 개통된 동해선 남북연결 도로로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루어 작년과 재작년에 동 해안과 남해안을 각각 일주일씩 갔다.
저절로 금년 해는 서해안 차례가 되었다.
수학여행을 서해안으로 갔다.
장마철이라 거니 태풍이 온다느니 하는 말들을 다 집어 치우고 용기 있게 6월 20일 금요일 8시에 출발했다.
시작하면서부터 날씨는 비에 바람까지 불어 매우 불안하다.
그래도 떠나는 마음과 행복감이 증가했다.
학교를 출발한 버스는6시간 만에 목포역에 도착했다.
목포역에서 바로 유달산으로 갔다.
비바람이 매우 세어서 사람이 거의 없어서 유달산을 구경하였다.
제주도 가는 배를 갈 때 마다 항상 구경하기만 했지 가기는 처음이다.
이순신장군 관련 노적봉이나 대학 루 일등바위 이등바위 달성 사 까지 다 구경하였다.
잘 볼 수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내려오는 길에 골목근처에 있는 숙소로 갔다.
걸은 거리는 12km이다.
TV에서는 뉴스로 태풍소식이다.
바람이 세고 비가 많이 와서 우산을 버리고 우의를 사서 입고 갔다.
목포터미널에서 무안을 거쳐 해제면 정류장에 도착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태풍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막는다.
그래도 처음 계획했던 해제면 유월 갯벌 해안 길을 맛이라도 보자며 구경을 하였다.
빗속을 걸어서 해제면 갯벌에 도착하여 물 빠진 갯벌 깊숙이 걸어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버스 종점으로 갔더니 그 곳 명칭이 도리 포 다.
도리 포 수한횟집에 들어가서 민어지리 탕을 먹었다.
국물 맛이 있다.
다음 영광으로 넘어가야하는지라 식당 주인이 말하기를 버스로 가자면 다시 왔던 길을 다시 가야한다며 지금 도리 포에서 영광을 연결하는 축산대교가 공사 중이고 일급 정보를 얻은 덕에 일단 다리로 가서 공사하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서 영광으로 넘어가고 다리에 가본즉 비바람 탓인지 공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불 수 없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잠정 허락을 받은 것으로 하고 2km 넘는 다리를 건너 30분 정도에 영광 땅에 도착하였다.
둘러 갔더라면 다섯 시간은 걸린다.
도로 정류장에서 기다렸다가 관광버스를 타고 영광읍내로 들어와서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걸은 거리는1km이다.
날씨는 계속 비가 온다.
계획은 백수 해안 길을 걷는 것이었지만 비가 와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기로 하여 영광터미널에서 일단 전주로 갔다.
여기는 날씨가 구름이 있고 가끔 햇빛도 보인다.
장항터미널에서 길을 따라 국립 생태 원 생태공원까지 갔다.
온대 열대 사막 한대까지 여러 가지 생물을 불 수 있었고 생태 보존의 필요성을 체험하는 좋은 구경이 되었다.
도보로 장항읍내로 돌아와서 옛날 장항 역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옛날 장항 역사를 구경하고 역사 의자에 앉아 쉬고 날씨는 맑고 아침부터 덥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근처 장항제련소를 향해 걸어갔다.
송림으로 갔다.
송림은 매우 큰 소나무들 사이로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서 기분 좋은 아침을 경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은 쉰다.
볼을 던지는 구경하기만 하고 그 옆에 있는 해양 생태 원으로 갔다.
해양 생태 원 역시 월요일은 휴무이다.
더운 햇볕 아래 다시 장항역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서 갔다.
기념관이랑 생가는 월요일인지라 문을 닫아 놓아서 들어가 보진 못하고 역시 둘러보았다.
그래도 내친 김에 만해 선생 생가를 향해 다시 도보로 갔다.
그런데 길은 멀고 날은 저물고 돌아 나올 길도 쉽지 않고 다음 기회에 구경하기로 하였다.
날씨는 좋다.
아침식사를 하고 용봉산으로 출발하여 내포 신도시 약간 못 가고 용봉산 입구에 왔다.
홍성 읍내와 내포신도시가 잘 보인다.
그리고 용봉산의 바위들이 잘 보인다.
설악산과 비슷한 여러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
2시간 만에 꼭대기에 도착하여 잠시 쉬고 산을 내려와서 내포 신도시로 갔다.
5천 원짜리 한식 뷔페라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반찬을 집어 올리다보니 가짓수도 많고 반찬 하나하나가 아주 맛이 있다.
서산-태안을 거쳐 천리포수목원에 갔다.
급하게 이리저리 바쁘게 구경하다보니 다 돌아보았는데도 조금 시간이 남는다.
수목원을 나와서 만리포해수욕장으로 갔다.
해변 모래사장이 있는 여름 서해바다를 갔다.
처음 목표로 했던 천리포보다 만리포가 더 가슴에 와 닫는다.
서산에 가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서산 시내를 야간 구경을 하였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아주 기분 좋은 하루였다.
걸은 거리는 500m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흐리고 장대비가 내린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내포-덕산을 경유하여 수덕사에 갔다.
버스 이동시간이 길어서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먹어본 밥 중에서 맛이 제일이다.
덕숭 산은 용봉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는 산이다.
바위도 보기에 형편없고 경치도 별루다.
수덕사를 안고 덕을 이룬 산으로서의 모양이 느껴지는 산이다.
아이들과 같이 내려와서 올라갈 때 남겨두었던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한 시간 넘게 더 기다려야하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발의 인내심이 부족하다.
의기투합하여 도보행군에 나섰다.
도중에 윤봉길의사 생가와 기념관을 구경하고 예산에서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흐린 날씨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서 걷기에 매우 좋았다.
걸은 거리는 300m이다.
여행을 끝내고 학교로 가는 날이다.
처음 계획은 예당 호를 찾아서 출렁다리랑 둘레 길을 걷는 것인데 새벽부터 천둥번개에 비가 많이 온다.
계획을 포기하고 버스로 학교를 갔다.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통일이 멀지않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수학여행이었다.
5.의정부 가능초등학교 근무
아침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오후 1시에 수업이 끝나고 다시 그 교실에서 1시부터 수업을 한다.
어느 날 학교 창고 뒤에서 아이들이 먹다 버린 빈 우유 곽을 쌓아 놓은 곳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다가 담배꽁초를 버려 불이 난 것으로 생각이 되어 소방서에 지나가던 사람이 연락을 하여 불이 학교에 붙는 것을 방지 할 수 있었다.
당시 열악한 학교에 대한 지원 실정이었다.
학교 화재가 났는데 새벽에 학교에서 긴급 소집을 하여 학교에 가보니 학교 교실이 마룻바닥이 반 정도 탔다.
불이 난 원인은 교실에 초저녁 어두컴컴한 때에 몰래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선생님 서랍 속에 무엇이라도 있나 하고 훔치려고 보이지 않으니까 성냥불로 하다가 성냥불에 책상위에 있는 종이에 불이 붙어 일어났다.
새벽2시경 어느 학부형이 택시를 타고 학교 근처를 타고 가다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신고했다고 한다.
원상 복귀시키기 위해 전 직원이 합심하여 페인트를 칠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루 종일 하였다.
당시 불이 난 교실 담임교사의 남편은 육군 보안부대 상사이고 직원들이 모인 곳에서 당시 교장선생님이 말씀을 하시다 우시었다.
정년을 앞두고 이런 일을 당했으니 하마터면 불명예스럽게 파면을 당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경영의 원칙을 세우고 흐트러짐이 없이 운영하는 깔끔한 분이었다.
당시 학교에 가끔 불이 나서 불이 난 학교의 교장은 물론 관계 교육청의 책임자를 징계하였다.
교장 선생님의 동생이 내무부 국장이어서 파면은 면하고 징계도 피하였다.
내가 맡은 반 어린이 가운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등치가 큰 어린이가 있는데 가끔 수업 시간에 예쁜 여자 어린이를 괴롭혀서 그것을 해결 하려고 가정 방문을 하여 부모의 협조를 구하였다.
반장으로 지냈든 어린이가 지금은 장년이 되어 몇 년 전 만나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또 박봉 속에서 교육대학원을 힘들게 공부하면서 졸업을 하였다.
6.남양주 시 양정초등학교 근무
남양주시에 있는 학교로 이동을 하였다.
이 학교 길 건너에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는 유황가스로 근로자 되는 분이 폐가 망가져 입원을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가 매우 많은 회사였다.
당시 그곳 도로 근처를 차를 타고가면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전셋집을 얻어 그곳에서 지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 년만 지나면 문고리가 녹이 슨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그곳 학교에서 인상적인 것은 교장선생님이 운동경기에 많은 관심을 가져 특히 축구 유도는 전국을 대표할 정도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열정적이었다.
학년은 6학년을 맡았는데 유도선수 아이들이 몇 명 있어 대구에서 하는 전국유도대회에서 인솔교사로 같이 가서 우승도 하였다.
그러면서 바쁜 교직생활가운데 어려운 봉급생활을 받으면서 야간정규대학을 졸업하였다.
일제 이후 산행 기를 찾다보니 유무명인들의 회상기와 에세이집을 남들보다 더 들추어 보게 된다.
70년대에 등산은 나름 품격 있는 스포츠여서 글 한 두 편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70년대면 이제 누구나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아래에 그 여정을 적고 있다.
망우리 너머 제3신앙촌 다산묘소 이런 곳을 들렀다는 건지 지나갔다는 건지 일제하 금강산을 당연히 찾았을 텐데 금강산에 관한 회고록이 수필집에 없다는 게 아쉽다.
당시 설악산 가이드들의 뻥이 셌다.
비룡폭포가 용의 전설의 시작점이라니 금강산보다 낫다느니 어사 박문수가 비선대에 왔다느니 의상대 아래에서 점심으로 해녀들이 요리한 전복 회를 먹었다.
제주 해녀들은 부산과 동해안 곳곳에 원정을 떠나왔었다.
당시에는 회를 먹지 않고 해삼이나 전복 그리고 멍게를 먹었고 그 실제풍경은 대체로 이렇다.
의상대 이쪽 편 모래밭 끝 쪽으로 차양을 친 간이 점포들이 줄을 서 있다.
경포대 일출을 보면서 지금 그들은 소주 한잔과 전복 멍게 해삼을 안주로 먹고 있다.
일정을 보면 알다시피 참 바빴다.
고성 통일전망대에 가면 주차장 옆에 6·25전쟁체험전시관이 있습니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서에서 출입증을 받고 DMZ 박물관을 구경하고 최종 목적지인 통일전망대에 도착한다.
고성 통일전망대 가는 길 및 관람안내 DMZ 박물관 고성 통일전망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룬 가르치고 일깨워 민족화합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6.25 전쟁을 경험 할 수 있는 곳이다.
영상체험실과 사진으로 보는 6.25 전쟁 죽은 유해 발굴 실 6.25전쟁자료실 유엔군 참전국실 6.25 전쟁 중 동해안의 주요전투를 다룬 기획전시실 등에서는 6.25 전쟁의 참상과 실제 몸습을 사진과 영상 자료와 유물 등을 통해 즉시 체험 할 수 있다.
더불어 국군홍보실과 국군 비전 실 병영 체험 실 등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상과 병영생활을 즉시 체험 할 수 있다.
통일전망대에 가기 전에 6·25전쟁체험전시관을 구경하고 다음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사진과 영상으로 6.25 전쟁을 보고 전사자 유해 발굴 실 유엔군 참전국실 병영 체험 실 6.25 전쟁 자료실 국군홍보실 국군 비전 실 기념품 등으로 구경을 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6.25 전쟁과 영상 체험 실은 코로나로 안하고 있다.
6.25 전쟁, 그 시련의 역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침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28일 수도 서울 탈환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1차 공세 시작 1950년 12월 3일 유엔군 전면 후퇴 1951년 6월 23일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 개시 1953년 4월 20일 상병 포로 교환 개시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 조인 1953년 8월 5일 포로교환 실시하였다.
전투장면 모형 야간전투의 현장과 야전막사 등을 멀티미디어 음향과 함께 재현하여 6.25 전쟁의 전쟁 상황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사자 유해 발굴 실 모습 국군의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아보고 만들어 놓은 유품과 유골 등 전시물을 통해 6.25 전쟁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4월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시작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은 매장 장소 자료의 제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엔군 참전국들 6.25 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을 도와준 유엔군 참전 16개국에 대한 정보와 깃발 참전규모와 주요전투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전몰자에 대한 추모의 장도 함께 준비 되어 있다.
추모의 장 6.25 전쟁 자료실 6.25전쟁 당시 남북한의 전투력 남북한의 전투장비 등을 전시자료를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의 비교 신병교육대 내무반 군 내무반 모습 고성지역의 6.25 주요 전투 국군 홍보실이 있다.
있어서는 안 될 전쟁입니다.
70년 전의 전쟁의 아픔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데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과 북이 없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철로로 가는 자전거 TV에서만 보다가 한번 타본 느낌 별 놀이도 다 있고 탄광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경을 많이 가 던 곳 현재는 철로도 쓸모없던 걸 관광철도로 이용 하니 좋다.
정동진에 있는 모래 시계탑이 예전에는 시간을 잴 수 있고 진짜 모래시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다 없어지고 저런 둥근 탑이 생겼고 주위에 없던 건물도 자꾸 생기고 관광지가 되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그냥 서운해서 탑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모래시계탑 앞으로 펼쳐진 저 큰 배는 무슨 호텔이라 하던데 생각도 잘 안 납니다.
정선에 있는 아우라지입니다.
그 옆에 서있는 저 동상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을 간절하게 일생을 기다리다 생명을 끝났다는 어느 여자의 간절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합니다.
정선 구절리역에서 철로로 다니는 자전거 타고 종점에 가면 1급수에만 산다는 어름치라고 이름을 부르는 그 물고기의 모양을 딴 건축물이 있습니다.
정선 구절리역에 서 있는 여치모양의 구조물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관광 물건도 팔고 특산물도 있고 휴게실도 있고 그냥 그 앞에서 전부 잡아 보았습니다.
2005년 7월 문을 연 정선군 여량 면 구절리 철로로 다니는 자전거도 인기상품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유명해져 있습니다.
주말과 휴일 피서가 되면 탑승권을 미리구하기가 어려워 당일 예매의 경우 전날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며 정선 레일바이크를 운영하는 코레일 관광개발 정선지사에 따르면 레일바이크 탑승 인원은 일 년에 30만 명을 넘고 매출액은 35억 원에 정도입니다.
정선 레일바이크는 편도 7.2km로 전국에서 이용하는 철로로 다니는 자전거 가운데 가장 긴 데다 모양이 훌륭한 내리막길이라는 점이 인기를 끕니다.
2인승 22,000원 4인승이 38,000원 입니다.
구절리역에서 2시간 반 가량 두발로 타고 가면 목적지에 1급수에만 산다는 물고기 여치 모양의 구조물이 보입니다.
그 어름 치 들어가면 카페도 있습니다.
음식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바닷가 구경하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추암 해수욕장이 있는 이상한 암석 바위들이 모습을 자랑하는 매우 보기 좋은 해변 가 입니다.
포항 시 근처에 위치한 호미곶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수학여행의 이름난 곳으로 유명한 불국사에 도착 했습니다.
2년 전에 다녀온 장소이지만 앞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수학여행을 다시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세계 문화유산에 기록된 불국사 다보탑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도 그 찬란함에 외국인들도 찬양합니다.
국보인 첨성대 2년 만에 가 보아서 설기도 합니다.
아우라지 레일 바이크 종착역 어름치 물고기 모양입니다.
추암 해변의 촛대바위라고 이름으로 감탄할 만한 바위 입니다.
아우라지에서 배를 타고 강을 이룩하기 전 안내표지판을 보았습니다.
배 삯은 없습니다.
밧줄을 이용하여 나갑니다.
배가 뱃사공이 줄을 이용하여 건넙니다.
정동진 해변 일몰 찍으려는 모습을 사진을 찍었습니다.
앞에 모자를 쓴 사람이 뱃사공이고 배를 탄 사람에게 한번 배를 밀어 보라고 해서 젊은 사람 한사람이 밀었습니다.
호미 곶에 있는 등대박물관에 있는 등대 모양입니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역전 건너 바다구경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우라지 조그만 배입니다.
정동진역 뒤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구절리역에서 이륙하기 전의 관광하는 사람들의 모양입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입니다.
정동진역 가까이 에서 음식점에서 여러 가지 생선을 먹고 매우 맛이 있습니다.
해가 전깃줄에 걸쳐있고 마지막 차에 가면 틀림없이 유리창에 당신이 안녕 하는 데 그리워하는 사람이 토끼가 늪에서 빠져 살리고 몸부림치는 저 달은 침묵합니다.
진정 사랑 한다면 가까이서 보고 싶고 오랫동안 그리워 한다는 말이 정말 같습니다.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다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컴퓨터의 메인보드가 작동이 안 되어 외국에서 고처 와야 합니다.
여행사진과 동영상이 다 컴퓨터에 저장을 해 두었습니다.
10일이 걸리며 돈 20만원 절약하려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아름다운 모양도 구경 합입니다.
왜냐하면 학문을 공부하려니까 영어가 부족한 것 같아 모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실력을 쌓기로 먹음 먹고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학교 봉급으로는 부족해서 아내의 친척에게 돈을 빌려 입학금 및 등록금을 받아 가며 학교를 다닌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있다.
당시 어머니가 병이 들어 몸이 너무 약해 큰형님 집에서 모시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집으로 모셨지만 두 달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생도 많이 하시고 3형제를 키우느냐고 고생도 엄청나게 하신 분이었다.
7.성남 금광 초등학교
새로 부임한 학교는 성남시에서 가장 달동네라고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학교였다.
부임하자 학교 내규에 의해서 새로 부임한 교사는 고학년을 맡는 규정에 의해서 5학년을 맡게 되었고 교장선생님이 학부형들의 생활수준과 지역적 특성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시면서 가정환경이 어렵고 부모들 거의 대부분이 맞벌이를 하며 노동들을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간다고 하였다.
또 아동들이 부모가 이혼하여 편부 편모의 아이가 있는 경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고 하셨다.
맡고 있는 학급에 아동이 1명 출석 하지 않아 그 다음날 시간을 내어 가보았더니 마침 아동 아버지가 계셔서 오영석에 대해 자세하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영석 어머니는 어렸을 때 이혼을 하여 없고 형제는 위로는 누나 둘이 있고 서울에 있는 공장에 다니고 바로 위형은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는 것과 오영석이 막내이고 현재 오영석은 집을 나가 가출한지 거의 10일 정도 되었고 이번뿐 만 아니라 전에도 자주 집을 나가 가출을 하여 남의 집 물건을 훔쳐 경찰에게 붙들려 파출소에서 데려오곤 한다고 하면서 내 자식이지만 내버린 자식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면서 아예 관심 밖이었다.
때려 보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하였지만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그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동을 봐야 뭐라고 얘기를 하든지 지도를 할 수 있는데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가끔 집을 방문하거나 아동을 통하여 집을 가보아 확인하였지만 집에 오영석은 없었다.
주위에서 다른 학급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일을 보았지만 내가 맡고 있는 학급에서는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학급 아동을 통하여 옆 반의 아동을 통하여 오영석 어제 어디서 다니는 것을 보았다니 하는 등 이야기를 들었지만 좀처럼 만 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거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오영석이 제 발로 학교를 왔다.
너무나 반갑기도 하고 고마울 정도였다.
신학기 담임을 맡은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앞으로 결석을 하지 말고 네가 학교생활이나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자세하게 묻기도 하고 하였지만 성격이 그런지 잘 대답도 안하고 눈치를 보며 경계하는 낯빛만 볼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은 학교를 잘 나왔다.
걱정되는 일은 오영석을 통하여 나쁜 짓을 하는 그룹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개 5학년 정도 되면 모험심이 강하고 또래 집단과 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시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한 것은 오영석이 자주 결석을 해서 그런지 친구가 별로 없고 반 아동에게 주의를 주어서 그런지 오영석과 어울리는 아동은 볼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 결석을 시작하여서 약간 불안한 생각이 들어 학급 아이들을 시켜서 알아보거나 교과 담당 시간을 이용해서 집을 가보았지만 집에도 없었다.
며칠 후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면서 교감 선생님께서 빨리 파출소에 가보라고 하면서 오영석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내용을 알아보니 동네에서 자전거를 훔쳐 타다 주인이 신고를 하여서 파출소로 붙잡혀 왔다고 한다.
파출소에서 데려와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도록 여러 가지 권면의 말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짐도 받고 다시는 학교를 결석하지 않고 물건을 훔치는 일을 안 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내었다.
그날 이후 며칠 후에는 교육청에서 새로 발령 받은 교사와 타 지역에서 새로 온 교사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맞벌이 부부가 많다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 지역에서 부부교사는 재벌이라고 하시기도 하셨다.
그만큼 빈곤한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또 이 지역은 중 고 등 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맞았거나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이 범죄를 일으켜 어느 지역보다 많다고 하신다.
그만큼 교육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라고 하시면서 어린이를 사랑으로 감싸 줄 것을 당부하였다.
문제아가 보통 아동처럼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아를 담임을 맡게 되었을까 하면서 자조 섞인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던 중 4월 중순경 어느 날 갑자기 전임지에서 같이 근무하시던 선생님께서 연락이 왔다.
먼저 같이 근무하시던 암으로 투병하시던 여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무슨 일인가? 지금까지 그 학교 신우 회 선생님들이 정성어린 기도를 하고 코흘리개들의 저금통 까지 뜯어 성금을 모아 어서 쾌유하기를 빌었는데 돌아가시다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 왔다.
죽음 앞에는 어쩔 수가 없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20여년의 교직 생활에서 아동들이 다치거나 물건을 훔쳐 약간의 문제로 고통을 당해 보았지만 또 이 번 처 럼 주위에서 동료 교사들이 맡고 있는 아동으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고 속상해 하는 것을 보아왔지만 이 맡고 있는 아동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지 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방관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정말 처음 겪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 후 3일 동안 학교를 잘 나오다 또 결석을 하여 알아보니 어제 집을 또 가출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날 오후 교감 선생님께서 파출소에서 데려왔다고 하시면서 어느 가구 공장의 물건을 다른 아이들과 함께 훔치다가 가계 주인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오영석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학급의 어린이들과 함께 노력하기로 하였다.
맡고 있는 학급이 정에 굶주린 정을 붙일 데가 없는 방황하는 아동의 안식처가 되도록 마음먹었다.
수시로 결석을 할 때 마다 교과 전담 시간 및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직접 방문하거나 학급 친구를 통해서 수시로 데려오기도 하는 등 우선 결석을 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학교를 나오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학교를 나오면 불량배들과 어울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영석이 학교를 안 오는 원인 분석을 하였다.
우선 혼자 외톨이로 지내고 친구가 없었다.
학급 내에 친한 친구가 없는데 학교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학급 어린이들과 인간관계가 잘 형성되도록 위해서는 일부러 상냥한 예쁜 여자 어린이들 앉히고 오영석에게 잘 해주도록 신신 당부하였다.
수업시간에 둘이 장난치는 것도 모른 척하고 아무든 옆에 짝을 통해 학교생활이 재미가 붙도록 노력하였다.
학급에서 고립아나 외톨이 아동들은 수업시간에 장난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어린이 지도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느끼었다.
또한 오영석이 늦잠을 잔다는 것이었고 저녁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침 늦게 일어나 보면 학교 갈 시간은 지나갔고 갈 곳은 없고 동네 오락실을 기웃거리다가 거기서 같은 처지에 있는 불량배들과 어울리다가 같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을 반복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영석의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는 학교생활에 적응시키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학교생활도 정상적으로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교사가 도시락을 2개 준비하거나 아동들이 돌아가면서 자발적으로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하며 또 점심시간에는 라면을 끊여주거나 빵을 사다 주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한 것은 오영석이 자존심이 들어 안 먹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으나 처음에는 잘 안 먹으려고 하는 것을 잘 설득을 시켰더니 그 다음 부터는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아침 9시가 되어도 학교에 안 오는 것은 늦잠을 자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자는 것을 깨워서 데려오기도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는 사제 간의 정이 붙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대화도 의도적으로 하고 특별 학습지도를 하였다. 대개 문제아들의 공통점은 학습에 흥미를 잃거나 학교생활에 취미를 잃어 지낸다.
이 아동도 마찬가지로 성적이 부진하고 5학년이지만 아직 구구단도 전부 못 외우고 간단한 계산도 못하고 한글도 겨우 띄엄띄엄 읽을 정도였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도록 공부시간 및 방과 후에 특별 관심을 기울여 지도를 하였다.
오영석을 정상적으로 공부를 하도록 하고 공부에 취미를 붙이도록 하는 일이 목표였다.
학교 공부시간에는 일부러 영배가 마다 처음에 교과서의 글을 읽도록 시켰다. 띄엄띄엄 읽어 가는 소리에 같은 반 어린이들이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그것도 5학년씩이나 된 녀석이 정말 한심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였다.
일부 아이들은 왜 오영석만 시키느냐고 불평을 하였지만 진의를 설명 듣고는 잘 이해를 하여 불평이 없었다.
조그만 칭찬할 만한 일이라도 발견되면 칭찬을 하여 주었다.
그러니까 과 거리감이 없고 자연히 친밀감이 형성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한다든가 계절에 맞는 옷을 사다주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과 친밀감을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듯싶었다.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학교에 나오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었고 혹시 안 나오는 날이 있으면 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늘 앞섰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복도에서 아동들이 떠들며 복잡하면서 경찰이 갑자기 교실로 들어와서 현행범으로 오영석을 잡으러 왔다고 한다.
오영석이라는 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겨우 경찰에게 이야기를 잘해서 '지금 수업중이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내가 교무실로 데려 갈 테니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붙잡아 갈 수 있느냐?'고 사정을 해서 여러 아이들 앞에서 수갑을 차는 장면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담임선생님이 책임지고 교무실로 수업이 끝난 후 데려가기로 하였다.
남은 시간 수업을 하는 등 마는 등 정신이 없었다.
며칠 전에 출장을 갔는데 그날 아이들 말에 의하면 2교시가 끝나자 내가 없는 것을 알고 불량 청소년이 찾아와서 오영석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날 기어코 불량 중 고등학생들과 어울려 동네 집 가운데 빈집만을 골라 오영석은 망을 보고 다른 불량 학생들은 열쇠로 빈집만을 열고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쳤다고 한다.
파출소에 요 며칠 사이에 동네에서 집의 물건을 자주 도난 당 한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잠복근무 중 몇 명의 학생이 훔치는 장면을 목격하여서 그 가운데 잡힌 불량 학생들에 의해 알아본 결과 공범으로 오영석을 붙잡으러 왔다고 한다.
교무실에 수업이 끝난 후 가보니 교무실에 다른 4학년 어린이가 포승줄에 묶여 앉아 있었다.
이들 두 명은 현행범이 되기 때문에 직접 데리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정말 여태까지 오영석 어린이에게 정성을 기울인 결과에 대한 보답인가?
정말 눈앞이 캄캄하였다.
경찰 아저씨 이야기로는 이 어린이는 아마 소년원에 갈 것 같다고 하면서 같이 훔친 불량 중 고등학생들은 지금 소년원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경찰 아저씨에게 요즘 맘을 잡고 열심히 공부도 하려고 좋은 착한 학생이 되려고 한다. 면서 책임지고 지도하겠다고 사정도 해 보았지만 이 학생은 현행범으로 붙잡아 가야 된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어린이의 아버님한테 연락이 늦게 닿아서 자초지종을 얘기 했다.
전화를 처음 할 때는 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왜 경찰이 데리고 가도록 가만히 있었느냐 것 같았다.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노력하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 면목이 없다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셨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고 정말 난감 하였다.
그 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좌절감도 맛보았다.
후에 아버지의 다짐을 받고 오영석은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그렇지만 이번은 충격이 커서 자신이 흔들렸다.
모든 게 다 싫었다.
너무 괴로워서 퇴직할 결심도 해 보았다.
교사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격지심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오영석을 다루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그러나 포기 할 수는 없었다.
학교 신우 회 활동도 매우 활발하였다.
70여명의 선생님 가운데 40여 분이 매주 정기적으로 금요일 오후 4시가 되면 한 교실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각자 갖고 온 문제를 갖고 기도를 하였다.
담임 맡고 있는 아이들이 하도 속을 썩 혀서 그런지 선생님들이 신앙적으로 열심이고 불이 붙었다.
적지 않는 수였다.
어느 목사님이 문제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 는 말이 생각났다.
신우 회 모임에 선생님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내가 맡고 있는 학급에만 지독한 문제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학급 6학년에는 여자 어린이가 여자 중학생과 그룹을 지어 남의 물건을 훔쳐 속을 썩는 선생님도 계셨다.
정말 좋은 모임이었다.
세상 적으로 볼 때는 권력도 없고 힘도 없는 선생님들 오로지 제자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모여 나라와 가정과 학생들이 잘되기만을 기도하는 모임 무엇이 그들에 마음에 다른 생각이 있을까? 왜 요즘은 당국에서 타종교와 차별이라 학교 교실에서 성경말씀도 학생들에게 들려주지 못하게 한다.
하루 속히 학교에서 마음 놓고 학생들에게 성경말씀도 들려줄 수 있는 때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오영석을 괴롭히는 악한 영들과 싸우자.
이기자.
한편 오기도 들기도 하였다..
최선을 다해보자.
하나님은 선한 자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라는 확신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오영석이 며칠 후 경찰서에 붙잡혀 간 다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현행범이지만 부모한테 인계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전보다 더 관심을 갖고 생활을 지도하였다. 5학년이지만 구구단도 모르고 한글도 띄엄띄엄 읽는다.
일부러 국어 시간이 되면 읽기를 시키었다. 어떻게 하든지 공부에 관심을 갖도록 위해서였다.
방과 후 학교수업이 끝나면 다른 불량학생들과 어울릴 염려가 있어 늦게까지 데리고 학습지도를 하고 토요일 날은 당시는 토요일이 토요 휴업일이 아니어서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늦게까지 데리고 있다든가 점심을 사 먹이고 가끔 계절에 맞는 옷도 사 입히고 아무튼 관심을 기울여 지도하였다.
학교에 결석을 하는 일이 없이 학교를 잘 다니었다.
반 어린이 아이들 한데도 특히 관심을 갖고 잘 놀아주도록 부탁하였다.
학교를 정상적으로 잘 다니었다.
여름방학이 가까웠다.
아버지도 걱정이 되는지 이번 여름방학에 전남 영광에 외할머니가 계시는데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겠다고 한다.
40일간의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 아버님이 고향 할머니 댁에서 재배한 꿀이라면서 병에 든 꿀 2병을 갖고 교무실로 와서 하나는 교감선생님 하나는 본인에게 주시면서 그동안 우리 영석이를 위해 고생 많았다고 고맙다고 한다.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면서도 극구 사양을 하였지만 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 후 6학년에서도 잘 학교를 잘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문제아는 얼마든지 관심을 갖고 지도하면 해결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다음 해 5학년을 맡았는데 너무 착한 어린이들을 맡고 정말 모범적인 아이들이었다.
학년말에 되었는데 교감선생님이 부르신다. 앞으로 벽지가 있는 연천으로 가라고 하신다.
당시에는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을 하려면 산간벽지나 휴전선가까이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여야만 승진 점수를 받도록 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인사 이동하는 곳으로 연천군으로 쓰라고 하신다.
처음에 작년에 학년주임선생님도 그곳으로 신청을 하였는데 안 된 것을 아는데 어떻게 제가 갈 수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신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경기도내에서 연천군 지역이 당시 휴전선 가까이 있어 교감으로 승진을 하려면 특별 부과 점수가 있어 선생님들 간에 서로 갈려고 하는 경쟁지역 이었다
2월말 인사이동이 발표가 되어 연천군으로 발령이 났다.
8.연천초등학교 근무
이곳 발령받은 학교는 교육부 연구지정학교로 6차 교육과정 개정 교과서 연구지정 학교였다. 그곳에서 열심히 하였다.
밤늦게 까지 선생님들과 토론도 하면서 교과서 개정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보람 있는 것은 당시에 차도를 다닐 때는 왼쪽 통행으로 다니도록 하는 규칙이었지만 당시 그 학교 연구 담당 선생님들이 개정교과서에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른쪽 통행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여 오늘날 교통법규가 오른쪽으로 통행하도록 개정되었다.
그 학교 있을 때 2학년 담임 이었을 때 박명주 라는 학생이 있는데 매우 똑똑했다.
영어재량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음날 외어오라면 반드시 외어 왔다.
후에 연락을 해보니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뒤 소식이 없어 뭘 하는지 궁금하다.
2년이 지나서 이학교의 분교로 이동을 하였다. 승진이 될 나이가 되어 빨리 승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곳 분교의 학부모 생활은 50년대 6.25전쟁이 끝난 이후 생계수단이 근처 사격장에서 총알 껍데기를 주어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위험하지만 할 수 없이 그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가끔 폭탄이 터져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쳐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학교는 학생수가 500여명까지 가는 12학급 규모였다.
점차 우리나라도 산업화 공업화가 되면서 주민들의 일자리를 대도시의 공장으로 옮기면서 학교규모도 작아지기 시작하여 당시 학생 수가 작아 분교로 되었다고 한다.
학생 수는 20여명이었다.
거기서 아동들과 생활하면서 이웃 포천에 있는 대학교 주최 전국 영어 말하기대회에도 데리고 가서 입상을 시키었다.
지금도 그 학생 부모님이 을 잊지 못하겠다고 전화를 하신다.
당시 데리고 있는 어린이들이 3,4학년 복식학급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하여 교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어린이가 와서 교문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다.
급히 뛰어 나가보니 평소에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어린이가 교문 앞에서 다리에 피를 흘리면서 살겠다고 소리치며 우는 것이었다.
또 다른 어린아이는 군인 트럭 차바퀴에 깔려 인사불성 이었다.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차바퀴에 깔린 아동을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다.
살 만큼 살았으니 저를 데려가 주시고 이 어린이를 살려 주세요 그때 기적은 일어났다.
마침 탱크 사격장으로 가는 탱크를 호위하던 헌병 차에 인계를 하고 전곡 읍 까지 가서 진찰을 한 결과 한 어린이는 여기서 치료를 받아도 되는데 의식을 잃은 아이는 의정부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한명은 전곡읍에 남아서 치료를 받는데 그 어린이의 엄마가 같이 병원에서 일주일간 같이 지내는데 어느 날은 다친 어린이의 다친 부위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데 의사한테 말을 하였더니 담당 의사가 말하기를 원래 상처부위 다친 데가 나려면 생살이 날려고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 어린이의 엄마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친 넓적다리를 풀어 달라고 하여 보았더니 그 부위가 살이 썩어 의사는 급히 서둘러 서울의 모 대학 병원으로 후송을 하여 거기서 치료를 하는데 마취도 안하고 뼈 주위의 그 썩은 살을 전부 긁어냈다고 한다.
한 달이면 족히 충분히 치료될 것을 6개월이나 걸렸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교통사고 나면 큰 병원으로 옮겨야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그 후에 2명다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학교에 나왔다.
교통사고의 원인은 본인이 잘못도 있지만 학교나 버스 운전기사의 안전의식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시 학교 교실에는 컴퓨터가 286컴퓨터가 몇 대 있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려고 서로 빨리 가서 컴퓨터를 차지하려고 급한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좌우를 살펴보지도 않고 반대편에서 오는 군인차량을 보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
또 당시 버스의 문이 앞문 밖에 없어 앞에서 내리자 뒤로 가는데 상대편에서 차량이 오는 것을 못 보았고 또한 기사도 상대편차가 오면 버스기사도 아이들을 차가 지나간 다음 하차를 해야 하는 것인데 위험하다는 인식을 못하고 아동들을 내리게 한 결과로 교통사고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동의 담임교사로서 책임감도 느끼었다.
학교생활이 끝나면 서울에 있는 병문안을 하고 이런 생활을 하니 교원 생활가운데 가장 괴롭고 힘든 때였다.
그러나 한편 부족한 신앙생활도 이것을 계기로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을 더 보고 기도를 더하게 되었다.
학급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서울로 갔다.
오지에 위치한 학교는 분교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교사와 학생 도시와 자연 모습과 미래가 어울리는 다양한 체험학습을 하였다.
체험학습은 2학기 교육과정 운영의 일정으로 서울의 도시 문화와 서울에 있는 박물관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알아가는 체험 중심의 수학여행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조선 개국부터 끝까지 정치, 외교, 군사, 법률, 통신, 종교 등 인간사의 모든 부분을 종합하여 기록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정확한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실록이 편찬되었지만 한 왕조가 ‘조선왕조실록’처럼 긴 시간에 걸쳐 풍부하고도 엄밀한 기록을 남긴 예가없다.
조선왕조실록은 궤짝에 담아 보관해왔다.
그리고 실록이 서로 닿는 것을 막도록 사이에 초주지를 끼워 넣고 악귀를 쫓는 붉은 보자기로 쌌다.
또 그 보자기에는 벌레와 습기를 막으려는 청궁, 창포 등의 한약재 가루를 담았다.
한 궤짝에는 15~20책을 담아 철저하게 봉인하고 자물쇠를 채웠다.
이렇게 자물쇠를 채운 왕조실록은 처음엔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보관했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뺀 나머지 사고가 모두 불타자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등의 산속 사고에 보관했다.
실록은 임금도 볼 수 없었으며, 실록을 관리하는 사람조차도 함부로 열지 못하게 했다.
오직 임금 명을 받은 사관만 궤짝을 열게 했고, 그 사관은 임금의 명을 받아 사고에 가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생각했다.
여름철 특히 장마철에는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스는 일이 많다.
그래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면 이부자리며 옷가지들을 내다 말리느라 집 안팎은 온통 빨래로 덮인다.
책도 마찬가지다.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은 통풍이 잘 되는 사고에 보관이 되어 안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의 관리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태종실록 23권(1412년) 4월 3일 기록에는 “포쇄별감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싸 가지고 와서 전악서의 악보를 참고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포쇄별감’이란 사고에서 책을 점검하여 축축한 책은 바람을 쐬거나 햇볕에 말리던 일을 맡아보던 별감을 말한다.
아예 별감을 두어 관리 했던 것이다.
별감이 있었지만 실제 책 말리는 일은 아랫것들이 했을까? 아니다.
장마가 지나고 햇살이 내리쬐면 조선왕조실록은 포쇄를 했다.
중종실록 36권(1519년) 7월 16일 기록에는 “외방 사고의 거풍하는 일을 외방의 겸춘추로 하게 하려 하시나 외방 겸 춘추는 사관(史官)이 아닙니다.
사국 일에 이런 발단을 열어놓으면 사국 일이 가벼워지게 될까 두렵습니다.”라는 좀 특이한 상소가 보인다.
책을 말리는 것쯤은 아무나 할 것 같아도 상소문에는 ‘아무나 하면 안 되며 꼭 사관이 하도록 해 달라.’고 간언하여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실록의 거풍 곧 포쇄는 엄격한 사관들의 관리 아래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철저한 관리가 있어 오늘날 세계에 유례없는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쉬운 인터넷 번역본으로 볼 수 있다
이산 왕과 나 그리고 대왕 세종 등 사극 드라마는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가 “정조를 괴롭히는 화완 옹주는 언제 죽었을까?”, “김처선은 어디 김씨이며 어떻게 죽었을까?” “충녕대군은 언제 양녕대군 대신 세자로 책봉되었을까?” 같은 궁금증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바로 우리에겐 번역본 그것도 인터넷에서 쉽고 간단하게 검색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록 한글번역본·원본 이미지는 물론 한문으로 된 원문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부호를 붙여준 한문 표점 본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입체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조선시대를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번역 과정에서 직역 위주로 한 나머지 이해하기 어려운 월(문장)과 낱말이 많은 것이 흠이다. 또 실제 조선시대에 쓰지 않았던 낱말을 일본말을 들여와 번역한 것은 두고두고 문제로 남는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은 산간벽지에 살다보니 바다에 가고 싶었는데 바다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수업시간에 공부한 역사나 지리적인 지식을 직접 알아보고 도시의 문화도 체험할 수 있어서 정말 보람 있고 즐거웠다.
수학여행을 앞으로도 학생들이 직접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찾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체험 학습의 기회를 갖도록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
2008년 6월 7일부터 10일까지 남해안인 경남 거제 통영 사천에 수학여행을 갔다.
수학여행을 기획 및 준비하여 실행하신 교무주임 등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한 어린이들이 다 건강하고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첫날 학교에서 어린이들은 아침 일찍 출발시간에 맞춰서 광주 송정리역으로 금남로에 도착하여 이동을 하였다.
광주 북 구 중흥동에서 예정대로 11:30에 출발을 하였으며 거제도로 가면서 인사말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나 노래를 한 곡씩 하였다.
저녁 식사는 통영 도천 동 음식점에서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즉시 거제도로 이동하였다.
걷기 운동 및 관람을 할 곳은 거제도의 관광1순위인 바람의 언덕이다.
아름다운 거제도 도장포 어촌마을에 있는 선착장에는 여러 가지 만든 조형물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쪽에는 도장포항의 산책로가 바다에 있어 사랑하는 사라들이 많이 찾는 데이트 이름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인근 남부면 다포리의 국립 수산 과학 원 육종연구센터이다.
수산생물의 육종에 관한 시험조사 및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해양수산부 국립 수산 과학 원 전략양식연구소 소속 연구기관이다.
경남 거제 시 남부면 다포리 20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센터장님의 친절한 안내로 사육시설물 등을 설명과 함께 구경하였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인근에 학동흑진주몽돌해변으로 이동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저녁식사를 맛있고 먹은 후 숙소로 예약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한 후 아침식사를 하기 위에 07시 30분에 거제 시 장승포로 이동을 하였다.
대구탕굴 국밥이 유명한 곳을 찾아가 아침식사를 하고 통영 도람 동 유람선터미널 으로 이동을 하였다.
오전에는 유람선을 타고 한산 섬 주변을 구경하고 제승당을 관람하였다.
통영 시 한산 면 두억리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이다.
이순신의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 승 첩 후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에 큰 타격을 준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을 의논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원래는 운주 당 터 이다.
운주 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살던 곳을 이름 부르고 있는 곳인데 1740년에 통제사 조경이 이 옛터에 유적 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유허비 기념비 귀선 각 한산정 등이 있으며 1976년 성역화작업으로 정비되었다.
제승당을 걷기 운동을 하며 관람한 후 유람선터미널로 나와 통영터미널식당에서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사천 백천 사로 이동하였다.
백천 사는 경남 사천 시 백천동 와룡산에 있는 사찰이다.
팔만 구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와룡산에 있다.
신라 문무 왕 때 의선 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주둔지였다고 한다.
옛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모습은 현대에 와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약사와 불전에 있는 길이 13m 높이 4m의 목조와 불로 유명한데 작은 법당이 있다.
대웅전 약사와 불전 산령 각 용왕 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의 외부에는 약사 여래좌불이 있다.
납골당 시설인 극락전 추모 관을 비롯해 오방여래불 소원 기원 탑 금종포대화상 산신할미상 등 여러 가지 조형물이 있다.
백천 사를 관람한 후 광주로 이동을 하였다.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는 안내로 담양군 식당을 찾아가서 맛있게 먹은 후 송정역으로 가 열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였다.
3박4일의 수학여행 동안 즐겁고 재미있는 여행이다.
9.궁평초등학교 근무
이번 수학여행을 다시 가기를 기대하면서 전교생은 3박 4일 동안 남해안 일대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산간벽지에 위치한 전교생 98명의 소규모 학교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교사와 학생 도시와 자연 전통과 현재가 어우러진 다양한 체험학습을 성황리에 실시했다.
이번 체험은 자유학기 일반학기 연계 교육과정 운영으로 부산의 도시 문화와 여수 순천 등 남해안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찾는 체험 중심의 수학여행이 됐다.
첫째 날은 부산 해운대 동백섬 트레킹 및 전통문화공연 왕비의 잔치 관람 가야문화 체험을 위한 복천박물관 탐방 부산 국제시장 견학 둘째 날은 오동도 및 향일 암 트레킹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의 역사적 상황 탐구를 위한 진남 관 관람 해상케이블카 체험 셋째 날은 자연 생태 탐구를 위한 순천만 습지 순천만 국가정원 및 창녕 우포늪 트레킹 등을 체험하였다.
버스로 4시간 30분을 달려 첫날은 공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공원에 간 후 숙소에서 한방에 7명씩 짐을 풀고 저녁은 숙소 식당에서 먹고 Buffet 아니고 계란찜 튀김 미소시루 고기 등이 나오고 밥만 무한 리필인데 많은 어린이들이 밥을 2번 씩 도 추가해 먹어서 그 먹성에 놀랐다.
저녁에는 여자 어린이 남자 어린이 따로 단체로 목욕탕에 들어가 씻게 하고 10시에 취침 모드로 들어갔지만 같은 방 어린이들과 새벽 12시까지 TV를 시청 하였다.
둘째 날은 아침6시에 기상 간단한 체조를 하고 아침을 먹고 긴 강에서 7명이 한조가 되어 호읍을 맞추어 열심히 노를 저어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11시까지 신나게 놀다가 민박에서 온 차를 타고 민박에 도착 민박이 있는 곳은 산 속에 곳곳에 집들이 있는 아주 작은 마을 이였다.
점심으로 일본씩 김밥과 국을 먹고 짐을 풀고 쉰 다음 산에 올라 저녁을 먹었다.
저녁에는 민박 주인 가족 아저씨 아주머니 여든의 할머니와 함께 불꽃놀이 등을 하면서 놀았다.
하늘에 별이 수 없이 있어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아침에는 국 밥 생선으로 먹고 숙소 주인과 작별을 하고 우후 2시에 떠나기 전 휴게소에 들려 기념품으로 과자를 사고 저녁 7시30분쯤에 도착했다.
숙소에서의 기억과 수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떠나기 전에는 약간 의심도 들었지만 어린이들과 매우 재미있었고 가기 정말 잘했다.
매우 이상한 체험 이였던 것 같아 듣는 내내 매우 생각이 좋았다.
수학여행에 참여한 학생은 벽지 오지에 살다보니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바다라는 좋은 자연을 구경으로 수업시간에 배운 지리적인 체험을 확인하고 도시의 공연 구경도 체험할 수 있어서 매우 보람 있고 즐거웠다.
수학여행을 앞으로도 학생들이 직접 체험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찾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학습의 기회를 더욱더 확대해 가겠습니다. 라는 뜻을 학부형에게 전했다.
학부형들과 어린이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제주도에 갔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다음 날 새벽부터 등산을 가셨는데 아침부터 안개가 짙게 깔려서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숙소 위치는 먼저 답사하신 곳 근처였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한 날 밤 어린이들은 감귤을 사기 위해 2층 베란다에서 난간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감귤 밭은 정말 넓었습니다.
넓은 밭 가운데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있어서 저희는 한 줄로 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습니다.
퇴근 후 동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한방병원에 갔으나 효과가 없어서 치료를 잘한다는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몇 번 치료를 받았으나 진전이 없어서 어느 날 대학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다.
너무나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렇게 많은 노인들이 뼈 관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몇 백 명은 되고도 남직한 수가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역시 대학병원에서 치료가 별 효과가 없었다.
의료기 판매를 하는 곳에서 부항기와 쑥 침 자료를 구입하여 집에서 치료를 하였다.
그러든 어느 날 부황을 붙이고 고단하여 잠이 들어 버렸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부황을 붙인 자리가 너무 오래 붙여서 피가 날 정도로 되어 있었다.
약국에서 붕대와 약을 사서 치료를 하였다.
학교에 출근하여 근무하는 동안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가까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갔다.
계속해서 새벽에 교회에 가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3개월 정도 어느 날 새벽에 나을 것 같은 확신이 들면서 오십 견이 나았고 학교 다목적 교실에서 아침 일찍 피아노를 연주하던 근처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피아노 소리를 듣고 어울려서 새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보니 나무에 지금까지 못 보던 너무나 아름다운 새가 울어대고 있었다.
처음 자동차를 사서 집에서 직장이 있는 초등학교까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의정부 국민은행 앞 5거리에서 나는 우회전을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과 부딪쳐 사고를 냈다.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사고 현장에 있는 분이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서 다친 사람을 근처 병원에 입원치료를 시키고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사고를 이야기하고 마침 경찰서에 근무하는 처남의 도움과 자문을 구한 결과 작은 사고는 타협을 하여 돈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서 그 다음날 피해자에게 얼마간의 금액을 주고 해결 하였다.
읍에서 학교 분교로 차를 운전하는 중에 통현 근처에 있는 군부대 앞에 있는 1m 도랑에 빙판길 위에 눈이 오는데 운전미숙으로 차를 구입한지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미끄러져 사고를 냈다.
학교에서 근무를 마치고 학교 근처 유명한 음식점 앞에서 졸다가 우회전을 하는데 좌회전을 하고 돌아오는 차와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다행히 상대방의 차가 부서지고 내 차는 이상이 없었다.
근처 자동차 정비사업소로 가서 상대방의 차를 수리하고 수리비를 내가 지불 하였다.
날씨가 매우 춥고 도로에 눈이 많이 내리는 아침 출근길에 내 뒤를 따라 오던 차가 갑자기 내차를 추월하다가 내차 옆을 지나가다가 미끄러져 사고를 냈다.
조금 후 사고를 낸 운전자의 친구 몇 명이 차를 운전하여 오다가 사고 난 것을 보고 나에게 당신이 잘못하여 사고 난 것이 아니냐? 고 대 들었다.
이때 사고를 낸 운전자가 내 차가 미끄러져 사고를 냈다. 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사고 난 후 근처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가서 사고를 낸 운전자가 말하기를 월 110만 원의 봉급을 받아 대학입시를 앞둔 고3학생이 있고 생활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라고 하며 사정을 하여 수리비를 내가 지불하였다.
어느 날 여름철 비가 장대비처럼 와서 교무실에 빗물이 넘칠 염려가 있어 직원 여러 명과 함께 한 나절을 보내면서 빗물이 다른 곳으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10.왕산초등학교 근무
연천 관내 교감들과 백령도를 연수로 다녀왔다.
서해 최북단 백령도는 북한과 가장 가깝게 위치한 섬으로 군사요충지로 중요하며 백령도는 천암함 사태이후 우리들 나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었고 최근에는 정찰 무인기도 추락한 곳으로 기회가 되면 한번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인천항 부근의 짙은 안개로 15일부터 잠정 중단되었던 인천 백령도 운항이 침몰된 세월 호를 운행하는 같은 청해진해운 소속 데모크라시 2호( 395t)가 3일 만에 재개된 19일 8시 첫 운항에서 3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아직은 다소 안개가 끼여 있어서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파도는 아주 잔잔해서 흔들림 없는 쾌속정의 안락함을 느끼면서도 가슴속에는 세월호의 안타까움과 같은 회사인 청해진 해운의 불안감도 느끼면서 연천 관내 교감들이 백령도 여행단에 동참하게 되었다.
연안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웬만한 파도에도 이륙할 수 있다는 새로운 큰 여객선 하모니 플라워호를 타고 9시 10분 이륙하고 오늘 파고는 0.7m 그리고 만 바다는 2m라고 하였는데 1시간 반쯤 가니 물결이 점점 강해져 배가 많이 흔들렸다.
급히 멀미약을 먹고 교감들과 이야기하며 갔다.
한데 2시간이 좀 지나니 멀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우리 교감들도 화장실로 가서는 30여분이 지나도 자리로 오지 못하였을 정도로 멀미 고생이 심했으니 찾아 1층으로 가 보니 너무 고통스러움이 보이고 얼른 1층 보다는 2층이 덜 흔들린다고 하며 같이 올라왔다.
2시간 후쯤 멀미약을 먹긴 했는데 너무 늦게 먹어 효과를 못 본 것 조금 후에는 화장실로 가더니 함흥차사 또 내려가 보니 세면대 앞에 1명의 교감이 앉고 서서 멀미 달래느라고 있는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어렵기에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니 지금 올라갈 수가 없단다.
이렇게 멀미로 반 이상의 사람들이 고생하며 3시간 반 정도 지난 후 소청도에 도착 그리고 30여분 후 대청도 도착 다행히 소청도와 대청도에 오니 파도가 좀 덜하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우리 일행들은 5시간이나 탄 배에서의 고생으로 무척 지친모습이 되었으니 오후 2시 드디어 백령도 도착 예상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기에 먼저 점심을 먹었다.
콩비지가 너무 맛있었고 그 외의 반찬들이 맛깔스럽고 정성이 깃들어 있어 우리 모두를 만족스럽게 한 식사이다.
우리의 가이드님은 백령도 태생으로 숙박업과 요식업 그리고 관광버스를 소유하고 가이드까지 하시는 분으로 너무나 친절 하시다.
식사 후 방을 배정 받고 오늘의 행선지로 출발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오늘 파도가 심해서 일정에 잡혀있는 유람선을 탈 수 없기에 육로로 간단다.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가 5시간이나 멀미로 고생하며 배를 타고 왔는데 금방 또 배를 타는 것은 고역이므로 그래서 섬 안쪽으로 향해 간 곳은 용기 포 등대가 있는 해안가이다.
카메라에 전체를 잡기도 어려울 정도로 높은 곳의 기암괴석과 바다 위에 있는 쌍둥이 바위
자갈이 깔린 해변 등 첫 번 부터 감탄스러운 정경을 만나니 멀미에서의 고생한 것이 다 없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우리 교감들의 6명 외에 5분이 더 함께 다녔는데 모두들 만족스러운 표정들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바닷바람도 쐬며 좀 있다가 다음으로 춤이다.
이번에 간 곳은 심청 각이 백령도 앞바다에 인당수가 있단다.
그래서 이곳에 효녀 심청상과 심청 각이 있어 심청전의 유래를 전해주고 있다.
이 곳 백령도는 인천과의 거리는 너무 먼 228km나 되는데 북한과는 불과 17km밖에 되지 않으니 안보를 위해 곳곳에 포가 놓여 있다.
옆의 것은 155밀리 평사포로 콘크리트 벽 안에 숨겨져 있으면서 북한 땅을 향해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은 M47 전차로 이 역시 높은 곳에 위치하여 북한 쪽을 향해 위용을 떨치고 있기에 북한에서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을 돌아본 후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님의 말씀이 유람선을 탈 수 있다고 연락이 왔으니 타야한단다.
겨울철 섬의 날씨는 절대 내일을 알 수 없는 거라고 하면서 다행히 두 곳을 돌아보며 심한 멀미를 했던 분들이 좀 나아져 유람선을 타러 갔다.
두문진포구로 가서 유람선 탑승, 약 40분간 북쪽이 가까워 출입 통제된 바다가 아닌 곳만 돌아보는 코스이다.
두문진포구로 유람선을 타고 쑥 튀어나온 곳을 지나니 대박 이렇게 기암괴석이 이어져 병풍바위라고 하는 이곳은 홍도 보다 더 멋지다는 가이드님의 이야기가 결코 헛된 자랑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섬에서 또 섬이 있고 형제바위가 있는 곳 낙조속의 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으로 우리를 감탄하게 한다.
촛대 바위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의 멋스러움 코끼리 바위는 각도에 따라 코뿔소 바위로 바뀌었다가 다시 코끼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속 이어지는 병풍바위를 감상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데 점점 높아지는 파도사이에 흔들리는 유람선 또 멀미가 시작되고 괴로움의 시간이 오고 말았으니 그러나 비록 멀미는 좀 했을지언정 유람선을 당일 날 타기를 잘 한 것 다음 날엔 유람선 출항이 통재되어 공기 돌 해안에서 홍합과 막걸리로 시간을 보내는 다른 여행객들이 자그마치 200여명이나 되었으니까 이렇게 홍도에 못지않은 병풍바위를 감상하고 항구에 오니 고깃배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낚시를 하러 오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고기가 잘 잡히며 물이 맑고 파도가 센 곳이라서 물고기의 육질이 좋은 곳이란다.
유람선에서 내린 후 육로로 병풍바위에 가보기 트레킹 난 그냥 식당으로 왔기에 보지 못했는데 바다에서 보는 것과 다른 맛의 비경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워라 그러나 엎어진 물 이었고 오늘 저녁은 자유식으로 1인당 25000원짜리 회와 매운탕 등의 식사이다.
좀 가격이 센 듯 했지만 100% 자연산 회를 맛볼 기회이기에 모두 회로 통일하였는데 정말 맛이 기가 막히다.
특히 매운탕이 어찌나 맛있던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이다.
식사 후 숙소로 가는 길에 어찌나 오래도록 가던지 섬이라서 거기가 거기이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다.
이곳은 민간인이 5,000명 군인이 5,000명 등 1만 명이 거주하는 섬으로 주로 농사를 짓는데 민간인 군인 합하여 다 먹어도 1년 농사로 4년은 넉넉히 먹을 만큼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그만큼 땅이 넓다는 이야기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2% 정도이기에 수산물이 육지에 비해 무척이나 비싼 것 같다.
생선등 해산물이 너무 귀하고 비싸기에 인천에 나가 사 가지고 와서 먹는다고 숙소로 돌아온 후 멀미로 못 먹은 사람을 위해 회를 좀 싸 가지고 왔기에 여자 일행들끼리 간단히 한 잔하며 담소를 나눈 후 취침 6시 30분 기상 7시 아침식사를 하였다.
오늘 첫 행선지는 천안 함 순국용사 위령탑 천안 함에서 희생된 46인 용사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멀리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이들을 보며 더욱 슬픔에 잠기게 한다.
모두들 너무 잘 생긴 아들 그 가족들은 얼마나 비통 했을까?
그 아래에는 해안선의 철책과 함께 해병대의 탱크가 이제는 절대 그런 일 없이 막아 내고 다짐하듯이 지키고 있다.
이곳을 나와서 다음 행선지로 가는 길에 무척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이 호수는 인공 담수호로 40만평이나 된단다.
그 곳은 물 반고기 반 인데 그 이유는 민물고기는 육질이 안 좋아 백령도 주민들은 거들 떠 보지 않기 때문이란다.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이 80만평이나 되는데 그 중 반 정도는 노는 땅.
너무 쌀 소득이 많기에 주민들에게 분양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북한과의 타협이 있을 시 비행장으로 쓸 부지라고 한다.
그리 되면 4~5시간씩 배타고 오며 멀미로 고생할 일이 없어질 거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11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중화 동 교회
입구에 다다르니 교회 건물과 오래된 고목이 있다..
왼쪽의 나무는 150년 된 자생식물 탱 나무 이고 오른쪽의 것은 삼림문화원에 등재된 천연기념물인 무궁화나무란다.
이렇게 굵은 무궁화나무 다 있고 위 계단으로 올라가니 교회와 기념관이 있다.
백령 기독교 역사관에는 110년이 된 중화동교회의 역사와 언더우드 목사 그리고 옛 중화 동 교회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백령도는 주민의 95%가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물건을 사기도 어렵고 차에 주유도 할 수 없어 전날에 미리 해야 하고 중화동 교회를 돌아본 후 버스를 타고 가는데 멀리 소나무를 보라고 한다.
이 소나무는 400년 된 나무로 천연기념물이라고 그래서 보호하라는 뜻으로 나무 방벽을 만들어 놓은 것 다시 달려 간 곳은 용트림 바위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갈 듯 솟아오르는 모습이다.
바위가 용을 쓰 듯 비비 꼬아져 있는 신기한 모습이라니 멀리 바다에는 심청의 연꽃 바위가 보이고 옆의 길섶에는 섬마을의 해당화 열매가 있다.
공기 돌 해안 동그랗고 납작한 돌로 이루어진 해안이다.
돌도 예쁘고 눈부신 햇살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도 아름답다.
공기 돌 해안은 천연기념물 392호로 자갈돌로 1km나 이어진 해변인데 돌을 줍게 되면 관리인이 다가오므로 이곳의 돌은 가져갈 수 없단다.
한데 맨발로 걸으면서 발가락 사이에 낀 돌은 슬쩍 가져가도 되니 발에 지압도 할 겸 맨발 걷기 체험을 해 보란다.
이어서 간 곳은 서해 최북단 백령도 탑과 모래 천연비행장이다.
이곳은 세계에 2개 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으로 2500km나 되는 곳이다.
이태리에 있는 천연비행장은 1400km이니 세계에서 가장 큰 천연비행장이다.
이곳은 오른쪽은 갯벌이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돌로 이루어진 공기 돌 해안 그리고 이곳은 규저 토로 된 천연비행장이라니 신기하기만 하다.
어찌 바닷물이 이렇게 알아서 공기돌과 갯펄과 규저 토로 구분을 해 주는 것인지 규저 토는 조개껍질가루와 모래가 섞인 것으로 물기를 먹으면 단단해져서 비행장으로도 쓸 수 있는데 물이 마르면 모래 가루가 날린다고 그러기에 비행기가 내리고 뜰 수 있는 시간은 물이 빠진 딱 2시간 뿐 이라 군 장성들이 와도 2시간이면 곧 떠나야 한단다.
다음에 간 곳은 사자바위사자의 모양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장어의 모습이기도한 신기한 바위이다.
이곳의 건너편은 북한 땅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마을도 흐릿하게 보이는데 대부분은 낮은 산이다.
백령도를 다 돌아보고 점심으로 백령도 특산물인 짠지 떡이라는 만두와 메밀칼국수를 먹었다.
제법 맛있는 점심식사였고 식사 후 오후 2시 출발 인천 연안 부두 행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고 배는 잔잔히 달리고 일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는 순간 해가 넘어가 버렸는데 노을이 붉고 아름답다.
교감들과 함께 하여서 좋았고 비록 멀미로 고생을 했으나 쉽게 갈 수가 없는 곳이고 이번 여행도 대 만족이다.
인천연안부두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는 8시에 출항하여 소청도 대청 도를 경유하여 4시간 남짓 백령도 용기 포에 도착하여 곧바로 점심을 먹고는 예정된 관광에 나서면서 먼저‘천암 함 46용사 위령 비’에는 부산일요산악회장의 주관으로 국화꽃 송이송이 받치며 국토를 지키다 먼저가신 용사들을 여행 단 단체 참배로 추모한 후에 효녀 심청의 심청 각에 들러 안개가 끼여 있어 선명치 못한 인당수와 북한의 장산곶을 바라보면서 통일기원도하고 백령도 해상과 두무 진 기암괴석 절벽의 해변의 절경을-선대 암 촛대바위 병풍 코끼리 바위 장군바위 등등- 유람선으로 관광하면서 자연의 신비함과 오묘함을 느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여행에서는 그곳 특유의 맛 기행도 기대되는 것으로 이날 저녁특식은 백령도 특산 초청 식으로 고정옵션 개별부담으로 소주 곁들인 쫄깃쫄깃한 자연산회와 매운탕 정식으로 식감을 음미하면서 자리 잘 잡은 행운으로 어찌하여 안면이 있다하여 인사하다보니 곁에 앉은 분과는 귀휴 복학한 같은 해 졸업동기 박 교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먹은 금주를 절주로 바꾸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배치 받은 숙소는 아마도 섬세하게 실내외 가꾼 솜씨로 보아 주인이 여성 같다고 느껴진 백학 펜션에서 선배님 외에 젊은이 두 사람과 어울러 그들이 끓인 오뎅 국을 안주삼아 또 한 차례 치통으로 금주하였던 규칙을 확실히 깰 수밖에 없었다.
피로하였던지 푹 빠진 잠에서 깨어나니 5시가 조금 지나 있었고 아침샤워를 끝내고 희망자만 아침트래킹으로 숙소 뒤편 안산 상봉의 군사시설 밑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등반 반시간도 못되어 부상 받은 발도 걱정되고 숨이 차고 힘에 겨워 난 포기하고 혼자서 도로 산길을 내려와서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벚꽃 길 도로를 따라 혼자서 반시간 넘게 산책을 하고는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후 등대해안의 천연동굴 트레킹과 천연 기념물 391호로 지정된 규사로 형성되어 물이 빠지면 아주 단단해서 큰 자동차나 비행기도 활주 할 수 있다는 3km도 넘는다는 6.25동란 시에 드골 연합국사령관이 착륙하였다는 세계에서도 드물다는 해안이 간척사업으로 둑을 쌓아 조금씩 환경이 바뀐다는 모래 천연비행장과 천연기념물 392호인 규암의 된 반들반들한 조각돌로 형성된 공기 돌 해안의 유지대책 등도 시급함을 깨달았다.
공기 돌 해안의 가운데 집 토속주 판매소 주인이 우리관광버스 기사 겸 안내자의 같은 실향민 출신 초등여자동창생이라고 권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 교감들이 어울러 홍합탕에 시원한 토속막걸리 한잔씩 마시니 여행기분이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2번째 남한에서 첫 번째 인 중화교회와 역사관을 둘러보고 백령도 농산특산품인 개통 쑥과 더더리 약쑥 판매처와 수산물 센터를 방문하여 백령도 특산품 선물구매를 하였는데 나도 남들 따라 아내에게 문의하여 까나리액젓을 귀가하여 인터넷에 찾아보니 역시 비싸게 산 현지상품 귀가 선물로 사고는 중식으로는 백령도 메밀 칼국수와 짠지 떡으로 해치우고 1:20분에 백령도를 출발하여 4시간 못 걸려 인천연안부두에 도착하여 명태해장국 곁 드린 석식으로 소주한잔에 피로를 달래며 부산에서 타고 갔던 하나교통 관광버스로 6시에 출발로 부산에 도착하니 거의 밤 11시였다.
다음에 또 기회 봐서 같이 즐거운 여행하자며 교감들과 약속을 하면서 며칠 후 건강하게 만날 것을 다짐하면서 세월 호 침몰사건의 국가와 관계자들의 대체능력에 한 국민으로서의 비탄과 좌절감으로 처음부터 찝찔한 백령도 여행을 무사히 마쳤지만 청천벽력에 애지중지 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들에게 심신한 애도와 빠른 안정을 기원하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한다.
11.연천군 대광초등학교
대광초등학교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게 되었다.
부임 첫날 많은 관내 기관장들을 모시고 취임식을 하였다.
가까운 신탄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출퇴근을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도 참석하고 관내 학교 교장들도 참석하고 면장을 비롯한 지서장과 관내 유지 분들도 참석을 하여 취임을 축하 하였다.
가끔 신탄리역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조용한 대광리역에는 의외로 맛 집이 많습니다.
역광이라 잘 찍히지 않은 대광리역 지금은 운행하지 않고 터만 남아있답니다.
대광리역 앞 낡은 슈퍼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군부대가 밀집해있어 전우사 선경사 등 군상점이 많습니다.
대광리역 바로 앞을 보면 대호식당이 있습니다.
부대찌개와 동태 탕을 파는 곳 정말 맛있는 음식점입니다.
부대찌개 2인 분 햄 듬뿍 당면 듬뿍 동태 탕 알과 수제비를 추가했습니다.
어제 2월 8일이 정월 대보름 이였습니다.
식당에서 나물을 많이 있었고 나물도 정말 맛있습니다.
정월대보름 잡곡밥 고소하고 담백하고 동태 탕에 찍어 먹는 겨자도 나왔습니다.
식당도 깔끔하고 이모님들도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맛있게 꼴깍 먹고 바로 건너편 메가 커피를 갑니다.
햇빛이 잘 드니 식물도 잘 크게 자랍니다.
평화로운 대광리역 근처에 있는 고대산에 올라갔습니다.
공기가 좋고 펜션이 많이 있고 여름에 놀러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눈을 이곳에서 매우 많이 보았습니다.
맑은 공기 쾌청한 날씨입니다.
겨울이란 계절을 잊은 채 아침부터 코끝 찡하니 추운 날씨 속에 걷기 출발하고
추위도 잠시 해가 떠오르고 날씨가 맑아지더니 파란하늘 빛을 선물하듯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화창한 날씨 속에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평화누리길 행복한 마무리 그 길속으로 함께 가보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꿈꾸는 그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침 기온이 몹시 쌀쌀하다 못해 춥고 지금이 겨울인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귀도 시리고 손도 시리고 코끝도 찡하니 영하 5도의 차디찬 날씨 온 몸으로 찬 기온이 느낍니다.
뜰 공원 차탄 천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강아지 이른 아침부터 평화 누리 길을 앞서 걷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하의 차가운 날씨로 풀잎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습니다.
도신리 다리 밑 쉼터를 지나고 예전 이곳에서 우스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니 따듯한 기온이 느껴집니다.
경원선 철교 대광리역 사거리 대광리역에 잠시 들러 봅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볼 수 있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주변 편의점에서 모닝커피 한잔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차탄 천에서 노니는 철새 차탄 천을 따라 이동합니다.
12코스 마무리 구간은 평탄하여 걷기에는 무리가 없어 평소보다 속도가 빨라집니다.
날은 점점 맑아지고 오늘은 유난히 하늘빛이 정말이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하늘색입니다.
하얗게 몸을 불사르고 생을 마감한 연탄재 이제는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평화 누리 길과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함께 가는 길 하늘 빛 색깔 보기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아집니다.
평화누리길 종주 마무리 한다고 좋은 날씨를 선물로 받은 것 같습니다.
용천 교를 지나며 해가 나오고 부터 기온이 점점 올라가고 있지만 아직도 영하 1도의 날씨 앞에는 연천의 대표 명산 고대산이 보입니다.
예전에 첫 경험을 했던 곳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평탄한 길 날씨도 점점 맑아지고 걷기 좋은 날입니다.
발걸음에 속도가 붙는지 평균 4.2 속도입니다.
거대한 눈송이 같기도 하고 벼 수확 후에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신탄리역 앞 경원선 복선화 공사로 인하여 경원선 운행이 중단된 후로 대체버스가 운행 중에 있습니다.
오늘 직행 완행 두 대의 버스를 모두 타 보는 경험도 있습니다.
신탄리의 유래는 알아보았습니다.
신탄리는 새 숯막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전부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 자원을 목재 숯으로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입니다.
여지도서에도 신탄 이라 적혀 있으며 경원선 철도가 부설된 뒤로는 숯 가공이 더욱 번창했습니다.
또한 새 숯막이라는 지명이 대광리와 철원 사이에 주막거리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 술 막 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철마는 더 이상 북으로 달릴 수 없습니다.
그나마 백마고지 역까지 달리던 경원선도 운행 중단 상태이고 언젠 가는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종주 마무리를 축하해 주기라도 하듯 하늘빛 색깔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좋은 날 평화누리길 종주 마무리를 할 수 있어 저 또한 기쁘고 만족스럽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찍으며 평화누리길이란 제목을 붙여 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어릴 적 불렀던 노래 꼭 그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며 백마고지 역으로 향하는 경원선 철길 역 고드름 영하의 날씨라서 역 고드름이 있나 기대했는데 아직 안내판을 보니 12월 중순 부터 다음해 3월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12코스 통일 이음 길 종착지 신망리역 역 고드름 17.92km 4시간 43분 소요산에 도착하고 신탄리역 역 출발하고 고드름 1시간 15분이 걸리고 미리 받은 완주번호(2019-292)로 표시판을 남기며 올해 목표한 평화누리길 종주를 마무리 했습니다.
이어서 백마고지 역 까지 이동 12:15 출발 평화누리 자전거 길과 이어지며, 평화누리길 13코스 쇠 둘레 길 철원구간입니다.
오늘 걷기 최종목적지 백마고지 역 도착 12:49 역 고드름 백마고지 역 까지 약 34분이 걸리고 경기도 평화누리길 연천12코스 마무리 걷기 20.59km 5시간 39분이 걸리고 13:18 동두천 행 직행 타고 대광리역으로 이동 백마고지 역 대광리역 약 15분소요 버스요금 천원 직행버스 백마고지 역을 지나 신탄리역과 대광리역을 무정차구간 지나 소요산역을 거처 동두천 역 대광리역 도착 여기서 내린 이유는 이 곳 맛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려고 합니다.
대광리역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호식당에서 늦은 점심 먹고 갑니다.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곳이라 다시 찾아 왔습니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북적북적 엄청 많았습니다.
이 곳 대표메뉴는 부대찌개와 동태찌개 저는 부대찌개 주문하고 라면 추가했더니 2인분 같은 많은 양이라서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답니다.
가격은 부대찌개1인분 8천원과 라면 1천원을 먹고 대광리역에서 14시 15분 완행 탑승 신망리역 도착 버스요금 천원 신망리역은 직행은 정차하지 않습니다.
신망리역에서 걷기 시작해서 걷기 끝내고 버스 타고 다시 신망리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동문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동문회가 열리는 날 다음과 같은 말을 학교장으로서 하였습니다.
대광초등학교가 개교한 이래 가장 뜻이 깊고 큰 행사를 하는 날이 아닌가 생각하며 화창한 날씨 가운데 우리 대광초등학교 총동문회 창립총회를 통해서 동문 여러분과의 반가운 모임을 갖게 된 것을 축복 드리면서 서울 부산 등 원근 각처에서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모교를 찾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총동문회 창립총회를 통해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멀리 있는 일가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고, 대광에 계시는 우리 대광의 동문들이 이 모임을 주선하는데 앞장섰고 참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압니다.
그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중에도 준비 위원장 삼복더위에 신발이 다 닳아서 새신을 사신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 외에 대광교 동문들께서 수차례의 회합을 갖은 결과 이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위원 동문에게 특히 감사를 드리면서 동문들께서는 이 열세분의 준비위원 동문들에게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이삼십년 전 또는 사 오륙십 전 대광교의 동산에서 청운의 꿈을 키워 왔던 추억의 장소인 대광리에 있는 초등학교가 안타깝게도 이제는 산업정보화로 농촌인구 유출과 노령화 그리고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대광초등학교 전교생 120명이라는 아주 작은 학교로 되어 학교운영이 힘들게 될 즈음에 총동문회 조직은 더욱 값진 모임이고 발기인 여러분과 오늘 대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왕림해주신 여러 동문들께 학교장으로 눈물겨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지 못한 대광초등학교 동문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동문여러분!
대광초등학교 총동문회는 계속 발전하고 영원할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총 동문들이 얼굴을 맞대고 즐거운 날을 보내길 바라며 대광리의 가장 크고 튼튼한 단체가 되어 대광초등학교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경하는 동문 여러분!
남은 시간 행복한 시간이 되시고 여러분의 하는 일과 가정에 항상 축복이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오늘 이 행사를 마치고 가시는 길 언제나 안전운전 하시고 무사히 귀가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두서없는 인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8월 30일
대광초등학교장
학부형과 어린이들을 위해 KBS 교향악단을 초청하였다.
어느 날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를 비롯한 성악가를 초청하여 어린이들과 학부형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학교장으로서 서울서 휴전선 근처 이곳까지 초청에 응하여 주심에 대해 감사한 인사말을 하였다.
다니는 교회에 유명한 강사를 초청하여 2회 어린이들과 학부형들에게 강의를 예의범절과 교양강좌를 열었다.
학교 간판에 영어로 표시하여 어린이들에게 영어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계단에도 영어 성경에 나오는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적어 기독교 정신을 심고 영어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매일 원어민과 교장실에서 영어로 예배를 하였다.
교감으로 근무할 당시 원어민을 데리고 역시 매일 예배를 하였다.
어느 날은 교감으로 근무할 때 있던 미국인 영어강사를 데리고 내차로 휴전선 일대 견학을 시키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후에 미국인 강사는 약혼녀를 한국으로 데려와 학교 직원들과 식사를 같이하고 결혼할 때 나를 초청하겠다고 하였다.
전임교의 원어민을 너무 강사비가 높아 내가 다니는 교회의 캐나다 교인을 초청하여 강사 비를 대폭 내려 학교 운영비에 보탬이 되었다.
후에 원어민 강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남아프리카에 사는 원어민 강사를 초청하여 어린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하였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목포로 수학여행을 갔다.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예정했던 준치 맛 집으로 가서 현지 지방 맛 집 분위기였는데 밑반찬도 심상치 않았다.
흔히 생각하는 쌈장이 아니라 된장에 참기름 넣은 걸 쌈장이라고 했다.
게다가 생오이랑 생양 파를 회랑 같이 먹는다.
그나저나 이건 송어 회다.
맛은 송어랑 비슷한 것 같은데 가시가 많아서 식감이 좀 맛이 없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갈치조림 익숙하게 먹을 메뉴로 생각했는데 양념이 너무 특이해서 놀라버렸다.
전혀 다른 맛없진 않았는데 맛있지도 않았다.
향이 솔솔 나고 딸려온 조기 탕은 진심 라면국물에 물고기 퐁당한 것이고 근데 이 무침이 너무 맛있다.
여기 들어가는 회가 준치인 것 같은데 부들부들 고소하고 양념도 익숙하고 맛있었다.
이렇게 밥이랑 비벼서 참기름 넣고 상추랑 깻잎 뜯어 넣어서 먹었다.
밥 다 먹고 나오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식당이 완전 바다 앞에 있고 사진기로 바다 모습을 찍었다.
여수바다랑 느낌 비슷한데 좀 더 농촌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목포대교 버스 타고 이동해서 스카이워크 도착하고 덧신을 신고 올라와서 그물에 올라가는 곳이 있다.
목포 도착해서 첫 단체사진을 찍었다.
전라남도 목포시 해양대학로 3층 바다 볼 수 있는 카페에 왔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사람도 엄청 붐비고 음료 값도 꽤 나가고 과자가 오천 원 근데 다른 음료들 다 맛있고 빵도 괜찮았다.
사람 없을 때 빨리 사진 찍고 애들이 퀴어 단편영화 포스터 같다고 하였다.
카페에서 두 시간 놀고 나가기 전에 옥상 한번 둘러보았다.
수영은 금지지만 진짜 뛰어들고 싶은 날씨였다.
전라남도 목포시 해양대학로 1층에 도착하였다.
또 먹으러 와서 이번엔 조개구이였다.
바다 바로 앞에서 먹는 조개구이 맛이란 근데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다.
배도 안 부르고 내 자리에서 찍은 아까 그곳 카페랑 달밤이랑 한건물이라 내내 여기서만 지냈다.
8시가 되어서야 슬슬 지기 시작하는 해 그전까지는 정수리 탈 뻔했다.
아무튼 목포대교 밑으로 지는 노을은 정말 예뻤다.
달밤에서 나오면 해변이 쭉 늘어져있는데 물이 막 빠져서 이끼 장난 없다.
싱그럽고 예뻐 보였다.
예쁜 자갈 찾고 이제 숙소 들어갈 준비하였다.
숙소 도착한 곳은 개조한 오피스텔이다.
사실 건물 자체는 엄청 낡았는데 이 방만 현관문도 다르고 그냥 다 다르다.
소품도 엄청 예쁘고 킹사이즈 베드 두개 있다.
너무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직원들과 같이 서해안으로 여행을 하였다.
해돋이 미래 갯벌에 몸을 위로받는 이른 아침의 게으른 태양 바닷길 파도를 타고 기쁨의 눈물을 받아먹었다.
지난해 생채기를 잘 묻고 돌아와 졸릴 수 없어 낮은 구름을 털어냈다.
곱게 빗어놓은 붉은 들판 바다 산의 능선을 타고 황금빛이 지나온 보름달만큼 서해안의 넓은 하늘을 안았다.
불붙은 태양의 잔해를 세상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해로 따라간 창백한 별들은 등을 돌려 서해로 흩어졌다.
안면 암 곁을 분홍 선으로 갈무리하여 물들이고 파도가 내뱉은 바다 향은 바람을 타고 내게 스며들었다.
머리와 몸을 온통 불 냄새로 헤집고 다녔다.
지도 위에서 밝혀진 사실 그들은 일출이라는 옷을 입혔었지 우리말이 되면 뜻이 빛나는 새해 태양의 명함으로 기억되길
2010년의 마지막 밤을 조금 설치고 2011년을 맞이하며 들었던 생각하며 해돋이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집에 있는 사람들끼리 의기투합이 되어 가장 가깝게 잡히는 서해안 태안 안면 암으로 신년 해돋이를 보러 가면 어떻겠냐고 서해안 태안의 해수욕장은 지역 특성상 해넘이의 명소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태안 안면도에서 동쪽으로 굽어져 있는 안면 암 주변의 해안가와 이미 다녀간 여행자들의 사진을 바라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안면 암 경내를 지나 너른 밭을 통과하니 썰물이 진행되고 있는 바다가 보였다.
추위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바다를 탄 산 능선에서 붉게 드리운 태양의 자태들이 환호성을 지르게 했다.
사람들은 해가 오르기 전 제일 어둠이 깃드는 시간을 또한 즐기기 위해 일찍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돋이를 마치고 안면 암에서 7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들고 나가는 차들로 대단히 붐볐지만 썰물의 환경이 고운 바다 모래에서 놀게 해주었다.
반려 견 산동이도 함께 해수욕장은 주차장 위로 해돋이가 솟아오른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여러 곳에서 올라오는 사진들이 가르쳐 준 결코 멋지지 않았던 장면이 오래갈 것만 같다.
주차장 위에서 반짝였던 태양은 우리 일행이 도착할 때쯤 해수역장의 모래사장 위를 오르기 위해 힘을 쏟는 듯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 쪽에서 해돋이를 볼 거라 상상을 했던가 싶다.
빠져나가는 차량이 오랜 정체의 시간을 만들고 있었으니 분명하였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다.
날씨 좋으면 뭐하나 소고기 사먹겠지 진하고 부드러운 그 맛 한우마을로 갔습니다.
광시한우는 예산의 자랑으로 30여년의 역사를 가지며 최고급 암소 한우만을 취급하므로 질 좋은 소고기를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스스로 한우용 암소를 기르고 관리하여 소고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
많은 미식가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광시의 한우는 암소만을 취급한다.
수도권 지역에서는 거세된 수소를 흔히 먹지만 이곳 예산에서는 암소를 훨씬 좋아한다고 한다.
광시한우는 현지에서 잡은 한우 암소를 저온 가공해서 공급하기 때문에 신선하고 맛 좋은 게 특징이다.
방문한 식당의 사장님은 한우 암소는 마블링을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맛이 진하고 풍미가 훌륭하다며 말씀하신다.
광시한우마을에는 암소만 취급하는 약 50여 개의 정육점과 식당이 밀집되어 있다.
생 갈비와 기본 반찬 간 천엽 육사시미 육회 육 초밥과 맛이 나는 기본 찬들이 푸짐하게 한 상 깔린다.
확인해 보기 위해 직접 맛을 보기로 한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좋다고 하시며 생 갈비와 살치 살을 추천하신다.
그나저나 고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상다리가 후들거린다.
각종 반찬 뿐 아니라 천엽 간 지라 등의 신선한 한우 내장과 육사시미 육회 육초 밥 선지 국이 서비스입니다.
하나 같이 따로 주문해 먹어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다.
신선한 내장은 달큼 고소한 맛이 입맛을 돋우고 고기를 먹기 전 육초 밥으로 가볍게 위를 달래주니 든든하다.
육회와 육사시미 또한 신선하고 고소한 맛에 젓가락이 멈추질 못하게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생 갈비와 살치 살을 구워보고 오랜만에 만나는 한우에 마음이 설렌다.
생 갈비 한우는 센 불에 앞뒤로 한 번씩 살짝 구워 육질이 살아있을 때 먹어야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불판에 올리자마자 고소한 내음이 방 안 가득 퍼진다.
적당히 구워 한 점 입에 넣어 맛을 본다.
씹으려니 사라진다는 고기가 맛있다.
만화 요리 왕 비룡을 보면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이고 뭔가 번쩍번쩍 빛나던데 나는 그게 참 유난스럽고 무리수 두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 비슷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맛이다.
확실히 눈이 뜨이는 맛이다. 진한 고소함이 특별하다.
얼큰하고 시원한 선짓국과 함께 하니 금상첨화다.
생 갈비 한우는 센 불에 앞뒤로 한 번씩 살짝 구워 육질이 살아있을 때 먹어야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느긋하게 음미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니 이곳이 천국 같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소고기 사먹겠지 라는 말이 왜 유행어가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광시한우마을의 식당은 정육점을 같이 운영해 질 좋은 한우 암소고기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시한우마을을 방문한 손님들의 요청에 택배 서비스도 시작했다.
최상품 한우를 진공 포장, 냉동 팩으로 신선도를 유지해 집에서도 광시한우를 맛볼 수 있다.
한우테마 공원의 정자에는 고기를 가져와 구워먹을 수 있도록 불판이 마련되어 있다.
넉넉한 서비스와 생 갈치 살을 모두 먹으니 배가 부르다.
산책을 해야겠다.
이 마을은 한우로 유명한 만큼 광시 한우테마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름 그대로 한우를 주제로 만든 공원이다.
입구부터 반겨주는 한우와 관련된 다양한 조형물들이 재미있다.
한쪽에는 해바라기길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최상의 한우를 맛보고 거니는 해바라기길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랗게 핀 꽃들이 이 공원을 아름답게 한다. 둘러보니 공원 한 쪽 정자에는 고기를 가져와 구워먹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역시 한우테마 공원답다.
예산의 따뜻한 인심이 느껴진다. 가족끼리 온다면 교육적으로도 좋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할 수 있으니 참 좋을 것 같다.
통일 전망대 밑에 커다란 성모상과 그 보다 더 큰 부처상이 북녘 땅을 향해 서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끝없는 미망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 하였다.
고성 통일전망대 구경을 마치고 고성에서 가장 맛있다는 메밀막국수 집을 찾아갔다.
산속으로 한참 들어갔는데 중간에 인가가 보이지 않았다.
메밀막국수보다 더 맛있는 게 투박한 강된장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조금 팔든지 한 두 숟가락만큼 줄 수 있나 물어보니 된장 담그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팔지도 줄 수도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메밀막국수 집을 떠나서 옛 진부령 길을 달렸다. 양양 서울 간 고속도로가 생긴 이후로 옛 진부령을 찾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한산했다.
한가한 길을 달리는 자동차 창문을 열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옛날 노래를 불렀다.
이번 여행은 하나의 주제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구름 따라 떠난 여정이었다.
아무 속박 없이 길을 가다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때에 관계없이 아침이나 점심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행한 교원들과 흉허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할 수 없는 초로의 늙은이들의 신세에 대해 끊임없는 수다를 떨면서 박수 치고 깔깔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마음의 상처와 쳐다보기도 싫은 이상야릇한 요즈음 세상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즐겁게 보냈다.
여행은 가슴 떨리는 추억을 만드는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다.
또한 낯선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텃밭이다.
여행은 떠나고 싶지만 과연 떠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그냥 떠나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몸담아 사는 곳이 힘들고 괴롭다 해도 그곳에서 살짝 한 발자국 옆으로 내밀 수 있는 용기를 내면 그게 바로 나그네 길이요 여행의 시작이다.
학창시절을 보낸 누구에게나 수학여행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전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팔복동에 있는 문화연필 공장에서는 연필 한 자루씩 선물 받고 코카콜라 공장에서는 줄줄이 이어 담기는 콜라병을 보며 신기해했고 담배를 제조하는 공장 덕진 공원과 박물관 등 처음으로 접하는 신기술과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였다.
어쩌면 당시 수학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집을 떠나 처음으로 타지에서 1박 2일을 보낸 잊지 못한 사건이었다.
70년대 초등학교 교사를 보낸 나에게도 타지로 떠나는 수학여행은 엄청난 이벤트였는데 70년대 산골 벽지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어린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자동차나 기차는 물론이고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구경조차 해본 적인 없는 아이들은 대절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순박한 시골 아이들과 서울 구경을 하였다.
시골 분교에 부임한 나는 현대 문명에서 고립된 아이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하루하루 삶에 묻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지 못한다.
나는 서울로 가는 수학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부모들은 수학여행을 보낼 돈을 준비할 수도 없고 아이들이 떠나면 일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부모들을 계속 설득한 끝에 아이들과 함께 공부가 끝난 후 여행 준비를 하였다.
아이들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리어카도 자전거도 없는 시골에서 자란 어린이들에게 서울은 처음이다.
아이들은 부임하고 있는 서울의 한 초등국민학교 아이들의 집에서 하루를 지냈다.
어린아이들은 창경원 남산 그리고 방송국을 견학하고 세탁기와 냉장고 같은 전기제품을 구경하며 신기함과 놀라기도 하였다.
처음 가 본 도시 구경에 웃지 못 할 일이 가끔 생기었다.
끝나는 날 서울 학교 어린이들로부터 리어카를 선물 받은 시골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자기가 사는 농촌을 서울처럼 잘 사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12월 남해안 수학여행을 하였습니다.
영광의 작은 소류지 첫 번째 한파가 시작되면 허리급 4짜 들의 입질이 시작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아끼는 애장 터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부담이 되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초청을 해주었고 전남 서해안으로는 눈이 많이 내려진 상태 이지만 한편의 망설임도 없이 영광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정말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갖고 싶어서였습니다.
5박 6일의 긴 여행을 하였습니다.
충북을 가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눈은 끝날 때는 벌써 많이 쌓여 있는 모양이고 작게 오는 눈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름다운 농촌을 보면서 셔터를 누르는데 눈이 아름답습니다.
깨끗한 모양을 갖고 있는 순결함이 느껴지는 12월의 겨울 모양이었습니다.
영광 소류지에 도착을 하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12월의 매서운 날씨에 서서히 걸으며 소류지를 구경하면서 의심 반 기대감 반 눈보라가 세차게 불고 있고 내일에도 계속 눈이 내린다는 날씨이지만 소담스런 소류지에 많이 내려준 함박눈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을 향하여 제방 권과 소류지 이급 포인트는 남겨두고 논 가운데 알맞은 자리를 잡고 낚시 대를 놓아 봅니다.
바람이 불고 더 오래 살고 싶은 마음과 나이가 들어 할 일은 많은데 짧은 해로 긴장해지고 긴긴밤에 생각이 깊어집니다.
겨울의 하얀 눈을 기다리고 푸른 솔은 사시사철을 잊고 한 마음 같이 바람을 맞는데 움직이는 것만 숨을 죽이며 바쁜 걸음으로 다니고 세월 지나고 바람을 움직입니다.
지난 것도 새로운 것도 없는데 시간은 늘 나의 생각에 여울목 시간이며 이제 늘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소류지는 약2500평 정도의 평지 형이고 서해안 수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해안을 따라 뗏장이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물속으로는 여러 가지 고기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미끼가자생새우와 참붕어라고 하는데 영 지금까지 채집망은 텅 텅 비어 있으니 힘듭니다.
마름이 물위를 덮고 낚시하기가 쉽지 않고 오는 사람들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어서 짬 낚시로 중치 급붕어를 만나고 갔습니다.
금방 눈이 잠시 끝나고 파란하늘을 보여줍니다.
서둘러 대편성도 마치고 잠자리도 준비를 해두어야겠습니다.
이른 시간 저녁밥도 미리 마쳤고 밤낚시를 위한 준비도 끝내 두었습니다.
눈이 많은 곳에서의 밤낚시는 정말로 10여년은 지난 것 같은데 정말로 참 낭만적입니다.
초저녁까지 밤 채집망에는 무슨 생명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옥수수 미끼 두개만을 가지고 오늘밤을 지내야할 것 같습니다.
옥수수 미끼에는 잔챙이로 약한 입질만 들어 올 뿐 정말로 시원한 입질은 없고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밤에 눈이 날리는 좋지 못한 기상조건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생소한 장소에서의 긴장감이 온몸의 신경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밤 11시 앞 35대에서 아름다운 찌 올림이 있었고 귀여운 5치 붕어가 나왔습니다.
아침은 좋은 날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상한 얼굴들 나의 마음을 날씨가 증명해 주는 것 같이 하였습니다.
대물꾼들은 상류 권 아름다운 뗏장에서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분주하게 손님접대에 온 신경을 썼습니다.
제방에 편하게 좌석을 하시고 정직하고 굳은 성격은 역시 낚시나 조그만 언어에도 생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난 사이지만 시간을 함께 한분위기 강가에서 가장 푸짐하고 정성어린 대접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일생을 지내면서 돈과 부와 명예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고도 하지만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이 귀중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이 쌓인 눈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의 꿈인 4짜를 알아보기 위해 밤을 지새워 해야 했습니다.
저녁에는 4마리의 새우가 왔습니다.
제일 좋은 곳에 생각되는 곳에 네 곳만 새우를 꾀 매어 달아 봅니다.
내방에서도 중류에서도 내 자리에서도 힘이 약한 입질만 계속되어 질 뿐 상황이 연달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기온 영하4도 깨끗한 하늘위로 수많은 별들이 나타났습니다.
소류지에 세 사람의 생각을 해 주는듯한 조과와 입질도 없지만 아름다운 좋은 저녁입니다.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며 추운 저녁을 생각해 봅니다.
생각 없이 아름다운 저녁에 웃었습니다.
늦은 시간 저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소화하려면 할 때 마다 이른 아침마다 서두르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세 분 조사님은 하루 종일 4짜에 도전을 꼭 실패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대를 걷고 있는 중에 새우미끼에 5치 붕어가 나타났습니다.
찾아준 손님에 대한 격려의 인사였습니다.
두 번째 장소를 지나 세 번 째 장소를 향하여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장소는 겨울 대물낚시의 나주 연화제입니다.
혹시나 이름에 알맞게 모든 곳에 있는 조사님들이 있었고 보트도 5대나 강 위에 떠 있 섰습니다.
앉기를 좋아하는 제방 모퉁이 자리는 4분이 늦어 다른 조사님께 양보를 하고 마을을 향하여 옆에 있는 조사님의 양해를 얻고 자리를 해보아 습니다.
정말 이곳은 꾼들이 늘 많고 나의 낚시 좋아하는 것과 맞지 않는 장소 입니다.
낚시하는 기간 버킷리스트 중 두 곳이어서 시간이 허락 될 때 찾아본 것이었습니다.
모든 조사님들은 늘 같은 곳에 있고 장대들을 놓으셨습니다.
걸면 대물이라는 공식이 통하는 곳에서 늘 나는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1시 방향으로 30대를 이루고 앞뒤로 40대 까지 긴대를 4대 편성하였습니다.
미끼는 오로지 옥수수 몇 번의 입질이라도 상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초저녁 생각 밖의 입질이 찾아왔습니다.
오른쪽 뗏장에 있는 20대의 찌가 한 번에 스르륵 올라왔습니다.
더 하지만 뚝 떨어지는 찌 이것이 무엇이지 이것이 아닌 것 같은 데 챔질을 했어야 했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고 이번에는 맨 좌측의 30대에 입질이 들어왔습니다.
지그시 올라가는데 더 속으로 외치고 또 뚝 떨어져버리는 찌불이 이상하기만 하였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연화제 4짜의 입질이 때로는 약 할 때가 있고 오늘같이 초속 4m의 바람이 있는 날 있었습니다.
후에 세 번의 입질이 전부 본신인 셈 이날 연화제 모든 곳에서도 챔질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숨이 차는 긴장감 속에서 하루 밤은 짧게 느껴졌습니다.
아름다운 아침 해가 긴장감이 없고 휴식할 때가 된 것 같았습니다.
찾아 온 곳 오늘 하루 더 좋은 붕어를 기다리기로 생각하고 낮에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어제는 바람이 있었지만 기온은 영하 7도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정말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도 몰랐습니다.
좀 더 생각하고 조심하며 장비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둘째 밤도 아무 변화가 없고 조용하게 지나갔습니다.
붕어 없이 경치만 보여줍니다.
아침 햇빛을 받으며 다음 곳을 생각해 봅니다.
예정대로라면 후보지인 고흥 쪽으로 갔지만 바람이 초속 9m입니다.
하루를 근처에서 편히 쉬고 아침 늦게 이동을 해야겠습니다.
연화제를 뒤로 하고 나주 가까운 저수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주 송암 제는 금년 겨울 허리 급 붕어들이 나타났습니다.
3월 산란시기에 좋은 붕어들과 4짜급의 대물들이 보이지만 이시기제방권의 연 밭은 알짜배기 중심입니다.
바로 뒤에 주차를 할 수 있어 빠른 철수가 있기에 오늘 같은 날에는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현재 바람은 제방이 막아 줄 수 있는 곳이라 더욱 좋습니다.
저 멀리 농촌 마을의 풍경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부근의 신원제와는 비슷한 모양의 중형 급 저수지로 같은 연 밭이지만 신원 제는 토종 터 송암 제는 배스와 블루길이 살고 있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제방 근처에는 4곳이 닦인 연 밭 자리가 있는데 50대까지 편성 할 수 있도록 좌석을 잘 가꾸어 놓아 편하게 대 편성을 할 수 있습니다.
제방으로는 얼음이 있어 낚시를 할 수 없는데 저 얼음이 덮여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추억이 아름다운 계절 예쁜 단풍잎도 제 품에 있습니다.
가을은 빨리 걷다 앞서 오는 초겨울 세찬 바람에 손 사레를 하며 달려갑니다.
옛날 인사만 했는데 아쉬운 것은 아쉬운 데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데로 못다 부른 노래도 방금 끝내고 새 하얀 첫눈이 많이 쌓여 보듬어 주리라 초겨울에는 사랑과 희망 품었던 꿈과 소망까지도 모두 사랑이란 이름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기에 봄여름에 사치스럽던 숲 가을과 같이 천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초저녁에 겨울이 오는 소리 창을 열면 흰 눈이 오는 오솔 길 어두움은 더욱 깊고 별 없는 겨울 숲을 둘이서 가니 먼 길에 목이 마른 가난의 행복 별 하나 가슴에 달고 겨울 길을 갑니다.
오늘은 옥수수와 단백질을 함께 이용해 보려고 합니다.
기온이 떨어졌으니 밤늦은 시간에 지렁이도 함 투척해 봅니다.
최근에 보기 힘든 노을이 매우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점심식사도 잊고 얼마동안 셔터를 눌렀는지 모릅니다.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처럼 모양도 없이 녹아 없어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눈발이 물 위에 있기 전에 몸을 바꾸어 흐르려고 이곳저곳 자주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시끄러운 강물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눈은 내려 강은 엊그제 밤부터 눈을 내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운데 으로 부터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떠나는 것과 다가오는 것의 분기점에 선 12월이 오면 그간 가꾸어 주지 못했던 것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작은 불빛이 별같이 깜빡거리는 차가운 1월의 밤거리를 다니면 나답게 살지 못해 울고 있는 나를 젖먹이 어린 아이 같이 껴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못난 나 자신을 한 번 더 용서해주면서 가까이에서 겨울나무같이 울고 있는 나에게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내일의 해가 어김없이 나타나듯 나에게도 엄마 품처럼 아늑한 시간이 온다고 조용히 이어지는 시간 위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쓸쓸한 노래를 불었습니다.
듣는 사람도 없는 시간 속에 노래만 있었습니다.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렸습니다.
내린 눈은 즐거움과 슬픈 인간이 지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었습니다.
눈이 쌓인 속에서 겨울은 즐거움과 서글픔을 분류하여 사람이 남긴 즐거움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합니다.
눈송이처럼 당신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서성거리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대로 너의 하얀 생활 속에 뛰어 들어 따뜻한 겨울이 되고 싶었습니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모두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고 무엇으로 서로 깊어질 수 있겠고 이 추운 계절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생겨나고 향기를 낼 수 있겠고 눈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이 오는 겨울밤이 없어지면 추위를 떠는 사람의 추위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나의 추운 몸을 녹이는 몇 평의 온기가 있는 방을 생각하고 나를 벗어버린 생각하나 커 나올 수 있겠고 아아 겨울이 온다.
차가운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 사랑이 온다.
여러분도 저물고 있고 산꼭대기를 기대어 앉아서 이른 저녁이 서서히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기간 입김이 분홍빛 노을로 지나가는 넓은 하늘을 봅니다.
여러분도 물이 들고 있고 나를 물들이고 고생하는 1층 같은 구름의 물결을 물들이고 가을 느티나무 잎을 노을처럼 저는 내시가 여러분의 얼굴 한 쪽을 색깔이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나의 노래가 끝으로 한 번 더 여러분을 물들이고 없어지는 저녁노을이기를 나의 눈빛이 한번 마음을 흔드는 저녁 종소리이길 바랐습니다.
시가 생각나면 어둠이 오고 나의 최후의 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의 시집은 시시 때때로 여러분을 향하여 마지막의 시집이 될지 생각에 떨었습니다.
마지막을 상상하는 동안 해는 서산을 지나가고 한 시간 저물어 가는 세상을 다 태울 것 같던 생각도 재가 되고 구름 그림자만 저무는 육신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나가고 있습니까?
쓰러져 지나가는 몸이 만들어 내는 확실한 희망 동살보다 더 빛나는 빛을 뿌리며 마지막의 나도 그렇게 저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가는 시간이 최후까지 빛이 나는 시간이기를 여러분과 우리 모두의 하늘 위에 최후 시간 까지 생각하기를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따라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작은 그 여자애가 꽃잎처럼 움직이는 여자애가 세상보다 더 큰 질량으로 저를 끌어당긴다.
저는 뉴턴의 사과처럼 생각 없이 여자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내가 눈발이라면 하늘에 뿌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고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낮은 곳으로 온화한 함박눈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을 못자는 사람의 창문 근처에서는 편지가 되고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나는 새 살이 되고 또다시 눈이 오면 생각이 났습니다.
오랜 기간에 묻혀 희미해진 얼굴 또다시 눈이 오면 생각이 나주겠지요
또다시 눈이 오면 생각이 떠올라 주겠고 천천히 오는 눈처럼 그 얼굴과의 얘기 다시 눈이 오면 떠올라 주겠고 다시 눈이 녹으면 녹아 없어지겠고 한 송이 한 송이 정성들여 만든 이야기 다시 눈이 오면 좋아 집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였다.
기차로 출발 하여 자동차로 귀가 하고 올해는 2개 코스 걷기를 하고 장거리 장시간 기간 지나면서 산티아고를 생각하는 나 자신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실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안전하게 목표한 것을 잘 끝나게 할 수 있어 만족합니다.
날씨도 좋고 맑아서 더욱 신나게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주말 다녀간 고대산 캠핑에 등산한 고대산 산길에 대하여 적어 봅니다.
고대산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의 경계에 위치 한 높이 832m의 산이고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좋은 힘이 되었던 산행이었고 지금 시작하기에 앞서 마늘 빵 소개 마늘빵 꽃이 피었습니다.
공장이 동네 부근에서 때로는 캠핑 갈 때 사가지고 가면 인기폭발이고 전날 끓인 스튜를 가끔 남겨놓고 아침에 끓여서 마늘빵에 발라서 먹었습니다.
맛은 찰떡궁합 인정 오룡 식품 광고 아니고 협찬 아닙니다.
진짜 맛있고 이제 정말 출발하여 고대산 등산코스 2코스로 올라가다가 표범폭포 보고 꼭대기 찍고 3코스로 내려오길 생각했으나 4코스 입구까지 좀 멀어서 가까운 1코스로 올라 꼭대기 찍고 2코스로 내려가는 길을 변경했습니다.
1코스 입구 계단구간 지금까지 몸이 안 풀려서 숨도 차고 힘이 듭니다.
그래도 잠깐 뒤돌아보며 경치를 보며 더 올라가면서 더 좋은 경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올라갑니다.
연달아 올라갑니다.
동네가 좀 더 잘 보입니다.
올라갑니다.
계속 올라갑니다.
말 등 바위 지금부터 경치가 볼 만 합니다.
말안장과 비슷해서 말 등 바위 인가 봅니다.
칼바람의 나락 말 등 바위를 지나가다 한동안을 오르다 보니 칼바위능선 아래 도착하고 눈이 온 능선 길 산 꼭대기 산행시간만 생각했더니 예상치 못한 기후변화와 갑자기 준비가 많이 부족했고 아이젠도 없고 장갑도 없이 고생 좀 했습니다.
칼바위 전망대 다행히 몸은 좀 풀렸는지 힘은 조금 들었고 세찬 바람에 얼굴과 손이 너무나 춥고 눈길에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올라가다보니 칼바위 전망대 도착 칼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시원 합니다.
아직 춥습니다.
바람이 너무 춥고 오래 동안 있고 생각하지 못하고 서둘러 시작합니다.
칼바위 암릉 구간 모르겠지만 고대산의 굵은 밧줄구간은 말뚝 봉에 쇠줄이고 생각지도 못했고 목재말뚝에 야자수 같은 굵은 밧줄만 보았고 손이 얼은 것 같았습니다.
2월 달까지는 배낭에 아이젠하고 동계장갑은 항상 넣고 다녀야겠고
어두운 언덕 구간 위에서 올라온 길을 다니다 보았고 손이 차가 워 사진 찍기도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경관을 안담을 수 없기에 눈으로 보는 걸 사진에 다 담지 못해 매우 아쉬웠습니다.
칼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다 반대로 보니 하나의 경치가 있어 일행과 같이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6학년 어린이들과 담임선생님과 수학여행을 갔다.
울산과 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갈 예정이다.
우리나라 제일의 경관이자 한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해안선 일주를 함께 할 예정이다.
첫날 수학여행으로 통영 별미 멍게비빔밥을 먹고 통영 명물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고 통영 중앙시장에서 회를 떠서 거제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첫 목적지 통영에 도착하니 오후 2시경이었다.
통영 중앙시장 음식점에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멍게 비빔밥을 먹었다.
아이들은 초장을 듬뿍 넣고 잘 비벼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안에 넣었더니 멍게의 향내가 입안 가득했다.
뭉클한 멍게를 밥과 함께 씹으니 입안에 감도는 느낌에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두 숟가락을 떠먹고 나서 옆자리 친구에게 멍게비빔밥 정말 맛있다고 한 마디 건넸다.
음식은 본래의 고장에서 맛을 보아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더니 왜 이곳 사람들이 멍게비빔밥을 칭찬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맛있게 점심 식사를 끝내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찾았다.
마침 충청도 부여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나 또한 나이를 잊고 그들처럼 기분이 좋았다.
동피랑 벽화 구경을 마치고 통영의 명물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탔다.
기다랗게 줄을 섰지만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케이블카는 아이들 일행 5명만 탔다.
건너편 미륵산 정거장에 내려 미륵산 정상까지 계단이 조금 힘이 들었지만 씩씩하게 올라갔다.
많은 관광객 틈에 끼어 정상에 올라가서 보니 한려수도를 다도해라고 말하는 이유를 실감했다.
날씨가 맑지 않아서 다도해의 멋진 모습을 눈 가득히 담지 못해서 조금 아쉽고 서운했다.
미륵산 정상에서 다도해 구경을 하고, 거제도에서 숙박하게 되어 회감을 떠가려고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여행 둘째 날 전에 보았던 거제 해금강을 다시 찾았고 외도-보타니아 섬에서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보여준 사람을 보았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누가 지켜줄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해버린 것 같은 부산 세월만 변한 게 아니라 인간의 삶 또한 변해버린 모습에서 애잔함을 느꼈다.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3천원의 가격에 비해서 진수성찬이었다.
특히 후식으로 숭늉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숙소를 나와서 거제도 해안 도로를 달리며 시원한 바다 바람과 절경을 구경하면서 거제 해금강과 외도를 찾았다.
해금강은 70년대 초반 대학 시절에 갔었다.
그때는 낚싯배를 타고 갔었는데 이번에는 비록 시설은 좋지 않지만 조금 큰 유람선을 탔다.
햇볕도 좋았고 게다가 파도가 잔잔하여 관람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해금강 주위에서 유람선이 천천히 움직여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입담 좋은 유람선 선장이 해금강의 소나무와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이 빚어낸 만물상에 대하여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해금강 구경을 끝내고 찾은 곳은 외도다.
거제도에서 떨어져 있는 땅이라 외도라고 불린 곳 48년 전 한 부부가 그 버려진 섬을 사서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열정과 끈기와 인내를 가진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애끓는 아내의 사모곡이 새겨진 글을 읽으면서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외도를 나와 바람의 언덕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었다.
바람의 언덕의 풍차는 돌아가지 않았다.
풍차를 세워 둔 곳의 높은 부분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왔다는 표시로 이름이나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을 새겨놓았다.
비릿한 바다냄새를 뒤로 하고 거제 시내로 들어가서 ‘대구 지리 탕을 먹었다.
심심하게 끓인 대구 지리 탕 펄펄 끓는 국물에 미나리 향기가 가득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고니와 대구 살은 살살 녹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방문하였다.
군대생활을 전방 철책 선에서 한 탓인지 그다지 감흥을 느낄 수 없었고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도 없었다.
우리 땅과 하늘과 바다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도 꿈속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지 모르겠다.
거제도를 벗어나 부산으로 향했다.
해저터널로 이어진 가거대교를 건너서 부산으로 가서 동백섬을 구경 하였다.
제철이 아닌지라 동백꽃은 볼 수 없지만 동백섬 산책로에서 시작하여 해안 길로 걸어가면서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위용을 자랑하는 해운대를 보았다.
해운대를 벗어나 하루 밤 머물 곳을 찾아 부산진역 주변에서 적당한 곳을 골랐다.
숙박할 곳을 마련하고 부산진역 먹자골목에서 ‘꼼 장어 구이’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주변 야경을 구경하며 보니까 30년 전 보름 간 머물었던 부산진역 부근이 완전히 새롭게 변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부산에서 양산 통도사를 거쳐 언양 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그동안 좋았던 날씨가 비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부산을 벗어나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이른 아침 길이라서 자동차도 별로 없었다.
천천히 달렸는데 금방 양산 통도사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서 입장료를 내지 않았다.
어린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전날 자기 전에 산책을 가자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절대 못한다. 더 자겠다." 이러고 잠들었는데 분명 늦게 잤었는데 눈뜨니까 새벽 6시 그래도 도저히 따라 산책은 못가겠어 애들 산책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만히 있었다.
좀 더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도저히 잠이 안와서 테라스에 나가서 풍경 보니 너무 아름답다.
둘이 다녀와서 깨고 애들이 "석자는 일어났나? 더 자는가?" 이랬는데 누구 한명이 "야 석자 일어나서 핸드폰 하고 있다." 이래서 숙소에 있지만 근황은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있다.
잠도 안 오고 또 아침바다 보고 싶다.
그래서 애들보고 "바다 보러 갈사람?" 이라고 하니 처음에 유희는 "우리는 갔다 왔다" 이러 길래 내가 "차타고 가는데?"이러니까 "그럼 또 갈래?" 이러면서 사이좋게 4명 차타고 편하게 아침바다 보러 갔다.
아침 바다는 또 느낌이 달랐다.
제주도라서 그런 가 왜 이렇게 다 감성적으로 취한다.
제주도 아침부터 산책 나오는 삶이란
아침 8시에요 사진에 진심인 아이들이 여행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진을 찍어요.
이렇게 잘 맞는 줄 알았으면 같이 맞춰서 수학여행 느낌도 나면서 진짜 너무 재밌었다.
이 사진 찍고 보면서 얼마나 웃어 거렸는지 분명 4명 다 같이 뛰었거든 마지막 날 숙소 떠나기 전에 여기서 너무 찍고 싶어서 꼭 다시 오고 제주도 오면 또 돌담길에선 사진 찍어줘야 하거든요
거울 보이면 사진 찍어야지 이렇게 단체사진 남겨놔야 여긴 내 인생카페이다 진짜 제주도 오면 무조건 가라고 추천하는 작년에 동생이랑 오고 아직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인생카페로 뽑히는 카페! 정말 너무 예쁘다.
음식도 너무 맛있고 제주도 오기 전부터 내가 애들보고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긴 꼭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 해서 애들이 다들 좋다고 해서 온 곳인데 다들 만족해서 너무 기분 좋았다.
다들 여긴 오픈시간 맞춰서 오세요.
도착해서 그런지 여유롭게 사진도 많이 찍었다.
어제 햇빛도 잘 들어오고 진짜 너무 아름다웠다.
마지막 날 까지 바람이 불어서 치마계속 입긴 불편해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숲을 나오면 이런 공터가 등장한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남아서 마지막 바다 한번 더 보자! 싶어서 공항 가는 길에 들린 함덕 해수욕장 여긴 제주도 올 때 마다 오는데 너무 예쁘다.
마지막 날 까지 제주도는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다들 제주도 오기 전에 온도보다 풍속 확인 기억하는 것이 좋다.
직원들과 여행을 갔다.
경기도 가평에는 꽃 별 어린왕자를 주제로 한 작은 프랑스 동화 속 마을이 있습니다.
유럽 지중해 연안의 풍경인 듯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지고 북항 강과 호명 산의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져서는 마치 방금 전 동화책 속에서 툭 튀어 나온듯한 정취가 가득한 아름다운 프랑스입니다.
아름다운 프랑스는 실제로 프랑스 알자스 주 바랭현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프랑스 전통마을로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어부와 물방앗간 주인 등이 살던 전통 목조가옥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있으며 라인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일강의 갑문을 통해서는 거의 모든 상점들의 뒷문까지 배가 물건을 실어 나른다고 합니다.
그러한 프랑스의 전통마을을 경기도 가평에서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평댐에서 시작하여 남이섬 방향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북한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다 도착하는 만큼 동화 속 마을을 마주하는 느낌은 도착 전부터 기분이 좋다.
멀리에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언덕위에 자리한 아름다운 프랑스는 그렇게 도드라진 풍경으로 인해 더욱 이국적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프랑스는 16개의 프랑스식 건물로 이루어져있는데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는 인형 집 기념관 아주 오래된 오르골을 만날 수 있는 오르골하우스 프랑스 전통마을 엿볼 수 있는 목조 가옥과 인형 그리고 접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생활도구들을 비롯하여 마을 곳곳에서는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어 볼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합니다.
그런가하면 베토벤 정원 얼마 전에 종용한 별에서 온 그대 촬영지로 드라마 촬영명소를 둘러보는 재미 또한 솔솔 하답니다.
호명산과 북한강 그리고 아름다운 프랑스가 어우러진 풍경은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고 자연의 정취가 가득하여 절로 마음의 치료해 주기도 하고 그러한 아름다운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게 되는 곳은 바로 인형 집 기념관입니다.
인형 집은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모두 사랑하는 소설 어린왕자의 저자로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이자 비행사입니다.
1944년 연합군 조정사로 프랑스 남부 행 안을 비행하다 행방불명이 되었고 기념관에는 어린 왕자 속 바오바브나무를 비롯하여 책속 삽화 등 생전에 직접 작업한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일생부터 전 세계적으로 영원토록 사랑 받을 것 같은 어린왕자의 탄생 배경 등 프랑스 문학사의 한축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한 기념관 2층에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생텍쥐페리에 대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게 되는 공간인 기도실로 오후 햇살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기념관을 나와 유럽의 광장과도 같던 분수광장으로 향합니다,
1층의 매점과 체험 실 기념품 사진 등이 위치해있어 쇼핑을 할 수 있는 공간이자 2층은 숙박 동이었습니다.
참고로 아름다운 프랑스는 최대 200여명까지 숙박이 가능, 하룻밤 머물며 프랑스의 의식주의 모든 문화를 체험할 수 있기도 합니다.
16개동의 한정된 공간 인만큼 즐길 거리는 한정적인데 그러한 단순함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마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던 공연이랍니다.
마을길을 산책하며 이국적인 정취에 취해있다가는 시간대별로 펼쳐지는 다양한 공연들에 섞여 즐기다보면 더욱 풍성한 나들이가 되어줍니다.
프랑스에서 건너 온 듯한 아티스트의 음악에 맞추어 관람객들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마을아래의 공터에서 펼쳐지는 듯 아주 편안한 공연이 되어줍니다.
그러한 야외극장의 야간은 더욱 화려해 진다하는데 의자에 걸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수히 많은 별들과 만날 수 가 있다합니다.
마을 구석구석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은 최고의 구경거리입니다.
아름답고 달달한 드라마의 촬영명소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누구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화보가 되어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린왕자를 통해 프랑스 문학을 만났었다면 이곳 에서는 프랑스의 음악과 마주 할 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수집한 아주 오래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르는 공간으로 해설과 함께 특별한 음악여행을 떠날 수가 있고 약 200 여녀 전의 것부터 최근에 제작 된 것까지 아주 다양한데 누구나 편안히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만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야만 했답니다.
마을 뒤에 이어지는 길 높이 오를수록 북한강의 풍경이 더욱 가까워지고 인형극공연이 펼쳐지는 인형극 극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프랑스의 작은 전원마을을 걷고 싶은 기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형극 공연은 공연이 시작되면 입장이 불가나 가는 길에 취해 5분 늦게 도착 하여서 입장불가 그러한 안타까움을 인형극 인형 관람으로 대신하였음에도 많은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답니다.
실제 프랑스의 라인 강과 함께하고 있다하는데 경기도 가평의 아름다운 프랑스는 북한강이 있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호명산과 북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외진 곳 그래서는 자연과 마을만이 전부이기에 그러한 경관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기 때문으로 마을도 주경관도 바라보이는 곳마다 멋진 경관만이 가득합니다.
그러한 풍광을 마주하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즐기는 여유는 아름다운 프랑스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되어주고 아름다운 프랑스의 즐기는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드라마 촬영지 그 첫 번째 장소는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지입니다.
MBC 인기드라마로 아름다운 프랑스가 더 많이 알려진 계기가 되었던 만큼 일부 촬영장소가 그대로 보존되어있어 드라마의 감동을 되짚어 볼 수가 있답니다.
촬영지의 피아노는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고 그 뒤편에 당장이라도 말을 할 것 같은 강마에 책상 그리고 그 위로는 휴식공간인 강마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어 편안한 관람이 되어주고 그런가하면 지금 많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프랑스를 찾게 만든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는데 대기하다 잠든 깨어난 바로 그곳 주말저녁이면 도민준의 도술로 시간이 멈추는 이벤트도 열리고 프랑스마을에서 프랑스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프랑스 전통주택 전시관입니다.
200년 이상 된 아름다운 가옥을 그대로 들여와 재조립한 주택전시관은 오래된 목재에서 프랑스의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동시에 소박한 침실과 화려한 접시의 대조적인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 밖에 함께 찾은 이가 연인이라면 사랑이 깊어지게 하는 곳 가족이라면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다양한 풍경들이 이어지던 곳 프랑스의 상징이 닭 조각과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그림 다양한 접시와 인형 등 사랑스런 소품들이 가득하고 그러한 아름다운 프랑스 여행은 인형극 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사람과 인형의 조화로 완성되는 인형은 얼마나 연습을 한 것인지 마치 한 몸 인처럼 사람의 몸짓 그대로 펼치는 인형의 동작들에 감탄이 절로 났었답니다.
피노키오 싱어 강아지가 보여주는 신비롭고 유쾌하며 친근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을 실천할 수 있는 곳 아름다운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드라이브에 이어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심을 찾게 되는 여행이다.
가평의 드라이브 명소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산 중턱에 자리한 라틴정원을 만날 수 있다.
방갈로에 앉아 아름다운 가평의 자연풍경과 북한강을 바라볼 수 있어 가평의 뷰 맛 집 카페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곳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는 방갈로 자리는 예약이 따로 불가능하며 당일 선착순으로 사용할 수 있고 사용료 3천 원을 지불하고 한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번거로운 조건을 모두 감수하더라도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산을 바라보며 커피와 즉석 라면을 함께 즐기는 이색 경험도 가능한 곳 꼭 방갈로 자리가 아니더라도 테라스와 야외 테이블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으니 한 시간만 사용할 수 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가평의 신상 호텔 아름다운 평화로운 북한강을 바라보며 즐기는 수영장이 있는 곳으로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으로 마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 모든 객실 모습으로 야외 개인 테라스를 가진 다양한 객실을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호텔 내에 카페와 수준급 음식점이 있어 호텔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수영하기 완벽한 곳이다.
6만 평 대규모 목장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가평양떼목장카페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상 베이커리 카페로 안개길 로도 불리는 이곳은 곡선형의 특이한 건축물로 네 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있어 어디에 앉더라도 광활한 농장의 탁 트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가평의 대표 자연 치료 중심인 아침고요수목원 약 10만 평의 부지에‘고향 집 정원 분재정원 에덴 정원 약속의 정원' 등 모두 13개의 테마정원으로 이루어진 수목원으로 서울 근교 대표 가족 나들이 코스뿐 아니라 커플들이 날 잡고 인생 사진 찍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고 특히‘서화 연'은 전통 조경 양식을 따른 아름다운 연못 정원으로 드라마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고 정자 주변으로 봄에는 벚꽃과 목련여름에는 붓꽃과 연꽃 등 계절별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가평 시내에서 차를 타고 10분만 들어가면 시골 냄새 풀풀 풍기는 정겨운 식당 동기간을 만날 수 있다.
토종닭만을 사용하는 닭볶음탕 맛 집으로 수요 미식 회에 출연했던 곳으로 출시할 정도인 찐 맛 집 닭볶음탕과 닭백숙 토종 오리 백숙과 로스구이 삼겹살 등의 메뉴를 판매하고 있으며 시원한 국물의 닭볶음탕과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감자전은 처음 동기간을 방문했다면 꼭 맛봐야 하는 메뉴이다.
모든 메뉴가 술이 생각나는 곳이기에 차를 가져왔다면 일행 중 한 명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며 점심시간에는 웨이팅 필수인 곳으로 예약 시 독채 방갈로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명지산은 높이 1,267m이다.
1991년 9월 30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광주산맥에 딸린 산으로 경기도에서는 화악 산 1,468m 다음으로 높고 주위에 남 봉1,250m 강씨 봉 830m 승천 봉 974m 등이 솟아 있다.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며 정상에 오르면 광덕 산1,046m 화악 산 칼봉 산 900m 등의 고봉과 남쪽으로 북한강이 바라다 보인다.
정상 쪽 능선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군락과 고사목 등이 장관이고 봄에는 진달래가을에는 붉게 물든 활엽수의 단풍 겨울에는 능선의 눈꽃이 볼 만하다.
북동쪽 비탈면에서는 명지계곡의 계류가 가평 천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비탈면의 계류는 조종 천으로 흘러든다.
특히 30㎞에 이르는 명지계곡은 여름철 수도권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산 입구에는 비구니 도량인 승천사가 있고, 남동쪽으로 46번국도 경춘 국도 서쪽으로 47번국도가 지난다.
비교적 높은 산이지만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아 등산 초보자들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다.
명지 산 산행후기 명지 산 등산코스 익근리 주차장-명지폭포-명지1봉정상-명지폭포-익근리 주차장 원점회귀 등산 가평 명지산 높이 1,267m이다.
경기도에서는 화악 산 1,468m 다음으로 높다.
명지 산 1252m은 화악산에 이어 경기도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에 따라 품이 너른 주중에 여동생 부부가 가평 쪽 산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한다.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가 귀목 봉 뒤에 병풍처럼 들어선 산이 명지산이다.
가평군 농어촌버스가 2020년 개편에 개편을 거듭해 지금은 가평역이나 가평터미널에서 명지 산 입구 한국전쟁 당시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가평 일대의 촌락에서 무수한 학살이 있었다.
Ⅴ.정년퇴직 후의 생활
어느 날 갑자기 음식을 먹기 싫어서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10일간을 금식을 하였는데 7일이 지나니까 오줌에서 핏빛으로 변하였다.
10일이 지난 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여 이웃집 휠체어를 빌려 타고 백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가자마자 영양 주사를 맞고 그날 보호자의 연락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내에게 연락을 하여 확인한 후 오후 늦게 입원을 하였다.
입원하는 동안 피부과 심장내과 등에서 치료를 하였다.
치료를 받는 동안 병원에서 주는 음식을 간병인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고 심장내과에서 인공심장 박동 기를 다는데 며칠간은 너무나 아파서 고통을 많이 느꼈다.
내가 있는 입원실에는 여러 명의 환자가 있는데 간암 수술을 받은 환자도 있고 몇 명의 다른 병으로 인하여 입원한 환자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변이 마려 간병인이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입원실 안에 오줌을 참을 수가 없어 싸고 말았다.
인공 심장 박동 기를 다는 동안 여러 가지 과정이 있는데 얼음찜질을 하고 마취를 하고 1시간 정도를 걸려 수술을 하였다.
피를 뽑고 수액과 처방된 주사를 맞아야 하고 아프면 핏줄이 속 안으로 들어가서 주사바늘 꽂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초보 간호사가 오면 될 수 있는 한 거절하고 주사 잘 놓으시는 분께 맞고 저는 말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환자만 더 고생 시키고 두 번 찌르고도 실패하고 멍들고 피나고 입원하면 보호자는 한 명만 지정 되고 다른 사람은 병원 오면 안 되고 잠깐씩 왔다 갔다 하고 병원 내부는 오래된 것 같지만 깨끗하였습니다.
다만 화장실 문턱이 좀 있어서 수액 거치대 끌고 오갈 때 불편하고 하루에 간병비가 10만원 병원 와서 제일 중요한 건 좋은 의사를 만나는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의사 한 분은 안 좋고 두 분은 괜찮고 안 좋은 의사 한 분의 어이없는 말이 염증으로 부은 얼굴을 자다 한 말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욕 했고 자격 없는 의사라고 소심하게 나오는 문 앞에서 더 있지만 말을 아끼려고 좋은 의사선생님 신경외과 의사 선생님은 잘 들어주시고 질문도 많이 하면서 환자 상태를 보셨습니다.
치과의사선생님도 이를 뽑지 않는 선에서 치료를 잘 해주셨고 좋은 의사선생님이 복이고 입원생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건 식사였습니다.
처음엔 환자 죽을 받았지만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해서 아내가 죽을 사왔고 병원 죽에서 병원 밥으로 제가 먹었습니다.
버리는 게 반 이상 이었지만 병원 밥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먹었습니다.
생선이 비리고 돼지고기 냄새가 풀풀 나도 잘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못 먹겠고 보기는 괜찮고 음식 투정하는 것 같지만 정말로 다 버렸습니다.
이날 입원한 다른 환자분도 첫 끼니 전부 돌려보내고 저는 화를 참고 절식 요청했는데 입원환자는 한 끼는 꼭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래 입원하신 분은 자연스럽게 밑반찬을 꺼내서 드시고 간병인 분께 반찬 드리고 하는데 이건 드릴 수 없었고 드시지도 않았습니다.
입원 시 꼭 밑반찬 준비 하세요 입원생활시 중요한 건 간호사와의 대화고 수액을 놓거나 주사 놓을 때 처방약을 줄 때 이게 무슨 주사인지 무슨 약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당연히 의사가 처방해 준 거겠지만 꼼꼼히 체크해야 간호사도 실수가 적었습니다.
저는 물어 봤는데 간호사가 무슨 주사약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물었고 간호사는 알아보고 말해주고 갔습니다.
약도 제가 검색해서 찾았고 이빈후과 약 인지 신경외과약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마지못해 체온도 꼭 물어야 대답 했습니다.
염증이 심해서 체온이 38.5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보호자가 체크해야하는데 간호사는 귀찮아했습니다.
일이 많아서 그렇겠지 이해하려고해도 실수가 많았습니다.
나중엔 뒤에서 까다롭다고 험담 하는걸 저한테 들켰습니다.
못들은 척 했습니다.
좋은 분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날이 선 칼 같아서 묻는 게 무서울 때가 많았습니다.
이건 진심이고 그래도 환자를 위해 필요한 건 꼭 말해야 했습니다.
세달 정도의 입원생활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무사히 퇴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부과에서는 무좀이 심하여 약도 먹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집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몸이 너무 가려워 물병으로 등을 긁어서 상처가 나서 치료를 받는 과정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담당 의사가 어디를 갔다가 치료약을 갖고 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3달간의 병원 입원 생활을 끝나고 의사의 권유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1달간의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2015년 10월 28일부터 2015년 1월 28일 까지 한 달간 내 돈으로 병원비내고
병원 바로 앞에 신한은행 CD기랑 편의점이 있고 근처에 각종 식당도 많고 오자마자 2박3일은 50인실을 사용하고 후에 7인실로 가고 옆자리 아무도 안와서 거의 1인실처럼 사용했고 사실 편하긴 했지만 심심 했습니다.
혼자 잘 때 제가 좀 겁이 많고 퇴원 후 일주일간은 물 자주 드셔야 되고 최소 하루 2리터 이상 먹어야하고 치료 후 입맛이 쓰고 침도 쓰고 물마시면 물도 약 같고 물 못 마시겠고 속도 미식미식 하고 그래서 수액 놔달라고 해서 수액 맞았고 제 혈관으로 소변을 흡입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 3일간 밥 나와도 밥은 못 먹고 국하고 반찬만 먹었고 귀 밑도 부었던 것 같고 누르면 아팠고 밥만 봐도 울렁거렸고 죽 해달라고 하면 죽 해주시고 누룽지 밥도 해주시고 친절하십니다.
2박 3일을 50인 실에서 지내고 나서 7인실로 옮겼고 다른 요양병원은 7인실 없었고 여긴 있고 하루 4만원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카레 나오고 고구마는 자주 나왔고 김밥도 나왔었고 김밥 진짜 맛있었고 식사는 대체적으로 깔끔하게 잘나왔고 인터넷 되고 전 컴퓨터 없인 못살아서 무선인터넷 안 잡히면 어쩌나 하구 걱정했는데 잡혀서 다행 7인실 방이 두 개였는데 한방은 다 차고 다른 방은 저랑 다른 분 계셨고 조용하게 잘 지냈고 아주머니들도 다 암 환자분이시라 동병상련으로 말 정말 잘 통했고 제가 또 제일 막내여서 너무 잘 챙겨주셨습니다.
여긴 특이하게도 인원 실에서 밥 다 같이 드시고 원래 밥은 다 같이 먹어야 제 맛이고 그래서 저도 억지로 껴서 같이 먹었는데 억지로나마 먹어서 그런지 입맛이 금방 돌아오고 분위기 너무 좋았습니다.
입원실에는 냉장고 있고 남는 밥은 원래 다 버리나 여긴 덜어놨다가 냄비에 누룽지 해먹고 나중에 죽으로 만들어 먹거나 자기가 알아서 요리해 먹으면 되고
냄비랑 그릇 다 있어서 맘대로 쓰면 되고 간호원 들이 아침마다 보리차나 메밀 차 큰 주전자에 끓여놓으셔서 정수기물 안마시고 그물 마셔도 됩니다.
입원 후 6일째 되는 날 워낙 아주머니들이 많고 그중에 식당 하시다 오신 분들이 많으시고 원하는 사람에 한하여 만원씩 모으셔서 고기 보쌈도 직접 삶아서 병원에서 먹고 간호원 들이 고기 좀 사달라고 하면 사주고 뭐 이런 병원이 다 있나 근데 정말 좋았습니다.
완전 잔치 집 같고 보쌈이랑 쌈이랑 싸서 정말 잘 먹고 가끔 이렇게 해먹고 직접 고향에서 가져오신 반찬들 다 같이 먹고 7인실 보호자 침대 붙여서 먹었고 혼자 드시고 싶은 분들은 침대에서 혼자 드셔도 무방하고 정말 밥은 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먹어야 제 맛인 것 같고 그리고 보호자 분 같이 오셔도 주무실 때 있고 방바닥에서 주무셔도 되고 보호자침대도 있고 방바닥이 또 따뜻하고 또 하나 대박인 것은 거기에 외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 되신 간호원 들이 있고 한국말 물론 잘하시고 영어 발음 정확하고 영어 섞어 사용하고 영어공부 하고 아침에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반이 영어고 처음에 오시는 분들 어리둥절하고 왜 영어냐고 근데 하루 이틀 지나시면 익숙해지고 근데 환자분들한테 아침이던 점심이던 항상 생활영어 하셔서 다들 영어 조금씩 하시고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어느 환자는 피리 피아노 기타 못 하시는 것 없으시고 밥 먹고 오후엔 스트레칭과 노래 부르는 시간 있고 피아노 직접 연주하고 노래도 잘하고 육체도 건장하시고 4층엔 간단히 운동 할 수 있는 달리기 연습과 자전거 그리고 인터넷컴퓨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있고 욕실도 있고 전 원래 책을 보는 것 안 좋아해서 달리기 연습만 좀 했었고 전 얼굴이 부어서 가렸고 전 폼으로 기타 잡고 있었고 악기연주를 못하는 지라 옆에 환자분이 연주 해주셨고 환자 아주머니 분들도 너무 정이 많으셔서 계속 뭐 주시고 전 드릴게 없어서 음료랑 빵이랑 이것저것 사드렸었고 원장님 매일 회진 하시고 월 수 금은 외과선생님이 도시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내과 선생님이 도시고 불편한 것 있으면 말씀 드리면 되고 제가 원장님께 저 토요일 날 퇴원하는데 노래 불러달라고 말을 즉시 해버렸고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원래 애교 없고 무뚝뚝한데 너무 편해서 그러나 말씀 다정다감하게 잘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만을 위해 노래 불러주셨고 "겨울아이"라는 곡을 불러주셨고 제 이름 넣어서 불러주시고 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퇴원 축하합니다. 라는 말로 바꿔서 피리 기타에 맞춰서 두 번이나 불러주셨습니다.
당연히 연주는 옆에 환자가 해주셨고 부끄럽다고 원장실에서 불러주셨고 대신 저도 원장님과 약속하며 저도 퇴원하고 나가서 자신감 있게 씩씩하게 살아야 되고 아내를 만나 집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생활을 끝내고 요양원으로 병원 의사의 권유로 갔습니다.
요양원이란 어떤 곳일까? 어떤 사람들이 입소를 하게 되는 걸까?
고령화 시대 요양원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궁금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요양원 생활 80여 명이 입소해 있다는 한 요양원엔 대부분 치매 노인들이 기거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또 취미도 다른 이들이 만나 어떻게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진다.
틈만 나면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특유의 애교로 1분 만에 좋아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어르신! 철두철미! 신속정확! 요양원의 원칙주의자 어르신까지 혼자 살 때 와 달리 말동무할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고 즐겁다는 어르신들 게다가 노래교실부터 공예시간까지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만나며 쉴 틈 없이 하루 일과를 알차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엔 늘 갈등도 법!
겨울옷이 없어졌다며 남의 방을 뒤지기도 하고, 숨겨둔 물건을 찾지 못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나이 때문에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는 어르신들 한국전쟁부터 저승 다녀온 이야기까지 고령자만이 통하는 대화주제로 밤새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는데 현대판 고려장 요양원을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말이다.
정말 요양원은 가족에게 버려지는 곳일까? 2005년 5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르신 후유증으로 편마비가 오면서 거동이 불편해졌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들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남편과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좋지 않은 극단적 생각까지 했다는 어르신 게다가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식사마저 거부해 몸무게가 33kg뿐이 나가지 않는 상황으로 건강마저 위험해졌는데 결국 가족들의 설득 끝에 한 요양원에 입소했다.
투병생활을 하며 망가진 몸과 마음 처음 요양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지만 요양원 식구들과 어울리며 점차 성격이 밝아졌고 영양가 높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면서 몰라보게 건강이 회복됐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스스로하려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커져요.”
다시 가족과 건강한 삶을 보내기 위해 매일 운동을 한다는 어르신 요양원은 남은 인생의 무덤이 아닌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곳이라 말한다.
초 고령 사회를 앞둔 지금, 인생 후반전에 내가 살 집은 어디일까?
내가 만약 요양원에 간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이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고 준비할 시대가 다가왔다.
처음 일 주일간은 50여명이 있는 입원실에서 지냈고 나머지 기간은 7명이 같이 있는 병실에서 지냈다.
어떤 환자는 입원실 침대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 다리를 묶고 지내고 간병인은 중국인 1명이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돌보고 목욕도 시켜주고 청소도 하였다.
나도 건강한 몸이 되어 간병인과 같이 입원실을 청소 하였다.
눈병이 생겨 병원의사에게 자주 가고 아파서 못 가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여 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아내가 가끔 간식을 갖고 와서 영양 보충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몸이 건강하여 퇴원을 하고 아내와 함께 지낼 곳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찾아 다녔다.
요양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에 청소가 안 되어 고시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저의 경우 취직하고 부모님 집하고 회사 간 거리가 왕복 5시간 정도였고 교통비와 시간을 생각하면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들어간 고시원에서 10개월 정도 살았고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다른 고시원으로 옮겨서 8개월 정도 더 살았습니다. 이 글은 약 1년 반의 고시원 생활을 마치고 작성하는 추억 팔이 겸 후기입니다. 제가 살았던 시기는 2018년 7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입니다.
고시원의 장점은 몇 백 몇 천 하는 보증금이 필요 없고 관리비나 공과금이 들어가지 않으며 다달이 월세만 내면 된다는 겁니다.
또, 언제든 원할 때 쉽게 방을 뺄 수 있습니다.
단점은 낯선 사람들과 세탁기 화장실 목욕실 등을 같이 써야하고 좁고 다닥다닥 붙은 방에서 산 다는 게 불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시설이 낙후되어 지저분한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모아둔 돈이 없을 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고시원 밖에 없습니다.
고시원의 한 달 월세는 22만원부터 45만원까지 다양합니다.
가격은 고시원의 전체적인 청결 도나 제공하는 물품과 내부 시설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공 물품에는 밥이나 김치라면 휴지 세제 등이 있습니다.
시설에는 방의 넓이 옷장 옷걸이 봉 책상 냉장고 내창 외창 여부와 방 내부에 화장실이 있는지 등이 있습니다.
내창은 복도와 연결된 창문이고 외창은 밖과 연결된 창문입니다.
보통 다른 건 없어도 옷장 옷걸이 봉 책상은 있습니다.
그만큼 없으면 불편합니다.
30만원 중후반에서 40만 원 대의 비싼 방은 대부분 더 넓고 안에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이나 에어컨이 있습니다.
도저히 공용 화장실 욕실을 못 쓰겠다 하시는 분은 조금 더 금액을 내더라도 이런 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설에 따라서 물이 잘 안 가고 역류한다던지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거나 관리하기에 따라서 곰팡이가 생길 수 있다고 하니 잘 알아보고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장실이나 욕실을 공용으로 쓰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서 비싼 방은 선택지로 두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돈도 없었습니다.
먼지랑 냄새에 예민한 편이라 외창이 있는 방을 구했고 방을 구할 때 사장님과 흥정해서 2만원을 깎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 창방 28만원으로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벌레도 없고 나름 깨끗한 고시원이었고 밥과 김치 세제가 제공됐습니다.
저는 밥을 사먹고 들어가는 편이라 사는 동안 밥이나 김치는 전혀 먹지 않았지만 정수기와 세제는 있는 동안 잘 썼습니다.
방 안에는 옷장 옷걸이 봉 책상 책꽂이 냉장고 랜선이 제공됐습니다.
외창 방 에는 단점이 하나있는데 겨울이 되면 굉장히 춥습니다.
창문이 냉기를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긴 게 원래 부실한 창문이라 방한지를 붙이고 겨울엔 내 창방으로 바꿨습니다.
값은 26만원으로 줄었고 살다보니 외창 없어도 괜찮아서 있는 동안 계속 그 방에서 살았습니다.
첫 번째 고시원에선 살면서 방사진을 찍어 둔 게 없어서 고시원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살게 된 고시원은 그 지역에서 고르고 골랐지만 시설이 좋지 않았습니다. 1층과 2층이 있었는데 1층은 전체적으로 습하고 잠깐 봤는데도 바퀴벌레가 많이 보여서 2층으로 골랐습니다.
외창 방으로 구했고 24만원에 들어갔습니다.
공용 정수기와 냉장고가 있었고 방 안에는 옷장 책상 전선이 있었습니다.
옷걸이 봉은 없어서 근처 생활용품점에서 사서 달았습니다.
봉은 사진처럼 빨래 후 건조대 또는 옷걸이용으로 사용하며 굉장히 편리합니다.
여름에 모기가 너무 많아서 잡아도 소용이 없다면 모기장을 추천합니다.
약간 아늑한 느낌도 들고 꿀잠을 잘 수 있습니다.
사진의 방은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천장에서 비가 샙니다.
주말에 부모님 집에 갔다 왔더니 방이 물바다가 되서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트북 말리고 물 퍼내고 방 건조시키느라 힘들었었죠.
여름엔 샤워하러 들어가면 벌레가 벽이나 바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건드리지 않고 무시하고 샤워하면 튀어 오르거나 하지 않습니다.
전 졸라 보지 않았지만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뿌리고 씻는 방법도 있다고 하네요.
세탁기도 관리가 안 된 것인지 빨고 나면 더러운 냄새도 나고 뭔지 모를 검 갈색 먼지 같은 것도 묻어나오고 했었죠.
눈물이 앞을 가렸던 시절입니다
처음 고시원에 살게 되면서 친구 소개로 타인은 지옥 이다. 라는 만화를 보고 겁도 많이 나고 걱정도 했지만 살아보면 적응도 되고 다 사람 사는 곳입니다.
다만 너무 싼 곳은 시설이 안 좋고 너무 비싼 곳은 비싸니 자신의 적응력과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적당한 고시원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살려는 지역에 고시원이 몇 군데 없어서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대학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들이 몇 병이 있었고 가정 사정으로 고시원에 와서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7개월 정도를 고시원 생활을 끝내고 편하게 지내려고 다른 여건이 좋은 다른 고시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다 또 다른 곳으로 옮겨서 생활을 하다가 월세 방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지하1층에서 지내는 동안 방에 먼지가 들어올까 봐 창문을 닫고 지내는 동안 방에 곰팡이가 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주인이 방에 곰팡이가 생겼다고 보증금을 거의 주지를 않고 또 다른 월세 방으로 이사를 하였다.
거기서 5개월 지내다 집으로 왔다.
집에는 청소가 안 되어서 내가 청소를 시작하였다.
집에 있는 여러 가지 도구를 깨끗이 소독도 하고 깨끗이 하였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단둘이서 달콤하게 지내기 시작하였다.
외동딸은 호주에서 지내고 2년 전에 결혼을 하여 남편 되는 신랑이 시민권을 취득하여 영주권을 획득하여 지내고 있다.
왼 손자를 낳아 귀여운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나는 가끔 손자와 대화를 영상을 통하여 지내고 사랑하는 딸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자주 하고 나의 아내도 계속 기도를 하는 중이다.
흑암의 세력이란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며칠 전 '자꾸 흑암의 세력인 시커먼 것이 나에게 자꾸 온다.
그때 나는 어머니 정신 차리고 기도 하세요 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죽음에는 반드시 저승사자 지옥사자가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이것은 밑 거나 안 밑 거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천국은 기독교에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있다.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행 한대로 상급을 받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가야한다.
지옥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장례식장에 가보라 죽은 사람가운데 천국에 가는 사람은 몸이 부드럽고 얼굴빛이 환하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몸을 비틀고 얼굴모습이 일그러진 형상의 죽은 모습을 보게 된다.
만일 천국이 없다면 저 동식물과 같이 죽으면 끝이다. 얼마나 절망적일까 믿지 않는 사람도 천국이 있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무엇하러 바쁘게 힘들게 고난 가운데 힘든 세상 가운데 살 필요가 있을까?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영어선교회가 있는데 싱어 리더 자매가 있었는데 참 목소리도 좋고 노래 지도자로서의 손색이 없도록 영어노래를 잘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안타깝고 참 안되었다.
당시 나는 금요일 저녁만 되면 금식기도원을 학교생활이 끝나면 그곳에 가곤했다.
잠을 부치고 새벽1시가 되면 일어나 3평 남짓한 기도원 굴에서 3시간 이상을 기도하고 토요일 당시 본인이 다니는 교회 청년 영어예배가 7시경에 있는데 거기에 참석하곤 했다.
어느 날 기도원에서 생활을 끝내고 그런데 자매님의 어머니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연세 대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기도를 해주었다. 강력한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마음속에 어머니가 밝은 햇빛과 같이 바라보며 천국을 바라보면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천국은 저 태양보다 밝은 곳이니 햇빛을 바라보며 천국을 생각하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몇 번 병원을 방문하였다.
저녁집회에 참
그때마다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없이 그 동안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아들들을 나두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병원에 갈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몇 개월 후 그 자매님의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정말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와 같이 죽음의 이별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바로 햇빛과 금식 그리고 공해가 없는 깨끗한 물 거기다 자연산의 채소를 먹고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이것은 비밀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인간은 죽지 않고 젊은이와 같이 모든 우리 몸의 기능이 정상적이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러면 죽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이 살아간다면 지구상에 인간이 너무 많아 어떻게 먹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도 연구대상이고 누군가 꿈을 꾸고 발명해야한다.
즉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든가 또는 안 먹고 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이일을 하는데 자본이 필요하다.
우선 실험대상의 사람은 암에 걸린 사람 등 죽을병이 걸린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차차 대상을 넓혀 나이 많으신 노인 어르신네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시설은 설치하기 나름이고 깨끗한 공기 좋은 청정지역과 거기에 의사와 간호원과 인허가 문제 얼마간의 자본이 필요하다.
의사는 돌발할 때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인간은 죽지 않고 젊은이와 같이 모든 우리 몸의 기능이 정상적이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러면 죽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이 살아간다면 지구상에 인간이 너무 많아 어떻게 먹고 살아갈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이 살기에는 지구가 좁아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도 연구대상이고 누군가 꿈을 꾸고 발명해야한다.
즉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든가 또는 안 먹고 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 금성이나 달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이일을 하는데 자본이 필요하다.
시설은 깨끗한 공기 좋은 청정지역과 거기에 의사와 간호원이 필요하고 인허가 문제 등 얼마간의 자본이 필요하다.
의사는 돌발사태가 일어났을 때 치료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앞으로 해당 성도를 수용할 미래의 건물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3층 사방이 유리로 된 태양열 건물이며 1층은 식당 2층은 예배실과 의료 실이 있으며 3층은 숙소 및 쉼터이다.
주변은 맑은 물이 흐르고 깨끗한 청정지역이다. 그리고 공해 없고 농약 안 쓰는 유기농 재배 시설이 주위에 있고 맑은 약수가 흐르는 곳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조감도 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본을 확보하는 방법을 또한 생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