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 카메라 고칠 수 있나요?

 

기름 냄새와 쇳내, 그리고 먼지 냄새.

 

하루를 여는 것은 언제나 이 세 가지의 냄새였다.

 

낡은 나무 선반을 가득 메운 수십 개의 황동 톱니바퀴, 렌즈의 경통, 셔터 막의 부품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머금은 희미한 향까지.

 

을지로 공구상가 골목.

 

그 끄트머리에 자리한 나의 작은 가게 ‘덕근 사진관’은 시간이 멈춘 섬과도 같은 공간이다.

 

나는 낡은 작업등 아래에서 루페를 고쳐 쓰고 막 분해를 마친 뷰파인더 뭉치를 들여다보았다.

 

먼지 한 톨, 지문 한 점 없이 완벽하게 닦아낸 프리즘이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중이었다.

 

손끝의 감각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안도하는 것도 잠시.

 

무심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보았다.

 

오후 두 시 십오 분.

 

황급히 작업대 한쪽에 놓인 낡은 가죽 수첩을 펼쳤다.

 

어제 자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적어둔 메모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오후 두 시. 세운상가 김 사장. 부품 수령.]

 

“아차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늦어버린 셈이다.

 

“젠장.”

 

요즘 들어 이런 일이 부쩍 잦아졌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남기는 쪽지들.

 

그 쪽지가 없으면 나는 하루의 동선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반쪽짜리 인간이 되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밧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밧줄은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삭아 내리고 있었다.

 

딸랑-!

 

그때, 가게 문에 달린 낡은 황동 벨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지러운 상념을 깨뜨리는 반가운 소음이었다.

 

“계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봄 같은 존재였다.

 

갓 스무 살을 넘겼을까?

 

밝은색 후드티에 청바지.

 

어깨에는 커다란 에코백을 둘러멨다.

 

그녀는 먼지와 부품 더미로 가득한 가게 안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우와! 여기 맞나 보네. 인터넷에서 본 거랑 똑같아요.”

 

“인터넷?”

 

“네! ‘을지로 필카 수리 장인’ 치니까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오던데요?”

 

“그런가.”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젊은이들의 세상은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뭘 맡기러 왔나?”

 

“아, 네! 잠시만요.”

 

아가씨는 커다란 에코백을 뒤적거리더니 낡은 융으로 감싼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요. 부산에서 국어 선생님이었던 저희 할머니 유품인데…….”

 

융이 풀리는 순간, 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은색 몸체.

 

1950년대에 독일에서 만들어져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기였다.

 

나는 무심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이었다.

 

‘……라일락 향기?’

 

아주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봄의 향기.

 

그리고 귓가에 맴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또 시작인가.

 

“저기,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가 문제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가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셔터가 안 눌러져요. 필름 감는 레버도 뻑뻑하고요. 다른 데 몇 군데 가봤는데 부품이 없어서 못 고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랬겠지. 요즘 것들 눈에는 그저 낡은 쇳덩이로 보일 테니.”

 

“맞아요! 다들 그냥 장식용으로나 쓰라고 하고……. 근데 이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가장 아끼시던 물건이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요. 이 카메라 안에는 할머니의 첫사랑이 담겨 있다고.”

 

“첫사랑?”

 

“네. 그래서 꼭 고치고 싶었어요. 할머니의 첫사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저도 보고 싶어서요.”

 

아가씨는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망울을 마주하자 차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칠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 대신 익숙하게 카메라를 살폈다.

 

셔터막의 상태, 렌즈의 곰팡이, 거리계의 이중 합치 상태까지.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수만 번도 더 반복했을 이 행위를.

 

“시간은 좀 걸릴 게다.”

 

“괜찮아요! 시간은 얼마든지요. 고칠 수만 있다면…….”

 

아가씨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 눈빛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서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맡기고 가게.”

 

“정말요? 와, 다행이다! 수리비는 얼마 정도 나올까요?”

 

“뜯어봐야 알아. 일단 연락처나 남겨놓고 가.”

 

나는 카운터 구석에 놓인 메모지와 몽당연필을 툭 밀어주었다.

 

아가씨는 익숙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려다 내 손에 들린 연필을 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한유라

 

010-4286-2500

 

획이 시원시원한 글씨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

 

아가씨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들어올 때처럼 맑은 방울 소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오직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와 내 심장 소리만이 공간을 채울 뿐 순식간에 가게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작업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카메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라일락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그날 밤,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대 앞에 홀로 앉았다.

 

낮의 소란은 모두 잦아들고 오직 어둠과 침묵만이 나의 오랜 친구가 되어주는 시간.

 

나는 한유라가 맡기고 간 낡은 카메라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단순한 금속의 질감이 아닌,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 카메라에 겹겹이 쌓여온 누군가의 기억, 감정, 그리고 시간의 흔적.

 

나의 능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오래된 사물이나 특정 장소에 남겨진 기억의 잔상을 읽는 것.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내게 살아있는 기억의 도서관과도 같았다.

 

길가의 벤치, 낡은 건물의 벽돌 한 장, 손때 묻은 옛 물건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도시의 기억을 선명하게 읽어낼수록 내 현재의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해져 갔다.

 

어제 먹은 저녁 메뉴, 며칠 전 만났던 사람의 얼굴, 몇 년 전의 일까지.

 

기억의 서랍장이 멋대로 열리고 뒤섞여 무엇이 진짜 나의 기억인지조차 희미해질 때가 있었다.

 

의사는 그것을 ‘초기 치매’라 불렀다.

 

반면에 나는 그것을 ‘등가교환’이라 부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카메라에 양손을 올렸다.

 

정신을 집중하자 손바닥을 통해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며 의식의 표면을 적셔왔다.

 

.

 

.

 

.

 

눈앞에 펼쳐진 것은 1960년대의 어느 봄날,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적한 길.

 

파릇파릇한 가로수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내 몸은 투명한 유령처럼 그 풍경 속에 섞여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잔상 속의 관찰자.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이리 와봐! 저기 봐, 솜사탕!”

 

한 소년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를 한 작은 여자아이가 내 앞을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다.

 

노란 원피스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

 

그 아이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바로 그 카메라.

 

아이는 멈춰 서서 서툰 솜씨로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뷰파인더 너머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작은 뒷모습.

 

나는 아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 궁금해져 그 작은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의 뷰파인더 안에는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솜사탕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어서 찍으라는 듯 재촉하는 얼굴.

 

그리고 그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아앗?!”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의 서랍장 가장 깊은 곳, 자물쇠로 잠겨있던 그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단 하나의 장면.

 

고이 모셔놨던.

 

라일락 향기.

 

노란 원피스.

 

그리고.

 

잔상 속의 시간이 느려졌다.

 

뷰파인더 너머의 소녀가 카메라를 든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덕근! 뭐 해! 나 안 찍고!”

 

그 목소리가 내 심장을 관통했다.

 

이덕근.

 

그렇다.

 

카메라를 얼굴에 바짝 갖다 대며 웃고 있는 저 소년은.

 

바로 나였다!

 

.

 

.

 

.

 

“헙!”

 

정신이 번쩍 들며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메라에서 손을 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 잔상은 3인칭 시점의 영화처럼 펼쳐졌다.

 

내가 그 안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내가 그 시간 속에 존재했던 것처럼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소년의 설렘, 소녀의 웃음소리, 청춘 사이에 흐르던 그 따스함까지도.

 

이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잔상이 아닌,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까 한유라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남기고 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적혀 있는 할머니의 성함을 발견했다.

 

김은희.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 아이의 이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카메라, 대체…….”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손에 들린 메모지의 감촉, 잉크 냄새, 그리고 그 위에 적힌 김은희라는 이름이 비로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이건 꿈이 아니다.

 

환각도 아니다.

 

수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기억의 빗장이 낡은 카메라 하나로 인해 이토록 허무하게 열려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시 작업등 아래의 낡은 카메라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과거와 현재, 어쩌면 미래까지 연결할지도 모르는 유일한 단서.

 

홀린 듯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적힌 한유라의 번호를 더듬더듬 눌렀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저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한유라 아가씨? 나다. 을지로 덕근 카메라.”

 

“어머, 할아버지! 벌써요? 혹시 카메라 다 고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수리를 시작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서.”

 

나는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네? 물어보실 거요?”

 

“그 카메라 말이다. 할머니께서 언제, 어디서 구하신 물건인지 혹시 아나?”

 

“음. 글쎄요. 워낙 오래전부터 갖고 계셨던 거라서요. 왜요? 수리하는 데 필요한 정보인가요?”

 

“그래. 오래된 기계일수록 그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럴듯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절반은 진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카메라의 역사를 알아야만 했다.

 

아니, 나의 역사를 알아야만 했다.

 

“아, 그렇구나. 잠시만요, 엄마한테 한번 여쭤볼게요! 엄마는 아실 수도 있어요!”

 

“그래 주면 고맙지.”

 

“네! 확인하고 바로 다시 전화 드릴게요, 할아버지!”



2화. 사라지는 것들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유라의 목소리는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전보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세차게 뛰고 있었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감정.

 

천천히 낡은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차가운 감촉이 어째서인지 따스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십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던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저 유라예요. 엄마한테 여쭤봤어요!”

 

“그래.”

 

“엄마가 그러시는데 그 카메라는 할머니가 어릴 때 어떤 남자분한테 선물 받으신 거래요.”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던 말.

 

“어떤 남자?”

 

“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첫사랑이래요.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쓰시던 귀한 카메라를 할머니한테 보물 1호라면서 드렸대요. 할머니는 평생 그걸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셨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떠다녔다.

 

특히 묵직했던 카메라의 감촉과 그걸 건네받고 환하게 웃던 은희의 얼굴이.

 

“여보세요? 할아버지? 듣고 계세요?”

 

“듣고 있다.”

 

“아, 네!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요, 정확히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냥 아주 어릴 때부터 갖고 계셨던 거라고만……. 도움이 되셨을까요?”

 

“그래, 알아봐 줘서 고맙다.”

 

나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안의 카메라는 내가 잊어버린 시간의 증인이자 나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품고 있는 타임캡슐이었다.

 

***

 

그날 이후, 나는 다른 모든 수리 의뢰를 뒤로하고 며칠 동안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오직 한유라가 맡긴 그 낡은 카메라에만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판과 하판을 분해하고 낡고 굳어버린 셔터 막을 떼어냈다.

 

수십 년 묵은 기름때와 먼지를 세척액으로 닦아내자 부품들은 비로소 숨겨왔던 제 빛깔을 드러냈다.

 

작업대 위로 작은 부품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스프링, 쌀알만 한 나사, 손톱보다 작은 기어들.

 

그 하나하나가 7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중하게 부품들을 다루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이 녀석도 참 고생 많았구나.”

 

나지막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카메라를 향한 말이기도 했고 그 카메라와 함께 세월을 보냈을 은희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모든 시간을 잊고 살아온 나 자신을 향한 말이었을지도?

 

작업에 몰두할수록 이상하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졌다.

 

손끝으로 부품을 만질 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잔상이 스며들었다.

 

찰칵-!

 

셔터 유닛을 들어 올리는 순간, 벚꽃이 흩날리던 창경원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와르르-!

 

필름 와인딩 레버를 조립할 때는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느꼈던 바람의 감촉이 살아났다.

 

그것들은 온전한 기억이 아닌, 감각의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그 파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의 과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리계의 이중 합치를 조정하고 렌즈를 완벽하게 닦아낸 뒤, 나는 조심스럽게 필름을 넣고 셔터를 눌렀다.

 

사각! 하는 필름 감기는 소리.

 

그리고.

 

찰칵-!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금속음.

 

긴 잠에서 깨어난 거인처럼 카메라는 70년 전의 제소리를 완벽하게 되찾았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 제소리를 찾았네.”

 

그리고 며칠 뒤.

 

.

 

.

 

.

 

한유라에게 연락했다.

 

“다 됐다. 찾아가라.”

 

“네? 벌써요? 와, 정말 빠르시네요! 지금 바로 갈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완벽하게 수리된 카메라를 작업대 중앙에 올려놓았다.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 몸체가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시원섭섭한 기분.

 

이대로 영원히 내가 간직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심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

 

카메라를 돌려준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모처럼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밖으로 나섰다.

 

손에는 나의 분신과도 같은 낡은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기억을 붙잡기 위한 나만의 발버둥.

 

나는 요즘 정기적으로 서울의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재개발로 허물어지기 직전의 골목, 마지막 영업을 앞둔 낡은 식당, 더 이상 아이들이 찾지 않는 동네의 놀이터.

 

언젠가 내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더라도 이 사진들만은 남아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주리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서소문 역사공원 근처였다.

 

오래된 인쇄소와 철물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번쩍이는 빌딩들이 들어서는 중인, 기억과 망각이 치열하게 싸우는 현장.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낡은 건물의 빛바랜 간판을 들여다보았다.

 

구도를 잡고, 노출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셔터에 손가락을 올리는 순간.

 

찰칵-!

 

“음?”

 

바로 등 뒤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셔터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내가 며칠 밤낮으로 매달려 되살려낸 바로 그 소리.

 

셔터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유라 아가씨?”

 

놀랍게도 그녀의 손녀딸이 서 있었다.

 

콘탁스 카메라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 들고 내가 방금 찍으려던 그 간판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시나.”

 

내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 덕근 사진관 할아버지! 우와! 여기서 뵙다니! 할아버지도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산책 중이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으로 총총 다가왔다.

 

“이 카메라, 진짜 최고예요! 소리도 너무 좋고 사진도…… 뭐랄까, 되게 따뜻하게 나와요.”

 

“렌즈 특성이다. 오래된 유리알 원래 그런 맛이 있지.”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평생 이것만 만지고 살았으니 당연하지.”

 

“우와! 멋있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한 가지를 평생 할 수 있을까요?”

 

“글쎄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더군.”

 

“에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저도 제 꿈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꿈?”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꿈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네! 저는 웹소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그래서 요즘 이렇게 서울 곳곳을 다니면서 사진으로 스토리를 기록하고 있어요. 나중에 집필할 때 참고하려고요.”

 

아가씨는 카메라를 든 채,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기억 속 잔상에서 보았던 노란 원피스의 은희와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할아버지는 뭘 찍고 계셨어요?”

 

“사라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이요?”

 

“그래. 저 간판도, 저기 저 골목도, 다음 달이면 전부 사라진다.”

 

내 말에 아가씨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그렇군요. 그냥 낡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라진다고 하니까 왠지 다르게 보이네요.”

 

“…….”

 

“그래서 그런데요, 할아버지.”

 

“음?”

 

“괜찮으시면 저한테 사진 찍는 법 조금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사라지기 전에 저도 이곳을 예쁘게 담아보고 싶어서요.”

 

나는 잠시 대답 없이 한유라를 바라보았다.

 

과거에 갇혀 사는 노인.

 

미래를 헤쳐 사는 젊은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어째서일까.

 

굳게 닫아두었던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작은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한번 찍어봐라. 뭘 어떻게 찍고 있는지나 보게.”

 

내 허락에 아가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그럼, 할아버지의 첫 번째 출사 장소는 어디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출사 장소라……. 거창할 것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거지.”

 

“와! 진짜요? 그럼 우리 지금부터 같이 출사 가는 거예요?”

 

“시끄럽다. 따라오려거든 조용히 따라와.”

 

나는 무심한 척 앞장서 걸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유라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가 익숙했던 나의 시간에 예고 없이 불쑥 타인이 끼어든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동행 장소는 익선동의 좁은 골목길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 사이로 낡은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식당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곳.

 

과거와 현재가 가장 위태롭게 동거하는 서울의 얼굴 중 하나였다.

 

“우와! 여기 예쁘다! 맨날 사람들 많을 때만 와봤는데 평일 낮은 한적하네요.”

 

한유라가 감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말없이 낡은 담벼락 앞에 멈춰 섰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군데군데 허물어진 벽.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난 담쟁이덩굴이 위태로운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건 뭘 어떻게 찍어야 해요, 할아버지?”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은색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줘 봐라.”

 

“네? 아, 네!”

 

한유라가 얼떨결에 건넨 카메라.

 

익숙한 무게감과 차가운 감촉이 손에 감겼다.

 

카메라를 들어 그녀가 바라보던 그 담벼락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할아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낡은 벽이잖아요.”

 

한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뷰파인더에 눈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눈으로만 보니까 그렇지.”

 

“그럼 뭘로 봐요?”

 

“시간으로 봐야지. 저 벽이 여기서 얼마나 오래 버텼을 것 같나?”

 

“음…… 오십 년? 아니, 백 년?”

 

“그래. 그 시간 동안 비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고,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스쳐 지나갔을 게다. 저기 저 칠이 벗겨진 자국, 저기 저 담쟁이덩굴. 그게 전부 저 벽이 살아온 세월의 기록이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뷰파인더 속 풍경에 더욱 집중했다.

 

“사진은 그 기록을 찍는 게다. 그냥 예쁜 그림을 남기는 게 아니고.”

 

그리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찰칵-!

 

다시 세상이 변했다.

 

.

 

.

 

.

 

눈앞의 담벼락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로 반투명한 과거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1970년대의 어느 늦은 오후.

 

지금처럼 번쩍이는 가게들은 없었지만,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 훨씬 더 사람 냄새나던 익선동의 골목길.

 

담벼락 앞에는 교복을 입은 한 소년과 소녀가 서 있었다.

 

‘은희야, 이쪽으로 좀 더 와봐. 그림자 진다.’

 

‘싫어! 덕근이, 네가 이리 와!’

 

‘고집은.’

 

앳된 목소리의 소년, 바로 어린 시절의 나였다.

 

나는 은희의 손목을 잡아끌어 햇살이 비치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바로 이 카메라로 담벼락에 기댄 은희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자, 웃어봐. 하나, 둘…….’

 

찰칵-!

 

.

 

.

 

.

 

잔상이 흩어지고 나는 다시 현대의 익선동 골목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묵직하게 울렸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니다. 그냥 찍어봤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카메라를 한유라에게 돌려주었다.

 

“이 카메라는 사람을 참 잘 담는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네가 찍어봐라. 아까보다 더 잘 보일 게다.”

 

“네에?”

 

한유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상하다. 아까랑 똑같은 벽인데 왠지 알 것 같아요. 뭘 찍어야 할지.”

 

그녀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셔터를 눌렀다.

 

찰칵-!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의 능력이 아주 조금이지만 그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카메라에 깃든 은희의 기억이 그녀의 손녀에게 어떤 영감을 준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멈춰 있던 나의 시간이 아주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3화. 약속은 지켜야지

 

“어디 보자.”

 

한유라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그녀의 카메라 뒤편이 아닌 내 머릿속 기억을 더듬었다.

 

방금 내가 잔상을 통해 보았던, 담벼락에 기대선 은희의 구도.

 

한유라가 찍은 사진 역시 그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닮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진의 중심과 여백, 빛을 담아내는 방식까지도 은희의 그것과 몹시 닮아있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구나.”

 

“와, 진짜요? 할아버지한테 칭찬받았다!”

 

“칭찬 아니다.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나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돌아섰다.

 

하지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낯선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그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멈춰 있던 내 세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종류의 보람.

 

“할아버지, 저기도 찍어봐요! 저기 저 오래된 이발소요!”

 

한유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낡은 이발소 하나가 있었다.

 

삼색 회전 간판은 이미 색이 바래고 멈춘 지 오래인 듯했다.

 

“저런 건 어떻게 찍어야 잘 나와요?”

 

“기다려야지.”

 

“기다려요? 뭘요?”

 

“순간을. 빛이 가장 좋을 때, 혹은 저 문을 열고 누군가 나오는 찰나. 사진은 무작정 찍는 게 아니라 순간을 낚아채는 낚시와 같은 게다.”

 

나는 말없이 이발소 앞을 지키고 섰다.

 

한유라도 내 옆에서 숨을 죽인 채 카메라를 들었다.

 

우리는 오지 않는 순간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유라의 팔이 아픈지 그녀가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언제까지 기다려요?”

 

“쯧! 인내심 하고는.”

 

“아니, 팔이 아파서 그렇죠! 그리고 그냥 찍으면 안 돼요? 꼭 뭐가 나타나야 해요?”

 

“그럼 의미가 없지.”

 

“의미요?”

 

“그래. 텅 빈 무대를 찍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배우가 등장해야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는 법이다. 저 이발소의 주인 또는 손님. 그들이 바로 이 풍경의 배우들이지.”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굳게 닫힌 이발소 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 너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숨 쉬고 있을까.

 

수십 년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늙은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 동네 사랑방처럼 모여들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손님들의 목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기다림의 진짜 의미였다.

 

“이리 줘 봐라.”

 

나는 그녀의 카메라를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이발소의 낡은 유리창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찰칵-!

 

순간, 1970년대의 익선동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

 

.

 

.

 

쌩쌩하게 돌아가는 삼색 간판.

 

그리고 그 유리창 앞에 웬 남자아이 둘이 딱 붙어 서 있었다.

 

‘야, 이덕근! 너 머리 자른 거 진짜 웃기다! 꼭 밤톨 같다, 밤톨!’

 

‘시끄러워! 너도 똑같거든?’

 

까까머리를 한 어린 나와 내 친구 녀석이었다.

 

우리는 유리창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낄낄거렸다.

 

그때, 가게 안에서 은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둘 다 그만 안 해? 아저씨 일하시는데 방해되잖아!’

 

친구 녀석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들었냐? 은희는 네 밤톨 머리가 제일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헛소리!’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괜히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삐걱! 소리와 함께 이발소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주인아저씨가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는 인자한 눈으로 우리를 쓱 훑어보더니 껄껄 웃었다.

 

‘이놈들, 아주 시끄럽구만. 그래, 머리는 마음에 드냐?’

 

아저씨의 말에 나와 친구 녀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손가락질했다.

 

‘아저씨, 쟤 머리 좀 보세요! 완전 웃기죠?’

 

‘덕근이 너야말로 거울 좀 봐!’

 

‘허허, 둘 다 똑같이 시원하고 좋구만 뭘. 사내놈들이 머리 가지고 싸우기는.’

 

아저씨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우리에게 박하사탕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자, 이거 하나씩 물고 어서들 가거라. 은희 말 들어야지.’

 

은희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아저씨에게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야무져 보였는지.

 

나는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화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때, 은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전히 짐짓 화난 척 나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장난기와 함께 희미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햇살이 은희의 까만 단발머리에 부서져 윤슬처럼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자, 가! 은희 화나면 무섭다!’

 

친구 녀석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은희의 핀잔에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머리를 놀려댔다.

 

햇볕이 유난히 따뜻했던 그런 오후였다.

 

.

 

.

 

.

 

“……할아버지?”

 

한유라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평소보다 잔상의 여운이 길게 남는 탓인지 심장이 저릿했다.

 

“방금 뭔가 표정이 되게 그리워하는 것 같았어요.”

 

“빛이 딱 좋구나.”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마침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줌이 쏟아져 내려와 낡은 이발소 간판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유라는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

 

익선동을 벗어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산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

 

내가 기억하는 서울과 지금의 서울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사라진 건물, 새로 생긴 다리, 낯선 간판들.

 

나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래.”

 

“우와! 그럼 진짜 서울 토박이시네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대학 때문에 올라왔거든요. 서울은 너무 크고, 빠르고, 정신없어요. 가끔은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한유라의 목소리가 조금은 차분해져 있었다.

 

“하지만 또 신기해요. 이렇게 오래된 골목도 있고 할아버지 같은 분도 계시고. 꼭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에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보물들이 내게는 하나씩 잃어버리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었기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남산 정상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와! 서울이 한눈에 다 보이네요!”

 

한유라는 난간에 기대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도시.

 

그 사이를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만이 유일한 숨통처럼 보였다.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물쇠들이 빼곡하게 걸린 난간, 화려한 기념품 가게, 낯선 조형물들.

 

모든 것이 생경했다.

 

내가 기억하는 남산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할아버지, 저기! 저기가 롯데타워 맞죠? 우와! 진짜 높다. 저기는 여의도고…….”

 

한유라는 신이 나서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어떤 랜드마크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잿빛 콘크리트 덩어리들의 무덤처럼 보일 뿐이었다.

 

‘여기가 아니구나.’

 

내가 은희와 함께 서 있던 남산은 여기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푸르고, 더 조용했던 곳.

 

지금은 사라져버린 기억 속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 저기 좀 찍어주세요! 제 카메라로요.”

 

한유라가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서서 자신의 카메라를 내게 건넸다.

 

“저는 할아버지가 보는 세상이 궁금해요. 할아버지의 눈으로 본 서울은 어떤 모습일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 카메라를 다시 잡으면 또 어떤 기억이 나를 덮쳐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한유라의 맑은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묵묵히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뷰파인더에 한유라의 모습과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이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초점을 맞추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찰칵-!

 

세상이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

 

.

 

.

 

.

 

한유라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교복을 입은 은희가 서 있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더 푸르고 낮은 건물들로 가득했다.

 

‘덕근아, 여기 정말 좋다! 그렇지?’

 

‘그러게. 서울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네.’

 

우리는 난간에 기대어 한참 동안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은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무슨 약속?’

 

‘오십 년 뒤 정확히 오늘! 우리 다시 여기에 오는 거야. 그때도 이 카메라로 똑같이 사진 찍어주기. 알았지?’

 

어린 날의 맹랑한 약속.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오십 년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 약속! 꼭 다시 오자.’

 

나는 은희의 새끼손가락에 나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때의 온기가 지금 나의 손끝에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듯했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

 

.

 

.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황급히 눈가를 훔쳤지만, 한유라는 이미 모든 것을 보고 난 뒤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기억 속 은희가 서 있던 자리에 서 있는 한유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십 년이라는 시간.

 

나는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기억 자체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은희와 이 카메라는 그 약속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남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무겁고 조용했다.

 

한유라는 몇 번이나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오십 년 전의 기억과 지금의 현실이 뒤엉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할아버지, 정말 괜찮으세요? 댁에 바래다 드릴까요?”

 

버스 정류장 앞에서 한유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은희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 눈에 담긴 따스한 염려는 기억 속 은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됐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앞장서 걸었다.

 

더 이상 쌀쌀맞은 가시를 세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기름 냄새와 쇳내가 나를 맞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 냄새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나 혼자만 다른 시공간에 던져진 기분.

 

가게 문 앞에서 한유라가 머뭇거렸다.

 

“저,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

 

나는 대답 대신 말없이 가게 안쪽의 작은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한유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기다리려면 앉아 있어라.”

 

“네? 뭘 기다려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두 대의 카메라를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암실로 쓰이는 가게 안쪽 공간으로 향했다.

 

“기록을 해야지. 오늘 우리가 본 것들.”

 

“필름 현상하시는 거예요? 여기서요?”

 

“그래. 기다릴 수 있겠나?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암실의 붉은 전등을 켰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은은하게 퍼지자 비로소 세상이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필름을 꺼내 현상 탱크에 감았다.

 

서울의 현재와 은희의 과거가 담긴 필름.

 

이것은 흩어져 버린 내 과거를 복원하고 잊혀진 약속을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가 오늘 본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곧 알게 될 테니.”



4화. 기억을 인화한다고요?

 

암실 안은 오직 붉은 안전등의 희미한 빛과 현상액이 찰랑이는 소리, 그리고 나의 낮은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바깥세상의 소음과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이 작은 공간은 나에게 있어 가장 편안한 안식처이자 성소였다.

 

한유라는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을 힐끔거리며 가게 안 작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늙은이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어리둥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바깥의 기척을 애써 지우고 오직 눈앞의 작업에만 집중했다.

 

현상, 정지, 정착 등.

 

수십 년간 수만 번도 더 반복해 온 과정.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몸에 익은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처음 필름을 현상하던 어린 시절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탱크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필름은 붉은빛 아래에서도 선명한 상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필름을 건조대에 걸어놓고 인화지로 눈을 돌렸다.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한유라가 서 있던 바로 그 풍경.

 

확대기 아래에 필름을 고정하고 인화지 위에 상을 투사했다.

 

노광 시간을 맞추고 셔터를 눌러 빛을 쬐어주었다.

 

이제 마지막 과정.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인화지를 집어 들어 첫 번째 현상액 트레이에 담갔다.

 

살살 흔들어주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 위로 희미한 형체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옅은 회색의 윤곽선으로 시작해 점차 명암이 뚜렷해지며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

 

언제 봐도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사진 속 인물은 한유라가 아니었다.

 

단발머리의 교복을 입은 소녀.

 

“……!”

 

바로.

 

은희였다!

 

‘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숨을 멈췄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잔상의 여운이 너무 강하게 남은 탓에 내 눈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확대기 아래에 놓인 필름을 다시 확인했다.

 

필름 속 네거티브 이미지에는 분명 후드티를 입은 한유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인화지 위에는 교복 입은 은희가 나타나는 것인가!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아닐 게다. 약품을 잘못 탔거나, 빛을 잘못 줬거나.’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음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익선동의 낡은 담벼락.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과정을 FM대로 진행했다.

 

약품의 농도, 현상 시간, 온도까지 완벽하게 맞추었다.

 

이것은 일종의 대조 실험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이건 나의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결과는 똑같았다.

 

사진 속에는 담벼락에 기대어 수줍게 웃고 있는 은희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익선동의 낡은 담벼락이 담긴 그것을 확대기 아래에 놓았다.

 

새 인화지를 꺼내 빛을 쬐고 다시 현상액에 담갔다.

 

붉은빛 아래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풍경.

 

그곳에는 낡은 담벼락뿐만이 아니었다.

 

그 벽에 기대어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은희가 있었다.

 

잊었던 기억의 파편이 뇌리를 스치자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첫 번째는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는.

 

기적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몇 장의 사진들을 정착액과 수세 과정을 거쳐 집게로 집어 들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사진을 들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것은 나의 병이 만들어낸 환각인가.

 

아니면 정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인가.

 

혼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증인이 필요했다.

 

나의 과거를 붙잡아 줄 미래가.

 

나는 암실 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한유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 다 되셨어요?”

 

“들어와 보거라.”

 

“네? 저도 들어가도 돼요?”

 

“그래. 들어와서 이게 뭔지 좀 봐줘.”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유라는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암실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나는 말없이 방금 인화한 두 장의 사진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한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받아 들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듯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의 표정이 이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어? 이상하다. 이거 남산이랑 익선동 맞죠?”

 

“그래.”

 

“풍경이 좀 다르네요? 남산에 저런 케이블카가 있었나? 건물들도 다 낮고…….”

 

“또 뭐가 다른가?”

 

“음. 저기 봐요! 지금은 없는 건물인데? 그리고 이 길도 포장이 안 되어 있어요. 꼭 옛날 영화에 나오는 서울 같아요.”

 

“사람은.”

 

“네?”

 

“사진 속 사람은 어떤가.”

 

“그리고 이 사람, 누구예요? 저 아니잖아요. 교복 입은 이 학생은…….”

 

한유라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우리가 찍은 사진이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환각이 아니다.

 

“아니. 우리가 찍은 사진이 맞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이런 사진 찍은 적 없는걸요. 이거 혹시 할아버지가 예전에 찍어두셨던 다른 사진 아니에요? 필름이 바뀌었다거나…….”

 

“필름은 하나뿐이었어. 네가 오늘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바로 그 필름.”

 

“그럼 이건 합성이에요? 요즘 기술 좋잖아요. 옛날 사진처럼 보이게 하는 필터도 있고…….”

 

“나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우리가 셔터를 누른 것은 현재였지만, 이 카메라가 담아낸 것은 과거였던 게지.”

 

나는 건조대에 걸려있던 은희의 필름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이건 기억을 인화하는 카메라인 모양이다.”

 

한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내가 한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적을.

 

“네? 기억을 인화한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이 카메라에 깃든 네 할머니의 기억이겠지. 우리가 같은 장소에서 셔터를 누르자 과거에 네 할머니가 보았던 풍경이 필름에 새겨진 게다.”

 

“……말도 안 돼요.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요?”

 

“나도 모르겠지만 눈앞의 결과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

 

나는 남산이 찍힌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사진 속 소녀가 네 할머니 김은희다.”

 

“할머니…….”

 

한유라는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사진 속 은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할머니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의 모습.

 

그녀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할머니네요. 앨범에서 봤던 어릴 적 모습이랑 똑같아요.”

 

“앨범?”

 

“네, 앨범이요. 그나저나 할머니가 이렇게 활짝 웃으셨구나. 저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사진으로만 봤지, 이렇게 생생한 모습은 처음 봐요. 꼭 살아계신 것 같아요.”

 

한유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사진 속 은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그 모습에 내 마음 한구석도 시큰해져 왔다.

 

“그럼 이 사진들은 전부 할머니의 기억 속에 있던 풍경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암실 안의 모든 소음이 멎는 듯했다.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와 사진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벽에 걸린 수많은 서울의 흑백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평생을 바쳐 기록해 온 사라져가는 도시의 모습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텅 빈 풍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안의 이 사진들은 달랐다.

 

그 안에는 은희가 있었고 서울이 있었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있었고 우리가 나누었던 약속이 있었다.

 

잊어버렸던 나의 시간이 선명하게 숨 쉬고 있었다.

 

초기 치매는 기억을 앗아간다.

 

어제의 일, 일 년 전의 일, 심지어는 소중했던 사람의 얼굴까지도 안개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정반대였다.

 

잊었던 기억과 사라진 시간을 눈앞에 되살려낸다.

 

이것은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지도.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여명이 가게 안의 낡은 부품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긋지긋한 두통과 함께 어제의 기억이 온전한지부터 더듬었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머릿속이 안개처럼 맑았다.

 

어젯밤, 암실에서 확인했던 기적 같은 사진들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희의 웃는 얼굴, 잊었던 약속,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난 나의 과거.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게 한편에 놓인 나의 분신, 손때 묻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게 렌즈를 닦고 몸체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것은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 전, 나의 무기를 점검하는 의식이었다.

 

은희의 카메라는 과거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의 이 카메라는 그 과거를 찾아 나서는 현재의 나를 기록해야만 한다.

 

두 개의 시간이 만나 하나의 온전한 기억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나는 가방에 여분의 필름과 수첩을 챙겼다.

 

수첩에는 밤새 뒤척이며 떠올렸던, 희미한 기억의 장소들을 적어두었다.

 

덕수궁 돌담길, 창경원, 남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의 기억은 구멍 뚫린 지도와 같아서 결정적인 장소들을 놓치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따르르릉-!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고 가게의 낡은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저예요, 유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죄송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유라 아가씨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들떠 있었다.

 

“괜찮다. 무슨 일인데.”

 

“앨범이요! 할머니 앨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나저나.

 

느닷없이 앨범이라니.

 

아차차.

 

치매 증상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으나 어젯밤 암실에서 내가 한유라에게 무심코 던졌던 질문이었다.

 

‘아가씨, 혹시 할머니의 앨범 같은 게 남아있나?’

 

그때는 그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던진 말이었다.

 

나의 구멍 뚫린 기억을 메워줄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설마 정말로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찾았단 말이냐?”

 

“네! 찾았어요! 할아버지가 어젯밤에 물어보셔서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여쭤봤거든요. 처음엔 엄마도 그런 게 있었나 갸우뚱하시더니…….”

 

수화기 너머로 한유라 아가씨의 흥분된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새벽에 갑자기 생각나셨나 봐요! 본가 창고에 할머니 유품 상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새벽부터 창고를 뒤졌잖아요. 먼지가 잔뜩 쌓인 낡은 나무 상자였어요. 그 안에 다른 물건들이랑 같이 들어있더라고요. 갈색 가죽으로 된, 아주 오래된 앨범이에요.”

 

나는 눈을 감았다.

 

갈색 가죽 앨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기억의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은희와 함께 문방구에 들러 우리가 찍은 사진들을 보관할 앨범을 고르던 날의 기억.

 

“그 앨범, 내가 좀 볼 수 있겠나?”

 

“네? 아, 네! 물론이죠! 할머니 기억이랑 관련된 장소를 더 찾아보시게요?”

 

“그래. 기억에도 지도가 필요한 법이다. 무작정 헤맬 수는 없지.”

 

“알겠어요! 그럼 제가 지금 가지고 나갈게요. 어디서 뵐까요?”



5화. 이 넓은 데서 어떻게 정확한 장소를 찾아요?

 

나는 한유라와 사진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아침 햇살이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창문을 통과하며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내 앞에는 한유라가 밤새 찾아냈다는, 갈색 가죽으로 된 낡은 앨범이 놓여 있었다.

 

“이거예요. 할머니의 앨범.”

 

한유라가 조심스럽게 앨범의 첫 장을 넘겼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흑백 사진 속의 시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말없이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언제나 소녀가 있었다.

 

단발머리의 야무진 소녀.

 

바로 어린 시절의 은희였다.

 

창경원 동물원 앞에서 솜사탕을 들고 찍은 사진, 덕수궁 분수대 앞에서 물장난을 치다 찍은 사진, 뚝섬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까지.

 

모든 사진 속에서 은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 할머니, 엄청 행복해 보이세요.”

 

한유라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잊고 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솜사탕의 달콤한 맛, 분수대의 차가운 물보라, 뚝섬의 흙냄새까지도.

 

나의 병은 기억을 지웠지만, 감정까지는 지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고 계세요.”

 

한유라의 말에 나는 앨범 속 어린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걱정도, 슬픔도 없는 얼굴.

 

오직 눈앞의 친구와 함께하는 순간이 전부였던 시절.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나는 앨범의 낡은 가죽 표지를 쓸어보았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시간의 더께였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잊고 있던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 사진들…… 전부 할머니 카메라로 찍으신 건가 봐요.”

 

“어떻게 아나?”

 

“사진 귀퉁이를 보면 날짜랑 함께 작은 글씨가 적혀 있어요.”

 

한유라가 가리킨 곳에는 은희의 것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글씨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낡은 종이의 감촉뿐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자, 그럼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 거예요, 할아버지?”

 

“지도를 그려야지.”

 

“지도요?”

 

“그래. 기억에도 지도가 필요한 법이다. 이 사진들이 찍힌 정확한 장소를 찾아내야 해.”

 

나는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여기부터 다시 확인해야겠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앨범의 가장 첫 장에 붙어 있던 사진이었다.

 

덕수궁 돌담길.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은.

 

그렇다.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내가 은희에게 카메라를 선물하던 바로 장소이기도 했다.

 

***

 

“무턱대고 라일락 나무부터 찾으려고 하면 못 찾아.”

 

내 말에 한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럼 뭘 찾아요? 사진에는 분명 라일락 나무가…….”

 

“나무를 둘러싼 모든 것을 봐야지. 이 길도, 저 담벼락도, 빛도 전부 달라졌으니까.”

 

나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주말의 덕수궁 돌담길은 시간의 박물관과도 같았다.

 

최신 유행의 옷을 입은 젊은 연인들, 유모차를 끄는 신혼부부, 그리고 나처럼 희끗한 머리카락을 한 채 느릿느릿 걷는 노인들까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저기 저 보도블록 보이나?”

 

내가 길바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네. 왜요?”

 

“색이 다르지. 저쪽은 회색빛인데 이쪽은 누런빛을 띠고 있잖나. 저긴 최근에 새로 깐 게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저쪽이 아니야.”

 

“아…….”

 

한유라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그저 똑같은 돌길이었겠지만, 내 눈에는 도시가 남긴 미세한 흉터와 주름이 보였다.

 

우리는 옛길의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는 담벼락에 손을 대고 그 거칠고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걸었다.

 

돌 하나하나에 담긴 시간의 무게.

 

어떤 돌은 이끼가 끼어 검푸른 빛을 띠었고, 어떤 돌은 비교적 최근에 보수된 듯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쪽 담벼락은 돌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 아마 예전에 무너져서 다시 쌓았을 게야. 사진 속 담벼락은 이음새가 더 촘촘했지.”

 

“와, 할아버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세요? 그냥 탐정 같으세요.”

 

“기억하는 게 아니다. 그냥 보이는 게지. 오래 보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말을 걸어오는 법이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담벼락 너머로 솟아오른 거대한 빌딩의 유리창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을 부시게 했다.

 

“빛도 달라졌어.”

 

“빛이요?”

 

“그래. 저 빌딩이 없었을 때는 이 시간쯤이면 햇살이 담벼락 전체를 비췄다. 하지만 지금은 저놈이 해를 가리고 있지. 사진 속 네 할머니 얼굴에는 분명 따스한 햇볕이 가득했어.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저 빌딩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내 설명에 한유라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감탄과 존경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자가 남은 것들에 집착하며 얻게 된 서글픈 통찰일 뿐.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나는 한 지점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곳은 다른 곳과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증거.

 

나는 낡은 보도블록 틈새에 박혀 있는, 거의 닳아 없어진 놋쇠 맨홀 뚜껑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서울시의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다. 이건 그대로구나.”

 

그 맨홀 뚜껑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희미한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라일락 꽃잎이 흩날리던 봄날, 은희가 저 맨홀 뚜껑 위에서 깡충깡충 뛰며 장난치던 모습.

 

“여기…… 맞아요?”

 

“그래. 바로 여기다.”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겹쳐져 있는 과거의 온기를.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네가 서야지. 사진 속 네 할머니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나는 앨범 속 사진을 보여주며 한유라가 서야 할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한유라는 어색해하면서도 사진 속 은희와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나는 은희의 카메라를 들어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지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

 

.

 

.

 

눈앞에 서 있던 한유라의 모습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그 자리에 단발머리의 교복을 입은 은희가 서 있었다.

 

1970년의 봄.

 

덕수궁 돌담길은 지금보다 훨씬 더 한적했고 공기는 풋풋한 흙냄새와 라일락 향기로 가득했다.

 

‘자, 여기.’

 

나는 묵직한 은색 카메라를 은희에게 건넸다.

 

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카메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정말로?’

 

‘그래. 너 가져.’

 

‘왜? 이건 덕근이, 너의 보물 1호잖아!’

 

‘이제 네 보물 1호 해.’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사실은 며칠 밤낮으로 고민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이 카메라를 과연 은희에게 줘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은희가 사진 찍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낡은 가게 쇼윈도에 진열된 카메라를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지, 너무나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일 수 없었다.

 

은희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다루듯 그 차가운 금속 몸체를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고마워, 덕근아.’

 

나지막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은희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허둥댔다.

 

‘야, 너 왜 그래!’

 

‘그냥…… 너무 좋아서 그래.’

 

은희는 활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봄날의 햇살보다 더 눈부셔서 나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이걸로 나 많이 찍어줘야 한다? 알았지?’

 

‘당연하지!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찍어줄게!’

 

은희는 당차게 대답하며 서툰 솜씨로 카메라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나를 향해 렌즈를 겨누었다.

 

‘자, 웃어봐! 덕근아, 하나, 둘, 셋!’

 

찰칵-!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이었다.

 

따스한 봄, 코끝을 간질이는 라일락 향기, 그리고 나를 향해 반짝이는 렌즈와 그 너머의 다정한 눈빛.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완벽한 봄날의 풍경이었다.

 

***

 

그날 오후, 우리는 가게로 돌아와 곧장 암실로 향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인화지 위에는 앨범 속 사진과 똑같은 구도로 찍힌, 하지만 훨씬 더 생생하고 선명한 화질의 과거가 펼쳐져 있었다.

 

교복을 입은 내가 수줍게 웃고 있는 은희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는 모습.

 

사진 너머로 두 사람의 설레는 감정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와…….”

 

한유라는 말을 잃은 채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똑같아요. 앨범 속 사진이랑.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 기억이 복원된 게지.”

 

나는 복원된 사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을 떠다니던 안개가 조금 걷히는 기분이었다.

 

잊고 있던 그날의 대화, 공기의 냄새, 서울의 온도까지 되살아났다.

 

두통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항상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희뿌연 안개가 아주 조금이지만 걷혀나간 느낌.

 

이것은 나의 병에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그럼 다음은 어디예요?”

 

한유라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어느새 그녀는 이 기묘한 시간 여행의 가장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앨범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진 속에는 창경원 동물원의 코끼리 우리 앞에서 코끼리 흉내를 내며 장난치고 있는 나와 은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창경원이다.”

 

“창경원이요? 지금은 창경궁 아니에요? 동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잖아요.”

 

“알고 있다. 하지만 장소는 변하지 않았지. 그 땅에 깃든 기억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을 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서울 곳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다음 날, 우리는 창경궁 매표소 앞에 섰다.

 

주말의 고궁은 나들이객들로 붐볐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화려한 전각들이 아니었다.

 

나는 입구에서 받은 안내도를 펼쳐 들고 한때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었던 궁궐의 동쪽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여기다. 지금은 춘당지라고 불리는 연못 근처야.”

 

“여기에 코끼리 우리가 있었어요?”

 

한유라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 코끼리도 있었고, 호랑이도, 원숭이도 있었지. 그때는 여기가 궁궐이 아니라 창경원이라는 유원지였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은 희뿌연 안개에 싸인 듯 흐릿했다.

 

앨범 속 사진을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창경원에 와본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코끼리 우리 앞에서 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

 

그 사진이 없었다면 이곳에 얽힌 나의 시간은 영원히 지워졌을 것이다.

 

기억이란 이토록 허무하고 연약한 것이었다.

 

우리는 고즈넉한 궁궐의 돌길을 따라 걸었다.

 

화려한 단청과 유려한 곡선의 처마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직 땅의 형태와 나무의 배치, 그리고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만 집중하며 70년대 창경원의 흔적을 더듬었다.

 

“할아버지, 근데 이번엔 어떻게 찾으시게요? 여긴 덕수궁보다 훨씬 더 넓고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는데요.”

 

“냄새.”

 

“네? 냄새요?”

 

“그래. 모든 장소에는 고유의 냄새가 있다. 그리고 강렬한 기억은 언제나 냄새와 함께 남는 법이지.”

 

나는 눈을 감았다.

 

솜사탕의 달콤한 냄새, 동물들의 쿰쿰한 냄새, 흙먼지와 풀 비린내가 뒤섞인 그 시절 유원지의 독특한 향취.

 

그것이 나의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단서였다.



6화. 기억은 언제나 향기와 함께 남는다

 

우리는 고즈넉한 궁궐의 돌길을 따라 걸었다.

 

화려한 단청과 유려한 곡선의 처마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직 땅의 형태와 나무의 배치, 그리고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만 집중하며 70년대 창경원의 흔적을 더듬었다.

 

“할아버지, 근데 이번엔 어떻게 찾으시게요? 여긴 덕수궁보다 훨씬 더 넓고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는데요.”

 

“향기.”

 

“네? 향기요?”

 

“그래. 모든 장소에는 고유의 냄새가 있다. 그리고 강렬한 기억은 언제나 향기와 함께 남는 법이지.”

 

나는 눈을 감았다.

 

솜사탕의 달콤한 향기, 동물들의 쿰쿰한 냄새, 흙먼지와 풀 비린내가 뒤섞인 그 시절 유원지.

 

그것이 나의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단서였다.

 

한유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후각과 감각에만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창경궁은 잘 가꿔진 소나무의 청량한 향과 흙냄새가 전부.

 

하지만 나의 능력은 그 표면 아래에 잠들어 있는 과거의 향기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남긴 잔향.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70년대의 향기를, 은희와 함께 맡았던 그 향기를, 찾아 헤맸다.

 

얼마나 걸었을까.

 

춘당지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가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

 

수양버들이 부드럽게 늘어진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내 코끝에는 다른 향기가 섞여들고 있었다.

 

“바로 여기구나.”

 

“여기가…… 코끼리 우리가 있던 곳이라고요? 이렇게 예쁜 연못이요?”

 

“그래. 저기 저 관덕정이라는 정자 보이지? 저 자리가 예전에는 식물원이었고 그 바로 앞, 이 연못 전체가 동물들이 있던 자리였다.”

 

나는 앨범을 펼쳐 사진과 지금의 풍경을 비교했다.

 

사진 속 배경으로 희미하게 보이던 언덕의 능선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와! 진짜 신기하다. 지금은 상상도 안 돼요. 여기서 동물들이 뛰어놀았다는 게.”

 

한유라가 연못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평화로운 풍경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수많은 동물의 그림자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겹쳐 보였다.

 

“도시라는 건 그런 게다. 끊임없이 덧칠해지는 그림과 같지. 옛 그림 위에 새로운 물감을 칠하고 또 그 위에 다른 그림을 스케치하고. 그러다 보면 맨 처음 그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들 잊어버리게 되는 게야.”

 

“그럼 할아버지는 그 덧칠된 물감을 걷어내고 맨 처음 그림을 보시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나는 나지막이 대답하며 낡은 앨범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덧칠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단서.

 

그것이 바로 이 낡은 사진들이었다.

 

“자, 이제 네가 나설 차례다.”

 

“네? 저요?”

 

“사진 속 네 할머니처럼 서야지. 코끼리 흉내, 낼 수 있겠나?”

 

“네에? 코끼리요?”

 

한유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다며 우물쭈물했다.

 

“괜찮다. 아무도 신경 안 써.”

 

“아니,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럼 빨리 찍고 끝내면 되지 않나. 낄낄낄.”

 

내 재촉에 한유라는 결국 못 이기는 척 한쪽 팔을 들어 코처럼 만들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 사진 속 은희와 겹쳐 보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서둘러 은희의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

 

.

 

.

 

셔터를 누르는 순간, 평화롭던 연못의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귓가를 때리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까지.

 

1971년 여름의 창경원은 활기 넘치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코끝을 찌르는 동물 특유의 쿰쿰한 냄새와 달콤한 솜사탕 향기.

 

눈앞에는 거대한 코끼리가 긴 코를 흔들며 서 있었다.

 

‘우와! 덕근아, 저것 좀 봐! 진짜 크다!’

 

교복을 입은 은희가 내 팔을 잡아끌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팔짱을 끼고 대꾸했다.

 

‘시끄러워. 코끼리 처음 보냐?’

 

‘응! 책에서만 봤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꼭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아!’

 

은희는 넋을 잃고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보며 엉뚱한 제안을 했다.

 

‘우리, 저 코끼리랑 똑같이 사진 찍자!’

 

‘뭐? 싫어. 유치하게.’

 

‘왜애! 재밌잖아! 내가 먼저 할 테니까 덕근이 너도 꼭 해야 한다?’

 

은희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코끼리 코 흉내를 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나에게 카메라를 불쑥 내밀었다.

 

‘자, 어서! 이 각도가 딱 좋아!’

 

나는 마지못해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은희의 모습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자, 이제 네 차례야, 이덕근!’

 

‘내가 왜 해!’

 

‘약속했잖아! 남자가 약속을 어기면 쓰나!’

 

은희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코끼리 흉내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은희가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런 창피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우리는 한참이나 코끼리 우리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날따라 뜨거웠던 여름 향기를 맡으며.

 

.

 

.

 

.

 

“……할아버지? 할아버지!”

 

한유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나는 어느새 카메라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니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카메라를 내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방금 보고 온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두통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힌 기분.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코끼리를 보고 나서 보통 그 시대 때 사람들은 거길 갔었지.”

 

“네? 어딜요?”

 

“대학로.”

 

“대학로요? 갑자기 대학로는 왜요?”

 

“그때는 여기가 종로구였으니까. 창경원에서 대학로까지는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나도 그때, 단성사에서 영화를 봤어. ‘미워도 다시 한번’이었나?”

 

앨범에는 없던 기억이었다.

 

코끼리라는 강렬한 매개체가 굳게 닫혀 있던 또 다른 기억의 서랍을 열어젖힌 것이다.

 

“영화요?”

 

“그래. 그 시절에는 그게 최고의 데이트였지.”

 

나는 무심코 ‘데이트’라는 단어를 내뱉고는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한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데, 데이트요? 할아버지는 누구랑 데이트하셨어요?”

 

“떽! 내가 데이트는 무슨. 그냥 그 시절 젊은이들이 다 그랬다는 게지.”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감정의 경계선도 함께 허물어지고 있었다.

 

은희는 나에게 그냥 소꿉친구가 아닌, 훨씬 더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나는 확신에 찬 눈으로 한유라를 보았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단성사다.”

 

“단성사요? 지금은 영화관 아니지 않아요? 보석상가로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건물이 바뀌었다고 해서 서울 땅에 새겨진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

 

창경궁을 나선 우리는 곧장 종로3가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시끄러운 소음과 번잡한 인파가 우리를 맞았다.

 

귀금속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

 

그 한가운데에 옛 단성사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이 서 있었다.

 

지금은 화려한 주얼리 센터로 변해 있었지만, 건물의 골격만큼은 옛 모습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가 단성사 터예요? 와. 정말 완전히 바뀌었네요.”

 

한유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래. 모습은 바뀌었지. 하지만 공기는 그대로다.”

 

“공기요?”

 

“그래.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설렘, 영화가 끝난 뒤의 아쉬움. 수많은 사람의 그런 감정들이 이 땅에 아직 남아있어.”

 

나는 눈을 감았다.

 

자동차 경적과 호객 행위 소리 너머로 아득한 과거의 소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웅성거리는 관객들의 목소리, 필름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스크린 속 배우들의 애절한 대사까지도.

 

“할아버지, 그럼 이번에는 사진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정확한 위치를 모르잖아요.”

 

“사진이 없으니 더듬어 찾아야지. 기억의 조각들을.”

 

“기억의 조각들이요?”

 

“그래. 앨범 속 사진은 등대와 같다. 멀리서도 길을 알려주지. 하지만 사진이 없는 기억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과 같아. 더디고 힘들지만, 손끝에 닿는 모든 것이 단서가 된다.”

 

나는 한유라의 질문에 답하며 동시에 나 자신을 다잡고 있었다.

 

사진이라는 확실한 증거 없이 오직 나의 희미한 감각에만 의존해야 하는 첫 번째 시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보석이 현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옛 극장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삐걱이던 마룻바닥, 팝콘과 오징어 냄새가 뒤섞여 있던 매점, 그리고 어둡고 긴 복도.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듯 건물의 한 지점, 지금은 작은 카페가 들어선 곳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여기가 2층 7관, G열 12번과 13번 좌석이 있던 자리다.”

 

내 말에 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좌석 번호까지 기억하세요?”

 

“아니. 기억하는 게 아니다. 그냥 느껴지는 게지.”

 

나는 은희의 카메라를 들었다.

 

앨범 속 사진이 없으니 이번에는 기억이 복원될 리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희미한 기억이 과연 진실인지.

 

카페의 빈 테이블과 의자를 향해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예상했던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고 과거의 잔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은희 앨범 속 사진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니 카메라의 기적도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왜 웃으세요, 할아버지?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한유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네?”

 

“이걸로 충분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나는 카메라를 내렸다.

 

비록 눈에 보이는 기적은 없었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잊고 있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두운 극장 안.

 

스크린의 희미한 빛이 은희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영화의 슬픈 장면에 몰입한 은희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나는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오직 그런 은희의 모습만을 훔쳐보고 있었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꼼지락거리던 내 손가락.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눈이 퉁퉁 부은 은희를 보며 놀려대던 나의 짓궂은 목소리.

 

극장 밖으로 나와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종로의 가을 거리를 나란히 걷던 그 순간의 서늘했던 공기까지도.

 

사진이 없어도 특정 장소와 행위가 방아쇠가 되어 기억의 서랍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돌아가자.”

 

“네? 벌써요?”

 

“그래.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머릿속은 방금 되찾은 가을 기억으로 인해 벅차올랐다.



7화. 이건 할머니의 장난일지도 몰라요

 

단성사 터를 나선 우리는 곧장 가게로 돌아왔다.

 

밖은 아직 환했지만, 나는 서둘러 가게 셔터를 내렸다.

 

한유라는 익숙하게 암실 문을 열고 붉은 안전등을 켰다.

 

며칠 사이에 그녀는 이 비밀스러운 공간의 또 다른 주인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어떤 기억이 나올까요? 완전 기대돼요!”

 

한유라가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창경궁에서 찍은 필름을 현상 탱크에 조심스럽게 감았다.

 

단성사에서의 기억 회복으로 머릿속은 한결 맑아졌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되살아나는 기억들은 즐거웠던 추억의 나열이 아닌,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소중한 사람을 잊고 살아왔는지 깨닫게 하는 통증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 하세요?”

 

“아무 생각 안 한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현상액을 부었다.

 

찰랑이는 액체 소리가 암실 안의 정적을 채웠다.

 

잠시 후, 현상을 마친 필름을 건조대에 걸었다.

 

그리고 오늘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코끼리 흉내를 내던 한유라의 모습을 담은 그 필름을 확대기 아래에 놓았다.

 

“자, 이제 마법의 시간이에요!”

 

한유라가 내 옆에 바싹 붙어 서서 인화지가 담긴 트레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묵묵히 인화지에 빛을 쬐고 현상액에 담갔다.

 

붉은빛 아래에서 하얀 종이 위로 서서히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배경은 70년대의 여름 창경원.

 

거대한 코끼리가 보이는 우리 앞.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진 속에 서 있는 인물은 한유라가 아니었다.

 

“어?”

 

한유라가 의아한 소리를 냈다.

 

사진 속에는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이 서 있었다.

 

한쪽 팔을 어색하게 들어 올려 코끼리 코 흉내를 내고 있는,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나였다.

 

“푸핫! 이게 누구야!”

 

한유라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웬 남자애가…… 할머니 대신 찍혔네요? 그것도 코끼리 흉내를 내면서! 표정 좀 봐요, 엄청 억지로 하는 것 같아!”

 

그녀는 배를 잡고 웃으며 사진 속 소년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남자애가 할머니의 첫사랑인가 봐요! 와, 할머니 진짜 짓궂으시다. 자기가 시켜놓고 자기는 쏙 빠지고 친구만 찍었네!”

 

한유라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었다.

 

나는 말없이 웃고 있는 한유라와 사진 속의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째서.’

 

지금까지는 분명 사진을 찍는 현재의 인물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던 과거의 은희가 나타났다.

 

그것이 이 카메라의 규칙인 줄 알았다.

 

“할아버지, 왜 안 웃으세요? 엄청 웃긴데! 이 오빠, 완전 얼었잖아요!”

 

한유라가 사진 속 소년이 어린 시절의 나인 줄도 모르고 웃음을 참지 못해 내 팔을 툭툭 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 사진 속 소년이 느끼는 감정을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피함, 쑥스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애정.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사진을 찍은 것은 나였고 피사체는 한유라였다.

 

그런데 어째서 사진 속에 나타난 것은 은희가 아닌, 어린 시절의 나란 말인가.

 

“아, 너무 웃겨. 이건 할머니의 장난일지도 몰라요. ‘내 기억만 볼 생각하지 마라, 내 친구의 굴욕 사진도 좀 봐라!’ 뭐 이런 거 아닐까요?”

 

한유라의 해맑은 추측이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장난?

 

은희의 장난?

 

나는 사진 속 나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억지로 코끼리 흉내를 내며 잔뜩 굳어있는 얼굴.

 

하지만 그 굳은 표정 너머에는 은희를 향한 애정이 숨겨져 있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오직 그녀를 웃기기 위해 기꺼이 망가지길 감수했던 그 날의 나.

 

어쩌면 이것은 은희가 남긴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너의 기억만 되찾지 마. 네가 나를 위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지 말아 줘.’

 

그 순간, 희미한 잔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뷰파인더 너머에서 나를 보며 까르르 웃던 은희의 목소리.

 

‘덕근아, 너 진짜 웃겨! 꼭 원숭이 같아!’

 

‘뭐? 코끼리 흉내 낸 건데!’

 

‘아무튼 오늘 덕분에 실컷 웃었네. 고마워.’

 

그 한마디.

 

고맙다는 그 한마디에 나의 모든 창피함이 눈 녹듯 사라졌던 기억.

 

그래, 나는 은희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원숭이든 코끼리든 뭐든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계세요? 이것도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잖아요.”

 

한유라가 어느새 웃음을 그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너희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기억이었겠지.”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사진을 집어 들어 먼저 복원했던 두 장의 사진 옆에 나란히 놓았다.

 

특히 코끼리 흉내를 내던 나의 사진은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주 오래전, 은희가 이 사진을 인화해서 나에게 건네주며 네 굴욕 사진이니 평생 간직하라며 놀려댔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 사진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그 사진과 함께 그날의 웃음소리와 여름 공기, 은희의 장난기 어린 눈빛까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소중한 기억이란 이토록 사소한 물건 하나에 깃들어 있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함께 증발해 버리는 허무한 것인지도 모른다.

 

.

 

.

 

.

 

은희에게 카메라를 선물하던 날의 사진.

 

담벼락에 기대어 웃던 은희의 사진.

 

그리고 코끼리 앞에서 억지 춘향을 하던 나의 사진.

 

이렇게 보니 비로소 우리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할아버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앞으로는 할머니가 나올 수도 있고 이 남자애가 나올 수도 있는 거예요?”

 

“글쎄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카메라의 규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감성적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 속에서 은희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고 싶었던 주인공이 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혹시 다음에는 두 분이 다 나오는 거 아니에요?”

 

“둘이 같이?”

 

“네! 할머니랑 할머니의 첫사랑이요. 두 분이 같이 찍은 사진도 있을 거 아니에요.”

 

한유라의 말에 나는 앨범의 다음 장을 떠올렸다.

 

뚝섬 유원지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찍었던 유일한 두 사람의 사진.

 

만약 그 사진을 복원한다면 정말로 나와 은희가 함께 나타날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럼 더 재미있겠네요! 다음엔 또 누가 나올지 제비 뽑는 기분이겠어요!”

 

한유라는 여전히 긍정적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앨범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진 속에는 뚝섬 유원지의 강가를 배경으로 은희와 어린 시절의 내가 나란히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지나가던 행인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일 것이다.

 

“다음은 뚝섬이네요. 여기는 또 어떤 기억이 숨어 있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사진 속, 은희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가 잔뜩 경직된 나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엔 또 누가 나올지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

 

다음 날, 우리는 뚝섬유원지역에 내렸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드넓은 한강공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잘 닦인 자전거 도로, 현대적인 디자인의 편의 시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까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뚝섬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와, 날씨 진짜 좋다! 할아버지, 우리 저기 가서 돗자리 깔고 좀 쉴까요?”

 

한유라가 신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저기가 아니다.”

 

“네? 그럼 어디요? 사진 속 배경은 그냥 강가 아니었어요?”

 

“강은 그대로지만, 땅은 변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지금의 이 공원이 아니라 저 너머에 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강변북로 너머,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곳을 가리켰다.

 

“저기요? 저긴 그냥 아파트인데요?”

 

“그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예전에는 저기가 전부 모래사장이었다. 뚝섬유원지는 지금처럼 잘 닦인 공원이 아니라 그냥 강가의 거대한 백사장이었어.”

 

내 말에 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래사장이요? 한강에 백사장이 있었다고요?”

 

“그래. 여름이면 다들 여기 와서 수영도 하고 모래찜질도 하던 시절이 있었지.”

 

나는 아련한 눈으로 아파트 숲을 바라보았다.

 

저 콘크리트 건물들 아래, 나와 은희의 발자국이 찍혔던 부드러운 모래밭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비된 화단과 놀이터,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할아버지, 여기서 어떻게 찾아요? 전부 다 똑같이 생겼는데요.”

 

“아니. 자세히 보면 다 달라. 저기 저 아파트는 창문틀이 다르고 이쪽 길은 경사가 미세하게 다르지. 모든 것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야.”

 

나는 땅바닥을 보며 걸었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아래에 숨겨진 옛 지형을 읽어내려 애썼다.

 

어디가 더 낮았고, 어디가 강으로 완만하게 이어졌는지.

 

나의 희미한 기억과 서울 땅이 남긴 미세한 단서들을 조합해 나갔다.

 

“강을 찾아야지. 가장 강가에 가까운 동, 그리고 그곳에서 강이 가장 잘 보이는 곳. 그곳이 앨범 속 너희 할머니가 사진 찍던 자리일 게다.”

 

우리는 단지 안을 한참이나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강 쪽으로 난 산책로와 가장 가까운 아파트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건물과 산책로 사이, 작은 쉼터처럼 꾸며진 공터가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다.”

 

“여기가…… 맞아요?”

 

“그래. 저기 저 버드나무 보이나? 저 나무는 그때도 저 자리에 있었어. 지금은 저렇게 늙어버렸지만.”

 

앨범 속 사진의 배경에 희미하게 찍혀 있던, 작고 가느다란 버드나무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대하고 늙은 나무가 되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한유라에게 앨범을 건넸다.

 

“이번에는 네가 찍어줄 수 있겠니? 부탁하마.”

 

“네? 제가요?”

 

“그래. 평생 다른 사람들 사진만 찍어주다가 이번만큼은 나도 피사체가 되어보고 싶구나. 저 버드나무 옆에 서 있을 테니.”

 

한유라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찍어 드릴게요!”

 

그녀는 당차게 말하며 은희의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전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찍어주겠다고 말하던 은희와 겹쳐 보였다.

 

희미하게 웃으며 늙은 버드나무 옆으로 걸어갔다.

 

앨범 속 사진에서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

 

어색하게 서서 한유라가 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평생 카메라 뒤에만 서 있었지, 이렇게 렌즈 앞에 서 본 것은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쑥스럽고 어색한 기분.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묘한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자, 할아버지! 웃으세요! 김치!”

 

한유라가 뷰파인더에 눈을 댄 채 외쳤다.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더 이상 뷰파인더 너머의 한유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오십 년 전 그날, 내 옆에서 나란히 서서 웃고 있던 은희를 보고 있었다.



8화. 우리 둘 다 잘 나올 수 있을까?

 

한유라가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찰칵-!

 

그 소리와 함께 나는 오십 년 전 그날, 내 옆에서 나란히 서서 웃고 있던 은희를 보고 있었다.

 

‘덕근아, 너 왜 이렇게 굳어있어? 웃어봐, 활짝!’

 

‘시, 시끄러워! 웃고 있거든?’

 

‘그게 웃는 거야? 꼭 화난 사람 같은데.’

 

은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놀려댔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은희의 어깨와 내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

 

풋풋한 비누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끝을 간질였다.

 

그날, 우리는 모래사장 위에 나란히 앉아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유유히 부서지는 강물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덕근아, 저기 봐! 물수제비!’

 

은희가 납작한 돌멩이를 주워 들고 힘껏 강을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통! 통! 통! 세 번을 튀어 오르다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에게, 겨우 세 번?’

 

나는 짐짓 비웃으며 더 납작하고 매끄러운 돌을 골라 들었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최대한 낮고 빠르게.

 

내가 던진 돌은 수면 위를 경쾌하게 스치며 대여섯 번은 족히 튀어 나갔다.

 

‘우와! 어떻게 한 거야? 가르쳐 줘!’

 

은희가 내 팔에 매달리며 졸랐다.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어려운 기술인 척 헛기침을 했다.

 

‘이건 말이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손목의 힘과…….’

 

나는 은희의 손을 잡고 돌멩이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서서 팔을 잡고 던지는 자세를 알려주었다.

 

은희의 작은 손이 내 손안에 들어왔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기억.

 

등 뒤로 느껴지는 은희의 온기와 샴푸 냄새가 섞인 머리카락이 뺨에 스쳤을 때의 아찔함.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다.

 

누가 더 많이 튀기는지 내기를 하고 지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기로 했다.

 

결국 내기를 핑계로 우리는 강가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로 향했다.

 

나는 은희에게 아이스케키를 사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반으로 쪼개어 하나씩 나눠 먹었다.

 

차가운 아이스케키를 베어 물며 우리는 다시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덕근아.’

 

‘왜.’

 

‘오늘 진짜 재밌었다. 고마워.’

 

은희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

 

.

 

.

 

그날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리자 한유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비틀거리며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러실 줄 알았어요. 햇볕에 너무 오래 서 계셨어요. 우리 일단 가게로 돌아가요.”

 

한유라는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내 팔을 부축했고 그런 그녀에게 의지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방금 겪은 강렬한 잔상으로 인해 멍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처럼 과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완벽하게 사진 속 주인공이 되어 그 순간을 다시 한번 살아냈다.

 

가게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암실의 붉은빛 아래,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인화지가 현상액에 잠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번엔…… 정말 두 분이 같이 나올까요? 할머니의 첫사랑이라고 하셨던 분이랑요.”

 

한유라가 기대와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서서히 떠오르는 이미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얀 인화지 위로 70년대 뚝섬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가에 서 있는 낡은 나룻배, 저 멀리 보이는 낮은 산의 능선, 그리고…….

 

두 명의 인물.

 

교복을 입은 소년과 소녀.

 

어색하게 굳어있는 나와 그런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은희.

 

“와!”

 

한유라가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정말 같이 나왔어요! 할머니랑 할머니의 첫사랑이랑요!”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의 나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어깨는 잔뜩 경직되어 있고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곁에서 은희는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어색함과 긴장감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제야 깨달았다.

 

평생 은희의 사진만을 찍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장난치는 모습을 나의 프레임 안에 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은희는 나를 자신의 프레임 안에 담고 있었다.

 

나의 서투름, 나의 긴장, 나의 애정까지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억과 이 카메라 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 사진…… 정말 예뻐요.”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한유라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꼭…….”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수줍게 덧붙였다.

 

“진짜 파릇파릇한 첫사랑 같아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다른 사진들을 보는 척했다.

 

“진짜 파릇파릇한 첫사랑? 어린애가 뭘 알겠나.”

 

“에이, 알 건 다 알죠! 저 표정은 누가 봐도 ‘나 너 좋아해’ 하는 표정인걸요.”

 

***

 

그날 밤, 나는 가게에 홀로 남아 네 장의 복원된 사진을 작업대 위에 나란히 펼쳐놓았다.

 

덕수궁, 익선동, 창경원, 그리고 뚝섬.

 

사진은 흩어져 있던 나의 10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주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또 다른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뚝섬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은희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왔을 때의 아찔함.

 

그녀가 잠꼬대처럼 내 이름을 불렀을 때, 터질 것 같았던 심장.

 

‘그래, 맞아. 버스.’

 

나는 수첩을 펼쳐 ‘버스’라고 적었다.

 

몇 번 버스였는지, 어디서 어디로 가는 버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흔들림과 은희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 냄새, 그리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종로의 가로등 불빛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사진이 없는 기억.

 

하지만 언젠가 이 조각들도 맞출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 그랬었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기억이 돌아올수록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토록 소중했던 시간을 어째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나는 앨범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날,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은희의 사진이 있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하얀 입김을 불어내는 모습.

 

“다음은 겨울이구나.”

 

나는 사진 속 은희의 모습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은희야, 너는 그 겨울을 기억하고 있니?”

 

***

 

계절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앨범 속 사진들을 따라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서울을 부지런히 누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남대문 시장의 왁자지껄한 골목에서 호떡을 나눠 먹던 기억과 서울역 광장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며 웃던 기억을 하나씩 복원해 나갔다.

 

사진을 인화할 때마다 나의 머릿속은 조금씩 맑아졌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날이 줄어들었고 수첩에 메모해야 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적어졌다.

 

기억을 되찾는 행위는 분명 나의 병을 늦추고 있었다.

 

한유라와의 동행도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어색한 손님이 아니었다.

 

암실에서는 능숙하게 약품을 다뤘고 출사를 나갈 때면 내 낡은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침묵 속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드세요.”

 

어느 날 저녁,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한유라가 따뜻한 꿀차를 내밀었다.

 

“웬 꿀차냐.”

 

“그냥요. 요즘 할아버지 얼굴이 좋아 보여서요. 예전에는 항상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요즘은 많이 펴지셨어요.”

 

나는 무심코 내 미간을 만져보았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던 변화였다.

 

멈춰 있던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굳어 있던 얼굴 근육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침내, 앨범의 마지막 계절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할아버지, 오늘 진짜 추워요! 꼭 겨울 같아요.”

 

두꺼운 목도리를 두른 한유라가 하얀 입김을 불며 말했다.

 

며칠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져 거리는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 있었다.

 

“겨울이 온 게지.”

 

나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가게 문을 나설 채비를 했다.

 

손에는 기억의 좌표가 담긴 앨범 페이지가 들려 있었다.

 

명동성당.

 

우리의 다음 목적지.

 

우리가 도착한 명동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볐다.

 

연말 분위기를 내는 화려한 장식들과 최신 유행가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와, 명동은 여전하네요. 사람 많은 거.”

 

한유라가 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 내 옷소매를 꼭 붙잡았다.

 

나는 그 작은 온기에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우리는 복잡한 거리를 지나 언덕 위에 자리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고요하고 경건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여기구나.”

 

앨범 속 사진과 눈앞의 풍경을 비교했다.

 

성당의 웅장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사진 속 은희가 서 있던 성당 앞 넓은 광장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다. 앨범 속 네 할머니가 서 있었어.”

 

“알겠어요. 이번에도 제가 서면 되죠?”

 

한유라가 익숙하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아무도 서지 않는다.”

 

“네? 왜요?”

 

“이 사진은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날의 기억은 인물 없이 오롯이 이 공간에만 집중해서 담고 싶구나.”

 

나는 한유라에게 더 설명하지 않고 은희의 카메라를 들었다.

 

이것은 나만의 고집이었다.

 

그 겨울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나와 은희 둘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뺨에 와 닿았다.

 

프레임 안에는 웅장하고 고요한 명동성당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기도를 올리는 신부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그때, 옆에 서 있던 한유라가 나지막이 물었다.

 

“할아버지.”

 

“왜.”

 

“오늘따라 할아버지 표정이 꼭……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람 같아요.”

 

한유라의 말에 셔터 위를 맴돌던 내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마지막 인사.

 

그랬다.

 

나는 지금 나의 10대 시절 마지막 기억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내는 이 여정이 과연 나에게 기쁨만을 가져다줄까.

 

어쩌면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시작된 여정이었다.

 

끝을 봐야만 했다.

 

“추운 날이었다. 그것만 기억나는구나.”

 

머릿속으로 그날을 추억하며 다시 프레임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셔터를 눌렀다.

 

찰칵-!

 

그 소리와 함께 나의 세상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9화. 그 겨울을 기억하고 있니?

 

찰칵-!

 

그 소리와 함께 나의 세상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소음과 색채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웅장하던 명동성당의 회색빛 벽도, 내 옆에 서 있던 한유라의 모습도, 저 멀리 명동 거리의 번잡함도 모두 하얀 눈송이 속으로 녹아내렸다.

 

나는 1972년의 겨울.

 

그날의 명동성당 앞에 서 있었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솜이불처럼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감싸 안으려는 듯, 소리 없이 쌓이는 눈.

 

성당의 뾰족한 첨탑 위에도,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그리고 내 어깨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덕근아, 춥다!’

 

내 옆에서 빨간 목도리를 두른 은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호! 하고 입김을 불자 하얀 날숨이 눈송이처럼 흩어졌다.

 

‘그러게 누가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랬나.’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하며 내 주머니 속에 있던 털장갑을 꺼내 은희에게 건넸다.

 

‘자, 껴라.’

 

‘됐어. 너도 추울 텐데.’

 

‘나는 괜찮다. 손 시려서 카메라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온갖 핑계를 대며 은희의 손에 장갑을 억지로 쥐여주었다.

 

은희는 잠시 망설이더니 못 이기는 척 장갑을 꼈다.

 

나에게는 조금 작았던 장갑이 은희의 손에는 꼭 맞았다.

 

그날은 우리의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해방감에 들떠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시내를 쏘다녔다.

 

그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 명동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 오니까 진짜 예쁘다. 그렇지?’

 

은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은희의 긴 속눈썹 위에 내려앉아 작게 반짝였다.

 

나는 그 모습에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덕근아,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시험도 끝났으니까 이제 슬슬 정해야지.’

 

은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의 세상은 온통 은희와 카메라뿐이어서 그 너머의 미래 같은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그냥 계속 사진이나 찍지 않을까.’

 

‘사진작가? 와, 멋있다!’

 

‘그런 거창한 거 말고. 그냥…….’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너를 계속 찍고 싶다는 말을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희 너는?’

 

‘나는 선생님이 될 거야.’

 

은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선생님? 네가?’

 

‘왜! 내가 선생님 되면 안 돼? 국어 선생님이 돼서 아이들한테 시를 가르쳐 줄 거야.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고 싶어.’

 

은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예뻐 보였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자, 여기 봐라. 미래의 김은희 선생님.’

 

‘어? 지금 찍게?’

 

‘그래. 오늘을 기록해 둬야지. 네가 처음으로 꿈을 말한 날이니까.’

 

내 말에 은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빨간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하얀 입김을 불었다.

 

바로 앨범 속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뷰파인더 너머로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은희가 나지막이 내뱉은 한마디가 나의 세상을 흔들었다.

 

‘덕근아, 사실 나. 어쩌면 부산으로 이사 갈지도 몰라.’

 

‘뭐?’

 

‘아빠 사업 때문에.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그렇게 될 수도 있대.’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뷰파인더 너머의 은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은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예쁘게 찍어줘. 나중에 부산 가서도 이 사진 보면서 오늘을 기억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셔터를 눌렀다.

 

찰칵-!

 

셔터가 닫혔다 열리는 짧은 순간, 나는 이별을 필름 위에 새겼다.

 

그리고 카메라를 얼굴에서 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뷰파인더라는 작은 네모 창이 나를 보호해 주는 유일한 방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작은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슬픔도, 이별의 예감도, 모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득하게만 보였다.

 

눈앞에서 애써 웃고 있는 은희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그녀의 눈을, 나는 맨눈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가지 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가지 말라고 붙잡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이었으니까.

 

‘부산에 가도 편지할 거지?’

 

간신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은희는 뷰파인더 너머의 나를 향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매일 할게.’

 

‘거짓말.’

 

‘진짜야. 내가 찍은 사진도 보내줄게. 부산 바다는 어떤지, 거기는 눈이 오는지, 전부 다 찍어서 보내줄게.’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울고 있었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니 그녀의 뺨 위로 하얀 눈송이가 녹아내려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 역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되돌려주곤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덕근아!’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얀 눈발 속으로.

 

그렇게 도망쳤다.

 

그렇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은희와의 마지막 겨울이었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좀 차려보세요!”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드는 감각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하얀 눈송이 대신 걱정 가득한 한유라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어느새 성당 앞 광장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손에서 놓쳤는지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휘청거리면서 쓰러지셨어요!”

 

“은희는.”

 

“네? 뭐라고요?”

 

“은희는…… 갔나?”

 

나는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현실과 과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유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여긴 명동성당이고, 저는 유라예요. 할머니는…… 여기 안 계세요.”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단호한 목소리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의 감촉,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내 눈앞의 한유라.

 

그래, 은희는 이미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났다.

 

“괜찮다.”

 

나는 한유라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겪은 기억의 후폭풍이 너무나도 거셌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앨범이 그 겨울 사진에서 끝나 있었는지.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은희는 정말로 부산으로 떠났고 우리의 시간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그 사실을 지난 오십 년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놈의 사진을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가게로 돌아가요. 할아버지, 얼굴이 너무 창백하세요.”

 

한유라는 거의 반쯤 나를 끌다시피 하며 성당을 내려왔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가게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이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되찾는 것이 과연 나에게 좋은 일이기만 한 걸까.

 

치유인 줄 알았던 이 여정이 사실은 잊고 있던 상처를 다시 헤집는 고통일 뿐이라면.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

 

그날 밤, 우리는 마지막 사진을 인화했다.

 

암실 안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차가웠다.

 

한유라도 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나를 도울 뿐이었다.

 

인화지 위로 마침내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눈 내리는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빨간 목도리를 두른 은희가 하얀 입김을 불어내는 모습.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진이었다.

 

“……예쁘다.”

 

한유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니, 꼭 영화배우 같으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퍼 보일까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진 속 은희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이별의 예감을 이제는 나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완성된 사진을 말없이 작업대 위, 다른 사진들 옆에 나란히 놓았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우리의 10대 시절 사계절이 마침내 그곳에 모두 모였다.

 

앨범 속의 모든 기억이 복원된 것이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마침내 끝이 났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유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제 앨범 속 할머니의 추억을 전부 찾았는데 그럼 할아버지와 저와의 출사는 끝난 건가요?”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한유라의 질문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우리의 동행은 할머니의 앨범 속 기억 찾기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방금 마지막 사진을 인화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계도 끝나는 것이 맞는 순서일까.

 

다시 예전처럼 먼지와 기름 냄새가 가득한 이 낡은 가게에 홀로 남아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싸우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반면에 한유라는 내 인생에 예고 없이 나타난 불청객이었다.

 

시끄럽고, 귀찮고, 나의 고요한 세상을 멋대로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나의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기름 냄새 대신 가게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다 놓은 작은 화분의 푸른 잎이 잿빛 부품들 사이에서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나의 세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혼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 어렵게 싹을 틔운 작은 희망을 내 손으로 다시 뽑아버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작업대 위에 놓인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은희와 함께했던 서울의 사계절.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한유라라는 이름의 ‘새로운 봄’을 보았다.

 

나의 멈춰버린 과거와 위태로운 현재를 이어준 존재.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앨범의 마지막 장, 사진이 모두 채워진 그 페이지를 넘겼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새하얀 빈 페이지가 몇 장 더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빈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남았잖나. 아직 채워야 할 기억들이.”

 

한유라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빈 페이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워야 할 기억들이요? 그게 무슨…….”

 

“앨범 속 기억은 모두 찾았지. 그건 너희 할머니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이 여정은 비단 과거를 되찾는 것만이 아니었어. 너와 내가 함께 서울을 걸으며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있었던 게지.”

 

작업대 위에 놓인 또 다른 필름 통을 집어 들었다.

 

우리가 기억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의 낡은 카메라로 틈틈이 찍어두었던 필름이었다.

 

“이 안에는 너의 기억이 담겨 있다. 네가 처음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그 시간이.”

 

“……제 기억이요?”

 

“그래. 너의 서울 이야기. 이제부터는 그것을 기록하고 이 빈 페이지에 채워 넣을 게다.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목표다.”

 

내 말에 한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큰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투명한 눈물방울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왜 우나.”

 

“그냥요. 저는 그냥 할머니의 기억을 찾아드리는 걸 돕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제 이야기까지 기록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투박하게 두드려 주었다.

 

“너는 서울의 새로운 주인공이잖니.”



10화. 당신의 서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날 이후, 우리의 출사는 새로운 막을 열었다.

 

더 이상 낡은 앨범 속 좌표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한유라의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서울에 온 이후, 가보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곳과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풍경들이 빼곡하게 적힌 지도였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였다.

 

“와!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거대한 조약돌 같아요.”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유선형 건물 앞에서 한유라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나는 말없이 그 기묘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동대문은 땀 냄새와 함성으로 가득했던 낡은 야구장이 있던 곳이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할아버지, 여기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한유라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내가 너무 오래된 것들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이 있나. 그저 다른 세상 같을 뿐이다.”

 

“다른 세상이요?”

 

“그래. 내가 알던 동대문은 흙먼지와 땀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차가운 쇠와 빛으로 기억되겠구나. 시간이라는 건 그런 게지.”

 

나는 낯선 풍경에 대한 감상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것은 불평이 아니었다.

 

그저 서울이라는 도시의 거대한 변화를 목도하는 늙은 기록자의 담담한 소회였다.

 

“할아버지, 저기 좀 서보세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한유라가 은희의 카메라를 들고 외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내가 찍을 차례다.”

 

“네? 저를요?”

 

“그래. 오늘은 온전히 너의 날이니까. 너의 서울 이야기를 담을 게야.”

 

낡은 수동 카메라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의 한유라를 프레임에 담았다.

 

미래적인 건축물과 현재를 살아가는 싱그러운 젊음.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찰칵-!

 

그날, 나는 온전히 사진가가 되었다.

 

DDP의 기묘한 곡선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한유라를, 내부 전시장에서 신기한 듯 작품을 구경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옥상 정원에서 작은 수첩에 서울의 풍경을 메모하는 그녀의 진지한 옆얼굴을 묵묵히 필름에 담았다.

 

은희의 카메라를 들었을 때와는 다른, 편안하고 따스한 감정이 마음을 채웠다.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은 아프고도 절박한 일이었지만, 현재를 기록하는 것은 오롯이 기쁨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성수동의 한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이 사진 정말 마음에 들어요! 꼭 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찍어주셨어요.”

 

한유라가 갓 인화한 DDP 사진들을 보며 좋아했다.

 

흑백사진 속 그녀는 내가 보기에도 꽤 근사했다.

 

그 후로도 우리의 출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 우리가 찾은 곳은 낙산공원 아래, 이화동 벽화마을이었다.

 

은희의 기억이 깃든 묵직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었지만 낡은 골목길 담벼락 위에 누군가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곳.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한유라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뭘 찍을까요?”

 

“오늘은 내가 묻고 싶구나. 너는 무엇을 담고 싶으냐?”

 

내 질문에 한유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는 이 골목의 색깔을 담고 싶어요. 낡은 회색 벽에 저렇게 예쁜 그림이 그려지니까 서울 전체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요. 꼭 동화책 속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그녀는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온통 해바라기 그림으로 뒤덮인 벽화 앞에 멈춰 섰다.

 

시멘트벽의 거친 질감 위로 노란색 물감이 햇살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다.

 

한유라는 홀린 듯 벽화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진짜 해바라기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벽화 위를 쓸어보았다.

 

그림을 사랑하는 아이의 순수한 경외심이 그 손끝에 담겨 있었다.

 

나는 말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주인공의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찰칵-!

 

“좋으냐.”

 

내가 나지막이 묻자 한유라는 벽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너무 좋아요. 저는 앞으로도 할아버지처럼 시간과 이야기를 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처럼?”

 

“네. 할아버지는 사진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시잖아요. 저는 글로써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요. 이 해바라기 그림도 언젠가는 비바람에 색이 바래고 지워지겠죠. 하지만 제가 글로 남겨두면 그 글이 품고 있던 오늘의 햇살과 온기는 영원히 남을 테니까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낡고, 병들고, 과거에만 갇혀 살던 내가 어느새 이 아이에게는 닮고 싶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낯설고도 벅찬 감정이었다.

 

“너는 펜으로, 나는 빛으로. 같은 시간을 담는 게로구나.”

 

그 말을 들은 한유라는 내 말에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예요.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야기와 시간을 봐야 한다는 거.”

 

나는 뷰파인더 너머로 그녀를 보며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낡은 골목에 피어난 한 송이 해바라기 같은 아이.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다음 출사 때는……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괜찮을까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뺨을 살짝 붉히며 묻는 그 모습에 나는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려무나.”

 

***

 

다음 주말, 우리가 만난 곳은 여의도 한강공원이었다.

 

한유라의 곁에는 훤칠하고 인상 좋은 젊은 사내가 함께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유라 남자친구, 정한결이라고 합니다.”

 

정한결이라는 청년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흐믓한 미소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꿀이 떨어지는, 영락없는 풋내기 연인들이었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전 나와 은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자, 그럼 오늘의 사진을 찍어볼까. 오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게다.”

 

그날,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필름에 새겼다.

 

함께 자전거를 타며 웃는 모습, 돗자리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는 모습, 서투르게 솜사탕을 만들어 서로에게 먹여주는 모습까지.

 

정한결이라는 청년은 솜사탕 기계 앞에서 한참을 쩔쩔맸다.

 

장가도 안 간 젊은 총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매사가 어설퍼 설탕을 허공으로 흩날리고 막대에는 볼품없는 실 몇 가닥만 맺혔다.

 

그 모습을 보며 한유라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배를 잡고 웃었고 정한결은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 순간, 아주 오래전 창경원 동물원에서 솜사탕을 두 개나 사 들고 와 의기양양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행동들.

 

사랑은 그렇게 사소한 순간들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그들의 현재가 나의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닮아있는지를 보았다.

 

세상은 변하고, 장소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셔터를 누르는 내내 내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노을 지는 강을 배경으로 두 사람을 세웠다.

 

“자, 여기 봐라.”

 

정한결이 한유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유라는 수줍게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댔다.

 

완벽한 그림이었다.

 

뷰파인더 너머로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 예쁘구나.”

 

그것은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나의 과거에게, 그리고 은희에게 건네는 진심이기도 했다.

 

찰칵-!

 

.

 

.

 

.

 

며칠 뒤, 한유라가 평소보다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할아버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일이냐.”

 

“내일이…… 할머니 기일이에요. 혹시…… 저랑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혼자 가기 좀 뭐해서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은희가 잠든 곳.

 

“……그러마.”

 

다음 날, 우리는 하얀 국화꽃 한 다발을 사 들고 경기도 외곽의 한 추모공원을 찾았다.

 

빼곡하게 들어선 납골당의 수많은 이름 사이에서 우리는 마침내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故 김은희

 

작은 유리창 너머로 활짝 웃고 있는 은희의 영정 사진이 보였다.

 

내가 앨범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바로 그 맑은 미소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사진 속 은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단 한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좋아했다.

 

보고 싶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름진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할아버지……?”

 

옆에 서 있던 한유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우세요? 저희 할머니를…… 아셨어요?”

 

나는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사진 속의 저분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

 

시간이 흘러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나의 가게 ‘덕근 사진관’의 낡은 쇼윈도에는 새로운 사진들이 걸렸다.

 

봄의 덕수궁, 여름의 창경원, 가을의 뚝섬, 겨울의 명동성당.

 

은희와 나의 사계절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그 옆에는 DDP에서 포즈를 취한 한유라의 사진과 한강공원에서 노을을 등지고 웃고 있는 한유라와 정한결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어느덧 눈이 내리던 오후, 가게 문에 달린 벨이 맑게 울렸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한유라였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꿀차와 함께 웬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거…….”

 

그녀가 내민 종이 뭉치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2025 창작선수단 콘텐츠 공모전 서울 시리즈>

 

<웹소설 부문>

 

<대상 :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

 

“제가 쓴 웹소설 작품이에요. 할아버지 덕분에 당선됐어요. 무려 대상이에요!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종이에 프린트해왔어요!”

 

나는 말없이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과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잉크 냄새.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그 안에는 그녀가 쓴 웹소설의 문장들이 한 편의 잔잔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감상을 주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할머니의 낡은 카메라를 들고 을지로의 한 늙은 사진가를 찾아가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익선동에서의 에피소드가 담긴 챕터의 시작에는 좁은 골목길을 찍은 그때의 경험이, 남산에서의 추억을 풀어낸 챕터에서는 서울 전경을 찍은 그곳에서의 경험이 집필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녀의 웹소설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문이자 시간을 넘나드는 창이었다.

 

그리고 종이 뭉치의 마지막 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의 서울 이야기는 낡은 카메라 가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할머니와 이름 모를 소년의 아련한 과거로부터 저의 서투른 현재를 거쳐 찬란한 미래로. 이 모든 시간을 기록해주신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에게 이 웹소설을 바칩니다.’

 

나는 종이 뭉치의 마지막 장을 덮고 조용히 한유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더 이상 앳된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완성해 낸 한 명의 어엿한 웹소설 작가가 되어 있었다.

 

“고맙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날 이후, 치매는 기적처럼 나아졌다.

 

기억은 더 이상 흐릿해지지 않았고 나는 수첩 없이도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병은 기억을 잃어버린 병이 아니라 기억할 다음 이야기가 없어서 생기는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낡은 카메라를 들고 서울을 달린다.

 

사라져가는 서울을 기록하고 새로 태어나는 서울을 맞이하기 위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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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달리는 사진가

  • 작가 : 박정민
1. 제목
  •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
2. 기획의도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 서울.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수많은 풍경을 스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우리는 어제의 풍경과 소중했던 기억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본 작품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는 바로 이 기억의 상실과 복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이덕근은 초기 치매로 자신의 기억을 잃어갑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과거의 수많은 이야기가 겹쳐 보이는 다층적인 공간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치유할 단서를 찾기 위해 한유라와 낡은 앨범을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여정을 떠납니다.

이 작품은 ‘나의 서울 이야기’라는 공모전 주제를 ‘개인의 기억’과 ‘도시의 기억’이라는 두 축으로 해석합니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옛 모습과 병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주인공의 기억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사라져가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합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익선동, 명동, 뚝섬 등 익숙한 서울의 공간에 숨겨진 아련한 과거를 여행하며 자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장소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과거의 기억을 발판 삼아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고 미래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따뜻한 힐링 드라마입니다. 기억의 상실이라는 절망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희망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기억과 ‘나만의 서울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여운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3. 스토리
발단 (기): 초기 치매로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는 이덕근. 을지로의 낡은 가게에서 멈춰버린 시간 속에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여대생 한유라가 할머니의 유품인 낡은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면서 그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개 (승): 카메라는 놀랍게도 과거 사진이 찍혔던 서울의 특정 장소에서 현재를 촬영하면 잃어버렸던 1970년대의 과거가 사진으로 인화되는 기적을 품고 있었다. 이덕근과 한유라는 할머니의 낡은 앨범을 지도 삼아 본격적인 여정을 떠난다. 덕수궁, 창경원, 뚝섬 등 서울 곳곳을 누비며 주인공의 잊혔던 첫사랑 ‘김은희’(한유라의 할머니)와의 추억을 하나씩 복원해 나간다. 과거의 기억 조각들이 맞춰질수록 주인공의 병세는 기적처럼 호전된다.

위기 (전): 마침내 앨범의 마지막 장소인 명동성당에서 주인공은 첫사랑과의 가슴 아픈 이별의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모든 기억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잊고 있던 상실의 고통까지 되살아나면서 그는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앨범 속 과거를 향한 여정은 끝이 나고 두 사람의 동행도 끝날 위기에 처한다.

결말 (결): 하지만 주인공은 과거의 복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제 카메라를 들어 현재를 살아가는 한유라와 그녀의 연인의 ‘새로운 서울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현재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마침내 병을 완전히 극복한 주인공. 한유라는 그 모든 과정을 담은 웹소설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를 완성하고 주인공은 이제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다른 이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묻는 ‘서울을 달리는 사진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