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슈퍼모델의 퇴마 생활
1화.
울창한 숲속, 청아한 풍경이 울리는 집.
그러니까 저게 집으로 볼 수 있는지 아닌지는 일단 이끼와 덩굴로 뒤덮인, 일종의 문이라고 보이는 저것을 열어야 알 수 있는 귀곡 산장과도 같은 곳,
이곳에서 한 청년이 단아한 여인의 사진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어머니, 오늘도 일하러 갔다 오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지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으로써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한 사람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19살의 건실한 청년이다.
삐그덕거리는 낡아빠진 나무 마루에 엉덩이를 딛고 작업화를 신은 그는 기다란 다리를 쭉 뻗으며 촉촉한 땅을 밟고 일어섰다.
흘러오는 새벽의 선선한 바람.
들려오는 새들의 상쾌한 소리.
밀려오는 태양의 반짝이는 햇살을 온몸에 뒤집어쓰며 그는 해맑게 웃었다.
“역시 이 시간에 우리 집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거야.”
서울 어디에 이런 곳이 있겠냐마는.
놀라지 마시라.
그의 집은 용케, In 서울.
그것도 남산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집을 짓고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거든, 그의 집안 내력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그의 가문은 이 남산에 터전을 잡고 살아갔다.
무려 일제 강점기에도 굳건히 지켜낸 가문의 성지로 오래도록 그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이지존의 가문이 가진 비밀과도 연결되니 알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천인(天人)의 직계 후속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이 말은 그의 어머니가 이지존에게 항상 했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지존아, 우리 집안은 대대로 단군의 피를 이어받아 그분을 모시며 살아왔음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가난하더라도 마음과 행실은 언제가 올곧아야 함을 잊지 마라.]
그녀의 이러한 가르침은 이지존의 삶과 태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누구보다 솔선수범했고.
그는 누구보다 긍정적이었으며.
그는 누구보다 잘 생겼다. 진짜로.
물질적인 풍요는 없었지만, 저 세 가지의 장점으로 이지존은 커다란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 또 하나의 장점도 있다.
어릴 적부터 하도 산을 타고 내리는 바람에 신체가 일반인보다 뛰어났다.
지금 하산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야생동물들이 지나다닐 법한 길을 거침없이 뚫고 가는 그의 이마엔 땀 하나 없었으니까.
휙! 휙!
그때 눈앞에 인위적인 산책로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날렵했던 움직임은 스르르 녹아들 듯이 사라지며 일상의 일반인처럼 바뀌었다.
남의 눈치를 본다기보다 이곳 중구에서 이지존이 손에 꼽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긴 다른 곳과는 기운이 틀려.”
충무로의 한옥마을에서 새로운 기운을 받은 그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가 가는 곳은 동대문.
정확히는 바로.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서울의 패션, 디자인의 중심지.”
그는 멀리서도 보이는 웅장한 DDP를 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잘생긴 얼굴.
188cm의 커다란 키.
거기에 등산으로 만들어진 바디 라인.
이 정도 외형이면 다들 그의 직업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모델]
아쉽지만 틀렸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무대 설치.
한마디로 막노동이었다.
한때 그는 모델을 꿈꿨었다.
초등학교부터 남다른 키와 외모로 그 유명한 로드 캐스팅도 몇 차례 왔었다.
하지만 시도조차 못 했다.
바로 어머니의 강경한 반대 때문.
자세히 사정을 듣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천인이란 집안 내력과 이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
어떻게 보면 예언과도 같았다.
[조상님이 말씀하셨다. 넌 절대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큰 일이 벌어진다고 하셨어.]
그의 어머니는 꽤 용한 무당으로 집을 이끌고 계셨다.
어머니의 경고는 틀린 적이 없었기에, 어린 이지존에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날 이후로, 그는 머릿속에서 모델이란 단어를 지워버렸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이상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모델이란 단어가 자꾸 앞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지금 하는 일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을 선택했던 과정을 보면 이것조차 뭔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일을 찾던 와중.
재밌을 법한 일을 하는 팀을 만나.
오직 호기심에 이끌려 들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DDP.
처음 장소를 들었을 때 콘서트를 이곳에서 하는 줄 알았다.
도착해서 알고 보니 콘서트가 아닌 패션쇼.
그 때문에 관련 업종이 계속 눈에 들어오면서 어린 시절 받은 충격으로 소멸한 줄 알았던 그 단어, 아니.
모델이란 직업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장님.”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위치에서 등장하는 작업 반장님을 보고 이지톤이 힘차게 인사했다.
“어, 지존이구나. 역시 마지막까지 네가 가장 먼저 오는구나.”
“제가 집이 가장 가깝잖아요. 거기다가 다른 분들은 함께 오시고요.”
“그게 힘든 거야. 그게.”
그때 저 멀리서 이지존과 비슷한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엇, 말하기가 무섭게 다들 오시네요.”
“그럼, 양반은 못 되는 놈들이니까. 하하.”
작업반장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도착한 무리가 밝은 인사를 건냈다.
“어이구, 반장님. 먼저 오셨네요.”
“그나저나 지존보다 먼저 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한 번을 못 이기네.”
“하하하, 죄송합니다.”
“무슨 젊은 애가 이렇게 성실한지.”
“우리가 복이 많지. 이런 청년과 마지막까지 일할 수 있었으니.”
다들 이지존의 칭찬으로 가득했다.
이런 반응은 10년 만이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말없이 나오지 않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왔으니 이제 작업하러 가보자고.”
“네!”
우렁찬 외침과 함께 흥겹게 모두 DDP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막바지 작업만 남아있어 2시간도 안 걸릴 분량이라 다른 날과는 다르게 모두 기운이 넘쳤다.
***
“이렇게 성실한데 하늘에서 선녀 하나 안 떨어지나?”
“이렇게 잘생겼으면 강제로 이 앞에 툭 하고 떨어질 만한데.”
“19살 이랬지? 그러면 곧 나타날 거다! 이 아저씨가 장담하지.”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호언장담하다가 큰코다치시면 어쩌려고요.”
“이게 다 세월의 경험이다. 지존아. 넌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이지존의 말에 방금 말한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그 말을 듣던 방장이 날카롭게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 아저씨 말은 듣지 마. 그쪽으론 재능 없으니까.”
“아니, 반장님. 너무 하십니다. 나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고요.”
“너무하긴 이 사람아. 연애는커녕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붙들려 결혼한 주제에.”
“쳇! 반장님도 저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하긴 나도 그게 그거지.”
반박 없이 껄껄대며 웃는 반장에 다들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랑 다르게 이지존은 앞날이 창창하니까 걱정 말라고.”
“인정합니다.”
오랜 친구처럼 떠들며 도착한 홀.
넓은 공간을 동양화 같은 느낌으로 가득 채운 이곳은 오늘의 주인공, F/W 서울패션위크의 오프닝을 장식할 패션쇼가 열릴 장소였다.
이곳에서 열리는 패션쇼는 일반적인 패션쇼와는 다르게 런웨이를 제작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 때문에 콘서트 전문이었던 이 팀이 맡게 된 것이다.
“지존아. 다 끝났냐?”
“네, 반장님. 다 끝났습니다.”
이지존은 작업복을 털며 답했다.
작업 시간이 2시간이 안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간을 보니 1시간 조금 넘어서 끝나있었다.
“그래, 막내인 네가 고생 많았다.”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선배님들이 잘 가르쳐주셔서 그런 건데요 뭘.”
“이런 건 겸손하지 않아도 돼.”
반장은 완전히 신뢰하는 얼굴로 이지존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런웨이를 점검하면 끝이다.”
“네? 방금 한 게 아니었어요?”
“그건 설치 점검, 마지막은 무대 점검.”
“아, 런웨이를 걸어보는 거군요.”
“정답.”
반장은 이지존과 함께 무대 위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둘은 연결된 모든 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도착한 무대 위.
“어떠냐, 올라와서 직접 보니까.”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런웨이에 이지존은 감동이 밀려왔다.
그의 손이 닿은 땀과 노력의 결실이었으니 얼마나 뿌듯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반장이 옆구리를 툭툭 치며 환하게 웃었다.
“걸어봐.”
“제가요?”
“그래, 우리가 설치한 무대다. 당연히 첫 타자는 네가 돼야지. 우리 같은 놈들이 걸어봐야 뽀대도 안 나잖니.”
“하지만.....”
“괜찮아. 무대 점검이야.”
반장의 인자한 눈웃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백스테이지와 런웨이를 가르는 입구에서 발을 들어 올려 그 선을 넘어섰다.
런웨이.
패션쇼 모델들의 무대.
선택받은 자들이 자신만의 날개옷을 입고 걸어가는 비행기 활주로처럼 생긴 그 길.
‘그래, 그냥 무대 점검일 뿐이야.’
이지존은 직접 손으로 세운 무대에 발을 올리며 차분히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와, 그림 좋다.”
“역시 쟤는 우리랑 같이 일을 하면 안 된다니까.”
“맞아, 누가 봐도 모델이 천직인데.”
팀원들의 탄식에 이지존은 런웨이 끝에서 뻘쭘한 듯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선배님들, 너무 비행기 태워주지 마세요.”
“그래 비행기는 아니지.”
“맞아, 전투기가 눈앞에 있는데.”
“선배님들!”
진심이 담긴 팀원들의 장난을 끝으로 먼저 내려간 반장이 모두에게 말했다.
“보고도 끝났으니 이제 가자. 모두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과 함께 행사장을 나가자, 이지존은 그들과 함께 가기 위해 무대에서 뛰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행동을 멈췄다.
‘혹시 잘못해서 무대가 망가지면 큰일이니까.’
그는 백스테이지로 몸을 틀었다.
그때,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음? 누구지?’
몇 초 후, 그의 눈에 멋진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런웨이 시작점에 등장했다.
미세한 조명에도 광택 나는 구두.
푸른 포켓 스퀘어로 포인트를 잡은 고급 원단의 슈트를 입은 그 남자는 누가 봐도 이 무대에 오를 모델이었다.
‘부지런한 사람인가? 엄청 일찍 왔네.’
그자는 방금 만들어진 런웨이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무대 안쪽에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 런웨이 쪽으로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땅이 아니잖아!”
라고 신경질을 내고는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정확히 10초 후.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저 고소공포증 때문에 이런 런웨이는 못 한다고요!”
이런 대화가 오가더니.
무대 위로 한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오프닝을 맡은 디자이너 김유리.
금빛 안경, 금빛 국화매듭 팔찌.
황금 비녀로 곱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
거기에 저고리 느낌의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기묘한 디자이너였다.
[옷은 입은 자의 또 다른 인격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진실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라는 신념으로 한국의 전통 디자인에서 착안한 많은 대표작을 만든 그녀.
다른 디자이너에게 없는 독특함으로 전 세계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다.
“컨셉이 하늘이라 높은 무대에서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김유리는 런웨이로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손을 번쩍 들면서 이지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여기 높이가 몇이죠?”
“1000mm요. 착오 없이 설계대로―”
“고작 1m가 뭐가 무섭다고. 날개옷 없이 하늘도 나는 마당에. 어처구니가 없네. ”
그렇게 이지존의 말을 싹 잘라버린 그녀는 갑자기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흠.”
그리곤 손으로 캔버스를 만들어 이지존을 넣은 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188cm에 76kg. 좋군.
갑자기 내뱉은 것 치곤 너무나 정확한 그의 신체 사이즈.
이것조차 당황스러웠는데 이어진 그녀의 주문은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걸어봐요.”
“네?”
2화.
“걸으라고요?”
이지존이 되묻자, 그녀는 인상을 팍 쓰며 시작점을 가리켰다.
“저기로 걸어보라고요.”
“지금요?”
“그럼, 지금 걷지. 내일 걸으면 무슨 소용이죠?”
“하, 참나.”
강압적인 명령에 그는 살짝 화가 났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이 무대의 안전도를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 만든 결실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보여주고 싶었다.
이 런웨이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런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는데요.”
그는 일부러 포복을 길게.
쿵쿵 소리를 내며 힘차게 걸었다.
“이것 봐요. 이렇게 힘차게 걸어도 아무 문제 없잖아요.”
김유리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네.”
“네, 문제없어요.”
“당신, 있다가 리허설 나와요.”
“네? 저는 오늘 일이 끝났는데요?”
“좋은 말 할 때 나와요.”
이번에도 일방적인 김유리.
마치 혼을 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말투는 강압적이었다.
“저기요!”
이지존은 빠른 걸음으로 무대를 내려가는 김유리를 쫓아갔다.
“저기요! 전 오늘 업무가 끝났다고요.”
여전히 무시하는 김유리.
그녀는 다가오는 관계자에게 이지존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대신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반박도 안 하고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존을 바라봤다.
이러니 그는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여보세요. 내가 뭘 대신 한다는 겁니까?”
“이름.”
“이지존이요. 그런데―”
“오늘 한 번 걸어봐.”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지존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진 김유리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오늘 내 패션쇼에 서라고.”
“네에?”
“너 재능 있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관계자와 가버렸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어이가 없어 금붕어처럼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살기에 가까운 세 개의 눈초리가 이지존의 뒤통수를 노려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원성과 원망 섞인 눈빛이 한 대 모여 멍하니 서 있는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저기요? 누구 시죠?”
말을 걸기 무섭게 그들은 압박 수비를 하는 것처럼 세 방향에서 이지존에게 달려들었다.
“빨리 치수부터 재! 빨리!”
순식간에 낯선 이들은 그의 치수를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상반신부터 보고!”
“네! 어깨 47cm, 가슴 95cm, 허리 75cm, 엉덩이 92cm, 목둘레 38cm, 소매길이 65cm, 팔 둘레 30cm, 손목 둘레 17cm, 상의 길이 49cm. 입니다!”
뿔테 안경을 낀 여성은 빠르게 메모 후.
“하반신 보고!”
“네! 허벅지 둘레 54cm, 무릎 둘레 38cm,
종아리 둘레 36cm, 발목 둘레 22cm, 인심 89cm, 총장 111cm. 발은 275입니다!”
“좋아! 당장 작업 시작!”
“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손들에 떠밀려 이지존은 반항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모든 신체의 치수가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가만히 뭐 하는 거죠!”
“네?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무것도 안 하니까 문제라고요!”
“빨리 옷을 입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이지존은 세 명의 스태프에게 강제로 연행되듯 백스테이지로 끌려갔다.
잠시 후,
“됐다!”
“휴. 안 늦었어.”
“와, 죽는 줄 알았네.”
이지존을 에워쌌던 자들은 맥이 빠져 헉헉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게… 나?”
그는 넋이 나간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하늘대는 긴 소매.
양옆이 트인 로브 자락.
꼬리가 긴 곤룡포 같은 디자인.
마치 환웅이 구름을 타고 세상에 내려올 때 입었을 것 같은 옷에 미소가 절로 흘렀다.
넉넉하게 입던 작업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숨을 고른 세 명의 스태프도 조개에서 탄생한 비너스를 바라보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밤하늘과 새벽의 빛.”
뒤에서 들려온 침묵을 깨는 소리.
따스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이지존 앞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유리가 다가왔다.
“옷의 이름인가요?”
“이름보다 컨셉이 더 맞겠지? 길고 긴 겨울밤의 어둠을 뚫고 떠오른 태양에 의해 펼쳐지는 하늘이 가진 장엄함과 변화를 표현한 거야.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진짜 날개옷 같아요.”
그 말에 김유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행히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모두 이지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걸어봐.”
“네?”
“뭘 그렇게 놀라. 리허설 몰라?”
김유리는 그를 보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에게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기둥이 쏟아져 내리는 런웨이가 나타났다.
그가 만든, 그리고 방금 걸었던 그 길.
하지만 이지존은 섣불리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어머니의 충고가 떠오른 것이다.
[넌 절대 모델이 되어서는 안 돼! 큰일이 벌어질 거야!]
그런 것도 모른 채 김유리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은 이지존의 행동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뭘 그리 꾸물대는 거야. 그냥 앞만 보고 걸으면 된다고.”
그녀의 말에 조금은 정신이 든 이지존은 말라가는 입술을 어금니로 꾹 누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괜찮아. 아까처럼 그냥 걷는 거야. 난 모델이 아니라고.’
시선을 런웨이 끝으로 옮긴 그는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넌 절대 모델이 되면 안 돼!]
잠깐 멈춘 경고가 런웨이를 앞에 두는 순간 심상치 않은 사이렌처럼 미친 듯이 그의 머릿속으로 헤집어 놓기 시작한 탓이다.
그때 김유리가 건넨 진심 어린 한마디.
“이지존, 넌 단순한 대타가 아니야. 내가 인정한 모델은 네가 처음이라고. 그러니 겁먹지 말고 아까처럼 걸어봐.”
그 순간, 경고로 가득 찼던 그의 머릿속에서 봄날의 햇살보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넘실대며 들려왔다.
[겁먹지 않아도 돼. 아들. 넌 할 수 있어. 이리 와.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디뎌보렴.]
이지존의 어머니는 항상 그를 응원했다.
어릴 적부터 뭐든 잘해 낸 그였기에 하고 싶은 일을 절대 막거나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어머니는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가난 앞에서 항상 제동이 걸렸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 모습을 쭉 봐온 이지존은 어린 나이에도 금방 철이 들었고 착한 아이라는 칭호가 늘 따라다녔다.
[엄마! 저 모델에 재능있데요. 모델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데요. 저 모델이 될래요!]
그랬다. 그는 모델이 되고 싶었다.
모델이 되어 홀로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돕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알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모델을 막았다.
귀여운 외동아들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것이 전부 그녀 탓이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 죄의식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이지존에게도 똑같이 마음의 응어리가 되어 자리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그는 한 여성에게 들은 말로 마음속 응어리가 눈처럼 녹아내리는 경험을 했다.
이제 더 이상 경고는 울리지 않았다.
그는 런웨이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듯, 고요한 떨림을 하늘에 쏘아 올렸다.
‘엄마, 이제 저 길을 가도 될까요?’
당연히 답은 없었다.
하지만 신호는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격해도 좋다는 의미가 담긴 손짓은 확실했다.
“후우.”
이지존은 가슴을 힘껏 부풀렸다.
이어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봤다.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는 무릎.
그 동선을 쫓아 오른 발바닥.
입구에 머물러 있던 그의 다리가 드디어 출발선을 넘어 앞으로 이동했다.
탁.
발바닥이 런웨이에 닿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머리카락까지 뻗어왔다.
작업화를 신고 점검을 하기 위해 걸었을 때의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게 런웨이구나.’
지금껏 닿을 수 없었던 저 먼 곳을 향한 이지존 인생 최초의 런웨이.
세상을 향한 그의 첫 비행이 시작됐다.
“와우!”
“오호.”
“잘하네.”
비록 연습이라 해도 그 시작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활주로를 날아가듯 질주하는 이지존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입은 옷은 패션쇼를 위한 옷.
그가 평소에 입던 작업복과 비교해서 움직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 모두는 긴장된 눈으로 이지존을 바라봤다.
‘실수해도 좋아. 자신 있게.’
그녀는 이지존이 다시 긴장할까 봐 입을 닫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다행히 이지존은 큰 실수 없이 나아갔다.
그러나 고비는 어느덧 도착한 끝자락에서 찾아왔다.
“엇.”
TV에서 보던 데로 방향을 틀 때 몸의 무게중심이 바뀌며 이지존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것이다.
털썩.
그는 힘찬 심호흡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뒤로 돌며 모두의 시선과 마주하며 밀려온 부담감에 몸과 마음이 무거운 족쇄에 채워진 것처럼 만든 것이다.
다 큰 성인이 걷다가 넘어진 데다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까지 일어나며 그의 다리를 더욱 강하게 옭매어왔다.
그때 김유리의 힘찬 외침이 울렸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아까처럼 자신 있게 해. 그냥 산책한단 생각으로.”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다.
특히 전문가가 초심자에게 하는 조언은 때론 조언이 아니라 벽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지존은 달랐다.
김유리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이 귀를 타고 뇌에 전달된 순간 이상할 정도로 잡념이 사라졌다.
“네가 만들 길이야. 이 정도는 쉽잖아. 안 그래?”
맞았다. 그가 땀을 흘려 만든 길이었다.
이런 길에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벌떡!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존은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눈과 입에 미소까지 두르고 있었다.
“오호, 생각보다 물건인데?”
천하의 김유리마저 이지존의 모습에 두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걸림돌이 들어왔다.
런웨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두웠지만, 형광색 옷을 걸치고 있으니 안 보이려야 안 보일 수 없었다.
“여긴 우리가 청소하는데.”
청소부가 빗질하며 런웨이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본 김유리가 바로 지적했다.
“맞습니다. 위에서 전달이 안 됐나 봐요.”
안경을 쓴 여자 스태프 한 명이 재빨리 청소부를 향해 달려갔다.
“아저씨, 안 하셔도 괜찮아요.”
쓱, 쓱, 쓱.
“아저씨, 괜찮다니까요.”
쓱, 쓱, 쓱.
“아저씨. 지금은 안 하셔도 된다고요.”
대답 없이 고개를 내린 채 빗질하던 청소부가 로봇처럼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스태프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흐흐흐.”
오싹한 수준을 넘어 소름 끼치는 미소로 웃고 있는 청소부.
스태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피로 물든 두 눈.
괴수 같은 날카로운 송곳니와 흉측한 손톱.
청소부는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였다.
3화.
“흐흐흐흐, 안녕.”
끔찍한 웃음을 가르며.
샥!
녀석의 손톱이 스태프의 목을 향해 뻗었다.
찌익.
뭔가가 베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음?”
악귀는 방금 휘두른 곳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정신을 잃은 스태프를 껴안은 김유리가 그를 조심히 땅에 내려놓고 있었다.
“리허설 중지! 모두 당장 대기실로 이동!”
김유리는 곧장 큰 소리로 명령했다.
다행히 남은 스태프 둘은 워킹을 끝낸 이지존을 살피느라 그녀가 왜 소리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명령은 확실히 인지했다.
“네! 모두 빨리 이동!”
한순간에 모든 행동을 멈춘 그들은 숙달된 조교처럼 이지존을 데리고 일사천리로 움직이며 빠르게 빠져나갔다.
‘악귀 녀석.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 결계도 최고 등급으로 쳐놨는데.’
김유리는 놈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악귀는 흥미롭다며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너구나. 우리를 잡고 다니는 정신 나간 인간이.”
“그래서? 너도 죽고 싶어서 온 거야?”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준비도 안 했을 때 만나다니.’
날개옷을 입고 있진 않아 도술을 사용할 수는 없는 상태.
그렇다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도 이 팔찌가 있으니. 한방만 제대로 노리면!’
그런데 뭔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멀쩡하던 다리가 주저앉은 것이다.
“엇?”
다리뿐이 아니었다.
얼굴, 몸, 팔, 다리.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길! 당했나?’
날개옷을 입었다면 방어가 되었겠지만, 지금 그녀의 옷을 그냥 일반 옷.
너무 급한 움직임으로 이어진 실수를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상태였다.
“흐흐흐, 독이 퍼졌군. 인간 주제에 우릴 사냥해? 네 영혼은 그냥 삼킬 순 없지. 잘근잘근 씹어 주마.”
악귀는 실실 쪼개며 김유리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을 빼곤.
뚜벅, 뚜벅.
악귀의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입꼬리.
놀리는 듯 흐느적흐느적거리는 발걸음.
기분 나쁜 음침함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두 눈만 시퍼렇게 뜬 채 무력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스으윽.
놈의 손가락에서 끔찍하게 길어지는 손톱.
그에 반응하듯 위로 올라가는 녀석의 팔.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죽어서도 기억될 끔찍한 고통일 테니까.”
녀석의 팔을 내려치려던 그때.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잘빠진 그림자.
그곳에서 뻗어 나온 힘찬 주먹이 악귀의 턱을 가격했다.
“흐억!”
깜짝 놀란 악귀가 거리를 벌렸다.
화들짝 벌린 거리에 녀석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누, 누구냐!”
“이지존이다.”
악귀는 너무 어이없었다.
녀석은 눈두덩이를 좁히며 귀를 쫑긋 세우고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
“그나저나 넌 뭐냐? 붉은 눈에 송곳니 같은 이상한 분장이나 하고. 할로윈 파티를 원하는 거라면 잘 못 왔어. 여긴 DDP지 이태원이 아니라고.”
이지존의 엉뚱한 말에 상대는 멍하니 2초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 뭔가 깨달은 듯 붉은 눈의 꼬리가 움직였다.
“방금 공격은 우연이었군. 하긴 인간 주제에 기척도 없이 내 옆까지 올 수는 없지.”
“뭐라는 거야? 기척이건 나발이건. 용건 없으면 빨리 갈 길 가라고.”
그때 아래에서 고요 속의 외침이 들려왔다.
“으~! 으~!”
김유리는 필사적으로 이지존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무슨 소린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끙끙대는 입과 눈빛을 파악한 이지존.
“잠깐. 너 설마?”
그는 손뼉을 치며 다시 악귀를 바라봤다.
“이거 쇼 중 하나구나! 하늘을 주제로 했으니, 모델들이 천사면 넌 악마겠네. 눈에 빨간 렌즈를 낀 거 보면. 맞나요?”
이지존은 해맑게 웃으며 김유리에게 물었다.
‘이게 쇼겠냐!’
분노 섞인 말이 단전 깊숙한 곳에서 솟아 올랐지만, 김유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보기 힘들었다.
“으… 으….”
당연히 그걸 이지존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해. 리허설에 있을 쇼야. 당황하지 마. 이지존. 진실 된 마음으로 사과하면 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같이 일한 동료들은 콘서트 무대를 만들던 자들, 그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었으니 이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반대로 김유리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더욱이 그의 뿌듯한 얼굴은 그녀를 더욱 미치게 했다.
‘악귀라고~!’
하지만 의외의 정보에는 귀가 꽂혔다.
악귀의 눈에 빛이 들어가면 붉게 빛나는 특징이 있었다.
이 붉은 눈을 보통 사람은 볼 수 없었다.
‘저 녀석, 설마 퇴마사 집안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악귀를 전혀 모르는 태도는 그녀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잠깐! 설마?’
순간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
그렇다면 당하기 전에 빨리 도와줘야 했다.
“으! 으!”
그녀는 어떻게든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 댔다.
그러나 이지존에겐 전혀 닿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사과부터 할게요.”
김유리의 끊임없는 메소드를 보며 이지존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곤 악귀에게 다가가며.
“전 이지존이라고 합니다. 방금 모델로 들어와 못 알아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본 악귀는 반가운 얼굴로 날카로운 손톱을 빼 들었다.
이어 흘러나오는 침을 간신히 누르며 먹이를 노리는 늑대거북처럼 이지존의 목을 노려봤다.
“멍청한 녀석.”
그때 이지존의 고개가 삐그덕 돌아갔다.
살짝 들어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악귀조차 보지 못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의 들끓는 눈빛을 마주한 악귀는 지금껏 잊고 있었던 한 단어가 떠올랐다.
[死]
악귀의 올라간 손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이 움직였다.
촥!
이지존의 분노가 담긴 어퍼컷.
악귀는 피할 생각조차 못 하고 그대로.
퍼억!
강한 타격에 턱주가리가 비틀댔다.
이어 잠시 공중 부양을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크허억!”
바닥이 널브러진 녀석은 뒤틀린 턱을 붙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맞췄다.
“뭐야. 너 인간 맞냐?”
“악귀라고! 악귀!”
방금 얼굴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김유리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며 외쳤다.
“악귀? 저놈이?”
그제야 이지존은 제대로 놈을 마주했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날 멍청이라고 부른 놈은 설령 악귀라 할지라도 절대 용서 못 해.”
찢어지게 가난해서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콤플렉스로 남아있는 이지존에겐 멍청이는 발작 버튼과도 같았다.
“인간 주제에! 감히!”
분노에 찬 악귀는 버럭 소리쳤다.
사람이라 볼 수 없는 음침한 음성에 이지존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악귀라고 불린 놈을 살펴봤다.
“진짜 악귀라고?”
녀석은 화들짝 놀란 이지존의 표정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속절없이 몇 번이나 당했지만, 아직 여유가 넘쳤다.
‘아무리 반응속도가 빨라도 인간은 인간. 저놈이 날 쫓아올 리가 없다.’
놈은 바로 공격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탐색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이지존의 동공은 그를 전혀 쫓지 못하고 있었다.
“날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악귀가 이지존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묵직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퍽!
그건 악귀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
정확히는 이지존의 주먹이 녀석의 코를 뭉개는 소리.
가만히 앞만 보던 이지존이 갑자기 허리를 틀며 내지른 주먹이 정확히 악귀의 코를 강타한 것이다.
“으어떠게야아라누!”
동시에 악귀의 놀라 자빠지며 내지르는 괴상한 의성어가 울려 퍼졌다.
악귀는 다시 거리를 벌렸다.
녀석은 삐뚤어진 코에서 흐르는 검은 물기를 닦아내며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이 자식이~!”
마치 슈퍼 히어로 같은 그의 움직임에 놀란 건 김유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경 너머로 그녀가 만든 옷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신성력을 보자, 긴장된 상황에서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 돌았다.
‘내가 만든 옷이 반응하고 있어. 확실해 그토록 찾던 천인(天人)의 후손이야!’
그제야 왜 결계가 깨졌는지 알았다.
‘나를 제외한 특이한 힘을 가진 모든 것을 막는 최고 등급으로 설정해 놨기 때문이야. 하지만 천인마저 막을 수 없었겠지.’
그 사이에도 악귀는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퍽! 퍽! 퍽!
공격할 때마다 역으로 얻어맞기를 반복했다.
“인간 주제에!”
“인간이 아닌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건방 떨지 마!”
악에 받친 악귀는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그때마다 이지존의 매서운 주먹이 녀석을 막아냈지만, 아쉽게도 쓰러뜨릴 힘은 없었다.
특별한 무기나 힘을 강화해 줄 뭔가가 필요했다.
‘역시, 천의 없이 인간의 힘으론 힘들어. 하지만 천인이라면 내 신성력이 깃든 이걸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 상체를 삐걱대며 손목에 낀 팔찌 한 짝을 빼 던졌다.
“이걸 껴!”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고.”
이지존은 어이없다며 김유리를 노려봤다.
“일단 닥치고 끼기나 해봐!”
“말 한번 곱게 잘하네.”
이지존은 오른팔에 팔찌를 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화매듭을 중심으로 금빛이 일렁이더니 권투 글러브처럼 그의 주먹을 감쌌다.
“일회용이니 급소를 노려야 해!”
슬슬 이지존의 공격에 적응한 악귀.
녀석은 이번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과감히 파고들어 어떻게든 독이 묻은 손톱을 놈의 피부에 찔러넣을 생각으로 돌진했다.
“이번엔 죽인다!”
그 특별한 살기가 이지존의 등 뒤를 파고들던 순간.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주먹에서 타고 내려온 강한 울림이 발끝까지 밀려왔다.
이지존의 공격은 정확했다.
그의 주먹은 악귀의 머리통을 뚫고 나와 있었다.
털썩.
박살 난 머리는 먼지처럼 사라져갔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악귀의 시체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따라 사르르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끝났군.”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유리가 쓰러진 스태프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정말 악귀야?”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이지존.
김유리는 그의 손목에 감긴 팔찌가 먼지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다가갔다.
“괜찮아?”
“괜찮아.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지존은 그녀에게 받은 팔찌를 넘겨주려 했다.
“어? 뭐야 어디 갔어.”
당황한 이지존이 몸을 비틀며 팔찌를 찾기 시작하자, 김유리는 황당한 눈초리로 그를 보며 물었다.
“뭐해? 갑자기.”
“팔찌가 안 보여서요.”
“일회용이라고 말했잖아. 그리고 아깐 반말이더니 지금은 왜 또 높임말이야.
“앗, 아까는 급해서 반말이 나왔는데─”
“앞으론 반말로 해. 나도 그게 편하니까.”
너무나 쿨하게 받아치는 김유리.
하지만 이지존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어, 너랑 자주 볼 거 같거든.”
“저랑, 아니. 나랑? 왜?”
이지존은 긴가민가한 표정 물었다.
김유리는 그 얼굴을 보며 태연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괜찮아요. 지금 다 오라고 하세요.”
그녀는 카리스마 있는 어조에 스태프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유리 디자이너님!”
사람들이 소리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나 같이 잔뜩 긴장한 상태.
갑자기 대기실로 가라고 소리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난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휴우.”
“하아.”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뿜어졌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김유리는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최아리 씨가 많이 피곤했는지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러니 쇼 시작 전 리허설까지 모두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유리는 이지존과 함께 누워있는 스태프 부축해 일으켜 세운 후 달려온 두 명에게 전달했다.
이후 김유리는 핸드폰을 흔들었다.
“저도 대기실에서 쉬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연락하세요.”
“네.”
그렇게 앞으로 가다가 멈춰 선 김유리.
그녀의 시선은 이지존에 머물러 있었다.
“넌 안 와?”
“음? 나?”
“하….”
그녀의 한숨이 터진 순간.
모든 인원이 이지존을 노려봤다.
그 눈빛엔 이런 말이 담겨있었다.
[감히, 김유리 디자이너님께 반말을?]
김유리는 서둘러 다시 웃었다.
“괜찮아요. 알고 보니 어릴 적 엄마 친구의 친구였더라고요. 그렇지?”
“어? 어. 엄마 친구의 친구예요. 하하하!”
이지존의 어설픈 연기에 김유리는 미간을 부여잡았다.
이어 그에게 바짝 다가간 후, 귀를 힘차게 잡아당기며 강하게 경고했다.
‘또 악귀에게 당하고 싶어? 살고 싶으면 빨리 따라와!’
4화.
‘꾸물대지 말고!’
김유리는 연이어 험상궂은 눈빛을 날렸다.
악귀의 존재를 방금 안 이지존에겐 아주 잘 먹힐만한 협박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그를 움직이게 한 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김유리의 정체.
‘알았어. 가, 간다고.’
그렇게 이지존은 김유리를 따라나섰다.
아직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DDP 내부는 고요한 정자와도 같았다.
“궁금하지? 네가 본 게 악귀인지.”
앞서가던 김유리가 이지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도 있고요. 하지만─”
“반말로 해, 나이 차도 안 나는데.”
“알았어.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네 정체야. 악귀라니.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김유리는 입꼬리만 올리곤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리며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김유리 디자이너님]
부드러운 굴림체로 쓰인 표식을 앞에 두고 좌우를 확인한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문을 열었다.
“빨리 들어와.”
이지존의 몸이 문지방을 넘기기 무섭게 문을 걸어 잠근 그녀, 이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고는 이동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지존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제 말해줘.”
“여기선 말해도 못 믿어.”
“뭘 못 믿는다는 건데.”
김유리는 이지존에게 눈길 한번 없이 걸음을 이어갔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탈의실.
그 모습을 이지존이 보고 있든 없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활짝 열었다.
“말도 안 해보고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답답했던 이지존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내부로 들어가며 이지존을 쓱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탁, 탁.
뭔가를 걷어찬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김유리가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와.”
“언제 말해 줄 건데?”
“그래서 들어올 거야 말 거야?”
이지존은 잠시 망설였다.
남자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누가 낯선 여자와 저 좁은 탈의실에 들어가고 싶겠나.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리고 철컹이었다.
“다 너에게 도움 되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말고 빨리 들어와. 시간 없어.”
“그러니까 이게 날 도와주는지 어떻게 아는데. 아무래 봐도 그 반대─”
김유리는 이지존의 팔을 붙잡고 탈의실로 끌어당겼다.
“아휴! 그냥 좀 들어와! 무슨 의심이 이렇게 많아!”
“으악! 네가 한 거다. 나 아니야!”
“헛소리 말고 꽉 잡아.”
문을 닫으며 김유리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러니까 난 아무무어어아~!”
갑자기 모노레일처럼 떨어지는 탈의실.
안전끈 없이 번지를 뛰는 느낌에 이지존은 말을 멈추고 손잡이를 꽉 잡았다.
촤아아아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
건물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그 웅장함에 밀려오는 두려움이 점점 희석되어 갔다.
‘뭐지?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느낌은.’
이지존은 기분이 묘했다.
왜 이렇게 편한 느낌이 드는지.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슈우우웅.
슴슴한 소리와 함께 김유리가 놓았던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나가자.”
“도대체 네가 가는 곳이 어딘─”
이지존은 말을 잃었다.
그녀가 열은 문 너머로 펼쳐진 공간을 본다면 모두가 그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뭐야. 이건. 무슨 판타지 영화─”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지?”
김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신감 있게 그곳을 소개했다.
“이곳은 나의 비밀기지. 서낭당(서낭堂)이라고 해.”
서낭당(서낭堂).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이란 뜻으로 황홀하게 전개된 기묘한 풍경은 그 이름이 가진 신비함을 넘어서고 있었다.
높은 천장, 가운데 우뚝 선 거목을 중심으로 세 변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있었다.
그 거목의 주변엔 다양한 형태의 오리가 장식된 솟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균형을 맞춰 세워져 있었는데, 8 괘에서 건(乾)을 표현한 ☰모양이었다.
더 놀라운 건, 거목의 밑기둥이었다.
거기엔 이름 모를 최첨단 장비들이 모여있었는데 옷을 만드는 장비 외에 신비한 것들도 잔뜩 모여있었다.
“하하, DDP 지하에 이런 게 있었을 줄이야.”
앞서간 김유리는 컴퓨터를 켜고 결계 시스템이 꺼진 것을 확인 후, 다시 재작동시켰다.
결계가 원상 복구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돌아서서 이지존을 바라봤다.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고. 얼마나 열심히 산 줄 알아? 완성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고.”
“어, 충분히 알겠, 잠깐.”
이지존은 김유리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수십 번을 왕복하고는 안심의 웃음을 지었다.
“하하, 농담이지? 20년이라니.”
“농담이긴. 내 나이가 인간 나이로 180살이 넘어간다. 그 후로 세본 기억이 없어서 몰라.”
“…….”
이지존은 또다시 김유리를 살펴봤다.
도무지 겉으로 봐서는 믿을 수 없었다.
특히 나이에 대한 정보는 풀린 게 없었다.
일단, 겉으로 봐선 많아 봐야 21세인 그와 3살 정도 차이 날 법한 외모.
‘정말 많아 봐야 27, 28 같은데.’
하지만 지금 그가 있는 서낭당이라는 공간을 본 이상 뭐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 반말하면 안 되겠구나. 한참 어른이신데. 오히려 할머니라고 해야 할 판에.”
“뭐!”
김유리의 눈빛이 변했다.
마주하면 돌이 되는 메두사의 눈도 이 정도로 위협적일 순 없었을 것이다.
“아닙니, 아니. 아니야. 나랑 생긴 건 동갑 수준인데 뭐. 당연하지. 하하하!”
핏대선 이마와 힘줄 선 주먹을 이지존에게 내밀며 김유리는 강하게 경고했다.
“후후, 죽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미안….”
그녀는 이지존을 꿰뚫듯 노려봤다.
“아무튼, 나이까지 말했으니 내 정체를 알려주지. 난 선녀야.”
이지존의 눈과 입이 조금씩 꿈틀댔다.
눈꼬리는 아래로, 입꼬리는 위로.
그렇게 두 꼬리가 만나는 순간.
“후하하! 선녀? 하하하! 선녀와 나무꾼의 그 선녀? 날개옷 입고 천계와 인간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그 선녀?”
“잘 아네.”
“푸하하! 그러면 날개옷은 어딨는데. 날개옷은 또 잊어 버렸어?”
“잘 아네.”
“…….”
김유리의 허공을 가르는 아련한 눈빛에 이지존은 웃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이번엔 조심히 질문을 던졌다.
“설마 나무꾼이 훔친 건 아니지?”
“걔가 훔쳤으면 20년을 가까이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지.”
“누가 훔쳤는데?”
그의 질문에 김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순간 차오른 긴장감.
이지존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의 입만 바라봤다.
“악귀들의 왕, 귀마(鬼魔).”
“……걔들도 왕이 있어?”
김유리의 고개가 까딱 움직였다.
“천계에 있는 동안 난 금기를 어기고 이 현세를 관찰했어.”
“여기를 보는 게 금기라고?”
“현세에 관여하지 말라. 선녀가 제멋대로 나무꾼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것을 알고 환인(桓因) 님께서 분노하시며 만든 법이야.”
“하긴 열 받을 만하겠다.”
“하지만 나 같은 선녀가 있어서 이 서울이 악귀 소굴이 안 된 거라고.”
김유리는 그를 살짝 째려보곤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인간들 몰래 악귀를 사냥하고 다녔지. 그리고 악귀들의 이상 행동을 포착하고 그들의 목적을 알기 위해 추적 중이었어. 하지만 귀마의 계략에 휘말려 날개옷을 빼앗기고 겨우 죽다 살아남았지.”
김유리의 말을 들은 이지존의 고개가 갸우뚱 움직였다.
“그래서 네가 20년 동안 천계로 안 올라갔는데 그 위에선 이 일을 아무도 모르는 거야?”
“…… 뭐, 그렇지? 아무도 현세에 절대 관여하지 말란 법을 따라야 하니까?”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한 김유리를 본 이지존은 이번엔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환인이란 분. 속이 좀 좁으시네”
“흐, 흠!”
김유리는 크게 헛기침 내뱉으며 그의 눈이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는 잘못됨을 깨닫고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단순히 널 못 올라가게 할 목적이라면 이미 날개옷을 태워버리거나 하지 않았을까?”
“그리 쉽게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그러면 왜 날개옷을 훔쳐? 그걸 어디에 쓰려고?”
김유리는 입을 다물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앞쪽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을 켜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날개옷은 선녀가 아닌 자가 입으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거든.”
“혹시, 걔가 널 좋아해?”
“좋아해서 훔쳤겠냐!”
버럭 소리친 김유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며 거친 숨소리가 피어났다.
잘못하다간 주먹이 날아올 듯한 분위기.
“미안, 미안. 농담이야. 농담.”
이지존이 서둘러 두 손을 올리며 사과하자, 씩씩대던 그녀의 얼굴이 사르르 자취를 감췄다.
“아무튼 악귀 녀석들이 도시를 마음껏 거닐며 뭔가를 꾀하고 있어.”
말을 잇는 김유리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신성력도 사라진 지금, 서둘러 날개옷을 되찾아 천계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어떻게 찾을 건데.”
이지존의 말에 그녀의 눈빛에서 불씨가 살그머니 돋아났다.
“악귀 놈들을 사냥하면서 힌트를 모아야지. 너와 내가.”
“혼자보다 둘이 더 빠르다는 건가.”
”그것도 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길 때 신성력을 모두 소모해 버렸거든. 이제 혼자 귀마를 상대할 수 없어. 그래서 천인을 찾았지. 환웅의 후손이라면 너라면 분명―”
“잠깐!”
이지존은 다가오는 김유리를 향해 황급히 손을 올렸다.
“내가 진짜 천인의 후손인 걸 어떻게 알았어?”
김유리는 이지존이 입은 옷을 가리켰다.
“내가 만든 옷을 입었을 때 풍겨 나오는 신성력으로 알았지. 일반인에겐 절대로 일어날 수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이지존은 옷깃을 이리저리 살피곤 냄새까지 킁킁 맡았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행동에 김유리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걸로 신성력이 감지 되겠냐!”
“혹시 모르니까. 그럼 나와 함께 악귀를 처리하자고 설득하려고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어,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선 이것도 필요해.”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이지존에게 보여줬다.
“계약서?”
“내 브랜드의 전속 모델 계약서?”
“전속 모델? 내가?”
“선녀인 내가 디자인한 옷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너뿐이야. 그 말은 내 패션쇼에서 네가 절대로 빠져선 안 된다는 말이지.”
넌 나의 Only One.
이보다 더한 칭찬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이지존의 얼굴은 시무룩하기만 했다.
“뭐야, 맘에 안들어?”
“안 들긴. 너무 좋지.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왠지 불길하다고.”
“뭐가 불길한데.”
그는 어머니가 한 말을 그녀에게 해줬다.
“조상님들이 나보고 절대 모델이 되면 안 된다고 했거든. 모델이 되면 반드시 큰일이 날 거라고.”
그 말을 들은 김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모델도 안 됐으면서 무슨 걱정이야.”
“음? 방금 런웨이 걸어서 악귀까지 만나고 이번엔 네가 귀마 어쩌고 가 뭐를 했다며. 지금 이게 큰 일이 아니라고?”
“아니, 너 지금 정식 모델도 아니라고.”
김유리는 계약서를 흔들어 보였다.
거기 서명란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누군가의 대타였으니까.
“이렇게 나를 만난 건 넌 모델이 될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신성력을 잃어버린 지금 널 만난 건 어찌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거든.”
“…….”
“그렇지, 아까 말한 대로 네가 모델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어. 이미 큰 일이 벌어졌다고.”
김유리의 이론은 너무 완벽했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함께 일한 반장이 늘 경고했었다.
“공짜로 부려 먹는 건 아니지?”
“물론 공짜는 아니야. 위에서 말했잖아? 날개옷을 찾은 이후에도 쭉, 거기다가 날개옷을 찾으면 난 천계로 갈 테니 내가 만든 브랜드인 천무(天舞)도 너에게 줄게.”
“천무?”
슈퍼모델, 상상도 한 적 없던.
꿈으로도 꾸지 못했던.
그의 삶에서 절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그것을 넘어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의 CEO.
이지존은 그대로 손을 들어 볼을 힘껏 꼬집었다.
“어때? 천인으로 태어나서 그 재능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아?”
김유리는 계약서를 확인 중인 이지존에게 진중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어때?”
계약서를 다 읽은 이지존은 의지를 드러낸 눈빛으로 김유리를 마주 봤다.
“좋아, 잃어버린 날개옷, 내가 찾아줄게.”
텅 비었던 [천무(天舞) 전속 모델 계약서]의 서명란이 두 개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모델 : 이지존]
[대표 : 김유리]
5화.
이지존과 김유리의 이름이 들어간 계약서를 컴퓨터로 스캔하자 청아한 AI의 음성이 울렸다.
<이지존 님이 보안 프로그램에 등록됐습니다. 지금부터 보안등급 검사 없이 이곳 시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김유리에게 이지존이 물었다.
“그런데 악귀를 상대할 방법은 있어? 아까 아무리 때려도 멀쩡했다고.”
“이제 알게 될 거야. 악귀를 상대할 네 재능을.”
“재능?”
[재능]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능이 하나씩 있다고들 하지만 지금껏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처럼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대로 열심히, 오직 열심히, 묵묵히 열심히 노력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이다.
이 절대적 믿음은 한 남자 인생의 중대한 기로 앞에서 커다란 작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내가 알려줄게.”
“네가? 아까 아무것도 못 하고 바닥에─”
“독에 당했다고! 독!”
김유리가 분노의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여전히 이지존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얘가 날 우습게 아네. 100년 넘게 이곳, 서울에 나타난 악귀를 내가 몇 마리나 처리했는지 셀 수도 없다고! 거기에 날개옷도 없었으니 당연하지!”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날개옷은 빼앗겼다고 하지 않았어?”
순간 김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건 자신감 넘치는 모델이 런웨이를 나서며 모두에게 보내는 강렬한 신호와 같았다.
“따라와.”
그녀는 웃으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러다 앞서가던 걸음을 멈추며 잔뜩 의문 가득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받네. 도대체 뭐 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일부러 천인이 본능적으로 좋아할 만한 디자인으로 만든 건데.”
“네가 만든 옷은 고급 브랜드잖아. 난 그런 옷은커녕 네 제품이 진열된 옷 가게 근처도 갈 형편이 안 됐다고.”
“흠, 생각을 잘 못했었군. 난 천인이라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하네요. 천인이 거지여서.”
“괜찮아.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김유리가 앞서 걸어간 곳은 거목의 밑동에 설치된 단단한 보안으로 둘러싼 문.
<문을 열겠습니다.>
김유리가 다가가자, AI의 음성과 함께.
치이잉.
문이 사르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 모습에 이지존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거기엔 다양한 디자인의 여성 옷들이 아이언맨 슈트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그 안의 중심에 선 김유리는 허리춤에 주먹을 올리며 이지존을 바라봤다.
“이건 전부 내가 개발한 날개옷. 귀마에게 빼앗긴 날개옷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나의 결과야. 물론 현세의 재료로 천계의 의상을 만들 순 없지만, 내가 가진 일정 능력은 끌어낼 순 있었지.”
그녀의 눈빛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설명을 끝낸 그녀에게 이지존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잠깐, 너도 이렇게 날개옷을 개량해서 만들 수 있는데. 그 귀마라는 놈도 훔친 날개옷을 만들려는 거 아냐?”
“하하하! 너 참 웃기다. 악귀 놈들이 무슨 옷을 만들 줄 안다고. 걔들은 애초에 미(美)도 모른다고. 그것보다 이거나 봐.”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가장 가운데에 진열된 옷으로 걸어갔다.
“이게 바로 네 재능을 인도할 옷이야. 바로 천의(天衣)! 무려 천계에서 내가 직접 만들고 가지고 내려온 거라고!”
어둠 속에 들어있는 그 옷은 슬쩍 보면 평범한 양반집 한복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빛에 들어서면 숨어있던 오색 빛깔(흑, 백, 청, 홍, 황)과 함께 금루가 승천하는 용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곤룡포를 능가하는 고풍스럽게 변하는 옷이었다.
“입어봐.”
그 옷은 신기할 정도로 이지존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거기에 움직일 때마다 상의의 옆트임과 얇은 어깨 장식이 펄럭이며 마치 구름을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역시, 명품은 주인을 알아보는 법. 혹시 몰라 세운 대비책이 여기서 빛을 보는구나!”
김유리는 뿌듯한 표정과 함께 이지존의 모습에 감탄하며 말했다.
“자! 그 옷을 입었으니 이제 너의 숨겨진 능력이 느껴질 거야.”
“예를 들면?”
“진짜 천인처럼 강력한 도술을 발휘한다든지. 아니면 천인이니까 번개를 다룰지도?”
그녀의 말에 이지존도 잔뜩 흥분됐다.
그는 눈을 감고 어떤 능력이 나타나면 좋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슈퍼맨 같은 파워?
이건 너무 오버였다.
데드풀 같은 힐링 팩터?
좋긴 한데. 너무 아플 것 같았다.
아니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마법을?
이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즐거운 상상 속에서 이지존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오!”
김유리의 환호가 들렸다.
급하게 눈을 뜬 이지존은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 능력이 나타났어?”
“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왜 옷이 안 보이지?”
“옷이 안 보인다니. 그게 무슨…. 으악!”
그는 갑자기 휑해진 알몸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외쳤다.
“옷이 어디 간 거야!”
말 그대로였다.
이지존이 입은 옷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그는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김유리의 수상한 눈초리를 모조리 받아내고 있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그만 봐!”
이지존은 급히 손을 움직여 중심을 가리고 개다리춤을 추며 탈의실로 쏙 들어갔다.
그곳의 전신 거울 앞에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옷의 여부를 확인해 갔다.
“이게 도대체.”
어깨를 매만지고.
가슴을 두드리고.
허벅지를 꼬집어도.
옷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피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거울을 마주한 채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나도 섬유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나노일 리가 있나.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하겠어?”
“아니! 그럼,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옷이 바디 크림처럼 피부 속으로 스며들 리는 없잖아.”
이지존은 팔을 들어 올려 몇 번이나 킁킁거리곤 고개를 갸웃하며 벗어 놓은 옷가지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 정확히 말해줄 수가 없네. 흠, 설마 이게 네 능력인 걸까?”
김유리의 말에 옷을 다 입은 이지존이 잔뜩 실망한 얼굴이 탈의실의 문틈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설마, 이게 내 능력이라고?”
“그럴지도?”
“이게 능력이면 너무 허접하잖아.”
이지존은 너무나 허무했다.
그는 수만 가지 능력을 상상했었다.
그 모든 것 중, 지금과 같은 결과는 상상으로도 떠오른 적 없었다.
하지만 김유리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투로 질문했다.
“그것보다 느껴지니?”
“뭐가?”
“하늘의 기운.”
“그건 어떤 느낌인데.”
순간 김유리의 눈동자에 물음표와 함께 서늘한 서리가 감돌았다.
“너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져?”
옷을 다시 입은 이지존은 탈의실을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무것도.”
그리곤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고는 황급히 다시 탈의실로 쏙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것도 설마?”
“그건 그냥 패션쇼 컨셉에 맞춰 만든 옷이야. 그런 기능 따윈 있을 리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라고.”
“그래? 그런데도 아까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고?”
“놀랍지? 천의는 어느 정도의 힘을 낼지 궁금했는데. 확인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턱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던 김유리는 금세 시무룩해진 이지존을 따스한 격려를 보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보단 나아. 그러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천의가 사라진 게 어떤 의미인지 찾아내 보자고. 그래야 날개옷을 되찾고 악귀 놈들도 멸할 수 있으니까.”
이지존은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녀처럼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악귀와 싸울 때 온몸에 감돌았던 특별한 무언가가 되었다는 감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어, 알았어.”
이지존의 대답에 맞춰.
그녀의 주머니에서.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헤헤!
송창식의 노래인 ‘가나다라’가 흘러나왔다.
또다시 놀라는 이지존의 눈을 피해 김유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디자이너님. 전체 리허설 시간이 되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그녀는 통화를 끊으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이지존. 가자.”
“어? 어딜?”
“어디긴 어디야. 패션쇼 가야지.”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구나.”
김유리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지존은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아까는 못 느꼈지만, 그는 이상한 뭔가를 느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188cm의 그가 165cm의 그녀를 앞지를 수 없었던 것.
“선녀는 원래 걸음이 빨라?”
“이것 때문에 그래. 혹시 몰라서 몸놀림이 빨라지는 옷을 걸쳤지.”
그녀는 길을 가면서 목에 두른 옷가지를 펄럭였다.
“로브?”
“쓰개치마. 조선시대 여성들이 밖에 나갈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건데, 옷보단 모자 역할을 했지. 로브랑 합쳐서 개량한 거긴 해. 여기 태극 문양 보이지?”
“어.”
이지존의 대답에 김유리는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봤다.
이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이 문양은 일반인에겐 안 보여. 넌 확실히 천인이 맞아.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분명 깜짝 놀랄 능력이 숨어있을 테니까.”
“고마워, 노력해 볼게.”
그의 결의에 밝게 웃는 김유리.
“자! 그럼, 패션쇼도 힘내자고!”
“그런데 넌 날개옷을 찾는 게 목표라면서 왜 이렇게 패션 일을 열심히 해? 지금도 악귀들 찾아 도시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그것도 하지, 하지만 이곳, 서낭당 유지 관리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거기에 날개옷 개발까지. 배트맨이 괜히 부자가 아니라고.”
“하긴,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지.”
그렇게 패션쇼장으로 돌아온 그들.
김유리가 그곳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모든 관계자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특히 모델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디자이너님, 오랜만이에요.”
“사고가 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사방에서 몰려든 선남, 선녀들에 뒤섞인 김유리를 보자 이지존은 그녀가 쌓은 패션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 김유리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나무처럼 서 있는 그를 본 한 모델이 물었다.
“어머, 이쪽은 누구예요?”
그와 동시에 모든 모델의 시선이 이지존을 향했다.
그들의 눈초리는 상당히 매서웠다.
그들은 프로 중의 프로.
이지존이 입은 옷이 아니어도 일반인이 아닌, 그들과 같은 모델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김유리와 함께 들어온 자.
견제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사해. 이지존이라고. 앞으로 나와 쭉 같이 일할 모델이야.”
“네?”
그녀의 소개에 모두의 입이 턱 벌어졌다.
그건 모델뿐만이 아니었다.
스태프들까지도 같은 반응이었다.
시끄럽던 장내가 일순간 태풍의 중심부에 들어온 듯 고요해졌다.
“설마, 전속 모델은 아니겠죠?”
“맞아요.”
6화.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
“나도 그렇게 들었어.”
“디자이너님?”
이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김유리의 무대는 지금껏 그 어떤 모델도 겹쳐서 출연한 적이 없었다.
매번 다른 모델들로 구성되었던 것.
그렇기에 그녀는 모델과 친분을 유지하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그 때문에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디자이너로 유명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주최한 런웨이에선 언제나 톱스타가 탄생했기에 지금은 톱스타로 이어지는 약속된 길목이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나와 계속 함께 할 테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그런 김유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업계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놀라는 건 알겠지만, 이제 내 브랜드의 얼굴을 가질 때도 된 것 같아서요. 다들 인사하세요.”
김유리는 이지존에게 다가간 후 어깨동무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그 순간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해일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전 처음부터 모델인 줄 알았어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지 집중됐다.
평생 이런 기회가 없었던 이지존으로서는 쉽게 적응하기 힘든 상황.
그러나 지금껏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서며 누구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간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런웨이에 처음 서보는 신인이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지존은 온화한 미소와 공손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주변인들 모두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했다.
동시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
이 침묵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보통 이쪽 계열에서 일하는 자들은 자존감이 상당히 높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전 세계에서 내놓으라 할 모델 사이에서 자신을 뽐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지존은 완전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높인다?
자신을 높이고 또 높이며 상대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든 이 건방진 신인의 단점을 찾아내려 했던 그들이 이지존의 진심이 담긴 한 번의 인사로 마음이 뒤집어졌다.
“…… 어. 저도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요.”
“런웨이 처음이면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와, 그래도 되나요?”
냉철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오랜 가족처럼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스스로 말이다.
이건 김유리에게도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이렇게 자존심 높은 자들과 순식간에 친해지더니.’
그때부터 그녀의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휴, 디자이너님이 웃었어.”
“와! 정말이야!”
그걸 본 현장 스태프들의 표정도 환해졌다.
사실, 그때 김유리의 외침이 귀에 귀를 거쳐 이상한 소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저 웃음은 모두의 마음속에 담겨있던 유언비어를 한 방에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자! 여러분, 이제 최종 리허설만 남았습니다. 빠르게 처리하고 우리의 멋진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릴 준비에 들어가죠. 가능한가요?”
“그럼요!”
순식간에 끓어오른 열기.
이 강렬한 에너지는 리허설을 넘어 DDP 전체를 휘감더니 패션쇼 현장까지 이어졌다.
***
두! 두! 두!
웅장한 북은 하늘을 떠다니는 묵직한 구름.
띵! 띠디~!
아름다운 가야금은 자유로운 새들.
후~ 우웅!
깊은 울림의 대금은 이 모든 것을 이끌며 하늘에서 흐르는 바람.
모든 것들이 차례대로 등장 후.
착! 착! 착!
시커먼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빛기둥이 무대를 밝힘과 동시에 그들이 등장했다.
하늘을 상징하는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옷을 입은 모델들이 가볍게 혹은 힘차게 혹은 뚜렷하게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조명을 파고들며 런웨이를 가로질렀다.
“와!”
“미쳤다!”
사람들의 감탄이 쏟아져나왔다.
이 정도는 늘 있으니 넘어가도 좋았다.
하지만 패션업계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콜럼버스가 찾지 못한 황금의 대륙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어쩜 저리 아름다울까.”
“아름다운 건 많아. 하지만 신비로움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은 드물지.”
모델들의 자유로운 워킹이 빛을 가득 안고 분위기를 점점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를 증명하듯 푸른 하늘에서 노란빛이 흘러나오더니 서서히 붉은 기운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와, 다들 잘한다.’
반면 백스테이지에 있는 이지존은 점점 다가오는 차례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꿈으로도 다가가지 못한 무대가 코앞에 펼쳐진다면 아마 그 누구도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호흡해 봐.”
어느새 옆구리에 바짝 다가온 김유리.
깜짝 놀랄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안심하며 그녀의 말대로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 후우.”
“긴장할 것 없어. 아까처럼 해.”
“그렇게 말해도 전혀 도움이 안 돼.”
이지존의 말에 김유리가 살며시 웃었다.
“옷은 너의 마음이야. 네가 긴장하면 옷도 움츠러들어. 봐봐.”
그녀의 말대로였다.
한껏 이쁘게 다듬었던 옷이 불독의 볼때기처럼 잔뜩 주름져있었다.
“처음인 데다, 마지막 주자여서 어쩔 수가 없다고.”
김유리는 그의 귀여운 투정을 들으며 프로다운 손길로 옷가지를 이리저리 다듬어주기 시작했다.
“내가 이 옷의 컨셉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밤하늘과 새벽의 빛. 길고 긴 겨울밤의 어둠을 뚫고 떠오른 태양에 의해 펼쳐지는 하늘이 가진 장엄함과 변화를 표현한 거라고 했고.”
“워워. 그걸 다 기억하는 거야? 너 머리 좋구나?”
김유리는 마지막 주름을 없애면서 말을 이었다.
“봉황.”
“음? 봉황?”
“이 옷의 컨셉은 봉황에서 따왔어. 새들의 왕이자 조선시대 왕의 상징. 그리고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
이지존은 입은 옷을 다시 살폈다.
하늘대는 긴 소매.
기다란 로브 자락.
앞이 트이고 꼬리가 긴 곤룡포 같은 디자인.
왜 달려있는지 모를 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게 되니, 이 옷을 만든 그녀의 마음과 이 옷을 입은 그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자 신기할 정도로 긴장감이 사라졌다.
“이제 좀 웃네.”
“고마워.”
김유리는 이지존의 등을 두드리며 그와 같이 나란히 서서 런웨이를 바라봤다.
“저 빛까지 너의 색으로 물들여봐. 망쳐도 돼. 책임은 내가 지니까, 넌 마음껏 놀다 오면 된다고.”
이지존은 점점 붉게 물드는 런웨이와 온통 검게 칠해진 관객석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둠까지 물들이고 올게.”
그의 굳게 붙어있던 발바닥이 어둠이 깔린 땅에서 떨어져 빛을 향해 전진했다.
김유리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지존의 등을 살며시 밀어주며.
“Bon voyage(즐거운 여행이 되길).”
세계 최고 디자이너의 응원.
상상도 못 했던 꿈같은 현실이 펼쳐진 이곳에서 받은 그녀의 메시지.
이는 그에게 얼마나 강렬한 힘을 주었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대신, 그 모든 것은 행동으로 드러났다.
덩! 덩! 덩! 더쿵더!
피날레를 알리는 자진모리장단 북소리.
그 웅장함을 등에 업고 나타난 이지존.
하지만 관객은 그를 자세히 볼 틈이 없었다.
이미 패션쇼장은 저무는 태양의 연출과 함께 어둠이 내리깔리며 잔잔한 붉은빛으로 물든 상태.
그렇기에 그가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든 조명이 눈을 닫으며 자취를 감춰버려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사고인지 아니면 연출인지 모를 아리송한 상황에 관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너무 어두운 거 같은데.”
확실히 리허설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거기에 다른 곳에 비해 높이 설치된 무대.
이 때문에 모델들도 수군거렸다.
“사고 나는 거 아냐?”
“걷다 떨어지면 어떡해.”
하지만, 이지존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만든 길이야. 눈을 가리고 걸으라고 해도 걸을 수 있어.’
그리고 또렷한 눈빛보다 보일 듯 말 듯한 별들로 채워진 이곳이 지금, 이지존에겐 훨씬 부담도 덜 했다.
무의식 가득히 차 있던 압박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가자!’
그는 방금 달에 도착한 아폴로 11호에서 내린 닐 암스트롱처럼 통통 튀면서도 힘찬 걸음으로 런웨이를 장악했다.
마치 새 신을 신은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와!”
“어머!”
“미쳤다!”
빛을 내는 이지존의 옷.
처음엔 태양 빛을 흡수한 달빛처럼 은은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었다면.
런웨이 끝을 향해 갈수록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의 심장에서 시작된 붉은빛이 소매, 옷자락 끝까지 뻗어나갔다.
“오오오~!”
“우와아~!”
관객과 패션 업계인들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지르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지존이 런웨이 끝에서 포즈를 잡는 순간.
저물었던 태양이 떠오르며.
그들의 눈앞엔 더는 평범한 모델은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관객과 패션 업계인들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지르며 탄복했다.
붉은빛이 타고 흐르는 옷깃.
그곳에서 피어오른 노오란 황금의 점들이 금루를 따라 선을 그려나갔다.
점과 점, 선과 선.
이 2차원적 형태의 단순함.
하지만 이것들이 살아있는 이지존과 함께 움직이자, 이는 4차원을 넘어 5차원을 눈앞에서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는 누군가에겐 피닉스요.
저는 누군가에겐 불사조요.
그는 누군가에겐 봉황이었으니.
아마 오늘 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오늘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네 어머니가 옳았어. 이지존. 네가 모델로 데뷔한 오늘은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날로 기억될 거야.’
완벽한 무대를 선보인 이지존을 본 김유리는 너무 감탄한 나머지 그녀도 박수 치기 시작했다.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이지존의 무대에 매료된 나머지 그녀의 행동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촤르륵!
모든 눈이 집중된 그때, 이지존이 뒤돌았다.
처음과는 비교 못할 자신감 넘치는 원심력.
이는 또 다른 장관을 펼쳐냈다.
그 힘에 펄럭이는 옷자락은 마치 부드러운 봉황의 꽁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흥겹고 힘찬 그의 걸음.
그에 맞춰 사뿐대며 출렁이는 붉은 깃털.
동시에 이지존을 따라 움직이는 조명들.
“휘이익!”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약속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펼쳐졌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무대 밖에서, 무대 안에서, 무대 너머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훌륭한 런웨이를 선보인 이지존을 향한 감사와 새로운 스타 탄생의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이지존은 이 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아쉽게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지존이라도 신인은 신인.
런웨이를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그는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숨을 뱉어냈다.
“후우!”
“여행 어땠어?”
김유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사실, 오자마자 그녀에게 따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멈추지 않는 고동.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호.
이지존은 이제 완전한 모델이 되어 있었다.
“최고였어!”
“그럼, 누가 만든 옷인데.”
그녀는 숨을 고르는 이지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갈까?”
이 모든 환호가 이지존을 향해 있다고 해도 이 패션쇼의 주인공은 결국, 김유리.
“가야지. 넌 나의 보스니까.”
그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보스긴, 동업자지.”
7화.
“동업자, 그래. 맞아.”
이지존은 웃으며 김유리와 손을 잡았다.
둘은 동시에 런웨이로 나갔다.
참여한 모든 모델과 관중들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둘을 보며 환호했다.
“와아아!”
“김유리 최고!”
“너무 멋졌어요!”
김유리를 런웨이 가운데에 두고 모든 모델이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그녀의 옆자리를 단독으로 차지한 자는 이지존.
관중들도.
업계인들도.
그를 알아보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모두가 한마음으로 즐긴 패션쇼는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했어요.”
백스테이지에 모인 스태프들과 모델들의 인사를 받은 김유리.
이제 완전히 행사가 정리되던 그때.
모두의 용기를 끌어안은 한 모델이 김유리에게 살금살금 접근했다.
“김유리 디자이너님.”
“네?”
“혹시, 바쁘신가요?”
어떤 뜻인지 김유리는 단번에 알았다.
그녀는 쇼가 끝나는 대로 들어가 쉬는 걸로 유명했다.
그래서 모델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하나의 게임이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뒤풀이 파티에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자들이 실패해 지금 쌓인 상금이 4천만 원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이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지 모두 주목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오늘은 미팅이 있어서.”
“아쉽네요.”
“다들 재밌게 노세요.”
하지만 용기 있는 모델은 타겟을 바꿨다.
바로 그녀의 전속 모델이 된 이지존에게 말이다.
“이지존씨. 바쁘세요?”
“아니요. 이제 집에 가야죠.”
“그럼, 저희랑 놀러 가실래요?”
“놀러요? 지금요?”
“쇼가 끝나면 항상 같이 모여서 놀거든요.”
“쉽게 말하면 뒤풀이 파티랄까?”
파티.
지금껏 단어로만 알고 있던 파티.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그의 인생에선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파티.
“오! 그럼!”
이라고 말이 나옴과 동시에.
이지존은 등 뒤에서 밀려오는 살기를 감지하곤 화들짝 놀라 확인했다.
거기엔 김유리가 눈에 독기를 품은 채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참, 나 계약서 써야 한다.”
“계약서요?”
“네, 아직 서명을 안 해서요.”
“계약…. 아!”
모두 이해한 듯 안타깝다는 탄식과 함께 저 멀리 사라졌다.
“다행히 눈치는 빠르네.”
“또 해야 할 일이 있어?”
“허허, 이거 벌써 긴장이 풀렸네.”
눈을 날카롭게 뜬 김유리가 이지존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귀를 쫙 잡아당기고는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부업이 끝났지, 본업은 아직 남았잖아. 날개옷 찾아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이지존은 시간을 확인했다.
[AM 01:00]
“너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이제 내 밑에 들어온 이상, 쉴 시간은 없어. 각오하는 게 좋아.”
***
이지존은 김유리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에 들어선 순간.
이지존의 미간이 눈과 함께 슬쩍 좁아졌다.
“악귀를 찾으러 간다며, 서낭당엔 온 거야?”
“다른 옷으로 갈아입게. 지금, 이 옷으론 중급을 상대하긴 힘들어.”
그녀의 말에 이지존이 되물었다.
“악귀도 계급이 있어?”
“나도 그쪽은 잘 몰라. 천계에서 배울 때 대충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어. 하급은 신체 능력만 좋지, 특별한 건 없어. 그래서 독을 써서 인간을 마비시킨 후 영혼을 빨아들이지. 먹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
그녀는 신단수의 입구를 열며 말을 이었다.
“중급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독이 없지. 대신 인간을 압도하는 육체. 거기에 환술, 현혹 등 여러 술법을 사용해 까다로운 공격을 해대니 그에 맞는 대비책이 필요한 거라고.”
“그래서 그에 맞는 날개옷을 이렇게나 많이 개발한 거구나.”
“그렇지.”
“그럼, 난? 난 왜 하나야?”
날개옷을 살피는 김유리에게 이지존이 따지듯 물었다.
“네 건 천계에서 만든 거라 한 개면 충분해. 그리고 그 옷은 지금 네 몸에 있고.”
그녀는 어린아이의 투정을 보듯 흘겨 넘기며 내려오기 전에 스태프에게 받은 그의 옷을 넘겨줬다.
“그러니 그건 이제 벗어도 돼.”
탈의실로 들어간 이지존을 뒤로하고 그녀는 계속 날개옷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한 작품에서 멈춰 섰다.
“보름달이 뜬 밤이니 오늘은 이게 좋겠어.”
그녀가 선택한 옷은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조명을 받으니 그 진가가 드러났다.
상의를 수놓은 구름결의 은빛 자수가 시냇물처럼 깃을 따라 잔잔히 흐르기 시작한 것.
옛 선녀의 우아함과 오늘날 현대인의 자유로움이 하나가 된 듯한 디자인.
“와, 이쁘다.”
탈의실에서 나오며 감탄하는 이지존은 그녀가 왜 이 옷을 골랐는지 궁금했다.
“옷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어?”
“기준? 아니, 그냥 감각적으로 하는데.”
“아니, 악귀를 상대하러 가면서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고?”
“여자의 감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말은 이지존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김유리는 그걸 해낸 자.
보통의 머리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이 자리에 올라온 자였다.
‘선녀라서 그런가? 확실히 뭔가 다르긴 하다.’
탈의실에 들어간 김유리는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거울 앞에서 포즈까지 취했다.
“와, 잘 어울리는데?”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김유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 패션쇼를 끝낸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 피곤해?”
“당연하지, 사람도 구하고 내 날개옷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지도 모르는데.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고.”
“하하, 정말 대단하다.”
이지존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도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정도였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김유리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지금껏 두 가지 일을 유지한 것도 모자라 한쪽에서 정점을 찍은 그녀의 노력.
이지존은 김유리에 대해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제 차고로 가자.”
“차고? 하하, 배트모빌이라도 있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이 돈을 왜 벌었는데.”
“…… 농담이지?”
“아니, 진담인데?”
거침없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
그곳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김유리가 발을 디디기 무섭게 천장에서 푸른빛이 그녀를 감싸더니.
<어서 오세요. 김유리 선녀님.>
라며 AI 음성과 함께 어둠이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오, 나의, 신이시여.”
이지존의 감탄이 메아리 되어 퍼져 나왔다.
거목이 있는 방보다 몇 배나 더 놀란 반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거긴 한국의 패션 디자인 감각이 도드라지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깊은 동굴 속 석굴암의 부처상이 로봇으로 변해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공간이었다.
“확실히 남자는 남자네. 이쪽에 더 반응이 좋은 걸 보면.”
김유리는 환하게 웃으며 어디로 걸어갔다.
그곳엔 최신형부터 클래식한 차들이 오와 열을 맞춰 박물관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또다시 그의 탄성이 메아리가 되었다.
“우와!”
“오늘은 이걸 탈 거야.”
은빛 광택을 내뿜는 SUV.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 알고 있던 차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이것도 특별한 기능이 있는 거야?”
“그런 건 없어. 대신 내부 디자인은 전부 내가 특별 주문한 거지. 나만의 특별 에디션이라고나 할까?”
“와, 진짜 멋지다. 대단하구나. 너.”
몇 번이나 감탄하며 조수석에 앉는 이지존.
새침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는 김유리.
그가 안전 벨트를 매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입꼬리를 씩 올라갔다.
“좋아. 출동이다.”
***
한편, 보름달이 비추는 서울의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센터 등 주요 시설과 여러 기업이 위치한 곳.
그곳에서 가장 기이한 그리고 기괴한 외형의 회사 사옥이 보름달을 가린 채 서 있다.
그곳의 가장 높은 보안 등급의 가장 은밀한 방에서 한 남자가 소리쳤다.
“저건 또 뭐야?”
F/W 서울패션위크의 패션쇼 현장을 실시간 영상을 보던 한 남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화면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바로 이지존의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아니! 도대체 저게 뭐냐고!”
그는 전 세계 최고의 패션 브랜드.
귀무(鬼舞)의 회장, 하용오였다.
얼마나 놀랐으면 아리따운 여성에게 따라주던 로얄 샬로트의 52년 타임시리즈 싱글 캐스크 피니시가 잔에 넘치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에이, 아깝게.”
여자는 서둘러 잔을 바꿨다.
그러나 식탁보는 이미 호수가 되어버렸다.
“귀한 술이라며.”
여성의 말에 하용오는 여전히 화면을 보며 말을 받았다.
“귀한 건 이것뿐이 아니니까. 다른 게 필요하면 말만 하라고.”
여성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밖에 뜬 보름달보다 더 고혹적인 미소가 떠오르자,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옛날엔 이게 뭔지도 몰랐지.”
여성은 넘치기 직전인 잔을 들어 올리곤 아슬아슬한 표면장력 안에 달빛을 담았다.
“하지만 인간의 과학으로 많은 것들이 증명됐어. 과학의 발달이 우리를 괴롭힐 줄 알았는데 오히려 커다란 도움이 될 줄이야.”
여성은 깔끔하게 원샷으로 비웠다.
이어 요상한 드레스(팔 없는 쓰개치마와 파티용 이브닝드레스의 디자인을 합친)를 들척이며 다리를 꼬았다.
“내가 말했잖아. 과거랑 비교도 안 된다고. AI까지 나온 이상 이제 곧 날개옷의 비밀이 밝혀질 거야.”
하용오는 표면장력이 유지 중인 남은 잔을 힘차게 들며 균형을 파괴, 이후 질질 흐르는 위스키를 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혈화(血花)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음? 뭔데?”
“여름 신상품과 날개옷 때문에 신경을 못 쓰는 동안, 몇몇 악귀가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말이야. 최근에 현세로 통하는 문이 열려 흥분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제품 나올 때까지는 조심했으면 해서.”
말을 끝낸 하용오는 조심스럽게 혈화의 눈치를 살폈다.
악귀의 왕, 귀마의 총애를 받는 하용오.
하지만 혈화는 녀석의 직속 부하인 칠흉사자(七凶使者) 중 하나였기에 신분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해결하지. 그보다 넌 날개옷 분석에 모든 힘을 쏟기나 해. 이번 신상품도 우리가 잘 해결해 줄 테니까.”
다행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쳐졌던 하용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역시, 혈화야. 말이 너무 잘 통해.”
“호호호, 내가 다른 놈들과는 조금 다르긴 해.”
웃음소리가 인간처럼 들렸다.
지금 혈화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최적이었다.
“준비됐어?”
“뭘?”
혈화는 시치미 떼듯 되물었다.
그러나 녀석의 탐욕은 숨길 수 없었다.
파블로프의 개 마냥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후후, 이거 의도치 않게 서프라이즈가 된건가?”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일까?”
그녀의 이름만큼 점점 시뻘게지는 눈동자를 보며 하용오는 간신배처럼 실실 웃었다.
그리곤 두꺼운 시멘트벽 앞에 서서.
띠! 띠! 띠! 띠!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치이이익.
상스러운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그 안에는 비싼 무광택 검정 대리석으로 도배된 화장실인지 샤워장인지 알 수 없는 8평 정도 되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사지가 포박된 한 소년도 함께.
“최근에 큰놈들만 먹었다며? 너 정도 되는 악귀가 그래면 되겠어? 어렵게 구한 거야.”
그 아이를 본 순간.
미모의 얼굴을 유지하던 혈화의 얼굴에 검은 선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 그곳에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변하기 시작한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흐흐흐, 이거 얼마 만이야.”
어여쁜 여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끔찍한 웃음.
“저 녀석을 먹으면 한 달은 거뜬하지?”
“히히히, 글쎄 그건 가봐야 알겠지.”
혈화는 하용오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아이가 묶여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그도 별 반응 없이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하여간 저놈들 취향은 알아줘야 해. 어린애를 먹을수록 현세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건 대체 뭐람.”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하용오는 툴툴거리며 젖은 테이블 시트를 빼다가 쓰레기통에 때려 박았다.
그리곤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쟨 미래에서 온 거야? 어떻게 저런 옷을 디자인할 수 있지?”
압도적인 패션쇼였다.
그는 또다시 화가 끓어올랐다.
그런 그때 한 모델이 눈에 들어왔다.
“음?”
하용오의 눈썹이 사르르 떨렸다.
눈썹이 멈춘 그때.
그는 이미 내선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어, 나다. 지금 DDP 패션쇼, 어. 김유리 옆에 있는 남자 모델. 누군지 당장 알아봐. 우리 여름 신상품 모델로 완전 딱이니까.”
8화.
부와앙!
폭풍이 몰려오는 소리를 내뿜으며 이지존과 김유리를 태운 차가 DDP로 연결된 터널을 질주했다.
“조심히 좀 몰아!”
이지존의 투정에도 아랑곳없이 김유리는 DDP의 지하를 뚫고 나오기 무섭게 도심을 질주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악귀가 나타난 신호라도 온 거야?”
“그건 아니고.”
차량 이곳저곳을 살피며 신호를 찾는 이지존에 김유리는 안심하라며 다독였다.
“아까 우릴 공격한 그 녀석의 옷 기억나?”
“서울시 청소부분들이 입는 옷이었잖아.”
“청소부는 각자 맡은 지역이 있어. 그리고 그 위치는 옷에 적혀있지. 서울특별시 중구청 그리고─”
“을지로.”
“맞아.”
김유리의 표정이 엄숙히 변했다.
그에 맞춰 이지존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을지로.
1970년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 상가가 서울의 랜드마크로 들어서며 인파가 몰렸던 곳이다.
지금도 여전히 골목길에 인쇄소, 조명 가게, 공구상 등이 아기자기한 가게가 모여 서울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중 하나다.
그런 특색 덕에 ‘힙지로’라는 별명이 붙으며 젊은이들,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
“위치도 그리 가깝지 않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녀석이 이곳에 온 게 우연이 아닐 거야.”
이지존의 생각에 동의한 김유리.
둘은 텅 빈 도심의 도로를 달려 나갔다.
기업이 몰린 중구는 당연한 상황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오랜 시간 지상을 살피며 100년 넘게 살아온 김유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밝게 뜬 보름달 뒤편에 확실히 숨어 있었다.
***
을지로에 도착한 그들.
하지만, 이 넓은 곳을 어디에서부터 수색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 그때 이지존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멈춰!”
그의 다급한 외침에 김유리가 쏜살같이 반응.
끼이익!
급제동과 함께 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반짝이는 은빛 SUV가 멈춰 섰다.
“왜 그래? 악귀라도 본 거야?”
“아니,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걸 봤어.”
“뭔데?”
궁금했던 김유리도 그를 따라 쳐다봤다.
그곳은 두 가게 사이의 어느 좁은 골목길.
하지만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일반적인 골목길이잖아.”
“그래서 이상해. 여긴 을지로 인쇄거리잖아?”
“그건 나도 알아.”
“DDP 무대 설치하면서 뒤풀이로 여기 술집에 자주 와서 잘 안다고. 그런데 지금껏 이 근처를 지나다녔지만, 이 두 가게 사이에 길은 없었어.”
그의 말에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지존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특정 조건과 시간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들어가면 영영 돌아올 수 없다는 도시 전설. 들어봤어?”
“선녀인 내게 그런 괴담이 통할 것 같아?”
“하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그게 전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김유리와 이지존은 동시에 안전 벨트를 풀었다.
탁! 탁!
운전석과 보조석의 문이 열렸다.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남녀가 내렸다.
평소 을지로에선 보기 힘든 패션.
한 명은 누가 봐도 패션 피플.
한 명은 누가 봐도 일용직 노동자.
이 언벨런스한 두 남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란히 서서 어둠이 깔린 좁고 좁은 을지로 골뱅이 골목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정적을 깬 건 이지존이었다.
“아까 악귀를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어.”
“이 좁은 데서 악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해?”
그는 매우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을지로의 옛 서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좁은 골목.
거기다가 지금 그들이 앞에 펼쳐진 골목은 두 사람이 지날 때 서로 어깨를 틀어야 하는 사람 냄새 진한 골목이었다.
“이건 말론 힘들지.”
김유리는 눈썹을 바짝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며 움직였다.
“조심히 따라오라고.”
그렇게 말하며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론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런 걸 하나하나 정리할 정도로 내 인생은 한가하지 않았거든. 알아서 눈치껏 배우라고.”
김유리 두 손가락이 그녀의 두 눈과 이지존의 두 눈을 번갈아 오갔다.
“그런 건 눈치껏 배울 것도 없이 네 머리 너머로도 충분히 잘 보인다고.”
앞서가는 김유리를 바짝 쫓은 이지존은 큰 키를 이용해 미로처럼 얽힌 길을 살폈다.
고개를 틀어 그의 높이 솟은 머리를 확인한 김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왠지 모르게 기분은 나쁘지만, 뭐. 좋아.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본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녀의 말과 동시에 비좁은 골목길에서 4명이 걸어갈 정도로 넓어진 골목길이 펼쳐졌다.
그곳은 불 꺼진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곳.
손님맞이를 위해 문을 열고 있어야 할 술집과 여러 가게가 전부 문을 닫고 있었다.
“금요일인데 너무 조용해.”
이지존은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차디찬 철문을 장식한 그래비티.
어린 시절 그려봤을 법한 벽화.
붓글씨 같은 폰트의 간판.
운동회 때 보던 만국기.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저것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하지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애초에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이질감은 하늘에 확연히 표시되어 있었다.
“흠, 김유리. 네가 아까 멀리 보라고 했잖아?”
“그렇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뭐가 나타났어?”
“아니, 오히려 사라졌어. 분명 저기 보름달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아.”
“달이 없어졌다고?”
긴장감이 극도로 오른 그때.
이지존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솟아올랐다.
“음?”
“너도 들었어?”
이지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노랫소리였다.
둘은 조심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처음엔 반갑고도 동시에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동하면 할수록 처음 느꼈던 이질감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랫소리가 커지지 않아.’
그러자 어느새 이지존의 마음 한쪽엔 두려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김유리도 마찬가지.
‘이건 현세의 어둠이 아니야. 명계의 어둠이다. 최근에 놈들이 창궐하는 이유가 이거였어. 현세를 명계의 어둠으로 물들이려는 이유가 뭘까.’
둘은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도착한 홀로 불 밝힌 가게.
꺾어진 모퉁이에서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자, 여러 젊은이로 보이는 무리가 술집으로 보이는 가게 앞에서 놀고 있었다.
모두 DDP에서 만난 악귀처럼 청소부 옷, 눈에서는 붉은 안광을 뿜고 있었다.
‘악귀다!’
말도 없었다.
하지만 둘은 오랫동안 같이 생활한 병사처럼 동시에 서로 얼굴을 맞대곤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할 거야?’
‘마침, 잘 됐어. 저놈들 전부 현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하급이거든.’
굳어있던 김유리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당당히 모퉁이에서 벗어나 일자로 뻗은 놈들의 가게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수업 시작이다.”
“뭐? 상대는 3마리인데?”
“하급 3마리는 껌이지. 잘 보고 있으라고.”
이지존과 김유리의 대화를 들은 악귀들의 고개가 동시에 틀어졌다.
어떤 놈은 부엉이처럼 180도로 돌아가는 녀석도 있었다.
“음?”
“저놈들은 뭐야.”
“처음 보는 놈들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인의 등장에 놈들은 경계보단 어수선한 분위기로 김유리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뭔데 이리 시끄러워?”
안에서 한 놈이 나온 것이다.
“이제 4마린데?”
“훗, 저 정도는 예상했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도끼를 든 두 녀석이 더 등장한 것.
“뭔데?”
“어떤 녀석이 시끄럽게 떠들어?”
순식간에 3에서 6으로 불어나는 마법.
2배로 불어난 놈들 앞에서 김유리도 부담감을 느꼈던 걸까?
당당히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주춤대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이지존이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아직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는 그였지만, 이건 너무나 당연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김유리의 자존심을 건드는 행동이었다.
“흐흠! 어딜 학생이 건방지게. 잘 보고 배우라고.”
라고 답하고는.
“이봐, 악귀놈들! 도망갈 생각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라고 말하며 손과 목을 풀며 멈췄던 걸음을 이어 나갔다.
“말하는 꼴을 보니 우연히 들어온 것 같지는 않군.”
“퇴마사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군.”
저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악귀들은 숨겨놨던 송곳니와 손톱을 드러내며 붉은 안광을 뿜어냈다.
“전투태세 돌입인가? 그럼 나도 들어가야겠지?”
김유리는 두 팔을 교차하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양손에서 잔잔한 별이 파도치며 선을 이어 나갔다.
아름다운 빛의 선은 곧 특별한 형태로 변했다.
“부채?”
일반적인 접이식 부채와는 달랐다.
하나는 푸른 살에 매화와 난초가.
하나는 붉은 살에 국화와 대나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강렬한 수묵화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건 어디서 나온 거야?”
“옷은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고 했지? 지금 넌 천의를 입고 있어. 네가 싸우고자 하면 천의가 그에 응답할 거야.”
“응답이라.”
이지존은 그녀의 말대로 해봤다.
당연히 반응은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악귀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이거 초짜들이었잖아?”
김유리의 재주에 살짝 긴장했던 악귀들.
그런데 이지존의 말과 행동을 들으니 지금 상황에 어떤지 대충 알게 된 것이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었군.”
“정신 나간 인간은 악귀도 피한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우린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그런 녀석들의 비웃음에 김유리의 눈매가 가늘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서?”
“편식은 사치란 말이지. 흐흐흐흐.”
마지막으로 가장 흉악하게 입꼬리를 꼼지락대던 악귀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라고 외친 녀석은 김유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녀석은 김유리 앞에 도착해있었다.
그 움직임에 이지존은 깜짝 놀랐다.
‘빠르다!’
DDP에서 만났던 놈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건 김유리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여긴 놈들의 홈그라운드라 이건가?’
자신의 속도에 반응도 못 하는 그녀 앞에서 악귀는 신이 나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으헤헤헤!”
날카로운 손톱이 가게에서 뿜어지는 네온사인을 반사하며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김유리의 눈동자가.
휘이익.
뿌옇게 펼쳐졌다.
“어?”
악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김유리가 서 있던 자리엔 그녀는 보이지 않고 뿌연 연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구름의 장막]
악귀는 눈앞에서 사라진 김유리를 확인하기 위해 손톱을 줄이고 떠다니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구름?”
연기의 정체를 알기 무섭게.
슥!
선명한 푸른 선과 붉은 선.
두 선이 녀석의 몸통을 교차했다.
그와 동시에 악귀의 얼굴은 얼어붙으며.
사르르!
시커먼 먼지가 되어 진한 백색 구름 안에 스며들었다.
여유로웠던 5마리의 악귀의 표정이 그 장면을 본 순간 전부 굳어졌다.
“저 녀석!”
“확실해. 도술이야.”
“도술을 쓰는 퇴마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저놈이었군.”
놈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 이 정도의 도술이면 하급은 도망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전투태세를 준비했다.
“네가 도술을 쓴다 해도 여긴 명계나 다름없는 곳.”
“우리가 동시에 덤비면 너에겐 승산은 없다.”
“과연 그럴까?”
김유리의 돌발에 5마리의 악귀가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적이 너무 많아. 나도 도와줘야 해.’
그것을 본 이지존은 김유리의 싸움에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주물럭대는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땀도 나지 않았다.
‘흠, 내 의지가 부족한가?’
싸우고자 하는 의지.
김유리에겐 그 이유가 확실했다.
그녀의 실수로 빼앗긴 날개옷을 되찾고 귀마가 하려는 짓을 막아야 했으니까.
반면, 이지존에겐 그 의지가 있는 걸까?
당연히 있었다.
날개옷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
하지만 이 명분은 김유리와는 달랐다.
그녀는 날개옷을 찾아 악귀의 횡포를 막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명분은 동기가 될 순 있었다.
하지만 의지가 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지존은 어떠한 의지로 악귀들과 싸워야 할까?
‘확실한 결심 같은 게 필요하려나.’
그는 천의의 부름을 얻고자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찾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의 적, 악귀는 인내심이 많은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네놈도 있었지.”
그의 뒤에서 시퍼런 도끼로 땅을 찍는 소리와 함께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진 녀석의 말에선 섬뜩함이 느껴졌다.
“너부터 죽여주마.”
9화.
“흐흐흐흐.”
심상치 않은 소리를 따라 빠르게 고개를 돌린 이지존.
악귀를 본 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저기 있는 놈들과 비교도 안 되는 덩치의 악귀가 흉악한 두 쌍의 도끼를 각각의 손에 쥐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이지존!”
4마리의 악귀와 싸우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김유리가 외쳤지만, 그녀는 이지존을 도울 상황이 아니었다.
“잘 가라.”
녀석의 통나무 같은 팔이 올라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도끼날이 수직으로 급하강했다.
목표는 이지존의 머리.
쾅!
머리를 내리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기뻐했다.
“크크크크, 몸이 반으로 쪼개져 버렸군.”
그런 녀석의 옆에서 누군가 호응해 줬다.
“후, 아슬아슬했어. 못 피했으면 그렇게 됐을 거야.”
“그렇지?”
악귀는 당연히 그들 패거린 줄 알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녀석은 고개를 휙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그런 그를 이지존이 멀뚱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 녀석, 어떻게 피한 거지?”
“그건 나도 몰라.”
놀리는 것 같겠지만, 사실이었다.
이지존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뭐, 내 착각이겠지. 아니면 네가 느리던가.”
“뭐! 인간 주제에 감히!”
긴가민가하는 이지존에게 악귀가 성을 내며 소리쳤다.
“이번엔 확실히 머리통을 쪼개버리겠다!”
힘찬 고함과 함께 팔에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를 정도로 힘껏 휘두른 녀석.
휘이익!
녀석의 빠르고 강한 움직임에 김유리가 퍼뜨린 구름의 장막이 일부 물러갈 정도.
하지만 이번에도 놈의 공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뭐라고?”
그의 움직임을 아슬아슬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며 지켜보는 김유리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빨라졌어. 천의를 입어서 그런 걸까? 그건 아니야. 그랬다면 천의의 반응이 있어야 해. 도대체 뭐에 작용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가득 찬 그녀의 머릿속 상황을 악귀가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저놈보다 네가 먼저 죽게 생겼구나!”
어느새 뒤를 잡은 여성 악귀가 낫처럼 굽은 손톱으로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휙.
손톱이 두부 썰 듯 목을 베었다.
얼마나 예하던지 걸리는 소리 없이 깔끔하게 훑고 지나갔다.
“흐흐흐흐, 다음은━”
여성 악귀는 이 말과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김유리의 목 잘린 몸통은 구름으로 변해 뭉게뭉게 퍼져나갔다.
[구름 분신술]
그 광경을 본 남은 3마리의 악귀 움직임이 잠깐 멈춰 섰다.
순간 바로 달려들까, 생각했지만, 아직은 신중해야 했다.
이지존의 습격을 보고 마음이 살짝 급해졌었지만, 다행히 이지존의 움직임을 본 후, 마음이 안정됐다.
‘이지존을 믿고 차분히 하나씩 쓰러뜨린다.’
그녀와 반대로 아직도 초짜하나 처리 못하는 동려 악귀를 보며 놈들은 위아래로 뻗은 송곳니가 부딪혔다.
바드득!
입 밖으로 튀는 불똥에 김유리는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속으로 몸을 굽히며 찬물을 끼얹었다.
“자, 다음.”
“이년이!”
다시 구름을 휘저으며 김유리가 놈들을 상대하던 그때.
그녀의 믿음대로 이지존은 덩치 큰 악귀의 공격을 계속해서 사뿐히 피하고 있었다.
물론 피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빠른 움직임을 이용해 공격했다.
“핫!”
지금 보는 것처럼 주먹도 날리고.
“헛!”
연속해서 발차기도 하고.
“흐앗!”
힘껏 박치기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DDP에서도 타격만 있을 뿐이었던 악귀보다 훨씬 덩치 큰 녀석이었다.
오히려 효과를 바라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이지존은 끊임없이 녀석을 건드렸고, 그의 공격은 의외의 부분에 효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으으으으! 짜증 나!”
자꾸 빗나가는 공격도 짜증이 났는데 모기처럼 툭툭 건드는 이지존 때문에 상대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이다.
“모기 같은 녀석!”
녀석은 또다시 잽을 날리며 도망가는 이지존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곧게 뻗지 않고 ‘ㄱ’처럼 팔이 등으로 꺾인 것이다.
그리고 신경을 건드는 쇳소리와 함께.
“흐아아아!”
녀석의 팔이 빠르게 이지존을 향해 뻗었다.
휘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안에서 시퍼런 도끼가 몸을 숨기며, 이지존의 미간을 향해 날아 왔다.
퍽!
이것이 악귀가 원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음정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척.
퍼즐과 퍼즐.
기어와 기어.
혹은 자석의 N극과 S극이 만나듯 뭔가가 찰떡처럼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오호, 이걸 잡을 수 있었네.”
본능적으로 내밀은 손에 잡힌 도끼를 보며 이지존은 놀라워하고 있었다.
반대로 악귀는 미치기 일보 직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이성을 잃은 녀석.
점점 시뻘게지는 놈의 안구.
거기에 시끄럽게 울어대던 흉악한 입까지.
녀석이 얼마나 분하고 짜증 났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음?”
그런 녀석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방금까지 쭈글쭈글하던 녀석의 얼굴엔 물음표가 한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너 뭐야. 갑자기 왜. 도대체, 네놈은 뭔데. 아니, 무슨 저게.”
놈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계속 혼잣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그렇게 성을 내던 녀석이 한순간에 180도로 바뀌어버리니 이지존도 당황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던 그때.
“어?”
도끼를 잡은 손목을 스쳐보던 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이지존은 황당해하는 악귀를 향해 손에 쥔 도끼를 높이 올렸다.
그의 행동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악귀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의 팔을 살피려 한 행동이었으니까.
“뭐야. 이건 어디서 나온 거야.”
그의 시선은 팔에서 몸 그리고 다리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 모든 것을 확인한 이지존은 그제야 악귀가 중얼대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언제 바뀐 거지? 내 옷 어디 갔어.”
말 그대로였다.
그가 입고 있던 작업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대신 소박하고 단출한 차림의 흰색 삼배 상, 하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사극에서나 보던 옷인데. 그것도 양반집에서 일하던 하인들.”
이지존은 옷을 만져봤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무나 진짜 같았다.
아니, 진짜였다.
“아니, 이게 왜 진짠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렸다.
“푸하하! 갑자기 웬 나무꾼이야!”
그 주인공은 연이어 두 마리의 악귀를 처리하고 남은 한 마리와 대치 중인 김유리였다.
“이게 나무꾼이라고?”
“그래, 이마에 두른 끈까지. 너무 완벽히 재현했는데? 너무 잘 어울려.”
“뭐? 이마에도 있다고?”
바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소름 돋을 정도로 그가 입은 거친 삼배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순간, 멈췄던 살기가 돌진했다.
번쩍!
악귀의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 낸 도끼날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나무꾼이든 뭐든. 날 무시한 네놈의 영혼이 내 입에서 잘게 잘게 갈리는 건 변함없다!”
악귀의 통나무 같은 팔에서 두꺼운 핏대가 솟아오르자, 엄청난 힘이 뿜어지며 이지존을 내리깔기 시작했다.
이지존도 힘을 주며 버텼지만.
“윽!”
그의 인간미 넘치는 팔뚝으로는 압축기로 눌러버리는 듯한 힘을 견딜 순 없었다.
그의 몸이 점차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 인간 주제 나와 힘으로 맞서려 하다니. 으하하하!”
악귀의 웃음에서 승리가 가득히 떠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뭐, 뭐야. 어, 어째서….”
녀석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내가 왜….”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머랭쿠키 눌리듯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던 이지존.
그런데 지금은 녀석의 도끼날이 제자리에 멈춰 선 것도 모자라.
“왜 힘에서 밀리는 건데!”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악귀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
거기다가 어느 순간 오로라처럼 빛을 내는 이지존의 옷이 마치 그를 더욱 놀리는 것 같았다.
“절대 안 진다!”
녀석은 이를 악물고 팔과 손에 최대한 힘을 밀어 넣었다.
솟아오르는 핏대만큼 놈의 입에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이지존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악귀가 힘을 줄수록 더 강한 힘으로 녀석의 도끼날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뭐, 이 멍청한 놈아.”
악을 쓰며 저항하는 악귀.
그런 녀석을 송곳처럼 날이 선 표정으로 보던 이지존의 옷에서 뿜어지는 은은한 빛이.
번쩍!
강렬한 노란 빛을 뿜음과 동시에.
놈의 핏대가 잔뜩 오른 두 팔뚝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힘껏 밀려났다.
명계의 어둠에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나자빠져 졌을 것이다.
하지만 명계의 어둠 속에서 악귀는 강했다.
“이 녀석이!”
녀석은 순간적으로 힘을 온몸으로 뻗으며 무너진 균형이 바로잡혔다.
이어 밀려난 도끼날을 수직으로 세우곤.
“날 우습게 알고 있어!”
그대로 빛을 향해 내리찍었다.
퍼억!
라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번에도 없었다.
대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쩍!
악귀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의 몸이 갈라졌다.
솜씨 좋은 도끼질에 수직 이등분된 장작처럼 말이다.
이후 모두의 예상대로.
휘이잉.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짝, 짝, 짝.
경쾌한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남은 악귀를 꽁꽁 싸맨 김유리가 놀라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인데?”
“그래?”
“상당히 잘했어. 그 도끼를 드는 순간 그렇게 바뀐 거지?”
“뭐, 그런 것 같아.”
“흠, 흥미로운 현상이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김유리는 고개를 돌려 포박당한 채 분노의 콧김을 뿜어대는 악귀를 노려봤다.
“너, 선녀에게 훔친 날개옷이 어딨는지 알아?”
“날개옷? 하! 우리가 변태냐? 선녀 옷을 훔쳐서 뭐 하겠다고!”
여전히 씩씩대는 악귀를 무시하며 김유리는 이지존에게 말했다.
“지금껏 만난 녀석들 전부 이 모양이었어. 내가 왜 고생하는지 알겠지?”
이지존의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악귀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둘을 모욕하고 있었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맞아. 이놈들은 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 그녀의 부채.
그 궤적을 따라 악귀의 목이.
댕강.
썰리며 녀석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악귀를 전부 처리하자.
주변을 장악한 기분 나쁜 명계의 어둠이 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와 동시에 둘은.
“어? 여긴?”
골목에 들어오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고.
하늘엔 보름달이 밝게 떠 있었다.
늦봄의 향취가 묻어나는 새벽 공기도 확실히 느껴졌다.
“다행히 원래대로 돌아왔네.”
“이렇게 되면 도시 전설이 사실인 걸까?”
“명계의 기운에 잠식당한 도시라면….”
김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 도시 전설을 조사하는 것도 악귀의 소굴을 찾는 하나의 방법일 지도 모르겠네. 혹시 아는 거 있어?”
그녀의 질문에 이지존은 턱을 매만지며 어릴 적 괴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유리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너 도끼 어디 갔어?”
“도끼? 여기에 있, 어?”
이지존은 텅 빈 두 손을 보며 당황해했다.
“뭐야! 어디 갔어?”
10화.
보이지 않는 도끼를 고심이 추적해 보던 김유리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손에서 도끼가 사라지는 도시 전설인가?”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반박하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둘러보며 도끼를 찾는 이지존.
그런 그에게 김유리가 주제를 돌려 물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천의가 나무꾼 옷으로 나타나다니. 그게 네 능력인 건가?”
“나무꾼으로 변하는 게 내 능력이라고?”
뭔가 놀리는 것 같은 느낌에 이지존은 찾는 것을 멈췄다.
그의 매서운 눈길을 흘리며 그녀는 뒤로 돌아 주차된 차로 이동했다.
“언제는 천인 뭐라더니.”
“왜, 나무꾼이 어때서.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덕분에 목숨도 건졌잖아.”
이지존은 차에 타는 김유리를 째려봤다.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지존은 원래대로 돌아온 옷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인, 천의, 단군의 직계 후손 등등.
평범을 넘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를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김유리는 달리 평가했다.
그래서일까?
이지존은 평생 받지 못했던 상대의 기대감을 만족시킬 뭔가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나무꾼.
지금으로 따지면 그가 입은 옷과 다를 바 없는 일반 노동자.
분명 특별한 힘을 발휘해 악귀를 처리한 건 맞지만, 그는 이 힘처럼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 좀 이색적인 걸로 변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서 그렇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이지존의 말투.
그런 그를 바라보던 김유리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옷은 네 마음을 드러낼 뿐, 옷이 널 정의하진 않아.”
그렇게 말하며 안전 벨트를 맨 김유리는 조수석에 앉는 이지존을 보며 씩 웃으며 외쳤다.
“선녀와 나무꾼. 출동!”
“너! 사실 알고 있었지!”
“알았으면 천의가 사라졌을 때 놀랐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아랫사람 대하듯 한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어.”
이지존은 안전 벨트를 매며 김유리를 노려봤다.
“있긴 뭐가 있어. 음모론자도 아니고. 하여간 요즘 것들은 왜 이리 의심이 많은지.”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며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핸들을 잡았다.
이어 시동을 걸며 그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너 어디서 살아?”
“태워주는 건 고마운데 여기서 멀어. 그냥 DDP 근처에서 내려줘. 근처 찜질방에서 자면 되니까.”
“궁금해서 그래. 어디서 살아.”
이동을 시작한 창문 너머의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이지존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가문의 비밀이야. 그러니까 그냥 DDP 근처에서 내려줘.”
“남자가 비밀도 많다.”
“너보단 적을 걸?
그렇게 둘은 다시 DDP로 도착했다.
그런데 이지존의 부탁과는 달리 김유리는 DDP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왜 들어오는 거야? 또 할 일이 남았어?”
“할 일이 끝났으니 들어왔지.”
“그게 무슨 소리야?”
김유리는 지하 주차장 구석에 서낭당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문으로 차를 몰며 답했다.
“이제 여기서 살라는 말이야.”
“여기서? 내가?”
“어, 그래야 내가 부를 때 언제든 달려올 거 아냐.”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완전 뽕을 뽑아 먹을 작정이구나.”
“내 전속 모델이 되었으니 당연하지.”
“무섭다. 무서워.”
서낭당에 도착한 김유리는 산뜻한 미소를 드러내며 이지존을 끌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아무리 봐도 여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닌데.”
“여긴 비밀기지니까 당연하지. 내가 지낼 곳은 지하가 아니라 위야. 따라오면서 길을 잘 익혀둬.”
그렇게 김유리를 쫓아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승강기.
그 승강기를 타고 오른 곳은 5성급 호텔처럼 꾸며진, 거기다가 외부 전망까지 훤히 보이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숙소였다.
“DDP에 이런 숙박 시설이 있었어?”
놀란 이지존은 동대문 전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후, DDP는 지하의 서낭당을 감추기 위한 역할만 하는 게 아니야. 이곳 전체는 내 비밀기지나 마찬가지라고. 물론 이 비밀을 아는 자는 나밖에 없지.”
“그럴 리가. 도면이나 공사는 결국 외부인이 했을 텐데.”
“당연히 다 방법이 있지.”
라고 말하며 김유리가 입은 옷을 툭툭 건드리며 가리켰다.
앞서 전투를 보지 않았다면 뭘 말하는 건지 몰랐겠지만, 구름을 부리며 싸우던 그녀의 모습을 본 이상 더는 의문이 필요 없었다.
“선녀는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필요한 게 생기면 사슴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사슴?”
“내 매니저야. 지금까지 열섬히 우릴 도와준 AI지. 그리고 이제부터 널 관리해 줄 거고. 인사해.”
김유리의 말이 끝나자 지금껏 서낭당에서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가 방 전체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지존 님. 저는 사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나도 잘 부탁해.”
얼떨결에 AI와 인사한 이지존.
‘이래서 김유리 매니저를 아무도 몰랐구나.’
깨달음을 얻은 와중, 김유리가 그를 불렀다.
“너 SNS 해?”
“그런 걸 할 시간이 있었겠어?”
“오히려 잘 됐어. 핸드폰은?”
“그건 있지.”
이지존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보여주자, 김유리가 휙 하고 낚아챘다.
“어? 왜!”
“이런 낡은 폰엔 최신 해킹 프로그램도 안 돌아가겠다. 검사할 필요도 없겠어.”
“놀리는거야?”
“놀리는거지.”
라고 말하더니 책상에서 새로운 폰을 꺼냈다.
“이제 이걸로 써.”
김유리가 꺼내든 폰은 시중에선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거기에 한국의 창살 문양 가운데에 음양오행의 상징을 표현한 아름다운 자개가 박혀있어 고풍스러움을 더 했다.
“와! 이런 폰은 처음 봐. 고마워.”
이지존은 넋을 잃고 새 폰을 쳐다봤다.
그녀는 웃으며 사슴에게 명령했다.
“사슴, 이지존의 SNS 모델 계정 만들어줘. 너무 근사하게 말고 적당한 아마추어 모델 사진으로 만들어서 9장만 올려. 마지막 사진은 당연히 나와 함께한 패션쇼로.”
<네, 알겠습니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커다란 TV 화면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명령대로 그럴싸한 사진 9장이 완성, 마지막 사진을 제외하면 전부 사슴이 만든 사진이었다.
“와우, 진짜 같은데?”
김유리는 이지존에게 폰을 쥐여주며 당부했다.
“네 사생활 절대 올리지 마. 뭐, 올리는 즉시 사슴이 삭제하겠지만.”
“그런데 SNS가 필요해?”
그의 질문에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 요즘 세상 사람 맞니?”
“나 19살이거든?”
“후, 너 이제 모델이야. 지금이라도 사슴하고 공부 좀 해.”
그런 그를 뒤로하고 김유리는 벌써 둘이 타고 온 승강기에 올라가 있었다.
“일단 수고했으니 푹 쉬고, 조금 있다가 8시에 밑에서 봐.”
“8시? 지금 4가 다 돼가는데?”
답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는 김유리.
그녀는 곧 닫히는 승강기 문과 함께 그곳에서 사라졌다.
“너무하네, 잠은 재워야 할 거 아냐.”
지금 그는 침대에 눕기만 하면 바로 꿈나라에 빠질 수 있는 상태였다.
“한순간에 삶이 이렇게 바뀌다니. 믿어지지 않아.”
이지존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비현실적은 곡선의 유리 너머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달콤한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
띠링~
이지존은 수상한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띠링~ 띠링~
또 한 번 울린 소리.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맑은 종소리 같았지만, 여기에 종이 없다는 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띠링~ 띠링~
도무지 알 수 없는 음이 연달아 들리자.
꿈인가 해서 볼을 살짝 꼬집어봤다.
고통이 느껴진 순간.
그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악귀?’
그의 미간이 잔뜩 구겨진 그때.
띠링~ 띠링~ 띠링~
이번엔 세 번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이지존은 눈을 번쩍 뜨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외쳤다.
“누구냐!”
<이지존 님. SNS에 기업에서 보낸 DM이 도착했습니다.>
이지존은 5초간 멍하니 있다가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사슴, 잠깐. DM?”
<네, 총 7개의 기업에서 DM이 왔습니다.>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이지존은 멍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와 똑같은 풍경과 공간.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의심이 갔다.
“말이 안 되는데.”
이지존은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SNS는 없었지만, 기업에서 DM이 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가 익힌 노가다 판의 간접 경험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이쪽도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는데.”
거기다가 만든 지 하루도 안 되지 않았나.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해킹당한 거 아닐까?”
<아닙니다. 메시지 전부 안전합니다.>
“아니, 내 계정.”
<이지존 님의 계정은 제가 관리하기에 더욱 안전합니다.>
이지존의 마음이 떨려왔다.
악귀를 만나고서도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실화란 말이지.”
인기 스타, 팝퓰러, 인플루언서 등등.
당시 시대에 맞게 인기 있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만 일어날 법한 일.
지금 그 일이 이지존에게 생겼으니,
‘모델이 되자마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엄마가 말한 큰일은 도대체 뭘까?’
그의 몸은 빠르게 변화가 찾아왔다.
<심박도와 함께 몸의 온도가 상승 중. 이지존 님.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후우,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는 몇 번의 심호흡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오른 흥분이 쉽게 떨어질 리 없었다.
다행히 이어진 사슴의 정보에 이지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보다 이지존 님. 지금 7시 55분입니다.>
“뭐!”
이지존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엄청난 속도로 세수와 양치를 시작.
그러다 거울에 비친 옷에서 살짝 브레이크를 밟게 됐다.
“그래, 나무꾼보단 이게 낫다.”
그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다듬고 새로 받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사슴, 조금 빨리 내려갈 수 있을까?”
<가능합니다.>
슈우웅.
진공을 가르며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띵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 몇시간 전에 왔던 길을 빠르게 질주.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서낭당에 도착했다.
“1초 지각!”
김유리는 화들짝 들어온 이지존을 향해 외쳤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미안, 아침부터 황당한 일이 있어서.”
“황당한 일?”
김유리의 의문에 맞춰 사슴이 답했다.
<황당한 일은 아닙니다. 이지존 님 SNS에 협업을 원하는 기업의 DM이 도착했을 뿐이니까요.>
“DM이? 몇 개?”
<7개입니다.>
“와우, 이른 아침부터 이 정도면 점심 이후엔 20개 가 넘어가겠네.”
라고 말하며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음? 달라고?”
“넌 영원히 내 브랜드 모델이야. 다른 회사와 계약은 있을 수 없잖아? 거절 메시지와 삭제는 내가 하겠어.”
“그야 그렇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나도 궁금하다고.”
김유리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인 이지존의 마음을 모를 정도로 냉혹한 선녀는 아니었다.
“흠, 뭐. 좋아. 대신 여기서 같이 보자.”
이지존은 웃으며 핸드폰 빼 SNS를 켰다.
정말 DM이라는 것이 도착해 있었다.
어머니를 제외하면 이런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없었던 그였기에 벌써부터 심장 박동 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말 7개네.”
“그럼, 누른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7이란 숫자가 달린 알림 아이콘을 클릭했다.